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와 소망을 바꾸라

 

1982. 6. 23. 수야

 

본문:요한복음 5장 5절~9절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오늘은 다음 주일날 공과를 복습하는 말씀을 증거하기로 약속한 대로 그대로  합니다.

제 26 공과 본문은 요한복음 5장 5절~9절 제목은 38년된 병자 요절은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일대지에, 이는 표적이니 그 실상은 우리 성도들이다. 이는 표적이니 그 실상은  우리 성도들이다. 이 표적에서 그 실상은 우리의 각 부분을 바로 깨달아 구원을  이루어가야 그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이요, 이루지 못하면 정죄하는 율법이  된다.

둘째, 소망을 구걸살이에서 병낫는 살이로 바꾸고, 소망을 구걸살이에서 병낫는  살이로 바꾸고, 인간의 혜택을 의뢰하는 생활에서 찾아오신 주님을 의뢰하는  것으로 바꾸는 이 표적의 실상이 우리가 되어야 하고, 또 네 가지 난제인 제일  중병, 자신 무능, 협조자 없는 것, 방해가 있는 것이 봉착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한 분만을 의뢰하고 바라보는 것으로 초월 또는 무시해 버려야 하고  세 가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한다.

셋째 대지. 첫째 순종,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아니한 생활 곧 주님의 법칙대로  하는 생활 하나 하나가 고쳐지는 것이요 일어서는 것이다.

둘째 순종,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종전 38년 생애는 그 자리에 얹혀  살았으나 이제는 그 자리를 든 것처럼 닥쳐 오는 형편 사정 처지에 싸이고  속하고 거기 따라 붙어 사는 생활을 버리고 자리를 든 것처럼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행위를 그 현실 그 사정 그 처지에서 하여 대적 마찰을 극복하는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다.

셋째 순종, 일어선 것이 자리가 옮겨지면 걸어감이 되는 것처럼 시작한 믿음  생활을 자꾸만 바꾸어 닥쳐오는 어떠한 현실에서도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  걸어가는 것이다. 이 결과는 그 대중 속에 제일 무능, 가련, 수치, 가난,  멸시받던 자가 정반대로 인기, 존귀, 기쁨, 희망, 행복을 가장 많이 가진 자로  바꾸어진 이 표적대로 될 실상인 우리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38년된 병자만이 아니고 그 행각에 있는 수많은 병자는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거기 가서 못물이 동할 때에 병낫는 일이 있다고 하니 행여나 병이나  나을까 해서 병을 고칠 그런 소망을 가지고 거기 온 병신들도 있고, 어떤 병신은  아예 병나을 생각은 가지지 않고 선한 사람들이 많이 지나 다니니까 구걸하기가  그 자리가 좋겠다 해서 그렇게 찾아온 사람도 있고 여러 모양의 그 병신들이  모였는데,  차차 차차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거기 있는 병신들이 소망은 무슨 소망을  가졌던고 하니 그저 구걸이나 좀 넉넉히 좀 많이 해서, 후한 사람 만나 가지고  구걸이나 좀 많이 해서 넉넉하게 살까, 배부르게 살까 하는 이 소망을 가진 것이  거기 있는 병신들 전부입니다. 어떻게 좀 돈 많은 사람 선한 사람 만나서 구걸을  많이 얻어 잘살아 볼까 하는 이 소망을 가진 것이 한 둘이 아니라 거기 있는  병신들이 전부 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소망은 어떻게 돈을 많이  구걸받아 가지고 잘 먹고 잘살까 하는 이 소망만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는 제가 농사 지어서, 또 공장을 해서, 직장 생활을  해서 잘 먹고 잘 살려 하는 그게 아니고 오고가고 하는 그 만나는 사람들의 덕을  봐서, 그 사람들의 돕는,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덕을 봐 가지고 잘살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거기 있는 병신들은 소망한다는 것이  구걸을 잘 많이 해 가지고 잘살 소망, 또 잘사는 것은 오고가고 접촉하는  사람들의 덕을 많이 봐서 잘살려는 사람 전부 이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교회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 병신과 꼭 같은  사람들입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살꼬’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이 교회에 믿는 사람 가운데에 아마 10분지  한 8, 9나 안될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어떤 사람은 이래 살아도 저래 살아도 뭐 먹고 사는 것이야  잘사나 못사나 그저 그것은 사는 대로 살고, 어쩌든지 나는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심판받아 무궁세계에 갈 사람이니까 세상에서 참 하나님의 뜻대로의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 온전한 사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경이 말한  대로 내가 참 의인이 한번 돼 보겠다. 내가 의인이 한번 돼 보겠다. 거룩한  사람이 한번 돼 보겠다. 내가 하늘나라에 가도 후회없이 참 거룩한 행위를 내가  여생은 살고 가겠다.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도 이 가운데에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참 의인되어 보는 것, 흠없는 생활을 해 보겠다는 것 이  소망만 가진 사람도 여기에 많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 소망도 가지고 또  세상에서 사는 것도 잘 살고 이 두 가지 소망을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들도  여기에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하늘나라는 있다고 하니까 있지마는 가 봐야  알지, 예수님 믿어서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나 잘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이런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자기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행위, 의인과 거룩한 생활을  하고 가겠다. 뒤에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누가 나 산 전기를 다른 사람들이  책으로 써서 보든지 소문을 듣든지 하면 모든 사람이 감화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깨끗한 생활을 하고 가겠다 하는 이런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은 교회에 나오는 병든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병든 사람이 아니요 그  사람은 성한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38년된 병자가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 회개하고 나서는 이 사람  됐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 만나 회개하고 난 다음에는, 이 사람이  이제까지는 어떻게 해서 구걸해 가지고 좀 잘 먹고 잘 입고 할까 하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이제는 잘 먹고 잘 입겠다  하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고 어쩌든지 병을 고쳐 봐야 되겠다 하는 그 소원을  가진 거와 같이,  오늘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사는 행복 이 소망을 가진 자는 거기 있는 병신과  같은 자요, 이 소망에서 ‘내가 세상에서 못 사는 것도 다 인간의 실력이 없어  그러니까 어쩌든지 나는 잘살든지 못살든지 땅 위에서 의인이 한번 되어 보고  거룩한 생애를 할 수 있는 이런 생애가 한번 되어 보겠다’ 하는 이 소망을  바꾸어 가지는 것이 38년된 병자가 예수님 만난 후에 가졌던 거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38년된 병자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순전히 어떤 혜택을 바랐더냐? 거기  있는 병신들 혜택도 바라지 않고 오고 가고 하는 이 모든 성도들,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덕을 입어 가지고 잘살아 볼려 하는 그것을 가졌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구걸해서 잘살아 보겠다는 것도  포기했고, 선한 사람 만나 가지고 구걸 많이 하겠다는 것, 선한 사람 만나야  되겠다는 그런 것도 다 포기하고, 선한 사람에게서 혜택을 보겠다는 것도 포기,  또 구걸 얻어 가지고 잘살아 보겠다는 그것도 포기, 이제는 이 두 가지가  바꾸어졌습니다.

