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가지 심판
선지자선교회

1980. 1. 27. 주일오전

 

본문:요한복음 12: 44-50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자는 나를 믿는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 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이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로노라 하시니라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과 또 부장 선생님들 또 중간반 반사 선생님들과 부장 선생님들 장년반 예배에서 증거한 말씀을 다시 간추려 가지고 공과를 삼은 것이니 장년반 예배 때에 잘 들어서 그 진리를 체계 있게 파악을 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저 지낸 주에 가르치는 것이 허무해서 다시 한 주일 더 설교를 해서 그때는 잘 가르쳤는데 또 오늘 가르치는 걸보니까 두미를 모릅니다. 머리가 뭐인지 꼬리가 뭐인지 어는 것이 크고 작은 것인지를 모르고 잎사귀가 둥치보담 크고 둥치는 잎사귀 보담은 작으니까 그 아들이 학생들이 듣는 데에 부담이 많겠고 또 그 모든 것을 삭여서 이해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주일에는 너무 가르치는 걸 보니까 () 이층 일층 지하실 모두 준비가 너무 부족합니다. 너무 게을 하요. 그렇게 말씀해놓은 그것이야 뭐 황하게 회기라가 둘리도록 새김질할 수 있는데 다른데다가 다 기울여 버리고 찌끼 그거 가지고서 그저 오다 가다가 지내가다가 그기야 뭐 내가 전공하는 뭐 다 비교할 때야 가치가 아주 사소한 것이기 때문에 오면 가면 남은 시간 총명 가지고도 되리라 이렇게 생각하는 그런 못쓸 교만이 들어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배운 지식 모든 것보다 이 진리가 여러분들을 살립니다. 평가부터 바로 해야 돼요. 나도 암만 들을라 해도 간추려서 뭣이 머리인 지 꼬리인지 큰지 작은지 모르니까 그 학생들이 어떻게 들으며 반사들이 어떻게 이해를 하겠읍니까? 좀 더 성심성의를 기울여서 해야 겠읍니다. 주일학교 학생이 한 반에 삼천오백명 삼천여명 되니까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아주 큰 교회들입니다.

그런 교회를 책임지고 직명은 집사지마는 앞으로는 양성원 졸업하면은 목사 장립을 시켜 가지고서 목사님으로서 주일하교 책임자들을 새울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중한 직책인 것을 알고 해야 되지 모든데 다 쓰고 남은 찌꺼리기 성심성의 총명 지식 그거 가지고서 뭘해 보겠다고서 그렇게 하고 있읍니까? 하나도 결말을 짓지 않고는 지내가는 것은 없다고 입으로 가르치면서 너무 죽도록 충성이라는 그 말씀에 거리가 멉니다. 그 지낸 주간은 주일은 잘 가르쳤는데 그때는 두번째 가르치고 나니까 좀 나았읍니다. 오늘 주일은 아주 허무합니다. 은밀히 고요히 말하지 대중 앞에서 또 말을 한다. 여러분들이 그런 어리섞은 해석을 가지지 마십시오 나는 대중 앞에서 합니다 왜? 대중이 알고 주시하는 데에서 그 사람을 살리요 그런 인본주의 인간 체면 보다도 우리에게는 생명 문제가 있읍니다.

 

