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없는 믿음

 

1980. 12. 19. 금야

 

본문 : 마태복음 9장 1절 - 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보시고 이르시되 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9장에 내려 읽어 보면 여러 종류의 병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육신에 병든 이 병을 고치시는 권능이 계신다 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 아닙니다.

지나다가 환자를 만나게 되니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고쳐 주신 그런 것이 아니고  벌써 영원전 하나님이 이 일이 있어야 당신의 목적 곧 우리 구원이 이루어 걸 수  있기 때문에 예정하신 그 예정 그대로 여게 관련된 모든 것들이 창조된 것이고  또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이런 순위와 이런 순서와 분위기를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것을 가르쳐서 표적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으로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그 속에 알속 이 표적이 보이고 있는 그 실상을 우리들에게 주기  위함이요. 또 우리도 이것을 붙잡기 위해서 부름도 입었고 또 이런 성경을 보고  설교도 듣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원죄와 본죄로 인해서 모든 것이 병들었고  또 죽고 망하고 하는 것 뿐입니다. 죽고 망하고 병든 것 외에는 하나도 없는 것이  타락한 사람들의 형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병든 병과 이 죽음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는 여게서 이 계시를 받을 때에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에게 온갖 병을 치료하시고 영원한 건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인격의 병이든지 육체의 병이든지 또 사업이나 경제나 출세나  가정이나 행복이나 어떤 것이 병들었든지 예수님 앞에 나와서 구하면 고쳐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 세상 온갖 행복이라는 것도 이 병든 행복을 고쳐서 참 행복스럽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고 또 영혼도 모든 병을 고쳐서 행복되게 해 주실려고 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할 때에 예수님은 내기에 모든 면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요 또 고쳐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요 또 고쳐 주시기를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이신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이런 구주로 믿고들 있습니다.

믿음의 차이는 있지만은 자기대로는 믿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을 믿어서 영이나 육이나 소유나 또 자기의 뭐 활동, 활동이나 이런데 병든  것을 고침 받은 사람들은 많지를 못합니다. 또 더우기 모든 좋은 것으로 충당케  충만케 주심을 받은 사람은 더욱 적습니다. 이러니까 전도가 안 됩니다.

요사이 뭐 불교는 어떻게 전도가 되든지 그 사람들은 보기에 불교를 믿고 잘  됐든지 잘 된 사람이 불교를 믿는지 모두 다 불교 믿는 사람들은 아들도 딸도  살림도 전부 부처한테 빌어 가지고 얻었다 그렇게들 말을 하고 또 불교 다니는  사람들이 다 잘나고 부자고 똑똑하고 높은 자리 있고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보라 불교가 효력 있다. 또 그리고 불교는 일년에 한  번만 가도 효력 있는 복은 다 받는데 예수교는 새벽마다 가지. 일주일에 한번씩  몇번씩 이래 가도 아무 효력도 없는 거 믿을 필요 없다. 이래 가지고 전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저 우리 기도실이 꽃마을에 있는데 저 지난번에 제가 올라가니까 아주 꽃마을에  거게 길을 양쪽을 다 파헤치고 아주 널널하게 너르게 그렇게 도로를 포장할려고  그렇게 닦습니다.

내가 올라 가니까 이 길을 이제 넓게 닦아서 아마 다니시기 좋을 겁니다. '그 뭐  새마을 운동에서 합니까?' '아니 이 절에서 합니다.' 이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빼빼 말라 있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이 전도가 잘 안 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사업에 병이 들었느냐? 내가 사업병을 고쳐 주마. 네 무슨  출세나 가정이나 무엇이든지 병든 것은 모조리 가져 와라. 다 고쳐 주마' 이게  성경입니다.

또 영적 병도 고쳐주고 병만 고칠게 아니라 세상으로 말하면 위에만 있고 아래  있지 안하고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안하고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꿀 것이 없고  영적으로 말하면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 다스리고 그들에게까지  충만케 해 줄 수 있는 이런 권위 있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말 뿐이지  안됩니다.

이러니까 믿던 사람들도 슬슬 낙심이 되지 또 교회 다니기는 다니지마는 아무런  힘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 주신다고 떠들다가도 옆에 사람이 있다가 혀를 끌끌  차면서 입이 삐쭉 삐쭉 거립니다.

