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비유, 회개

 

1983. 4. 10. 주전

 

본문 : 눅15:3-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여기에 '양'으로 비유하신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고, 또 '잃은  양'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곧 세상 가운데에 빠진 택한 자들을 말씀하시고,  또 '목자'는 곧 예수님과 예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리켜서  말씀하시고, '찾아 양의 우리로 돌아 온다'는 것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에 대해서 지금 계속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또 각각 본인들이  다 회개에 대해서 힘을 쓰고 있는 줄 압니다. 회개는 고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병든 사람의 병을 고친다, 또 잘못된 이상한 정신을 바른 정신으로  고친다, 그 사람의 뭐 사상을 고친다, 인질을 고친다 인품을 고친다, 말을  고친다, 이 고치는 것. 외부적인 행위를 고치고 사람을 고치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쳐서 바로 하는 것을 가리켜서 회개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는 고치는 것이니 회개는 시작은 기쁘고 또 중간은  고통스럽고 결과는 기쁘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가 모든  잘못된 것이 고쳐진다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막상 고치려고 시작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고통입니다.

고통스러워도 고칠 것을 완전히 고쳐지고 난 다음에는 대단히 기쁘게 되는 것이  그것이 회개입니다. 꼭 치료와 같습니다. 병든 몸이 이제는 병원에 가면 완치를  받는다 하면 얼마나 기쁘겠지마는 그 수술할라 하면 아주 쓰리고 고통스러운 그  순위를 통과치 안하면 수술도 치료가 어려운 것과 같이 우리 회개도 그러합니다.

여게 양이 목자를 떠나서 제맘대로 가다가 목자 잊어버리고 목자 없는 양이 되면  산중에는 맹수들이 많기 때문에 그 양의 생명이 참 위태합니다. 그 양이  멋모르고 저 가고 싶은 대로 가다가 그만 목자를 잊어버려 한 맹수를 만났을  때에 한 어려운 형편을 당했을 때에 그 양은 놀라서 발동했을 것이고 참  불행감을 느끼지마는 어떻게 해야 뒬 줄 모르고 하고 하니까 그저 바들거리면서  살려고만 날뛰는 것처럼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사람의 목자는  하나님이신데 불 택자도 하나님 떠난 거게서부터 고통과 사망이 일어난 것이고  또 택함을 입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떠나고 잊어버린 데에서 모든 망하는 것과  고통과 죽음이 일어난 것들입니다.

 사람이 고생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데에서 오는 고생들이라 그렇게  해서 깊게 말하면 맞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이가 몸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 고통 있는 것이 죄값이라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지마는 그것도  본인이 간증하기를 죄값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교만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교만에 빠질까 해서 찌르는 가시를 주어서 겸손케 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양이 목자를 떠날 때에 만난 온갖 형편 그 형편은 목자의 보호가 없기  때문에 저 단독이 자기 모든 환경을 상대하게 되기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양을 찾아 헤매다가 양을 만나 가지고 양도 목자보고 기뻐하고  목자도 양을 보고 기뻐하고, 찾은 양을 목자가 어깨에 메고 그렇게 우리로  돌아을 때에는 그 양이 목자의 어깨에 메여서 이렇게 오는 걸음이지마는 제가  갔던 걸음을 되돌아오는 그 길이니까 목자를 떠나서 갈 때에 만나서 놀라던  형편도 있고, 두렵던 형편도 있고, 죽을 지경인 참 어려운 형편도 있고 그런  것을 다 되돌아오면서 양이 만나게 되면 양은 그 만날 때마다 꿈쩍꿈쩍 놀랄  것입니다.