오늘 이 봉독한 말씀에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을 심판할려고 오지 안했다 구원할려고 왔다 심판은 내가 할 것이 아니고 자기들에게 가르쳐 준 내 말이 마지막날에 너희 인생들을 심판할 것이다 말씀하시고 내가 한 말은 내 단독이 말한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하신 조물주의 말씀이며 전부의 주인공이 되시는 대주재의 말씀이며 모든 것을 홀로 주권하시는 주권자의 말씀이며 모든 것을 창조 하실 때에 목적을 두고 창조하신 그분의 말씀이라는 것을 또 밝혀서 가르쳤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하셨다하는 이 사실을 그 때에 실제로 하셨고 또 말씀하셨고 모세를 통해서 지나간 것을 문서로 기록케 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이창세기 라는 이 성경이 전달돼 왔읍니다. 예수님께서 그때부터 하나님이 물 위에 운행하셨다 하신 그 하나님이 곧 사람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신성이 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도 예수님이 피조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졌었읍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는 말을 듣는 자는 다 구원을 얻으리라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듣고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다 심판에 이르게 한다 이르게 된다 내 말을 듣지 아니할 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끝까지 나는 저희들을 구원하지마는 내가 저희들에게 말해 준 이 말이 마지막에 심판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가 원죄와 본죄로 인해서 어두워져 아무것도 바로 아는 것이 없읍니다 다 이렇게 저렇게 치우치고 삐뚤어져서 잘못 알고 잘못 행하고 잘못 소망하고 평가하는 것을 바로 고쳐서 바로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야고보서 125절에는 보면은 온전할 율법이라 그렇게 말했읍니다.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온전한 율법이라 온전한 율법이라 말씀 했고 또 자유의 율법이라 그렇게 말했읍니다. 자유의 율법이라 온전한 율법이라 말은 신구약 성경 이 말씀은 모든 면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하게 되어 있는 법칙이라. 또 어데서든지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기 위해서 이 진리를 주셨다 하는 것으로 자유의 율법이라 온전케 하는 율법이라 그렇게 말씀했읍니다.

성경은 우리가 금생에 있어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갖추어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책이 아니고 전지 전능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책이기 때문에 빠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 말씀했읍니다. 우리가 알아 필요한 지식은 여기에 다 기록돼 있읍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 전부가 아 이 지식이 종자가 될 때도 있고 강령이 될 때도 있어서 이 지식만 하면 거기에서 거게 소속한 수많은 지식을 연상할 수 있고 또 이어서 자기가 깨달을 수 있도록 영각할 수 있도록 되는 말씀입니다.

첫째에 수많은 영물이 있고 이 우주에도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억억만배도 더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다음으로 모든 피조물 중에 사람이 제일 존귀한 것이라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천군천사도 영원히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판단을 받는다고 했읍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존귀한 것이면서 영원히 없어지지 안하는 영원 불멸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존재요 그 형편과 사정은 심히 빨리 변해지지마는 사람이라는 자체는 영원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 다음 모든 만물의 위가는 이것이 본 지위인데 본 지위 본 지위인데 이 본 지위에서 하나님을 거스린 원죄로 인해서 본 지위에서 타락해서 본 지위를 잊어버린 것이 인생입니다. 이 타락한 여기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피조물의 영장이 되는 본 지위를 대속으로 회복시켜 주셨읍니다.

회복시킨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영육으로 된 사람으로 택한 자들의 영은 하나님과 진리와의 결합된 이 생명으로 영생으로 가지게 되었고 그 영의 소유가 되어지는 마음과 고기덩어리로 된 성경에 육체라고 말하는 이 육체는 법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었지마는 실질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지 못하고 삐뚤어진 속에 들어있는 것이 성도들의 육체입니다.

불택자가 누군지 우리는 모르나 불택자는 영육이 이 타락한 중에서 다시는 회복이 없읍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택한 자에게 한해서 대속을 했지 전 인류를 대표해서 대속 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한적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받아서 영은 온전한 율법을 갖추었고 자유하는 이 율법을 자기는 주관 자율이 되어진 것이 중생된 영입니다. 하나님과 진리로 인하여 움직이는 자 하나님과 진리의 힘으로 영의 힘을 삼아 이것으로 생기를 삼아 이것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중생된 영의 자율은 곧 하나님의 자율이요 중생된 자의 그 주관은 하나님의 그 주관이 중생된 자의 주관이 되어진 이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된 자의 심신으로 되어있는 이 육은 법적으로는 이렇게 구속을 입지 못했는고로 신구약 성경 말씀을 주시는 것은 아직 구속받지 못한 육의 구원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가리쳐서 행위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건설구원 행위구원 성경에 집을 건축하는 비유로도 했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은과 금과 보석으로 반석위에 모래 위에 이렇게 비유한 것은 우리의 건설구원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다 중생된 영 부활한 몸이 가지마는 그 실력과 영광은 심히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은 곧 행위구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것을 건설구원이라 그 심신의 육이 어떻게 구속을 받았느냐 하는 그것으로서 하늘나라의 영광의 차이는 있는 것입니다.

