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판 준비

 

1987. 7. 23. 새벽 (목)

 

본문:베드로후서 3장 7절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피공로가 우리 그 전반적인 구원을 다 완성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완성하신 이 구원을 우리가 법적으로는 다 받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받고 있는 이 면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지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 상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로 우리를 법적 해결을 다 지워 놨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공로 때문에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지 피공로 아니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소멸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범죄한 이후에는 하나님이 사람을 피하셨습니다. 같이 계시면 다 멸망시키기 때문에 같이 계실 수 없고 그 사이에다가 많은 그 방어선을 두고서 그래 하나님이 접하십니다. 이라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신 성령도 오실 수가 있었고 또 이 무서운 진리, 불의를 마구 소멸시키는 진리도 우리에게 올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상대해서 부르는 것이나 또 서로 대화하는 것이나 이런 것이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자살 행위입니다. 마구 소멸합니다.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는 어떤 것이 유황불 구렁텅이인가? 유황불 구렁텅이는 영원히 불로 타는 것인데 거게 불로 타기는 뭣이 태우는가? 그 태우는 것은 진리의 능력이 태웁니다. 영감의 능력이 태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완전하심이 태웁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치 안한 것을 소멸합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지 안한 것을 다 소멸합니다. 깨끗하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다 소멸합니다. 부정한 것이 거게 배겨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는 법적으로 완전히 정죄돼서 멸망에게 매여 가지고 있는 것이 대속으로 사죄 받았고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이 왔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올 수 없는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지극히 큰 능력이 왔으니 온 그 능력은 곧 하나님이신 영감 능력과 또 하나님의 뜻인 진리 능력 그 능력이 왔습니다.

그러면 진리도 전능의 능력을 독자적으로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뜻이니 능력 있다 그게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 진리인데 진리는 진리기 때문에 그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도 독자적으로 전능의 전지의 능력을 가졌고 완전성을 가졌고 영감은 완전자이신 하나님이, 하나님 당신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활동할 때에 그 활동을 가리켜서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감은 하나님의 작용입니다.

활동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 자체, 하나님 자체에서 움직이는 그 움직임이 영감입니다. 영감이 나타났을 때에 그 영감을 가리켜서 진리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에게 올 때에 이 문서로 기록해 가지고서 신구약 성경으로 왔고, 또 이 진리가 나타날 때에 여러가지 기적과 표적으로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그 택한 자들은 죽은 영이 뭘로 살아났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열한 가지 대속의 공로를 입었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를, “새사람을 입으라” 하는 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안에 있으면 완전입니다. 대속의 공로 안에 있으면 아무것도 해하지 못하고 완전인데 대속의 공로를 먼저 입히면서 우리를 살리기를 영감과 진리로 살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살릴 수 있도록 그렇게 완전한 자를 만든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요 대속으로 만들어 놓고는 완전한 자가 됐지마는 아직까지 생명은 없습니다. 그 생명을 불어 넣은 것이 영감과 진리입니다. 생명을 불어 넣은 것이 예수님의 또 부활의 대속으로 인해서 생명을 우리에게 불어 넣을 수가 있고 또 영감과 진리가 와 가지고 역사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된 자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하고 살 때에는 이는 완전자요 전능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를 자꾸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는 통에 다르고 또 입는다고 해도 실은 그 주관적으로 입고 하나님 보실 때에 합당하게 이치에 맞게 그렇게 합리적으로 입은 양이 적기 때문에 그 사고가 나는 것이지 입은 것만치는 효력을 납니다.

그 입는 것을 뭘로 입는가? 입는 것은 내나 우리가 다른 것 들 것 없고 믿음으로 입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속하신 것을 알고 인정하고 난 다음에 자기가 이 대속은 자기를 위해서 대속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이요 대속은 내것이기 때문에, 나를 대신 해서 대속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것이라.

이래서 “값이 없어도 사라” 그말은 사는 그 댓가는 우리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주님의 것이 돼야 주님의 대속이 내것이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거듭난 것은 진리의 능력으로 거듭났고 영감의 능력으로 거듭났고 예수님의 대속의 이 열한 가지 공로로 우리가 거듭났습니다. 그러면 열한 가지 대속의 공로를 예수님이 완전히 설정해 놓은 것인데 이 설정해 놓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가지고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그 역사를 누가 하는가? 그것을 내나 성령님이 하십니다.

또 성령님이 되게 하는 역사를 하시고,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대속이 우리 것이 되도록 이렇게 적응을 시켜서 그 대속이 내것이 되게 하시는데 그 하실 때에 그 하시는 방편은 뭐인가? 그 방편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방편으로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섰다 그렇게 했어. 보증섰다 말은 책임졌다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어떤 것이 우리 구원인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가 입은 것만치 그것이 내 구원이요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것만치 영감을 받을 수 있고 또 영감을 받은 것만치 진리를 알게 됩니다.