 돌아오면서 이리떼가 저쪽에 지나가는 걸 보고 양이 그만 웅키면서 죽을 만치  두렵습니다. 또 여러가지 가시덤불을 앞에 만날 때 '내가 과거에 저 가시덤불로  말미암아 크게 찢기고 상함을 받았는데' 해서 또 양이 많이 놀랄 것입니다. 참  위험한 그 굴혈, 강이나 그런 것을 만났을 때도 그 양은 겁이 나서 퍼들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어깨에 메고 가는데 그 목자가 그런 것을 다 능히 해결할 수  있고 능가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목자이기 때문에 개울도 문제가 없고, 들 강도  문제가 없고, 모든 맹수들도 문제가 없는데 그 양이 만날 때마다 놀라게 되는  것은 자기 혼자 목자 떠날 때에 그 당한 형편을 추억하면서 그렇게 놀라는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의 이  은혜를 입지 못하고 제 욕심대로 제 주관대로 이렇게 세상 살이 할 때에 자기가  놀랐던 모든 그 사정, 형편, 환경, 상대들 이런 것을 회개하면서 그런 사정을  만날 때에 자기가 과거에 그런 것에서 놀랐던 것과 같이 놀라나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왜? 그것은 자기 혼자 갈 때에는 놀랄 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고 그렇게  위험하지마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 걸음은 목자에게 안겨 가지고 오는  걸음이니까 아주 목자 없이 저 혼자 그렇게 당한 그 현실들과 목자의 품에  안기워 가지고 그 당하는 현실들과는 아주 차이가 있어 하나는 능력 있는  목자에게 안겨서 그 현실들을 닥치는 것이요 그 전에는 목자 없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안보 없이 저 혼자 당할 때라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놀라나기  쉽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다시 부활 승천하신 후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과 함께 하겠다' 하신 것은  예수님의 그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곧 영으로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그렇게도 말을 합니다. 성령이 곧 예수님의 영이요, 성령이  곧 예수님의 신성이시요 신인양성일위일 때에 역사하신 그 역사의 능력이 곧  성령의 능력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무형의 주님이 형체 없이 우리를 절대적인 그 능력을 가지고  보호하지마는 제 무지한 어두운 심령이요 육안밖에 가지고 있지 아니하는 자에게  무슨 보호가 있다면 큰 성벽을 쌓아놓든지, 큰 군대가 보호를 한다든지,  강대국이 보호를 한다든지 하면 '저만한 보호가 있으니까 든든하다' 이렇게  여기지마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분의 보호는 천하의 모든 강대국 다  뭉쳐봤자 그까짓 거 주님이 손가락으로 탱궈버리면 어데까지 날아가서 박살 될지  모르는 이분이 보호하고 계시지마는 우리 눈이 어두워, 믿음의 눈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고 믿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보이기 때문에 천하의 해가 다 와도  이분의 보호는 그보다 크기 때문에 다니엘 같은 사람도 모세같은 사람도 보이는  그 세력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한 그것은 신령한 눈이 밝고 어두운 차이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을 떠나는 걸음은 이 세상살이가 자기 대 세상, 또 거게 조종하고  모든 것을 명령하고 있는 사탄, 사탄, 사탄의 군대인 사람, 사탄이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는 모든 죄 안에 있는 이 세상 것들 이것과 자기와 서로 상대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강하고 크고 자기는 심히 빈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떠나는 걸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강하고 큰 것들을 나 혼자 대항하기 때문에 그 세력에게 놀라지 아니할  수 없고, 삼키지 아니할 수 없고, 죽지 아니할 수 없고, 해를 받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회개라는 것은 물론 이 세상에 인간  제도의 법을 어긴 것도 다 회개해야 되지마는 인간이 세운 법에는 어긴 것이  잘된 것도 더러 있고 법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완전한 그런 법을 표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입법을 표준해 가지고 하나님과 그 법칙에 거리끼고 잘못된  그것을 고치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에 벌써 그것을 칠 마음을 가져서, 우리  서부교회도 '어짜든지 지금은 위급하니까 급속히 회개해야 된다' 하는 것을 뭐  많이 말해서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회개는 목자가 양을 찾아 가 가지고  안고 돌아온 것이지 양 제가 스스로 돌아온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벌써  회개해야 되겠다는 그 마음이 있는 것은 절대자이신 이 하나님의 은혜를 벌써  입은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것을 내가 고쳐야 되겠다' 하는 그 깨달음이 있고 그  고치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것이 벌써 절대자이신 눈에 보이지 않는 자존자  창조주, 주재자, 주권자이신 이 지극히 크신 분, 참 우리가 상상 안 해 그렇지  상상만 해도 할수록 '어쩐 일입니까?'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이 지극히 크신 이  분의 긍휼과 보호를 입어서 어깨에 벌써 메이고 탈선돼 갔던 것을 한 걸음 두  걸음 회개해서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걸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양이 목자의 어깨에 안겨서 그 목자의 우리로 돌아가는 고 걸음은  그는 과거에 자기가 혼자 탈선돼 갈 때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에 자기에게 만나지는 이 세상은 자기 대 세상이기 때문에  자기가 패망하고 사망할 수밖에 없지마는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함으로 만나지는 이 세상은 절대자의 능력의 보호를 입고 그의 사랑과  은총을 입고 지금 가는 걸음이기 때문에 자기 세상에 어떤 것이 온다 해도  추호도 해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유익만 주지 해를 주지 못하는 것인데 왜  놀라고 겁이 나고 두려워하느냐? 그것은 과거에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자기의  경험 지식, 체험 지식, 선입적 관념, 인간의 주관적인 자율적인 인간 지식이  들어서 그렇게 놀라게 하지 성경 지식이 그렇게 놀라라고 한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게서 첫째로 생각할 것은 우리 그리 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법칙까지 잊어버리고, 하나님  잊어버리고 법칙을 잊어버리지 않아도 생명 역사는 없습니다. 하나님 잊어버리고  법칙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사망으로 떨어지는 탈선은 없습니다. 위협에 빠지지는  안하는 울타리 안에 있기는 있지마는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방편이요 하나님을 어떻게  상대하라는 그 이치를 가르쳐 주는 하나의 중매자요 소개자지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 주는 생존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데까지나  하나님께 대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하나의 지식입니다.

