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발과 새김질


선지자선교회 1983년 9월 18일 주후

 

본문 : 레 11:1-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육체의 이스라엘은 물질을 입으로 먹음으로 그들의 양식이 되었고 신령한  이스라엘은 영감과 진리의 행위를 먹음으로 양식이 됩니다. 그러기에 '너희들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원토록 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형으로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친 말씀이니 신령한 이스라엘  자손된 우리들은 쪽발 가지고 새김질하는 그 고기만 식물을 먹을 수 있고 쪽발을  가졌으나 새김질을 아니하든지 새김질을 하되 쪽발 가지지 안한 그런 짐승의  고기는 먹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만 지지도 말라 이랬습니다.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하는 것은 이 두  가지를 겸한 행위가 아니면 너는 그 행위를 하지도 말고 그 행위는 너희 신령한  이스라엘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을 행하지 말고, '먹지 말고' 행하지  말고, 또 그런 것의 죽음도, 네가 먹지 안할 뿐만 아니라 만지지도 말아라. 그  둘을 겸하지 아니한 그런 행동은 다른 사람이 행동한다는 그런 행동이라도 너는  거기에 동참하지 말아라, 거게 접하지 말아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희로애락의 전 움직임이 그 사람의 지식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또 지식은 두 영에게 따라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쪽발로 걸어가라고 한 것을 오전에 증거했고 새김질하라 한 것을 오전에  증거했습니다.

 쪽발은 둘로만 구별해서 옳은 것을 네가 잡았을 때에, 또 네가 과거를 반성해서  어떻다고 네가 판정을 했을 때에 둘로만 구별한 그 판정에다가 과거에 반성을  거게다가 겸해서, 둘로 구별한 판정에다가 과거를 반성한 그 판정을 한테 뭉친  그 행위만 하고 그 행위 외에는 하지 말아라. 그 행위 외에는 너를 죽이는  것이요 그 행위만이 너를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행위만 하라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그 사람의 결심이나 의지에서 나오고, 그 사람의 그 결심이나  의지는 그 사람의 생각에서 나오고, 그 사람의 생각은 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둘로 구별할 때에 제일 먼저 구별해야 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지식 구별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식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지식은 두 가지로만  나눌 수가 있기 때문에 지식 두 가지를 가지고서 구별을 해야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계시 지식이 있고, 문서계시인 영감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준 특별계시 지식이 있고 또 타락한 후에 사람들이 모두 구성해  놓은 그 지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지식이 있고  타락한 후에 사람들이 주 모아서 만들어 놓은 지식이 있고,  이러기 때문에 먼저 그 지식 둘을 가지고 비교해서 '내가 지금 언행심사에  경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식대로냐 세상 지식대로냐?' 세상에 어떤 이종교가나  도덕가나 사상가나 어떤 뭐 철학의 학자나 어떤 사람이든지 그 지식은 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이후 사람이 본 위치에서 쫓겨난 이후에 만들어진  지식들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육체의 지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지식이라 말은 사람의 영이 활동해서 한 지식이 아니고 마음과 몸이  활동해 가지고 만들어 놓은 지식이기 때문에 육체의 지식이라, 그 모든 소욕도  육체의 소욕이라, 또 그 생각을 가리켜서 육체의 생각이라 그렇게 말씀했고, 또  하나님이 계시한 지식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또 영감 도리라, 또  진리라 그렇게 이름을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꼭 두 가지로만 구별해야 우리의 지혜와 총명으로서는  정평정가를 할 수가 있지 셋만 되면 벌써 우리는 그것을 판정할 만한 역량이  없는 자로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둘로만 판정해야 되는데 악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두 가지를 두고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둘을 가지고 판정하는 것을 악령은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고로 먼저 하나로만 판정을 하도록 악령이 인도합니다, 하나로만  판정하도록.

 하나 외에는 보지 못하도록 하나만 보도록 그렇게 해 가지고서 수입을 보고  인간을 멸망시킨 것이 에덴동산 방편입니다. 에덴동산에 배암은 하와에게 선악과  하나만 보도록 하나에만 집결을 시켰지 둘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악령이 먼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삼키기 위해서는  하나만 보고 둘을 보지 못하도록, 하나만 생각하고 둘을 생각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다가 안 되면, 둘로만 생각하려 하고 하나로만 판단하게 하려고 할 때에  하나를 안 하려고 둘로 하려고 애를 쓰는 자는, 하나로 하도록 하려고 이거  당겨서 이거 붙이다가 하나로 생각하는 그 일을 안 하고 쪽발로 걸어가는 둘로  생각하려고 하면 악령은 왈칵 밀어버립니다.

 왈칵 밀어버려서 둘로 생각지 못하게 하고 셋으로 생각하든지 넷으로  생각하든지 하도록 하려고 악령이 둘 이상 '네가 요것 둘로만 좌냐 우냐 이렇게  둘로만 생각하지마는 그 가운데도 있지 않느냐? 또 좌우에 남도 북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처럼 이렇게 둘이라는 그 자리를 벗어나도록 해 가지고 셋으로  생각하게 하든지 넷으로 생각하게 하든지 우리의 생각을 복잡하게 해 가지고  정확한 것을 알지 못하도록 미혹하는 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생애에 우리는 비판 없는 걸음을 걷지 안해야 되겠고 평가 없는  그런 행동을 안 해야 되겠는데 꼭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 둘로만 가지고 비판하고  평가를 해야 하는데 악령은 하나로 당기다가 안 되면 하나를 넘어서 셋이나  넷으로나 그렇게 여러가지로 말을 해 가지고 우리를 정확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요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그때에 벌써 자기의 현실을 만날 때에 둘로 딱  생각하려고 하면은 어덴가 한 군데로 치우쳐서 현실을 비판하고 평가해서 그리  걷도록 할라고 악령이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좋지마는 하나님으로만 밀어붙여서  하나님만 생각하고 또 이 피조물을 생각지 않는 그리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현실을 행동할 때에 자기가 아무런 비판 없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닥치는 대로 그래 하는 사람은 그거야 마귀의 밥이기 때문에 그거는  죽은 사람이니까 생기가 없기 때문에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돈이 부딪히니까 그만 돈에 밀려서 움직이고, 난사가 부딪치니까 난사에 밀려서  움직이고 하면은 그것은 벌써 생명이 없는 것이라 물이 돌면 돌고, 흘러  내려가면 따라 흘러내려가고 하는 그거는 생명 없는 토막나무와 같이 그런  것이요 생명이 있는 것은 거게서 아무리 물이 흘러내려가도 조그만한 고기  새끼라도 생명 있는 것은 흘러가는 그 물에 역류해 가지고서 제 주관대로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고, 거게 머물고 싶으면  머물고, 환경에 피동되지 안하고 환경에 반해서 자기 주장을 세우는 그것이 생명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벌써 사람이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어떤 현실을  만나든지 그 현실에 따라서 움직이면 죽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뭐 그 생활  전체가 사망만 이루지 사망 외에는 이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현실을 만났든지 만났을 때에 그 현실을 한번 비판해 보려고, 한번 평가해  보려고, 그 현실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면 마귀란 놈이 생각할 때에 '야,  이놈은 쉽게 단속해서는 안 되겠구나. 이놈은 속에 생기가 있구나.' 해서 마귀란  놈이 이제는 달라들어 가지고서, 생각할라 하니 하나님의 법에는 둘로만  생각하면 명철해서 정확무 오한 참을 찾게 되기 때문에 어짜든지 쪽발로 걷지만  안하도록, 둘로만 비판하지 안하도록만 만들어야 되겠다 하고서 첫째 방편이  하나로 몹니다. 하나로 주 몹니다.