바꾸어져서 사람 의뢰하던 것이 이제는 이 양반이 어떤 양반인지 이 양반이 내  병을 고쳐 준다 하니까, 이 양반이 내게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니까  이제는 이분의 돕는 이분의 혜택을 내가 바라겠다. 그러면 예수님이 자기에게  은혜 베푸시는 이것만 바라는 것으로 바꾸어졌습니다. 또 자기가 병이 나아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는, 성한 사람이 되어지는 이 소망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러면 이 38년된 병자가 이 두 가지를 바꾼 것을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에서 이 두 가지를 바꾸어야 이 표적의 말씀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복음이 되어지지, 이 도리를 들어서 깨닫고 이 두 가지를  바꾸지 않았으면 네가 이 도리를 듣고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하기 때문에  뒤에 핑계할 수 없이 이 말씀이 우리를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밤에 이 두 가지를 우리가 바꿉시다. 이 두 가지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래 가지고 부산 재벌이  되겠다, 한국 재벌이 되겠다, 뭐 내가 큰 회사를 경영해서 한번 성공해 보겠다,  내가 어떤 지위를 차지해 보겠다, 권세를 차지해 보겠다, 내가 어떤 대학자가  되어 보겠다. 예술가가 되어 보겠다. 별별 소망을 가지지마는 이 38년된 병자가  구걸해 가지고 잘 먹고 잘 살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소망은 그것은 다 땅의  소망입니다. 땅의 소망이요 그것은 참사람이 못된 병신 사람이 소망하는  소망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가르쳤습니다.

