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기관을 세우신 목적

 

1989. 2. 9. 목새벽

 

본문: 요한복음 3장 10절∼17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압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밤에 증거할 때에 온 세상은 멸망뿐으로 되어 있는 세상이라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큰 말씀이며 또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다. 왜?  온 세상이라고 하면 이 지구만이 아니고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  우주가 지구보다 큰 것 많지마는 우주를 다 통치하고 우주를 주격으로 정복하고  하나님에게 하나님 대리 주인으로 인계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래서 사람이 범죄함으로 모든 만물이 다 저주받아, 하나님에게 저주받아 악한  자 안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9절에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했습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다 말은, 여기 악한 자라 말은 세상 왕 곧 악령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것을 세상 임금이라고도 말을 했습니다. 이래서, 아무나 따나 자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되나 안 되나 말하는 게 아니고 이 말한 대로는 반드시  뒤에 언젠가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온 세상은 멸망된 것으로만, 앞으로 멸망을 할 것이나 멸망할 것으로 돼  있는 것입니다. 새로 멸망할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벌써 멸망 안에 있는 것이며  멸망할 것이 돼 가지고 있는 세상이니까, 악령은 공중에도 권세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 있는 것도 다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그자는 송사에 능한  자입니다. 그자의 이름을 가리 켜서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쟁이 아비라고 말했고  밤낮 하나님에게 송사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송사에 능한 자입니다.

그자가 천하 인간을 다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은 이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고 막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지 못하지, 마귀가 충동시켜 가지고 온  세상을 멸망되어 있는 세상이라, 죽어 있는 세상이라, 공중과 우주를 사탄이 다  권세를 잡고 있는 세상이라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바르지마는  세상은 어둡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면 세상에게 송사를  받을 일들입니다. 아무나따나 자꾸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오.

 사람이 어데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크심을 아무리 말하지마는 하나님이 크신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두려움도 없고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고 소망에 넘침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저희가 세상에 몇 해 정권 잡고 있을 그 인간만침만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그 인간의 전적 사랑과 보호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 상대가 되어  있는 자신이라면은 그만치 행복감을 가질 것입니다. 그는 그 국경 안에서는  행복감을 가질 것이요 자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거는 필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그건 것과 비교될 것입니까? 너무 크고 거리 멀어서 못  믿는 데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 것을 제가 아는 대로, 어떤 자는 자기  동리에 잘난 사람이 큰 것만 알지 그 동리보다 큰 사회에서 큰 사람은 모르고, 또  사회에 큰 것만 알지 국가에 저명한 큰 사람들을 모를 것이고, 또 국내에서 큰  사람만 알지 세계적으로 큰 인물이나 역사적으로 큰 그런 인물을 모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심을 모르는 거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대해서도 모르는 자가 되고 또 우리로 더불어 교훈 하시고 선포하신 그 명령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실이 흐미하거나 거짓이 끼어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거짓되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모름을 인해서 우리의  주관 행동과 변화가 일어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세상은 멸망만으로 되어 있는 세상이며 멸망이 아닌 것은 먼지 만한  것도 끼어 있지 않다 하는 이 말씀이 아무나 따나 자꾸, 세상은 마귀의 세상이기  때문에 거짓말 있는 세상이요, 그저 거짓말이 그것이 자기를 정죄해서 크신  하나님의 앞에서 멸망을 자취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짓말해서  자기와 상대하고 있는 그 사람이나 설득시키고 이해시켜서 그 사람만 점령하면  되는 줄로, 눈이 어두워서 그 사람에게 거짓으로 이해시켜 유혹시켜서 자기 사람  만들고 자기 편 만들기 위해서 한 그 얼이 전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를  정죄로 영원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이 똑 끊어지도록 만드는 이건  자멸 자살하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게 감쪽같이 감춰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생활로 하고, 말할 때야 뭐 사실과 맞든지 안 맞든지 상대방만  어쨌든지 이해만 시킬라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래서 거짓말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들을 친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말에나 행동에나 저게 거짓된가, 저게 하나님에게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좀 늦추어서 멀리 보고 넓게 보고 거게까지를 좀 생각해서  사는 사람들은 말을 잘 못 합니다. 왜? 거게 맞출라 하니까, 거게 거치지 않는  말을 할라 하니 그 말이 많지를 못 합니다. 뭐 그거 생각지 안하고 그저 거짓말  참말 주 대서 상대방만 이해시킬라고 하면은 얼마든지 주 댑니다. 그런  사람하고는 말을 못 합니다. 말 안 하니까, 제가 중얼거리고 말을 하고 말 안  하니까 제 말에 접혀서 말을 못 하는 줄 알지마는 그 사람 병신 노릇 하는 데  따라서 같이 병신 노릇하고 저주받을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예 말하다 안 되면 그만 말지 거게 대해서 아무나 따나 자꾸 주 대서,  거짓말하는 자를 이길라면 거짓말하는 자가 돼야 또 거짓말을 정복하는 것이지,  그 사람은 참말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하는 그 진실한 자의 정의에 대해서, 진실한  자가 어떤 자가 진실한 자인가 하는 그 정의라는 것이 그것이 조그매 그런 것이  아니고, 영원히 가도 바로 말했어야 되지 바로 말하지 안 했으면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바로 말하지 안 했으면 진실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지식인 것을 알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기 지식을 삼는 그것이  지식 진실이요, 하나님 말씀대로 허하는 그것만이 진실이지 그외 딴거는 다  멸망이기 때문에 허위 진실 사람 진실 그 세 가지 진실은 다 성경을 근거한  것들입니다. 이래서, 자꾸 사람이 거짓된, 마귀에게 속한 자이니까 거게서  헤어나서 현실을 통해서 점점 진실한 자가 자기가 돼야 되는데, 진실한 자가 되는  그 근거는, 근거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그 소개하는 신구약 성경 말씀의 혜택을  입어 가지고 진실한 자가 되어지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옳다, 참되다, 하나님은 참되다, 하나님은 참 계신다,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분에게만 모든 것이 참되고 옳은 것이 있다, 선생님이다. 선생님 되는 선생은  하나뿐이니 곧 홀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주님께서 소개를 하셨습니다.