'야 복은 놔두고 너 배 곯은 것, 너 비찬한 것, 너 가련한 것, 너 천한 것 그거나  좀 면해라.' '뭐이 비참하기는 이등도 안갈 만치 그렇게 비참해 가지고 있는 것이  뭐 뽁뽁 하나님, 하나님 그렇게 하고 있느냐.'그 사람이 그렇게 말은 안 해도  그러니까 고만 전도하다가 입이 쑥 들어갑니다. '참 그렇기는 그래.' 고만 믿으라  할고 하는 그런 용기가 다 꺽어져 버리고 없어집니다.

그 예수 믿는 사람은 보면 표가 난답니다. 어깨가 축 처진 느줄은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랍니다.

이러니까 믿어 가지고 성경이 기록한 대로 참 모든 면에 병이 고쳐져 또 모든  면이 잘되어서 위에만 있고 아래 있지 안하고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안하고  이렇게 충만해서 그래 놓으면 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설쳐서 옆에 사람 견디지  못할 만치 그런데 어깨가 축 쳐져 가지고 있으니 말뿐으로 모든 사람들이 조롱을  해.

이러니까 예수교는 자꾸 지금 축소 되어지고 불교는 일어나고 다른 이종교는  자꾸 일어납니다. 그것은 복은 받는다고 하는데 복을 받는지 안 받는지 그들이  똑똑히 몰라도 믿기나 쉽다 그말이오. 믿기나 쉬워.

아 한 달에 한 번만 가도 되고 일 년에 한 번만 가도 되는데 예수교는 어북  믿으려고 하면 새벽마다 남 잠자는데 새벽 잠 못 자고 가지, 또 바쁜데 수요일 날  밤, 금요일날 밤 계속 일해도 일을 추진 못하는데 주일날 오전 오후 하루 종일  이러니까 '아이구 힘들어 못 믿겠다.' '아 힘이 들어도 영생과 복이 있는데  힘들어도 믿어야 될 것 아닙니까?' '아 그러면 그렇지요.' '이렇지만 영생이야  눈에 보입니까 우선 눈에 보이는 거 복 복 복 받는게 보이야지' 뭐 대티고개 지금 전부 이 돼지 움막 같이 지어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믿는  사람들 집이고 믿는 집 처놓고 훌룡한 집 짓고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고  보십시요.그러니까 자기가 속지.

예 우리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마십시요. 우리는 그렇게 어리석게 그렇게 속지  않습니다. 그냥 믿으라 하면 '뭐 종교는 가질 것이라.' 하고 '이래 가만이  덮어두지만 뭐 잘되고 잘된 게 있어야 잘되지.' '뭐 잘됩니까?' 이렇게 조롱을  하고 도를 막습니다. 이러면 전도하다가 쿡 처박혀 가지고 할 말이 없으니까 영생,  영생, 하늘나라 하늘나라에 있는데 이래도 속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틀렸는지 하나님이 안 계시는지 우리가 성경대로 하지 못하고  틀린 게 있는지 이것을 좀 살펴서 안 되면 아야 예수 믿는 거 치워버리고 말고,  효력이 있으면 똑똑이 믿어야 되겠고 이래야 될터인데 믿는둥 마는둥 이렇게  흐리멍텅하니 해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은 성경 말씀은 가감도 없고  거짓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은 행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가 믿는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주인공이요 지금도 홀로 모든 것을 이분이 안 계셔  그런 것도 아니고 이분의 계약이 잘못 돼 그런 것도 아니고 잘못된 이 고장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아서 고치면 될터인데 고치지 안하니까  헛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안하니까 하나님께서 삼백 년 동안 선지자를 없애버렸습니다. 보내지  안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들이 비참하기가 짝이 없이 절단났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선지자가 없든지 우리가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을 안 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겠는데 선지자는 벌써 선지 사도들이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해  주셨고 또 주님에게 구속으로 인해서 성신에 감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성신의 감동대로 했는데 안되는 분이 있으면 참  그분은 하나님 앞에 시비할만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행했는데 자기에게 성령의  감화 감동주시는 대로 했는데 이 성경대로 안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시비를 할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말씀해 주신 이 법칙대로 안한 게 있으면 그것부터  해 놓고 기다릴 것이요.

