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주신 복음의 증표 4가지

 

1988. 3. 14. 양성원개강예배

 

본문 : 누가복음 13장 22절-30절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그 동안에는 양성원에서 공부를 할 때에 제가 학생들에게 많은 제재를 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강사들은 별로 제가 염려가 없었고 교수들은 너무 외국에 많이  가 있어서 교훈에 대한 안심이 되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돌아온  다음에는 서부교회 부목사라는 그런 명칭을 줘 가지고 보통 사 개월 오 개월 뭐  그렇게 그만 그저 간략한 사례는 그렇지마는 주고 설교는 한 번도 안 하고  그렇게 있다가 나중에 한두 번 설교시켜 보고 모두 다 개교회 목회로 파송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그 이유는, 혹 자기네들이 잘못 배운 것이 있어서, 또 그것을 우쭐해  가지고서 나타낸다든지, 또 한 번 말을 해 놓으면 쏟은 물이 됐기 때문에 그건  뒤에 거둘 수가 없어서 그런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사오 개월  동안 듣고 배우면 거기에서 자기네들이 혹 틀린 것은 서로 참고로 해서 수정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가르치기를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고, OOO 목사님은 처음에 제가, 조직 신학을 그걸 가르칠 수는 없으나 좀  조직 신학을 한 번 네가 여기에서, 우리에게 준 복음, 하나님이 이 세대에 내가  백 목사가 깨달은 게 아니고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있습니다.

 제가 차차차차 세월이 지나가면서 더 깨달아짐이 있는 것은 저는 아주 무식한  사람이요, 또 그렇게 독서에 대한 그런 열정도 없고 또 그 정력도 없어서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박윤선 목사님 주석도 제가 사 가지고  있으나 불과 한 이십 페이지 미만, 전체 그 미만 정도에 제가 읽어봤지 다  읽어보지 못했고, 또 칼빈의 거독교강요는 그저 몇 장 읽어봤습니다.

 그랬는데,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있으니까 시대마다 하나님이 주셔서 선지자를  세워 가지고서 이렇게 복음을 주시는 것은 보면 유력한 사람 유명한 사람을 시켜  가지고 하는 것도 있지마는 대개는 무식한 사람들이 믿음이 독실해 가지고 그런  분들 시켜서 하신 일이 많습니다. 우리 천주교에서 개혁한 때도 루터가 정치  개혁을 했고 칼빈이 신조와 교리 개혁을 했는데 개혁한 것은 그분이 혼자 한 게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 깨달은 것이 그저 종이쪼가리 하나에 이런 종이  쪼가리 저런 종이 쪼가리 책속에 끼이고 한 그런 것을 전부 그것을 원고를  수집해 가지고서 편집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됐는데, 저는 그런  감을 깊이 느끼지를 못하고 이랬으나 하나님께서 저 에게, 나는 시골에서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부흥회니 뭐 신학이니 이런 데를 다니지를 안했습니다. 제가 해방  후에 그때에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하다가 고려신학이라 하는 신학이 처음으로  창설됐습니다. 그 창설될때에 그때는 신사참배를 안 한 사람들과 한 사람들  중에도 신사참배를 죄인 줄 알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 모여 가지고서 된 것이  고신이었습니다.

 고신에서 세우는 그런 신학이 있다 해서 제가 왔었습니다. 아주 창설한  제일회에 첫시간부터 제가 왔었습니다. 와 가지고서 한 사 일동안 있는 가운데에  나로서는 그거 도무지 앉아 있을 수가 없고 별로 이 배울 것도 없고 그거  가지고는 자꾸 후퇴만 되지 안 되겠다 해서 그만 나는 천상 지금 공부 못 하겠고  여기서 배워 가지고 안 되겠고 나는 지금 가서 증거를 해야 되겠으니까 가야  된다고.

 그래 가지고 거기서 나와 가지고 증거하다가 그 뒤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심히 많았는데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 사람들을 어느 노선에다가 붙여야  되겠느냐? 그래도 그 노선 중에는 제일 고신이 낫다 해서 그 할 수 없어 내가  고려신학교를 가야 되겠다 해 가지고서 고신을 그때 왔었습니다.

 고신에 와서 뭐 입학할라 하니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논문을  쓰라 할 때에 나는 그 논문을 간단하게 ‘나는 모도나무의 대목가지가 되기  위해서 나는 왔노라’ 하는 고것만 간단하게 적어 가지고서 보내놨더니마는 그  교수회에서 웃고 아주 그거는 그만 낙제라 해서 안 할라 하는데 그 어떤 교수 한  분이 ‘이상한 분이 있다. 이게 아니다. 이거 그냥 볼 게 아니고 이게 무엇인지  모르니까 한 번 용납해보자.’ 그래 가지고서 그때 입학을 허락해서 제가 거기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졸업을 하고 이랬는데 뭐 공부할 때는 별로 이, 고려신학교  와 가지고 제가 배운 것은 별로 이 없습니다. 또 김현봉목사님 만나 가지고는  제가 뚜렸히 하나 배운 것 있는 것은 ‘사람을 만들어라’ 하는 고거 한 마디를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 나왔는데 저는 이래 무식하고 이러니까 그저 깨달은 것마다 자꾸 이래  이단이라는 정죄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OOO목사 부후와 OOO목사 또  이런 분들이 가 가지고서, OOO 목사는 세계의 교리사를, 교리의 그 모든 사기를,  교회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데 대해서 전공한 셈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노트를 해 주면서 ‘내가 이제까지 설교를 하든지  강의하든지 하는 데에서 혹 틀린 게 있거든 그거 지적해 달라. 그러면 내가 고칠  기회를 얻겠다.’ 이래 가지고서 그분들에게 말을 했는데 그분들이 말해 주는  것이 단어에서 몇 나왔습니다.

 거기서 황충이라 하는 것을 메뚜기라고 하는데 그거 지금 그거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황충이와 메뚜기라 이랬는데 그 황층‘ 이를 메뚜기과에 속했는지? 그  창충이라고는 쏘는 것이라 했는데 여기 쏜다는 황충이라 듣고 또 메뚜기라는  그런 국어사전에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과 제가 또 시편 91편에 새 사냥군이라 하는, 나는 새로 출발하는  사냥군이라고 새로울 신(新)자를 나는 생각했는데 그들이 새로울 신(新)이  아니고 새라는 이 금수라는 이 새라 하는 데 대해서 그렇다는 그 단어만 그랬지  다른 거는 그분들이 속에 두고 말 안 하고 그런지 제가 아직까지 그거 틀렸다  하는 그런 것을 말해도 말을 해 주지 안하는지 어쩐지 몰랐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느끼는 것은 참 뭐 유력한 학자들이 수백이라 할 수 있는 그  벌써 근 이천 년 동안을 두고서 그분들이 자꾸 연구해 가지고서 정죄도 하고 또  거기서 정선도 하고 이래 가지고서 오늘까지 교리신조가 다 정리가 되다시피 돼  가지고 있는데 그분들이 정리한 교리신조와 제가 깨달음이 다르지 안한 그거,  그분들과 다 다르지 않고 그분들과 같은 그 깨달음을 가졌다는 것을 거기에  대해서 제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놀랬습니다.

 내가 한 것이 어데 그분들은. 그분들은 자꾸 통계를 맞추고 또 이렇게 정죄를  하고 수정을 하고 이랬지마는 나는 그것도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찌 그들과,  그분들이 다 정립시킨 교리와 신조와 제가 깨달은 것이 일치가 됐나 하는 거기에  대해서 저는 지금도 늘 하나의 참 속으로 놀라면서 이거 뭐인가 그렇게 대략은  지금 차차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랬고,   또, 그 분들과 그분들의 정한 교리와 제가 지금 깨달은 거와는 다른게  많습니다. 아주 다른 것이 많은데 많은 것마다 전부 이단이라는 정죄를 다  받았습니다. 많은 것마다 이단이라는 정죄를 다 받았는데 정죄를 받았으나  정죄받은 것이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이게 옳다는 것을 증거가 돼 가지고  그분들이 다 정죄했던 것이 다 고쳤습니다.