 생각하기는 생각하지마는 돈만 생각하게 되든지, 사람만 생각하게 되든지,  자기만 생각하게 되든지, 현재만 생각하게 되든지, 살아 있는 것만 생각하게  되든지 어쨌든치 하나만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에 그것이 악령의 유혹인 줄 알고 거기에 말려서 들어가지 아니하고  성경이 말한 대로 둘로만 생각해야 된다. 그러면 현재 네가 당면한 데 이런 일을  당면했으니까 이 일을 지금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할 때에 그러면 현재 당면한 이  일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현재 당면한 이 일이 미래적으로 어찌 되겠느냐?  '네가 현재에 당면했으면 이, 일만 현재 생각할 일이지 미래를 생각할 게 뭐  있나?' 현재를 미래와 연결을 시킬라고 하면 악령은 질색입니다. 질색이오.

 또 현재를 현재만이 아니고 과거와 연결을 시켜서 '내가 과거에 이런 일들이  있었나 없었나? 과거에 어떻게 처리했느냐?'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서 둘로  생각할라 하면 또 마귀는 질색입니다.

 이래 가지고서 둘로 하지 못하게, 자, 이러면 여게서 너 좋도록만 너 자기  하나만 생각할라 할 때에 '나는 이렇지마는 다른 사람에게는 어찌되느냐?'  이렇게 못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둘로 생각지 못하도록 하나에다가 귀속을 시키다가 안 되면 밀어  가지고서 하나를 넘어서 셋으로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 이 삼면으로  생각해 보자. 네가 좁게 이면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삼면으로 삼각적으로  생각해 보자.' 또 그러다가 '네가 그것도 좁으니까 이 넷으로 생각해 봐라.

거기에 관련된 것이 관련된 네 가지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거게 관련된 다섯  가지로 생각해라.' 이렇게 자꾸 늘어나게 해 가지고서 삐뚤어져서, 당겼다가  밀었다가, 생각을 못 하게 했다가, 못 하게 했다가 생각하는 자에게는  하나에게로 당겨 붙일라 하다가, 안 당겨 붙이고 둘로 갈라 할 때는 또 서이  너이로 밀어붙이다가,  그럴 때에 그것이 악령이 나를 노략하고 있는 것인 것을 깨닫고 이 모든 사탄을  물리치고 둘로만 생각해야 거룩한 중생된 이스라엘인 새사람, 이스라엘 자손인  중생된 새사람의 양식이 되어 새사람을 키우고 새사람을 힘있게 하고 새사람을  튼튼케 하는 새사람의 양식, 곧 온전한 뜻과 온전한 행위가 되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서 둘로만 생각하려고 하면 악령은 이것을 양보하지 안할 때에  거게서는 저는 패전해야 되고 쫓겨나야 됩니다.

 둘로 구별할 때에 둘로 구별할 종류들이 심히 많으니까 '어떤 것을 둘로  구별할까?' 둘로 구별하는 것도 그 종류가 심히 많으니까 어느 종류를 둘로  구별할까 이것이 이제 문제라서 악령이 그때는 선후를 또 뒤바꿉니다. 제일 먼저  구별할 것을 먼저 하지 못하게 하고 삼호를 일호로 하게 했다가 일호를 삼호로  하게 했다가 이것 또 선후를 혼동시켜 가지고 우리를 멸합니다. 그러기에  기독자의 신앙 생활은 철두철미한 인간 과학입니다. 호리라도 틀리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그 종류에 있어서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이 주와 및 그 말씀에게,  너희들을 의탁하고 간다 ''주와 그 말씀이 너희들을 거룩한 자들 가운데에  머물게 하고 거기서 기업을 얻게 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별할 것 순서 중에 첫째는 하나님의 지식이냐 인간 지식이냐 그것을  첫째로 구별해야 됩니다. 왜? 하나님을 먼저 구별하지 안하고 왜 지식을 먼저  구별할까? 하나님과 우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초절돼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그 연결이 되지 아니하고 끊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는 거리가 멀어서 그 사이가 끊겨 있는데 끊겨 있는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을 시키는 그 연결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나와 그 사이를 연결시킵니다.-저 뒤에? 백지 먼데서 와 가지고  꾸벅꾸벅 졸고 앉았네. ○○O목사! 껍데기 목회 하지 말고 정신 차려.

 우리가 전생활을 쪽발 가지고 새김질하는 것이라야 거룩한 이스라엘 자손이  먹을 수 있다 했는데 쪽발을 가지는데 그 선후의 순서에 있어서 첫째는 지식  구별을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하나님 구별 안 하고 왜 지식 구별하느냐? 하나님은 우리와 초절해 있습니다.

악령도 우리와 초절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관계는 그 가운데에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영감의 이 말씀이 그 사이에 중보자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고, 영감  말씀과 동행해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고, 영감 말씀과 서로 대립이 돼  가지고 하나님과 대립이 되는 것이고,  또 악령도, 악령과 나와의 초절되어 있는데 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나온 지식이  있으니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악령과 나와 밀접해지고 멀어지고 가까와지고 또  관계가 튼튼해지고 빈약해지고 하기 때문에 영을 먼저 구별하는 것보다도 지식  구별하는 것이 제일 순위로, 첫째입니다.

