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도

 

1986. 12. 22. 새벽 (월)

 

본문:로마서 1장 16절 상반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말은 복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그말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말은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 이는 하나님 다음으로서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것들은 영계에 있든지 물질계에 있든지 뭐 크고 작은 어떤 것보다 이 복음은 그것보다 영광스럽고 탁월한 것을 믿는 말입니다.

왜 이 복음이 그렇게 하늘에 있는 모든 피조물보다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보다 더 권위 있고 가치 있고 또 우리에게 유익되고 또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세력 있고 그런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첫째 하신 일이 뭐인고 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 정하신 그것이 첫째 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다음으로, 순서적으로 하나님 다음으로 존재케 된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또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기 때문에 예정보다 목적이 큽니다. 또 목적을 위해서 예정한 그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창조보다 목적이 큽니다.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목적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다 보존하시고 관리하시고 운영하시기 때문에 보존 관리 운영보다 이 목적이 큽니다.

그러면 이 목적이 무엇인데? 목적은 이 목적을 이루시는 데에 뭣뭣이 들어 가지고서 이 목적을 이뤘는가? 이 목적을 이룬 것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과 또 진리와 또 하나님이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 투자했습니다. “근본 부요하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난해지셨다” 말은 모든 부요를 다 내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부요를 내놓은 것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내놨다 말 아니오. 당신 자체에 대해서 그의 영광, 존귀, 권세, 모든 그런 것을 다 내놔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자체를 내놓으셨는데 자체의 그 완전성, 그 자존성, 불변성, 단일성, 이 하나님의 본체의 이 본성만 내놓을 수 없어. 그 본성은 완전이기 때문에 완전을 내놓을 수도 없고 불변이기 때문에 불변도 내놓을 수가 없고 또 영원성이기 때문에 내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만 안 내놨지 그외 당신이 가지는 뭐 지혜 능력 이것도 다 내놨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그 능력을 다 내놨기 때문에 말 한 마디도 할 능력을 못 가졌습니다. 그저 먼지만한 것도 당신 권리가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일도 당신이 당신의 주권으로 할 수가 없어서 언제든지 아버지에게 피동됐습니다. 아버지에게 피동됐으면 그러면 하나님은 세 분이냐?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당신이 당신에게 피동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이 본성 자존성, 완전성, 영원성, 단일성 이 네 가지는 내놓을래야 내놓을 수가 없어서 이거는 그대로 있고 나머지기는 다 투자해 가지고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영계나 물질계에 창조한 것은 당신이 이런 거 하나도 내놓지 안하고 당신이 이런 거 엿새 동안에 지었기 때문에 뭐 그런 걸 지을라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것보다 탁월해 있다. 모든 것보다 무한히 탁월한 하나님 다음가는 고차원의 것이다. 이 복음의 가치를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것을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믿어지게 할 때는 하나님께 대한 것은 일체 다 믿어지는 그 믿음이 생겨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우스꽝 소리를 하는 우스꽝 소리를 하나 들었는데 저도 그 신앙 경험이 전부 다 그러합니다. 처음에 서부교회 와 가지고서 제일 처음에 설교를 들으니까 설교하기를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은 사망으로 인도하고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할 때에 그 말씀을 듣고 깨닫기를 뭐라고 깨달았느냐 하면은 ‘이 손 길에는 차가 안 다니니까 그거는 완전하고 넓은 길에는 차가 다니까 이거 위험하다 하는 것이로구나. 참 이 말씀이 얼마나 완전한 말씀이요 완전한 교훈인가?’ 그래 가지고서 어떻게 감동이 됐든지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감사를 하고 어데든지 좁은 길로 가면서는 ‘이 길은 완전하다, 또 이 찻길 갈 때는 위험하다.’ 이렇게 깨달아 가지고서 그렇게 했다고.

그 깨달은 것이 그 잘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거 좁은 길이라 말은 이 세상에 인간들이 말하고 수많은 주장과 지식 그런 것은 넓은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식은 좁고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좁고 이런 것이지마는 하나님이 처음에 믿도록 택한 자에게 믿음을 줄 때에는 이렇게 믿어집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강단에서 하는 말이면은 그거는 뭐 틀린 말이라도 어짜든지 좋게만 해석이 되고 좋게만 믿어지고 자꾸 깨달아져서 이렇게 되는 사람이 그게 복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다른 데서 하는 말은 백프로 인정해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말하든지 강단에서 말하든지 하는 것은 무조건 반항적으로만 해 가지고 나가는 그런 인간이 있어. 고거는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그 심령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가 나는 왜 이런 자인고 해서 울면서 통곡하며 하나님께 간구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데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에 믿은 것이 그런 경험입니다. 제가 믿지는 안해도 열세 살 먹어서 중생은 되기는 됐는데,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후에 스물다섯 살 먹어서 제가 예수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 늘 예수 믿는 것을 뭣보다도 제일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믿지는 안 합니다. 믿지 안하고 믿는 사람 가면은 자꾸 만나면 핍박하고 이래 가지고 시달리고 이래 자꾸 이래 주 몰아붙여 가지고 울고 자꾸 그랍니다.

