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도적질 회개

 

1984. 11. 20. 화새벽

 

본문 : 말라기 3장 8절∼12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리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범사에 지식이 없으면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모르면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마음도 생각도 느낌도 마음의 움직임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죽으면 죽는갑다 망하면 망하는갑다 없어지면 없어지는갑다 그렇게 알지  자기에게 어떤게 와도 지식이 없으면 거기에 대해서 느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마귀로 말미암아 잘못 아는 것도 수 없이 많고 또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지식은 크게 말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님의 지식과 마귀의 지식이 두  가지인데, 그 두 가지를 상대해서 자기에게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그 지식이  생겨집니다. 그것이 자기 지식입니다. 불택자들은 그들은 마귀의 지식만  상대하기 때문에 마귀의 지식으로 인한 모든 경험 체험 그저 기존의 것들이런  것들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과거에 그런 것으로 다 제대로는 하나씩 차  가지고 있었는데, 그릇이 큰 사람은 작은 사람의 몇십 배도 그 마귀 지식이 들어  가지고 있지마는 그릇이 작은 사람은 그저 적게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거에 이 배암의 지혜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하나님의 그 지식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 지식이 우리에게 오기를 두 번째 왔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주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이 우리에게 왔고, 그것을 가리켜서 기본 구원에  속했다 이랍니다. 그 세 가지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두 번째 온 거는 뭐인고  하니 두 번째 온 것은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 말씀 당신의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래서, 이 지식을 중생된 사람이라면 다 접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또 직접  접합니다. 상접을 합니다. 그래서 이 지식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많은 자기  지식이 생긴 사람도 있고 적은 자기 지식이 생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자기가 하나님의 지식을 상대해서. 고대로 실행해 봄으로써 경험하고 체험하고  또 감각하고 목견하고 이럼으로써 '과연' 하는 그런 믿음의 지식이 생겨집니다.

 이렇게 되어서 우리가 할 일은 차차 차차 배암의 지식은 알기는 알고 있지마는  용도가 다릅니다. 배암의 지식은 알고는 있으나 내가 그 지식을 사용하지, 그  지식을 내가 사용하지 그 지식에게 지배는 받지 안해야 됩니다. 배암의  지식에게는 배암 지식이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이래라 저래라 이래  할 때에 거기에 나는 복종은 할 수 없고 다만 그것을 내가 이용합니다. 아무리  자기 집에 필요한 농구가 있다 할지라도 그 농구는 주인이 이용하는 것이지  농구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배암의 지식은 우리가 농구처럼 이용하고. 하나님의 지식은 한  마디라도 이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식에게는 절대 복종입니다. 그저  말씀은 참 죽어야 된다 하면 죽는 것도 죽어야 되고 또 굶어야 된다면 굶어야  되고 또 감사하라면 감사해야 되고, 이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게 복종하면 그 복종 전부는 다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복종할라고  할 때에 배암의 지식을 이것을 농구처럼 도구처럼 사용하지 안하면 불편해서  하나님의 지식에게 복종하는 고 일이 능률이 오르지 안하고 신속히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가 상대해서 그저 구경하고 구경한 그 지식대로  자기가 복종을 할 때에 그때에 자기 지식이 생겨집니다. 복종할 때에 자기  지식이 생겨지는 것은, 복종할 때에 자기가 경험해 보니, 지나 보니,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나 보니 '과연' 하는 자기에게 확고한 지식이 생겨집니다.

또 자기가 그것을 경험해 보니까, 또 자기가 몸소 체험해 보니까 이렇게 자기  지식이 생겨지는데 이것은 다 실상으로 이루어져야 되지 실상으로 이루어지지  안하고 논리만 가지고는 절대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땅위에서 말씀대로 깨끗하게 살라고 하면 깨끗하게 사는  것의 대적이 있다는 것을 자기가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대적이 있다는 것을  자기가 체험할 때에 세상에는, 마귀는 성경이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쟁이 애비라  하지마는 자기가 신앙생활을 해 봐야 알게 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데에서  거짓 것도 알고 참 것도 알게 됩니다. 또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요소라든지 신실한 요소라든지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복종하는 복종으로써 하나님이  구속해 놓은 양떼, 자기에게 맡겨 놓은 그 양떼를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주님이  나를 과연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하는 주님의 사랑이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집니다.