 그러기에 이 지식 구별을 하지 안하고 그다음을 구별하면 암만 구별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 만일 어떤 걸 '이거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생각을 하느냐 이 세상 지식 가지고 해야  되느냐 안 해야 되느냐 그 두 가지로 지금 구별하느냐? 벌써 세상 지식으로  구별해서 꼭 해야 된다고 하면 사람은 그 지식만 가지고 하는 사람은 꼭 해야 될  줄로 알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그것을 비판해 보면은 꼭 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서 그걸 구별을 하면은 아무리 해  봐야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내가 생각하고 비판하고 평가하느냐? 양심도 대단히 명철한 것이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에 지배받는 양심도 있고 인간 지식에 지배받는 양심도 있습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지식의 지배를 받고, 우리의 욕심도 지식의 지배를 받고, 우리의  생각도 지식의 지배를 받고, 우리의 비판도 지식의 지배를 받고, 우리의 감정도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의 모든 희로애락이 지식의 지배를 받아 가지고  희로애락의 움직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지식을 둘로 구별하고, 둘로 구별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잡으면 그 배후에는 하나님과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잡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살려고 할 때에 곧 하나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지식을 따를 때에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배후에 계셔서 하나님의 지식의 근본이시요, 하나님이 당신이  나타나신 것이 곧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진리라 하나님은 진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제일  먼저 지식과 지식을 구별하고, '이는 하나님의 지식이냐 사람의 지식이냐?' 그  둘을 구별하고 또 만일 자기를 척 하나 생각한다고 하면은 이것은 '나' 나의  상대가 뭐입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둘을 놓고 구별해  가지고서 '이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내게는 좋지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쁘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또 구별이 '그러면 내가 크냐 다른 사람이 크냐?' 나는 나  하나고 나 밖에 있는 다른 것은 수많은 많은 것들이 다 타니까 자기와 타와 둘을  비교할 때에 '어느 것이 크냐?' 비교하면 타가 크고 자기는 적기 때문에 자기가  타를 배반하고는 살 수 없고 자기는 타에게 필요한 것이 돼야 타가 자기에게  필요하게 되어지는고로 이것이 살 길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또 자기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그러면 가정에는 내 가정 남의 가정으로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 가정 남의 가정을 생각할 때도 세상  지식으로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 거와 달라서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이제는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이것이 이렇게 하면은 내 가정을 위함이냐 저렇게  하면은 남의 가정을, 모든 가정을 위함이냐? 내 가정을 위함이냐 모든 가정을  위함이냐?' 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판단을 할 때에 그때에 자기 가정을  주로 삼아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것과 모든 가정을 주로 삼아 가지고서 이래  '어느 걸 주로 삼아 가지고 판단하고 결정을 지울까?' 할 때에,  성경 말씀은 '자기 가정은 모든 가정을 위해서 있을 때에 모든 가정은 자기  가정을 위하는 그 결과가 되어지기 때문에 네가 모든 가정을 위함으로써 모든  가정은 너를 위함이 되어지는 것이니까 네가 조그만한 네 한 가정을 가지고서  모든 가정을 위할 때 모든 가정은 너의 것이 되고 만다'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판단이 와 가지고서 가르쳐 줄 때에 그것을 바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이것은 '오늘 이 시간에는 이게 좋지마는 또 그  둘로 판단합니다. 이 시간 현재의 상대는 뭐인가? 현재의 상대는 과거든지  미래도 그게 있는 것이니까 과거 네가 할 게 아니라 둘로만 할라 했으니까  '현재를 미래와 둘을 놓고 판단해 보자. 현재 이래 하면은 현재는 좋으나 미래는  어찌 되느냐? 미래에 좋은 걸 택하면 현재에 어찌 되느냐?' 이것을 시간적으로는  현재와 미래를 둘을 놓고서 구별하면 정확한 판단이 나온다.

 또 그 둘로 구별하다가 또 그다음에는 현재와 과거를 가지고 이 둘을 가지고서  구별하면 시간에 대해서는 내 현재와 과거와 한번 비교해 가지고서 과거 둘을  놓고서 비판해 보고 또 미래 두고 비판해 보면은 과거에 지난 과거에 현재만  보고 했더니마는 그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오늘 돌아보니까 그게 잘못됐다. 또  내가 현재만 보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앞으로 미래가 오면은 미래적으로는  이것이 어떻게 되겠느냐?  현재에 고난스러워도 미래에 평강이 있고 현재에 평안해도 미래에 좋은 것이  있으니 앞으로 있는 즐거움을 인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않으셨다 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현재만 보는 게 아니라 현재에 미래 이래 둘을 비교할 때에  현재는 나쁘지마는 미래가 좋기 때문에 그 일을 택하셨다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자, '그러면 이것이 세상과 하늘나라를 둘로 한번 판단해보자. 내가  지금 현실에 하늘나라를 두고 하늘나라를 두고서 위주로 하늘나라를 유익되도록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하늘나라에 속한 생활을 내가 하고 있느냐 세상에 속한  생활을 내가 하고 있느냐 이게 둘 중에 어데 속한 내 행동이냐?' 하면은  간단하게 판단이 나옵니다.