 그런고로 기독자가 벌써 그 말씀을 떠났다면 하나님은 벌써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난 뒤에도 말씀은 지켜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자기가 사모하고, 그 분이  누구심을 자기가 묵상하고, '그분이 내게 대해서 지금 역사 하심이 무엇인가?  내가 그분에게 지금 거리낀 게 무엇인가? 그분이 나에게 지금 역사 하심이  어떠하며 내가 거게서 따라서만 움직일란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그말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가 참 힘드는 그런 공로 있는  역사를 하라 하는 그말 아닙니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그말은 주님의 대속을 믿는 사람은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 하는 그말이  아니오.

 주님의 피와 살로 양식 삼은 자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셔서 하나님이 능동이  되고 나는 거게 피동이 되고, 하나님은 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인해서 내가  모든 것이 움직여 사는 것처럼 그분의 은택으로 인해서 살게 된다 하는, 그  피동의 은혜를 입는 것을 가리켜 말하지 이런 공로 받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에게 성의 있게 섬겨야 된다는 그것 아니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다른 것을 상대하다 보면  하나님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사람도 죄도 여러가지 회개 차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 안 어기려고 애를 쓰고, 어떤 사람은 계명 안 어기는 것은  으례히 벌써 본능처럼 자기 생활이 되기 때문에 계명 어기는 일은 참 심히  어렵지마는 그만 현실 만나서 사람 접촉하고 사물 접촉하다 보니까 그만  그것하고만 이렇게 맞대서 뭉쳐지고 하나님 잊어버렸다 그말이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보이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그것만 상대해서 움직이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죄를 회개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무슨 뚜렷한 계명에 어긴  것보다도 '주여, 내가 이 시간 누구를 만나서 얘기하는 가운데에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은 배반하고 그 사람하고 나하고 둘이 어떤 사건만 가지고  날뛰고 주님은 내 몰라라 하고 뒤로 돌려놨었습니다.' 그 죄를 회개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언제나 주님 모시고 주님이 말하라 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라 하는 대로 행동하고, 주님과 함께 그 사람을 상대하여 주님이  그 사람에게 상대하는 그대로 내가 피동되어 내가 상대하는 것은 주님이 그  사람을 상대하는 그 상대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내 단독이 상대하는  그런 상대를 안 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 면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그  면의 죄를 회개하려고 또 노력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회개는 차이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하늘에서도 주밖에 누가 있으며 땅에서는 주 외에 사모할 자  없도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 음녀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다 그는 화를  받으며 다 망하리로다" 말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 사모를 잊어버리면 오랜 후에  성경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위반된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을 위반된 자가 껍데기 성경 말씀을 지킴으로 자기가 위험한 모든 것을  벗어나서 거룩한 자리로 옮겨져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또 찾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닥친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자기 현실  상대하고 하나님 잊어버려서 현실 때문에 현실을 하나님 대신으로 삼아버리고  하나님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엄밀히 말하면 그것이 곧 인간이 만든  우상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이 다 우상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 사모하고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과 자기와 함께 하기를  힘쓰고 그분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대로 알려 주는 대로 그분과 뭐 연결이 돼  가지고 그분과 관계를 맺어 가지고 움직인 것 이라야 든든하지 그게 아니면 천하  인간이 다 옹호한다 해도 그것 무슨 힘이 있습니까? 아무 힘이 없습니다. 참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크나 작으나 모든 것에 '주님 두고 나 혼자 이것을 생각지  아니해야지. 주님 뒤로 두고 나 혼자 이 사람을 대하지 아니 해야지.' 주님 두고  내가 나 혼자 이 사건을 생각하는 이것이 음녀같이 주를 떠나는 자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잊어버리고 무엇을 생각하는 그것이 막바로  음녀성이요, 음녀성. 그게 창기성입니다.

