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생활과 새은혜

 

1982. 4. 5. 월새

 

본문 : 사도행전 1장 6절∼9절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또 때의 기약에 대해서만 알 바 아니요 그렇게 해석하기 쉽습니다. 나라와 때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거기에 말한 질문에 대해서는 때가 문제보다도 나라가 첫째  문제, 그 다음에 때는 거기 소속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와 때 전부를 다  포함해서 한 말입니다.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희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우리의 건설구원 성화구원 이것은 다 영생성을 가진 구원입니다. 완전성을 가진  구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요소가 아니고 우리의 자연인에 인적 요소를 아주  초월한 고차원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고 일으킬 수 없는 것이며 순전히 완전자, 절대자,  영원 불변자, 한 분 외에는 없으신, 한 분뿐이신 이분 만이 할 수 있는  조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만들어 왔으면 만들어 놓은 것이, 만들어짐을 받은 것이  만들어진 대로 있고 움직이게 했으면 움직이게 한 대로 움직여지는 것뿐이지,  제가 들어서 만들어짐을 인해서 더 만들어지지도 못하고 움직이게 한 그것만  움직이지 그 이상 움직여질 수도 없는 것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입니다.

 피조물이,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만들어진 그것이 제대로 이제는 커지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했으면 한 번 움직임을 인해서 두 가지 움직여 세 가지 움직여  움직임도 점점 넓어 나가고 커져 나간다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보는 자연주의 신학자들이  말해 놓은 것이요 그것이 기독교의 진화론을 말하는 이단자들의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꼭 간추려서 말하면 그는 부정하지마는 실지의 그, 실지로 생활에  있어서는 이 구별을 가지지 못하고 혼합시켜서 역연 이단의 걸음을 걷는 것이  우리 일반 신자들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있는 것을 다해서 죽도록 충성을 한다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이미 주신 그 은혜를 배반치 않고 그 은혜 생활 하는 것이오 왜.

은혜 생활하는 것은 그것은 내가 다할 때에 비로소 은혜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다할 때에 은혜 생활이 되는 것이요 다하지 않을 때에는 다하지 않는 그것이  은혜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그 은혜 생활을 하는 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100에 하나가 감해지면 99지 100은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것은  전체를 구속했기 때문에 전체가 다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몇 프로 은혜 생활을  하는 것은 은혜 생활이 된 것이 아니고 은혜 생활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가 동원되고 둘이 동원되고 열이 동원되고 이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이  구속한 그것이 다 동원이 돼야 비로소 이제는 은혜 생활을, 은혜를 다 감당해  은혜 받은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은혜 생활을 하는 것이 되고 부분적으로  그러할 때에는 은혜 생활을 하려고 하나씩 둘씩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는 자가 깰 때에는 그 자는 요소가 차차 차차 깨서 일어서 가지고  길을 가면서도 잠이 깨지 아니했으면 그 사람의 감각이나 정신이나 모든 비판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잠이 완전히 깼을 때에 비로소 그 마음의  요소 몸의 요소들도 한꺼번에 깨어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말은 있는 것을 다해야 이미 받은 바의 은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가 취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는 이 승리를 또 새 은혜를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 확고히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죽도록 충성해 봤자 우리가 새것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당하는 것이라, 은혜 생활하는 것이라.

 그러면 은혜 생활하는 그것은 다 산 생활이요 영생인데 그것을, 이미 받은 바  은혜에 속한 그것을 우리가 할 수가 있는가. 아니오. 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소. 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단속하고 몸이 몸을 단속해서 이미 구속받은 것이 우리만  게을부리지 않고 다 달려들면, 다 일어서면 이미 받은 바의 은혜 생활을 이 은혜  받은 자가 다 일어날 수 있다 그말이오. 이 은혜는 이 은혜 생활을 할 수 있는 그  정도에서, 요소에서, 그 양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은혜  생활을 자기가 하는 것이 자기 힘으로 안 받은 것을 새로 하는 것이 아니고 받은  은혜를 배반했던 이것이 받은 은혜를 지금 자기가 감당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생명에 속한 것이요 영생에 속한 것이요 완전에 속한 것이요 영원  불변에 속한 힘인데, 이 힘은 속한 것인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서 죽었던 것인데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것 아니고 주님께서 만들어 주셔서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살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 그것이 정상이요, 살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살지 않는 것은 은혜를 배반하고 은혜를 지금 버리고  자고 있는 것입니다. 비정상입니다.