 그럴 때에 악령은 '그렇지마는' 하는 말합니다. 요것을 양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좋지마는 하늘나라에서는 이것이 손해가는 일이다'  그럴 때에 악령은 '그렇지마는 하늘나라에 유익이 되지마는 그다음에 이  세상에서 손해가면은 하늘나라에는 네가 유익 된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이것을 해 가지고 하면은 결국이 그것이 다 실패가 되면 하늘나라  실패되지 않겠느냐?' 해 가지고서 단순히 둘로만 판단하는 것을 셋으로 넷으로  끌고 나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또 이것이 '자, 이러면 이 둘로 한번 대 보자.' 이 두 가지를 대  봅니다. '그러면 이것은 창조주를 위함이냐 피조물을 위함이냐?' 그래 가지고  성경은 창조주를 위하는 것을 하고 피조물 중심으로 하지말고 창조주 중심으로  하라고 이렇게 했는데 '창조주 중심으로 하려면 이리 해야 된다' 할 때에 악령은  와 가지고 '창조주 중심으로 하면 그리 해야 되는데 그러면 그다음에는 이렇고  이렇고 나쁜 영향들이 여건이 따라 날 것이고 또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그것이  나중에 이렇게 삐뚤어지면 안 되는 것이니까 피조물 중심으로 이리 한 것이 이래  한 것이 이리 해 가지고서 마지막에 결말적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면 되는  게 아니냐?' 별별 거기서 수단을 많이 하니까 그거는 뭐 수단이 수가 많기  때문에 그것은 해석을 한다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쨌든지 비판할 때는 꼭 둘로 하고 무엇이든지 비판할 때에 꼭  상대성을 먼저 찾아야 되지 상대성을 찾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성경 연구도  그렇습니다. 성경 연구도 꼭 상대성을 찾아야 됩니다. 만일 성경에 하라고  했으면 하지 말라는 것을 찾아야 됩니다. 성경에 좋다고 했으면 성경에 나쁘다는  걸 찾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비유컨대 '비판을 하지 말아라' 하는 성구의 뜻을 깨달을라 하면  비판해라 하는 그 성구를 찾아야 됩니다. 왜 비판을 하라 하고 비판을 하지 말라  하느냐 두 말인데 두 말을 찾아 가지고라야 그 비판하라 하는 데를 연구해 보고  비판하지 말라 하는 것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비판은 하지말고 이런  비판은 하라 하는 그 결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라고 하면 하나 하나의 그 현실에는 우리가  행동이 있어야 되는데, 현실에는 행동이 있어야 되는데 그 행동은 옛사람을 살을  찌워서 키우든지 새사람을 살을 찌워서 키우든지 옛사람의 양식이 되든지  새사람의 양식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는 현실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현실에서, 옛사람이냐 새사람이냐? 내가 옛사람으로 사느냐 새사람으로 사느냐  이것도 생각지 안하고 자기도 생각지 안하고, 자기도 생각지 안하고 돈만  생각하고 산다든지, 권세만 생각하고 산다든지 자기에게 당면한 직장이나 보고  자꾸 산다든지 하는 사람은 벌써 죽고 또 죽은 사람입니다.

 유다서에 말하기를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  그말은 벌써 그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고, 끊어진 것이 또 끊어지고,  끊어진 것이 또 끊어져서 벌써 희망 없는 시기까지 닥쳐졌다 하는 그런 것을  표현해서 '죽고 또 죽고 뿌리까지 뽑혀 열매 없는 가을나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가 '내가 현실에 어째 살꼬?'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지식을 먼저 판단해야 되겠고, 그보다도 또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 했습니다.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 '너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를 잃어버리고 자기  없이 자기 없이 돈이 자기가 돼 가지고 있고 권세가 자기가 돼 가지고 있고 자기  생애는 벌써 자기는 없어져 버렸고 돈이 왕이 돼 가지고 돈에게 속한 자로서  이렇게 살고 있으면 그 사람은 벌써 죽은 사람이요 육체가 된 사람이요 완전히  새사람은 파묻힌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뭐 이런 것 저런 것에게 소속해서 자기를 찾지 못하고  이런 것 저런 것이 자기가 돼 가지고 있으면은 그 사람은 제일 급선무가 자기  찾아야 됩니다.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찾아 가지고서 참 자기를 찾은 정신 차린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 할 때에는 지식을 찾지마는 지식보다도 자기를 먼저  잊어버린 사람은 자기 찾아야 됩니다.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은 자기를 찾아야  됩니다 자기를 잊어버리고 나서 온 천하를 얻어도 그 것은 제것은 하나도 아니고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찾으라 말은 '보자, 나를 찾으라 그러면 내가 없느냐? 내가  있다.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뿐이지마는 나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둘이라고 성경 말씀에 가르쳤는데 내가 분명히 경험하고 체험하는 대로 내가  둘인 것을 내가 몇 백 번이든지 체험을 한다. 내 생활에서 이 둘이 시비하는  것을 내가 얼마든지 보고 이로 인해서 내가 항상 고민한다. 보자, 그러면 지금  내가 이 현실에서 현실을 닥쳐 가지고 살라 하는 나는 어느 나냐? 옛사람 나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한 나, 영생으로 새로 살아난 나, 하나님의 아들인 나,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자기의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나, 다시는 늙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이런 것이 없는 완전자, 영원 불변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 또 진리와 거룩함으로 된 새사람, 예수님의 공로로 된 새사람, 내가  지금 이러는 것은 이 시간에 내가 현실을 보고서 이럴까 저럴까 하는 이것은  새사람 내냐 옛사람 내냐?'  그래 가지고 만일 자기가 새사람 내인지 옛사람 내인지 그것을 찾지 아니하고  '뭐 새사람 내고 옛사람 내고 그럴 게 뭐 있나? 현재에 당면한 일로 이는 내  지금 현재 당면한 이해면에서, 또 감정면에서, 공명면에서, 권위 면에서. 이  무슨 빈부면에서 이제 이 현재에 닥친 이것이 문제지.' 하고서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자기를 지금 비판할 여유가 없이, 자기를 비판하지 아니하고 현재에  그 자기에게 충격된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게 속해 가지고서 그것이 움직이고  있고, 움직이고 있으면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하는 것을 비판할라고 하니까  비판도 하지 못하게 그만 이게 서둡니다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그것을 심각하게  조용히 천천히 냉정스럽게 비판을 해야 될 터인데 비판도 하지 못하게 지금 내  현실에 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주장하고 있는 게 있어. 그럴  때는 벌써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오. 그 사람 죽었소. 죽은 사람이오. 죽은  사람이 그 현실에서 또 지금 어떤 판정을 내려 가지고 그 의지를 세워 가지고,  판정을 내리고 의지를 세워 가지고 그대로 행동하면 또 죽은 자가 또  죽었습니다. 죽고 또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제 그대로 주장을 하고 그것으로써 잘못된 것 반성할 여가도  없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주장하고 그것으로 행동하고 그것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은 벌써 뿌리가 뽑혔습니다. 죽고 또 죽어 뿌리가 뽑힌 사람이오.

