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보다 권위있는 사랑

 

1987. 5. 11. 새벽 (월)

 

본문:요한일서 3장 13절∼24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참 사랑을 가진다는 것이 힘듭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져서 사랑하는 행위를 계속하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게도 되고 또 이 사랑의 사람으로 점점 화해져 가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가운데서 사랑이 뭐인지 알 수가 있고 사랑은 무한한 힘을 가졌고, 무한한 생명을 가졌고, 또 무한한 존귀의 가치를 가진 것이지마는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에 이 사랑보다 미움을 오히려 귀중히 취급합니다. 미움을 귀중히 취급하는 그거는 전부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옛사람 그놈이 들어서 하는 것이지 예수님의 피로 중생된 새사람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해서 악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만치 사랑은 버릴 자가 아무도 없고 사랑을 세상의 무엇과 바꿀라고 할 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 사랑에 무식해서 사랑의 정반대인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복되게 하고 가치 있게 부요하게 하는 줄 알아 가지고 사랑의 정반대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평강과 생명과 기쁨은 없어지고 우리가 원치 안하는 모든 근심, 고생, 조급, 두려움, 모든 고통만 우리에게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아는 지식을 가질 때에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이 사랑은 최고의 도이기 때문에 성경 읽고 기도하고 해 가지고 우리가 모르는 깊은 속에 들어 있는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자기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연구해서 논리적으로 대략 윤곽으로 이렇게 짐작만 하고 자기가 사랑을 하는 데에서만 사랑에 대한 지식을 알 수가 있고 사랑에 대한 가치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만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는 것도 그렇게 애쓴다고 되는 거 아니고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거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은 거게서만 나옵니다.

이러기에 평생 형제를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아무리 입으로 증거하고 아무리 다방면으로 폭넓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할지라도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도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거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또 이 사랑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불신의 다 고난과 해를 스스로 마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것도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믿음이 나옵니다. 자기가 형제를 사랑해 볼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대한 지식도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한다는 그것도 알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사랑이 요동치 않는 것도 압니다.

또 이 사랑은 귀한 역사를 합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보고 깨닫고 지킬라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암만 지켜도 그 깊은 속에 평강도 맛볼 수 없고, 평강도 가질 수 없고, 담대함도 가질 수 없고, 또 능력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래서 요한일서 4장에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는 그 사랑을 내가 믿을 때에 참 두려움이 없고 내가 형제를 사랑할 때에 두려움이 없는데 이것은 암만 논리로 해도 안 됩니다. 꼭 형제를 사랑하는 데에서만 사랑에 대한 지식을 정확한 지식을 알 수 있고 사랑에 대한 믿음도 가지게 되고 또 이 사랑의 어떠한 그 행복과 평강과 능력을 가진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대대로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대대로 고대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정작 메시야가 오니까 다 배척해 버렸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메시야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그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이런 것을 봐서 안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 이렇게 증거는 하지마는 그들이 참 메시야를 알았다면은 메시야는 하나님이시요 저들의 소망의 전부인데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세밀히 지키고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 예를 들면은 삼십팔 년 된 병자라든지 나면서 눈먼 소경이라든지 그런 사람을 낫운 날이 안식일날입니다. 안식일날이니까 그들은 배운 율법이 그러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했으니 이는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 아니다. 이거는 분명히 사탄에게로 왔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 그래 가지고 한 사람이 의견을 내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의견에 따라가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합해서 ‘그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를 사형에 처하라.’ ‘나는 이 죄에, 사형시킨 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 빌라도가 말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 죄는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받겠다.’ 그 말을 할 때에 그들은 확신이 있는 ‘이는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처형해서 사형시켜 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일이다.’ 확신이 되고 확정이 됐기 때문에 그와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보고, 하나님의 율법을 보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메시야를 메시야로 모르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는가? 그것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사랑이 없는 연고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연고였습니다.

