라오디게아 교회

 

1981. 9. 18. 금야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4절 - 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멘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창조의 근본되신이인" 이  예수님을 그들이 힘입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덕을 입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택을 입지를 못했습니다. 아멘이신 주님의 은혜도 입지 못했고  충성이신 주님의 은혜도 입지 못했고 참된 증인이신 주님의 은혜도 입지 못했고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의 은혜도 입지를 못했습니다. 이 네 가지 은혜는 참  은혜인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입지를 못했습니다.

또 불로 연단한 금으로 부요해지는 이 부요도 입지 못했고 또 흰옷을 입어 영원히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이 은혜도 입지 못했고 또 눈이 밝은 은혜도 입지를  못했습니다. 승리한자는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심같이  승리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우편에 영원히 앉게 되는 이 영광의 지위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온 교회가 한 덩어리는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온교회가 이렇게 두쪽으로 다른 교회들은 다 되어 있는데 옳은 교회 삐뚤어진 교회  참 하나님의 백성 사탄의 백성 이렇게 모두 교회들이 두쪽으로 되어 있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두쪽이 되지 아니하고 한 덩어리가 되니까  자기네들 딴에는 보라 다른 교회들은 다 이렇게 분쟁이 있고 갈라지고  야단이지마는 우리는 분쟁도 없고 갈라지지 아니하고 똘똘 뭉쳐서 한 덩어리 되어  있으니 참 좋다 그렇게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죽은 교회입니다.

또 라오디게가 교회는 자기네들이 인정하기를 모든 것이 부요하고 구비해서  조그만치도 부족함이 없는 저희들로 이렇게 인정했는데 실은 주님이 보실때에는 참  곤고한자요 가련한자요 가난한자요 벌거벗은자요. 눈먼 자이였는데 저거가  보기에는 그렇게 모든 것이 구비한줄로 알아서 일생 구원준비할 시기를 완전히  속아 실패하고 마는 그런 라오디게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일곱교회는 신약 교회 전체를 말씀한 것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맨 마지막  교회입니다. 순위가 맞지 않는데도 있지마는 예수님의 재림때까지의 교회가 신약  교회인데 신약 교회로서 말세지말 말을 당한 교회중에 완전히 죽어있는 그런  교회가 많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렇게 좋은 것은 하나도 가지지 못하고 쓰지 못할 것만  많이 가지게 된 이 원인이 어데 있는가? 그 원인은 미직지근한 그것이  원인이였습니다. 차면 차고 더우면 덥고 이러하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직지근하다 차다고 하는데 실은 보면 차지 아니하고 덥다하는데 실은 "덥지  아니하고 미직지근해서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  말은 주님안에 살지 못하고 주님안에서 쫒기 나간다 말입니다. 주님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노아 홍수때에 방주밖에는 멸망 뿐이지 구원이 없었던 거와 같이 오늘은  주님 안에만 생명과 평강과 영광이 있지 주님 밖에는 전체가 사망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미직지근한 이것 하나 때문에 생명에서 쫒겨나서 완전히  사망속에 파묻혔고 불쌍하고 가련한 교회가 됐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교회가 된  그것이 불쌍하고 가련한 줄 알면 희망이나 있지마는 도리어 부요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그렇게 만족했기 때문에 고쳐질 희망은 전혀 없는 교회가 되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찾아 오시가지고 "네가 지금이라도 열심을  내고 회개를 하면 주님이 승리하신 그런 승리도 네가 할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심을 내어 회개할 것은 어떤것인고 하니 열심내고 회개할 것은  첫째로 주님이 원하신 것이 차든지 덥기를 원한다. 미직지근한 그것을 회개를  하라고 첫째 말씀했습니다. 이것만 회개하면 그다음것은 차차 되갑니다.

죽은 교회가 미직지근한 이것만 회개하면 살아나고 죽은 믿음의 가정이 미직지근한  이것만 회개하면 그 가정이 살아나고 죽은 개인 신앙이 미직지근한 이것만  회개하면 살아납니다. 미직지근하다 말은 아무런 구별이 없이 흐리멍텅한 것  구별없이 흐리멍텅한 것 비판이 없는 것 평가가 없는 것 이것이 미직지근한  것입니다. 구별이 없는 것 그러면 성도가 구별없으면 망하고 구별없으면  명망속에서 빠졌는데 저는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으로 그렇게 인정하게 됩니다.