 그러기에, 제가 반사 노릇 하는 것이 복이 있다, 장로 노릇하는 것보다 반사  노릇하는 것이 복이 있다 하는 것은 체험적 경험적 신앙을 가진 산 신앙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주일학교 반사로서 그 학생을 진정 구원해 보면 그  학생에게 대해서 자기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반사 노릇 하면서 알게 됩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그 학생에게 대해서 관대한 것이라든지 진정 그 학생의 유익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도모하는 것이라든지, 또 그 학생에게 자기 맡은 학생에게  거짓을 행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거기에서 차차 알아져서 하나님의 사랑도  믿어집니다. '나도 이것을 대해 이런데 주님이 나 위해서 피 흘려 구속까지  하셨는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어떨 것이며 그분이 내게 거짓부리가  있겠느냐, 내게 대해서 포기함이 있겠느냐 나를 속이고 꼬우고 해하는 그런 일이  있겠느냐? 있을 수 없다.' 이래서 안 믿는 사람들도 '양자의 지어부모심이라'  자식을 길러 봐야 부모의 마음늘 알 수 있다.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자기의 믿음의 자녀를 길러 볼 때에 주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주님의 인내를 알 수가 있고 주님이 내게 대해서 얼마나 진실되이 하며 또  어떻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나, 그 학생이 내 진정을 알지 못하고, 내  진실을 알지 못하고. 내가 저에게 참 유익한 것을 말 하고 살 것을 말하는데  이해되지 안하고 오히려 자기를 해치는 그런 거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것을  자기가 체험해서 마음에 안타까움을 겪어 볼 때에 거기에서 '내가 주님에게  대해서 이와 같은 자이다. 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내가 믿지 않느냐?  왜 전능하신 주님이라고 입술로만 하지 내가 진실되이 믿지 않느냐? 내가  진실되이 믿지 않는 데에서 이 행위가 생겨지지 않지 않느냐?'  이래서, 모든 것을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자를 사하여 준 거같이 아버지께서  사하여 주신다. 사해 준다 말은 해방시킨다 말인데,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것을  어두움에서, 거짓에서, 마귀에게서. 죄에서, 망령과 패역에서 강퍅에서 이것을  해방시킬라고 애를 쓸 때에 아버지의 애를 압니다. 주님이 나 위해서 애 쓰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것을 해방시켜 볼 때에 주님이 나를 해방시키시는  것이 자기에게 깨달아져서 나는 조그만한 것을 내게 속한 자를 해방시켰는데  그로 인해서 자기는 깨달아서 주님 앞에 큰 해방 받은 것을 인정 못 하다가  깨닫고 회개를 하면서 큰 해방을 자기는 받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한다는 말은 해방시킨다는 말인데, 네가 남의 죄를 사해 주지  않으면 천부께서도 너의 죄를 사해 줄 수 없다 그 말은 사해 주지 않는다 그  말은 내가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는 그 일을 순종으로써 해 보지 안하면은  아버지가 나를 해방시키는 일을 알지 못한다. 내가 실지로 그를 해방시켜 보지  안하면 아버지가 나를 해방시키는 것을 모르고 내가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  안타까움을 체험하는 그 체험에서 아버지의 안타까움을 내가 알게 된다. 그 길  외에는 아는 길이 없습니다. 암만 하나님이 말씀하고 성경에 백 번 읽어도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두 지식이 있고 우리는 또 네가지 지식이 있습니다.

왜? 과거에 배암의 지식을 우리가 상대했었고 또 배암의 지식을 상대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경험 체험 있습니다. 경험 체험 있는 것은 암만 있어도 도매금으로  말하면 전부 죽는 일이요 망하는 일이지 거기에 사는 것은 섞여 있지를 하나도  안 합니다. 그러나, 죽을 것을 죽을 경험 체험이라 하면 좋지마는 죽을 것을  사는 경험 체험이라고 그렇게 꽉 오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오인된다는  것은 그 체험은 제딴에는 유익되고 산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결말이  다 사망으로 쏙 찔러서 들어가는 걸 보니까 그 모든 경험 체험은 다 사망 속에  있었더라는 것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주님의 이 기본구원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왔습니다. 불택자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가지를 안했습니다. 그들은  읽어도 모릅니다. 봐도 모릅니다. 들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본구원을 얻었는고로 하나님의 지식을 중생된 자는 듣든지 읽든지 할 때에  보여지고 들려집니다. 중생된 자는 하나님 말씀을 설교를 들을 때에 들려지고  중생되지 안한 자는 들려지지 안합니다. 보여지지도 안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인해서 기본구원 받은 자에게는  오는데, 그 지식을 내가 상대해 가지고서 조금 순종했으면 조금 체험이 있을  것이고 많이 순종했으면 많은 경험 있을 것이고 이래서 거기에서 우리 지식이  생겨집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내 지식이 둘이 조화돼 가지고 거기에서 생겨진  지식이 있으니 그것이 우리 지식인데 우리 지식 그게 어떤 지식이냐? 모형적  지식입니다. 모형적 지식. 하나님의 지식이 아닌데 하나님의 지식 꼭 닮은  지식입니다. 말하자면 생화가 있는데 조화를 만든 것은 꼭 생화를 닮은 거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지식의 모형 지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가리켜서  모형 지식이라, 하나님의 지식은 원형 지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상대해서 그 지식대로, 베드로가  '참 무식한 소리 하네' 싶으지마는, 책임을 떡 전가시키기를 '선생님이 말하기  때문에 내가 던집니다. 이 그물 씻어 놨던 것을 던지는 것은 선생님이 말하기  때문에 내가 던지는 것이지 내 보기에 뭐고 기가 잡힌다고 던지는 것 아닙니다.

선생님 대우를 해서 던집니다.' 또 대우해 던질게 아니라 '보십시오. 그저  선생님이 그저 뭐이든지 다 아는 척 하고 있지마는 아닙니다. 무식이 있는 줄  아십시오.' 한번 아이들 말로 코방을 한번 줄라고 지금 한번 그걸 단단히 생각을  하고 던졌는데, 막상 던진 후에 체험에 많은 고기가 오니까, 그때 자기가 던질  때의 자기를 자기가 잊어 버리지 안하고 당장 알고 있기 때문에. 던지기 전의  자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던진 후의 그 자기와 서로 모순됐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주님을 모실수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패역하고 완패해서' 참 자기를 저주한 말이오. 주님이 그렇게 좋으신데 뭐  할라고 떠나라 했겠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망해야 옳고 나는 죽어야 옳고 나는 절단나야 옳습니다.' 자기가 저주스러워서.

저주스러워서 저주하는 말입니다.