 이렇게 받은 바의 은혜 생활 하는 것은 제일 강한 자 사탄을 능가하는 것이요,  사망을 능가하는 것이요, 모든 죄를 이기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살렸고  일으켜 놓은 것인데 그것을 우리 힘으로 한 것 아니고 이미 일으켜 놨소.

 일으켜 놨는데 일으켜 놓은 것만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런 벌써 능력이 와  있습니다. 이미 주께서 만들어 놓은 것은 할 수 있지마는 만들어 놓은 데에  털끝만치도 만들어 놓은 그 이상은 우리는 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할 수 있다  그말은 제가 창조주라 그말이요, 제가 자존자라 그말이요, 털끝만치라도 자존하면  그것도 자존이오. 털끝만치라도 자존을 자기가 인정한다면 그는 내나 적게  인정하나 많이 인정하나 꼭 같은 것입니다.

 뭐 삐뚤어진 것은 많이 삐뚤어졌다고 죄가 되고 적게 삐뚤어졌다고 죄가 안  되는 줄 압니까.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에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삐뚤어졌으면  그것으로도 전체는 다 죄에 메여서 정죄 받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만들어 놓은 그것은 다  영생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신 그분이 만들지 우리 스스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인데, 만들어 놓은 그것이 우리가 그대로 사는 것이 뭐이냐. 깨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는 것이오. 자는 것은 그 능력이 우리에게 와 있기는 있는데  이대로의 활동 하지 않고 있으니까 죽은 것은 아니지마는 죽은 것하고 같이 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서 표현을 잔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깨어 있으면, 은혜 생활 하면, 죽도록 충성하면 내가 다시 생명이  승리하는 그 승리를 네게 주겠다, 또 새로운 그 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

 그러면 네게 있는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이, 연결된 그 연결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그 부분을 점령할 수 있도록 연결된 그 연결이 승리해 가지고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그 부분을 연결된 부분이 점령하도록 해 주겠다. 그러면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있는 것을 다했으니까, 다하니까 이루어지고 안 하니까 이루어지지 않으니,  다했기 때문에 제가 주관이 벌써 다한 것을 제가 안다 그말이오. 다했는데  이루어지니까 다한 그 힘으로 이루어진 줄 그래 알지마는 다한 그것은 다만 이미  은혜 받은 그 은혜 생활을 하는 것이요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새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연보하는 것도 자기가 받은 바의 그 물질 가지고  하나님께 연보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또 배나 몇 배나 이렇게 물질을 주십니다.

물질을 주시면 그 물질을 하나님에게 바쳐 하나님의 뜻대로 산 그 값으로 줍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그 값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그 값으로 주지 아니하고 그것은 끝나 버렸고,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물질 관리를  잘해 물질에 충성하니까, 내가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다른 것은 더 못합니다.

재물에 충성하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에 물질을 배를 주든지 그만침 주든지 몇  배를 주든지 줬습니다.

 줬으면, 먼저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쓴 그 대가로 자기가 받은  것입니까, 또 하나님께서 대가로 주신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것으로 끝났고 내가  먼저 준 것 그것을 잘하니 다시 주님이 또 새로 물질을 줘서 그렇게 잘 하도록,  이번에 준 물질은 새것으로 준 것입니까 먼저 물질 생활을 잘한 그 대가로 주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새로 준 것입니다. 전적 새로 준 것이오. 대가로 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이나 이것이나 꼭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하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에게 이 건설구원  이루어지는 것도 실은 이것이, 건설구원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구원을 가지고 이  구원하고 나하고 둘이 합작을 하니까 이 구원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을 말하고, 이미 기본구원을 얻은 이 구원을 자기가 버리지 않고 잘  감당하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새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이니 건설구원의 이 구원도  전적 하나님 혼자 하신 것이지 인간이 한 것 아니다, 인간은 죽자껏 한다는 것이  받은 바의 은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고, 받은 바의 은혜를 가지고 세상 생활  하는 것을 가리켜 잔다 그말입니다.