믿는 사람들이 구별을 하면 구별 안하던 이것을 회개하고 구별만 하면 믿는 사람은  어떤 멸망속에 빠졌든지 희망이 없는 비참한 속에 빠졌든지 구별만 하면 솟아날  수가 있습니다.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다시 성공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성공하신 거와 같은 그런 성공을 할 수 있다고 여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도 믿는 사람가운데에 이 구별이 없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멸망  가운데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 그것이 예수님을 잘믿는 것으로 알고 행복된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구별하는 이 일을 버리면  눈도 어두어지고 귀도 어두어지고 모든 견해도 어두어지고 소원도 어두어지고  전부가 어두어져서 삐뚤어져가지고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어짜든지 예배당에 와 가지고도 춤추러가는 것처럼 기분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오면 기분좋은 것이 예배당인줄 압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편지 한 장 왔는데 엿세동안 자기 일에 골몰하다가 주일날 가면 그래도 그  복잡한 속에서 시원한 말씀을 듣고 마음에 모든 피곤이 다 풀리고 시원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그 심령이 편히 쉬기 위해서 예배당에 왔는데 예배당에서  책망만하고 그러니 그 교역자는 교인들에게 참 못할일 하는 아주 쓰지 못할  교역자라고 그렇게 편지가 왔습디다. 병들지 안한 사람을 병들었다고 말을 해서 그  사람 기분을 상하면 그는 죄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는데 그 병을 치료하지 안하면은 그 병으로 멸망받을 그 환자에게  네가 병들었은 지금 치료만 받으면 건강자 될 수 있으니 네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치료를 받아라 하는 그 사실이라면 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을 불안케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을 불안에서 구출하는 그 사람일  것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제 비위에 맞은 세상 도덕 설교나 감정 설교나 기분 맞춘  설교나 억만 죄악을 먹고 마시고 짊어지고 있어도 하늘나라는 내 나라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 이렇게 말하면 듣기 좋아하는 그거는  멸망에서 멸망을 더 가속해가는 것입니다.

미가서에 보면 말세에 교회들이 멸망의 길을 가면서 제사장도 멸망의 길, 선지자도  멸망의 길, 모두 멸망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화나 재앙이 미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라 잘 믿습니다. 하나님을 의심없이  자기네들을 구원하고 보호하는 이 하나님으로 확신을 가집니다.

그 밑에 보면 이렇기 때문에 "너희들은 전멸을 당한다" 이랬습니다. 시온은  밭갈림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수풀 언덕이되고 돌무더기가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도리를 가르쳐주셨는데, 이 구원 받을 도리는 다  집어던지버리고 구원만 소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주시겠습니까? 그저 예수 믿는  이치는 말하면 아야 귀가 어두어 안들립니다. 돈벌이하는 그런것이나 죄짓는 말이  이 세상과 세상에 관한말 이것을 말하면 귀에 속속 들어오지마는 예수 믿는 이치를  말하면 한마디도 귀에 안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오면 그만 좁니다. 조금 정신 차려 들으면 이 말씀이 저와 제  행동과는 정 반대니까 이 말씀이 저와 제 행동과는 정반대니까 언제나 칭찬이나  좋아하고 절 높히주면 좋아하고 제 기분 맞춰주면 좋아하는 완전히 멸망의 사람이  제속에 주인공이 되어있는 이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 이것 틀렸다 저거  틀렸다 이러해라. 틀렸다하는 것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틀렸다고 하고 하라고  하는 것은 가장 싫은 것을 하라고 하니까 제가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 나가고 싶소. 잠이오요. 그래 가지고 멸망을 받습니다.

데모데서에 보면 말씀하시기를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귀를 즐겁게하는 말을 듣고  진리는 버린다 또 제마음대로 제 욕심대로 살아도 괜찮은 그런 교훈만 좋아한다.

제 욕심을 죽이고 자기를 꺽어 복종시키는 일은 하라면 싫어한다.

내가 어제 어떤 교역자를 만나가지고 한 시간 가량 이야기하면서 먼저 자기부터  복종시키는 연습을 해라. 자기부터 이겨놔라. 자기를 마음대로 잡아 부릴 수 있는  아무리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이라도 이 일이 옳으니까 하라 하면은 안할라 할때에  마음이 안할라하든지, 몸이 안할라 하든지, 기분이 안할라 하든지, 감정이 안할라  해도 잡아 꺽어서 옳은 일이면 시킬 수 있는 너부터 잡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되지.

네가 너를 잡아 부리지를 못하고 너하고 싶은대로 벌망성이 모양으로 저가고  싶은대로 이렇게 내두면 멸망받는다. 자기부터 꺾어 복종시키고 나면 그 다음에  자기 몸밖에 있는 자기 세상을 꺾어서 복종시킬 수가 있고 이러면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에게 복종할 수가 있다. 자기를 꺾기 전에 하나님 말씀에게 어찌  복종하며 세상을 꺽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게 복종할 수가 있습니까?  안됩니다.

이런데 참 이 말씀이 어려운데 있는 마음을 다 기울려서 들어도 너무 육덩이로  살기 때문에 영의 말씀이 들리지 아니하고 땅의 것만 보고 살기 때문에 하늘의  구원은 말하면 들리지 아니하는데 거기에다 졸으면 들으니 뭐 들려집니까? 참  불쌍하고 가련하게 됩니다. 회개하면 예수님과 같은 승리를 하게 되고 회개 안하면  참 비참하고 가련한 신자 됩니다. 뭘 회개해 흐리멍텅한 것 이거 회개해야 됩니다.

미직지근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이 말씀을 지난 밤에도 증거 했는데 아멘은 자기를 기루는 것이라고 해석도  많이하고 말했지마는 아멘이 어떻게 자기를 기루는 것인가 하고서 문제를 내놓고  시험치면 여기에 지금 아래층 삼층 이층 앉은 사람이 아마 천 몇백명 될긴데 그  답을 바로 쓰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도 없을지도 모르요. 예,  그렇게 여러분들의 귀가 진리에서 멉니다. "말세가 되면은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자기 사욕을 쫒을 그런 스승의 말만 잘 들려진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미직지근하니 내 입에서 토해 내치겠다" 미직지근하니 예수님에게 버림당한다.