 루터도 자기가 깨닫고 난 다음에, 자기는 죽어야 되고 자기는 죽여야 되고  자기는 어떤 벼락을 맞든지 벼락을 맞아서, 과거에는 벼락 소리가 나니까 길에서  떨어져서 그 밑에 하수구로 빠지기도 했는데 이제는 벼락난다 하니까 '벼락이  나서 나를 죽였으면 좋겠다. 이 차가 나를 치어 죽였으면 좋겠다.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된다' 이렇게 자기는  베드로가 이런 회개를 했습니다. 이런 회개를 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는 네가고 자리에서 너는 정말 죽어야 할 자요 마땅히  멸망을 받아야 될 자인 것을 네가 아는고 자리에 있으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사람 수입을 네가 이제부터는 할 수 있으리라. 낙망하지 말고 나를  따라라' 할 때에 이제 자기가 그때에 소망했던 것을 다, 고기고 그물이고 다  집어던져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제는 소망이 과거에 부인했던 소망이  새로 생겨겼습니다. 과거에는 다 못 쓴다고서 멸시했던 그 주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권위있게 보여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아무리 중생됐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해서 나가는데 이 말씀에게  복종해서 체험과 경험의 지식이 자기에게 있어야 그 지식이 자기를 자유케  합니다.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말에 거하라' 그러면 내 말대로  실행하라 그말입니다. '내 말에 거하라 그리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참으로 닮는다 그 말이오. '진리를 알지니' 처음에 그 진리 알고 순종했는데  알고 순종한 그 진리를 이제는 참으로 안다 그 말이오. 참으로 알아. 경험해  봐서 경험의 지식으로 알고 체험의 지식으로 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  이제 너를 그 지식대로. 죽음이 와도 그 지식대로 자유하고, 어려움이 와도  자유하고, 그 지식이 거기에서 자유하지 못 하고 지식이 언제는 믿다가 안 믿는  그런 자 되지 안하고 그 지식이 믿는 자 된다. 자유한다 그 말은 그 지식대로  그대로 실행한다 그 말이오. 자유 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도 내가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경험과 체험의 지식을  가져라, 하나님의 지식을 네가 건너다 보고만 있지 말고 이 지식이 네 지식이  돼서, 하나님이 가지신 그 지식은 아니지마는 그 지식을 닮고 그 지식과 꼭 같은  그 지식의 모형의 지식을 네가 가져라, 경험과 체험의 지식을 가져라, 하나님의  지식으로 인하여 네 지식이 된 네 지식으로 가져라 그러면 네가 자유하게 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종해야 되는데, 복종하면 점점 이 거짓말쟁이가  물러갑니다. 이 거짓말쟁이 반거짓말쟁이가 복종을 하면 물러가게 됩니다.

복종을 하면 자기가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러면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말라기 3장에, 모든 사람들이 다 저주받아 가지고 이렇다. 전부  저주받았다.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다 자유하게 되리라 이라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조상 때부터 자유하는 사람들인데 뭐 우리가 뭐 새삼스레  뭐 종 되어 있느냐' 이렇게 말할 때에, 그들은 종되어 있는 걸 몰랐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너희들이 종이 되어 있으니, 너희들이 이렇게 체험과 경험의  하나님의 지식을 네 지식이 되어졌을 때에는 그 지식대로 네가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되리라'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엉뚱이 같은 그런 말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느니라 너희는  죄에게 종이 되어서 죄악이 시키는 대로, 죄악이 너거를 이용할 대로 하니까  죄의 종이 아니냐? 너는 인간의 종만 아느냐? 죄의 종이다 네가. 그러나 죄의  종에서 훼방되어서 자유하게 되리라' 할 때에 그들은 그래도 깨닫지 못해. 암만  말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마지막으로고 말씀하고 난 다음에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죽일라고 하는 것은 내 말이 너희들 안에서 너희들의 경험 체험의 네  지식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 말이 너희 안에 네 지식으로 있지 않기  때문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죽 일라고 한다'  그래 말했습니다. 그래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야 말았다 그거요. 죽이고도 지금까지도 메시야는 앞으로 온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성신이 떠났으니까 그 유태인들이 무슨 신앙을  지키겠습니까?  이래서, 어떤 사람 성지 순례하고 온 사람 말을 들으니까 거기에도 모두 뭐  택시가 있고 문화를 입어 가치고서 그래 돼 가지고 있더랍니다. 있는데, 택시를  타 가지고서 외국 손님인데. 택시를 타 가지고 '아무 데까지 간다' 이라니까  빙빙빙빙 돌아서 '여기가 거깁니다.' 하고 내려 주는데, 내려 보니 나중에  보니까 가기는 한참 갔는데, 한참 갔으면 어데 딴데로 갔을 건데 내나 그 자리  갖다 놨어. 고 자리만 조금 틀리게 고 옆에 갖다놨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돈  받아 먹고. 세상에서는 날도둑놈은 유태인보다 더 날도둑놈이 없다 그렇게  말합디다. 그 사람은 그래도 나처럼 날도둑놈이라 소리는 안 해요. 성지  갔으니까, 성지 갔으니까, 우리 큰집 유태인이니까 그렇게 말하지는 안해도 찰  놀랠 만치, '세상에, 아마 온 세계에 그런, 그런 도적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합디다.