 이래서, 16절로 17절까지 읽었는데 이 세상은 멸망할 것으로만 가득 차 있고  멸망하지 아니할 것은 조그만한 것도 섞여 있지 않다. 전부 멸망 덩어리다  말했습니다.

 그것을 어데서 보고 하는 고 하니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멸망치 않고'라 하는 것은 이것은  앞으로, 멸망치 않고라는 말이 아니오. '멸망치 않고' 이제 왜 그라면 '멸망치 않고'  미래사로 기록했느냐 하면은 멸망한 것이 앞으로 완전히 멸망을 하는데 멸망하지  안하고 구원 얻을 것이 구원 얻을 것이 미래가 돼 있기 때문에 여기 미래사가  끼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온 세상은 멸망만 가득 찬 세상이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멸망한  것이라도 자기가 이용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죽은 것이라도 이용 못 할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는 자기가 이용을 하면은 그것이 이용의 가치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죽은 것을, 성경에 말하기를 죽은 것을 산 자가 먹으면  산 자의 피도 살도 됩니다 그러나 그 죽은 자는 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거게서  생명은 구하면 안 됩니다. 죽은 자에게서 생명은 구하면 안 되고 죽은 자를  생명이 먹어서 점령해서 먹으면, 산 자가 점령하면 생명화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온 세상은 멸망뭉텅이뿐이라 하는 이것을 믿는 것이 아주 큰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멸망이 있는데 이거 온 세상에 온 우주에 생명이 하나 왔으니 그  생명은 하나님의 독생자신데, 하나님의 독생자 외에는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생명이 없다 말은, 생명은 힘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데, 자기가 도움을 받을 것이나  지도를 받을 것이나 또 자지가 실력을 갖출 것이나 모든 삶에 속한 것을  마련하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그분뿐이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받지 그분 외에  딴데서는 마련할 것이 없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이나 과학이나 어떤 권세나 어떤 것이라도  그것을 산 자가, 산 자라 말은 어떤 게 산 자인고 하니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것이 산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것인데 산  자가 그것을 취해서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면은 하나님이 양식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보배가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살고 영감으로 살고 진리로 사는 데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갖추는 건 좋지마는 이 세 가지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  버리고 그것을 취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생명을 버리는  자는 다 멸망할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버리고, 예수님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를 버리고라도 그것이 더 가치 있고 필요하기 때문에 취하는  자,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떠나, 진리를 어겨, 영감을 어겨, 예수님의 대속의 사죄  칭의 화친을 어겨, 벗어, 벗어서 세상 걸 취하는 것은 제가 일류 대학에 갔든지 뭐  재벌이 됐든지 권세자가 됐든지 그것은 생명을 떠나 멸망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거는 멸망 외 딴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고로, 세상은 멸망 뭉텅이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게는 산 것이 하나도  없다. 거게는 내가 배울 것도 없고, 지도받을 것도 없고, 인도받을 것도 없고, 내가  맡길 만한 것도 없고, 의지할 만한 것도 없고, 바라볼 만한 것도 없고 다만 그것은  우리의 양식같이, 그것은 산 사람이 죽은 생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처럼, 산  사람이 죽은 모든 동물과 식물들을 다 이걸, 곡식도 다 삶아 가지고 죽은 것 이런  것들을, 죽여서. 살았어도 죽여서 자기가 먹는 것으로 양식 삼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걸 똑똑히 알아서,  그러면 세상이 어떤가? 세상관은 천 가지 만 가지의 세상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관이 있는데 이 세상관을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는 것이 세상이라. 세상은  멸망되어 있는 것이 세상이라. 그런데 멸망돼 있는 세상을, 왜 멸망되어 있는  세상을 보존해 두느냐?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은 경건한 자를 거게서 지금  만들어 내기 위해서 보존해 두신다 했습니다. 그러면 이 작업이 다 끝나 버리면은  그 모든 것은 다 심판주가 와 가지고서 멸망을 시킵니다.

 이러니까, 그다음에 덧붙여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사 독생자가 온  것은, 그는 창조주시요 주재자시요 주권자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당신이 지으신  이 모든 영계와 물질계가 있는데 물질계가 범죄했기 때문에 이것을 범죄한 대로  심판해 가지고 멸하려 오실 터인데 지금은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오셨다 그렇게 밝혔습니다.

 이래서, 세상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세상관을 바로 가져야 되겠고,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있는 것이며 순전히 멸망뭉텅이지 거게는 생명이나  구원이라 하는 것은 먼지만치도 섞여 있지 않다 하는, 이렇게 보는 것이  성경대로인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세상관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세상관을 이렇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천에 하나가 들었거나 말았거나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음을 듣는 것이 이 세상에 나가면은 다 같은 줄  알지만 예수 믿어도 같지 않습니다.

 이래서, 우리 지금 총공회에서 사람들이 제각각 이러니 저러니 해 가지고서 뭐  간판을 붙이니까 전도하니까 사람들이 잘 안 오고 하니까 간판 붙이는 것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된다 또 찬송가를 이래 하니까 방해가 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에게 방해가 돼서 그들을 따라서 하지 안하면은 안 되는 그  사람이라면 이 복음은 그것보다 천 배 만 배도 더 크기 때문에 이 복음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가르쳐서 이 복음화시킬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문제되는 그런 사람이 이 복음화는 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이 복음와 깨달은  사람은 나가지도 안하고 그런 데에 미혹받지도 안하고, 이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람은 작든지 크든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외유내강을 가지는 것이지 속에서는 다 절대성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이  복음을 바로 깨닫고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관을 바로 가져야 되겠고, 그다음에는 세상에는 생명이라 구원이라  구원이라고도 했고 또 생명이라고도 했는데, 생명이라 말이나 구원이라 말이나  한가지 말인데 생명은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생명을 얻는  과정의 그 방편과 그런 것을 가리켜서 말해서 구원이라 말한 것이니 곧 독생자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만이 생명이요 그 외에는 생명이 없다, 구원이 없다.