38년된 병자들과 그 외에 많은 병자들이 어떻게 하면 구걸해서 잘살아 볼까  그것만, 잘살아 봤자 그 거지가 얼마나 잘살겠소? 구걸해서 잘 먹고 잘 살아  볼까 하는 요것만 꿈꾸는 거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김가라는 이 사람을 만나  가지고 내가 유익을 보고, 또 좋은 처녀에게 장가를 가서 내가 그 처녀로 덕을  보고, 또 좋은 총각에게 시집 가 가지고 또 총각의 덕을 보고, 또 내가 우리  사장을 친해서 사장의 덕을 보고, 상관의 덕을 보고 뭐 별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의 덕을 보고, 또 마지막에는 자기라는 사람의 덕을 보고, ‘내가 기술을  가지고, 내가 실력을 가지고’ 하는 그거는 자기 덕 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인간 덕을 봐 가지고 세상에서 잘 살려고 하는 자가 여기에 기록된  모든 병신들입니다. 모든 병신들. 이 병신의 자리에서 사상을 바꿔야 됩니다.

그러면 사람 덕을 봐 가지고 잘살려고 하는 자가 사람에게 구걸해 가지고  잘살려고 하는 자인 것을 이 표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 더러운 자리에서 돌아서야 되겠습니다. 어디로  돌아서겠는가? 이제는 인간 덕을 볼 게 아니라 찾아오신 주님 덕을 봐 가지고,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 한 분의 덕을 봐 가지고 소망은 어쩌든지 병이 나아  건강한 사람 되기를 원한 그 병신과 같이 내가 인간병을 고쳐, 내게는 못된  성질이 있고 못된 고집이 있고 못된 버릇이 있고 못된 욕심이 있고 못된 취미가  있고 못된 습성이 있고, 모든 이 못된 것이 있으니까 이런 모든 인간의 나쁜  요소는 다 고쳐 가지고 나도 죽기 전에 참 의인이 한번 돼 가지고 가겠다.

흠없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또 거룩한 생애를 이룬, 부끄럽지 아니하고 어데  가도 다른 사람이 감화를 받을 만한 이 거룩한 생애를 하고 나는 가겠다 하는 요  두 가지를 소망을 하는 것이 우리가 38년된 병자가 주님 만나 가지고 이 두 가지  회개한 거와 같은 요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38년된 병자가, 옆에 있는 병신들은 전부 어떻게 하면 후한 사람 만나 가지고  구걸 좀 많이 해 잘살까 이런 소망을 전부 다 가졌는데, 이 38년된 병자는  엉뚱이같이 예수라는 사람이 뭐 하나 왔는데 그분의 말만 듣고 그만 이 구걸할  소망을 다 버리고 ‘어쩌든지 내가 병 고쳐서 온전한 사람 되어 보겠다. 이 병  고쳐 보겠다.’ 하는 이 소망을 가진 것이 물에 넣어도 붓지 않을 말 같고  어리석은 말 같았습니다, 이 병 고쳐 보겠다는 것이. 병 고쳐 보겠다는 것이 이  사람 하나뿐이었어.

또 오고가는 점잖은 사람들을 의뢰하던 이것을 거기 찾아오신 예수님의 혜택을  입을려고 예수님을 의뢰한다는 이것도 참 다른 사람이 보면 다 웃을 일이요  허무한 일입니다. 그렇지마는 그 뒤에 결과가 어찌 됐습니까?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제일, 참 제일 천한 사람이요 가련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 만나 가지고  요 두 가지를 딱 바꿨습니다. 인간 의뢰하던 것 주님 의뢰해, 의식주에 소망하던  것 사람 병 고쳐 보겠다는 것 요 바꾼 것. 요 두 가지 바꿨습니다.

요 두 가지를 바꾸고 난 그 38년된 병자는 그 결과가 어찌 됐는가? 그 결과가 그  병도 나았고, 그만 거기 많은 사람 가운데에 제일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끄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에 눈이 휘뜩해서 그 사람에게만  눈이 갑니다. 그만 모든 사람의 인기가 그리 다 집중돼 버렸어. 또 사람의  행복은 쾌락에 있다 하는 것인데, 그날 그 자리에서 제일 기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제일 기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제일 기쁜 사람은 그  사람이었습니다. 제일 만족하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 그 사람이 제일  만족했을 것이오. 그러면 그 가운데에서 제일 희망이 넘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제일 불행한 사람이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이 됐습니다. 사람이 행복은  자신이 온전한 사람 되어지는 것이 행복이요, 제일 행복이요, 다음에는 모든  사람이 다 존대하는 온전한 행위를 가지는 것이 둘째 행복이요, 셋째 행복은  쾌락을 가지는 것이 셋째 행복이요, 넷째 행복은 만족을 가지는 것이 넷째  행복이요, 다섯째 행복은 희망이 넘치는 것이 다섯째 행복입니다.