그러면 하지 안해서 안한 게 있어도 그만 예수 믿으면서 성경에 말한 대로 온갖  치료와 온갖 축복이 안 와도 그만 우리가 이렇게 흐립니다. 우리가 이런 계약도  받았고 예수님의 공로로 입고 중생도 됐지만 실질적으로 이 치료나 이 축복이  오지 안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는 연고입니다.

오늘 저녁에 여기 보는데 중풍병 병자가 꼼작 못하고 침상에 누워 있는 자인데  다른 사람들이 에고 와가지고 당장 나았습니다. 메여 온 이 환자가 그만 나아서  그 침상을 제가 울러 메고 집에 가버렸어. 당장 낫지 안했습니까 이것 바로  우리에게 선포하는 계약입니다. 이런 병자와 같이 어떤 면이 병들어서 희망이  없어.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참 희망없는 다른 사람들이 메고  왔으니까 얼마나 그 본인은 가련한 자입니까? 이랬지만 와 가지고 당장 나았어. 주님은 이것을 왜 우리에게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해서 보이십니까? 우선 하늘나라 내버려두고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부터  무엇이든지 병든 거 있으면 가져오라 그말이오. 주님이 병든 거 있으면 다 치료해  주십니다. 영적 면이나 육적 면이나 다 치료해 주십니다. 시간 걸리지 안하고  당장 치료해주시요.

당신에게는 시간이 걸리지 안해. 당장 치료해 주시는데 우리는 왜 치료를 못  받습니까? 여게 보니까 "침상에 누운 충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을 당장 나아줘 치료해 주었습니다. 당장에 병이 나아 가지고 제가 메여온  그 침상을 제가 메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님과 우리 관계에  이 사실을 가르쳐 주는 이치입니다.

중풍병자는 예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믿는  사람들인데 왜 우리는 믿어도 안 됩니까? 이 중풍병자는 믿었는데 왜 믿은 대로  당장 나았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찾아야 되겠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죽은 믿음은 움직이지 못한단  말입니다. 죽은 믿음은 역사가 없다 말이오.

저 조는 사람 이름 부를까? 죽은 믿음은 활동이 없고 작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장사라도 체격이 좋고 근육이 잘생겼고 골격이 든든한 장사의 골격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생명이 없으면 큰 짐덩이입니다. 우리가 출상하는데 운송하러  가보면 빼빼 마른 그런 노인들은 뭐 메고 가도 아주 가볍고 쉬운데 이 장정은  죽어 놓으면 참 무겁습니다.

제가 그 효열자의 그 장질부사 장질부사로 그때 개명 집사로 있을 때에 청년이  하나 힘이 좋은 사람인데 하나 죽었는데 갑자기 그만 병들어 죽어서 그때는 예수  믿는 사람이 남자들은 없고 저 혼자 뿐입니다.이래서 그 교회 나왔으니까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니 그 내가 짐도 잘 못지지.

아 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 참 짐도 못 지는데 할머니들은 세상 뜬데 그만  짊어지면 뭐 그 좀 쉬면 가는데 이 장정이 되 놓으니까 어떻게 무거운지 발발  떨면서 조금 가다가 쉬고 조금 가다가 쉬고 그래 가지고 공동묘지 까지를  짊어지고 갔는데 뭐 참 하나님께 기도하고 죽자껀 힘 다 해 가지고 갔습니다.

힘이 세 놓으니까 죽어 놓으니 송장만 무겁지 그 힘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 사람이 믿음이 신구약 육십육 권 도리를 다 알고 제가 설교도  잘하고 또 영감도 받고 많은 역사들을 들어서 이런 면도 알고 저런 면도 알아서  모든 면이 구비한 그런 지식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어떤 계약 했으며 십자가의 대속까지 하셨고 하나님은 획 하나도 변함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알기는 뭐 참 튼튼히 알아서 이 힘센 장사  모양으로 모든 면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산주의가 와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그거 지었다. 그걸 지었다.

주님이 주권하셔서 그 모든 것을 섭리 해 가지고 내게 닥치게 했다. 내 구원을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했다. 그 참 기뻐해야 된다. 이렇게 알기를 잘 알고 설교도  잘합니다.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는데 이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 작용이 없습니다. 권능이 안 나타나. 믿음이  작용이 없어.