예수님에게 버림당하면 있지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는 자가 어떻게 그 말씀을 행해가지고 구원을  얻겠습니까? 들어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그 말씀을 제가 알아가지고 구원을  이루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대로 행하면 행한 것만치 구원이  됩니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행할 수 있으며 행하지 안했는데 구원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알려고 한 마디 한 마디 가르치고 시험치고, 가르치고 시험쳐서  여러분들 정도에는 이 말씀을 라오디게아 교회 이것만 해도 한 달 가르쳐야  여러분들이 알까 말까한 그만큼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무슨 구원을 이루겠소. 이루기를 그저 불교에도 있고 유교에도 있고 다른  이종교에도 다 있는 인간끼리 서로 뭐 사랑하고 겸손하고 화평하고 이해하고  양해하고 그까짓소리 암만해도 소용없습니다. 네 암만 해봤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것이라 이게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그거는 껍데기 밖에 온 입은거와 같은  것이요. 살은 안됩니다.

흐리멍텅하다는 것은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따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비판해보지 않는다는 것 이게 이러나 저러나, 옳으냐 그르냐 이게 없어. 이게 없는  통에 다 죽어. 제일 인간중에 제일 못쓸 인간 제일 천한 인간 제일 못쓰고 제일  천한 인간 제일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 그 인간은 어떤 인간이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인가? 아무런 구별없이 비판없이 환경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사는 그자가  제일 불쌍한 자입니다.

자기 속에 아무 것도 없고 저 사람들이 저거 사니까 나도 저거 사야 되겠다. 저  사람들이 저거 좋다하니까 나도 저거 좋다해야 되겠다. 저 사람들이 저거 필요하다  하니까 나도 저거 필요하니 저거 갖춰야 되겠다. 모든 사람들이 동으로 가니 나도  동으로 가야 되겠다. 모든 사람이 사로 가니 나도 서로가야 되겠다.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누군가? 그 사람이 참 생명도 없고 죽은 것도 썩은 것도 그 속에  없는 불쌍한 자입니다. 고 사람보담은 조금 낫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욕심을 가지고 비판을 하기는 하고 구별하기는 하는데 무엇이 왕이 돼 가지고  구별하는가? 욕심이 왕이 돼 가지고 그 욕심이 구별합니다. 사람을 만나도 제  욕심이 하나 있으면 그 욕심하나 돈 욕심을 가졌든지 저 취직 욕심을 가졌든지  권세 욕심을 가졌든지 가정 욕심을 가졌든지 어쨎든지 무슨 욕심을 가졌든지  욕심하나 가지고 요 욕심대로 모든걸 비판합니다. 사람도 만나서 요 욕심에  유익하도록 또 요 욕심에 해로울 것은 안하고 그러면 욕심 요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욕심이 주장하는 그 비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로 되,  비판없는 사람보담은 낫습니다.

환경에 피동되어 사는 사람은 환경이라는 그 감옥속에 들어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환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환경이 가는대로 가고 환경에  끌리가지고 환경속에 파묻혀서 환경을 헤어나지 못합니다. 환경에 망할 때 저는  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감옥속에는 감옥 중에는 제일 손 감옥입니다. 제일 고통이  많고 불쌍하고 가련한 깊은 감옥이요. 그 감옥보다는 자기 욕심으로 비판하는 그  욕심속에 갖힌 사람 욕심 감옥 욕심 감옥에 든 사람이 좀 낫습니다. 욕심이라도  있으니까? 욕심도 없어. 환경에 따라서 거기에 피동되어서 사는 사람은 제게는  아무 것도 없는자요. 환경에 소산으로 사는 자요. 그 보다 낫은자는 그래도  욕심이라도 가지고 그 욕심가지고 욕심을 표준해서 욕심본위로 욕심 중심으로 모든  것을 비판도 하고 평가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구별도 합니다.

그것도 다 욕심 감옥에 들어 죽는 것이요. 고보다 낫은자는 자기 주관을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합니다. 자기에게 닥힌 일이나 사람이나 물건이나 그 모든 것을  자기 주관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비판해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주관이라 말은  자기 생각 자기 이치 자지 지식 자율 그것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 주관속에 파묻힌 사람이라 주관의 감옥 주관 감옥속에 든 사람입니다.

고요히 생각합시다.

무슨 일이든지 닥치면 사람들이 보면 어떤자는 무엇이든지 닥치면 돈이라 여기에는  어떻게 하면 돈에 유익하고 어떻게 하면 돈에 손해 보느냐? 돈에 손해 안가면 그  믿음이야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어.

어떤 자는 무슨 일이 닥치면 자기 주관가지고 비판합니다. 제 생각가지고 만물보다  거짓된 제 생각가지고 초지장만 가리워져도 초지장 넘어 뭐있는지 모르는 그런  어리석은 무지 가지고 이렇게 깜깜한 자율, 자기 주관 만물보다 거짓된 이  삐뚤어진 자율, 자기 생각, 자기 주관 이것 가지고 모든 것을 옳으냐 그르냐?  비판하니까? 그 비판이 어떻게 비참하지 않습니까? 비참하겠습니까? 그자는 평상  자기 주관 속에 갖혀 가지고 자기 주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주관대로  생각하고, 주관대로 소원하고, 주관대로 비판하고, 주관대로 경영하다가 주관대로  살다가 주관이 망할때에 같이 망해버리고 맙니다.