생명이 없고 구원이 없다 말은 생명 지도를 받는 거, 생명 교훈을 받는 거, 생명  인도를 받는 거, 생명에게 속하는 거, 생명 권세를 가지는 거, 생명 소유를 가지는  거, 전부 생명에 속하고, 참 멸망 가운데 있는 자신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데,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이분은  생명덩어리요, 구원덩어리요, 그는 다 영생덩어리요, 의의 덩어리요, 진실덩어리요,  옳은 것 덩어리요, 참된 덩어리인데, 그러면 이 큰 참되고 옳고 바르고 의롭고  생명이요 무한이요 완전이요 영원인 뭉텅이가 우리에게 왔는데, 그 뭉텅이를  내것을 삼는 데는 어떻게 삼을 수가 있느냐? 내것 삼는 그 방편을 뭐라고 성경에  말했습니까? 뭐라고 말했어? 뭐라고?  '저를 믿는 자마다' 믿는 거 외에는 방편이 없습니다. 믿는 것 외에는 방편이  없어.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어떤 걸 믿는다는 것이냐? 그 사상과 주의와 교훈과  우리에게 전한 그 복음인데, 곧 복음인데 이 복음을 알고 이 복음을 인정하고 이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이 생명을, 참 자기가 이 생명에 속해서  생명을 받아서 영생하는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이시요, 이 생명이, 신인양성 일위가 곧 도성인신하셔 가지고  신인양성일위로 사활의 대속을 베푸시고 사십 일 후 승천하신 그후에는 우리와  같이 있지마는 신령한 무형의 존재로 이와같이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했으나 함께 있는 다는 말씀은 신령한 무형의  존재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무형의 존재로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은 우리들의  편리를 봐서 우리들이 바다에 가 있어도 어데 있어도, 만일 유형의 존재로  있으면은. 유형의 존재가 있으면은 거게만 있지 딴데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형의 존재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고, 또 우리가 눈에 보이면 믿기 쉽겠다  하지마는 눈에 보이면은 그는 예수님의 한 일 모퉁이만, 한 모만 보고 어떤 한  각도만 보지 예수님의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타나시기를 신구약  성경 육십육 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역사하셔서, 그러면 성경 전부를  아는 사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요 성경 전부와 자기와 하나된 사람이 예수님과  자기와 하나된 사람으로 그렇게 이 복음 인격으로. 복음 신인양성일위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래서 그분을 믿는 것만이 구원 얻는 유일한 방법인데, 그분을 믿는 것은  뭐인가? 곧 그분이 우리에게 알기 쉽게 나타난 것이 복음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믿는 것이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 전에도 늘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읽고 또 자기가 외우고 실행해 보고 그라는 가운데에서  들을 때에 나에게 말해 주는 그이가 누군가? 껍데기는 사람이지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용해 가지고 그와 같이 써 가지고 하시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창세기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내나 그 하나님인데 그 다음에는 또 보니까 사람이 아니고  천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나타나서 말씀한 거와 같이 오늘도  그와 같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백 