뿌리가 뽑힌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제는 자기가 그대로 된 그 사람 욕심대로 그런 기회를 노리고 모든  현실이 그것에 유익되기를 원하고 그대로만 비판하고 그것 되기를 원하는 그  사람은 벌써 열매가 없을 뿐 아니라 열매 맺을 수 없는 가을나무가 된  사람입니다. 벌써 시기가 지나갔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요것 아주 중요합니다. 현실을 만났을 때에 아무리 바빠도  '내가 지금 이래 뭐 흥분해 가지고 있는 것이,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이,  내가 현실에 이렇게 주먹을 쥐고 어짤꼬 이래 떨고 있는 것이 어떻게 해 볼꼬  지금 이걸 판단하고 노력하고 이 현실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 하는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옛사람이냐 새사람이냐? 내가 두 사람 중에 여느  사람이냐?' 이것을 생각할 여지가 없이 부지런히 날뛰고 생각할 여유가 없이  조급하고 당황하고 급급하면 벌써 거게는 죽은 것뿐입니다. 죽어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 알고 그럴 때는 뭐 망하든지 흥하든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나를  찾는 게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 재쳐 두고, 마귀란 놈은 그럴 때 막  급하게 들이 몰아칩니다. 뭐 징 뚜드리고 꽹과리 치는 것 그것 다 마귀  역사입니다. 또 하나님을 찾는다고 막 뚝닥뚝닥 하는 그것 다 마귀 노릇입니다.

 하나님은 조용하고 우리를 심각하게 진실되게 참 넓고 넓게 범위 넓게 모든  것을 차근차근 똑똑히 생각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요 성령님이시지 이렇게  울렁울렁 해 가지고서 사람들을 울렁거리고 마음을 이렇게 마구 바람 앞에서  날리듯이 이렇게 울렁거려 가지고 그 사람에게 연보를 내게 하는 것이나 그  사람으로 회개하는 것이나 뭐 그런 것들은 전부 마귀 놀음입니다!  그러면 오순절 예루살렘을 말하겠는데 예루살렘은 차근차근한 진리에서 나와서  그 진리에 그 사람들이 깨닫고 난 다음에 회개하는 떠들음이오. 과거를 너무  원통히 여겨 지금 떠들음이오.

 그런고로 우리가 현실에서 아무리 큰 일을 닥치든지 급한 일을 닥치든지 큰  이해에 문제가 닥치든지 어떤 일이 닥치든지 자기가 그 현재를 밟아 가야  된다면, 그 현재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 한다면 자기는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행동하는 그런 일을 우리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유유합니다. 그러기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한다' 그말은 유유한 자가 승리한다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럴 때는 급하게 날뛰지 말고 제일 먼저 자기를 찾아서 자기가  옛사람 새사람 찾은 다음이면 지식을 찾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지금 내가 이  지금 내가 새사람이냐 내가 옛사람이냐?' 새사람이 옛사람 되는 것도 눈  깜짝하는 것보다도 더 빠릅니다. 눈깜짝보다도 더 빠릅니다. 아무리 눈 깜짝하는  게 빠르다 하고 아무리 이 광선의 속도가 빠르다 하지마는 우리 생각만치는 못  빠릅니다 우리 생각에다 비하면 광선의 속도 그런 거는 뭐 느리기가 짝이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 생각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옛사람과 새사람이 우리  생각이 여게 속하면 이 사람 되고 저게 속하면 저 사람 되기 때문에 아주  옛사람과 새사람이 서로 바꾸어진다는 것이 어떻게 빠르게 바꾸어지는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연습을 해서 평소에, 처음에는 서투르지마는 차차차  연습을 해서 새사람과 옛사람 이것을 구별하는 이것이 숙달돼야 됩니다,  숙달돼야.

 만일 어떤 얘기라도 할 때에 '야,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새사람이 말하고  있는지 옛사람이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좀 한번 찾아봐라.' 이럴 때 파뜩 찾을  수 있어야 됩니다. 파뜩 찾을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럴 때에, 뭐 찾기는 뭘 찾아?'  하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두말 할 것 없이 옛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언행심사에는 멸망 외에는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평소에 연습을 많이 해서 숙달해서 '새사람은 영감과 진리의  사람이라. 이 사람은 위엣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 사람은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다 집결이 되기 때문에 심판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 새사람은 자기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자기가 생겨졌고 모든  인류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제가 자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작지마는 모든 인류에 필요한 자가 될 때에 모든 인류 전체는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지는 이것이 자기에게 빨리 생각이 돼서 '내가 이라는 것이  과연 이 옛사람이 지금 하고 있구나.' 옛사람이 하고 있다고 하면 자기가 어떻게  흥분되어 있고, 어떻게 오기로 발동되어 있고, 어떻게 감정으로서 불타오고,  어떻게 현실이 어떻다 할지라도 옛사람과 새사람을 비판하는 것이 아주 신속해야  되겠고 속빨라야 되겠고, 빠르고 난 다음에는 옛사람을 착 꺾어버리는 '이놈아  물러가라. 너는 죽어야 한다. 너는 죽을 자다.' 옛사람을 착 물리칠 수 있는  이것이 천지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나는 아무리 땅속에 매장돼도 이게 새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새사람을 입고  나는 새사람으로 나는 활동하겠다.' 새사람으로 언행심사를 하면 당장에 사형을  받을지라도 그 사형을 받아도 새사람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새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이것이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하는 그것을 비판할 여유가  없을 만치 급급하다면 두말 할 것이 지금 악령에게 사로잡혀 가지고서 완전히  사망 깊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뭐 참 벼락같은 일이 닥치고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급하게 와서  우리를 포위해 가지고 어떻게 지금 피할 길을 조그만한 구멍이 있는데 피하게  되고 그때 '어디로 피할꼬?' 하면은 벌써 죽었습니다. 어디로 피할꼬 하면  죽었어. 피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새사람 옛사람입니다.

 어느 길로 어느 구멍으로 피하나 할,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당장 지금 죽는  일이 생겼으니까 '여게서 우선 살고 난 다음에 뭐 해야 될 것 아니냐?' 아니오.