이 사람은 뭐 행복 뭉텅이요. 마구 행복은 혼자 똘똘 뭉쳐서 제일 큰 행복을  혼자 가졌습니다. 혼자 이 제일 큰 행복을 제일 천한 인간이 가지게 된 것이  어떻게 해서 가지게 됐는가? 의뢰하는 것을 바꾸고 소망을 바꾸고 요거 두 가지  때문에 이렇게 모든 사람 가운데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에게 요 문서 계시로 가르쳐 주십니다. 요것이 역연새로 계약맺은  신약 성경 계약 속에 든 조건이오. 계약의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믿으면 돼,  믿으면.

어떤 사람이 듣고 ‘그것은 물에 넣어도 붓지도 않을 소리다. 뭐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어? 모든 인간을 의뢰하지 않고 예수만 의뢰해? 또 의식주가 중대한데  그것도 다 돌보지 아니하고 제가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행위가 되어 볼려고 하는  이 소망을 가져?’ 삐쭉삐쭉하고 비웃지마는, 비웃지마는 정말로 요 둘을 바꾸어  가졌으면 그 사람은 인간 가운데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입니다. 얼마 안 가서 이  사람의 행복된 것을 영원히 우리가 볼 것이오. 또 이 사람은 갈수록 기쁨이  충만할 것이요, 만족할 것이요, 희망에 넘칠 것이요, 모든 사람의 주목은 끌  것이요, 모든 사람에게 인기는 끌 것이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로  갑니다.

오늘 우리 서부교회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요 두 가지를 당장 바꿔 가지고, 이 두  가지를 바꿔 가지고 만일 하루를 지나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다.

괴이쩍다.’ 이래 볼 것이요, 한 달을 계속하면 ‘야, 그 우습다. 저게 저러면  뭐 어쩔려고 그럴꼬? 제가 한번 해 보겠다고 지금 한번 우쭐거리고  나서는구만!’ 별별 조롱을 하지마는 만일 두 가지를 바꾸는 생애를 1년을  계속한다면, 1년을 계속한다면 그 사람의 사람의 변화된 것도 행위의 변화된  것도 모든 사람이 부러워할 뿐만 아니라 두려워할 것이요, 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역사로 인해서 모든 사람의 눈이 다 집중될 것이요, 다  놀랠 것이요, 다 그이의 발 아래 복종하지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는 그 대상이  되어질 것입니다.

참 이렇게 큰 행복이 우리에게 있지마는 우리가 어리석기는 이 세대의 아들들만  못합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 두말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다  마구 입을 다물고 이 일을 다 취할 터인데, 우리는 이는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  사실을 등한히 여기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밤에 요거 둘을 꼭 고쳐야  됩니다. 뭐 뒤에 많은 말 있지마는 그거 말할 것이 아니라 요거 둘을 고쳐야  되겠어, 둘을.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조롱할 것이오. ‘아, 이제 보이지 않는 예수만  의뢰하고, 예수만 의지하고 바라본단다. 그러면 밥이 나오는가 떡이 나오는가  옷이 나오는가 보자.’ 할 것이오. 보지! 이렇게 인간 의뢰하는 것, 어떤 사람은 자기 의뢰하고 살고, 어떤 사람은 남편  의뢰 아내 의뢰, 아버지 의뢰 아들 의뢰, 상관 의뢰 부하 의뢰, 친구 의뢰 뭐  인간 의뢰하고 사는 요것은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 38년된 병자가 오고 가는  모든 사람 다 의뢰하고 그 사람들에게 한 푼씩이라도 혜택을 보고 살아 봤자  제까짓 게 병신으로 마지막에는 죽어 송장되면 모든 사람이 이거는 구제부에  넣어서 동네 장례로 데려다가 화장시켜 버리고 말지 그까짓 게 무슨 소망이  있겠소? 이와 마찬가지로 제가 인간을 의뢰하는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고것만 하고  나면 세상 마칠 때는 멸망만 일생동안 마련했지 자기에게 영원한 나라의 소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멸망만 마련했지. 이러니까 요것을 바꿉시다. 요거  바꾸는 것이 문제요. 이 바꾸는 것이 쉽게 되는 것 아닙니다. 여기 잘난 사람들  좀 바꿔 보십시오. 이거 못 바꾸면 못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에 큰 낭파와 실패와 산 벼락 같은 일이 닥칩니다. 닥쳐도 눈도  꼼짝거리지 아니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가 의뢰하는 주님은 만유의  대주재인 것을 자기가 확실히 알고 전능자를 의심없이 의뢰하기 때문에 그런  지저분한 것들이 와서 떠들어 봤자 상관이 없다 그말이오. 마치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며 큰 사자가 까치 찌직거린다고 그 사자가 놀래 호독거릴 건가?  절대자를 정말로 의뢰한다면 그분을 의뢰하므로 그분의 시키시는 대로 순종해  나갈 때에 나라가 달려든다고, 사회가 달려든다고, 병이 달려든다고, 죽음이  달려든다고, 공산주의가 달려든다고, 전능자를 정말로 의뢰한다면 그가 염려가  있을까? 이것이 의뢰하느냐 안 하느냐는 증거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정말로 네가 나를 의뢰하는구나! 네가 백세에 난  아들이라도 아끼지 않고 번제로 드렸으니 이제야 네가 나를 참으로 두려워하고  의뢰하는 자인 것을 내가 알았다! 이제부터는 안심하고 너를 축복준다! 의뢰하지 않는 자에게, 가다가 딴 것 의뢰하고 의뢰한 것 배반할 자에게 축복  주면 그 축복 다 까불라 가지고 화 될려고?  우리가 여기에서 좀 큰 사람 한번 돼 봅시다, 큰 사람. 이게 대인입니다.