자기가 아무리 성경을 명철한 사람이 많이 읽고 본다 할지라도 영감이 역사하지 안하면은 그 진리를 읽어도 외워도 거게 대한 참뜻은 하나도 모르게 됩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믿음으로 입은 것만치 영감의 은혜를 입을 수 있고 영감의 은혜를 입은 것을 믿은 것만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이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것은 뭐이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이질되는 것,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이질된 것을 이것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안으로 이끌어서 대속의 공로와 동질을 만들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예를 들면은 우리는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인데 이 택함받은 이것을 알고 믿음으로 자기 것 되는데 택함받은 자가 되지 안한 것, 또 하나님과 화친된 자가 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과 화친된 자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그런 걸 자꾸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때냐 하면 곧 예수님의 열한 가지 이 구속, 열한 가지 구속의 나를 만들라 합니다. 하나 비유 말한다면 어떤 그 베쪼가리라도 그 베쪼가리를 다른 물로 물을 들이면 푸른 물을 들이면 그 베쪼가리는 완전히 푸른 베쪼가리가 되고 붉은 물을 들이면 완전히 붉은 베쪼가리가 되는 것처럼 우리를 열한 가지 예수님의 이 대속과 구속을 입히기 위해서, 대속은 대신 하신 것이요 지금 대신 하신 그걸 가지고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는 것을 가리켜서 구속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예수님의 이 열한 가지 대속과 이질이 되는 것은 다 그것은 멸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를 대속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공심판에 견디고 진리 앞에 견디고 영감 앞에 견디지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당장 소멸돼 버립니다.

예수님의 열한 가지 대속과 나와 이 이질된 것을 자꾸 동질을 만들라고 지금 역사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영감과 나와의 이질된 것을, 이질이라 말은 본질과 본성이 다르다 말입니다. 영감과 나와 이질된 것을 동질되게 할라고 지금 성령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또 진리와 나와 이질된 것을, 진리와 나와 이질된 것을 진리와 나와 동질되도록 할라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병은 어떤 것이 사람병인가? 사람병은 영병이 사람병인데 영병은 어떤 것이 영병인가? 영은 성령과 진리와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완전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중생된 영입니다. 우리 중생된 영은 어리기는 어려도 거게 뭐 흠이나 점이나 그런 것이 없고 다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영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영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 영은 어떤 것이 영의 병이냐? 영은 이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로 연결돼 있기는 있지마는 아직까지 어린 것이 병이요 약한 것이 병입니다.

그러면 영이 어린 것이 병이요 약한 것이 병이라는 말은 영이 중생된 영이 어린 것은 뭐인가? 어린 것은 자기의 소유가 되어 있는 그 마음과 고기덩어리 자기의 소유인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그것이 영이 약한 것입니다. 또 영이 어린 것은 뭐이냐? 자기의 마음과 고기덩어리 이것을 대속화 영감화 진리화 이 시키지 못한 그것이 어린 것입니다. 지배하지 못하는 것이 약한 것이요 이와 같이 완전히 성화시켜 놓지 못한 것이 그것이 어린 것이라 말이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심신을 중생된 영이, 몇 가지로 살아났습니까? 중생된 영이 몇 가지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손가락으로? 녜, 이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 가지 능력을.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능력으로 살았어. 그러기 때문에 영의 힘은 무슨 힘인가? 영의 힘은, 우리 영 말입니다. 우리 영의 힘은 무슨 힘이요? 우리 영의 힘은 예수님의 대속의 힘이요, 영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님의 이 구속을, 합해서 구속이라고 이래 말할 수 있는데.

구속의 힘을 가졌다 그말은 영은 영원 전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예택받은 하나님의 목적인 이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영은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영을 목적한 거, 우리 영은 온전케 하려는 것이 하나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제일 목적인 그 목적의 대상이 돼 가지고 있는 그것이 우리의 영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영의 힘이요 또 예정 구원, 창조 구원, 대속 구원, 또 이래 가지고 중생 구원 이렇게 나가서 이게 다 우리 영의 힘이오.

그러면 사죄가 영의 힘이요, 칭의가 영의 힘이요, 또 죄에서 해방해 자유하는 것이 영의 힘이요, 마귀에게서 자유하는 것이 영의 힘이요, 또 사망에서 자유하는 것이 영의 힘이요 이게 다 영원한 힘인데, 이것이 영의 힘인데 이 영의 힘을 가지고 있지마는 그게 어립니다.

어린 것은, 어린 것은 자기의 이 심신의 기능을 영화를 많이 시킨 사람 있고 적게 시킨 사람 있어서, 예수님의 이 세 가지화시키기를 많이 시킨 사람 있고 적게 시킨 사람 있고 하나도 시키지 못한 사람 있고, 그 사람은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본구원만 있지.

이것이 영이 아직까지 어린 것이오. 크지 안했다 그말이오. 영이 커 나가는 데에 중생된 영이 커 나가는 데는 어디로 커 나갑니까? 우리 이 육신으로 말하면 커 나가는 것은 어데로 커 나갑니까? 이 공간을, 처음에 아이 낳으면 요 조막덩이만 돼 놓으니까 공간을 그만치 자지했지마는 이제는 커지면 공간을 커다랗게 큰 사람은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작은 사람은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 이렇게 차지해.

고기덩어리로 차지하고 마음으로도 차지하고, 그 모든 걸 점령했다 말이오.

이랬는데 그러면 우리 영은 지금 어데로 커 나갑니까? 영이 커나가는 곳이 어데로 커나갑니까? 공간으로 커나갑니까 어디로 커 나갑니까 영이 커 나가기를 어데로 커 나가지요? 어데로 커 나갑니까? 마음으로 커 나갑니다. 마음을 자꾸 점령해서 커 나갑니다. 마음을 영화시킨다 말이오. 마음을 점령해 가지고서 영과 한덩어리를 만든다 그말이오. 또 고기덩어리를 점령해서 영과 한덩어리 만든다 그말이오.