저보다도 저 여동생이 먼저 예수 믿었는데 만나면 내가 울립니다. 이렇게 저렇고 자꾸 이래, 안 그렇다고 이래 변명을 해 가지고 자꾸 보골채우니까 나중에 가서 답변도 못 하고 운다 그말이오. 이래도 속으로는 그분들이 하는 그 일은 하나도 헛되이 보지 안하고 ‘뭐인가?’ 이러는데, 제가 저거 친구 이유신 선생이라고 그분이 큰 그저 상점을 차리고 있는데 그 상점에 한번 가서 내가 잠깐 좀 들어가 앉았었습니다. 들어오라 해서 거기 들어가 앉아 가지고 있는데 밖에 누가 손님이 왔다고 찾아가는데, 손님이 왔다 하는데 그것이 그 옆에 제가 처음에 나온 교회의 고운서 권서라고, 권서, 권서라고 글을 권한다고 해 가지고 권서라 하는 그런 직책이 있었습니다. 전도사도 아니고 권서라는 그 직책을 가지고서 거게 와 가지고 교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그 집에 그 아들이라 이래요. 아들이라 이래서 그거 내가 그 문구멍으로 가만히 내다 보고 하는 소리를 엿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비판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만 그거는 완전자요 천사같이 이렇게 자꾸 보여집니다. 보여져서 ‘보자, 어떤고? 저 사람들은 언행심사를 어떻게 하는고 보자.’ 이라니까 오더니마는 ‘뭐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이거 얼마입니까?' 얼마라 하니까 그만 돈 주고 가. 그래 내가 거기 가서 또 큰 감동을 받았다 말이오. ‘저 사람들은 저러니까 저것이 저 사람들의 행동이로구나.’ 이래서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교회는 안 나가도 반했든지 말이요, 내가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막 마음이 쏠리고 반했든지.

‘자, 그 집에 있는 무슨 티끌이라도 하나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 이래서 인제 예수 믿는 제 계매가 예수 믿기 때문에 만나 가지고 ‘그 집에 뭐 있노? 개를 키우나?’ ‘개 안 키웁니다.' `그러면 뭐 키우노? 짐승 키우는 거 없나?' ‘양을 아마 키웁니다.’ `양을 키워? 그 양을 그러면 내가 사올 수 없을까? 그 돈을 얼마든지 달라 하는 대로 줄 터이니 양을 살 수 없을까?’ 이라니까 그뭐 아마 나를 말하면서 ‘산다 하면은 아마 그 사람들이 팔 겁니다.’ 그래 내 마음에 또 아마 암만해도 내가 산다 하면, 나는 모르는 사람이지요.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산다 하면 그 사람들은 팔아 줄 거다.’ 이렇게 또 믿어진다 그말이오. 어짜든지 그 사람들 하는 일은 그만 모든 것이 완전이라 이래 보이고, 완전이라 사랑이라 이렇게 보여져.

‘그래 그러면 가서 양을 그걸 좀 사다 줄래?’ 이라니까 사다 준다 해. 가니까 그만 그래 가지고 가라 하더래. 그 가져가라 하는데 그걸 값을 말하니 값을 안 받을라 하고 가지고 가라 한다 해서 그거 나는 또 값을 주고 보내고 보내고 자꾸 보내고 보내고 하다가 기어코는 나중에 가 주기는 줬습니다. 줬는데 내가 줄라 하는 거는 많이 줄라 하고 그쪽에는 조금만 이래 부르고, 그것도 그래. 이러니까 모두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언행심사 하는 것이 내게 크게 감동이 돼졌고, 또 첫날 가 가지고서 제일 처음에 나갔는데 마음에 조급해서 견디지 못하겠어.

‘아무래도 이거 뭐 일은 나기는 나는데 오늘,’ 그때 안 믿어도 그래요. ‘오늘 내가 생명이 떠날지 내일 떠날지 모르는데 이거 오늘 안 믿고 만일 오늘 내가 생명 떠나면 이거 헛일 아니가?’ 뭐 조급해서 못 견뎌요. 그래 나는 사건이 많아 가지고 못 가고 첫주일을 제 아내를 ‘아무리 바빠도 오늘은 가야 된다. 오늘 안 가면 큰 일 난다.’ 이래 가지고 보내고, 인제 두번째 그다음 주일은 내가 갔었는데 가니까 사람 한 사오십 명이 앉았어요.