 성경에 잔다 말은 세상으로 잔다 말이오. 물질로 자고, 권위를 자고, 지식으로  자고, 뭐 지위로 자고, 행락으로 자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으로 이미 은혜  받아서 그 생활 할 수 있는 그것이 자기에게 돼 있는데, 그 사람이 은혜 받은  자로서 살지는 않고 세상의 무엇으로 인해서 이 은혜 받은 생활 안 하고 세상  생활 하는 그것이, 은혜 받은 그것이 살아 있기는 있지마는 아무리 장사라도 누워  자 버리면, 잠들면 송장 한가지요. 숨만 빨딱거려. 일어날 수는 있지. 그것이 죽은  자와 그것이 다르지. 죽은 자는 다 같은 송장 같지만 일어나지를 못하지. 자는  것은 송장 같이 자기는 자지마는 푹 찌르면 벌떡 일어날 수가 있지.

 이러니까 은혜 받아 가지고 은혜 생활은 하지 않고 세상 생활 하는 것을  가리켜서 잔다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깨라 말은 이제 세상 생활 하지  말고 네가 은혜를 많이 받았든지 적게 받았든지 은혜 받은 대로의 생활을 해라.

 사데교회에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도다 그러므로 네게 있는  죽게 된 것을 다시 일깨워 살리라" 살리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들은 것은 생각하고 또 받은 것은 그대로 지켜 행하라"  이랬습니다. 이것이 깨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므로 기본구원도 하나님이 내 의식 없이 당신이 하셨고, 나는 죽어 있는데  했고, 건설구원은 내가 기본구원의 은혜를 감당할 때에 다시 하나님께서 새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이 이것이 건설구원이라.

 또 은혜 생활 하니까 또 새 은혜 붓고 새 은혜 부어서 건설구원은 하나님께서  여러 수십 차례, 수백 차례, 수천 차례, 수만 차례로 그가 은혜를 감당하는 은혜  생활 하면 또 주시고 은혜 생활 하면 또 주시고 은혜 생활 하면 또 주시고,  기본구원은 내가 은혜 생활을 안 하고 죽어 있는데 당신이 단번에 다 주신  그것이고, 이제 건설구원은 은혜 생활을 할 때에 그 은혜 생활에 따라서 주시는  것이라 그말이오. 은혜 생활 할 때에 은혜 생활 하니 또 내가 다시 준다, 다시  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도 건설구원도 전적 주님의 은혜요,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해서는 받은 은혜 감당하는 것, 은혜 생활 하는 것, 무궁세계에도 우리가  이만침 구비한, 바울 같은 그 구원을 이루었으니까 이 이룬 이 구원 이것 가지고  무엇이 독단으로 창조해 나가는 것, 성장되어 나가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그분으로 인해서 창조되고 성장되어 나갑니다. 이것을 굳게 잡아야 됩니다. 아주  이것이 말세에 필요합니다.

 어제는 내가 설교할 때에 심히 힘이 들었습니다. 힘이 들었으나 아주 나로서는  새것을 다시 얻어 발견해서 큰 양식을 먹고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확실히 구별할 것. 전적 우리의 구원은 성령님의 은사, 성령님의  은사는, 성령님이 이 진리 안으로 너희들을 인도하리라 이랬습니다. "보혜사가  오면 너희들을 진리 안으로 인도하리라" 말씀했고 또 "내 것을 가지고 너희들에게  증거하리라" 이랬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진리로 우리를 도우시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래서 보혜사라 이렇게 주님이 처음에는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성령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게  하는 이 방편은 무엇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  갈라디아 6장 6절인지 거기에 보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내게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혔고 나도 세상에 대해서 그러하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게 있는  세상은 죽었고 이제 세상에 대해서도 나는 죽어서 세상에게도 나는 필요 없는  자요 세상도 나에게는 필요 없는 자가 됐다" 갈라디아 6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기에 땅에 있는 소망을, 땅에 있는 소망을 이것을 버려야, 이것을 버려야  거기 죽는 것이 생겨집니다. 이것을 버리면 무엇이 죽습니까. 이것을 버리면  옛사람이 곯아서 죽습니다.

 악령과 악성과 악습은 그것의 소망이 뭐이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그러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우리를 달래다가 안되면 꾀우고 꾀우다가 안되면  위협을 줍니다. 위협을 줄 때에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우리를 저를 따라가자고  저를 따라가자고 달래다가 안되면 위협을 줍니다. 협박을 줍니다. 우리를  강압으로 합니다.