그러면 마음과 고기덩어리를 영과 하나 만드는데 하나 만드는 것은 뭘로 만듭니까? 하나 만드는 것은 뭐 쇠로 가지고서 묶어서 하나 만듭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주 못을 쳐 가지고 한테 이렇게 못을 박아서 나무 그렇게 만들듯이 하나를 만듭니까 어떻게 만듭니까? 마음과 영이 하나되고 고기덩어리가 하나되는데 하나되는 것은 뭘로 하나되느냐? 내나 영이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로 하나 됩니다.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열한 가지 대속으로 하나를 만듭니다. 이 마음을 열한 가지 대속화시킨 것은 그것이 영이 그만치 큰 것입니다. 이 몸을 예수님의 대속화시킨 것은 그만치 영이 자란 것입니다.

또 그다음에는 뭐인가? 그다음에는 성령의 영감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 가운데 영감화된 마음이 있고 영감화 안 된 게 있습니다. 영감화 안 된 그것은 누가 점령하고 있습니까? 악령 악성 악습 옛사람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화된 것은 내 마음이 피와 성령과 진리의 것이 돼 가지고 있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움직이는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또 우리 몸도 그러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도 몸도 영이 점령하는 것은 이 세 가지로 점령하면은 자기와 같게 하나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영육이 하나돼 가지고 있고, 또 영감으로 영육이 하나돼 가지고 있고, 또 진리로 영육이 하나돼 가지고 있고, 이러면 이 진리가 힘이요 영감이 힘이요 대속이 힘인데 이 힘으로 하나돼 가지고서 뭉쳐 가지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화입니다.

지금은, 지금은 이 예수님의 대속과 또 영감과 진리가 무슨 일 하고 있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악령 악성 악습에게 사로잡혀 가지고서 악령의 것이 돼 가지고 있고 악성의 것이 돼 가지고 있고 악습의 것이 돼 가지고 있고 사망의 것이 되어 있는, 이러니까 사망의 것이 돼 있고 죄의 것이 돼 있고 마귀의 것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을 이걸 자꾸 빼앗아서 지금 이 세 가지화될라고.

악령화돼 있는 것을 예수님의 대속화시키고 또 악령 악성 악습화돼 있는 것을 영감화시키고 또 진리화시킬라고 자꾸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긍휼 베푸셔서 이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과 이질된 것을 동질 만들라고 지금 애를 쓰시기 때문에 이 예수님의 대속도 그러하고 또 영감도 그러하고 진리도 그러하고 이 죄와 사망과 마귀는 극히 대적입니다. 이것이 극히 상극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구 소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장차는 그래 되지마는 지금은 하나님께서 마귀도 소멸시키시지를 안하고 마귀도 지금 이렇게 내놓고서 예수님의 대속의 이 운동을 위해서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대속의 운동을 위해서 이용을 하고 있고 또 이 죄악과 마귀와 사망에게 속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심신을 자꾸 이것을 구원 시킬라고 애를 씁니다.

구원시킬라고 애를 쓰는데 누가 애를 쓰시는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이 애를 쓰고 영감이 애를 쓰고 진리가 애를 쓰지마는 영감과 진리와 대속이 직접 하지를 못합니다. 직접 하면 소멸되기 때문에 직접 하지는 못하고 이제 모든 사람들의 영을 통해서 또 성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중생된 영을 통해서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지금 우리 밖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으니까? 우리 밖에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녜,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마음 안에 계십니까 우리 몸 안에 계십니까 어데 계십니까? 우리 몸 안에 계시나, 몸 안에 계시나 몸 안에 계시면 우리 몸이 타 버립니다. 진리와 배반되고 영감과 배반되고 예수님의 대속과 배반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나면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만나면 소멸되니까 이렇게 만나지 아니하고 간접으로 만납니다. 우리 안에 계시지마는 우리 몸 안에 마음이 있고 마음 안에 영이 있고 있기 때문에 영 안에 머물고 계십니다.

이래서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어 주면 내가 들어가서 나로 더불어 먹고 또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먹는다는 것은 인격이 먹는 것이기 때문에 인격이 먹는 것은 그 역사를 이루는 것이 먹는 것입니다. 그래 그걸 해석하기를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내게 있으니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내가 먹는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나는 너로 더불어 먹는다” 그말은 이제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 그말은 너는 나를 힘입어서 너의 의무와 책임과 본분의 구원의 양을 전부 완성한다 그말입니다.

이거 좀 어렵기 때문에 한 마디라도 들어서 이걸 좀 깨달아야 알지 단어도 전부 다르고 이라기 때문에 세계가 다르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 것 가지고는 전연히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 우리 영 안에 이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의, 이 셋은 지극히 큰 능력인데 이 피는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이 피는 하늘의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통일시킬 그 능력을 가졌습니다. 가졌고 또 영감은 자존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졌고 진리는 없는 가운데 우주를 엿새 동안에 만든 그 독자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을 가지신 이 능력은 어데 와 있느냐? 우리 중생된 영에 있습니다. 왜 우리 중생된 영에게 있습니까? 우리 중생된 영을 점령해서 중생된 영을 당신의 집으로 삼았습니다.

이래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다 멸망을 시키고, 성전이 깨끗하니까 너희도 깨끗해야 된다.” 하는 말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영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 안에 계시는데 영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올라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영 안에 계시는 이 세 가지 능력이, 이 세 가지 능력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올라고 문을 두드려. 마음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두드려서 우리 마음 안에 이 세 가지 능력이 들어와 가지고 계시다가, 세 가지 능력이 들어와 가지고 계시다가 이 마음이 반대하면 쫓겨나갑니다.

반대하면 쫓겨나가. 쫓겨나면 어데로 갑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는 이 완전이요 전능이요 영원이요 영생이요 이는 지극히 큰 능력을 가졌는데 이 세 가지 능력이 우리 마음이 환영하지 안하고 반대하고 우리 마음이 이 간부, 간부. 우리 마음이 악령 악성 악습, 제 중심으로 살면 죽는 건데 그게 좋은 줄 알거든.