사오십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내가 가니까 그 사람들은 전부 천사들이고 그는 완전자들이고 나는 죄인이라 뭐 죄인이라 도무지 거기서 머리를 들지 못하겠어. 어떻게 뭐 부끄럽고 겁나고 참 내가 볼 때에 천해 보이는지 못견뎌서 그만 꼬구려 가지고 그저 땅을, 땅에 코가 대이구로 꼬구려 가지고는 들어보지를 못했어요. 들어보지 못하고 그렇게 숙여 가지고서 이랬는데, 그날 창세기 1장 설교해요. 그 어른이 설교를 그렇게 능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는 그말에 그만 나는 그만 꼬구라져 버렸어.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있구나’ 우리는 그때 그말 못 들었어요.

이제까지 그때까지 뭐 세상에 돌아다니기는 많이 돌아다녔지마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하는 천지를 창조한 분이 있다는 걸 못 들었다 말이오. 처음으로 듣고 난 다음에 어떻게 뭐 마음에 놀래지고 ‘과연 이렇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창조한 분이 있으면 안심하고 살 수 있다. 그분이 창조했으니까 그분은 능하다.

그분을 찾아야 되겠다. 그분을 찾아서 그분에게 모든 것이 다 달려 있다.’ 그날 그라고 나서 예배를 마치니까 장로님이 어떻게 알았든지 저 온 줄 알고 붙들고 못 가구로 해서 거게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점심을 해서 주는데 또 밥도 평생에 그렇츰 맛있는 밥은 또 못 먹어 봤어요. 또 반찬도 그렇츰 맛있는 반찬 못 먹어 봤고 뭐 별거는 아닌데 어짜든지 그만 예수 믿는 거게 속한 것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높이 봐서, 좁은 길로 가라 하니까 아, 눈물을 흘리면서 ‘이 손 길로는 손 길은 위험성이 없고 넓은 길은 차가 다니니까 위험스럽고 이렇게 우리에게 바르게 옳게 참되게 지도하는 이 말씀이 있다.’ 그래 가지고 뭐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았대요. 이거 모양으로 이렇게 돼져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보면 벌써 그게 세상에 가면은 다른 사람한테 저 꼼뱅이, 꼼짝도 못하고 제일 말단에 이를 그 천물이 교회 오면은 그만 막 이렇습니다.

교회 오면 이래 가지고서 교회 오면 아예 이거는 내가 왕이다. 왜? 오니까 모든 사람 친절하고 다 이래 주먹을 내고 막 ‘엉’ 해도 막 예예 이래 쌓으니까 이렇게 여기는 왕노릇 할 수 있겠다 이라는 인간 있고, 오면은 교회 안에서 꼼짝도 못 하고 요래 가지고 옹그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잘 믿을 사람이요 하나님의 그 은혜가 그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데서는 말도 못 하는 게 교회 와서는 큰소리 하고 에헴 하고서 어른인체 하는 그거는 미련하고 어두워서 참 크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고 죄도 모르는 사람이고 죄를 안 범할라 하는 의라 하는 의도 모르는 사람이고 그거는 완전히 짐승같은 그런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여기 지금 여러분들이 와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그럴 거라, 아마. 그 경험이 그런 경험 없는지? 어릴 때부터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안할 건데 중간에 믿는 사람은 다 그럴 거야. ○○○권사님 몇 살 먹어서 믿었어요? 일곱 살? 일곱 살 먹어 믿었으니까 그때는 뭐 그래. 참 늦게 믿은 사람은 그 좀 맛을 봤을 거라.

늦게 믿은 사람 누구 여기 더러 있는가? 서부교회서 그런 꼴 봤어요. 서부교회 오니까 그렇던가? 저 지금 ○○대학 총장, 저 뒤에 와서 제일 못난 사람이 그 사람이오. 오면은 머리 못 듭니다. 요래 가지고 앉았어요, 요래 가지고 요래 가지고. 그분이 서울법대 대학원 원장으로 내치 지내다가 정년퇴직이 돼서 나왔고 정년퇴직 해도 사립에서는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대학에 하도 청해 쌓아서 지금 총장으로 와 있어.

이런데 그만 오면 오는 그 시간부터 그만 감옥이라. 오그라져 가지고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꼬구라져 가지고 머리 한번도 못 들고 한번도 눈 뜨는 걸 못 봤습니다. 요래 가지고 오그려 가지고서 만날 요래 가지고 뭐 요래 책 내 가지고 요래 쓰고 보면 어데 저런 바보 같은 영감이 하나 와 있는가 이래 볼 겁니다.