 그놈이 우리를 강압으로 할 때에, 협박을 할 때에 뭘 가지고 합니까. 무엇을  가지고 하지요. 지옥을 가지고 합니까 천국을 가지고 합니까. 무엇을 가지고  합니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가지고 합니다.

 너 이러면 이거 깨트린다, 이거 안 준다, 이거 없앤다, 내나 조금만 넓게  생각하면 그러나 저러나 하나님이 부르면 다 그것 되는 것인데. 지금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다 그것 되는 것인데 십자가에 못박힌 그 강도가 못박혔으니까  그 숨 떨어지면, 그놈이 뭐 세상을 가지고, 너 세상 뺏든다, 세상에 있는 것  뺏든다, 위협을 주나 안 주나, 너 세상 있는 생명 뺏든다, 또 너 내게 잘 보이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너 준다 이렇게 미혹을 하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면서도 행여나 지금이라도 예수 욕하면 날 놓아 줄까 싶어서 한편 강도는  주님을 욕했습니다. 대적했습니다. 그것이 뭐이요. 간교요. 그것이 뭐이요. 생의  애착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공연히 자기들을 강도라고 십자가에 사형을 시켰으면 옳게 생각하려면, 내가 죄  지어서 죄 그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지금 사형 받는다, 죄를 미워하든지, 죄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저거를 정죄 해서 십자가에 못박은 재판관과 그 모든  병정들을 미워하든지 할 일이지 저와 상관도 없는 예수님을 미워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예수님을 대적할 필요가 뭐 있소. 예수님을 욕할 필요가 뭐 있겠소.

욕하는 그것이 생의 애착욕에서 거기에서라도 이렇게 예수님을, 전적 보니까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적해 제일 미워하는 것이니까 예수님을 미워하면 혹 저거  편이라고 동정이나 받을까 해서, 거기에서 땅엣 것을 또 소망하면서 그렇게  아부하고 아첨하고 못난 자가 되어졌고 또 그 형에서 놓임을 받을까 해서, 형에서  놓임 받을까, 다시 도움을 받을까, 긍휼을 입을까 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 그때에 숨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살고 싶은 그런 애착욕이 있어.

그거 가지고 악령이 위협을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그 위협을 받았어.

 제가 6·25 때에 바로 저 앞에 거기에 황산이라는 동리 앞산에 조그만한  곰퉁이가 있는데, 인민군이 50명을 지금 뛰어 가지고 총살을 시키려고 이거 엮어  가지고, 줄로 엮어 가지고 세워 가지고 가는데, 가 가지고 이 사람들을 허리만 딱  묶고 이제 손은 풀어 놓고, 허리만 딱 묶어 가지고 손을 풀었다. 풀어 가지고  구덩이 파라, 구덩이는 뭐 하려고 파. 그 안에 들어가면 총 쏴서 이제 묻기  쉬우라고 저거들 보고 구덩이 파라 해, 이미 거기 온 것이 그만하면 죽을 터인데  뭐 구덩이 팔 게 뭐이요. 나 안 파겠다, 이미 죽을 것인데 안 파겠다는 사람 없고  다 팝니다.

 그것이 뭐이냐. 생의 애착욕에서 안 파겠다 하면 지금 죽인다는 그 위협에, 내나  죽기는 죽으면서 위협에 떨어져 가지고 거기에서라도 파면서 있는 힘껏 팝니다.