그렇지 안해요? 제 중심 제 위주 이것이 좋은 줄 알지만 제 위주 제 중심이면 멸망을 받습니다. 지극히 큰 자존자가 계시는데 그분 위주 그분 중심이 아니면 그거 멸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도 우리 나라도, 지금 뭐 우리 나라 나는 비유할 것이 없어. 취택해 비유할 만한 것이 없어. 이북에 공산주의가 비유할 만한 것이 많이 있어요.

이북에는 만일 이북에 김일성이에 대립이 되면 막 죽여버립니다. 막 죽여버려.

거기는 그거 있어. 우리 나라에는 뭐 뭐이 정권인지 몰라, 지금. 뭐 혼돈이 돼 가지고.

이래서 이 환영하면은 이라다가 이 피와 성령과 진리,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를 환영하면은 이 세 가지 능력으로 된 이 우리 구원이 우리 구원인데 이 세 가지 능력이 뭐이냐?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이 세 가지 능력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생명. 우리의 생명인데 이 생명이 영을 살려서 영의 생명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 안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있다가서 이 마음에 들어올라고 애를 쓰다가 그 마음에 겨우 들어옵니다. 마음에 들어올 때에 마음에 들어올 때에 이 세 가지 능력이 마음에 들어올 때에 무엇을 통해서 들어옵니까? 무엇을 붙잡고 들어옵니까? 무엇을 타고 들어옵니까? 크게 말해 봐요. 확신이 없는가배. 양심을 통해 들어옵니다.

셋의 잡을 것이 양심밖에 잡을 게 없어. 다른 거는 멀어. 양심을 잡아 가지고서 양심하고 합동이 돼 가지고 차차 차차 이 마음에 모든 요소에게 자꾸 이래 선전을 하고 자꾸 빛을 비춥니다. 비추면 그래 가지고 온 마음이 다 원할 때에는 이 마음에 들어와 가지고서 역사를 하다가 이 마음이 나가라고 쫓아내면 나가야 됩니다.

쫓아내면 나가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 속에 영감이 충만히 왔다가도 그만 도망치고 진리가 우리에게 깨달아져서 진리가 깨달아져 가지고 환하게 성경 보면 믿는 이치가 환하다가 그만 이 진리가 깜깜하게 그만 가 버리고 없고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에게 환하게 보여지고 대속을 인해서 ‘주님 나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나도 주를 위해서 죽기를 원한다’ 하고서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굉장한 그 참사람의 힘이 오는데 그만 그게 흐미하게 돼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대속해 죽으셨다 해도 ‘그런가?’ 하나 얘기삼아 얘기 들은 것같이 그렇지 자기에 실감이 없다 말이오. 그래 되는 것은 왜 그러냐? 피와 성령과 진리가 쫓겨나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피와 성령과 진리가 참사람의 능력인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쫓겨났습니까? 배척을 하니까 쫓겨납니다, 배척하니까. 배척하는 것이 어떤 것이 우리 마음과 우리 몸이 어떻게 하는 것이 피와 성령과 진리를 배척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배척하는 것이지요? 악령 악성 악습 그놈, 그놈을 청해 들이면 배척하는 거라.

배척하면 그만, 배척을 하면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을 좋아하고서 피와 성령과 진리를 좋아하지 안하고 이놈을 좋아하면은 그만 피와 성령과 진리, 피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 영계와 물질계의 것을 통일시키고 영원히 왕으로 앉아서 계실 분이 내나 예수님의 피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하나님 안에서 통일된다고 하지를 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공로 이는 하늘과 땅의 것을 통일시키고 영원히 왕이 되시는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피입니다.

또 영감, 영감은 하나님, 진리 다 이 능력인데 이렇츰 능력이 있는데 우리 마음에 와서 겨우 사정을 해 가지고 문을 두드리면서 ‘나 좀 들어가자 들어가자’ 이래 사정해 가지고서 겨우 들어오셔 가지고, 들어오셔 가지고 이거 모두 다 이걸 좀 정리하고 정돈하고 이래 가지고서 이거 좀 살리는 운동 할라고 이라니까 그만 이 마음이 나가라고 고함을 질러버리니까 그만 뭐 쫓겨서 그만 이 피와 성령과 진리가 그만 막 번개같이 쫓겨서 도망쳐 버립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쫓아내는 것입니까? 이 간부 이놈을 맞이하면 쫓아내는 것이라.

간부를 맞이하면 간부를 누가 맞이합니까? 우리 마음과 이 몸 이것이 간부를 맞이해. 간부 맞이하는데 간부 그놈의 이름이 뭐이요? 옛사람이라고도 하고 악령 악성 악습이라고도 합니다.

악령은 제 중심 제 위주로 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나온 그놈이 타락한 천사장이 악령이요, 또 악성은 그놈에게 물이 들어 가지고서 우리도,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있는 것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있다 말이오.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있는 그게 뭐이냐? 그것이 악성인데 악성을 다른 말로 말하면 뭐입니까? 악성을 다른 말로 하면 뭐이지요? 원죄. 그게 원죄입니다.