예수 믿는 구원이 그 주관에 속한 주관대로 되는 구원이 털끝만치 있습니까?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가만히 보면 욕심이 비판하여 사는자 자기  주관이 비판해 가지고 주관대로 주관을 따라사는 사람 주관이 자기 왕이요,  주관대로 모든 것을 비판하고 구별해 가지고 그대로 사는자 어떤자는 그것도 없이  창기 모야으로 여가면 이 사람되고 저가면 저 사람되고 아무 기둥뿌리가 없이  저거집에서 한달만에 온다 했지마는 고만 거가면 그 사람돼 버리고 저가면 저 사람  돼 버리고, 물어볼까? 그런 불쌍한 사람 그것보다 낫은 것은 이성 비판에  사람입니다.

이성을 가지고 구별하는 것 이성은 이치를 따지는 성품이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고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이치를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해서 옳다 그르다  해야 되겠다 안해야 되겠다. 이렇게 비판해 가지고 이성 비판으로 사는 사람  있습니다. 고 사람은 이성이라는 감옥소에 갖혀 있습니다.

이성이라는 감옥속에 갖힌 사람이 기독자로서 백의 구십구입니다. 이걸 뭐이지  들어야 모를 것이요. 이성은 자기 이성입니다. 자기 이성이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이성을 가지고 성경에 이랬으니까? 이것은 해야 되겠다. 이러니까 안해야  되겠다. 이성 비판가지고 아무리 성경대로 비판해서 살았다 할지라도 그거는 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요. 모래위에 지은 집입니다. 그 타는 자기요.

기초가 자기요. 예수 믿기가 얼마나 어려운줄 압니까? 이성에 감옥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성에 감옥을 벗어나야 돼요. 이성의 감옥을 벗어나면 다시 말하 '이성  감옥을 벗어나라' 말은 자기 감옥을 벗어나야 됩니다. 자기를 벗어나야 됩니다.

자기 속에 들어 있으면 자기속에 죽습니다. 자기 망할때 같이 망합니다.

오늘 말세에 이 교회들이 왜? 이렇게 번쩍 번쩍하게 이 세상보다 번적거리게 아주  양새끼 모양으로 번들번들하게 이렇게 허우대 좋게 고난없이 마찰없이 이렇게  번들번들하게 사는가 이것은 다 이성속에서 죽었습니다. 자기를 표준한 자기를  주인공으로 모신 자기 이성가지고 세상이치 그대로 따져 살다가 예수 믿는 신구약  성경 이치가 좋으니까? 신구약 성경 이치대로 살자 해 가지고 신구약 성경  이치대로 자기를 위하여 사는 고급 자기주의자 이성주의자 거기에서 일생을 예수  잘믿는 줄 알았는데 가 보니까 다 불타버립니다. 잘믿는줄 알았는데 홍수가 나니까  다 떠내려 가 버리고 맙니다. 환란이 오니까 다 떠내려 갑니다.

오늘이라도 모릅니다. 남한에 있는 교회들이 이제 김일성이를 만나지 안하고  깨끗해지면은 그까짖거 못오게 날려보내 버릴 것이고 남한에 있는 교회가  김일성이가 오지 안하면 회개안하고 그대로 하나님의 것가지고 배부르게 띵띵먹고  잘 먹고 잘 입고 이러다가 죽게되면 건설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을 알고나 죽어라 하기 위해서 보낼런지 모릅니다. 김일성이가 와  가지고 따지데면 아무리 하나님과 진리가 동으로 가라 할지라도 동으로 가는 것이  자기가 절단이 나고 서로 가는 것이 자기가 피난이 된다면 하나님과 진리 버리고  서로 갈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여기에도 얼마나 많은지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뭘  믿는다 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생각도 안해봤는데 그것이 이성 비판에 그 감옥에 벗어나지 못하고  이성 구별 그 감옥속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제가 이용하요. 하나님  말씀대로 뭐 할라고 사느냐? 저 위해서 삽니다. 저 좋을라고 하나님 말씀 지키요.

저 좋을라고 하나님 섬기요. 저 복받을라고 하나님 섬기요. 고것은 다 이성  감옥속에 들어서 망할자입니다. 주님이 나 위해서 다 살아 주셨으니까 남은때는  내야 어찌됐든지 당신 위해서 사는 것이 이것이 대속의 원인입니다. 진리입니다.

이 이성 감옥에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 자기가 주를 위하는 완전히  제물이 되지 안하고 믿는것도 자기 위해 믿는다. 자기의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무서운 말씀이고 어려운 말씀이고 힘드는 말씀이다. 정말로 내가 지금  오늘까지의 사는 생활이 주를 위한다고 말했지마는 주를 위하는 그 속에 알맹이는  뭐인가? 알맹이는 자기 위함이 아닌가? 이러기 때문에 주를 위하는 일이라도 자기에게 손해가 안갈때에는 위하는척  했지마는 자기가 주님과 서로 마주 탁쳐 가지고 자기에게 명예나 지위에나  권세에나 자기 무슨 가정이나 자기 위신이나 무엇에 조그만치라도 거리끼기만 하면  예수가 어데 있소. 진리가 어데 있소. 교역자가 어데있소. 지도자가 어데있소.