그 생활이 아주 힘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그렇게 사모하고, 놓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주님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 주님이 같이 하실 수 있는 일,  주님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일은 당신이 내가 말하기 전에 함께 해  주십니다. 주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그 일 이라면 내가 뭐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고 그런 말하기 전에 당신이 그 일을 솔선적으로 먼저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언제든지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지 못하고 언제나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이렇게 그분이 먼저 동하고 우리가 그 다음에 피동으로 되는 이만치  주님은 우리에게 대해서 열심도 또 신실도 하십니다.

이분을 잊어버리지 않고 이분을 놓지 않고 이분을 생각하면서, 정도가 다  다르니까 어릴 때는 그저 '주님이 뭐라고 하실꼬 몰라' 그렇게만 생각해도  달라집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 때에 순응성 있게 만들었습니다. 씨름하는 데  가면 씨름하는 사람되고, 놀음하는 데 가면 놀음하는 사람되고, 물들도록 그렇게  순응성 있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닮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도 보면 역사를 가만히 이래 보면 이런 사람 만나면 만난  사람들이 그만 그 사람 돼 버려. 저런 사람 만나면 그만 만난 사람이 저 사람 돼  버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구역 식구를 기를 때나 교인을 기를 때에 그  교인에게 접하는 사람을 조심해서 살펴야 됩니다. 그것이 아주 이리되기  쉽습니다.

이러니까 사람도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뭐 믿음 말하지 아니해도  믿음의 사람을 만나면 내가 믿음의 사람에 동화가 되고 감화가 되고, 또 아주  세상주의자 세상 욕망자를 만나면 나도 그만 세상 욕망자에 동화가 되고 그렇게  속화가 됩니다. 복음도 설교도 하늘의 복음이 있고 땅의 복음이 있습니다. 땅의  복음은 사람들이 듣기를 좋아합니다. 네, 세상은 나쁜 것 아니오. 기독교가  염세주의 아닙니다.

내 세상은 내 과거가 쌓여 가지고 있는 것이 내 세상이요, 내 미래가 쌓여 있는  것이 내 세상이요, 내 현재가 쌓여 있는 것이 세상이오,세상은 나의 것이 적재돼  있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나쁜 것 아니요 보배요.

그러나 우리가 그 썩을 것으로 썩지 아니한 것을 가지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잘못하면 세상이 그의 목적과 욕망이 되기 쉽다 그거요, 그걸 가리켜서 땅에  속한 복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이런 데에 물들고 저런 사람 만나면 저런 데에  물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글을 짓는 데 '수종 방원기요' 물은 그 그릇의  모양을 따라서 가고, 동그란 그릇에 물 부으면 물은 절로 동그란 물 안 됩니까?  네모배기 그릇에 부으면 물은 으례히 네모배기 물이 되는 것처럼, '인위  선악우라' 요와 같이 사람은 그 벗의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만나는 것을 따라서  사람은 만들어져 간다. 그게 인간 통계를 어떤 사람이 하나 발표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세상에서도 성자를 만나면 성자의 감화를 받고, 또  사기꾼을 만나면 사기꾼의 감화를 받고, 또 이 씨름쟁이를 만나면 씨름쟁이  감화를 받는데,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감화를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주님을 사모하고 또 생각하고  가까이하려고 안 떨어지려고 애쓰는 그것이 자기 성화에는 제일 첩경입니다.