영은 같지마는 영이 자기에게 소속한 그 심신이라는 육 자기의 기관이라 자기의 지체라 영 자기의 집이라 영의 집이라고 우리 육도 말할 수 있고 영이 소유라고도 육을 말할 수 있고 영의 도구라고도 우리의 육을 말할 수 있읍니다. 영은 같은 영이지마는 그 소유가 처소가 또 그의 실력이 기관이 다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구원의 영광의 차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우리에게 오셔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어짜든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다 그 말은 해방을 받는다 하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다.

심판을 받는다 그 말은 결박을 당한다 구속을 당한다 마치 죄인이 그 수갑을 질려서 볼끈 매가지고 꼼짝 못하게 자유하지 못하게 감방에 감금되는 것처럼 이것을 가리켜서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아무데도 거리낌이 없이 아무것에도 재재 받지 안하고 아무 데에도 결박을 제재를 강제를 억제를 당하지 아니하고 어데서든지 자유할 수 있고 또 자유하는 것을 모든 것이 환영할 수 있는 이런 존귀한 자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 하셨고 대속 받은 자들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할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원 불멸의 존재로서 세상과 죽음 넘에 무궁이라고 이 토막을 가진 것이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라는 죽은 이편에 한 토막 또 죽음 저편에 영원무궁의 한 토막 이 양세계를 접하고 살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무궁을 준비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 이대로 무궁 세계에 옮겨져가는 것이 아니고 외형은 그대로 두고 그이의 행위만 옮겨져 가가지고 무궁 세계에 결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은 무궁을 좌우하는 준비의 기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돼고 준비의 기간에서 어떤 것을 접해 가지고 좋은 것을 접하고 또 흉한 것을 접하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그 존영한 것을 접하고 모든 사람이 피할려고 하는 참 불행을 접했다 할지라도 접촉한 그것은 세상에 다 두고 갑니다. 좋은 것도 두고 가고 (높은 것도 두고 가고) 나쁜것도 두고 가고 다 두고 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접촉할 때에 내 행위가 어떻게 됐나 하는 그것은 하나도 두고 가지 못하고 다 가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라는 이 세 상은 영원을 결정지우는 중요한 현제인데 그 세상은 나쁜 것 아닙니다. 기독자들이 세상을 나쁘다는 것은 아니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세상이 나쁘다고 누가 말했으면 세상은 하늘 나라보다 나쁘다 그렇게 말하는 말이지 세상을 나쁘다는 것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한 토막입니다. 영원무궁을 결정지우는 한 토막이요

 

이런데 이 세상의 짧은 생활에서 우리가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도 있고 영원한 속박을 이 구속 묶동여 매는 거이 붙들어 매는 이 죄인을 포승줄로 매는 것처럼 이렇게 속박을 당하는 것을 마련할 수도 있고 자유를 마련할 수 있고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세상만 보고 그저 자기 욕심대로 자기 취미대로 얼렁 뚱땅 이렇게 살고 지나가면 또 잊어버리고 하나가 그만인줄알지마는 한 현실 한실현 현실에서 사는 그것은 자기의 영원한 자유가 마련되었던지 영원한 속박이 마련되었든지 둘 중에 하나씩이 마련되고 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령의 사람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전심전력을 기울려서 자유하는 준비가 되도록 속박을 피할라고 애를 썼지마는너무 힘이 들어서 마지막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전심전력을 기울려도 또 수갑줄 포승줄 (죄인을 죄인을 형사들이 묵어 가지고 가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또 포승줄에 또 걸렸다 이라면서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가 어떻게 등을 눌르고 마음을 누르든지 세상에도 호의호식 뭐 빈부귀천 그것은 자기 마음에 그렇게 눌지지 안하고 이 현실에서 영원 무궁의 자유가 마련되느냐 영원무궁 세계에서 속박이 마련되느냐 하는 여기에 마음이 눌리고 정신이 눌려서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눌려있다 그렇게 말을 했읍니다. 이렇게 영원한 문제를 두고 우리를 이 속박에서 해방을 시켜서 자유케 할려고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말씀에는 어떤 심판을 말하며 어떤 자유를 말하고 있는가 간추려서 말하면 몇 가지로 말할 수가 있읍니다. 외부적으로 말을 하며 첫째는 인간 생활의 이 보편성 일반성 보편성 일반성 이 선이 있읍니다. 보편성 일반성이라는 이 심판이 있읍니다. 이 보편성 일반 성이라고 하는 이 심판에 걸리지 아니하고 이것은 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평강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이 심판에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하도록 할려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일반 성 자유성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이 일반적으로 일반적으로 사는데 보통으로 사는 거기에 거리끼리 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 그 사람은 뭐 그 사람 생활은 다 일반생활에 아무런 꺼리끼지 않는다 보편생활에 걸리지 않하는 그런데서 주의해서 그저 보통사람으로 일반사람으로 사는 이 생활 그 일반성 보통 보편성이라고 하는 이 제도 이 윤곽 이 인간 집단의 사회 여기에 거리끼리 안하도록 살아서 이 그물에 걸리지 안하도 록 하고 이 그물에 걸리지 안하는 자유를 얻도록 하라 그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한 걸음 더 높이 올라가서는 인간의 이목구비 인간의 귀에 거슬리지 안하고 눈에 거슬리지 안하고 입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이렇게 인간 이목구비에 이 심판이라는 이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해서 이런것에게 자유하도록 여기에 아무 거리낌이 없고 이것에 그심판에 정지받지 아니하도록 살아라 하는 것이 이 신구약 성경말씀입니다.