없어. 폭팔같이 티어나와. 속지 맙시다. 자기가 자기 이성을 가지고 신구약 성경을  비판해서 지킬것은 지키고 못지키는 거는 못지키고 살면서 구원이 된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다 지킬 수 있을때는 지켰지마는 고 계명도 고 계명 지키는 밤중이 될때에는 고  계명지킬라 하면은 자기가 깨어지고 주님은 서게되고 자기 세울라하며는 주님  버려야 되겠고 하는 고 밤중단계 되면은 착착 버립니다. 일생동안 계명지킨 고  계명도 마지막에 니냐 내냐? 너보다 내냐? 주님이 너보다 내냐? 나보다 네냐? 보자  둘이 둘중에 둘은 다하지 못하니까? 어느 것이냐 할 때에 주님보다 자기를  앞세워서 도망칩니다.

외정말년에 고것이 나타났고 그래서 신사참배 났을때에 신사참배 안한 목사가 몇  없었어. 교인이 몇 없었고 육이오 전령시에 인민군들 왔을때에 그이에게 머리  숙이지 안한 사람이 많지 못했어. 네냐 내냐 주님이 시험하니까 다 저붙들고 갔지  주님 붙들고 자기 부인하는 사람 없었어. 그것이 자기 이성 감옥속에 파묻혀가지고  믿는줄로 알고 믿는 그 불쌍하고 가련한 자입니다.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아, 자기 이성 비판에서 살면 안된다 하더라.

그러면 어데로 이 감옥을 벗어나서 가야 되겠느냐? 그 다음에 거기에서 벗어나서  양심 구별, 양심 비판으로 가야 됩니다. 적어도 양심 구별 비판에 가야 자기가  떨어졌습니다. 자기가 부인됩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를 사정두고 남을 기대고 양심은 사정에 붙들리고 형편에  붙들리고 처지에 붙들리고 입장에 붙들리고 죽음에 붙들리고 이유에 붙들리고  손해에 붙들리고 어데서 든지 붙들린 것은 양심이 아닙니다. 아무 데도 붙들리지  안하고 다만 거기에 하나님 말씀가지고 옳으냐 바르냐? 바로 냉정스럽게 고대로  공정되게만 붙들린데 없이 치우친데 없이 아무 것에게도 자극받는데 없이 자유롭게  냉정하게 정평 정가하는 고것이 양심입니다. 고것이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비판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비판하되 비판하다가 자기를 가지고 비판하니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비판합니다.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방어하는 그런 비판을 하게 됩니다.

원수가 있으면 원수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비판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후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은 다 양심이 아닙니다. 양심은 자유하는 것입니다. 아무 데도  붙들리지 안한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 비판이 양심 구별이 인간으로서는 최고  구별이지마는 그러면 그것이 완전자입니까 안됩니다.

또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양심 구별하고 내 양심에는 삐뚤어진 것 양심대로는  구별해 놨지마는 이 이상 나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롭지 의롭다 하지를 못한다.

모든 것을 아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아는대로 그분 비판을 내가 잡아야  될터인데 그분 비판을 내가 잡지를 못하고 힘껏 해봤자 내 양심 비판가지를  했으니까 그분 비판을 가지지 못했으니 이것이 낭파다 하여 열심을 내고 더  고쳐볼라고 애쓰는 자에게 영감 비판이 오는 것입니다. 양심 비판은 힘이  안나오요. 양심 비판은 옳다 해도 옳다는 것뿐입니다. 영감 비판이 올때에는  옳다는 것이 생명을 버리도 아깝지 안하고 옳다 확신이 옵니다. 강하게 옳다는  것이 능력적으로 자기에게 비판됩니다. 해야 된다는 것이 능력이 와 가지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안하고 전 능력이 능력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하니 시행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자기에게 와서 감동시킵니다.

양심 비판과 영감 비판은 누든지 자기가 받았다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무 데도 사정두지 안하고 거리끼지 안하고 아무 데도 메이지 안하고 자격받지  안하고 내대로는 옳게 바르게 비판하는 양심 비판이다. 이래도 나는 이 이상  알지못하는데 주님은 그 이상 무한히 영원히 완전히 아신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비판을 내가 받지 안하고는 마음에 안심되지 안한 것이 바울의 탄식이요.

요럴 때에 영감의 비판이 오면 내가 양심 비판하고 난 다음에 영감이 오면은  그것이 양심으로는 옳다고 했는데 틀린것도 있고 미비된것도 있고 옳다해서 나에게  강하게 느껴져서 이야말로 죽을만하고 이야말로 의심없이 염려없이 모든것 다  받혀서 안심하고 확신을 가지고 단행할 수가 있다 하는 그런 확신과 능력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감 비판이 올때에 신구약 성경에 하는 말씀은 다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말씀으로 믿어지고 인간들이 지걸거리는 말은 아무리 큰소리 해봤자 큰소리  하는 그 이면에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네, 큰소리하는 그것이 아무 책임없고  권위없고 큰소리한 그보니까 앞은 큰소리인데 뒤에는 영원한 사망과 멸망과 거짓이  붙어 있습니다. 믿을게 없어. 들을게 없고, 배울게 없고 가치가 없어. 어데서 뭘로  더불어 의논하며 무엇을 표준해서 안심하고 저 지도를 받으라 할것이 하나도 없어.