목사가 여기서 지금 말하는 것은 백 목사  사람이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로 쓰시고, 당신의  지체로, 안 되면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만일 내가 믿지 안하고 하면은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도구만 되지 내 자체의 구원은 되지는 않습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서 처음에 시작해서 중간까지는 하나님 말씀을  전했으면 하나님의 도가 저를 통해서 나타나지마는 중간에서부터 인간 말을 하면  그때는 즉시 하나님의 지체가 아니고 거짓 선지자 마귀의 것으로 화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듣는 자는,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하시기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다른 이의 음성은 듣지 않는다 그말은, 우리가 양심을 써서 이래 성신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 말씀을 바로 들을 수가 있지 하나님 말씀을 잘못하면 마귀  말인지 하나님 말인지 분별하지를 못하고 그만 혼돈돼 가지고 미혹받기 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말을,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뭘로 마친다 했습니까? 육체로  마친다 그말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다 말은 순전히 인간만의 자기  주관으로 마친다 그말입니다. 성령은 객관 은혜인데, 객관의 능력에게 붙들려서  객관의 사상을, 객관의 주의를, 객관의 소욕을, 거게 피동돼 가지고 그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데 전하다가 바로, 찰나도 아니고 찰나보다 더 빠르게 그래 전하다가  자기 주관으로 그만 돼 버리는 것을 가리켜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마칠 수 있게 이렇게 교체가 빨리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하나님으로  시작한 것이 자기로 끝마칠 수 있고 자기로 시작했던 것이 이제 그 사람이  고쳐서 또 하나님으로 시발될 수 있는 이것이 빠르게 교체되기 때문에 우리들이  항상 깨어 있어야 되고, 왜 빠르게 교체되는가? 빠르게 교체되는 이런 신령한  민활한 것이 아니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멸망 속에 생명의 구원이 왔는데 이 생명의 구원에 내가 입을  대고 빨아먹는 것처럼 생명의 구원에 여게 연결돼 가지고 그 생명과 구원을 내가  취하는 방법은 뭐이냐? 내가 곧 우리의 마음으로 믿는 것, 우리 영은 다 접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믿는 것, 우리 몸으로 그대로 감각하고 움직이는 것  그것이 유일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믿는 그 믿는 것은 어떤 게 믿는 거냐?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또 거게서 외우고 또 그대로 실행하고 거게서 생각하고 깨닫고 하기를 뭘  생각하고 깨닫게 해?. 그러면 말씀하시는 이가 곧 하나님이시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요, 성령이 말하는 것이 주님 말하는 것이요 주님 말씀하신 것이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데에 껍데기는 사람이지마는 그  속에 하나님이 그를 붙들고 말씀할 수도 있고 마귀가 그를 붙들고 말할 수도  있다 그거요. 그러면 금방 우리가 상대방 말할 때에 그 사람이 성령의 말을  하다가 금방 마귀 말을 합니다. 이제 그러면 그걸 우리가 노력을 하면 알 수가  있다 말이오. '그 사람 말은 순전히 미혹시키는 마귀 말이다'  내가 탄식하는 것은, 우리 교역자회에서 교역자라 하는 것이, 교역자라고  하나님께서 그 직책을 맡겨 그렇지 그 사람들이 구원 잘 이루고 있는 거 아니오.