 내가 그거, 내가 사람으로서 내가 그렇게 알 만한 뭐 아무 명철도 없고 또 내가  그런 박식한 사람도 아니고 이런데 하나님이 이 시대에 당신이 지금 쓰신다,  내가 또 연구하는 것이 책을 보고 연구해서 안 것 아니고 그저 말씀 증거하는  가운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줘서 말해 놓고 난 다음에는  내가 감당을 못해서 말하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정죄할 때는  나는 참 가서 뭐 숨을 곳도 없고, 없는데 그래 나중에 그거 차차 그것이 옳다는  증거가 돼서 벌써 저를 해방 직후 그때부터 고려신학교서 저를 이단이라는  소리를 제일 많이 정죄를 했었는데 그것이 다 이단이라고 틀렸다고 하는 그거는  그분들이 다 고쳤지 저에게 깨닫게 해 주신 거 고친 건 없습니다. 전부 그분들이  다 고쳤어요.

 그러니까, 뭐 이단이라고 서로 그들이 깨달은 교리와 신조와 대립된 것이 뭐  수십 가지입니다. 그 하나라 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 하나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교리 신조인데,  그뭐 지금 여기 자꾸 들으니까 무인지 모르지마는 서도 구원에 대해서도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하는 것이나 또 사람의 영에 대해서나 또 예사람  새사람에 대해서나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해서나 그 전체가 거의 다 그래  됐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여수 애양원교회 가서 집회할 때에 그때에 어째 그런 성구가  나와서,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하는 그 성구를 그때  해석할 때에 그 말이 나왔습니다.

 ‘모든 위에 뛰어난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성을  말합이다. 신성은 근본부터 하나님이신데 뭐 뛰어났는데 말할 것이 없고  예수님의 인성이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것을 가리켜 말씀한다. 예수님의  인성이 피조물인데 다같은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 위에 초월해서 있는 그것을  가리켜 말한다.’ 하는 이 말을 나는 뭐 내게 깨달아지기 때문에 말했는데 그게  그만 정죄가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때에 집회 가운데 장로 한 분은 거기서 퇴장을 하고, 그것이  고신에 바로 고려신학교 바로 왔습니다.

 와가지고 이단이라고 그렇게 잠ㅂ깐 동안 그 신학교가 옥신했는데 그 뒤에  그분들이 다시 생각할 때에 ‘예수님의 인성을 피조물이라 해야 되지 그러면  그거 창조주라 해야 되겠나?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라 해야 맞다.’ 이래서  그것은 그대로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과거에 모든 학자들과 깨달음이 일치됐다는 것이 그것이 신기하고,  나로서는. 또 그들과 대립된 그 모든 교리와 신조가 수많이 발견됐는데 그것이  다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았지마는 마지막에는 그게 성경적이라는 것을 다 인정을  받아서 오늘은 지금 학자 쳐놓고는 저 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정죄했다가서 개인적으로서 또 단체적으로 노회적으로 그렇게 다 사과를 하고서  그 회개를 하고서 다 그랬는데, 그것이 좀 내 맘에는 ‘그거 참 기이하다. 나는  모르는데 어떻게 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이 기이하고,

 또, 제가 집회할 때에 대구 집회에서 기적을 반대 했습니다. 표적을 반대하고  우리 교역자회 때에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리가 증거하는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 주는 하나님의 역사인 표적이 나타나야 사람들이 믿지,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안 믿고 있다가서  그러면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달라 이래 가지고 표적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 표적이 없을 때는 예수님 말씀도 믿지를 안했습니다.

 안 해서, 물 위로 걸어가시는 것 보고 또 명령할 때에 풍랑이 잔잔한거 모든  다, 나사로가 죽어 살아나온 이런 모든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의 그 교훈을 믿게  됐는데 우리도 이 표적을 자꾸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지를  못하시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 복음을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당신이  표적하는 이 표적을 나타내는 이 표적을 우리가 인정하고 믿어야 된다.’ 하다가  그때 교역자회서 반발을 많이 당했습니다.

 뭐 여러 목사님, 첫째는 OO 목사님이 말했고 다른 목사님들이 자꾸, 표적이니  기적이니 그런 것을 말하면 이거 다른 거 되는데 다른 데는 그러다가 사람도  죽인 일도 있었고 뭐 자꾸 이라니까 이래 된다고 이렇게 말이 나왔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꾸 뚜드리고 안수하고 이렇게 하고 이래 해  그렇지마는 우리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하나님이, 가르치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거하기를 누가 증거하겠느냐? 당신이  표적으로나 증거하지 아무도 증거할 이가 없다. 그러니까 그분이 증거하는 것을  왜 우리가 부인하고 막을라고 하느냐?’ 이 신강이 많이 있었습니다.

 있고서, 이제는 모든 목사님이 다 반대해도 나는 하나님의 표적을 나는 믿는다.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집사로 있을 때에 그런 역사가 많이 나서 문둥이도  깨끗해지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다 벙어리도 말하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그 후에 내가, 고려신학교 오지 안했는데. 고려신학교에서는 ‘지금 표적 그런  것이 없는 때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 그거는 다 잡도라’ 이런 말을 듣고서  그때부터 그걸 아주 뭐 자꾸 피하고 반대를 했었습니다.

 이라다가, ‘아무래도 이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안 됐다’ 이래서 그래  그때부터 교역자들이 다 반대해도 나는 이것을 나는 인정하고, 하나님이, 성경에  모두 보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도 하나님의 표적을 보고서 ‘과연 하나님의  독생자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래’ 했지 표적이 나타나지 않고는 그  증거를 받지 못했다.

 그때부터 반대하고 나섰는데 반대하고 난 그 오월 집회 때에 대구집회에서 백  오십 두 종류의 병이 육백 십 몇 명이 나아서 그때 개인들이 써 가지고  자기네들이 신고를 써내서 그거 지금 일호 책이 그겁니다. 육백 십 몇 명이  그때에 나았습니다.

 나았는데 뭐 귀머거리가 아주 오랫동안 귀머거리도 눈먼 소경도 뭐 이래  가치고서 또 그 뭐 여러 가지 별별 병들이 이렇게 많이 낫고 이랬는데 그것이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로,  내가 그때 기도를 그래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이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이 세대를 구원할 당신의 뜻인 복음이거든 여기에 대해서 당신이 이 말씀이  당신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간이 할 수 없는 당신만이 할 수 있는 표적으로  증거해 줘야 되지 그뭐 말세되면 모두 다 설교는 다 천사의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어느 말이 참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당신의 표적이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는데 그 집회 때 육백여 명이 나았습니다.

 그 뒤에 자꾸 계속해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이고,

 또, 이 복음으로서 이 제 주일학교가 지금 이래 되는 이것도 우리는 거기  대해서 말 한 번도 안했습니다. 한 번도 안하고 자꾸 숨기고 가루고 이랬는데  미아가 유괴아가 하나 생겨서 그 아이 때문에 그 형사 문제가 돼 가지고서  그것이 조사가 되는 거기에서 이것이 경찰서에 출입 기자가 이 말을 듣고서  신문에 낸 것이 비로소 이게 서부교회 주일학교의 광고의 시발입니다.

 그래 가지고서 이래서, 이 세계에 제일 큰 어린이 교회라 이렇게, 뭐 그 보다  더 큰 교회도 많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지마는 그래 말이 나오고, 이라고 또  이번에 어제 주일까지 이 서부교회 주일학교를 시찰하고 견학하러 온 회수가  미국 일본 또 이 한국 전체에서 온 사람 수가 회수가 구백 열여덟 회입니다.

 그러면, 한 회에 사십 명 온 데도 있고 오십 명 오는 데도 있고 시찰회로 온  데도 있고 또 한 명 오는 데도 있고 두 명 오는 데도 있고 열 명 오는 데도  있어서 구백 십 팔회째 어제 주일에 그 왔다 말 들었습니다.