창조주시요, 주재시요, 주권자시요, 전능자시요, 전지자시요, 우리를 사랑하기를  당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는 자시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마음 안에도  계시는 이 하나님, 모든 피조물 의뢰하던 것을, 피조물 의뢰하는 것은 피조물을  거슬릴 수가 없고 피조물을 따라서 살 것이고, 그의 비위에 거슬리면 의뢰하던  것이 반대될 터이니까, 피조물 의뢰하는 사람은 피조물을 거슬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슬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의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에 피조물이 ‘너 그러면 죽인다!’  어떻게 세상이 떠들어도 요동하지를 않는 그것이 절대자를 의뢰하는 증표입니다.

이렇게 이분을 의뢰하는 사람이 참 잘난 사람이요, 포부가 큰 사람이요, 위대한  사람이요, 대인이요, 이 사람은 세상이 그 사람을 놀라게도 못할 사람이요,  흔들리게도 못할 사람이요, 망치지도 못할 사람이요, 아예 세상을 발 아래 밟고  그까짓 거 상대하지도 아니하는 사람이요, 정말로 잘난 사람이요, 세상이 미워서  어떻게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위인이요, 대인이요, 강한 자요, 무게있는 자요,  지극히 큰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예수님 다음으로 지극히 큰  자입니다. 이 사람 한번 돼 봅시다.

이제 모든 피조물, 어떤 사람은 자기 의뢰하고 살고, 어떤 자는 인간 의뢰하고  살고, 어떤 자는 돈 의뢰하고 살고, ‘내가 이만치 부동산 있으니까!’ 부동산  의뢰하고 살고, ‘내가 회사가 이만치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고 그것만  받아도 되니까’ 그런 것 의뢰하고 살고. 참 못났소, 잘난 것 같지마는.

여러분들! 대주재를 의뢰하는 것과 그런 것 의뢰하는 것과 어떻게 같습니까?  이는 참 차원이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이렇게 차이가 다릅니다.

떡 줄 사람은 시장하지도 않는데 자기 혼자만 백지 침을 꿀떡 꿀떡 삼키고  있다는 말과 같이 대주재는 내 의뢰의 대상이 안될려고, 내가 의뢰하는 것에  책임을 안 질려고 이러는데 저 혼자 의뢰하는 것은 우스광스러운 짓이요  어리석은 일이지. 그러나 이분은 변하지 않는 거짓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분이  당신을 의뢰하는 자는 수치당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당신을 의뢰하는 자는  책임을 진다고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인간을 초월한, 인간이 이해 못할, 천추 만대에 기념하고  칭찬하고 자랑하고 참 존대할 만한 그 생애를 걸어간 그 원인이 어데 있느냐?  “내가 의뢰하는 이를 내가 알고” “내가 의뢰하는 이를 내가 안다.” 그분은  그분이 의뢰하는 분이 어떤 분인지 확실이 알고 의뢰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해도 그를 흔들 수가 없었어. “내가 의탁하는 것을 그날까지 그분이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노라” 말했습니다.