그보다 한 걸음 더 올라가서 사람들이 몇이 단합해 살든지 저 혼자 살든지 간에 인간이 그래도 좀 어짜든지 복되게 평안하게 잘 살아 보겠다고 해서 거게서 하나 규정을 정해 놓은 그것이 인간들이 정한 입법입니다. 인간들의 그 법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법이라는 이 심판이 있으니까 이 법이라는 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인간이 제정해 놓은 어떤 법에도 거리지 아니하는 이 자유하는 사람이 되도록 할려고 이 신구야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살아 이제 말한대로 이 세 가지 심판을 면하는 것이 우리의 신자의 생활이요 거게서 자유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보담 한 걸음 더 좁은 세계에 올라가서 인간들이 말하고 있는 이 도덕이라는 그러면 도덕이라면 있읍니다. 도덕 심판이 있읍니다. 이 도덕 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이 도덕이라고 그물에 걸리지 안하도록 뭐 도덕에 걸린다고 누가 감옥에 갖다 넣겠읍니까 마는서도 그래서 그만큼 자기 세계는 벌써 자유의 세계가 도말되었고 좁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덕의 그물에 걸리지 안하고 여기에서 자유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이보다도 더 이기면 다가 아니라 세상은 말하기를 보편은 이상이라는 것이 여게 있읍니다. 그보다도 그위에 사람이라는 것은 각각 자기의 그 자연 빛이라 하는 것을 가지고 있읍니다. 자기 속에 자기 몸 밖에 무엇보다도 자기 속에 깨끗이라는 한 그 빛 옳은 그 옳다고 하는 빛이 있는데 그것을 소위 말하기를 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양심의 심판이 있으니 양심 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자기 양심에게 자기가 거리끼리 안하도록 양심에게 정죄 받지 안하도록 자기 양심에 자유할 수 있도록 양심이 자기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양심에 자유하는 이 자유를 얻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이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이것이 이제 자연 속한 인간에게 속한 심판인데 이것으로써 영광과 존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영광이 만들어지고 존귀가 만들어집니다.

세상은 이 선 아래에 있읍니다. 그러나 기독자들은 이거로서 다가 아니고 그 위에 또 선이 있으니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의 심판이 있읍니다. 이 진리의 심판이 있어 이 진리에 거리끼리 안하도록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었다하는 이것은 그 태우는 것이 불로 태왔다 그랬읍니다. 그 불은 진리를 말합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것이 그 밑에 다섯가지는 다 구비 해서 인정을 받았지마는 하나님의 뜻이인 진리의 심판에 걸려 가지고 다 절단난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진리의 심판에 거리지 안하고 이 진리에 자유를 하는 이것이 인생에게 있어서 실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힘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힘이요 다른 것은 다 거게 따른 문채 입니다.