 어제 주일에는 나와 제일 거리가 멀게 있었던 OOO 목사님이라고 내나 서울에  계시는데 그 목사님은 나와 신앙이 반대가 돼서 많은 시비를 거창서 있었습니다.

내게 대해서 스물 다섯 가지를 잘못됐다고 정죄한 그분인데 그 편지를 내가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깨닫지 못해, 하나도 지금 생각해 보면  틀린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랬는데 그분도 어제, 그분은 정년퇴직을 했는데.

어제 그 장로님하고 주일학교 반사 열 한 명하고 보냈는데, 개척 교회를  한답니다. 은퇴했기 때문에. 그래서, 참 거기서 보냈는가 싶어 전화를 하니까  내가 OOO 목사입니다 하면서 반사들을 보냈으니까 어짜든지 잘 좀 가르치고  훈련시켜 보내 달라고서.

 이것이 사람이 하는 일 아니라 그말이오. 어찌 지금까지 구백 몇회 수가 이래  와 가지고 이래 하도록 이거 뭐 온 사람마다 또 가서 교회가 크게 부흥됩니다.

 이래서, 한국에서 이 주일학교가 이 벌써 시작한 때가 한 십 몇 년됐지 이  후로써 이로 인해서 부흥된 그 주일학교 학생들 말하면 아마 수백만 명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뭐 수백만, 수십만이 아니라 수백만, 현재 교인 전 수보다 몇 배  됐으니까, 자꾸. 어른 아이만 차이 있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이 역사라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 이거 뭐 내가 설교를 한 거 내가 이거 뭐 사투리말 뿐인  거, 나는 그 설교록 봐야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내가 설교한 거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설교록 이 지금 우리 총공회 안에서 가져가는 목사들 수 보다도 그  밖에 교회들의 그 목사님들이 가져가는 수가 많습니다. 백수십 인이 됐다고  하니까.

 그라고, 한국과 일본과 그 미국 같은 데서도 이 설교록 어째 갔는지가 가지고서  이 설교록을 읽어보고, 한 번 아니라 한 설교를 뭐 사십 번인가 오십 번  읽어보고 그 사람들이 여기에 사람이 역부러 한국까지 나와 가지고서 참여를  하고서 설교록을 사 가지고 가고 또 테이프를 사가지고 가고 또 그곳에 교회를  시작해서 교회 시작한 것은, 하와이에는 어떤 사람이 사십 번을 읽고 와 가지고 집회  참석하고 가 가지고 교회를 하도 세운다고 사람을 청해서 거기에 O목사님을 보내  가지고 지금 교회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과거의 역사로 봐도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가 그거는 유명한  사람으로 나타나지 안하고 어느 사람으로 나타나 가지고 그래 역사합니다.

 이래서, 이 성령 역사가 이 중세대에 없었었는데 미국 어떤 산골 어떤 교회에서  그 역사가 시작돼 가지고 그 불이 시작돼 번져 나와 가지고 미국에 전국에 또  한국까지 그때 와 가지고서 하다가 그 불이 지금은 인제, 뭐 지금으로부터 한  칠팔십 년, 팔구십 년 됐는데 우리 벌써 나기전부터 말이 그 말이 나왔습니다.

이러다가 지금 잦아졌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닌가 그렇게 저는, 내가 혼자  자꾸 있어 갈수록 이 이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이거 책임이  무겁다’ 하는 그런 느낌을 자꾸 가지고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 총공회에서 벌써 그동안 자꾸 이래 사람들이 수정이 되는데  수정되는 것은 다 보면은 아무래도 그분들이 다 수정이 돼야 되지 그분이 수정  안 될 사람들이면 다 자기가 나가 갔었습니다. 갔는데, 그래 이 OOO 목사님께 이  조직 신학을 가르치라고서 가르치는데 모든 조직 신학은 그거는 토대로 삼고  우리에게 이 세대에 주신 이 복음, 우리에게 책임 있는 이 복음을 가르치라  하고서 그래 자기에게 좀 그걸 만들어 보라고 책을 쓰라 했는데 그 쓰면 쓰는  대로 그거 가져오면 내가 좀 한 번 열람을 해 가지고서 수정을 해 가지고서 그래  하도록 하자 이랬는데,   와 가지고서 참, 보면 한 페이지 써 가지고 왔는데 제가 고치는 것이더 많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는 도저히 그거 안 되겠고 이래서 ‘이거는 안 되니까 이거  안 됐다. 그라면 고전어를 가르치라.’ 이랬습니다.

 고전어를 가르치다가 나중에 ‘그라면 이 박형룡 박사의 조직 신학을 보고서  그래 가지고 좀 참고로 삼아 가지고 해 보라’ 했더니마는 그걸 참고로 삼아서도  도무지 여기 가르치는 것을 잘 모르고 이래서 그 가르친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대로에 되지 안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인물이 귀하기 때문에 그 학생들에게 제가 제재를  줬습니다. 그저 가르치면 그냥 듣고 배우지 아무리 백 목사에게 배운 거와 서로  상치됨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질문이나 그렇게 하지말고 그저 무조건 듣고  배우기만 배워라 이렇게 말을 해서 많은 시비가 있는 것을 그것을 다  꺾었습니다.

 꺾고 중단을 시켰는데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돼서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이 여기서 공부할 때에 어느 그 강사가 와서 어느 교수가 와서  가르치더란대도 여러분들이 제게 배운 거와 서로 배치가 될 때에는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 마십시오.

 넘어가지 말고 그것을 다 지적해서 ‘여기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가르치니까 어느 것을 택해야 될는지 모르겠다’ 여러분들이 만일 확신이 있는  바른 깨달음이라면 그분의 가르친 게 틀렸으면 아무리 교수가 가르쳐도 ‘이거는  틀렸습니다. 우리가 깨달은 데 이러니까 자기는 이렇게 말하니까 어느 게 옳은  지 한 번 똑똑히 설명을 해 달라.’이래 물어 가지고 진가를 밝혀서 그렇게  확고한 그 신조와 교리를 가지도록 하십시오.

 왜? 신조와 교리라 하는 것은 우리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쳐서 살길입니다.

길이기 때문에, 내 생명을 바칠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내 생명보다 귀합니다.

그 길을 잘못 알면 내 생명을 잘못 바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소한 힐이  아니라 내 생명까지 바쳐야 되는 그 생명보다 중한 교리입니다.

 생명보다 중한 교리요 신조이기 때문에 이제는 여러분들이 내가 가르치는  거라도 가르침이 뭐 틀렸으면 틀린 것을 말해서 질문을 해가지고 이 교리와  신조는 확고, 부동하지 않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요 진리 교리 신조를  가져야 바른 신앙 행위를 하지 그리 안 하면 바른 신앙 행위는 안 되는  것입니다.

 뭐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혹 목회자가 될라는 그런 생각도 가지고 오는 그것도  있지마는 목회자가 되는 것도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바로 인도하는 그 직책이  목회인데 바로 인도해서 사람을 구원하는 주님의 참 신실한 일군이 된 그것이  성공이지 뭐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사람이나 많이 따르고 하는 그런 것을 바라는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걸 가지는 데는 다 자멸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어짜든지 여기 오는 것은 내라는 내 한 사람이 여기서 배워서 주님  앞에 설 때에 후회 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로 서야 하겠고 또 이런 사람을  가르쳐서 만드는 것이 그게 필요 하지 많은 사람이 따르는 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옳고 많은 사람이 따라야 되지.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다수가 종다  하지마는 진리야 주고 못 합니다. 다수보다 진리가 좋습니다. 진리보다 하나님이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 그저 진리를 양보하고 이래 하지 말고,

 또, 이제는 조직 신학을 그것을, 조직 신학이라든지 뭐 다른 이런 모든 이제  현재에 성경 신학과 교리사 교회사 이 강사들은 있고 조직 신학강사는 OOO  목사님이 하다가서 이제 딴 데로 탈퇴하고 나갔습니다. 나갔으니까 조직 신학은  없는데,   그래 앞으로 차차 차차,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 양성원을 성경 가르치는 곳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성경 가르치는 성경 학원 모양으로 그렇게 성경 가르치는 것을  전무로 하는 기관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 생각을 제가 가집니다.