그분이 법으로서는 우리 나라에 제일 먼저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모두 물어서 들어 보면 그래.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하나님 말씀 들을 때에 어떤 사람은 자꾸, 그러니까 사는 거라. 목사가 설교, 어떤 목사는 설교한다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지마는 어짜든지 영감이 가서 거석하니까 자기의 행위에 유익하도록 자기 자체에 유익하도록 자꾸 이 회개해서 고쳐서 바로 자꾸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이 방향으로만 자꾸 감동돼 나가니까 아주 뭐 허무한 설교해도 그 사람이 크게 변화를 받고 이렇게 성신의 감화 없는 사람은 어떤 높은 설교해도 그 사람에게 아무 자극이나 감동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그렇게 시시하게 들려지는 그것이 저주 중에 큰 저주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참 처음에 아무리 존귀히 듣는다 할지라도 이 말씀만치 압니까? 이 말씀은 모든 존재보다 탁월한 가치와 권위와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더 제일 효력 있는 보배를 주는 것이 이 복음이다. 이렇게 이 깨달아지는 게 정상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제가 이 세상에 테레비는 봐도 열두시까지 봐도 눈이 감기지 안하고 성경은 볼라 하면 잠이 오고 또 하나님 말씀은 들으면 벌써 요새는 뭐 설교가 짜릅니다. 짤라서 길게 할라 해도 길게 할 힘도 없고 또 길게 해 줄 그런 필요성도 느끼지 안하고 해서 많이 해 봐야 찍해야 한 시간 합니다.

제가 처음에 여기 올 때는 그래도 한 아마 한 두 시간 했습니까? 두 시간 같은 건 암만 짧아도 두 시간은 했습니다. 또 제가 처음에 거석할 때에는 제일 많이 한 설교는 언제 설교했느냐 하면 봉산 거기서 집회할 때에 저녁에 일곱시에 시작해 가지고서 아침에 여덟시에 끝마쳤어요. 아침에 여덟시에 설교 끝냈습니다. 그것이 진짜요, 진짜는. 그래야 됩니다.

이 천주교가 전부 교회를 다 삼켜서 멸망시켰을 때에 그때에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고 또 칼빈이 교리 개혁을 하고 할 때 그때는 설교를 하면은 언제든지 세 시간 이내 하는 것은 짧은 설교고 못쓸 설교고 다 네 시간 이상 했다 말이오. 네 시간 이상 하면은 모두 졸지 않습니까? 조는 사람도 있다 말이오. 있으니까 저 기단하게, 사람이 그때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이만침도 안 모여요. 그뭐 몇십 명이지, 처음에. 기단한 장대에다 달구터러기, 달구깃를 이래 끄트머리 달아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졸면은 그걸 가지고 낯을 이래 쓸어요. 낯을 쓸면 잠이 깨고 그라면서 자꾸 설교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개혁이 되고 됐는데, 요새는 말이지 우리가 말하기를 ‘미국에 믿는 교인들은 찬송은 좋아하고 뭐 세상 그런 건 좋아하지만 설교는 그저 사십 분 이상 하면은 싫어한다’ 해서 우리는 그때 놀래고서 ‘그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을까?’ 이랬는데 한국도 그게 왔습니다. 사십 분 설교도 길대요, 사십 분 설교도 길어.

이러니까 이거 내게 큰 하나 좀 시집살이가 생겼어. 중간반하고 중간반 일이부하고 이거 장년반하고 같이 예배를 보고 설교하니까 ‘이것들은 더군다나 더 많이 해 봤자 이십 분밖에는 안 하는 것이니 사십 분만 해도 이거 지지리를 틀고 주리를 틀고 이랄 터인데 이거 문제 아니가?’ 이래서 ‘어떻게 하면 사십 분 설교 이내를 할까?’ 이래서, 어제 오전에 몇 분이나 했어요? 삼십오 분 했어? 오후에는? 오후에는 오십 분 했어. 그만 처음에 주의하니까 삼십 분 하고 그다음에는 오십 분 했다 그거요.

이런데, 이게 뭐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들으니 또 좋고 읽으니 또 좋고 생각하니 좋고 이래서 이 말씀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그만, 다 그런 모양이라.

오종덕 목사님도 저한테 그렇게 말하데요. 성경 말씀을 보고 이래 기도하든지 말씀을 보고 이라니까 그만 또 식사 됐다고 자꾸 이래 조우니까 그만 이래 그걸 못 하고 또 방해를 받고 또 성경 보다가 그라고 이래 가지고 사모님이 있을 때는 자꾸 그래서 그랬지마는 없을 때는 그만 그래 가지고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 그만 하루고 이틀이고 그만 뭐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자꾸 이래 성경 봐. 그러니까 그분이 고신 진영에서 성경을 제일 잘 알았습니다. 또 그이의 신앙 생활이 제일 권위 있었습니다. 그래도 환난에는, 신사참배 하지는 안했습니다. 안 해도 이리 저리 망명해서 다녀서 신사참배를 피해서 다녀 그렇지 신사참배 하지는 안했지, 신사참배 싸워서 이기지는 안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꾸 이리 싸워서 이기지는 못했다 그말이오.