제일 지름길이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주님을 잊어버리고 난 지 오래 지나면 그 다음에 나타난  울타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또 어기게 됩니다. 벌써 말씀도 어기게 되면 그는  깊이 타락한 사람이요 세상에 깊이 빠진 사람입니다.

이 걸음은 하나님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사는 이 세상살이는 그  세상은 악령 악성 악습, 악령하고 또 자기 중심의 인간성하고 자기 중심의 모든  행동들하고 이것들이 뚤뚤 뭉친 게 세상인데 이 세상하고 자기하고 상대하기  때문에 자기는 거기 밥이 되고 삼켜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놀랄 줄  모르고 오히려 기뻐하면서 야, 재미있다 하면 그것은 벌써 생명이 없고 죽은  자입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법칙을 떠날 때에는 자기 대 온 이  세상 대 이기 때문에 자기는 거게 짓밟히고 천물이 되어지고 자기는 참 몰라  그렇지 기절할 만치 자기 신세는 가련한 신세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벌써 회개를 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큰 줄 알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려고 뭐인가  잘못된 것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는 그 회개를 시작한 그 걸음, 회개를 함으로  자기가 걸어가는 걸음, 회개를 함으로 자기에게 닥쳐지는 모든 닥치는 일,  거게는 절대자의 책임과 보호가 있기 때문에 그 현실을 당할 때에 자기가 놀라고  떠는 것은 자기 속에 마귀가 준 지식, 선입적 관념, 기존 지식, 예수님이 없을  때에 자기 혼자 날뛰던 그 경험 체험의 지식, 마귀들이 만들어 준 그 인간  지식이 그것이 들어와 가지고 자기를 놀라게 떨리게 하지 자기가 거기서 변동만  안하면 해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그럴 것이오. 뻐들거리며 놀라면 '야, 양아. 네가  나 떠나서 갈 때에는 이리 저놈 만났을 때에 너를 상할라 하지, 내가 있으니까  꼼짝 못해. 보라, 내가 이리를 볼까? 나를 봐.' 이리가 저기 있는데 '웍!'  하니까 이리라는 놈이 훅 뛰어 달아납니다. '봐라, 내가 이렇게 능력 있어.'  구렁텅이를 당할 때에 과거에 빠졌기 때문에 거기 거석 하면 그리 가니까 빠져  죽을까 싶어서 막 뻐득거리니까 '염려하지.마 네가 봐라.' 아듬고 훌쩍  건너뛰니까 벌써 개울은 지나왔어. '개울 벌써 지나왔어. 네가 내게 안겨 있을  때와 나 없었을 때와는 달라.' 이렇게 그 목자가 말할 것과 같이 우리가 회개하면서 세상살이를 살아갈 때에  자기가 '야, 이렇게 회개하고 이것은 가다가는 큰일나겠다.' 이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것은 자기에게 옛날 지식, 마귀 지식,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날 때에  자기가 당면한 그 모든 얻은 지식 그것이지 하나님의 지식이 그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어떤 회개든지 살림살이가  절단이 나든지, '회개하면 가정 파괴가 되겠다' 가정이 파괴가 되든지,  '회개하면 목숨이 절단나겠다', 절단나든지, 절대로 그런 두려움이나 염려를  가지지 말고 안심하고 회개만 하면 자기 눈에 그렇게 다 패망될 것 같은 것이  회개를 함으로 그것이 정말로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회개의 걸음은 자기 혼자 세상  살이 할 때와 달라. 절대자가 안보하는 절대자의 품 안에 안겨서 점점 완전을  향하여 가고, 행복을 향하여 가고, 평강을 향하여 가고, 승리를 향하여 가고,  모든 것에 주권자 주인 위치, 주인 위치를 점점 향하여 가고 있는 이 걸음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자의 회개의 생활에 해될 것이 만에 일도 없고 절대 없다 하는  요걸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요것을 믿어야 뒵니다.