사는 것보다 급한 것이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찾아서 새사람을 찾으면 새사람을 찾았을 때에 새사람을 하나님이  보호하고 있으니까 새사람이 가는 길이 있을 것이요. 새사람이 피하는 길도 있고  새사람이 하는 일도 있고,  지금 전국이 조서를 내려 가지고 기도한다는 자는 사자구덩이 집어넣는다는  다급한 일 그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도 다니엘은 그때에 옛사람 새사람을  구별해 가지고 새사람의 사는 생활을 취한 것이 그것이 미련하게 사자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이 새사람이 사는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어떤 다급한 데서라도, 우리가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급하지  않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 급한 게 아니오.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지금  뚜드려 맞은 데에서 거기서 복수가 급하지 안 하고, 맞는 그 맞음을 피하는 것이  그것이 급하지 안하고, 우리는 무엇보다도 제일 급한 것이 내가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맞아도 새사람으로 맞아야 될 것이고, 때려도 새사람으로 때려야 될 것이고,  피해도 새사람으로 피해야 되지, 새사람 아니고 내가 옛사람이라면 나는 벌써  멸망을 받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사람이냐 옛사람이 하는 것을 구별할 수 없는  그런 여유 시간이 없을 때는 벌써 죽은 것인 줄 알고 어떻게 해도 그것을 다  물리치고 거게서 일어나서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어떤 내냐? 어떤 내냐? 새 내냐, 새사람 내냐 옛사람 내냐 그것을 첫째 구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급할 때에 벌써 새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전능, 전지, 하나님의 사랑,  우주를 창조한 진리, 이것으로 똘똘 뭉쳐 가지고 되어 있는 것이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다 만든 능력을 가졌고 모든 피조물을 다 제어하고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새사람 찾는 것이 모든 우주와 영계  피조물들을 발 아래 밟는 자기를 찾은 것이요 그 위치를 찾은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약한 자가 아닙니다.

새사람 찾았으면 새사람은 때릴 자도 없고, 새사람은 해할 자도 없고, 새사람은  손해보일 자가 없습니다. 새사람을 죽일 자는 없는 것입니다. 새사람을 죽일  자는 없고 새사람을 제가 죽인다고 했으면 새사람은 심히 영광스러워졌고  새사람을 죽인 저만 죽었습니다. 저만 결국은 멸망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위급한 데서라도 우리는 새사람을 찾아서 자기가 새사람  됐으면 자기는 전능에 소속자요, 전지에 소속자요, 완전에 소속자요, 대주재에  소속자요, 주권에 소속자요 모든 주재에 소속한 자 이기 때문에 그 찾았으니  그러면 찾은 그다음부터는 숨을 쉬어야 됩니다. 찾았으면 그다음부터는  자기에게는 천하가 손해보일 것이 아무것도 없어.

 새사람을 찾기 전에 매를 맞아야 그 매가 자기를 손해보이고 상하게 하고,  새사람을 찾기 전에 뺏겨야 자기가 뺏기고 손해가지 새사람만 딱 찾아서 자기가  새사람 딱 됐을 때는 자기를 손해보일 자는 우주와 영계에 하나도 없고 하나님도  그 사람은 손해보이지 않습니다. 해 보이지 않습니다. 요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아멘이 되고 심히 기쁠 것입니다.

 새사람을 찾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새사람을 찾았지마는 내가 새사람인데,  내가 새사람인데, 새사람을 찾았는데,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 영감과 진리대로 살아난 새사람 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말하고,  진리는 우주에 영계에 모든 것의 실무의 능력을 가리켜 말하고, 거룩은 모든  것을 구별해 가지고 모든 것을 승리하고 구별해서 구별해서 완전에 도달한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사람을 내가 이제는 찾아서 새사람으로 살게 되니 그러면 새사람으로  살 때는 언제가 새사람으로 살 때냐? 새사람은 옛사람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때가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새사람으로 산다고 내가 지금 새사람으로 산다 할  때에는, 옛사람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 때가 새사람으로 사는 때지 옛사람으로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 없을 때에는 벌써 새사람은 벌써 파묻혀 버렸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새사람으로 살면 현실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할 때에 그때는  으례히 새사람이니까 하나님의 지식을 잡지 안하면 그때에 우리는 옆에 옛사람이  쫓겨나고 있었지만 그놈이 옆에 붙어 있기 때문에 현실을 닥칠 때 새사람이 내가  모처럼 새사람이 나서 가지고 새사람으로 내가 살면서도 현실을 닥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지식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얼른거리고 있습니다.

 있는데, 이제 이 인간 지식을 배격할 그때에 하나님의 지식을 취할 때입니다.

인간 지식으로 더불어 싸워서 인간 지식을 용납지 안하려고 인간 지식을  배격하는 그 배격의 싸움이 끝났을 때에는 벌써 인간 지식에 벌써 감염돼서 속해  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지식으로 더불어 대적해 싸워 인간 지식에게 삼키워지지지  안하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기가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고 경영하려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내가 지금 이래 해야  되겠다' 하면 벌써 틀렸소.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하려 했으면 자기도 모르게  벌써 인간 지식이 들어와 가지고서 승리를 해서 감염돼서 점령을 당했습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의 지식으로만 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지식에  대립되는 인간 지식이 옆에 와 가지고 간교하게 서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할 때는 인간 지식이 옆에 대립돼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지  못하게 인간 지식으로 끌려고 하는 그것이 옆에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하려 할 때는 이놈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놈의 역사에게  끌려 가지고 이놈의 미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지식대로 하려고 둘 중에 하나를  취하는 그게 아닐 때에 하나뿐이면 자기는 헛일했어. 하나님 지식 하나뿐이면  벌써 틀렸고 벌써 마귀의 지식에 넘어 가버렸습니다.

 왜 그리 되느냐? 이것은 예를 들면 하나님의 지식은 위에 속해서 위에 달려서  위에 매달려 가지고 위에 연결된 것이고 이제 인간의 지식은 땅에 걸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딱 끊어지면 떨어집니다. 딱 끊어지면 떨어지고 달려 가지고  있을 때는 위에 붙들려 매여 가지고 있는 그 끈이, 매여 가지고 있어 위에 들고  있는 힘이 끊어지면 벌써 떨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지식에서 인간의 지식으로 타락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고 새사람이 옛사람으로서 변하는 타락이라 하는 것은 마치 위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위에 공중에 매달린 것과 같기 때문에  이거는 쉬지 안하는 그 힘이 위에 달고 있어서 다는 힘이 떨어지면, 다는 힘이  없어지면 즉시 떨어진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는 새사람으로 사는 그 역사가 계속 할 때에 그것은 떨어지는  걸 반대합니다. 옛사람으로 사는 것을 자꾸 대항해, 옛사람으로 사는 이놈이 와  가지고서 옛사람이 뿔뚝 나올 때에 옛사람을 한쪽머리는 쳐서, 옛사람을  한쪽머리는 쳐서 뚜드려 꺾고 뽑고, 뽑을 때가 새사람으로 사는 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다음에는 두 가지 지식을 비판하고, 두 가지 지식을 비판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지식에 속하면 하나님의 영이 거게 하나님 지식에 연결돼  있고 인간의 지식과 연결되면 인간의 지식을 자기가 취하면 인간의 지식과  악령과는 연결돼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지식은 악령의 중계자요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에게  중계자이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나와 그 사이를 연결시키는 중보의  권위를 가지고 역할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식이요 인간 지식은 악령과 중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세상 지식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시간이 뭐 얼마든지 자기가 생각하면 여러분들이 많이 배웠기 때문에 가면 많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뭐이든지 현실에서 비판할 때에 둘로 가지고 비판합니다.