이렇게 모두 다 그런데 저도 성경을 그래 읽고 싶을 때 읽어야 되지 아무 때나 읽어지는 것 아니라. 성경을 읽으니까 자꾸 앉아서 읽으니 방석을 펴놓고 앉았지마는 그저 뭐 자꾸 성경만 읽고 읽고 이라니까 나중에는 이 앉을뺑이 그만 터져 버렸어. 앉을뺑이 이래 가지고 앉아 자꾸 이러니까 내가 젊을 때지마는 아마 뼈가지하고 살하고 뭐 이래 붙었던 모양이라. 이래 놓으니까 구멍이 나 버렸어.

구멍이 나서 궁둥이가 터졌어. 터졌는데 또 터져도 또 그래 앉아 또 성경 봅니다.

이라면 그러다가 나중에는 터졌다가 또 낫고 터졌다가 낫고 이래 가지고서 나중에는 그래 앉았어도 괜찮을 만치 그랬습니다. 다 모두 이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 이렇게 좋고 기쁜데 오늘에는 이거 예수 믿는 사람은 많은데 안 그런 거 보면 그런 거 잡탱이 아닌가 이렇게 싶어요.

성경 보면 위로가 돼. “천국은 마치 보화를 만나, 오다 가다 보화를 만난 사람이 보화 만나고 나니까 보화를 보니까 어떻게 좋았는지 있는 걸 다 팔아 가지고서 보화 있는 밭을 삼과 같다.” 이거는 오다 가다가 저절로 만나 버렸고 또 어떤 자는 보니까 “진주를 구하는 자가 찾아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다가 진주를 만나니까 있는 걸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산 거와 같다” 이러니까 애써서 구하는 사람도 있고 이거는 애써 구하지도 안하는데 오다 가다 보니까 만나는 그런 것도 있어.

이러니까 이 도를 들어서 열심히 연구해 가지고서 이렇게 도를 찾아서 만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듣기가 싫어서 ‘에이구, 사십 분 설교하면 될 터인데 너무 길어서 안 됐다. 뭐 종은 치는 것은 또 종소리 났지. 종 치는 건 설교 짧게 할라고 종을 떡 만들어 놓고 쳐놓고 벌써 인제 얼마나 변해졌든지 종 치면 종소리 나면은 이제 반 됐다는 신호가 돼 버리고 말았다’고. 이렇게 망령 부리는 게 그것도 말이요, 그건 또 그래 가지고 자리는 거라.

내가 어떤 데 가니까 그 말하기를, 그 위로해 주기를 ‘콩지름은 물을 주면은 물이 안 내려가고 괴여 있으면 콩지름 썩습니다. 콩지름을 주면 물이 쭉 내려가고 다 내려가고 자꾸 그래도 그래 가지고 자랍니다. 하나님말씀 들으면 다 잊어버려 버리고 또 들으면 다 잊어버리고 그래도 그래 가지고 자랍니다.’ 이제 그런 종류도 있는 모양이야. 이렇지마는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듣고 자기가 강직하고 이래야 되지 하나님 말씀을 자꾸 그래 그것만 좋아하고 그래 하는 사람은 별 능력이 없어. 안 돼요.

이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어짜든지, 처음에 성경 보면은 졸음 옵니다. 졸음 오면 그만 그대로 않아 자꾸 졸다 보면은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헛일해 버려. 그만 졸음 올라 하거든 얼른 일어서 버리요. 일어서 가지고서 바깥에 훅 한번 돌아 가지고서 또 잠을 깨 가지고 또 성경 보고, 또 졸리니까 또 가서 나가 가지고 또 그라고 또 성경 보고 이래 가지고서 세 번만 나가서 애써서 깨 가지고는 그다음에 성경 보면은 아무든지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암만 봐도 졸음에게 종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오늘 아침에 ‘주의 주실 화평’ 311장 찬송했는데 자기 모든 것을 산 제사로 드린 다음이라야 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그거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콩지름 예수꾼도 자라기는 자라지마는 그런 사람 될라고 하지 말고 어짜든지 진주를 구하다가 진주 만나는 그 사람이 될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자, 콩지름 신앙 될 사람 손 들어 봐요. 하나도 없네요.

그라고 억지로 송아지 믿음이 있어. 송아지 믿음 그거는 홀갱이를 해 가지고 억지로 끌어다가 이래 놓으면 자꾸 끌어다가 놔. 그거는 송아지 믿음이라, 송아지 믿음. 그런 믿음도 있어서 자라기는 자랍니다마는 우리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것을 함께 하라” 했어. 이러니까 그 가르치는 자 애터지게 가르치면 저도 애터지게 받아 가지고 이래 같이 믿어야 될 건데 가르치는 것만 암만 말해도 오늘 아침에 보니까 이 남반에 이렇게 안 왔어. 남반이 저까지 오면은, 오늘같이 오면은 한 구백 명 돼, 오늘 아침에는 구백 명 안 돼요. 구백 명이 안 돼요. 이렇게 말을 해도 안 되니.