또 악령하고 원죄하고, 자기 중심하고, 자기 중심의 마귀하고 자기 중심의 인간의 본성하고 이 둘이 합작해 가지고서 행동한 것, 한 번 또 행동하고 두 번 행동하고 또 한 번 생각하고 두 번 생각하고 자꾸 여러번 이렇게 해서 주 모은 것을 가리켜서 뭐라고 합니까? 악습. 자기 중심한 그거 연습한 것 악습. 그것을 가리켜서 본죄 이랍니다. 원죄 본죄 이라는데, 이것이 간부입니다. 우리 본남편은 무엇이 본남편인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 본남편이요 영감이 본남편이요 진리가 본남편이요 이 간부는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이 간부입니다. 이것을 좋아해 가지고서 영접하면, 영접하고 이 피와 성령과 진리를 배척하면은 피와 성령과 진리는 전능이라 하고 전지라 하고 이렇게 완전자고 이런데 그만 쫓겨나갑니다.

만일 ‘우리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살겠습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살겠습니다. 내 위주로 살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되면 이 피와 성령과 진리는 빨리 쫓겨나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 말이요, 성령님을 원하고 예수님의 피공로를 원해서 ‘나에 예수님의 피공로의 이 은혜를 입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나에게 충만케 하시옵소서.’ 자꾸 입술로는 그라는데, 또 영감을 충만히 달라고 또 입술로 그라는데,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자꾸 입술로는 그라는데, 입술은 그라는데 그러면 이 셋이, 자꾸 청하기는 청하면서 쫓아내니까 쫓겨나갑니다.

쫓겨나가요.

그러기에 영감을 원하는 자가 자기 중심이면 영감을 쫓아내는 것입니까 영감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어째 자꾸 말 대답을 해 봐요. 자기 중심, 악성. 자기 중심이 악성인데 악성은 성령을 쫓아내고 진리를 쫓아내고 예수님의 피공로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악습도 성령을 쫓아내고 진리를 쫓아내고 영감을 쫓아내고 피공로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쫓아내면 이게 들어오면은 이게 들어오는 것을 가리켜서 성경에 간부를 좋아하는 것이라 이랬어, 간부. 간부를 좋아하는 것이라 이랬는데 간부를 영접하면 이 셋이 쫓겨납니다.

쫓겨나는 이유는 능력이 모자라서 겁이 나서 쫓겨납니까, 능력이 없어 쫓겨납니까 어째서 쫓겨납니까? 어떻게 해 쫓겨나지요? 하나님에게, 하나님에게 능력이 없어 쫓겨납니까, 하나님이 겁쟁이라서 쫓겨납니까, 하나님이 뚜드려 맞을까 싶어 쫓겨납니까, 하나님이 죽을까 싶어 쫓겨납니까, 하나님이 어리석어서 쫓겨납니까? 어째서 쫓겨납니까? 뭐 똑똑히 한번 말해 봐. 틀리면 뭐 배우는 사람이 틀릴 수 있지, 틀리면 뭐 틀리지. 한번 똑똑히 말해. 왜 쫓겨나는고? 어? 뭐라 하노? 아하, 죄는 하나님하고 동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동존할 수 없으니까 쫓겨나는구만. 그것도 녜, 그럴듯 한 이유는 있습니다.

왜 쫓겨나지, 여게서는? 예? 하나님 사랑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안 쫓겨나고 거기 ‘이놈’ 들어오니까 그만, 악령 악성 악습이 들어오니까 ‘네 이놈 들어와 봐라.’ 버티고 섰으면, 버티고 섰으면 망하고 죽기는 뭐이 죽습니까? 뭐이 죽습니까? 우리 마음이 소멸돼 버립니다. 우리 몸뚱이가 소멸돼 버립니다. 대번 그만 이 전기가 꽝 그라면 다 타버리지 않습니까? 이것 모양으로 그만 이래 한 대 탁 부딪히면 그만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우리 구원 못 이뤄, 그만. 그만 불심판이라. 그만 멸망받고 말아. 이러니까 할 수 없어 퍼뜩 피해갑니다. 만나면 태워버리기 때문에.

이라다가 또 살살 이해를 시키고 납득을 시키고 달래 가지고서 살살 이해를 해서 자꾸 그렇게 이해를 시켜 가지고서 이제 그걸 회개를 하고, 회개를 하고 이 성령과 진리를 영접할 수 있는 자가 되어지면 성령이 들어가고 진리가 들어가도 타지 안할 수 있다 말이오. 그 마음에 성령이 들어가고 진리가 들어가도 타지 안할 수 있으면 들어갑니다.

그 마음에 어떻게 되면은 성령과 진리가, 그 깨끗한 성령과 진리가 들어가도 타지 안하고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마음이 어떻게 되면 그렇습니까? 여기 남반에?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지? ○○○선생? 손 들어 봐. ○○○선생? 알아 봐. 성령과 진리가 들어갈라고 그 마음에 들어갈라고 살살 달래고 타이르고 이래 가지고 들어갈라 하는데 못 들어가는 이유는 들어가면 확 태워버릴 거라 말이오. 확 태워버리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 인제, 확 태워버리니까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들어가도 괜찮도록 그 모든 준비 작업이 된다 말이요, 들어가도 괜찮도록.

이제 근근히 성령이 들어가도 진리가 들어가도 타지 안할 수 있도록 그렇게 준비 공작을 하는데 그 어떻게 공작을 합니까? ○○○조사님? 예수님의 뭐? 아멘! 예수님의 공로를 입으니까 이제 예수님의 공로를 입으니까 이 성령이 들어갈 수가 있다 말이오. 예수님의 공로를 입지 안하면 들어가지 못해. 예수님의 공로를 입으니까 성령이 들어가.