그 사람이 뭐 잘 깨달은 것 아니오. 주일학교 학생은 잘 깨닫고 무식한 사람은 잘  깨닫는데 목사들은 전연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있어요. 보면 같이 앉아서  말해도 '저거는 순전히 마귀가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마귀가 말하고 있는  것이지마는, 그들에게 따지면은 알 수 있는데 따지기를 싫어합니다. 이 말이  이렇고 이렇고 이러면 어찌 되느냐 하면 그만 중간에 가다가는 듣기 싫어해. 마귀  말이라는 근본이 드러날상바르면 그만 말하기 싫어해. 그만 싫어합니다.

이래 가지고 마귀 말을 좋아하는 자, 마귀 말을, 성경에 말하기를 땅에 속한 말과  하늘에 속한 말이라 그렇게 구별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땅에 속한 자는 땅에 속한  말 하매 듣기 좋아하고 잘 듣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말을 하매 잘  듣고 듣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래서, 복음에 우리가 믿는 걸로 접해야 되는데,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거기서 나에게 지금 가르쳐 주는 분이 누구시며, 내가 들을 때에  나에게 전해 주는 분이 누구시며, 보니까 껍데기는 바뀌어지지 않는데 속은  바뀌어집니다. 바뀌어지는 건 여러분들도 잘 체험할 걸요, 백 목사도 한 설교  가운데에 쭉 계속에서 하나님에게 이용당해서 하나님이 백 목사를 통해서 말씀할  때도 있고, 말씀하다가 어느 새에 바뀌어졌는지 그거 옛사람 악령이 들어서  말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그 좀 가끔 가다가 바꾸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볼 수 있을 때에는 바꾸어져서 다른 그런 것은 다 밷어 내버려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만 들어 강직해야 되니까 여게는 깨어 있지 안하면 안  됩니다.