 미국에서 신학은 많이 있는데 신학은 생겼다고 하면 부패해집니다. 신학은  생겼다고 하면은 나중에 차차 차차, 신학은 하나님 공부하는게 신학인데  신학이라는 그 정의가 벌써 신학이라는 하에 있으니까 학을 연구하는 것이라  이렇게 돼 버렸기 때문에 벌써 신학의 생명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래서, 신학이 다 개혁 신학이 됐다가는 조금 있으면 그것이 다 지식 위주의,  지식의 위주로써 하나님께 가치를 두지 안하고 지식에게, 가치를 둡니다. 또  하나님 다음으로는 성경에 가치를 둬야 될 터인데 인간의 모든 이 세상 학문에  가치를 둡니다.

  이라다 보니까 자꾸 이거 속화돼지고, 미국에서 무디 성경 학교라하는 그 성경  학교가 하나 있는데 그 성경 학교는 아무리 오늘까지 세대가 이래 가도 그렇게  속화되지 안하고 변질되지 안한답니다. 거기는 성경만 가르치니까.

 자꾸 교과서가 어떤 학자가 만든 어떤 그 학을 교과서로 교안으로 쓰지  안하고서 성경을 교안으로 쓰니까 교안이 변동 안 되니까 그 암만 해석이 좀  달라지기는 달라지지마는 별 변동이 없어.

 오늘까지 벌써 오랫동안 지나갔는데, 교육 기관으로서 변동되지 안하고  부패해지지 안하고 고대로 되어 있는 것은 무디 성경 학교밖에 없다 하는 그런  말을 제가 요즘에 생각이 나왔습니다. 그전에 듣기는 들었지마는 요즘에 그  생각이 났는데.

 이래서, 우리도 이 성경 가르치는 이 기관이 돼서, 사람마다 보면 한 사람이  전부 다 깨닫는 게 아니고 사람마다 깨닫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점에 대해서 잘 깨닫고 저 점에 대해서 깨닫고, 자기가 그 깨달은 장점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 점을 깨닫게 해 주셨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가 겸손히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서,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장으로 비유했습니다. 시장이라 하는 것은 자기  생산 하나만 가지고 가면 모든 걸 다 사 가지고 옵니다. 그렇지 안해요? 이거  모양으로 이 사람 요거 깨달으면 고 깨달음 고거하나 가지고서 삽니다.

 그러면, 고거 하나 깨달아 가지고 하면 또 고거 하나 깨달은 것만 가지면 모든  사람의 깨달음을 다 자기가 흡수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이래서, 성경의  깨달음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강사를 미리부터 그 한 석 달 전부터 말을  해서 ‘너는 성경을 몇 시간을 가르치라’ 하는 그것을 분담을 시켜 가지고 그  가운데서 연구하고 하면은 자기로서 깨달은 데에 제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다고 은혜되는 깨달음 말이지요. 그것을 와서 여기서 하루나 가르치고 또 그  다음 그래 가르치고,  이래 가르치면 그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제일 하나님이 그에게 줘서 깨달은 그  진수를 알 수가 있지 않겠나? 이러면, 이것을 가르쳐서 배워나가면 이 소용 없는  신학이라는 거, 공연히 인간 말만 꾸민 거,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가치가  없어요. 그뭐 이래서 조직 신학 그런 것은 그것은 하나의 종류들을 다  나열시켜서 다 이렇게 진열해 놓은 것인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제가 OOO박사의 조직 신학을 약간 봤습니다. 다 보지 안하고 그저 한 한 번에  몇 페이지씩을 봤습니다. 보니까 그분이 아주 독서는 많이 해서 참고 서적으로  말하면 아마 한국에 지금도 있는 사람들이 그만치 참고를 많이 한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그분이 아주 광범위하게 많은 그 참고 서적을 봤기 때문에 재료는 제일  많습니다. 재료는 제일 많이 수입을 해서 해 놨어요.

 이랬는데도 그래도 그 누가 말하기를 OOO 박사의 이 책은 생명이 없다 김현봉  목사님이 말했는데. 그 말이 아주 깊이 깨달은 말입니다. 왜 생명이 없느냐!  모두 다 이 사람은 깨달았다 저 사람은 저래 깨달았다 이래만 말했지 ‘너는  어째 믿느냐? 나는 요래 믿는다.’ 그게 없다 말이오. 나는 요래 믿는다 그게  없어. 그게 없으니까 자기 신앙 없으니까 생명 없는 거 아닙니까? 책이지 뭐  그거는 참 책보따리지 이거는 뭐이라 이랬는데,   그래서, 여기 양성원에서는 인제 뭐 모든 유명한, 조직 신학으로 말하면  벨코프가 유명하고 또 어드멘이 유명하고 또 박형룡씨가 유명합니다. 한국에 뿐  아니고 말이지.

 이러니까 유력한 분들의 조직 신학을 이것을 다 사 가지고서, 살 데가 없으면은  여기서 등사를 해가지고서 그것을 교안을 만들어서, 그거는 잠깐 보면 됩니다.

고 일곱 권으로인가 돼 가지고 있는데 고것은 만일 여러분들이 청년으로서  그것만 볼라고 이라면 그저 한 두 서너 달만 보면 한 삼사 독 할 수 있습니다.

삼사 독 하면 그거는 그만 다 알아요. 뭐 이 처음에는 모르지마는 여기 배운  것을, 여기서 성경, 배운 게 있기 때문에 그거 들으면 이거 틀렸다 옳다 하는 거  환하게 자기가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거는 공부하도록 하고 나머지기는 전부 성경을 이거, 그런 교과서는,  교안으로 서적으로 돼 가지고 있는 거는 사 가지고서 숙제로 집에서 다  한번씩은, 한 두서너 번 열람하도록 하고 성경을 배워야 되겠다 하는 그걸  생각해서 지금 성경을 주로 가르치도록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암만 신학자 뭐 많은 학을 이렇게, 그러기 때문에 신학자랑은  어학 자랑입니다. 어학 자랑. 그러니까 어학을 세 나라 어학 네 나라 어학 다섯  나라 어학, 많은 나라의 어학을 많이 해야 많은 나라의 말로서 저서 돼가지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어학 자랑이지 그게 아무 그렇다 해 뭐 깨달은  그런 건 없어요. 보면 알지마는.

 그래서, 미국에 요번에 간, 미국에서는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벌써  지식주의로 흘러서 많이 속화가 됐습니다. 카브넌트 신학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낫다고 하고 그 뭐 퓰러 신학이니 그런 신학은 세계 제일 큰 신학인데 그거는 뭐  세상 학교와 꼭 같지 그거는 신학이라고 보지를 못합니다. 유니온이니  프린스톤이니 하는 그런 학교도.

 이랬는데, 카브넌트 신학교에 다니는 여기 학생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전화가  왔어요. 이렇게 암만 이 지금 배우고 봐야 여기서 말하는 거는 우리가 배운 거  찍해야 지금 그 종류를 지금 선택하는 그 시발에 지나지 못하니까 암만 해 봤자  끝은 결론을 지우지 안하고 여기서 허송세월 하니까 그만 나가겠습니다. 하는  그런 전화가 왔기 때문에 그래도 네가 거기에서 정한 그 기간을 채우고 나오너라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이런데, 그래서 아무래도 성경 배우는 것이 이것이 유리하겠다 해가지고,  그러니까 그저 여짜든지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성경을 배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만드는 것이 둘째로 중요합니다. 그뭐  이것 없으면 안 됩니다.

 이래서 오늘 내가 이 말씀을 보고서 여러분들에게 권면 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23절에,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하나 지금 증거할라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여기에 과거에 여기서는 어짜든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은 주관성은 아니고 객관식으로 이렇게 한다 해 가지고서  자꾸 무제한의 객관식을 자꾸 용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말한 걸 다 그것을  평가하지 안하고 막 용납하고 보니까 자연히 속화가 돼져 버리고 흐려집니다.