뭐 도덕이라든지 법이라든지 인간의 이목구비라든지 일반적 보판성이라든지 이런 것은 다 영광이 되고 환영이 되고 좋은 의복과 같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되지마는 이제 진리라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힘입니다. 실력이 없으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은 불에 타 버렸읍니다. 금과 은과 보석은 안 탔읍니다. 이거 비유입니다. 진리의 힘이었기 때문에 진리대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멸하란 말이 있었읍니다. 진리대로 됐기 때문에 그것은 멸할 자가 없었다 그 말입니다. 진리의 그물있으니 어짜든지 이 진리의 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이 진리에 거리끼지 안하도록 (진리에)진리가 나를 정죄하지 못하도록 여게서 자유하는 사람이 돼라 해서 성경을 주신 것이요

 

그러면 이것이면 다냐 성경은 여기에서 머물고 마는 것을 가리켜서 율법아래 아래 있는 자라 그렇게 말했읍니다. 그는 생명이 없다 그렇게 말했읍니다. 이 위에 일곱째로 근원이 있으니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는 이 성령 곧 하나님영감을 영감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성신의 감화감동 이 영감은 최고의 법이요 이는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이 영감에 거리끼리 안해서 영감 심판에 걸리지 안하고 영감 심판에서 자유하면 그의 자유는 영원합니다. 생명에도 자유 사망에도 자유 모든 피조물에게도 자유 하나님에게 다 자유 어데가도 환영받고 어데가도 대접받고 어데가도 도움받고 또 어디를 가도 피조물들에게는 은혜를 끼쳐 유익을 줄 수가 있고 어데가나 하나님의 이 완전자에게서 그의 받을 것은 무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로 이렇게 우리는 수없는 심판을 거쳐서 무궁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이렇게 수많은 심판그물이 있으니 이 한 그물 한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서 이 심판을 면하여 자유하는 자가 되어 져라 온전한 율법을 지켜 자유자가 되어져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오는 것으로서 다는 아닙니다. 교회 와야 진리를 듣고 또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성경 말씀을 자기가 접해서 자기의 심령을 차차차차 밝게 만들고 여기에서 자기의 양심을 가꾸어서 자기에게 어두움이 물러가고 환한 빛이 자기를 주관하는 자가 되어져 하나님의 영감에 까지 도달하도록 이렇게 되어지는 자를 가리켜서 소경은 거리끼고 넘어지지마는 눈이 밝으면 어떤 험로라도 잘 갈 수가 있는 것처럼 그 양심이라는 이 빛을 가진 사람은 처세할 때에 자기를 빠트리는 수많은 옹호와 착고와 함정에 걸리지 안하고 이런 것들을 벗어난다 하나님의 빛이 그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의 빛이 인도하는 그 인도를 받을 때에는 이는 완전히 자유한다 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너를 자유케 하면 자유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해준 이 말이 너를 자유케하면 자유하리라 인자에게 자유한다 말은 영감 자유를 말하고 말씀말하는 것은 진리 자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생활을 할 때에 첫째 일반성 보편성에 걸리지 아니하는 생활을 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읍니다. 그러나 그 위에 인간의 이목구비가 있기 때문에 거게 걸리지 안하도록 그보다도 더 큰 법이 있으니 율법의 법이 있으니까 율법의 심판이 있으니까 이 율법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국법이든지 사회법이든지 단체법이든지 가정법이든지 자기 혼자 만들어 놓은 법일지라도 거게 걸리지 아니하도록 하고 그보다도 더 높은 다른 사람에게 우리는 양식을 줘야 되는데 감화적인 이 도덕법에 도덕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양심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진리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영감심판에 걸리지 안하도록 이렇게 조심해야 되는데 이 심판은 일호보다 이호가 권위있고 이호보다 삼호가 권위있고 (사호보다)삼호보다 사호가 권위있고 사호보다 오호가 권위있고 오호보다 육호가 권위있고 육호보다 칠호가 권위있읍니다.

이러기에 반드시 밑에 있는 그 심판과 위에 있는 심판이 마찰이 되고 대립이 될 때에는 부득이 해서 밑에 있는 심판을 무시하고 위에 있는 심판을 준해야 되겠읍니다. 그럴때는 그거 이상의 큰 심판에 통과됐기 때문에 그 밑에 있던 지저분한 그 심판은 시일 문제지 자연 해소가 됩니다. 자연해제가 됩니다. 그러기에 위에 심판보다 더 권위있는 위에 칠호심판에 걸리지 안할 때에는 우리는 진리 심판을 지켜야 됩니다. 진리 심판에 걸리지 안할 때에는 우리는 양심 심판을 지켜야 됩니다.