깨어 있어야 되는데, 깨어 있어야 되는데 여게 말씀을 들을 때에 주님이 친히  말씀해 주시는지 마귀가 말해 주는지 그것을 구별해서 듣는 그 귀가 무엇입니까?  뭘로 들어야 됩니까? 양심으로 듣고, 양심으로 들어서 애를 쓰면은 영감으로 듣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은 껍데기는 진리요 속에 알맹이는 영감이  돼야 바로 되는 것인데, 그가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별별 위험성  있는 그런 작용들과 정반대되는 이런 작용의 역사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거게  우리가 양심을 쓰지 안하는 사람은 귀가 먹은 사람으로 그렇게 취급하고,  양심으로 들으면, 양심으로 들어서 성령이 옳다 인정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제가  받아야만 그게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접할 때에 자기가 거게서 생각해서 깨달아지는 것, 주님도  깨닫고, 거게서 그라면, 우리가 믿음이 보배인데 믿음은 어데서 얻은 믿음이라야  됩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생겨진 것  아니오. 하나님이 선물로 줘서 생겨지는데 선물로 주는 생겨지는 그 믿음이  어데서 생겨집니까? 들을 때에 생겨지고 읽을 때에 생겨지고 외울 때에 생겨지고  실행할 때에 생겨지고, 무엇을?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거게서 중단하지 안하고 그다음에는 자기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양심으로 이제 듣고 읽고 외우고 실행하는 거게서, 또 그러면 그 속에서 내나  나와. 자기가 양심으로 들을 때 있고 잡탱이로 들을 때 있는데 잡탱이로 들을때는  참이 나오기가 어렵지마는 양심으로 들으면은 믿음도 거게서 더 진실한 믿음이  나오고 또 깨달음도 진실한 깨달음이 나오고 소망도 진실한 소망이 나와요.

그러면 처음에서, 껍데기에서 믿음이나 소망이나 '주님이 말씀하신다' 하는 그것도  자기가 그 실상에서 멀어지는 먼 주님이 우리에게 건너올라고 애를 써 그와같이  하고 있는 것인데, 양심을 쓰면은 차차 그 실상에 가까와지고 그라다가 영감이  되면은 실상이 되어지고 이라면은 나중에 가서는 필연적으로 그 사람과 이  세상과 어찌 됩니까?  그 사람과 세상이 어찌 됩니까? 저 OO교서 오신 분? 그 사람과 세상이 어찌  됩니까?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할 때 어찌 됩니까? 어찌 돼요? 이 학생은 어찌 돼?  그 사람이 세상을 대할 때에 세상과 어찌 돼? 저 OO교회서 온? 대립이 됩니다.

대립이 됩니다. 세상과 대립이 됩니다. 필연적으로 대립이 됩니다. 과거에는  친했던 세상이 대립이 되고, 과거에는 그거 없으면 안 되겠다고 그게 좋아서  그렇츰 그렇던 것인데 나중에 그것이 있으니까 세상이 자기와 확실히 대립된다는  자체가 변해짐으로써 대립을 압니다. 자체가 세상하고 하나되니까 하나되어  있으니까 변화가 없으니까 대립이 안 되고 변화됨으로 대립이 되고, 변화됨으로,  지식이 변화되면은 지식적으로 대립이 되고 자기 행위로 변화되면은 행위로  대립이 되고, 자체가 변화되면은 자체는 세상과 대립이 되고 누구하고는  하나입니까? 하나님하고는 하나입니다.