 이래서, 여러분들이 이 양성원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하는  요것을 기억하고 어짜든지 좁은 길로 갈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마태복음  7장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크고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혐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좁은 거,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되 좀 더 좁게, 좁게라 말은 그것은 그뭐  아무나따나 까다롭게 믿는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니오. 좁다는 말은 예를 들면  여러분들, 지금 여기에 공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 공한 개 있고 공이 두 개  있습니다. 공이 두 개 있는데 이 공과 공 사이에 제일 가까운 데는 몇 군데  있겠습니까? 하나입니다. 그걸 말합니다. 거기서 넓으면 넓은 것만치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가까운 것은 꼭 하나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말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자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래야 돼지지 그저  사람이라는 것이 ‘서로 화평하자’ 또 뭐 ‘관용하자’ 또 ‘독선주의로 하지  말자’ ‘안하무인으로 그렇게 날뛰지 말자’ 이래 가지고서 넓어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넓어집니다.

 그 신앙을 자꾸 어짜든치 ‘보자. 이 둘 말한다.’ 둘 말하면 ‘뭐 둘 말하면  둘 다 이해해야지. 열 말하면 열 다 이해해야지.’ ‘열이 있는데보다 그 총중에  어느 게 낫노? 보다 어느 게 제일 나쁘나?’ 나쁜 거 하나를 가라내고 나니까  아홉이 됩니다. 아홉에서 여기에서 그저 제일 빠지는 게 뭐이냐? 가려내고  가려내니까 나중에 하나가 남습니다. 하나가 남으면 ‘하나 남는 이거는 이거  성경적이냐 아니냐?’ 아니면 그것도 집어 던져 버립니다.

 이래서, 자꾸 이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을 써야 되지 자기가, 좁다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진리는 둘이 아니라 그말이오. 진리는 둘이 아니라. 점과 점  사이에 가까운 것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 옳은 거는 하나지 둘이 아니라. 그  하나의 옳은 것을 찾아가라 하는 그말입니다.

좁은 길로 가라 말은 그 사이비한 것 중에도 자꾸 가리고 가려서 하나만 되는  옳은 거 그걸 찾아가라 하는 그것을 가리켜 좁은 문으로 말한 것인데, 좁은 문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좁은 문은 곧세 가지를 말합니다. 좁은 문은.

성경 말씀인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그 뭣이든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세 가지 대속이 아니면 그만 거부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전에 오종덕 목사님이 고신에서는 제일 성경을 잘 아는 분이었는데  그분은 말하기를 그런 말을 하는 소리를 제가 한 번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설교를 할 때에, 설교할 때에 예수님의 피가 안들었거랑은 그 설교일랑은  너희들이 듣지 말아라.’ 그 말이 얼마나 엄격한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이 안 들었으면 그 설교 암만 유창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아무리 훌륭해도 그 설교가 진리에게로 자꾸 더 들어가고 더 진리와 가까와지고  영감과 가까워지고 예수님의 대속과 가까워져서 자꾸 그속으로 가까워지고 그  속으로 깊이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은 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파고 들어가는 것도 끝이 없어요. 죽는 날까지 성자가 파고 가다가도 아직까지  마지막에 종착지를 못 만났어요. 들어가도, 들어가도, 또 있어요. 더 좁고, 좁고  더 좁아요. 그러면 이것도 틀렸다 이것도 틀렸다 다 그라고, 좁아요.

 이래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들어가고 영감으로 들어가고 진리로 들어가서  영감도 다 뭣을 예수 믿어야 되겠다는 그것도 영감이지요. 그러나 그 영감 속에  또 깊은 영감이 있어. ‘예수님을 믿되’ 이렇게 믿어야 되겠다! 그만하면  다인가! 그 보면 또 더 들시가신, 아니다. 이것도 껍데기다. 이런 껍데기를 다  제하고 요렇게 믿어야 되겠다,’ 하는 그것으로 자꾸 들어가는 게 좁은 길로  들어가는 것인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래 서로 친구끼리 말하든지 또 설교를 듣든지 들을 때에 이 설교가.

누구에게로 들어가느냐? 주님께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냐 진리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냐 영감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냐 이거 구별하면 그만 압니다.

 이걸, 몰라 그렇지 알고 나면 쉽습니다. 세상 아무거라도 알고 나면 다 쉬워요.

알기 전에는 몰라도.

 알고 나서,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으로 우리가 또  중생됐습니다. 났어요. 이 셋이 우리라요. 우리 속에 생명이시요.

이러기 때문에 이 셋이 아니면 우리는 필요 없어. 온 세계를 접령 한다고 세계가  다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 셋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길이지 그 외에는  생명길이 없습니다.

 이래서, 자꾸 이래, 강사들이 가르치더란대도 ‘그거 가르치는데 내가보니까  자꾸 나를 진리로 인도한다’ 그 배우고 보니까, 양성원에 여기와서 배우고  보니까 ‘자꾸 진리 속으로 어짜든지 나도 모르게 진리 속으로 자꾸 끌려  들어간다, 영감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예수님의 대속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하면은 바로 배우는 곳이요 바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여기 와서 보니까 널펑하게  ‘이 세계 학자들에게로 나간다’ 학자에게로, 학자가 구주가 아닙니다.

‘학자에게로 나온다. 자꾸 이거 모든 학자들의 그 신학이라는 거 학문으로  이렇게 나온다.’  내 가치가 자꾸 바뀌어져서 학문으로 나가고 학자에게로 나가고, 내가 가치가  자꾸 진리만이 가치 있다 영감만이 가치 있다 예수님의 구속만이 가치 있다 내  가치관이 자꾸 그리 기울어지는 거와 이리 퍼져지는 걸 알 수가 있을 거라  말이오  그래서, 그 O 목사님을 먼저 그때 작년엔가 제가 이 부산으로 오라하는 이동을  말했습니다. 이동을 말할 때에 부산으로 올 이유는 뭐이냐? O 목사님이 지금 이  조직 신학을 맡고 있는데 이 지금 교훈이 나와 통일이 돼야 되지 교훈이 통일 안  되면 이거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부산으로 와 가지고서 가깝게 여기  거제동교회로 와 가지고 있으면서 그라면 자꾸 조석으로 만나니까 어째 좀 그  교훈이 차차 차차 서로 하나가 돼서 통일이 되도록 그리 하자 해서 그래 가지고  그것을 원했었습니다.

 그라니까, 자기가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동을 만 데로 하라 하면 하지마는 이  부산으로는 안 올랍니다’ 그래 거부돼 가지고서 그렇게 하다가서 나중에 총공회  위원들이 이동하라 해 가지고 지금 저런 문제가 생겨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어짜든지 보다 좁은 문으로, 보다 좁은 문으로,  자꾸 문에서 자꾸 점점 좁은 문으로 좁은 문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했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데로 들어가라 말이요? 네, 더  진리 안으로.

 안으로, 그것도 영감은 영감이지요. 영감 그 영감보다 더 강한 영감 뜨거운  영감, 자꾸 영감으로. 예수님의 대속의피를 자꾸 대속 속으로,  대속이라 하는 그것은 아는 사람도 있고 안 배운 사람들은 복잡해 잘 몰라요.

예수님의 대속은 자기가 그 모든 게 다 우리 신앙생활이 다거기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부교회 주일학생들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열 여섯 가지를 말하라  하면 쫙 말해요. 다 외우고 있어요.