 지금도 복종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래 돼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아랍  족속들로 말미암아 유태인들을 찔벅 찔벅 옆구리를 자꾸 쥐어 박고 하는 것은 뭣  때문에 쥐어 박느냐? 쥐어 박는 것은 이제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타나신 그 여호와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지마는 안 믿는 행동만  합니다. 안 믿는 행동만 해 가지고서 일 대 일로 가지고서, 세상 과학을  가지고서 그들을 대항해 볼라고, 옛날 내나 강대국 애굽을 초청하고 거기서  동맹하고, 대국들을 동맹해 가지고서 대국들에게 다 삼켜지고 말았습니다. 일차  이 대국에 동맹해서 이 대국을 대적할라 하다가서 그때에는 패전만 당해서  고생하고 이제 나중에 동맹했던 그 대국에게 또 종이 돼 버리고 말고 만날 이  노릇만 하다가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 노릇만 하다 마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교인들은 옳게 깨달은 사람은 유태인을 위해서 매일 한  번도 기도하지 안하는 이는 없습니다. 저도 별로이 빠지지 않습니다. 매일  별로이 빠지지 안하고 기도합니다. '이 유태인들이 아직까지 메시야를 알지  못하고 지금 헛되이 기다려고 있으니 주님이 열어 주시지 안하면 안되는 것인데  그 진노를 푸시고 그들에게 빛을 열어 주셔서 주님이 그들의 메시야이심을 어서  깨닫고 믿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옵소서' 하는 것을 저도 대개는 안 빠지고  매일 기도합니다. 왜? 또 주님이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구원이 거기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를 귀중히 소중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우리가. 그가 먼저 잘되기를  원해야 우리 뿌럭지가 잘되는 거와 같다 하는 그런 뜻으로써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민족을 위해서 기도 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큰집은 천주교가 아니오. 천주교는 타락한 이단 되어서 우상 종교가 된  것이오. 그는 제 이계명에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했는데 사진 놓고서 하루  아침에 대개는 한 이백여 번을 머리 숙여서 절하는 그 일이 미사드리는  것입니다. 이러나 이것이 나가면 천주교인들이 세력을 가지고서 이라다가 백  목사가 이 말 했다고 잡아서 죽일란지 모른다 그 말이오. 다 머리에나 손에나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죽인다고 말했습니다. 짐승이라 말은  내나 세상주의라 그 말이오. 짐승은 세상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 세상  사상이나 또 세상적인 행동 예수 믿는다고 해도 행동은 세상 행동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몇이든지 죽임을 받아. 그러나 천주교는 우리 큰집이 아니오. 유대인은  구원이 거기에서 나왔으니까 우리의 큰집입니다.

 그들이 왜 저렇게 되어 있느냐? 지금도 아랍 족속들이 다 옛날 히스기야 왕  때와 같이 그들이 단합해서 다 회개하고, 택시를 태우니까 어만데 갖다 놓는  그거는 그 민족에 대해서 어떻게 개성이 강하고 개성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하든지 단합이 안 돼요. 아무리 단합해도 단합이 안 돼요. 세계의  예수교인들이 의논을 해 가지고 우리 큰집인 유대인들을 구원해야 되겠으니까  유태인들이 무조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기만 믿으면 그 가족생활 책임 다  담당하고 그 자녀들은 최고의 교육을 다 시켜서 최고의 교육을 담당해 주기로  그렇게 해도 그 사람들은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안 팔립니다. 안팔려요. '우리가  예수를 우리 구주로 믿지 않는다.' 암만 그렇게 해도. 벌써 그렇게 한 지가 오래  됐습니다. 오래돼 가지고 그렇게 해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저거 구주로 믿지를  안해요, 지금까지. 이러기 때문에 그들이 자꾸 패망에서 패망으로 그저,  지금 이스라엘은 그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히스기야 왕 때와 같이  정권자들은 '이것은 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 우리가 다 회개하자.' 전부 뭉쳐 가지고서 '자, 우리가 다 회개하자'  하고서 참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면서 아랍 군대가 어떻게 와도  '우리는 암만 해 봤자 이것을 정리하지 못하니까 그들을 주님이 쳐서 없애든지  막아 없애시든지 우리를 해하는 이 해를 주님이 방어해 주시옵소서' 하는 그  단합만 되면 하나님이 계시는 걸 한번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만 되면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 십 팔만 오천 명을 멸한 그 하나님이 지금도 계시기  때문에 거기에 아랍 군대를 다 죽여서 없애 버리든지 그리 안 하면 꼼짝 못 하게  다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침노할라는 그런 생각도 가지지 못하고 다 공연히  벌벌 떨며 와 가지고서 '우리와 화친합시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우리와 화친합시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대적들이 와 가지고서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과 같이 하기 때문에 우리를  멸하지 않도록 우리 자손과 당신의 자손들이 화친해 살고 대대로 서로 멸하지  않도록, 화친의 맹세를 합시다.' 자칭 와 가지고서 요렇게 요구한 것이, 요구한  것이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오. 야곱은 많이는 없었어. 야곱이 그 셋 중에는 제일  빠져요  그들이 지금 저거 힘으로 대항할라고 이렇게 자꾸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하나님을 믿는 일이 있으면 콱 터질 터인데, 믿지 안하다가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터인데 믿지 않기 때문에 자꾸 그런 것입니다. 믿지 안하고  배암처럼 엉뚱한, 엉뚱한 소리만 듣고 엉뚱한 생각만 가지고서 이 과학으로만 뭐  할라고 야단을 지기고 이 인간들 생각으로만 자꾸 하고 있지 성경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래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그런 패역을 부리기 쉽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복종합시다. 복종해 보면 압니다. 복종해 봐야 알지 복종 하기 전에는 천  번 만 번 말해도 안 됩니다.

 내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경험을 했느냐? 가장 나에게 가까운 사람,  내가 친근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 볼라고 내가 수백 번 수천 번  말할수록이 뻐드러져 나갑니다. 거기에서 나는 오래 동안 헛일하고 난 다음에 내  결론 난 것은 '주여, 사람은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할  때에 이 증거하는 말씀을 참말로 인정한다는 것은 한 마디를 인정해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정하게해서 인정하는 것이지 내 언변이나 내 무슨  수사로써 인정되는 것 아닙니다.' 하는 고것을 내가 확실히 체험하고  경험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그 경험 없는 사람과 저와 다릅니다.