이제는 피조물 의뢰하던 것 버리고 이제는 창조주, 피흘려 구속하신  하나님이시며 중보자이시며 양성 일위이신 주님, 이 주님을 의뢰하는 것으로  바꿀 것, 의뢰하면 그분 의뢰하니까 그분 뜻대로 해야지. 그분을 의뢰하니까  순전히 받을 것은 그분에게 밖에는 받을 것이 없기로 작정한 것인데 그분에게만  받을려 하면 그분의 인도대로, 그분의 성미대로, 그분의 비위대로, 그분의  원하는 대로, 그분의 뜻에 맞추어서 살아야 되지, 내가 그분을 의뢰하면서  그분의 비위에 반대가 되어지면, 당신과 나와 반대되어지면 의뢰하는 그게 다  헛일일 거라 그말이오. 내가 인간을 의뢰하면 그 인간의 비위를 맞춰야 될  것이고 따라 살아야 될 것이고, 주님을 의뢰하면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의뢰하는지 인간을 의뢰하는지, 주님의 이치를 의뢰하는지 인간  이치를 의뢰하는지 그것은 주님이 시험할 때에, 주님의 인도대로 행하라고  이렇게 시키실 때에 주님의 인도대로 행하는데, 행하다가 이 세상이 와 가지고  ‘그렇게 하면 낭파된다’ 해서 세상이 낭파를 지울려고, 해 지울려고 이러니까  세상이 무서워서 주님에게 순종하던 것을 중단하면 세상보다 주님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믿지 않는 증거이지. 의뢰하고 순종하다가 세상이 ‘너 그러면  우리는 너를 버리고 너를 멸망시키겠다’ 하니까 세상에 비위맞춰 따라 살면  주님 의뢰하는 것보다도 세상 의뢰가 더 크기 때문에 거기 기울어진 것이지.

이것으로 판명이 나는 것입니다.

의뢰하는 사람 많지마는 가다가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을 시험하게 되면 고만 착  배반하고 헛일하고 돌아섭니다. 참 못났소. 우리가 못났습니다. 이 못난 것 이것  벗읍시다. 못난 것 이것 벗고, 못난 것 벗고, 오늘부터 당신은 죽은 가운데 살릴  수도 있어. 다니엘이 당신을 의뢰했는데 사자구덩이에 던졌으니까 이제 볼일 다  보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사자구덩이 들어갔지마는 살아 나오니까 더 능력  컸고 더 영광이 컸고 더 성공이 컸고 수입이 더 많았어.

이러니까 이분을 의뢰하고 순종해 가다가 죽어도 꿈쩍없고 빼앗겨도 꿈쩍없고  거지돼도 꿈쩍없고 감옥에 갇혀도 꿈쩍없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꿈쩍없고 죽어도  꿈쩍없어. 버림을 당해도 꿈쩍없어. 낭패를 당해도 꿈쩍없어. 왜? 이 모든  것에서 구출하실 수 있는 능력이 얼마든지 무한히 있고, 그 신실함이 무한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이 의뢰자를 따라갈 수 있다 그말이오. 이거 바꿔야 됩니다.

이거 바꿉시다.

자, 오늘 밤에 이제 피조물 의뢰하던 것 이제는 주님 의뢰하고, 그런다고 해서  피조물에게는 배척하고 피조물에게는 이별을 합니까? 피조물은 이제  원수시합니까? 그것 아니오. 이분을 의뢰하고 바라보면 이분 시키시는 대로  했는데 이분 시키시는 대로 하면, 시키시는 대로만 하면, 남편에게도 남편이  잘잘 녹도록 이분이 시키십니다. 이분 시키시는 대로 하면 남편이 잘잘 녹소.

이분이 시키시는 대로 하면 아내가 쫄쫄 따르요. 이분이 시키시는 대로만 하면  매장시켰던 친구들도 마지막에 이렇게 손 위에 들고 올라옵니다, 들고.

이러니까 이제 의뢰하는 것을 우리가 바꿉시다. 의뢰하는 것을 바꾸되 의뢰하는  것을 바꾼 이 의뢰가 진실되기를 얼마나 진실될 건가? 의뢰하므로 그분에게  순종하다가 매 맞아도 의뢰는 요동 않겠다. 이혼을 당해도 의뢰는 요동 않겠다.

직장에서 쫓겨나와도 의뢰는 요동 않겠다. 감옥에 갇혀도 의뢰는 요동 않겠다.

사형 선고를 받아도 의뢰는 요동 않겠다. 이제 사형 선고에 이제는 가서 죽어도  의뢰는 요동치 않고 의뢰함으로 죽겠다. 왜? 죽음 가운데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생명이 남아 있으면 죽었던 것을 다시 살릴 수도 있고, 의뢰함으로 죽을 생명이  때가 돼서 끝났으면 그 의뢰의 상급이 무궁세계에서 무한할 것이오.

이러니까 다시는 요동치 않는 의뢰로, 피조물 의뢰하던 것 이분 의뢰로 바꾸기를  소원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소원하는 사람. 네. 소원이야 다 되겠지요.