행여나 잘 파면 거기서라도 혹 긍휼히 여겨서 동정을 받아 가지고 거기서 끌러  놓을까 싶어서, 거기 끌려간 자가 이렇게 생의 애착욕에 대해서 꼼짝을 못하는  것이요 죽기를 두려워 하므로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인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좌 우편에 강도요. 강도  하나는 거기에서 이미 십자가 못박혀 죽는데 내가 이 죄 때문에 죽으니 이분은  죄 없는 분을 죽이시는데, 죄 없는 분이 이분이 죽는데 이분이 말하기를 죄 있는  자는 자기를 믿으라고 했으니까 여기에서 이미 사형받아 있는 자가 안 믿어도  죽을 것, 믿어도 죽을 것, 그들에게 아부해도 죽을 것, 그들에게 반대해도 죽을 것  그들이 반대하는 예수를 자기는 환영하고, 하나는 그들이 반대 하는 예수를  반대하고 이 두 강도가 다르지. 다른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신자와 불신자,  택자와 불택자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의 모형적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우리는 다 십자가에 못박힌 자요, 사형선고 받은 자요, 못 박혀 있는 자, 이러나  저러나 죽는 자인데 여기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이요 하나는  그들에게 붙어 가지고 무슨 생의 애착욕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악령이 우리를 미혹시키고 또 달래다 안되면 위협하고 강압하고 하는  것이 뭐이냐. 세상과 세상에 있는 소망을 내놓은 자는 마귀라는 놈이 건드리지를  못합니다. 마귀라는 놈이 건드릴 수도 없고 가까이 올 수도 없고 말해 봤자  웃기만 하고 이제 도리어 저만 손해갔지 그럴수록 더 강해질 것뿐이지 하나도  해하지를 못합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무엇이든지 하나 잡고 있으면 그  끄내기를 가지고 살살 당겨서 당겨 오면, 당겨 오면 그만침 제것이 됐기 때문에  낚시 하나 더 걸고 또 당기고 더 걸고 더 걸고, 낚시는 많이 찼으니까.

 거기에는 낚시줄이 하나뿐이지마는 당겨오면 한 개 더 걸 수 있는 낚시가 있고  또 올 수 있고 이래 가지고 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소망을 버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이것을 그대로 보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옮겨야 된다 말이오.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이것 죽은 것이라도 이것을 여기에서 옮겨 없애야 살아나고 이것이 성화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소망도 버렸고, 또  있는 이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보존하려는 것도 버렸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소망은 하나도 없고 다만 이것을 이용하는 한  길밖에 없으니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이고 버리고 쓰고 없애면,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이것을 없애 버리면 살아난다 말이오. 이해가 됩니까.

이것이 이해가 안되면 안 된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써서 없애든지 말씀 때문에 빼앗겨 없애든지 말씀  때문에 죽어 없애든지 어쨌든지 말씀으로 인하여 없어진 것은 영생이 되어지고  말씀으로 인하여 없어지지 않은 것은 영생이 안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것, 이 두 사상을 딱 잡은 자에게는 이제는 마귀의 왕입니다, 마귀를  잡아 부릴 수 있는. 예수님이 마귀를 잡아 부리는, 마귀는 예수님이 부리시는  악령입니다.

 우리도 마귀를 잡아 부릴 수 있고 마귀를 호령칠 수도 있고 마귀가 제가 내  심부름을 안 해도 제가 하는 일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소망을 버리고 이것을  진리와 영감으로 살릴 수 있는 이 사상을 가진 자에게는 결과적으로는 마귀가  돕는 일만 했고 위하는 일만 했고 유익 되게만 했지 이 사람을 손해 보이는 일은  하나도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이용당한 것이 된다 말이요, 결과적으로 이용된다  그말이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그러기에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소망과 유지 보존하려는 하나라도 잡은 것  이것이 없이 이것을 버려라.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너희의 상관할 바 아니오.

 자, 아는 것이 알고 난 다음에 상관 있습니까, 상관 있고 난 다음에 압니까. 뭐이  먼저요. 끄트머리가 뭐이요. 송곳 끄트머리가 뭐입니까. 아는 것이 상관하는  것이오. 뭐이라, ○○선생. 아는 것이야, 아는 것. 알 것 아니라 했으니까 상관없다  말은 그 안에 쑥 들어가서 더 상관없다는 강한 말 아닙니까. "알 바 아니요"  이러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은 내게 할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생명이면 최종 남은 것인데, 생명 내놓고 생명을 주고 성령을 받으려고  하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 얻고" 생명 내놓고 성령 받으려고  하니까, 그 사람은 생명을 내놓고, 생명보다 성령의 은사를 더 귀중히 여기고,  성령의 은사를 더 높이 평가하고, 생명보다 성령의 은사를 더 귀중히 여기니까 그  사람은 성령이 붙들고 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쓸 수 있습니다. 성령이 쓸 수  있소 생명이든지 무엇이든지 그 사람이 성령보다 귀중히 여기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성령은 쓰지 못합니다. 그것을 쓸려고 하면 성령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성령보다 강한 것이 있고 그 사람에게는 성령보다 더 권리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쓰려 하다가 거기에 딱 부딪히면 성령은 후퇴해야  됩니다. 그 사람은 그것의 것으로 싹 돌아가 버리고 성령은 배척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 성령이 그 사람을 사로잡을 수가 없다 그말이오. 성령의 것이 될 수가  없어. 성령은 그 사람을 사로잡을 수 없어. 그 사람이 성령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말이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얻고" 성령이 어떻게 임하면. 네가 전적 성령의 것이  되어지면, 100분지 1이 되어지면 100분지 1이 되어지는 그 일을 해 봤자  100분지 99가 남아 있기 때문에 100분지 1 해 봤자 그것의 것이오. 사람은 한  인격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제일 최종의 것이 생명인데, 생명이든지 돈이든지  무엇이든지 그 사람이 성령보다 더 갈급하고 더 높이 평가하고 더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최종은 원하는 그것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 돌아가고 맙니다.