예수님의 공로를 입으니까 공로 때문에 공로가 가리워 있기 때문에 성령이 들어가도 타지 안할 수가 있다 말이오. 예수님의 공로가 우리의 마음과 몸과 성령과 진리와 그 사이에 예수님의 공로가 가리워 있기 때문에 타지 안한다 말이오. 가리워 가지고 있으니까 타지 안하도록 해 가지고 들어가서 차차 차차 작업을 해 가지고서 이제는, 작업을 해 가지고, 그러면 성령과 진리와 아주 한덩어리가 될라고 하면은 우리의 그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변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변해야 됩니까 뭐이 변해야 됩니까? 우리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변해야 돼. 어떻게? 영감화돼야 돼. 진리화돼야 돼. 예수님의 피공로를 우선 입었지만 예수님의 피공로화돼야 돼.

이라다가 우리가 간부를 청하면은 빨리 달아납니다. 왜? 달아나는 것은 무능해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 머물고 있으면 우리 그 심신은 타버리니까 뭐 구원도 못 이루고 그만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이렇지마는 앞으로 피와 성령과 진리가 그만 뭐 상대방이야 타든지 말든지 확 들어와 가지고서 척 들어와서 정립을 하고서 딱 당신의 행정을 펼 때에는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언제 그리 됩니까? 한번 똑똑히 말해 봐, 틀리면 틀리고. 언제 그래 돼? 불심판이야, 불심판. 그게 불심판이라. 피와 성령과 진리가 직접 와서 닿으면 피와 성령과 진리에 이질되는 건 확 타버립니다.

알겠습니까? 확 타버려. 장로 속에서 타고 목사 속에 있어도 타고 뭐 성자 속에 있어도 다 타 버립니다.

이러니까 오늘 피와 성령과 진리에 배치된 이질된 것을 어서 동질을 지금 만들어야 돼. 동질만 만들면 이다음에 불로 태우는 것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 말씀으로 불사르기 때문에 이제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피공로와 하나되는 것은 거게 타지 않고, 자, 자기 동질되는 자가 좋아요 이질되는 자가 좋아요?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하고 있으면 좋아요 뜻이 다른 사람하고 있으면 좋아요? 동질은 좋은 겁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이다음에 우주가 불타는데 하나님 말씀에 배치되는 건 다 타버리요. 다 타버리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하나되는 것은 그때가 좋은 때라, 그때가 좋아요. 그때가 자유 세계라. 얼마든지 자유 세계로 뭐 우주가 불타는데 이 사람은 여게도 가고 저게도 가고 마음대로 돌아다녀.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불이 안 타.

불이 안 타는 것은 이 불은 하나님과 이질되는 것만 태우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질되는 것은 막 하나가 돼 가지고서 돕기 때문에, 이것을 보이기 위해서 옛날 출애굽 할 때에 출애굽에 장자 재앙은 무서운 재앙이지마는 그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자유요 해방이요 이제 크게 유익을 보는, 보는 대로 달라 하면 다 줘야 돼. 다 줘야 돼. 큰 수입의 날이요 자유의 날이요 능력의 날이요 해방의 날이라. 그러나 어떤 자에게는 그날이 멸망할 날이라 그것을 이 예표해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어쨌든지 우리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 요 말씀과 다른 것은 다 타버립니다. 다른 것이 하나 있으면 그면이 탑니다. 또 둘 있으면 그면이 탑니다. 이러니까 그것은 소멸되니까 소멸된다는 그게, 사람 말이요, 그거 비유입니다. 손가락이 이거 하나 끊으면 어찌 돼요? 아파요 안 아파요? 아프지요? 아픈데 비유컨대 손가락 하나 요것이 하나님 말씀과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동질이 안 됐으면 요거는 타 버립니다. 요거 타버리니까 요거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요거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둘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팔 하나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그 사람의 이 전체 가운데에 백분이 일이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십분지 일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십분의 십이 타는 고통을 당할 것이오. 하나도 타는 고통을 안 당하는 것, 안 타는 것은 영광이요 존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거룩한 행실이라 하는 건 뭘 거룩한 행실이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 말씀과 이질되는 것을 자꾸 어서 고치자 그말이오. 이질되는 것을 고쳐서 이질되는 것이 없이 동질화하는 것이 이것이 거룩한 행실입니다.

자꾸 거룩한 행실이라는 거는 진리와 나와 다른 것, 영감과 나와 다른 것,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나와 다른 것, 다른 것을 자꾸 일치를 시키도록 하는 그것이 거룩한 행실입니다.

그러면 경건은 뭐이냐? 경건은 하나님 한 분을 위하는 것,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하는 것, 그렇기에 이질되는 것을 다 없애버리고 동질을 만들어 가지고서 동질된 그걸 가지고서 뭣 하느냐? 동질된 그것 가지고서 자존자 하나님을 위하는 그것이 경건입니다. 이게 영생입니다. 이거 다 필연성으로 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오늘에 하나님 말씀에 위반되는 것은 뭐이든지 그것 다 빨리 이것을 정리해서 고치는 것이 자기의 이 피난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지 안해요? 이 세상에서도 자기에게 그 사람 ‘저 사람은 모든 게 좋은데’ 인물도 좋고, 또 생활력도 좋고, 또 모든 사교성도 좋고, 애교성도 좋고 모든 것 다 좋은데 그 사람에게는 못쓸 욕심 하나 있다 말이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은 온 전신이 고통당하는 거라, 못쓸 욕심 그거 하나 때문에.

또 다른 거는 다 좋은데 그 사람에게는 나쁜 버르징이 하나 있습니다, 나쁜 버릇.