이렇게 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 구원이기 때문에 여게는 그만 시발부터 끝까지  진실이 없으면 다 헛일입니다. 기독자의 구원, 기본구원과 건설구원, 구원은 두  가지 구원이 있는데, 이 구원은 진실 없으면 다 헛일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을 말한 걸 모두  이단이라고 여러 해를 뭐 대적했어. 여러 해가 아니라 수십 년을 이단이라고  대립을 했다가 지금은 이단이라 말이 슬슬 없어지나 뭐 자기가 그거 사과 안  해도 어짜든지 어서 '구원은 둘이라,' 이러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이미 얻어 놓은  것이지마는 우리가 이 건설구원을 얻을라고 노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노력이지 기본구원은 애쓸 것도 없고 우리가 알기도 전에  벌써 돼 가지고 있는 구원이라. 이거 얼마나, 이거 구별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진영에 믿는다고 하지마는, 믿는다고 하지마는 실상에 가 가지고는  지금 대립이 돼 있어. 실상에 가 가지고서는 대립이 돼서 지금 교역자들이  건설구원에 대해서 그것을 혼돈해 가지고서 지금 이해를 안 하고 있습니다. 안  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현실에서 우리의 정력이 활동하고, 이 심신의 정력이  현실에 활동하고, 이 정력이 현실에서 활동하면은 뭘 만드는가? 현실에서 심신의  정력이 활동하면은 그 정력이 뭘로 화해집니까? 그 정력은 없어집니다. 현실에  자기가 투자한 그 정력은 현실을 지내면 없어져 버리요. 없어지면 그 현실은 뭐  화됩니까? 저 장로님? 처음이라도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알란가 몰라.

 현실에 자기의 심신의 정력이 나와 가지고 현실에 활동을 하는데, 활동하면은 그  정력이 남아 있습니까, 그 정력은 현실이 지나가면 없어집니까? 여기 OO교회서  온 집사님? 없어집니다. 그러면, 없어지면은 그 정력이 아주 없어집니까, 그  정력이 다른 것으로 화해집니까? 저 뒤에 장로님? 바로 요 가 줄에 있는 장로님?  OO에서 오신 장로님 한번 대답해 봐요. 이거 알리기 위해서 하는 거라. 한번  대답해 봐요. 그런 건 이 세상에 가깝기 때문에 알 수가 있는데?  우리의 정력은, 현실은 우리가 현실을 살라 하면은 정력으로 활동합니다.

정력으로 이 현실을 삽니다. 정력 없으면 죽은 송장이기 때문에 현실을 못  삽니다. 심신의 정력이 현실에 활동하는데 현실에 활동한 그 정력은 그라면 남아  있느냐? 없어져 버립니다. 그거는 소모돼 버렸어.

 마치 촛불을 켜는데 한 시간 촛불 켰으면은 환하게 빛을 나타냈던 초는  없어졌습니다. 닳아서 없습니다. 기름도 없어졌습니다. 그 정력은 닳아서  없어졌습니다. 없어졌으면 그 정력이 지금, 기름이 닳아서 빛이 된 것처럼 우리의  정력이 소모돼 가지고 무엇이 돼졌습니까? 그거 한번 대답해 봐요. OOO장로님?  녜, 영생이 아니면 사망이라 이라는데 그것이 곧 기능이 됩니다. 기능이 돼. 한  시간 정력을 기울여 가지고 썩어진 것이든지 영생할 것이든지 둘 중에 하나  만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지금 그 정력을 기울여 가지고 한 시간 동안에 어학을 할라고  자꾸 이렇게 외워서 단어를 만일 한 백 개나 외웠다 하면은 그 사람의 정력은  변해서 뭐이 됐습니까? 어학의 기능이 됐습니다. 어학의 기능이 됐습니다. 어학의  기능이 됐는데, 어학의 기능도 될 수가 있고, 이제 그 사람이 한 시간 동안 성경을  외우든지 성경을 읽든지 해 가지고 성경의 지식이 됐습니다. 성경 지식의 기능도  되고 어학 지식의 기능이 됐습니다.