 그러기에, 그때부터 집회를 하든지 교인들이 거석할 때에 그 교인 개적이나  단체나 내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교인들이 참 믿고 인정하고 마음에  감동받고 또 깨닫고 회개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심지어 그대로 실행해서 살기도  한다는 이것은 절대 거기에 억만분의 일도 내 힘으로 된 거는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말했는고로 말하고 말 속에 있는 지극히 큰 능력이 들어서 그  사람을 믿게 한 것이지 내 힘으로 믿게 한 것은 아니라 하는 것을 내가 확실히  단정을 지웠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이래 이제 단정지우고 이러니까 가서 집회  인도 하든지 교회서든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내가 대언을 할 때에 내가  대언하는 그 말씀을 다른 사람이 듣고 인정된다는 것, 인정된다는 것 그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케 해서 인정이 되지 내 사람  힘으로 인정됐다는 것은 털끝만치도 없다고 완전히 구별이 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마 요걸 체험하지 안한 사람이 말한 것을, 하나님이 와서  역사했지 내가 역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렇게 구별하는 그 구별이 요만치  구별에 도달된 사람이 별로이 없을 것입니다. 왜? 나는 체험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만들어 볼라고 그 사람에게 수천 번 수만 번 말해도 안 듣소.

정반대요. 가라 하면 오고 정반대입니다. 그것을 내가 봤고.

 그라다가, 그리 그리 그래 살다가 차차 차차이래 나오는데 또 내가 그 뒤에서  종종 경험합니다. 어째 우연히 돼서 '이 사람은 내가 내게 책임을 지워 줬으니까  알려야 되겠다 가르쳐야 되겠다' 이래서 가르쳐 볼라고서, 안 되니, 안 되니까,  '이거 이는 내 밑에 있어 나와 가장 접근해 있다고 하면서 이 사람이 순종치  안하든지 사람이 되어 가지 안한다고 하면은 그것이 내게 내 위신이요 내게 대한  관계되기 때문에 이것을 어짜든지 회개 시켜서 사람을 만들어 봐야 되겠다.'  아무리. 다른 사람의 몇십 배를 애를 써도 절대 안 됩니다. 쓰면 쓸수록이 안  되는 거 거기서 나는 또 큰 체험을 경험을 또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나를 접하는 가운데에 놀랠 만치 사람들이 또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날 만날 때에 변화되고 두 번 만날 때에 변화되고 밤낮으로 이래 가까이 이렇게  지냄으로써 변화된 사람 얼마든지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변화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나는 거기에서 이제 큰 수입이 돼서 '내가 거룩함 같이  너도 거룩하라' 말씀하신대로 '내가 구별함 같이 너도 구별해라' 말씀하신 거와  같이, 주님이 '이렇게 네 옆에 접근해 가지고서 그 사람이 변화가 돼서 변화된  그것이 네가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시켰지 그 변화된 것에 대해서 네가  변화시킨 것은 하나도 없다. 네가 변화시킨 거는 인간 보기에는 변화시킨 것  같지마는 너로 인해서 변화된 거는 하나도 없다. 순전히 나로 변화됐다.' 주님이  고렇게 구별해서 주님이 견해하신 고대로 내가 견해하는 것이 아버지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한 것입니다. 그냥 이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냥 아버지가 선하니 나도  선해야 되겠다 하는, 어림도 없습니다. 천리 만리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거 말하면서 속으로는 딴 말 하고  있습니다. '네가 내가 너한테 범을 길러서 앙문하는 거와 마찬가 지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람을 지혜의 사람을 만들고 나니까 네가 그 지혜의 사람을 가지고서  네가 스스로 된 줄 알고 교만해 가지고서 나를 마지막에는 멸시하는 사람이 돼질  것이다' 내가 그런 말, 그래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하지 내가 정말로 '내가 그 사람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이 만들어지고  배은한다' 이렇게 하면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내게 징계가 올 것입니다.

속에서 기도합니다. 속에서 '주님이여, 내가 만든 것이 아니지마는 그래도 그  사람이 은혜의 기관을 알아야 될 터인데 은혜의 기관을 모를까 해서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었다고는 내가 추호도 생각지를 않습니다.'  또 내가 그 말 한 것이 뭐이냐? 만들어서 나로 통해서 옳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옳게 만들어진 그것은 나를 배은할래야 배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옳게  만들어진 것은 내게 있는 것이 그보다 원형이고 그는 모형이 되는데 어떻게  모형이 원형을 자꾸 이렇게 높이고 존경하지 원형을 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는 아닌 말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사망 하는 길은 넓다' 하는 그  말은 말이 아니라. 틀린 말이라. 너거 지식대로 말할 때에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평탄하지, 생명으로 가는 길이 정말 평탄하지 사망으로 가는 길은 그것은  땅가시 밭과 같이 전부 맹수 소굴이다. 이리 나오는 데다. 이렇지마는 또 성경에  그렇게 말씀해. 성경에는 너거 지식으로 말하면, 너거 의견으로 말하면, 너거  소견으로 말하면, 그렇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은 이 도적질한 거, 일곱 가지 도적질한  것을 회개하자는 것입니다. 요거 실지로 우리가 회개합시다. 이제 오늘 아침에도  이걸 알아 듣도록 하기 위해서 그 서론을 많이 말했습니다. 서론을 많이  말했는데 그저 제목만 말하면은 요 일곱 가지 도적질을 회개를 하자 그 말이오.

 두 가지 도적질은 소유권 도적질이오. 소유권 도적질한다. 말은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안하고 그 주인을 딴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게  도적질이라 말이오. 소유권을 다 달리 생각하는게 도적질이라 그 말이오.

그런고로, 자기 몸 밖에 있는 거.