자기가 지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설교도 하고 잘하는데 '야 그렇지만 뭐 어데  성경에 있나' 성경 절수 딱딱 대면서 '아 성경에 있다.' '여 있다.' 아무리  말하고 설교 다하고 똑똑히 알고 이런데 능이 없어. 믿음이 죽었다 말이오.

죽었으니까 믿음이 움직이지 않해. 믿음이 움직이면 산 믿음은 무슨 작용을  하는고 하니 산 믿음은 먼저 안심이라는 작용을 합니다. 이 믿음이 안심을  일으킵니다. 산 믿음은 안심을 일으키요.

그 사람이 뭐 설교도 잘하고 괭장하고 똑똑하고 성경도 환하게 다 알지만 막상  공산주의 앞에 닥치든지 무슨 일이 닥치면 안심이 않돼. 성경에 이랬지만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는 해 주시겠나 안 해 주시겠나? 이 일이 되겠나 안  되겠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사자에서 구출했다. 불에서 구출했다.

공산주의가 암만 와도 문제 없다. 이렇츰 안심이 되야지. 공산주의가 올라 하니까  안 되겠다 이거요. 도망을 쳐야 되지. 안심이 안돼. 강단을 지킬 수가 없어. 안심이  안돼.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하나님이여 일본 나라 이거 당장 멸해 주시옵소서.' 멸할  권리가 있습니다. 잘 알고 있지. 이렇지만 신사참배 안하면 죽인다 하니까 겁이  나서 안할 수가 없다 말이오. 안심이 안나와. 안심은 믿음의 활동인데 믿음의  소생인데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안심인데 안심이 안돼. 또 산 믿음은 평강을  만들어 내는데 그럴 것 아니겠소. 하나님이 모든 것 다 책임지시고 계약해  놨으니까 얼마나 안심이 되며 얼마나 평안하겠소.

원수가 많을 수록이 좋고 클 수록이 좋고 모세는 애굽 병정이 뒤에 쫒아오고  앞에 홍해가 가로막히고 큰 일이 닥치니까 모두 다 발발 떨고 있는데 모세는  조금도 염려 없이 안심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죽겠다고 야단치니까 못  견디는 기쁨을 가지고 '야 구경좀 하자.' '야 구경 좀 하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솜씨 구경좀 하자.' 기뻐서 지금 못견디는 그런 기쁨을  가졌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튼날 하나님께서 '모세야 제사장들 앞세우고 이 홍해 바다로  건너가라.' 이러니까 이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나는 걸 구경할 일을 생각하니까  기쁘고 못견뎌서 '예.' 하고서 더벅 더벅 가니까 홍해가 갈라졌다. 이거요.

아무리 자기가 지식적인 믿음을 가져도 죽은 믿음이면 논리적으로 지식적으로  자기가 충분히 또 성구를 들어서 똑똑히 확실히 인정하고 해석하고 그렇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의심이 없습니다. 확실히 압니다. 이래도 죽은 믿음은 작용이  없어. 믿음의 작용이 안심이 안돼. 평안이 안 나와 평안이 안돼. 기쁨이 안돼.

실행이 안돼. 인내가 안돼. 이것은 순전히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행하는 게 뭐입니까?  믿음이 첫째 행하는 것이 안심, 둘째 행하는 것이 평안, 셋째 행하는 것이 기쁨,  넷째 행하는 것이 단행, 다섯째 행하는 것이 계속, 이건데 행함이 없어. 그 이유는  뭐이냐? 믿음이 죽었기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암만  가져도 소용 없습니다.

이 중풍 병든 중풍 병든 이 환자는 산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을 받았고 영광을 돌렸고 모든 사람에게 놀래게 했습니다. 증거가 됐습니다.

그러면 이 중풍병자가 생명 있는 믿음을 가졌는데 생명 있는 믿음이 어떻게 되면  이 믿음의 생명이 건너옵니까? 어떻게 하면 이 믿음의 생명이 건너오며 어떻게  하면 믿음의 생명이 끊어집니까? 믿음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 죽은 믿음에서  생명이 건너오는 것,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산 영이 됐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이 생명입니다.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죽습니다.

믿음은 있지만 그 장사가 죽은 힘센 사람이 죽은 송장 같이 송장 믿음이요.