이리되면 아멘의 주님을 믿게 됩니다. 아멘의 주님은 아멘은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그것만이 소원이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이루기를  노력하고 이루어지니까 기쁘고 이것이 아멘입니다. 기도할때에 아멘하는 것은  기도한 고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나도 고대로 되기를 원하고 고대로 지금  힘쓰겠습니다 하는 고 뜻으로 아멘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이 내야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것 기쁨이 이루어지든지 수고스러움이 이루어지든지  죽음으로 이루어지든지 어때도 일편단심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고 싶고 자기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모든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달성되는 것 요것만이 소원되는 고것이 뭡니까?  뭐이라고 배웠습니까? 그것이 뭣하는기라 했어. 그것이 참 사람이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것은 참 사람이 먹고 자라는 양식입니다.

기독자의 참사람이라는 그 인격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씩 둘씩 이루는 그것으로만  자랍니다. 그것으로만 배부르요. 왜? 하나님의 뜻을 하나 이루면 그 이루는데에는  진리가 거기에 같이 동참했고 피조물이 동참했고 창조주가 동참했고 자기가  동참해서 그래서 거기에서 그 하나를 이룸으로서 그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과  진리와 모든 피조물과 자기와의 옳바른 관계가 서숙알만침이라도 이루어졌습니다.

고게 자기 큰 것입니다. 고게 큰 것이요.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나 먹을 양식이 여기 있으니 곧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과 온전히 이루는 것이 곧 나의 양식이니라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는다 네가 나를 네  안에 주로 모시면 내 마음에 주로 오셔서 내 마음을 내가 주관하게 하고 네 몸을  내가 주관하게 하고 내 생애를 내가 주관하게 하면 나는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영광된 모든 의로운 일을 다 성사하겠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는 나를  힘입어서 나의 도움을 입어서 네게 대한 사명을 다 이루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멘에서 자기를 기룬다 말을 했지마는 이것을 아는지 느끼는지 충성에서 자기의  실력을 이룬다. 충성 충성의 주님을 모시고 충성의 주님을 모시고 주와 함께  충성하면 자기의 실력이 자랍니다.

충성은 뭐이 충성인데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주를  사랑하는 일하는 것이지 이렇게 내가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주님을 섬기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을 내 모든 것 다해서 하나 내  힘이 모지래 얼마 안돼, 있는 것 다 했지마는 방해하는 세력이 내 힘에 백배도 더  크니까 됩니까? 안되지마는 내게 있는 것은 다 기울려서 주를 위해서 할때에 내  힘은 대적의 백분의 일도 안되지마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가지고 내 힘의 백배도  더되는 것을 정복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 뜻대로 하는 이 일을 취케 해버립니다.

그러면 그때에 내 힘에 백배의 힘을 하나님에게 얻어서 그일을 성취한 그 힘은  하나님이 가져가지 않습니다. 그 힘은 영원히 내힘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자기와의 연결되는 그걸로 자라는 것입니다. 어데서 자랍니까? 주를 위하는  행위에서 자라지 그 행위는 얼마나 자기하고 나머지 찌끄러기 가지고 행위하는데서  하나님이 그 연결줍니까? 있는것 다해서 "내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영생이니라" 이것이  충성입니다.

이 충성에서 만유주와 자기와 연결되어 그분의 능력이 내 능력되고, 그분의 지혜가  내 지혜되고, 그분의 사랑이 내 사랑되고, 그분의 모든 온전한 속성이 내속성되고,  그분의 역사가 나는 당신의 손과 같이 당신의 원하시는 것이 나를 통해서  피조물들에게 이루어지는 이 실력을 갖추는 이것이 양심 비판의 영감 비판에  나아가면 이 일 밖에는 할일이 없을터인데 일생동안 욕심 비판에서 비판없이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불쌍하고 가련한 자 이자는 동무하나 만나면 세기간만  만나면 그만 그자 되버려 어데가서 하루만 있으면 그자 되버려 여러분들 죽은자  되지 맙시다. 죽은자 이북에서도 공산주의 그 박해 밑에서도 아무리 탄합해도  그속에 신앙은 요동치 안하고 껍데기 예 예 흥 흥 해도 속에 신앙의 신조는 빛으로  나타내지는 못했지마는 속에는 변질되지 안해.

그러나 오늘 기독자라 하는 사람이 이것은 뭐 동에가면 동에 것 되고 서에가면  서의것 되고 이렇게 아무 속에 알맹이 없이 환경에 따라서 움직이는 불쌍하고  가련한자 그거는 인간중에 제일 천한 인간입니다. 제일 가치없는 인간이요.