요것을 믿지 않고 회개할 마음 가졌다가도 '이 회개는 하면 큰 영향이 오겠는데,  큰 파탄이 오겠는데.' 해서 염려하는 그것이 요 말씀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입니다. 자기가 안 믿으면 그만치 자기는 마음으로 고통을 당해도 당할  것이오. 회개를 한다 할지라도 고통을 당하면서 회개를 할 것이오.

그러나 회개만 했으면 회개하고 난 다음에는 '공연히 내가 놀라기만 놀랬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놀랬네.' 그리 될 것이고, 만일 회개를 못했으면 그 사람은  '내가 그때 회개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지.' 점점 회개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고 회개하는 자는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피조물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리요? 기쁘고 즐거워하면서 '주님의 솜씨를 바라보자' 하면서 담대히 회개한  자들은 두려움이나 염려 없이 그 승리의 걸음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주님을 떠나는 걸음으로 세상을 상대할 때와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회개로 세상을 상대하고 만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 그 떠날  때의 한 것은 저 단독이고, 크나 작으나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회개하면서 회개로 인해서 당하는 그 모든 것은 절대자의 품 안에 안기기 때문에  적이 크면 클수록 절대자의 보호가 크고, 해하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절대자의  그 보호와 축복이 더 큽니다. 망치는 것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 때문에  더 좋은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하고, 또 둘째로 기억할 것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가  요 '한 사람' 하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되는 그걸로만  생각하는데 그것도 그러하고, 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건을 회개하는 것, 한  건을 회개하는 것, 한 행동을 회개하는 것, 그 사람은 다른 것은 다 잘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덕되지 않는 술 담배를 먹는다. 술 담배를 끊을 때에 그것도  하나의 회개입니다.

요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살살살살 꾀우는 간교한 그런 마귀성이 있어 가지고  간교한 말을 해서 반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좋지 못한 바람을 일으키는 그  버릇이 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그 버릇 그것 하나를 고치려고 애를 써서  고치면 그것도 하나의 회개입니다.

또 그 사람이 그 사업을 하면서 저 사람은 다 좋은데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는데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해. 돈벌이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 그 사람이  거짓말하는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알고 자기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요 거짓말하는  요것을 고쳐보겠다' 하는 그 마음을 가져서 거짓말하나 고치면 그것도 그 사람의  한 사람의 회개입니다. 그 사람의 회개요.

이래서 우리가 그것을 이 단 위에서 말 못 할 죄도 많고 말 할 죄도  많이 있습니다. 있는데 그 하나를 그것을 회개할 때에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그 모든 것 그것보다 이 세상에서는 더 그것을 기뻐한다.

그러면 하늘에서 기뻐한다 그 말은 하늘에는 누가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이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일체인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게는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천군 천사들이 있습니다. 모든 만물들이 다  등록되어 있습니다. 마귀들도 있습니다.