○○○교회는 제가 주보를 보니까 ○○○교회는 새벽기도에 얼마나 나오느냐 하면은 보통 천백구십 명, 천백팔십 명 그거는 언제든지 주보 누가 갖다 주기를 넉 장을 갖다 줘. 넉 장 다 보니까 새벽기도에는 천 얼마라. 천백 얼마라. 그 사람들 잘 믿어요. 그라고 변동을 보니까 요 주일과 다음 주일과 그 변동이 그것이 그저 한 이삼십 명, 이십 명, 삼십 명까지 안 가. 한 이십 명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렇지 그렇게 많이 변동이 없어. 아주 잘 믿는 교회라.

이런데 ○○○교회 잘 믿는다 한다고 또 반대가 돼 가지고서 야단을 되는 사람도 있는데 그 교회 잘 믿어요. 나는 그 교회 총동원이라고 한 달 동안은 열심을 내 가지고 뭐 장로도 얼마, 몇 명 데리고 오라, 몇 군데 해라 이래 가지고 그걸 실행을 했대요. 이러니까 그 열심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내가 그것을 처음에 좀 반대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그 방편이 세상 사람이 볼 때에 좀 덕스럽지 안하고 조금 너무 어리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에게 혹 조롱받지 않느냐 그렇게 해서 내가 그것을 강단에서 그 식이 틀렸다 내가 이랬습니다. 틀렸다 하고 내가 뒤에 또 찬성한 것은 열심을 찬성했습니다.

이랬는데 과연 그 식이 조금 틀려서 야비한 점이 돼서 ○○○교회서는 사람들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조금 뭣한 사람들은 ‘이거 뭐 예수 믿는 걸 진리로 하는 게 아니라 이거 수단 방법 가지고 하는 것이다’ 이래 가지고서 오해를 많이 받아 그래. 오해 받았지만 안 되니까 그렇게라도 해 가지고 전도해 가지고 예수 믿을라고 하는 것인데 이 망령된 것들은 그라니까 ‘에이 여기 안 있겠다. 딴 교회 갈란다.’ 하는 그거는 또, 좋은 것만 취하지 ‘이 열심히 이래 하니까 우리가 열심히 참 전도해야 되겠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야만이나 지혜 있는 사람이나 헬라인에게나 모든 이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하는 것은 무슨 빚졌다 말이요? 바울이 돈 취해서 돈 빚이 졌다 말이요 무슨 빚졌다 말입니까? 이 복음을 들으면은 그 사람이 멸망에서 구원 얻고, 불행한 사람이 행복스러워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모든 악인이 의인되고 이렇게 되는 이 복음을 취해 가지고 전해만 주면 될 터인데 전해 주지 안했기 때문에 그래 지금 자기가 그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 못한 빚진 걸 가리켜서 “나는 빚진 자로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모두 자꾸 공통적으로 말 들으니까 그런 짓 하지 말고, 그런 것으로 뭐 총동원 말을 전부 다 써요. 총동원 그 방편을 다 쓰는데 우리 진영에도 그거 쓴 사람 있어. 쓰는 사람 있는데 쓰는 교회는 다 교회가 안 돼. 그거 쓴 교회는 다 손해를 봐요. 그저 꾸준히 기도하고 매일 자기가 꼭 계속 전도하고 이라는 교회들이 돼지지 그런 별식을 쓰는 교회들은 잘 안 돼요.

그러나 모두 다 공동 고백이 다 그렇습니다. ‘요새는 이상한 때다. 전도하면 사람들이 다 기다리고 있다가서 듣는 것처럼 다 듣는다.’ 그것이 공통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것 같아요.

이러니까, 우리가 어짜든지 다른 사람의 생명이 되는 복음을 가지고서 전해 주면 될 터인데 내가 전해 주지 않아서, 전해 주기 싫고 다른 일에 분주해서 전하지 못하고 또 부끄러워서 전해 주지 못해. 이 복음을 부끄러워서 전하지 못해요. 이 전도하는 게 부끄러워서 전도를 못 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모든 것보다 탁월한 가치와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모든 것보다도 우리에게 제일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복음이지마는 그 표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그 말을 하나님이기 때문에 요 말을 썼지 하나님 아니면 요 말을 요렇게 묘한 말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짜든지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을 힘쓰고 복음을 믿어야 됩니다.

믿음으로만 구원 얻습니다.