 그러고, 둘째로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여개 ‘힘쓰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으리라’ 하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힘쓰지 안하고 그저 설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해서 들어가기만 구하는 그런 사람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이 여기 있고,  또,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그 말에는 무슨 말인고 하니 고 밑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문 닫기 전에, 기회가 오기 전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안하고 해야 되지 기회 놓치면 안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기회가 있어요. 사람이 넓은 신앙이라 좁은 신앙이라, ‘그 사람은  신앙이 좁다. 신앙이 좁고 모든 판단도 좁다’ 판단도 널펑하게‘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  아니면 아니고 그거면 그거지 그렇게 넓지 안하고 아주 정확무오한, 그렇게  판단을 가진 사람도 있고 뭐 널펑하게 ‘이거나 저거나 뭐 그렇게’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있는데,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는 그 말은 이 힘쓰지 않는자는,  고 기회 안에 힘쓰지 않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고 또 벌써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죽는 날까지 언제든지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있어요. 자기가  회개할 기회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2장에 보면은 에서는 복빎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했지마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랬습니다.

그 기회가 있는 거라.

 기회 있으니까, 우리의 강퍅한 마음으로 ‘뭐 회개는 아무 때 해도 되지’  하지마는 본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그 시기가 있습니다. 고 시기  안에서만 그렇지 시기를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을 욕을 보일대로 보이고 강퍅할  대로 강퍅했고 대적할 대로 대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버려  버립니다. 그 시기 놓치면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교만과 강퍅은 자멸하는  행위입니다.

 그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문 안에서 저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는 그가  누굽니까? 내나 예수님 당신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당신이 기회가 지나가고 문을 닫은 다음에는 다시 그 사람에게 대해서  냉정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든지 긍휼을 베푸시지마는 기회를 놓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냉정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에 성전  밖마당이니,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로 말해 놓고 밖마당은 다시 취급하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성전 밖마당은 이 성전도를 여러분들이 잘 봤겠지마는 보면은 성전도가 예를  들어 이 방만 하면은 성전은 그 안에 있는 그저 요런 책상 하나만 합니다.

작습니다. 밖마당은 성전 마당은 뜰은 크고 성전은 조그만합니다. 고 중에도 또  제단은 더욱 조그만합니다. 경배하는 자는 제사장이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런데, 그것들은 벌써 그걸 측량하지 말아라 그랬다 말이오. 그거 몇 장에  있습니까, 계시록 11장에 있습니까? 갈대 같은 자로 가지고서 측량하되 성전  밖마당을 측량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벌써 그것은 그 문을 닫았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이걸 언제든지 뭐 죽을 때까지 당신의 긍휼이 꼭 같다 그래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이 우리에게 이래 개인마다 이래 권고하는 게 있는데 그 강퍅을 부리고,  자꾸 그때는 영감이 오고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 그렇게 하는데 그 강퍅을  부려서 기회를 놓쳐 놓으면 다시는 주님을 만날 기회를 못 만납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들이 뭐 그런 기회 놓치고 나서, 어제 손명복 목사님이  우상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하고 갔는데 우상 그 준비해서 우상에 대해서 그걸  승리하도록 이래 놨는데 그 기회를 놓친 사람, 우상 숭배를 한 사람 가운데 두  종류 있습니다. 우상 숭배를 한 사람 있는데 아직 우상에 대해서 아무 철도  모르고 성경이 없는 사람, 성경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달라요.

 성경을 똑똑히 아는 그런, 성경을 똑똑히 아는 그런 사람들은 뒤에 아무리  회개를 해도 그 신사참배 전 그 능력은 못 받습니다.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는  없어요. 관계를 안 해요. 하나님이 외면해요. 그만 음행한 여인처럼 외면해  버려요.

 그러나 모르고 한 자들은 그것도 저것도 아무 가책도 없고 아무 거석없다 한  자는 그자들은 회개하고 하지마는 회개한 그자는 그 영감받으나 그 영감이  언제까지 있느냐? 그 영감 받아 가지고 하나님의 시험이 있을 때 시험을  통과하면 그 영감이 변동 없고 시험 통과하기 전에는 있다가 없다가 이러다가  나중에 시험에 져 버리면 다시 그만이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거창 사람인데 그 임영수라 하는 영수입니다. 옛날은  장로 못 줄 때는 영수 주지 안했습니까? 임 영수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거창서  거기에, 그 임씨 많이 사는데 어데고? 북상 그 뭐꼬? 친해가? 친해인데 거기에가  거창읍에서 아마 한 삼십 리? 오십 리 되나요? 오십 리 인데, 새벽기도  마칩니다. 새벽 기도 마치고 오십 리 되는 집에 가서 아침 먹고 와 가지고서  오전 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도 몰라. 어째 가는지를 몰라요.

 이렇게 갔고, 또 김동선 목사님이라고 내나 그 교회 그 전도사로 그때 있었는데  그분이 해방 후에 경상남도 도청에 학무국장으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만  전도사 내놓고 학무국장 됐었어요. 자기 지식이 있고 하니까 그만 세상으로  나갔다 말이오.

 그런데, 그분이 한 번 가니까 그 임영수가 성경을 읽고 있는데 불은 깜깜하게  꺼놓고 성경을 읽고 있으니까 ‘이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외우는가 보자’ 한  시간을 있어도 성경을 외우고 두 시간을 있어도 성경을 외우고 이래서  ‘이상하다’ 이래서 ‘얼마나 외우는가 보자’ 얼마나 외우는가 보자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있으니까 나중에 뭐 두서너 시간 지나가도 자꾸 읽으니까 그래  가지고서 문을 두드리며 ‘그래 영수님 성경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외웁니까?’  ‘아니, 나는 성경 외우지 않습니다. 성경 보고 읽습니다.’ ‘불을 꺼놨는데  어찌 그거 읽어요?’ 깜깜 불을 꺼놨는데 그대로 성경을 읽은 것을 그분이  증거를 합디다. 김동선조사님이라고 그 사람이 아주 유식도 하고 아주 버틀도  크고 아주 인물도 잘나고 좀 유력한 사람입니다.

 그랬는데, 그분이 신사참배 때에 와 가지고서, 끌려 왔었는데 자기 속으로  해석이 되기를 ‘내가 뭐 속으로는 신사참배 안 하고 겉어머리하는 거야  어떻겠나?’ 이라면서 속으로 ‘신사참배를 막 박멸시켜 주옵소서’ 속으로  기도하면서 신사참배에 절을 했다 말이오, 요래 시키는데.

 절을 하니까 자기 속에 뭣이 확 날아가는 것 같은데 뭣인가 확 달아나는데 그  자리 퍽 엎어졌습니다. 엎어지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일어서서 그 오십 리를  꼭 일반 사람과 같이 그렇게 거의 하루를 걸려서야 가지 그전에는 못 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불 꺼놓고 성경은 한절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사람마다 그 능력이 있어서 그만 그라고 난 다음에 그 능력이 다시 안  돌아와요. 이러니까 기회가 있다 말입니다. 성경에 기회가 있는 거 그래서 그런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제일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하는 다른 신을 뒀기 때문에 그것이 말하자면 재혼한  것이야. 주님을 배반하고 재혼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다릅니다. 그래도 뭐 다른  설교하고 일반 영감은 오지마는 극단의 영감이 안 옵니다.

 그 사람이 극단에 빠질 때에 그 사람을 가르쳐 주고 자기가 모르는 걸 네가  그리 가면 안 된다 이래 중단해 주고 특별히 주님이 직접으로 섭리하시는 그런  섭리를 받지 못합니다.

 또 자기가 이와같이 연구해서 서적 하나 보고 둘 보고 자꾸 놓고 떼 가지고  이래는 보지 자기가 모르는 거 툭툭 트여내서 이렇다 가르쳐주는 거 받지는  못해요. 그런 영감을 받지 못해요. 제가 이렇게 모두 다 이단이라 한 것은 다  그래 받았지 ‘내가 이래 계산해 보니까 이게 아니냐?’ 그런 게 아니고 말하다  보니까 툭 튀어나와서 그 나오고 난 다음에는 뒤에 이것 또 ‘이 큰일 났네.

이런 소리를 똑똑히 모르고 해놔서.’ 이 겁을 내서 다 정죄 받았으나 그 뒤에  다 수정이 돼졌지 제가 뭐 놓고 앉아 떼서 그래 말해 가지고 한 거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 신앙에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잃지 마십시오. 한 번 문을  닫은 후에는 안 돼요.