이래 가지고 아무 비판없이 그 찍해야 한다면은 제 욕심을 표준해 가지고 전부  욕심을 기준해 가지고 모든걸 비판하니까 그것도 망할 것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  주관 그것을 비판의 잣대를 가지고 비판하니까 그것도 다 망할 것,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비판한다고 하지마는 자기가 주인공이 돼 가지고 자기 이성 가지고  비판하니까 그것도 망할 것, 이 언덕을 떡 떠나서 양심을 가지고 비판할때는 아무 거리낄 것도 내게 해로워도  옳은 건 옳다. 원수에게 유익해도 옳은 건 옳다. 사정없이 옳고 바른 것을  냉정스럽게 정평 정가해서 하는데 이 양심 비판을 통과해도 그것으로서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해서 바울이 탄식한 이 탄식을 가지고 영감 비판에 나아갈라고 애를  써 영감 비판 주시기를 고대하는 이 열심과 회개하는 이것이 오면 예수 믿는 것  등한히 하고 땅위에 할일이 하나도 없는데 자기하는 일을 영감으로 비판해보면  망할 일인걸 환하이 아는데 신앙 내놓고 할일이 어데 있소. 웃는데, 웃는데 그  웃음속에도 저주와 사망이 가득찼소.

제가 뭣 때문에 웃노 멸망받을 네 욕심 비판대로의 욕심이 성공되니 웃는구나 네,  주관이 성공 되니까 웃는구나. 네 주관 이성에 맞을때는 웃는 구나. 틀릴때는  싫어하는구나 틀릴때 거기에 생명있다. 양심 비판에 가는 사람은 그만해도  자기에게는 가책될 것뿐이고 두려울 것 뿐이고 탄식할 것 뿐이고 울것 뿐이고  저주뿐이고 고통뿐이지 좋은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 양심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 좋은 것 뭐입니까? 예수 밖에 좋은게 뭐입니까? 여기에서도 사람은 양심 비판만 되어져도 사람이 정신은 차립니다. 돈에 끌려가지  안하고 권세에 끌려가지 안하요. 이 고기덩어리와 목숨에 끌려가지 안하요.

고기덩어리의 목숨에 끌릴때는 양심이 아닙니다. 고기덩어리의 목숨도 떼놓고  나서야 양심입니다.

거기에서 부터 자기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안돼. 영감 구별 영감 비판 와서  영감이 나에게 확신을 주면서 이는 옳다. 이는 죽어도 맞다. 영원히 틀림없다 하는  확신의 깨달음을 가지고 이 일을 할때에 주님이 자기와 동행한다는 것이 확신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강한 것이 막아도 너는 너 할일 할 것, 나는 나 할일하고 네가  아무리 해봤자 내 생명밖에는 못할 것이고 생명보다 귀한 걸 잡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나간다 하는 이 평강을 가지고 나가지마는 거기에까지 가지 안하고 밑에  지금 아무 비판없는 자로 찍해야 살면 욕심 비판에서 주관 비판에서 김일성이는  욕심 비판과 주관 비판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이성  비판도 아니오. 우리 기독자들은 성경 이성 비판에서도 거기에서도 안심하면  안됩니다. 아닙니다. 아직까지 가야 됩니다. 양심 비판에 가야 됩니다. 양심  비판에서 내 마음에 자책할 것 없으나 그러나 이로 인해서 내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바른 비판이 못됐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의 영감 비판이  와야 되겠는데 하는 그것을 갈망한 것이 사도 바울이였습니다.

그러면 아멘에서 자기가 자랄 것을 자라는 것을 알 것이고 충성에게 자기 실력이  자라지는 것을 알 것이고 참된 증인 하나님의 것을 자꾸 인간에게 갖다 주는  그것으로서 영원히 하나님과 피조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으니 피조물 창조한  창조주 그분과 모든 피조물을 해결짓는 이것이 피조물을 자기가 소유하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이 외에는 없어. 이것이 없으니까 부자라 했는데 불쌍하고 가련한  자가 됐지 스스로 부요하여 그것은 하나님이 제게 줘야 제게 되지, 하나님이  내것이라고 인정을 했어야 되지 하나님은 그에게 대해서 네가 내것을 도적질했다  하고서 왜나 주인공 절대자 능력있는 분이 하나도 주지 안한 그것을 가지고  제것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제 자율대로 인정, 주관대로 인정, 인간  법칙대로 인정, 하나님의 법칙이 인정하지 안한 그것을 가지고 제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합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이 이거는 네 것이라 했어야  그거는 아무도 뺏어가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네가 참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 멀었다" 눈멀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간단하게만 합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해라" 금은 뭐인데 믿음 어떤 파란 곡절 환란이 와도 요동치 아니하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순종 요거가지고 부요해라.

아무리 네 생명을 끊을라해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으면 그 뜻을 양보하지 안하고  고대로 순종하는 사자구덩이 집어 넣을라 해도 기도하는게 하나님의 뜻인 것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사자구덩이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하나님의 뜻은 양보없이  고대로 실행하는 고것이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고것가지고 부요해라. 그거 가지고  뭘 부요해.