자꾸 그래요. 자, 그러면 저게서 지금 화살이 옵니다. 화살이 오는데 이 화살을 자, 이래 그러면 화살이 오는데 지금 제일 처음에 화살 받습니다. 여게 화살을 끼면은, 화살 쏘고 또 그다음에 방어하는 방어가 있고 이라면은 이 화살이 와서 쏠 때에 제일 처음의 것이 많이 뚫힙니까 둘째 것이 많이 뚫힙니까? 어떤 게 많이 뚫힙니까? 처음의 것이 많이, 자, 그러면 처음에 맞고 두번째 맞고 세번째 맞고 화살을 이래 탁 쏘면은 이 쏴 가지고 이놈이 뚫고 들어가서 또 요다음에 뚫고 요다음에 뚫고 들어가고 그라면은 이 처음의 것이 많이 상합니까 둘째 것이 많이 상합니까 셋째 것이 많이 상합니까? 어떤 게 많이 상합니까? 처음의 것이 제일 많이 상하지요. 처음의 것이 제일 많이 상합니다. 처음의 것이 제일 많이 상하지 않소? 여러분들.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내것 삼았습니다. 내것 삼았습니다. 그 밖에는 뭐입니까? 그 밖에는 뭐입니까? 그 밖에는 뭐이요? 나는, 나는 주님의 것 됐습니다. 알겠습니까? 나는 주님의 것 됐습니다. 주님의 것 됐고 그다음에는 이제는 주님의 것이 삽니다. 주님의 것이 삽니다.

이제 마귀란 놈이 화살을 가지고 쏩니다. 마귀란 놈이 화살을 가지고서 우리를 미혹을, 미혹의 화살을 가지고, 꼬우는 화살을 가지고, 협박의 화살을 가지고, 범죄케 하는 온갖 화살을 가지고 우리에게 쏩니다. 우리에게 쏘는데 제일 처음에 쏠 때 제일 처음에 맞는 것은 뭐이 맞습니까? 제일 처음에 뭣이 맞습니까? 우리를 범죄케 할라고 마귀란 놈이 쏠 때에, 범죄케 하는 화살 미혹의 화살 가지고 쏠 때에 제일 처음에 그 화살에게 맞는 것이 뭣이 맞습니까? 내가 한번 물어 볼까? 자, ○○○집사님이 대답은 잘 해요, 요새 보니까. ○○○집사님 대답해 봐. 뭐이 제일 먼저 맞아? 주님의 것. 그래. 또 ○○○목사님은? ○○○집사님은? 다 모를 거 같애, 내가 물어서. 그래 덩더꿍이같이 복음 믿으면 사람 덩더꿍이 사람 됩니다.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밤송이같이 까끌까끌해야 됩니다.

○○○선생? 주님의 것,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 또 보자. 어데 있노 보자.

○○○선생 어데 있노? 주님의 것이 사는 것, 주님의 것이 사는 것. 주님의 것으로가 아니고 인제 그것도 생각해서 ‘주님의 것이 사는 것’ 자, 주님의 것이 사는 것, 또 주님의 것이 사는 것, 주님의 것으로 뭐라 하노? 주님의 것, 주님의 것으로라 했나 뭐라 했노? 저게 ○집사는 뭐라 했노? ‘주님의 것’ 했나? ‘주님의 것’ 했지. 주님의 것이 사는 것, 또 주님의 것, 또 그다음에 뭐 하나 또 물어 봤으면 좋겠는데, ○○○선생은 뭐라 했노?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라 했나? 예, 사는 것.

자, 그라면 제일 처음에 마귀가 유혹을 해서 우리에게 첫방으로 미혹의 화살을 쏘는 것은 제일 처음에는 뭣이 맞습니까? 주님의 것이 사는 것이 그것이 맞습니까? 그게 맞는다는, 그게 처음에 탁 부딪혀 맞는다고 하는 답이 있고, 또 주님의 것이 먼저 맞는다고 그렇게 하는 답이 있고, 또 일곱 가지 대속의 것이 내것 된 대속의 것이 맞는다는 그거 있고, 또 내가 직접 마귀와 죄로 더불어 부딪히는 그게 있고, 내가 마귀를 부딪히고 내가 죄를 부딪히는 그거 있고 이런 순서를 여러분들이 말할 때에 이거는 하나의 비유도 되고 실상도 되는데 이 순서가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자, 답이 이제 내가 이 마귀하고 죄하고, 내가 죄 안 지을라고 죄하고 마귀하고 나하고 부딪혀서 싸우는 이것이 많이 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대항하는 게 많이 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 대항하는 것이 많이 상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것이 사는 것으로, 예수님의 것이 사는 이 삶이 이것을 대해 가지고서 막는 것이 많이 상하겠습니까? 내게 대해서는, 내게 대해서는 뭐이 많이 상하겠습니까? 어떤 것이? 이거 비유인데 이 방어선이, 방어선이 일방어선, 내가 죄로 더불어서 싸워서 이길라 하는 것은 일방어선이고, 그다음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그걸 대항하는 것은 이방어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셋째로 예수님의 것이 된 것은 삼방어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것이 사는 것으로서 대항하는 것은 사방어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갈라디아서에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을라 하는 자는 그런 자는 절대 얻지 못한다” 하는 것을 말해 놨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이행하면 살지마는 율법 이행자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다 죄 가운데 가둬 버렸다” 이랬어. 이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절대 이행하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이 방어선은 내기 때문에 내게는 이 감감하이 멉니다. 나는 안에 들어앉았소. 나는 안에 들어앉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속 안에 들어앉는 나에게는 죄가 상관이 없어. 그다음에 예수님의 것이 된 자에게는 더군다나 더 자기에게는 거리가 멀어. 또 예수님의 것이 사는, 예수님의 것이 사는 거게는 거리가 더 멀어.