양심 심판에 걸리지 안할 때에는 도덕 심판을 우리가 상대해서 지키야 됩니다. 도덕 심판에 걸리지 안할 때에는 이 인간이 맨들어 놓은 이 율법심판을 지키야 됩니다. 율법심판에 걸리지 안할 때에는 인간의 이목구비의 이 심판을 우리가 상대해서 거리끼지 안하도록 해야 되고 인간의 이목구비에 걸리지 안하는 것이라면 보편 생활해야 됩니다. 일반적인 생활해야 됩니다. 이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위에 걸릴 때는 부득이 이 밑의 것을 그것을 버릴 수 밖에 없지요 아 자기 가족이 중하지마는 하나님과 비중을 논하는 이 모순이 되어질 때에는 부득이 내가 귀한 가정이지마는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버리고 하나님을 내가 취하고 영접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이런 류의 심판이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다 이루어져 가고 있으니까 무궁 세계의 그 경계는 세상을 넘어 무궁 세계의 경계에서는 이 심판들이 다 기다리고 있으니 이 심판의 그물에 걸리지 안해야 자유롭게 통과하는 것이니까 이것을 보면서 자유케 하는 이 율법을 내가 (되돌아 들여다보고 지켜 주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 이 일곱 가지 심판에 정죄받지 아니하도록 하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입시다.

우리는 이 문제가 중요하지 먹느냐 입느냐 마시느냐 부자냐 가난하냐 높은 지위냐 권세냐 하는 그런 것은 너무도 사소한 일입니다. 너무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사소한 일이요 그것은 그저 하나의 잠깐 이용하고 지내가는 우리에게 필수한 이용물들이지 영원한 우리의에 관계자는 아닙니다.

(기도)

나의 마지막 시간은 알지 못하는 저희들로 마지막 시간이 지나가기 전에 모든 심판의 속박에서 해방받아 영원한 자유를 마련하여 준비의 기간 세상을 끝마칠 수 있도록 영감시켜 주시옵소서. 이를 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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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855 입술로 죄짓는 자는 희망이 없다/ 이사야 49장 23절/ 870123금새 선지자 2015.12.16
854 잃은 양의 정의, 회개는 피동/ 누가복음 15장 3절-7절/ 830410주후 선지자 2015.12.16
853 잃은 양과 살리는 능력/ 마태복음 10장 1절-15절/ 840207화새 선지자 2015.12.16
852 잃은 양, 한 죄/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830413수야 선지자 2015.12.16
851 잃은 양, 주님의 요구/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830413수새 선지자 2015.12.16
850 잃은 양, 드라크마 비유/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830411월새 선지자 2015.12.16
849 잃은 양 비유, 회개/ 누가복음 15장 3절-7절/ 830410주전 선지자 2015.12.16
848 읽는 자/ 에베소서 6장 18절-19절/ 880814주새 선지자 2015.12.16
847 일하는 가운데 주님 맞이하자/ 마태복음 24장 35절-43절/ 811022목새 선지자 2015.12.16
846 일어서는 것 세 가지/ 요한복음 5장 6절∼11절/ 850604교역자회 선지자 2015.12.16
845 일등 교사/ 디모데전서 6장 17절/ 84022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6
844 일곱머리 열뿔 짐승(외적)의 박해/ 야고보서 5장 13절/ 820701목새 선지자 2015.12.16
843 일곱가지를 생각하라/ 베드로후서 1장 1절/ 840401주전 선지자 2015.12.16
» 일곱가지 심판/ 요한복음 12장 44절-50절/ 800127주전 선지자 2015.12.16
841 일곱가지 도적질 회개/ 말라기 3장 8절-12절/ 860105주후 선지자 2015.12.16
840 일곱 가지 준비/ 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861207주새 선지자 2015.12.16
839 일곱 가지 은혜/ 에베소서 1장 5절-10절/ 850721주새 선지자 2015.12.16
838 일곱 가지 산 것 죽은 것/ 로마서 8장 5절-6절/ 851229주후 선지자 2015.12.16
837 일곱 가지 도적질 회개하면 세 가지 축복/ 말라기 3장 7절-12절/ 861109주후 선지자 2015.12.16
836 일곱 가지 도적질 회개/ 말라기 3장 7절-12절/ 860824주후 선지자 201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