하나님과 그 믿음이 끊어지면 송장 믿음이요.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으로  지식으로 믿는데 안심이 안돼. 평안이 안돼. 기쁨이 안돼. 견디지 못하고 어서  하고 싶어 못견디는 시작이 안돼. 인내가 안돼. 이것은 그 믿음이 살았을 때에 이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살았을 때에 이 생명이 역사하는데 요 생명이  끊어지면 고만 역사가 중단됩니다.

생명이라니 이 믿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연결된 이것이 들어서 안심도  일으키고, 연결된 이것이 들어서 평안도 일으키고, 연결된 이것이 기쁨도  일으키고, 연결된 이것이 시작도 하고, 연결된 이것이 계속도 하고 하는데  사람들이 믿는 대로 계속도 하고 싶고, 그 일을 단행도 하고 싶고, 기쁨도 가지고  싶고, 평안도 가지고 싶고, 안심도 가지고 싶고 이렇게 원하지만 안된다 이거요.

언제는 자기가 확신을 가지고 안심되고 기쁘고 평안해서 시작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뿍뿍 해 나갔는데 어쩐지 그만 생명이 끊어져서 안되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서 믿음이 이렇게 하나님과 끊어져 죽는 믿음이 되어지느냐? "소자야  안심하라."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면 그 저가 믿음을 가졌는데 어떤 믿음을 가진 것을 예수님이 말씀합니까?  이 중풍병든 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중풍병자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뭐입니까? 예수님 말씀하신 것 보니까 소자의 믿음을 가졌고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안심하라 하는 것 보니까 걱정 믿음 가졌고 죄인 믿음 가졌고 이거  세 가지 가졌습니다.

게 죄는 하나님과 자기와의 끊는 그 법이 되어 있습니다. 사업이 생명이 있는  사업은 하나님이 그 사업이 함께하실 때에 그 사업이 살았는데 생명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사업을 붙들고 사업을 통해서 당신의 살아 계시는 능력이 역사  하는데 그러면 자 안심이요, 평안이요, 기쁨이요, 단행이요, 승리요, 인내요  이런긴데 이렇게 해 나가던 사람이 왜 졸지에 안심이 안되느냐? 의심이  나오느냐? 왜 염려가 나오느냐? 두려움이 나오느냐? 왜 근심이 나오느냐? 왜  용단이 다 같아 않느냐? 왜 이것이 계속이 없고 중단이 되어지느냐?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잘못된 요것이 생길 때에 하나님과 끊기집니다. 사업도 거게 잘못된 것 있으면 그  사업도 하나님과 끊어집니다.

'네가 병이 나았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마라.' '더 큰 증세가 발할까 두렵다.'  권능이 없더라도 죄는 하나님과 사이를 끊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지식적으로  믿사옵나이다. 뭐 오만 소리 다해도 안심의 안심의 이 작용이 없어. 자기 심령  속에 안심의 작용이 없는 것은 자기의 지식적 그 믿음과 하나님과 그 사이에  죄가 가리워 있습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이 소자는 예수님이 낫아 줄 것을 믿고 예수님에게  나아왔지만 예수님과 자기 사이에 거리낌이 있어서 이것 때문에 안될까 해서  근심 걱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이 안심하라 하는 것 보면 근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씀을 보면 그가 자기의 잘못된 것을  다 들춰 가지고 주님 앞에 내가 이런 것이 있는데 하고서 벌벌 떨었습니다.

"소자야" 하는 것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아무것도 아닌 점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모지라는 점, 이리 봐도 저는 소자요 저리 봐도 소자요 저는 이리  봐도 모지라고 저리 봐도 모지라고 자기의 모지라는 것, 자기의 약한 것, 자기의  무지한 것, 자기의 부족한 것 요것만 자기에게는 자기의 부족한 것 자기에게  잘못된 것 이러니까 이 둘밖에 없으니 근심 밖에 없다 그말이오.

이럴 때에 주님은 자기의 자기의 안된 점, 못된 점, 약한 점, 작은 점 고점 모르는  것을 주님이 기뻐해서 "소자야 안심해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 하시고  서기관이 참람되다고 말할 때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이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어렵고 쉽겠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내가 보이기 위해서 걸어가게 하겠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가 걸어가는 그까짓거야 문제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막혀 있는 이것이 해결되는 것이 크다 말입니다.