나쁜 버릇 그게 한번 두번 해 오랫 동안 습성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나쁜 버릇 하나 있는 그놈 때문에 고생이라. 이 세상에도 그렇지 않소? 사람들, ‘저 사람은 참 모든 면이 멀꿈한데’ `멀꿈하기는? 그 사람 아무짝도 쓰지 못할 사람인데 뭐.’ ‘아니야. 모든 면이 멀꿈한데 저 사람은 못된 버릇 하나 그것 때문에 저 사람 신세가 갔다. 못된 욕심 그것 때문에 제 신세가 간다.

또 그 사람은 다른 것 다 괜찮은데 못된 그 성격 못된 나쁜 성격 하나 있어 가지고 그것 때문에 평생을 망치고 있다.’ 그게 모두 다 뭐냐 하면 우리 사람병입니다. 사람병 고치는 것.

이래서 이번에는 사람병 고치러 다 가는 것은 뭐이냐? 영의 연약성을 자꾸 강건케 하는 것이고 또 이 마음에 모든 병,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속에서 나오는 것이 뭐이 속에 나오는 것입니까? 네 속에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 안된 욕심 모든 소원 모든 성품 정 그런 게 다 나쁜 거라 말이오.

이래서 어짜든지 이번에 우리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마련할라고 하고 있는데 여게 대해서 요번 주간에 어짜든지 열심을 내 가지고서 이걸 해서 성령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이질된 것을 다 고쳐야 됩니다. 이질된 것을 어서 빨리빨리 고쳐버려요.

고치고 그뭐 사람마다 나쁜 그게 하나 있어 가지고 안 돼. 나쁜 고거 하나 있어 가지고서. 그 사람이 병이 들었다 그러면 병이 들었다 하는 데에 그 나쁜 게 뭐 하나 있어 가지고 병이 들어. 나쁜 게 하나 있어 가지고.

그걸 나한테 물으면 내가 좀 가르쳐 주지마는 나한테 묻지도 안하고 또 물으면 물어도 가르쳐 줄라 해도 이게 가르쳐 주면 도로 이거 자는 범 코차기로 이거 도로 그 악화를 시키나 싶어서 그걸 말을 못하고 또 그런 것도 있다 그말이오.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거 죄병 그놈 무섭습니다. 죄병이라 말은, 죄병이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무슨 병이요? 죄병이라 말이 무슨 말이지요? 한번 대답해 봐요.

죄병이 무슨 말이요? 저 한번, 저 청년? 흰옷 입은 청년? 죄병이 뭐이라, 죄병이라 말이 무슨 말이지? 또, 이제 새로 나온 모양인데, 그래. 죄병이라 말이 무슨 말이요? 저 미국에서 온 청년들 한번 물어볼까? 죄병이라 말이 무슨 말이지? 죄병이라 말이 무슨 말이지? ○선생? 죄병이라 말은 하나님과 삐뚤어진 병이라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죄는 삐뚤어진 것.

누구하고 삐뚤어진 것 뭐? 대통령하고 삐뚤어진 것? 백 목사하고 삐뚤어진 것? 아니야. 하나님하고 삐뚤어진 것. 하나님하고 삐뚤어진 걸 어찌 아노? 성경하고 삐뚤어진 게 하나님하고 삐뚤어진 것이지.

죄병이라 말은 하나님하고 삐뚤어진 병인데 하나님과 삐뚤어진 병을 뭘 보고 아느냐?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과 삐뚤어진 병을 안다. 하나님과 삐뚤어진 병 그거 하나 있음으로 병도 들어.

그라면 떡 아프다고 이래 쌓으면 이래 쌓아도 ‘너는 그 병을 고치기 전에는 절대 그병이 고쳐지지 않는다.’ 그 병 그놈이 무섭소, 삐뚤어진 게. 그만 죄병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그 값을 받아서 골케골케, 죽을 지경되면은 이제 항복하다가 그 몸뚱이가 조그매 살아나오면 그만 그 병이 시작해. 살아 나오면 그 병이 시작해. 죽느니 사느니 뭐 입원하니 그래 쌓아도 그 병이, 회개해서, 회개해서 그 병을 조그매 회개하니까 그 건강이 돌아와. 건강이 돌아오면 또 그 죄 또 짓습니다. 인간 고약해요.

이러니까, 어짜든지 이걸 하나님이 참 애먹어. 이거 뭐 자글자글 구워서 말이요, 철판 위에 굽는 것 모양으로 구울 수 있는데 그라면 또 다른 구원이 안 되지 냅두니 이게 또 기운만 생기면 또 망령을 부리고 패역을 부리지 이거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이거.

이번에는 거룩한 행실 경건 이것을 힘을 씁시다.

앞으로 결혼 상담은 집회 갔다 와서 하고 그 안에는 안 하겠습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회개 20가지’ 그것을 가르칠 시간 없는데 언제 이번 혹 집회 가면은 그것을 한 시간 가르칠란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니까 자꾸 환하게 외워 놔요. 외워 놓으면은 그때 가르치면 알아듣지마는 언제 외우지도 못하는 거 그때 가르쳐 봤자 못 알아듣는다 말이오. 어짜든지 외우십시오.

그라고 지하철 공사 위해서도 기도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놓지 맙시다. 지난밤에 손든 사람으로 말하면 뭐 몇천 명이 들었는데 오늘 아침에 나온 사람은 요래밖에 안 돼. 그 모두 약해서 못 나와요. 그만치 약자라.