요 둘로 가지고 비판을 하다가 이 둘로 비판하면 아는데 둘로 비판해 가지고,  그다음에는 요것을 또 둘로 비판합니다. 또 요다음에는 또 요것을 그다음에 또  요 둘로 요래 비판합니다. 이래 가지고 전부 둘로만 비판해 나가면 참이  나온다는 그건 여러분들이 이제 실지로 실험을 해 보면 알 것입니다.

 그런데 둘로 비판에서 둘에서 서이로 넘어가면 실패입니다. 서이로 넘어가면  혼돈돼서 마귀의 벌써 시험에 걸렸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새사람이냐 옛사람이냐? 내가 지금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에 지배를 받고 있느냐 인간 지식에게 지배를 받고 있느냐?' 뭐  인간 생활이 요 둘로만 구별하려 하면 간단해서, 이 보통 세상 생활은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간편하게 판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서 인간들이 모르는 신령한 세계에 있는 그 진리를  우리가 찾을 때는 인간이 모르는 인간 위의 철학, 인간 그 이상의 그 영계의  모든 것을 구별하려고 할 때에는 그때는 심히 혼잡해서 둘로 구별해도 아주  힘들지마는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일반적 신앙 생활 하는 데는 둘로  구별하면 뭐 시간 걸릴 것 없습니다. 누구든지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자, 이것이 '그러면 나는 지금 천국을 건설하고 있는 사람인데 이것은 천국  수입을 위주로 하느냐 세상 수입을 위주로 하느냐? 이것은 인간 좋게 하는  것이냐 하나님 좋게 하는 것이냐? 이것은 영을 위하는 생활이냐 육을 위하는  생활이냐? 이것은 현재만을 위주로 생각하느냐 이제 영원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냐? 이것은 인간들의 비판만을 위주로 하는 것이냐 하나님의 비판을 위주로  하는 것이냐? 이것은 준비 생활이냐 이것은 열매를 마구 먹는 종자를 먹는  막살이 생활이냐 준비 생활이냐?' 뭐 둘로만 들이대면 간편하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둘로 쪽발을 가진 것이라야 먹어라. 둘로 비판하는,  신약에 먹으라는 것은 행동하라 그말이요, 행동하라.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나  먹을 양식이 있는 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 행동을 말했습니다. 행동을 말한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 두 가지로 비판한, 요 두 가지로 비판해 가지고서 두  가지 비판을 해 가지고 '요게 옳다' 하는 그게 아니거든 행동하지 말아라 그게  아니거든 행동하지 말아라, 그게 아니거든 먹지 말라 그말이오. '먹지 마라'  그게 아니면 행동하지 말아라.

 또 그것만 해도 안 된다. 새김질하는 것이니 과거를 그것을 현재에 반성을,  과거를, 과거를 이 현재에 현재를 당해 가지고 현재에서, 해 아래는 새것이  없습니다. 현재 닥친 것이 현재 닥친 게 처음 닥친 것 아니오. 현재 닥친 것이  과거에 수십 번 지나갔습니다. 내게도 지내갔고 내게 안 지나갔으면 벌써 여러  수천 명 수만 명이 그런 것을 다 지내간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했어. 새것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과거에 모든 것을, 현재에 이것을 과거에서 찾아봐라. '현재와  같은 이런 것이 과거에 없느냐? 현재 같은 현재 이것이 과거에 없었느냐?'  그것을 네가 찾아보고, 또 과거에 네가 그런 것이 있을 때에 어떻게 처리했느냐?  현재에서, 현재를 과거에서 깨닫게 되고 또 과거를, 과거를 현재에서 다시  개조할 수 있는, 과거를 현재에서 다시 개조하고 현재를 과거에서 깨닫게 되고  그렇게 이제 현재를 과거에 연결시켜 그 과거가 현재 자기에게 다시 개조가  되어지는 그것이 아니거든 행동하지 말아라.

 그러기 때문에 네가 현실에 행동하는 행동은 쪽발로 걸어가는 요것, 너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너 과거 모든 사람 과거 '구름같은 간증자들이 둘러쌌으니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달음질하라' 구름같은 간증자들이  많다.

 그러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사람의 역사를 잘 알지마는 도시에서는 사람의  역사도 잘 모르고 만물의 역사도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독서를 많이 해야 됩니다. 글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앞집 뒷집도 그 소문을  모르지마는 글에는 그게 많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많이 읽어라.

 그래서 내 과거도 있지마는 모든 사람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모든 나와 인류의  과거, 인류의 그 과거에서 네 현재를 비판해 가지고 네게 현재 어떻게 움직여야  되는 그 움직임을 과거 네, 네가 많은 사람들의 과거 그것을 네가 참고로 삼아  가지고서 현재에 움직일 것을 결정을 해라.

 또 과거에 그 모든 사람 참고한 그걸 움직인 것을 그것을 참고로 해 가지고서  그것을 현재에 와 가지고서 과거에 잘못된 것은 현재에 고칠 것은 고치고,  모자라는 것은 더 보충을 하고, 또 제거해 버릴 것은 제거를 하고, 거게서 더  가해야 될 것은 가하고, 네 현재에 행동이라는 그 행동이 수많은 간증자의  과거의 모든 것을 다 그것을 나벼 가지고 나벼서 그것을 다시 되새기고 새겨  새김질해 가지고 그것을 새로 되새겨 가지고 만들어 놓은 현재의 행동이  아니거든 하지 말아라. 그러기 때문에 쪽발과 새김질 이 두 가지를 겸한 그  행동을 네가 해라. 그래야 그것이 새사람의 양식이 되고, 새사람이 자라가고,  새사람이 튼튼해지고 하는 것이 되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거룩한 자를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먹지 말아라. 먹지 말라 말은 행동하지 말아라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참, 사람은 말입니다. 자꾸 마귀는 알맹이 기쁨은 버리고  껍데기 기쁨으로 자꾸 끌어냅니다. 이러기에 이 세상 물질의 기쁨보다는 인간의  기쁨이 좋고, 인간의 기쁨보다는 자기에게 있는 기쁨이 더 좋고, 자기에게 있는  기쁨보다 하나님에게 있는 기쁨이 더 좋습니다.