 이러니까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겠다. 내가 어짜든지 지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를 사랑해야 영생이 된다는 그것이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대로요.

 그대로인데 그대로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보통 있는 게 아니라 있을 때도  있다가 차차차 ‘아무래도 내가 그렇게 걸어가야 되겠다, 생활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나중에 차차 차차 보면은, 그런 기회가 있다 말이오. 그런 기회에  해야 되지 그런 기회를 놓치고 난 다음에 지나가고 난 다음에 다시 그 영감이 안  옵니다. 안 와요, 그걸 여러분들이 아십시오.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라’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냉정합니다.

 주님을 언제든지 ‘그분은 아무래도 참는 분이다 그분은 아무래도 용서하는  분이다’ 이렇게 생각지 마십시오. 그분은 굉장히 까다로운 분입니다. 아주  까다로운 인격을 원만한 인격을 교제하면은 그분의 모양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인격이 신앙 인격이 위대할수록, 또 이 세상 또 인격이  위대할수록, 얼마든지 용서하는 것 같고 뭘 들어도 감당하는 것 같지마는 그  속에 복수성은 굉장합니다. 사람이 위대해 갈수록 이 복수성이 큽니다.

 복수성은 하나님이 제일 복수성이 강하요. 그러기 때문에 성자들은 복수성이  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기와 안 되는 대립이 됐으면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그저 뿍뿍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 신앙가들입니다.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이제 그 말합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그러니까 주님이 문을 닫고 안 열어  주니까 주님 앞에 친하니까 말할 것 아닙니까?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주님에게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이 말은 주님과 같이,  생활했다 말이오. 주님과 같이 생활했다 그말이오. 먹고 자고 같이 생활했다  그말입니다. 만만하게 생활했어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저  여기에서도 가르치고 저게서도 가르치고 뭐 자리를 가리지 안하고서 자꾸 이렇게  가르치고 자꾸 말하고 이렇게 많이 말해 줬다 말이오. 장소를 가리지 안하고  그저 늘 주님이 계속해서 말씀해 주지 않습니까? 만나면 천국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고 이 말씀 저 말씀 자꾸 이렇게 가르치고 하니까 귀넘어듣고 업수이  봤지마는 요렇게 냉정해 집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지 안했습니까?’ 너거가 ‘주님하고 같이  생활하지 안했습니까? 생활도 같이 했고 또 우리가 길에서 고 들에서 고 항상  가르치지 안했습니까?’ 그렇게 하리니 말이오.

 ‘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이제 이  쥼은 길에 들어서라고, 좁은 길에 들어서라고 말씀하신 건데 좁은 길이 아니고  전부 다른 어만 길에 가 가지고서 세상 생활 하다가서 이렇게 주님의 교훈을 다  만홀히 여기고 다 업신여기고 이래 왔으니까 너거들이 오는 그 자리는 나는 내가  모르는 자리요, 어데서 온지 모른다 그말은 너거가 다니다 오는 그 자리는 나는  그곳은 나는 모르는 곳이라, 내게는 상관없는 곳이라 그말이오. 좁은 길에  들어서서 걸어갈 때에 주님과 상관있지 좁은 길을 떠난 자는 주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요것이  중요합니다. ‘행악하는 모든 자야’  이 행악이라 하는 게 뭐입니까? 행악이라 하는 게 무슨 말이요? 행악이라 말이  무슨 말이요? 저 뒤에 오늘 처음으로 오신 분, 울산서 왔는지? 악을 행하는 게  뭐인데? 네, 행악하는 자들이라 말은 그전에 와서 배웠지? 악이라 하는 것은  이게 뭐이냐 하면 악을 일반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악이라 하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모든 피조물 중심은 다 악입니다. 민족 중심, 인류 중심,  국가 중심, 뭐 문화 중심, 과학 중심 무엇이든지 하나님 당신 중심이 아닌 것은  전부 악입니다.

 이래서, ‘행악하는 자들아’ 이 말은 전부 구속하신 주님 중심이 아닌 그 모든  중심을 가진 그것은 당신에게는 상관이 없다 그 말입니다. 요것 가지고  심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은 다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뭐, 악을 가지고 선교사 합니다. 악을 가지고서 선교사  노릇도 하고 악을 가지고 부흥사, 목회 성공, 악을 가지고서 순생도 하고 악을  가지고 순교도 합니다. 악을 가지고 순교도 합니다. 순직자들이 세상에 많고  순족자들이 많고 순국자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 다 죽음을 내놓은 거 뭘  가지고 내놨소? 뭘 가지고 그것을 내놨소? 하나님 중심 가지고 내놨소? 그 무슨  중심 가지고 내놨어? 악 가지고 내놨어, 악 가지고. 알겠습니까?   그거 무슨 생활 그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중심인  사람이 실수해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 이오, 하나님의 신부가 아무리 다른  거 뭐 돈을 잘못 썼다 뭐 재를 저질렀다 해도 그거는 남편이 책임질라 하니까  힘만 들었지 그렇다고 버리지는 말라했어. 음행한 연고 외에는 버리지 마라.

이혼하면 안 된다.

 그말이 무슨 말이요? 당신을 주로 호시고 당신 중심으로, 당신 중심 당신  위주로 당신에게 피동으로 이렇게 사는 그것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담당하지마는 당신을 버리고 악을 그라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이거 있는 거는 하나님이 용납 안합니다. 안하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있지만 안 됩니다. 그거는 건설구원은 다 헛일이오.

 그래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암만 배워도 이걸 공을 들여서, 오늘 두 가지 말한 것 ‘좁은 문’ 또, 악을  행하는 거. ‘기회가 언제든지 있는 거 아니다’ 요것을 생각해서 쓰면 하나님,  업수이여기지 안하고 조심하고 자기가 참 구원 이루는 사람이고 이것을  업신여기는 자는 그 자는 벌써 하나님 앞에 버려서 화인을 맞아 놓으면  헛일이오.

 화인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은 암만 양심 쓸라 해야 양심 못 씁니다.

양심대로 하지 못해요, 그게. 안 돼져요.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기회가  언제든지 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오.

 ‘나를 떠나가라’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자기중심, 이러니까 뭐 여러분들이  보면 알아. 여러분들이 이래 강사도 보면 ‘저 강사는’ 암만 입으로 말해도  저거는 행악자다, 자기중심 이다, 피조물 중심이다, 명예 중심이다, 영광  중심이다, 자기 대우 중심이다, 또 저거는 무슨 학문 중심이다, 자기 인기  중심이다, 저거는 세상에 학자들 하는 무슨 신학 무슨 신학을 중심이다.’  중심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눈을 뜨고 볼라하면 보여진다 말이오. 저 사람은  아무리 둔해도 천해도 저 하나님 중심이다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아니면 행악자인 줄 아십시오.

 28절에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이 보니까 이거 예수 믿는 사람  아니요? 안 믿는 사람이 그런 거 어찌 압니까? 아브라함이 하늘나라에 있고  선지자가 하늘나라에 있고 이삭과 야곱이 하늘나라에 있는데,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것이 지금 우리 진영에서  아직까지 해결이 되지 않은 미해결 교리입니다. 교리.

 그러면, 이 사람이 지금 어두운 바깥에 쫓겨나 가지고서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보니까 아브라함과 선지자와 모든 사람들은 다 하늘나라 가 있는데  자기는 쫓겨나서 지금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다 하는 이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봅니까? 이 사람이 지옥 간 사람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요대로 말하면은  여러분들은 지옥을 가겠습니까? 천국을 가겠습니까?  이 사람의 행위,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는 이와같이 지옥 간다 했는데,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는 지옥 간다 했는데 여러분들은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는  전부 지옥 보낸다 하면 여러분들은 지옥을 가겠습니까 천국을 가겠습니까!  어데로 가겠습니까? 예?  아니, 여기에 ‘행악하는 자들아’ 다 지옥 보내니까 행악지 안한 자 행악 안  한 자는 천국 갈 것이고 행악하는 자는 지옥 가야 안 됩니까! 그 지옥 가야  되면은, 성경에 말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바깥  어두움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 하니까. 그러면 이 교리가 지금 분명히  나타나지 안하고 있습니다.