자, 오늘 아침에, 오늘 아침에 자기 새끼들에게, 자기 새끼들에게 양식을 먹일라고 전화로 연락한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 전화로 연락한 사람들? 전화 연락한 사람들 손 들어 봐요. 이것뿐이라. 연자도 보니까 그놈 새끼 까놓고 새끼 먹일라고 막 소낙비가 오는 데도 양사방 돌아다니며 물어다 먹이고 야단을 지기는데 이걸 안 먹이면 뒈져. 새벽기도 안 나오는 그 신자가 뭐 해? 그거 아무 소용 없어. 앞으로 환난 오면 다 꺼꾸러져 버려.

저 우리 양산동에는 연자가 새끼를 쳤는데 이거 그만 늦게 시작했어. 내가 늦게 시작해서 ‘저거 헛일 하는데 헛일 하는데’ 마음에 그 안타까와서 ‘헛일 하는데 헛일 하는데’ 그걸 내가 말을 해서 들을 것 같으면 말하지만 그 말해야 못 알아듣는다 말이오.

이런데 꼭 나오는 시기가 뭐냐 하면은 이 칠월 장마통 나오는데 그때가 폭풍 부는 때라. 그때 지금 집에서 나올 때라, 나와 가지고서 돌아다닐 때. 나와 가지고서 그만 폭풍에 다 죽어버리니까 에미도 새끼도 한 마리도 못 보겠어.

나와서 새끼가 물에 빠져 죽으니까 또 에미도 따라서 그걸 건진다고 이래 쌓다가 죽을 것이고 그만 폭풍에 다 죽은 것 같애. 시기 잘 못 만나면 안 돼요. 일찍 그 폭풍 오기 전에 새끼 까 가지고서 연습 시켜서 다 자유로 날아다닐 수 있도록 해야 그때 폭풍에 안 죽고 이래 살지 그리 안 하면 폭풍에 걸리면 다 죽어버리요.

이것 모양으로, 그것도 보니까 자꾸 먹여 살릴라고 애를 쓰는데 이거 새벽으로 자꾸 알뜰히 전화하고 전화하고 자꾸 해 가지고서 이것이 와서 먹으면 삽니다.

먹으면 자라요. 안 먹고 뭘 자라요? 이게, 자, 앞으로 환난 오면 이 가운데서나 뭐 이거나 다 살란지 몰라. 이거나 다 살고 나머지기는 시원찮애. 시원찮애. 지금도 자기 형편 사정에게 종이 돼 가지고서 꼼짝을 못 하는데 언제 자기 생명이 다 달아나고 위협이 올 모양인데 어떻게 그때 이겨내겠어? 인제 맡은 식구들은 새벽에 전화를 해요. 새벽에, 미리부터, ‘내일 아침에는 그래야 된다. 이래야 된다.’ 그 전화 할라 하면은 남편 있고 그런 자리는 차차 차차 알아서 해야 돼요, 알아서. 강제로 그라면 안 돼요. 뭐이든지 초월적으로 이래 순위적으로 돼야 되지 순서 없으면 안 됩니다.

나올 수 있는 거 뭐, 온 가정이 다 믿는 거 나올 수 있지 안해요? 그런 거는 호통을 쳐요. 만일 여기 저 장로님들은, 내가 시간이 없어. 장로님들은 안 나오는 사람 뭐 다른 교회 뭐 놔 놓고 내가 알기만 알고 시간만 있으면 장로님 야단을 칠 겁니다. 그라면 전화 하면 ‘아이구 내가 아파서 못 나왔습니다.’ 다른 소리는 할 수가 없어. 안 되면 장로 치워버리고 그만 나가라 하지, 뭐. 다른 교회로 가라 하지. 이제 깨달은 사람은 몽둥이로 때릴 수 있어. 왜? 그래야 구원 이루지 그리 안 하면 안 돼요. 못 깨닫는 사람은 그거 해 봐야 소용 없기 때문에 삐꾸기 때문에 그저 살살 달래서 자꾸 이래 해야 되지마는.

그거 내가 집사로 있을 때에 한번 이래 이상한 가운데 보니까 이 큰 강이 있는데 뭐 저 오리떼가 거기 꽉 이래 가지고 있는데 오리떼가 저기 나는 여기 위에 있는데 지금 저 산위에 가야 먹을 게 많고 있는데 저 밑에 보니까 오리떼가 거기 있어. 있는데 거게서 내가 훌치면 안 되겠어요. 내가 훌치면 안 되겠어. 그거 내가 훌칠라 하니까 누가 있다가 ‘그거 치면 안 된다. 가만히 둬 둬라.’ 그래 가만히 둬 두니까 요놈이 살살 올라와서 내 앞에 와. 내 앞에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막 장대를 가지고 막 후려댔어. 막 후려대니까 막 쫓아올라가. 그라고 난 다음에 생각하기를 ‘아, 요거 어느 정도가 돼야 되지 어느 정도 되고 난 거는 막 독촉을 해야 되고 어린 거는 그라면 그만 저 후퇴해서 세상으로 달아나 버려 안 되겠다.’ 그걸 이런 계시를 줬는가 이렇게 한번 여겨봤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 자꾸 이래 한번 생각해 봐요. 자꾸 불탈 것도 생각하고 또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모두가 산도 들도 탈 것도 생각하고 좀 자꾸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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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부활의 차이와 심는 일/ 고린도전서 15장 42절-44절/ 880616목새 선지자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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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부활의 소망으로 산 것은 헛되지 않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58절/ 890723주후 선지자 2015.11.02
189 부활의 소망으로 산 것은 헛되지 않다/ 890623금새 선지자 2015.11.02
188 부활의 소망/ 이사야 1장 1 8절-20절/ 890724월새 선지자 2015.11.02
187 부활에 이르려/ 빌립보서 3장 11절/ 800407월새 선지자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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