이러면 회개하는 요 회개는, 그 회개라 하는 것은 "하늘에서" 하는 말은  하나님이 그 이미 회개해 놓은 그 모든 전부보다 한 사람이 그 하나를 회개하는  그것을 더 기뻐한다. 또 천군 천사도 지금 회개하는 그것을 기뻐한다. 모든  성도들도 그걸 기뻐한다.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 하늘에 있는 모든 운동들,  하늘에 있는 모든 그 전체의 그 시위들 그 전부는 그 회개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제일 기뻐한다 하는 그것을 여게다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위해서 참 온갖 충성을 다하는 그런 것 좋지마는 그것보다,  의인이 의인 노릇 하는 그것보다 지금은 죄인이 회개하는 그것을 주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여게 분명히 말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순교하는 그  순교만 애쓸 것이 아니라 순교보다 주님이 나에게 알려 주시는 말씀과 영감을  통해서 내게 고칠 부분과 요소가 무엇이 있는지 그것 하나를 고치는 것을 내가  순교하는 것보다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왜?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 순교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마귀의 것이 그게 회개하지 않으면 마귀의  것인데 마귀의 것이 있으니까 마귀가 줄을 당깁니다. 하나님이 전적 거게서  전력을 기울여서 보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순서는 먼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에 거리끼는  마귀적인 것 이것을 우리에게 고치게 하시고 고친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다음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죄보다는 적은 죄가 낫고, 적은 죄보다는 죄 없는 것이  낫고, 죄 없는 것보다는 의로운 것이 낫습니다. 이래야 생명이 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한 사람의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미 자기가 회개해서 의로워져 가지고 있는 것, 의로워져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이런 의가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그것은 하늘에서는  지금 돌볼 여가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천국이 건설되고 난 다음에는  관련되지만 지금은 그래 할 여가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나는 이렇게 단식하고 기도하고 저 세리와 같은 죄를  짓지 않고 모든 도덕면에 깨끗합니다. 참 이렇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깨끗합니다.' 하는 그 사람은 자기에게 고칠 것 있는 것을 고치지 않고 고쳐  놓은 것 그것만 내놔서 주님 앞에 '나는 이렇게 고쳤습니다.' 하는 그것만  가지고 온 사람은 주님 앞에 버림을 당했습니다.

아주 허무한 세리지마는 '나는 이런 고칠 것이 이런 죄가 있습니다. 이걸  고칩니다. 이걸 고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돌아갔다 성경에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이미 고쳐놓은 그것은 무궁세계에 가서 써먹을 터이니까  그것은 둬 두고 자기에게 고칠 것 있는 것 찾아서 그것 고치는 것이 주님과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기쁘게 하는 유일의 방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가 없이는 하늘과 하늘에 속한 자들을 지금은 기쁘게 할 것이  없다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있는 기간은 그 전기간은 회개의  기간이라 그렇게 우리는 단정을 지울 수 있습니다. 뭐 지식에 대한 회개도,  소망에 대한 회개도, 행실에 대한 회개도, 계속에 대한 회개도, 그 뭐 회개는  그저 자기가 회개해 나감에 따라서 한 회개를 하면 그 다음 회개할 것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고 그걸 회개하면 그 다음 회개를 가르쳐 주시지 자기가  회개해야 될 것을 알고 그걸 회개하기 전에는 아무리 울고 불고 단식해도 회개의  길은 막혔습니다. 그것부터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 회개해야 그 다음에  회개의 순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오전에는, 하늘의 존재들, 하늘은 무궁세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천국과 세상이 둘이 한테 있습니다. 천국과 세상이 둘이 한테 있는데  어떤 사람은 천국에 살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살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 살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건너감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천국에서 세상  갔다가 천국 갔다가 자꾸 이렇게 넘나들면서 이렇게 사는 사람 있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그 천국은 무궁세계를 말하는 것 아니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있는 이 영생하는 이 세계를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라 하는 말은 영생하는 것, 완전한 것, 불변하는  것, 깨끗한 것, 하나님과 일치되어 있는 것, 하나님에게 속한 것, 그는 영원히  사망이 없는 것 그런 모든 좋은 것들을 가리켜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라 그렇게  말했어.

'벗들이라' 하늘에 있는 이웃을 불러 가지고 이래 하늘에서는 회개 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한다, 그  하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고 있는 하늘 운동, 하늘에 속한 모든 것, 그 모든  속한 것이 기뻐 환영을 하고 맞이해 줄 것은 뭐이냐? 회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에 대해서 중단하지 말고 다 됐다고 생각지 말고  어데까지 갔든지 그대로 우리는 회개로 자꾸 걸어가야 될 것이오,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기쁘게 하는 것도,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이 소원하는 것도, 하늘에  속한 모든 것에게 환영을 받는 것도 회개뿐이라 요것 하나 기억하고, 하나는,  회개에는 자기가 속화돼 나갈 때의 세상과 회개할 때의 세상은 다르다. 회개할  때의 세상은 절대자의 그 능력의 보호를 입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세상이  해하지 못한다. 해할 것으로 네가 보여 지는 것은 네가 탈선될 때의 그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 그 모-든 인간 지식 그런 것이 들어서 너를 놀라게 하는  것뿐이지 네가 그 걸음에서 회개에서 돌아서면 해를 받지마는 회개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해를 줄 자가 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요 두 가지를 기억하고, 목자의 어깨에 메여 가기 때문에 해를 받지  아니했습니다. 요 해를 받지 아니한 데 대해서 혹 사람들이 오해를 할까 해서  한번 좀 더 한 마디 더하겠는데 이 해는,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손해 안  간다 했는데 회개했는데 그만 돈을 잊어버렸다, 돈이 손해 갔다, 실패를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마는 요 목자에게 안겼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하지 못한다, 해를  보지 않는다 하는 그 해는 하늘에 속한 해를 말합니다.