 어제 손 목사님이 와서 설교를 했는데 이제 나온지 한 몇 달 안 된 교인이 듣고  나와서 자기 구역장에게 가 말하기를,   오전에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하시고 오후에는 또 이렇게 설교하시고 이러니까  신사참배하면 지옥 가고 다 천국 못 가니까 하라고 이렇게 말하니 어느 교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면 오전에 백 목사님이 가르친 것은 이렇게 열심히  믿어라 이렇게, 열심히 믿는 것은 천국갈라고 믿는 게 아니고 심신의 기능이  구원 얻을라고 하는 것이지 그저 지옥을 가고 천국 못 가서 그게 아니고,  천국 못 가는 사람이 이리 힘씀으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라. 이거는 천국 가는  사람의 그 구원의 영광이요 실력의 차이요 이게 대우의 차이지 이게 지옥 가고  안가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가는 것이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라는데 또 여기서 가르치는 거는 달리 가르친다 말이오.

 이러니, 여기에서 지금 이것이 작년 그 오월달 집회에 OOO 목사님과 서로  문답할 때에 제가 이걸 믿느냐 안 믿느냐 하니까 그분이 나는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여기 지옥에 가는데, ‘너희가’ ‘너희가’ 하는 것이 여기 지금 이  사람들이라 말이지요? 행악하는 자 아닙니까?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랬으니까 이 너희는 누굽니까? ‘너희는’ 누굽니까? 우리는 빠졌다고 봅니까?  여기 양성원 학생들은 여기 ‘너희’ 속에는 안 들어 갔습니까! 들어가  있습니다. 들어가 있어. 들어가 있어.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어데를 갑니까? 천국 간 중에  또 지옥에서 지금 슬피 울고 이를 갈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는 거짓말입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심신의 기능이 지옥 간다는 것이 판명이 나지마는 성령이 안 오는  사람은 그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인정이 안 돼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중생된 영과 심신으로 된 육과 합해 가지고 사람되어 있고  안 믿는 불택자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은 죽은 영과 심신이 합해 가지고서  사람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죽은 영은 작용이 없습니다.

 작용 없는 죽은 영, 영의 작용이 없는 그 사람들에게 인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희로애락을 압니까 모릅니까? 이 심신의 기능은 희로애락을 아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을 아는 것이오. 심신의 기능은 희로애락을 아는 것인데  희로애락을 아는 기능이 지옥 갔기 때문에 그들은 슬퍼할 줄도 알고 고통당할 줄  알고 울 줄도 알고 마음에 원통하게 여길 줄도 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심신의 이 기능이 자기 일생 동안 사는 기능에 이제 행악은 다  지옥입니다. 행악은 다 지옥이오. 하루 동안 행악으로 살았으면 지옥입니다.

하루 동안 산 그 기능은 지옥이야. 자기가 일 분이고 하루고 하나님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좁은 길로 간 그거는 한 시간 살았든지 일 년을  살았든지 그것은 구원입니다.

 여러분들, 기능이라 하는 거 이상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하루 동안  여기에서 에이(A), 비(B), 시(C)를 배웠습니다. 하루 동안 에이(A), 비(B),  시(C)를 배웠는데 하루 그라면 열 시간을 영어 단어를 배웠습니다. 단어를  배웠는데 단어를 배우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한 그것은 뭐입니까? 그 한 것이 뭣이  그래 했습니까? 정력이 그랬소, 정력. 아닙니까? 정력 아니라요? 그거 이해가  되면 이해가 된다고 말해요. 정력이 그랬어요? 정력이 분명히 그날 읽고 쓰고  외우고 한 건 정력이 그랬습니까? 정력이 그랬습니다.

 정력이 그랬는데 열 시간 지나고 나니까 정력이 있습니까? 정력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까? 정력은 없어졌어. 정력이 뭣 돼 버렸어? 무슨 기능 됐어? 심신의  기능, 무슨 기능? 어학 기능 됐어, 어학 기능. 그러기 때문에, 고거 안 한  사람은 그날 그만 그 열 시간을 이래 노는 사람은 그거 없었는데 그거 공부한  사람은 영어의 기능이 영어 기능이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하고 나니까 그  사람에게는 영어 기능이 그 만치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심신의 정력이 변하여서 기능이 되는데 그 정력이  변해서 썩을 기능이 되든가 썩지 안할 기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말해도 이  사람들아 알아 듣지를 못하고 지금까지 부정을 하고 있어요. 이것도 이제까지  역사에 없는 교리라, 이거 지금.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에사 알려 주는데 역사에 없는 교리를 우리가  맡았지마는 옆에 있어도 몰라, 옆에 있어도 이거 부정하고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23장 끝에 보면은, ‘이 독사의 종류들아, 너희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고 의인의 비석을 만들면서도 말하기를 우리가 그때  있었으면 우리는 그 선지자를 죽이지 안했겠다 하는 자들아, 너희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된 것을 증거하고 너희들이 있다, 선지자의 근본인 내가 있지마는  너거가 나를 선지자로 아느냐? 나는 너희들이 십자가 못박아 죽일라고 하면서  너희들은 옛날 선지자는, 그 선지자는 조그만한 새끼 선지자요 나는 선지자의  근본이다.’ 말씀하시지 안했습니까? 그때와 꼭 같애요.

 그러니까, 그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러기 때문에, 신앙이라 하는 것은 이거 고정체가 아니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아무리 자기가 오늘까지 잘했다 할지라도 그만 힘쓰는 게 없으면 안  돼. 여기 ‘원해도’ ‘구해도’ 들어가기를 구한다 이랬는데 힘쓰지 안하면 안  돼.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지 않으면은 이 영생은 안  이루어집니다.

 이런데, 이거 오늘은 전부 ‘그거 뭐할라고?’ 그렇게 말한다 하면 다 저거  너무 치우쳤다. 좁다.’ 이래 가지고서 여기에서 지금 우리를 좁은 도라고  이렇게 말하고 ‘그 사람들은 좁게 믿는다’ 좁은 게 뭐인지 알지도 못하고 욕  얻어먹을 좁은 것으로서, 사람이 관대하지 안한 것으로서 그렇게 보고 있는데,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거는 진리 아니요?  원수를 사랑하라 했는데 그러면 원수의 주먹덩이만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좁은  것입니까 이 집채 무더기만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좁은 것입니까 어떤 게 좁은  것입니까? 한 번 판단해 봐요. 예? 그래? 주먹덩이만한 거 사랑하는 것이 더  좁은 거 아닌가? 어때요? 똑똑히 판단을 해 봐요. 똑똑히 알아요, 지금.

버물거려 있지 말고.

 진리에 이 껍데기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꾸 깊이 들어가니까 작은 원수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무한한 원수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깊이 들어가니까? 무한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거라. 이러기 때문에 그게 좁은 길이라. 그게 좁게 가는  거라. 알아야 돼요. 이 꺼꾸로 자꾸 육덩이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일이 안 된다  그거요.

 여러분들이 여기 배우기는 한없이 배우는데 여기 새벽 기도 나와서 배우는 것만  하면 그만 하면 다른 데 뭐 십년 오년 신학 하는 것보다 나아요. 이거  귀넘어들어 그렇지.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거 신앙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자기가 자꾸 주님과 연결되기 때문에 연결되면  그만 몇 층이라도 몇만 길이라도 뛰어 오를 수가 있고 연결됐다가 떨어지면  그만이야.

 자꾸 우리는 전진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전 시간에 아무리 전폭적으로 구원  얻었다 할지라도 이 시간에 방임하면 없어. 구원 얻은 거는 그대로 있는 거고.

자꾸 새 구원을 이루고 작성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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