그것의 종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 속하고 맙니다. 그를 따라 가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지도를 합니다. 지도를 해도 그 사람이 그 지도를  받지 아니하고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이렇게 넘어지고 쓰러져도, 암만  지도할 때에 배반을 많이 해도 최종의 지도하는 권력이 내게 있어서 내가 하면  된다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내게 책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넘어지고  쓰러져도 책임이 내게 있습니다.

 왜. 그 최종은 그가 내게 속해 가지고 내 지도를 받고 그 중간에서 이리 저리  갔다가 장난을 친다 할지라도 최종의 지도 권리는 내게 있고, 그 최종의 최후는  그 사람이 내 지도에 따를 수 있는 최종을 내가 가졌고 내게 속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수십 번 수백 번 넘어져도 넘어지는 것은 내게 책임이 있다 말이오.

그것이 넘어져도 또 달려들어 해야 되고 해야 되고 이렇지마는, 그 사람이 내가  지도하는 데에 잘 순종을 해서 잘 순종 받습니다. 순종을 받지마는 최종 최후는  내가 아니고 다른 것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이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은 인도를  하되 내게는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말 알겠습니까. 책임이 없소. 인도하는  것은 그러다가 혹 최종 최고의 것을 권위를, 그 사람에게 대한 최종 최고의  권위를 행여나 가질 수 있을까 해서 지금 노력하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심판에  대한 책임은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 있고 심판에 대한 책임이  없는 사람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이 심판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은  몇 번 넘어져도 자꾸 달려들어 또 시작합니다. 이것은 내게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가 넘어지는 것이 내 심판이기 때문에 자꾸 이럽니다.

 그러나 심판에 대한 책임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하다가 안 들으면  그만둡니다. 넘어지면 그만두고, 하되, 지도를 하고 교훈을 하되 이는 행여나 최고  권리 그것을 내가 점령해서 내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때가 올까 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을 하기 전에는 헛일입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가리켜서, "너희들이 누구 집에 들어가서 그 물건을 늑탈하려고  하면 빼앗으려고 하면 그 집에 제일 강한 자를 결박해 놔야 빼앗지 제일 강한  자를 결박해 놓기 전에는 빼앗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 강한 자와 나와 둘이  대결하기 때문에 제일 강한 자가 나보다 강하면 그것은 그의 것입니다. 내가 암만  뺏들어 봤자 결국은 그의 것이오.

 그런고로 사람이 사람을 지도할 때에도, 보자. 이것은 최종이 이 사람에게 대한  최종 최고의 권리가 돈이 되어 있나, 어떤 사람이 되어 있나, 사업이 되어 있나,  자기 가정이 되어 있나, 또는 자기 주관이 되어 있나 그것을 살펴보면 환하게  나옵니다.