그 해는 첫째가 그 걸음은 심판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심판의 해를 받지 않소.

심판의 해를 받지 않고 마귀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마귀는 천하 사람은 다 해할  수 있지마는 회개하는 사람은 해하지 못합니다. 마귀의 해를 받지 않아요. 또  죄의 해를 받지 않아요. 그러면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합니다.

요 네 가지 해만 받지 않으면 세상 살이도 하늘의 살이도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유익 되는 것이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해받았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심이 해가 아니라 큰 수입 큰 성공했소. 큰 승리를 했소.

이러니까 우리가 해라는 그 정의도 세상적인 것도 있고 천국적인 것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해가 해이지, 해가 들어서 이익이 되는 그것이야 해가 됩니까?  이익도 영원한 이익이 이익이지, 작은 이익이 큰 해를 끌고 온다면 그것 뭐  이익이 되겠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는 걸음에는 뭐 공산주의를 당해서  순교를 당했든지, 뭐 자기가 공산주의에게 회개함으로써 매를 맞았든지, 또 어떤  자에게 회개를 함으로써 자기 동지에게 배척을 당했든지, 회 개를 함으로 벌  돈벌이를 못 했든지간에 무엇이든지 뭐 지저분한 것 그런 것 수가 많겠는데  어쨌든지 회개하는 걸음은 하나님이 정죄하는 심판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의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은 망하리로다 인정한다 했어. 하나님이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정죄받지 않습니다. 심판의 해를 안 받습니다.

심판의 해를 안 받으면, 심판의 해를 안 받는다면 이것 한 마디면 다요. 심판의  해를 안 받으면 영존합니다.

심판의 해를 안 받고, 마귀가 해할 수 있는 마귀의 해를 받지 않고, 죄가 해하는  죄의 해를 받지 않고,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이렇게 회개하는 걸음에는 해를  받지 아니한다.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왜 이것을 처음에 둘만 말하면 되는데 덧붙여 말하느냐 하면 회개하다가  '회개하면 돈 안 떼인다 했는데 회개하니까 돈을 떼였는데' 회개하는데 돈을  떼였으면 그것이 치료인 줄 아십시오. 치료라는 것. 회개하는 데 돈을 떼였으면  그 돈 안 떼이면 그 돈이 자기 망쳐서 암같이 망합니다. 회개를 함으로 돈을  떼였으면 그 돈 떼인 그것이 자기에게는 치료요. 암 치료. 멸망 치료.

그렇게 착각할까 싶어서 말하는데, 오늘 오전에는 우리가, 회개하는 걸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입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해하지 못하는 것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축도} 다시 한번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늘의 능력들, 하늘의  운동들, 하늘의 권세들,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소원하는 것이 회개된 모든  것보다 지금 회개하는 이것을 기뻐하고, 회개하지 아니한 모든 것에 대한  근심보다 현재에 당면된 하나를 회개치 않는 여기에 전근심 걱정은 집중되고  기쁨도 집중된 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사오니 우리에게 성령으로 인쳐  기억하고 실행하게 하시고 또 회개하는 걸음에는 절대의 능력의 보호가 있는 이  보증을 다시 한번 알려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담대히 회개하는 이 깨달음의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지금 회개하여야 할 당면한  요 한 건에 하늘의 운동은 다 집중되고 있는 이 사실도 밝히 깨달아 놓치지 않는  저희들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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