 그렇습니다. 제가 그 전에 개명 살 때에 그 밑에 어떤 동네, 그 동네, 개바우  동네라하는 동네가 있었는데, 개바우 동네에 여기 살다 온 사람 하나 있구만. O  집사 개바우 동네에 살다 왔지? 예? 개바우 동네에 살았는데, 그 개바우 동네에  아주 그 동네에 머리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머리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그 머리되는 사람의 그 토지 가에 가 가지고서는 소를 먹이지  못합니다. 먹이지 말라고 나무래 그런게 아니라 겁이 나 가지고서. '아, 여기  먹이다가 만일 콩 한 포기라도 곡식 한 포기라도 먹은 날이면은 이거 큰일  난다.' 발을 보고 떱니다. 그랬지? 예? 안 그랬어요? 안 그랬습니까? 그랬지?  그렇습니다. 또 그 사람들에게 속한 자녀라고 말하면은, 자녀라 하면은 의례히  이렇게 섬길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우리가 깨닫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깨닫고, 내 밖에 있는 내 원수도 주님의 것이라, 아무리 그 사람이 예수 믿어서  마귀 노릇를 하고 있어도 주님의 것이라 이것을 아는 사람은. 주님을 알고  주님의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가 내게 어떻게 하든지 주님 때문에 그를  대해서 멸시를 하지 못합니다. 미친 소리를 자꾸 해도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렇게 괄시하고 압박하지를 못합니다. 왜? 주님 때문에. 내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니까 이라면 '야, 저래도 가만히 있는 거 보니까 뭐 아마 고삐나 잡혔고  무슨 하나 죄나 있는가 보다.' 너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라기 때문에 중생된 것도  모르고 몰라. 구원도 몰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것이  아닌 원수도 하나님의 것이오. 하나님이 지었오. 원수의 것도. 하나님의 것이오.

원수의 집이 불타는 것도 하나님의 것이오. 원수가 미끄러져서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것이오. 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것이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범죄하지를 못합니다. 떨려서 범죄하지 못하고 그를 멸시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니까,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가지고 시비할 때에 마귀를 저주하지를 못했습니다.

저주하지를 못하고 '하나님이 너를 꾸짖으시리라' 하나님이 꾸짖으시리라 그  말은 하나님이 네가 잘못된 것을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주리라 한 말이지 마귀를  저주한 거 아니라 그 말이오.

 우리도 이거 다른 사람 가르치기 위해서. 마귀를 모르기 때문에, 원수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귀 이놈은 원수라 마귀 이놈 이놈' 이래 말하지 그 말 하고 난  다음에 속으로는 반드시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주님이여 이거 모르기  때문에, 주님도 인간 말로 쓰지 안했습니까? 이렇지 그 마귀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쓰시기 위해서, 주님이 쓰시는 신이 요 주님이 쓰시는 마귀요,  주님의. 말하면 내나 다르기는 다르지마는 주님이 쓰시는 주의 일군인데, 그걸  내가 듣게 하기 위해서 말했지마는 그를 내가 멸시할 수 없는 것은 당신이 그걸  지으시고 오늘까지 보존하고 계시고 당신이 가지고 계신데 내가 그것을 저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주님에게 그걸 말하지, 다 말하지 안해도 그런 줄 알고  그래 가지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귀 이놈을 너희들이 물리쳐야 된다.

마귀 이놈이 우리를 망치는데 자꾸 마귀를 청해 들이느냐' 이렇게 말하지  속속들이 그걸 미워하거나 저주를 못 한다 그거요  또 그뿐만 아니라 모든 과타나는 그 순서가. 우리가 성경을 보고서 모든 순서가  하나님이 다 예정했는데 뭣 때문에 예정했느냐? 우리 구원 위해서 예정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나 위해서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우리는 확고하게  지금 기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또 그 지으실 때 창조한 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  창조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우리 구원 위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당신의 것이요 곧 내것이요 나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멸시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이런 폭넓은 세계에서, 폭넓은 세계에서 모든 만  사물을 상대해 가지고 이렇게 계획해서 살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고, 이해 못하는 자는 이상하게 말한다 그거요.

 어떤 사람이 어제인가 아레인가 또 나한테 그 말 합니다. '목사님은 주무시면  꼭 베개를 세 개를 나란히 놓고서 이래 딱 주무시니까 이거 다른 사람이 와서  보면 이상하게 보겠습니다.' 누가 그래. '보거나 말거나 뭐 안 그러면 되지.' 또  그걸, 그거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아요. 베게 두개는 양쪽에 놓고 하나는 베고  그래 누워잡니다. 왜 그러냐? 이거 하나는 누워잘 때 나는 이거 등이 이래  가지고서 하나는 이 등어리에다가 등어리 밑에 넣어서, 넣어 가지고 허리를  꾸부정하이 이래 가지고서 한참 있다가 빼고 누워 자야 잠이 오지 그래 안 하면  다 안 된다 그 말이오. 또 하나는 내가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또 이게 자꾸  삐뚤어져 갈 때는 이걸 또 한쪽에서 고여야 된다 말이오. 어떨 때는 이놈을  여기에다 고우고 또 자고 또 어떨 때는 이쪽을 고우고 자고 또 이러는데 다른  사람이 누가 그걸 알겠느냐 말이오. 베개는 베고 자는 것인데 베개 서이니까  아마 서이 같이 누워자는 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오.

 이러니까, 제 지식대로 견해한다 그거요. 제 지식대로 견해한다고, 누가 당나귀  팔러 가는 사람 모양으로 이 사람이 이라면 그 사람 따라서 당나귀를 매고  가다가 또 걸려 가지고 가다가 마지막에는 둘이 매고 가니까 '저 어리석은 자들  부자간에 당나귀를 타고 가지 매고 간다' 하니까 그러면 매고 가도 못하고 타고  가도 못하고 꼼짝도 못 하고 앉았어야 되겠다 말이오. 그럴 수 있겠느냐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다른 거는 그까짓 거 세상 거 다 몰라도 좋습니다. 다 몰라도  좋아요 다 몰라도 좋은데, 하나님의 말씀만은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모르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워 말씀을 내가 순종해서 경험과 체험으로 자기  지식을 삼자 그 말이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 더군다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이중 하나님의 것이라.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요, 당신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 가운데에서 사셨으니 당신의 것이오. 믿는 사람 모든  사람이. 나는 자기 자신으로 말하면 창조적으로 주님의 것이요, 나를 당신이  쓰실라고 이렇게 십자가의 대속 하셨기 때문에 대속으로 주님의 것이요, 또 내가  멸망받을 만한 죄를 또 지어서 빠졌는데 거기에서 구속 했기 때문에 또 주님의  삼중적으로 주님의 것이요 이런 참 견딜 수 없는 죄 가운데에 빠졌는데 또  구출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오. 이중 삼중 십중 백 중으로서 나는 주의 것 된  것이라. 나는 주님의 것 된 것이라, 주의 종이라.