고라면 아무 어려움이 와도 타지 안하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고 순종 순종 고것으로  부요해라. 고거 뭐하는 것인데 고것이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요동치 않는 순종  고것이 누한테 순종인데 진리에게 순종이지 누한테 순종인데 하나님에게 순종이지  그러면 그 어려움에 그 어려움을 인해서 누구하고 하나 됐을까 진리하고 하나됐지  하나님하고 하나 됐지 인생아 너는 진리로 부요하고 하나님으로 부요한 그것만이  기독자의 부요지 그 외에 딴 것은 소용이 없어 네 진리로 부자가 됐어 진리를 많이  차지했어. 하나님만 차지했어. 진리를 많이 차지했으니까 자기는 진리의 것이되고  진리는 자기 것이 됐어. 진리하고 자기하고 한 덩어리된 부분이 많아 하나님과  자기와 한 덩어리 된 부분이 많아. 이것이 기독자의 부요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곡간을 헐고 요만은 수입 되니까 요만침만 수입주면 내가 예수 잘  믿겠습니다. 고만침 주니까 또 곡간을 헐고 또 이제 요만침만 더 많이 벌어놓고  요만침만 주시면 곡간을 헐고 더 짓는 자야 네가 고 탐심에 홀려서 이제는 준비 다  됐으니까 예수 잘 믿을란다 하니까 탐심 고놈이 고날까지 끌고 왔다가 이제는  이만하면 되니까 돈벌이 고만하고 권세벌이 고만하고 예수 잘 믿을란다. 고날 밤에  그사람 영혼 불렀소.

하나님으로 부요하지 못하고 세상 물질로 부요할라 하는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으면 너의 마련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정함이 없는  재물로 부요하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부요하라."  예,"하나님으로 부요하라" "불로 연단한 금으로 부요하게 하라".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라" "네가 주님이 사죄 칭의 화평의 이 생애를  너희에게 주셨으니 네가 이걸 사라" 뭣 주고사 자기 주고 사지요. 네 이것을  살려고 하면 사죄를 내주지 안하고 칭의를 내주지 안하고 하나님으로 화합된 것을  내주지 안할라고 하면은 뭘 내줘야 됩니까? 자기에게 있는 것 내줘야 되지, 자기  내줘야 돼.

자기 목숨도 내주고 명예도 내주고 지위도 내주고 재물도 내주고 소유도 내주고  자기에게 있는 것 안내줘도 될 것 같으면 안내주고 내주면 다 내줘야 된다면 다  내주도 사죄를 내주지 안하고 칭의를 내주지 안하고 주님으로 더불어 화합된  이것을 내주지 안해야 제가 되지 제게 있있는것 다가지고 이것 안내주고 될줄  압니까? 어리석어, 그것을 가리켜서 "사라 네게 있는것 내주고 사라" 그러나  성경에 말하기를 "값은 없어도 사라" 했어. 값은 안돼. 그 댓가는 안돼. 그것이  주의 구속을 빼앗기지 안하고 자기가 가질라고 하면은 자기를 내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화와 진주를 구하는 자가 만나니까 있는걸 다 팔아가지고  그것을 산거와 같다는 그 비유에 말씀입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 하나님이 문서 계시를 주셨으니까 이 문서 계시  이 지식가지고 모든걸 비판합니다. 이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지식을 삼소. 자기의  지혜를 삼소. 하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섭리하는걸 세계에 섭리하는 것 요새도  보니까 유대인드에게 대해서 어떻게 한다. 세계 지금 공산 민주주의가 어떻게  돌아간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인데, 그 모든걸 볼때에 세계가 어떻게 된다 하는  것이 환하이 보이진다 말이오. 환하이 보여져. 오늘이 어느 때라는 걸 환하이  보이져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 자기의 지혜를 삼고 영감으로 자기에게 알려주는  그것으로 최종 지혜를 삼아서 이러면 '네 눈이 환하이 밝다' 과거에 대해서도 네가  바로 볼 것이고, 현재에 대해서도 바로 볼 것이고, 미래 영원 무궁도 바로 볼  것이고, 너도 바로 볼것이고, 세상 뭐 귀하고 천한 것도 바로 볼 것이고, 네가  탐할 것도 바로 볼것이고, 버릴것도 바로 볼 것이요. 바로봐.

이러면 우리는 어데까지 타락했을지라도 내가 아버지의 보좌에 이기고 앉은거와  같이 너희들도 이기면 내 보좌에 함께 앉겠다. 전적 죽은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진리를 깨닫아서 눈을 감고 고요히 복잡한 것을 떠나서 깨닫고 깨닫고 깨닫고  세겨서 이렇게 깊이 세겨서 자기에게 꽉박혀도 실행하기 어려운데 알지도 못한  사람이 예수 어찌 믿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아멘이 뭐입니까? 아멘에서 무엇이  자랍니까? 네, 미직지근한 것이 뭐입니까? 우리는 예배당에 오면 되는 것 아닙니다. 와서  진리의 말씀을 참 바로 깨닫고 자기가 고대로 살라고 할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오는  것입니다.

보고서 안낸분들 보고서 내고요. 또 다 모두 삼십분 씩 기도하고 가요. 뒤에 큰  환난 닥쳤을때 그때 허덕거리고 그때가 나 죽는다고 하고 그때가 비참하게 망하지  말고 오늘에 기도하는 그 살고 힘드리면 될터인데 그때 망해도 안되는 죽고 망해도  안되는 그런것을 그 당할 필요가 뭐있소. 있기를 자 불을 꺼주시오. 저 뒤에는  약간 남겨놓고 또 자기 소지품을 딱검어지고 기도해요. 여 지금 도적이 많이 와  가지고 불끄면 지금얼른 도적질하려고 뭐 옆에 숨어 앉았습니다. 모두 딱 검어지고  기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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