예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리 소망을 가지고 성경을 보아서 아무리 확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믿음이 생명을 가질라면 자기대로의 아는 고 하나님께 대한  죄 고걸 회개해야 되고 자기의 모지라는 소자의 점, 작은 점, 부족한 점 요것을  가지고 내가 요것 때문에 하나님을 행한 소망 이 믿는 것이 헛일될라 하는  요것이 생명을 능력을 끌어 오는 인간 요소입니다. 이거 없으면 헛일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증거하고 똑독히 알아도 하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습니다. 안 믿은 증거라 말이요. 하나님이 대주제인데 뭣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을 염려하며 하나님이 대주제신데 알지 못함이 없으신데 하나님을 이렇게  속이고 저렇게 속이고 속여서 눈 가림으로 제 지혜대로 하면 입술만 놀리면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안 됩니다.

아무리 성경에 있는 것을 다 자기가 인정하고 지식적으로 믿음을 자기가  훌룡하게 증거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과 하나님과 사이에 죄가 있으면 그 믿음은  죽었습니다. 작용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안심이 않되며, 무엇 때문에 평안이 오지 않하며, 무엇 때문에 기쁨이  오지 않하며, 무엇 때문에 실행이 시작되지 않하며, 계속이 않되느냐? 이것은  시작이 않되는 것을 죄가 가리워 그렇고 시작이 가다가서 중단되는 것도 그때  무슨 죄가 들어 와서 가뤄 그런 것이고 두고서는 안됩니다. 죄를 청산할 때에  생명이 돌아오고 자기의 소자인 것을 발견할 때에 주님은 환영합니다. 근심할  때에 위로하고 동행합니다.

그런고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를 사하는 것과  중풍병자가 걸어가는 것 어느 것이 어렵고 쉬운 줄 아느냐? 너거 보기에는  중풍병자 걸어가는 것이 어려운 줄로 아느냐? 죄 사함을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죄만 사함 됐으면 주님과 우리 사이에 가리워진 것만 티워지면 모든 문제는  문제없습니다. 교회 부흥도 목회 권능도 원수 앞에 영광도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것이 없어지면 우리에게 확신이 생겨집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평강이 옵니다. 기쁨이 옵니다. 안심이 옵니다. 죄가  가리워지면 하나님과 그 사이가 끊어져 죽은 믿음이 되니까 죽은 믿음이 되면 그  다음에 믿음이 썩는 냄새는 안심이 안됩니다. 염려가 됩니다. 의심이 납니다.

두려움이 옵니다. 그 다음에는 물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믿습니다. 우리가 다 믿습니다. 우리가 다 믿는데  왜 믿음의 능력이 왜 없느냐? 왜 우리가 확신하는 그 일에 대해서 안심이 안  되느냐? 왜 평강이 오지 않느냐? 왜 기쁨이 오지 않느냐? 안심하고 기뻐서 왜  단행이 안 되느냐? 왜 계속이 안 되느냐? 이것은 생명이 끊어지는 연고입니다.

생명이 끊어지는 데에서 생명이 있겨 져도 소자가 안되면 물리침 받습니다.

염려가 없으면 오만한 자라 동행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상한 마음을 물리치지 않는다 말은 자기의 이점에서 염려하고 있는 그  염려의 위로를 줍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 받습니다.

오늘밤에 우리가 믿는 믿음이 참으로 산 믿음인지, 오늘 공산주의가 와도  꿈쩍없을 것인지, 장기간의 고문과 고행이 있어도 꿈적 없을 것인지 모든 만 가지  우리의 앞에 닥치는 일에 있어도 안심하고 기쁘고 평안하고 뿍뿍 단행할 수 있는  인내할 수 있는 이 믿음의 생명이 있는지 믿음 뿐이고 생명이 끊어져서 송장  믿음이 되어있는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고 인간 붙잡고 암만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이거면 됩니다. 믿음만 산 믿음  가지면 능치 못할 것 없소. 의심은 하나님과 사이가 끊켜져서 그 소산으로 믿음이  죽으면 첫째 불안 염려 의심 두려움 그것이 믿음 썩는 냄새입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과 생명이신 하나님과 끊혀져서 그렇습니다. 끊은 것은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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