소원은 다 하겠지요. 놓읍시다. 그러면 작정하는 사람 한번 손 들어 볼까요? 자,  그러면 작정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작정하는 사람. 작정하는 사람.

작정하는 사람 손을 잘 못 드는데, ○○○씨도 손 들었나? 작정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작정하는 사람. 뭐 이제는 생명까지 다 뺏겨도 이 의뢰를  요동치 않겠다고 작정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만일 이래만 된다면  우리만 해도 삼팔선 저까짓 거야 뭐 확 뚫어집니다. 문제없어. 그거 문제없소.

그까짓 게 무슨 문제요? 그만 우리나라를 통해서 세계에 선교가 어디든지,  방방곡곡에 퍼질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밤에 이 의뢰하는 것 요동치 않으면, 그러면 의뢰하면 어떻게 할까?  의뢰하면 그분에게 다 맡기고 의뢰하니까 그분 시키시는 대로 해야지, 그분  시키시는 대로.

또 하나만 바꿀 것. 뭐? 소망 바꿀 것. 소망은 뭐 이 세상에서 의식주, 또 사장,  고관 대작 큰 벼슬, 모든 행락과 구비한 행복 어떤 소망이든지 이 세상에 속한  이런 소망 했던 것 이제는 내어 놓고 어떤 소망? 나도 흠없는 사람 돼 보겠다.

흠없는 의인 돼 보겠다. 성자 돼 보겠다. 성녀 돼 보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노아와 같은, 에녹과 같은, 아브라함과 같은, 사도 바울과 같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같은 이런, 마리아와 같은 의인 한번 돼 보겠다, 의인. 나는 이제  땅에 있는 그런 소망은 다 버려 두고 나는 의인 한번 돼 보겠다. 의인 되려는 이  의인의 소망, 이제는 털끝만치도 후회할 것이나 부끄러울 것이나 가책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행위, 요거는 온전한 행위와 이제는 의인 요 두 가지 내가 소망으로  살아 보겠다.

요 두 가지 소망으로, 땅에 있는 부귀영화의 그 모든 소망을 이제는 그만 두고  의인과 온전한 행위 요 두 가지 소망을 내 소망으로 두고 요 소망을 두고 요  소망을 이루어 보겠다. 요 소망을 가지고 요 소망을 이루어 보겠다. 요 두 가지  소망으로 바꾸고 싶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바꾸고 싶은 사람. 바꾸고  싶은 사람. 바꾸고 싶습니까? 정말로 바꾸고 싶습니까? 정말로, 정말로 바꾸고  싶소? 나도 정말로 바꾸고 싶소. 정말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러면, 정말로 바꾸고 싶으면 바꿀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 오는데요? 배고파도  좋습니까? 굶주려도 좋습니까? 헐벗어도 좋습니까? 배척을 당해도 좋습니까?  멸시 천대를 당해도 좋습니까? 어떤 일을 당하든지 나는 의인과 온전한 행위만  돼 보겠다. 의인과 온전한 행위가 된다고 하면 감옥에 갇히는 방편을 통해서, 순  목베임을 당하는 방편을 통해서, 몽둥이로 뚜드려 맞는 방편을 당해서, 배척을  당하는 방편을 당해서, 감옥에 갇히는 방편을 당해서, 거지가 되어지는 방편을  당해서, 어떤 방편을 당하든지, 주님이 어떤 방편으로 나를 의인과 온전한  행위로 만드시든지 요 두 가지만 만들어 주시면 좋겠다고 이렇게, 이제 어떤  방편을 써도, 주님이 잘 먹고 잘 입는 방편 가지고 이거 만들어 주신다면 참  좋겠는데, 주님이 그렇게 만들런지 어떤 방편 쓸런지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조건부로 ‘내가 의인과 온전한 행위는 이런 방편 써 주십시오. 저런  방편 써 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조건이 있습니까 무조건하고 의인과 온전한  행위를 만들어 주기를 원합니까? 무조건하고 이 두 가지를 만들어 주기를  소원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무조건하고. 아, 손이 꼬부라진다. 손이  꼬부라져. 뭐이 못들 게 뭐 있어, 있기를! 어리석어. 등신이라 못 들지. ‘무슨  방편 써도 좋습니다’ 하고 우리가 작정해 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 온전한 사람 되기 위해서 배부른 방편보다도 배고픈 방편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요. 배고픈 방편 취하면 그 다음에는 백 배나 배가  부릅니다.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어.