 만일 자기 주관이 되어 있다 하면, 자기 주관이 되어 있다 하면 이것은 최고의  적입니다. 이제 돈이 되어 있으면 돈이 되어 있는 것, 뭐 되어 있는 것 그것을  지금 점령해서 최고의 적을 그것을 멸해서 자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를  지도하고 점령할 수 있는 이 일을 위해서 자꾸 나아가는데,  아직까지 최고의 왕을 점령하지 못했으면 지금 그 사람은 내가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책임을 지지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았고 책임을 지지도 않았고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최고의 것을 꺾어서 됐으면 그게 중간에 패잔병 노릇이기  때문에 그 심판은 전적 자기에게 부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부모가 자식을, 그 최고의 권위를 부모가 가졌을 때에는 그 아이에  대한 심판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모에게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 자라  가지고 부모가 그 최고의 점령권을 가지고 있는 그 점령권을 빼앗기지 않고 그  점령권을 보존을 해서 쭉 계속해서 자식이 30이든지 40이든지 50이 되든지 뭐  60이 되든지 이제 그 점령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의 잘못한 것이 심판이  전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 부모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령권을 가지고 열살 먹을 때까지는 됐는데 열한 살 먹으니까 안  된다, 중학교 들어가니 안 된다, 고등학교 들어가니 안 된다. 안될 때 그때는 그  권리를 안 빼앗기려고 애를 쓰고, 어떤 사람은 그 권리를 모릅니다. 그 권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 권리에 대해서 생각지 않지마는 그 권리 이것만 빼앗겨 놓으면  안 되기 때문에 최고를 진리와 영감의 인도로 그 최고의 최종의 권리를 거머쥐고  이것을 인도하는데,  국민학교 때는 그것이 반항을 해도 강제로 눌러서라도 그것을 이래 꺾을 수  있고 이래 돌이킬 수 있고 이랬지마는 이것이 차차차 중학교 가니까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 가니 안됩니다. 안되고 그 다음에는 최고의 권리가 제  주관이 되어 있고 제가 되어 있을 때에는 벌써 그때에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  하나 보조 역할을 하든지 협조 역할을 하든지 이렇게 하는 것이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전적 책임을 자기는 질 권리를 잃었고 벌써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과거에 어릴 때는 내가 전적 최고의 권리를  가지고 암만 제가 이렇게 하고 냅 둬도 마지막에 내가 저리 끌겠다 싶으면 저리  끌어 버리고 말았지마는 이제 그 권리 잊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내가 암만 말해  봤자 자기에게 대한 권리는 자기입니다. 이것이 되어지면 아예 내 놓습니다.

이것이 되면 내놓소.

 교인도, 여기 권찰들도 그렇습니다. 제가 최종 최고를 지금 권리를 가지고  이것을 지도하는 사람 있고, 또 이래 하다가 안됐으니까 이제일은 내놓고 나는  그저 옆에서 하나의 찬동, 찬성 불찬성하는 사람으로, 또 이것은 그저 협조하는  사람으로, 이것은 책임을 지고 하는 사람으로, 최종까지의 그 지도의 권리가  자기에게 매여 좌우로 되는 사람은 자기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벌써 심판에  책임이 되어 있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모든 심판은 자기가 가서  대신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의 생명을 이것을 부정할 때에는 성령이 와서 잡을 수  있습니다. 시간 다 됐는데, 이것 가리는 사람 있을지 몰라서 그러면 우리가  증거는 어떻게 하노. 그러면 악령과 악성이 악습이 나를 붙들지 못하지, 거기에  매여 있는 줄이 다 끊어져 버렸지. 줄이 다 떨어졌다 말이오. 줄이 다  떨어졌으니까 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 대해서 옛사람에 대해서 나는 자유입니다.

옛사람 그놈은 세상을 가지고 나를 미혹시키고 나를 꾀우고 달래고 위협주고  협박했는데, 내가 세상을 다 저거에게 내 줘 버렸으니까 그놈은 나한테 달라붙을  것이 없다 그말이오. 제것을 다 내가 내줬으니까. 세상은 저희 것이니까. "세상  임금이 오겠다" 하는 그 세상 임금은 악령입니다. 이러니까 내게 대해서 손을 못  대. 이러니까 자유하지.

 그러고 난 다음에 내게 있는 것, 생명 이것 하나가 아까워서 이것 하나를  성령에게 바치지 못할 때에 이것이 들어서 암 모양으로 성령이 나를 사로잡으려  해도, 잡으려고 하고 보면 그 생명은 성령보다도 더 존대하고 놓지 않는 이것이  있으니까, 생명 하나는 완전히 성령님의 것이 되지 않고 바치지 않으니까 성령이  붙들다가도 생명 이것 때문에 탁 게워낸다 그말이오. 게워 내. 이것 때문에  성령이 사로잡을 수가 없어. 제가 이번에 어떤 양어장에 가니까, 낙동강 가에서  고기를 잡는 데 똑 이만해요. 이만한 고기가 있는데 그 고기를 가려내. 왜 이거는  가려 냅니까. 이것은 주면 가물치가 안 먹습니다. 왜 안 먹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하얀 뼈가지가 둘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강한 침인지 가물치가 먹었다가는 그만  먹어 넘겨 삼키면 죽는대요. 그 놈이 그렇게 강하니까.