 이렇게 믿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아는  사람은 멸시할 수가 없어. 심지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지극히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 지극히 소자 하나에게 멸시한 것이 나를 멸시한  것이라 마태복음 25장에 말씀을 해 놓지 안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밖의 전체가 다 주님의 것이라는 이것도 그렇게  알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몇 번이나, 몇 주간 말했다 말이요. 말해도  제가 실험하지 안하면. 실행하지 안하면 제 지식이 안 돼. 체험의 지식이  아니라. 체험의 지식이나 제것 되고 경험의 지식이나 제것되지, 베드로가 그렇게  암만 떠들어 쌓아도 소용 없었는데 딱 순종해 보니까 하나의, 경험 딱 해  보니까, 자기가 한 번 딱 체험해 보고 경험의 지식이 딱 오니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다 그 말이오. 경험의 지식이 없이 뭐이 되겠느냐 그 말이오.

순종해야 경험의 지식이 나오지. 순종하지 안하니까 전부 소경이라. 마귀 눈이  열어서 다 색경을 쓰고 있다 그 말이오. 회개 해야 돼. 열매를 보면 안다 그  말이오.

 이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도적질  회개하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몰라. 자기는 다 한 말로 '다 주님의 것인 줄  압니다.' 아니야. 아는 데에서 이제 실질적으로 나가 가지고서 하나씩 살핍니다.

'이것을 내가 주님의 것으로 정말 압니까?' 주님의 것으로 알아서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 대우하듯이 대우해요. 주님의 것이라면.

 내가 그전에 비유도 많이 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 남편은 외국에 가 버리고  가난하게 살다가, 공부한다고 가난하게 살다가 외국에 갔는데, 구두도 다  떨어져서 쪼그라져서 아무리 내던져 봤자 그거는 쓰레기 줍는 사람도 안 주울  그런 더러운 건데 그걸 닦아 넣어 놓고 남편 보고 싶으면 보고 남편 보고 싶으면  보고 그 구두를 소중히 여겨요. 그 아이들이 '이러운 구두를 내둬?' 휙  집어던지니까 그 부인이 깜짝 놀래. '야야, 너거 아빠 구두인데 왜 이렇게  했느냐?' 깜짝 놀래. 아빠의 존경이 아빠가 벗어 놓고 내버리고 간 구두에게까지  가는 것입니다. 구두에까지 가는 것이라.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느끼면 내가 거기에서  거기에 대한 내 태도와 내 정신과 내 관계와 내 생각이 달라질 터인데 그게  달라지지 일는 걸 거머쥐고 사람들이 우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이 주와  것이라고 입술뿐이지 내가 주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전능자라고  내가 입술은 말하지만 전능자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주님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대해서 자꾸 회개를 해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천층  만층이라. 뭐 다 같이 한자리에서 예배보면 같이 예배보는 줄 압니까? 천층  만층이오. 가 보면, 하늘나라 가 보면 천층 만층 억만층도 더 돼.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도적질 회개하는 것인데 이개 얼마나  어려우며, 또 자기에게 있는 그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주님의 것이라. 주님이  내게 주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이러니까, 두 가지 도적질, 소유권 도적질을 회개를 합시다. 하나씩 회개해  봐요. 하나, 우리가 또 하면 돼요. 하나는 성령이 와 있고 진리가 와 있고  주님의 피공로가 와 있기 때문에 하면 된다 그 말이오. 지극히 큰 능력이 와  있어.

 이라고 다섯 가지 용도 도적질하는 것을 우리가 하나씩 새겨서 이 도적질을  회개를 합시다.

 이제 나가는 사람 꽃마을에서 파요. 꽃마을에서 새벽기도 오는 사람인데 차도  없어요. 새벽기도 오는데 언제든지 요만치 앞에 와 앉습니다. 앞에 와 앉고 또  시간 됐으니까 여기서 지금 걸어서 거기까지 가 가지고서 자기 남편이 군대  장교라. 장교인데 내가 꼭 한 번 만나봤어. 그 집에 한 번 꼭갔었는데, '남편  있을 때에 날 한번 전화를 해라. 내가 한번 가 볼 수 있다' 이랬디마는 그  남편이 그 말 듣고, 그 말하자마자 그 이튿날 일찍 모든 걸. 퇴근해 가지고서,  일찍 퇴근해 가지고서 그래 전화가 왔어. 한번 그 집에 가 가지고서 잠깐 한번  서로 얘기했는데 대단히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전하니까  '예, 저도 존경하고 있고' 그저 믿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기도도 하고  이라면서, 믿음이 좋다는 거 자기부인이 믿는 걸 보고서 '믿는게 좋다. 내가  군대 생활 하고 있다 보니까 이렇다' 하면서, 진정, 가니까 뭐,  내가 어떤 교인들 집에 가도 그렇츰 내가 환영하는 꼴 못 봤어 그렇츰 존대하는  꼴 못 봤어. 날 똑 천사같이 여기고 이렇게 존대를 해 보니까. 어떤 집에 가면은  참 아주 거지같이 여겨 멸시합니다. 그놈의 집구석은 망 해! 하나님의 종을  이렇게 이렇게 하는 집구석은 삽니다. 내가 오늘 아침에도 어데 한 군데 전과를,  장로 집에 전화를 했는데 그 장로님이 입을 못 떼. '예예예예 예예' 막 고양이  앞에 쥐같이 '예예 예예 예예 예예 예예 감사합니다.' 그게 복이 잊고 사는  거라. 그러면 거기에 있는 모든 새끼들이 살아나.