삼십팔 년 된 그 병자에게 대한 애착심이나 긍휼심이 있는 사람은 그를 평생 가련한 자리에서 주님이 구출했으니까 거기는 전폭적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고 이렇게 높이지 이렇게 찍탈 잡아서 ‘안식일에 이런 일 했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고 사탄에게서 왔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그런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또 나면서 눈먼 소경이 나았을 때도 그 아버지는, 만일 예수님이 나았다 이렇게 말을 하면 자기는 사형받는 것입니다. 출회라 말은 그때 바리새 교회서 쫓겨나면 멸망을 받는다고 그들의 인식은 다 그렇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멸망을 받는 것이니 그가 어짤 수 없어 ‘나는 그를 모른다. 어떻게 낫았는지 모른다. 그가 장성하니 그에게 물어 봐라.’ 이랬지마는 그때 그 아버지의 심정을 본다면 아버지 심정은 예수님에게 대해서 동정이 갔을 것이요 예수님에게 대해서 옹호가 되었을 것이요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진정 감사함이 생겨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아버지는 왜? 그 소경된 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을 초월한 하나님의 깊은 성신의 감화를 깨달았고 이 사랑 없는 데에는 율법뿐이기 때문에 거기는 정죄와 사망뿐이지 하나도 생명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안하시고 자비를 기뻐하신다” 이랬습니다. 또 야고보서 2장 12절입니까? “너희는 말에나 행사에나 장차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로 알고 말도 하고 행위도 하라” 2장 12절에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사람이 긍휼 없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 대해서 긍휼 없는 심판을 할 것이라.

그라고 난 다음에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했어.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그 말은 사랑은 이 율법을 이기고 자랑한다, 사랑은 율법보다도 초월한 하나님의 바로, 하나님이 말해 놓은 말보다도 하나님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는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보다도 하나님의 깊은 중심은 사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걸리지 않도록 행해야 심판을 받지 않는데 그것보다도 더 힘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불쌍히 여기고 제 몸같이 생각하는 이 긍휼이 있는 사람은 그 율법에 모든 저촉되는 게 있다 할지라도 이 긍휼 하나는 모든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이랬습니다.

그것은 왜?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발표된 외부요 자비와 사랑과 긍휼은 하나님의 중심의 본성입니다. 율법 지킨 사람은 구원 얻는다면 근근히 구원 얻을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도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있어서 서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이 같이 계시게 되고 동거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2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눈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이 성경책을 봐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가집니다. 지혜를 가져도 이것보다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 있는 자는 이 하나님의 율법을 초월한 영감의 지혜와 총명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다 외우고 미간에도 붙이고 손목에도 붙이고 문지방에도 붙이고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상고했지마는 그 속에 자비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일날 환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 준 데마다 송사하고 시비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네들이 율법을 가지고 따져 가지고는 아무래도 모릅니다. 다만 거게는 사랑이 있을 때에 그 사랑은 이런 것들을 다 헤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중심과 같이 화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는 “이것이 없으면 영생이 안 된다” 그 말은 하나님하고 연결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영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영생이오.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인데 영생하는 건 생명 가진 자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대속으로 연결된 자가 하나님의 중심과 내 중심이 일치되어서 살 때에, 내가 하나님의 마음이요 중심인 그 성령과 일치되어 살 때에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만 돼지지 사랑이 아니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래도 이 떠나기 전에, 모든 능력보다, 모든 능력보다 율법이 더 귀하고, 아무리 능력 있는 일 해도 법에 정죄되면 소용 없습니다. 그 온갖 능력보다 율법이 더 권위 있습니다. 율법보다 제일 권위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우리의 긍휼심이요 자비심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자비를 기뻐하신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온갖 제사를 드리지마는 너희들 속에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 없다, 자비가 없다. 너희들이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자비가 없으니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고 항상 외식으로서 껍데기만 알지 하나님의 깊은 그 중심과의 하나되지는 못한다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종전같이 교회 주변을 청소합시다.

오 분 기도 후에 권찰회 모이겠습니다. 다 모였다가서 바쁜 이들은 그만, 대략 이번에 집회 갔으니까 집회갈 때에 혹 불편한 거 있으면 우리가 말해 가지고서 고쳐서, 명년에 또 있을란지 없을란지 모르지마는 명년이라든지 금년 여름에 거창이라든지 이번에 우리가 준비한 이것을 전감으로 삼아 가지고 보다 좀 편리하고 또 질서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덕을 끼치는 그런 방편을 했으면 좋겠다 해서 오늘 권찰회는 그것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고 또 자기의 좋은 의견이 있으면 발표해서 우리가 실행하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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