 그러면, 말하기를 둘로 말했습니다. 사람의 심은 것은 그대로 거두나니 육체로  심은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으는 자는 뭘 거두요? 영생을 거둔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기가 지식의 기능을 만든 사람은  영생하는 기능을 만들어 영생하는 지식의 기능을 만들었고, 또 오늘이라도 죽으면  없어질 거 그런 기능을 만든 거는 그는 썩어진 기능, 그것을 가리켜서 육체를  위해서 심은 자라 그말이오. 육체를 위해서 심은 자, 성령으로 심지 안하고 육체로  심은 자는 그렇게 된다 해서 썩어질 것과 썩어지지 안할 것 이런 것으로써  사람이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래서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생을 거둔다 그렇게 말씀했어.

그러면 성경은 변동 못 하게 이렇게 절대적인 이 절대성을 가진 이것을 결박이라,  이렇게 절대적인 진리의 법도라 이라는데, 이것은 이리저리 변동을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로 아는 것이 힘이고 바로 아는 것이 구원의 초보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꾸 배워야 되지 그렇게 다 쉽게 알라고 생각지 말아요. 수천 년 동안 학자들이  거머쥐고 날뛰었지마는 이것이 발견되지 안한 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뭐 백  목사가 명철해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당신이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나타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백 목사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내  주시니까 안 것이오. 이러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들어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깨닫게 될 것이고 육체의 사람은 여기서 반항이 나옵니다. 그러면 자체가  땅에 속했나 하늘에 속했나 하는 데서 반항과 긍정과 감사와 또 불평이 거기서  생겨나옵니다.

 삼십분 기도와 주일학교 반사들이 공과를 외우고 체험하고 경험할 것과  자기에게 하나님이 붙여주신 양떼를 마음 속에 넣어 놓고 항상 길러야 합니다.

그라고 OOO권찰님 구역은 언제든지 구덕산으로 가는데 어데든지 좋기는  좋습니다. 좋지마는 우리는 단일 교회라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단일 교회.

단일 교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는 어짜든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우리가 총공회라 하는 공회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공회라 말은 단일 교회라  그말입니다. 공회라 말은 단일 교회라 그말이오. 공회라는 것은 단일 교회. 공회는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역사에 교회가 하나요 또 이 공간적으로 세계 교회가  하나라. 단일 교회라. 그러면 공회라 그말은 단일 교회라, 단일 교회라. 그러기  때문에 단일 교회 속에 우리도 들어서 들어 가지고 있는 단일 교회라는 그것을  우리가 사모하면서 공회라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이 공회라는 것도 하지마는 교역자들 가운데 공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해야 그게 믿어지지 안하니까. 공회는 뭉친 것인데 뭘로 뭉쳤는가? 진리로  뭉쳤고 영감으로 뭉쳤고 예수님의 피로 뭉쳤고 영생으로 뭉친 뭉텅이에 한  덩어리입니다. 여러 뭉텅이가 아니오.

 그러고 십 분 기도 후에 결혼 상담이 있습니다. 결혼 상담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을 좀 여러분들이 생각해 가지고 좋은 그런 안이 있으면  신고함에다 써넣으면 그것을 보고서 참고할 것입니다. 뭐인가 이 결혼 상담을  조금 더 실질적으로 해야 되겠고 좀 효과적으로 해야 되겠는데, 지금 하는 것이  너무 형식뿐이지 아무 실효가 별로 가져오지 못합니다. 제가 먼저 세 번  사회했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많은 결혼이 되기는 됐지마는 또 내가 늘 그것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이러니까 좀 좋은 방편을 여러분들이 기록해서 신고함에  넣어 주면 좋은 방편은 우리가 다 같이 채용을 하겠습니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사람들 그거 금하십시오. 그거 위생적으로, 지금 자꾸 인제  발명이 되니까 말하지마는 그것이 자기 몸에 대해서 굉장한 요소를 죽입니다.

자기에게 아주 필요한 중요한 요소를 그것이 죽여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런  면 아닌 다른 면에서는 산 것 같지마는 제일 좋은 중요한 요소면에서는 죽어  있기 때문에 그 면에 대해서는 깜깜해서 도무지 아주 중요한 그 신경, 아주  예민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신경을 죽여 버리는 독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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