 이러니까 그 가시가 아주 강한 가시가, 그건 똑 이래 가지고 있어 보니까. 강한  가시가 있으니까 거기 대이면 탁 쏘아서 그만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은 못  먹습니다. 그래.

 그래 내가, 야 저놈은 저거 가지고 보호를 하고 있는데 옛사람 이놈이 생명  그거, 생명의 애착심 이것을 가지고 보호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일생동안 그놈에게 종노릇하지. 생명 이것을 가지고 지금 제 유지를  하고 이러고 있는데, 인간 이 생의 애착욕이라는 이것 때문에 성령이 삼키지를  못하고 마귀라는 이놈이 우리에게 생의 애착욕이라는 이 가시를 가지고 지금  성령님에게 삼켜지지를 못하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야 그것 참  오묘하다. 이것은 어쩝니까. 마구 매에 넣어 가지고 갈면 가시가 다 부셔져  버립니다. 그러면 넣어 먹입니다. 그래요.

 생명의 애착욕 이것이 갈려서 없어져야, 생명의 애착욕이 없어서 생명을 버려야  성신의 인도를 받을 수 있고 성령에 쓰일 수 있는, 이 생명까지 내놓는 이때라야  성령이 쓰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이래 쓸 수가 있지 그리 아니면 쓸 수 없겠다  하는 이것을 그때 내가 생각하며 오묘하다 그렇게 봤었습니다.

 자기 생명만 내어놓으면 성령은 나에게 자유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돌짝밭에 뿌린 씨, 덤불 밑에 뿌린 씨 이것이 진리가 그를 삼켜서 나가다가 돌이  딱 받치니까 헛일입니다. 덤불이 있어서 헛일입니다. 그것이 뭐이냐. 성령이  점령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진리가 점령하지 못하는 것 내나 꼭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도통이라. 이거 통하면 꼭 같이 속에서 한 덩어리라.

 이렇게 점령을 하게 되면, 버리게 되면 우리가 "내 증인이 되리라" 주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뭐이냐. 그러면 네 가지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말로 증거 할 수가 있습니다. 말로 증거하고,  둘째로는 내가 말로만 증거 해 가지고 안되고, 말로 증거하고 내가 인정하고  거기에 순종합니다.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봅니다.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요. 야, 다니엘 저거는 참 믿는가 보다, 하도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도 하나님께서 죽이고 살리는 것은 당신에게 있다, 저 등신이  저것이 제가 밤낮 섬기는 그 하나님이 참으로 사자 구덩이에서도 살려낼 수 있는  줄로 저거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무신론자가 와서 설교를 들을 때에 무신론자가 듣고, 그것 참 목사  그거 등신이더라, 그 설교하는 것 보니까 참말로 하나님이 그것은 있는 줄로  알더라,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는 속아서 참으로 있는 줄 알더라  이렇게 참 있는 줄로 인정하는지 순종하는지 보면 안다 그말이오. 인정하고  순종을 함으로 말로 증거하고, 참 제가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면 그 다음에 셋째로 나오는 증거가 있습니다. 뭐이냐.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해서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에서 안 죽고 살아 나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요. 하나님의 역사가. 다니엘이 안 죽었어. 그거 하나님이 하신  일이오. 그러니까 살아 나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넷째로 되는 일은 뭐이냐. 다니엘이 그 순서를 통과하기 전과 통과한  후와 다니엘은 딴 사람 됐습니다. 이러므로서 넷째로는 자기에게 성화라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넷째로 됩니다.

 이러니까 성령이 오시면 입으로 증거하고,  자기가 참 인정하고 순종함으로서 증거가 되어지고, 그 다음에는 인정하고 하는  것 해도 무신론이 보고 저거 참 믿는 갑다 이것만 봤지마는 실지로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사자가 잡아 먹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이 증거가 되어졌습니다.

 그러고 나면 넷째로는 무슨 증인이 되느냐. 예수와 꼭 같은 자가 되어진다  그말이오. 성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할 터이니까 잘 기억해서 자꾸 가서 명상하고 깨달으면 양식이 돼서  새사람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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