자, 어떤 방편을 막론하고 이제는 이 두 가지 소망을 내 소망으로 가지고 주님  인도만 죽는 날까지 뿍뿍 따라 가리라! 가리라! 가리라! 이제 작정한 사람들,  마음에 간절한 작정한 사람들은 두 팔 들고 이제 작정한 사람은 한 팔 들고 자,  한번 손 들어 봅시다. 자 두 팔!  이제는 마귀가 뜹니다. 이거면 다요. 이거면 다입니다. 이거면 다요. 예수님이  피흘리신 것 이것 때문이요,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것이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이오.

자, 이제는 주님이 우리에게 참 이 두 가지 돌이켜 주셨는데, 이 두 가지 우리가  회개를 하고, 모든 염려는 다 주께 맡겨 놓고 뿍뿍, 배고파도 순종하고,  억울해도 순종하고, 매맞아도 순종하고, 병들어도 순종하고, 멸시받아도  순종하고, 천대받아도 순종하고, 경찰서에 잡혀 가도 순종하고, 감옥에 갇혀도  순종하고, 빨갱이에게 잡혀 가도 순종하고,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도 순종하고,  사형받아도 순종하고 요렇게만 나가면 장차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이 사람의  상속의 유업입니다. 유업이오. 이미 한번 죽기는 죽는 건데 못 갈 거 뭐  있습니까, 있기를? 뭐 생명만 내놓으면 다 되는 줄 압니까? 아니오.

제가 서울에 국군 묘지에 한번 갔는데, 가 보니까 거기에는 모두 생명 내놔서  전사자들만 있는데, 생명 내놓은 전사자들만 있는데, 생명 내놨지마는 쪼가리로  요만한 사람 요만한 사람 요만한 사람 요만한 사람 표가 있습니다. 생명 내놔도  큰 일 못했소. 생명 내놔도 큰일 못해. 생명 내놔도 한국만 차지하는 일도  못했소.

내가 거기 슬슬 가면서 ‘이분들은 생명을 내놨지마는 우리나라 하나도 그저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구나. 생명 내놓는다 할지라도 실력에 따라서, 생명을  내놨는데도 자기 실력이 적은 사람은 생명 내놔 봤자 적은 일, 생명 내놓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로구나. 이런데 우리 기독자들은 생명과 모든 것만 다 내놓으면  능치 못함이 없으니 이거 어쩐 일이고?’ 제가 국군 묘지를 지나가면서 ‘야,  생명 내놔도 실력 이상의 큰 일은 못 하는데 우리는 생명 내놓으면 능치 못할  것이 없게 되니 이 어쩐 일인고?’ 저 혼자 국군 묘지를 가면서도 ‘참 웬  일입니까? 웬 일입니까?’ 속으로 구덩거리면서 지나갔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두 가지 바꿨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광고 하나 있습니다. 예배 마치고 30분 기도 후에 남반은 1층 신관 여반은 2층  구관에서 철야 기도회가 있습니다. 또 녹음한 것을 재독합니다.

또 하나 광고합니다. 잘 들으시오. 잘 안 들으면 우사합니다. 오늘부터 당분간  여반 변소는 전에 남반 변소를 사용하고 남반은 새로 변소 짓는 곳에, 저 새로  짓는 저 집에 말입니다. 짓는 곳의 담 있는 곳에 임시 변소를 만들었습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임시, 이걸 곧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8월 집회  안에 지하실이라도 해 놓고 가야 되기 때문에 부득이 그래 했습니다. 잘  양해하시고, 그래서 남반은 신관에서 변소에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가 없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폐회하고는 여반 변소이니까, 이거 여반  변소이니까 들어가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여반이 들어가니까 남반들은 이 변소에  못 들어갑니다. 이거 단단히 광고를 듣고 그릇됨이 없도록 하십시오.

건축에 대해서 일곱 가지 기도, 첫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이 건축을 해 주실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되도록 기도해야 되겠고, 둘째는 온  성도들이 이 일에 대해서 성심성의를 기울여 화를 받는 자는 하나도 없고 다  복받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야 되겠고, 셋째는 관민, 모든 이웃들과 모든  관민이 우리 하는 일에 협조하도록 다 성령으로 감동시켜 그들도 복을 받는 사람  되고 우리 성전 짓는 데 화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넷째는, 공사를 맡은 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영육의 강건을 달라고, 충성을 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사고가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로는 좋은  재료를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되고, 일곱째는 좋은 일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좋은 일기란 말은 우리 위해서 오는 비 안 오게 해 달라는 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기 순서를 짰는데 거기 맞추어서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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