 내가 언제 말하기를 어떤 목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지금 자기가 들어서  가정을 망쳤기 때문에 가정에 가 가지고서 나를, 백 목사를 우상이 될만치  그렇게 소개를 해라. 그라면 가정이 살아난다' 이라니까 웃으면서 '목사님 우상  돼 가지고 되겠습니까?' 고 속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일곱 가지 도적질을 회개합시다. 어짜든지 뭐 이제는, 오늘 아침에 이렇게 서론  했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는 또 안 나온 사람 다 소리해 나오십시오. 나와  가지고 내일 아침에는 그럴 것입니다. '일곱 가지 도적질 회개합시다.' 하고서  거기에 따라서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또 좀 말해 주고  이래서,  어쨌든지 우리가 실천해야 됩니다. 실천해요. 주님의 피가 있고 주님의 성령이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에 이제 주의 말씀으로 이 모든 거 다 우리에게 다 소개한  거 성경 말씀 안에는 성령도 계시고 진리도 있고 또 주님의 대속의 공로도 이  성경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셋은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 하나 들어 가지고서 내가 실천하면, 주님 계시고 주님 공로  있고 진리 있고 나 있고, 넷이 합작 돼 가지고서 사합만 되면 못 할 것 없고,  누가 사합이 되어 있으면 욕하는 것도 복이 되고, 나를 매장하는 것도 복이  되고. 뭐 두드리는 것도 복이 되고, 죽이는 것도 복이 되고, 뺨 맞아도 복이  되고 복 안 될 것이 하나도 없어. 전부 복 돼.

 내가 오늘 아침에 보니까 효력 난 걸 둘을 보고서 이제 기뻐하는구만. 여기에  보니까 하나 와 앉았고 저게 하나 앉았네. 와서 앉았으니까 얼굴이 옛날 얼굴  돌아온다. 그전에, 얼마 전에 내가 보니까 귀신 얼굴이라. 시커머이 귀신  얼굴인데 오늘 아침에는 보니까 아주 하나님의 은혜의 얼굴이 됐어.

 여러분들 은혜의 얼굴 다릅니다. 문둥이한테 가서 집회를 하면은 처음에는  문둥이 내음새가 나요. 은혜 척 받고 나면은 문둥이 내음새가 하나도 안 납니다.

문둥이 내음새가 하나도 안 나. 썩는 내음새가 하나도 안 나. 이런데 그 얽은  것이 툭툭 볼가진 것이 어떻게 아름답게 미가 됐는지. 여기 마치 내가 요새 수석  말이지요, 수석 그걸 이래 하나씩 좀 갖다 놨는데 수석을 내가 보고 나는  느끼는게 따로 있어. 옴빡 좀빡 이라는데 옴빡 좀빡 그게 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자연의 미를 가졌다 말이오. 문둥이도 옴빡 좀빡 요래 가지고. 요래 가지고  요런데, 요놈 두드리니까 딱딱 해. 박수하면 손바닥이 살이 없으니까 딱딱거려.

딱딱딱, 목탁치는 것같이 딱딱 딱딱 요라면서 찬송하는데 어떻게  아름다워지는지.

 여러분들, 과장품으로 단장하지 마시고 주님을 사모함으로써 그 용모를  단장하십시오. 분명히 있습니다. 은혜의 안면이 있고 마귀의 안면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봤소. 날 봤소. '보자. 어떤고 보자' 해 가지고서 하루 저녁에는  테레비를 틀어 놓고 '테레비를 보자.' 테레비에 다가 집중을 해 가지고서 아마  한 삼십 분 봤을 겁니다. 집중해 가지고서 삼십 분을 보고 난 다음에 '보자'  얼른 가서 면경을 들여다 봤어. 면경을 들여다 보니까 시커먼 마귀의 얼굴이오.

내 눈이 변했는지 얼굴이 변했는지 시커먼 마귀의 얼굴이라. 마귀의 얼굴이라.

이래서 '아 요렇게 변해지는구나.' 내가 그동안 그 삼십 분 보면서 그랬는데  순전히 마귀의 얼굴이 됐어. 암만 봐도. 보니까 다른 사람이 증거하는데 마귀  얼굴이라는데 송장 같아요. 송장 송장 얼굴이야. 시커머이 이래 됐어, 또 거석해  볼라고 한참 이제, 삼십 분 기도 안 있습니까? 가서 기도한다고 이래 기도하다  보니까 그만 지나가서 고만 한 시간이 됐어. 기도하고 난 다음에 '또 보자' 얼른  기도하고 난다음에 얼굴 보니까 벌거이 그만 영 그만 은혜의 미남이 돼 버렸어.

 여러분들, 어짜든지 주님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고로 일곱 가지 도적질을 꼭 회개합시다.

 오늘 아침에 지금 OOO 장로님이 와 있는데 OOO 장로님 주일학교 반사 인제  하십시오. 보조 반사부터 시작하이소. 반사 자격 없어 보조 반사 해 가지고서  그래 한 다섯 명 되거든 분반 해 가지고 반사 노릇 해요. 우리 장로님들 다 반사  합시다. 거기에서. 반사 안 하는 장로님들은 저 분교에 가 가지고서 학생들을  맡아 가지고서, 그것을 기르고 있는데, 그래해 봐요. 과거와 다른가, 자기가  경험해 봐야 알고 체험해 봐야 알아요.

 어짜든지 나오직 안한 사람들 나와서, 새벽 기도 다 나오도록 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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