이러니까 이것을 가리켜서 “죄와 허물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로마서 7장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원치 안하는 것을 원하는, 의는 행하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죄를 범하는도다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요” 뭐라 했습니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가 행하는 것이라”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딴것이 행했어. 나와는 거리가 멀다 말이오. 거리가 먼 이것은 오늘 아침에 비유하는 거와 같은 요런 순서를 말해 쌓았기 때문에 요것을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요 주석에 요것을 바로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자기가 입고 있는 것에는 죄의 방어선에서 제일 강한 방어선이기 때문에 그라고 나서 내가 주님의 것 됐으면 주님의 것이 죄짓거나 말거나 그렇지. 주님의 것 됐는데, 주님의 것 됐는데 주님의 것이 살다가 범죄한 것은, 주님의 것이 사는 것에 범죄하는 것은 그게 와서 때묻은 것이지.

예를 들면은 이 옥을, 옥을 똥 속에 넣었다가 진흙 속에 넣었다가 아무데 돌아다녀도 옥은 그런 것이 옥에는 그런 게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진흙 속에 들어가서 막 진흙 더배기가 돼도 물에 넣어 살랑살랑 씻어 버리면은 옥 그대로지 옥에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것이 된 그 속에는 죄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게 뭐입니까? 우리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요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요렇게 암만 말해도 안 듣는다 그거요.

예수님의 것이 된 그것이 범죄해도 그거는 죄가 와서 범했고 죄가 와서 제 장난쳤지 그 속에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들어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은 내것, 나는 주님의 것, 주님의 것이니 자,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 죄를 대항하는 데에 강합니까 나는 주님의 것, 나는 주님의 것 돼 가지고서, 주님의 것 돼 가지고서 지금 내가 주님의 것 된 내가 사는 것. 주님의 것 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것 된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것 자체가 사는 것. 자꾸 이거 떼 버리라 말이오.

나는 예수님의 대속은 내것, 그러면 내 모가치는 딱 챙겨요. 내 모가치는 챙겨 가지고서 나는 따로 딱 요래 되고 이거는 주님의 것으로 던져버렸어. 주님의 것으로 던져버려. 나와 상관 없어. 이거는 주님의 것이야. 이러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이제 이거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 내것은 뭐인데? 주님의 일곱 가지 대속만 내것 됐습니다.

주님의 것 돼 버렸어.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것 된 거게서 이제는 주님의 것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의 것이 사는 것으로 산다 그말이오.

이렇게 자꾸 방어선을 방어하고 방어해 가지고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이오. 그럴 때에 마귀는 우리에게 와 가지고서 해하지를 못합니다. 이 순서가 지나가면 마귀는 호령치면 도망쳐 버려야 되지 있을 수가 없어. 왜? 저를 죽이고 한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꼭 놓지 말고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거 안 지키면 앞으로 우리가 큰 환난 당하고 우리의 이 쌓은 탑이 마지막에 다 무너지고 맙니다. 이 삼십 분 기도 없으면은 이 탑에 힘이 없어서 마지막에 환난 오면 다 넘어가 버리고 말아요.

오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입니다. 오늘은 지금 연말 인제, 오늘이 며칠입니까? 이십이일? 이십이일입니까? 이제 우리 설이 곧 닥쳤습니다. 그래 성탄을 설로 새는 것 좋습니다. 성탄에 우리 떡국 끓여 먹는데 그 설에 떡국 끓이지 않습니까? 설이니까 떡국도 끓이고 아이들도, 여기 와서는 뭐 그 재미 그래 없어. 그전에 시골에 있을 때는 탄일 때는 전부 옷을 그때는 다 떠나다가, 지금으로부터 한 오십여 년 전이니까 그때 뭐 베를 짜고 떠다가 이래 가지고서 모두 곡개를 만들어 가지고 전부 탄일날 입힙니다. 이러니까 거게는 탄일이 설이라 하는 것을 제가 거창에 있을 때는 그리 인식이 됐는데 그만 제가 오고 나니까 그것도 자꾸 속화가 돼지고 나도 또 여기 부산 와 놓으니까 그만 혼자 그라지 뭐 속화가 돼 버렸어. 이 성탄을 설로 새는 것이 이것이 좀 괜찮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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