 이것은, 그러기에 기독자가, 기독자가, 신앙은 늙지 않습니다. 신앙은 늙지  안하고 새로와지고 자꾸 날로 새로와지는 것은 기독자들어 자기 현실을 쪽발과  새김질로 이렇게 걸어갈 때에, 그래 가지고서 자기가 행동하는 그 행동은 맛이  참 고량진미요 이 맛을 본 사람은 무슨 물체의 움직이는 소리나, 인간들의  움직이는 아무리 명창이 노래 한다 해도 그 소리나 또 이 세상 모든 움직임이나  그것은 껍데기 중에 껍데기요.

 그 속에 알맹이뿐 아니라 모든 것이 거게 매였고, 거게 속했고, 거게서 발원돼  나가는 것이고, 그것이 모두가 다 점령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자는 한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피조물로서 제일 쾌락을 누리고, 간 자가 누구냐? 제일  만족을 누리고 간 자가 누구냐? 제일 행복을 누리고 간 자가 누구냐? 제일  호강하고 간 자가 누구냐? 제일 기쁨을 가지고 간 자가 누구냐? 제일 요긴하고  제일 진짜를 딱 자기 것을 만들고 간 자가 누구냐? 제일 쾌락과 행락을 누리고  간 자가 누구냐? 누리고 간 자는 주님이십니다. 주님 이상 아무도 행락을 누린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의 생활은 바울이 옥중에 들어 있으면서도 기쁘고 즐겁고 종일  매를 맞아서 마구 피투성이가 되고서 깊은 착고 안에 채여 가지고서 감옥 깊은  속에 들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못 견뎌서 찬송을 외칠 때에 그 찬송에는  만물이 다 함께 찬송해서 지진이 나고 움직이고 한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  형식으로 보인 것인데, 오늘에는 움직이지 안해도 우리가 어느 돌팍 위에 가서  앉을 때에 돌과 산천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또 자기가 어떤 길을 갈 때에 모두  다 만물이 다 말을 하면서 이제 '어데까지 가십니까? 이제 오십니까? 쉬어  가십시오.' 만물이 다, 후란시스가, 후란시스가 돌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고,  나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고, 새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고 조그만한 풀 한포기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밥을 한 그릇 갖다 놓고서 그 밥에 대해서  죄송한 것을 그 밥은 이렇게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이 맡긴 직분대로 하는데  나는 직분대로 못 하니 이 밥에 대해서 '미안하고 죄송하니까 내가 먹을 수가  없다.' 할 때에 '나를 먹어야 내가 구원 얻지 먹지 안하면, 당신이 나를 밥을  먹어 주지 안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 얻습니까?' 하는 그 소리를 듣고서 그 밥을  먹었다고.

 그러기 때문에 후란시스를 사람들이 언뜻 보면 '그는 다 만물상의 사람이다'  그렇게 '물화동체의 주장하는 하나 불교와 같은 그런 사람이다. 그런 다신  종교의 사람이다.' 별별 말하지마는 성경이 말해 놓지 안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그 소리를 들을 줄 아는고로 자기가 갈 때에 모든  짐승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짐승들에게 설교를 하고 범에게도 설교를 하고,  그런 사람들 많습니다. 어떤 사람 말 들어 보니까 자기에게 아주 산곡에 가  가지고 혼자 기도하다가 이제 뭐이 와닥다닥하니까 막 겁이 나 가지고 이랬는데  나중에 한참 기도하고서 나중에 새사람을 찾고 보니까, 새사람을 찾고 보니까  어떻게 마음이 기쁜지 그 찾아왔던 맹수를 사랑으로 대접하지 못한 것이 너무  기가 막혀서 다시 맹수를 찾아서 산을 헤맸다고.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다가 밤에 가다가, 밤에 가다가 저물게 이래 가다가  어덴지도 모르고 그만 자꾸 눈감고 명상하며 가다 보니까 팍 부딪히는데 보니까  층암절벽의 암석이 앞에 가리워 있는데 그 보니까 어데인지도 모르고 첩첩 산중  뭐 계속 이래 얼마나 깊이 왔는지 이래 가지고 있는데 거게서 이래 보니까 옆에  보니까 큰 사자가 한 마리 옆에서 앉았더라고.

 그래서 새사람된 그 사람이 이제 그 사자를 보니까 반가와서 사자에 '짐승은  사랑하는 것이 쓰다듬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 하더라' 하면서 그 사자에 가  가지고 등을 이래 스르르 쓰다듬고 보니까 바위듬성이고 사자가 아니더라고.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 쪽발로 걸어가고 새김질하는 그 행위가 아니면 새사람의  양식은 되지 못한다. 그것이 아니면 너희에게 부정하니까 다 사망이요 그걸로  먹으면 너희들이 자라간다. 우리에게 한 형식을 가지고서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요 생활을 하면 전부, 이 우주와 영계는 하나의 조성품으로 돼  가지고 있고 이 믿음의 새사람의 생활은 그 새사람을 통해서 모든 우주와 영계가  움직이고 있고 거게 전부 집결돼 있고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런고로 우리가  세상에서 노력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는 그  말씀을 오늘도 모두 중간반에 공부하고 주일학교도 공부했는데 이제  그리스도직의 생애는 모든 것이 다 환영하고 찬양하고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그 사람이 하늘나라 갔다 할지라도 사물 속에 자유 행동  하지 못하면 감옥에 갇힌 사람이오. 사람들 속에 자유 행동 못 하면 감옥에 갇힌  사람이오. 그 사람의 어떤 성질 어떤 행동에라도 자기가 자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만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그 사람은 내 맘에 못 들어와도 나는 그 사람에  자유할 수 있는데 내가 남의 마음 속에 자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원수를 만날  때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은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데 나는 그 사람을 사랑스럽고  그 사람이 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그에게 막힌 담이 없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그 사람에게 자유하는 사람인데.

 자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그 사람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내가 그  사람 속에 자유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자유하지 못하게 해서 내가 나  때문에, 내가 나를 금지합니다. 내가 내 마음이 나를 금지하고 내 양심이 나를  금지해서 그 사람 속에 만날 때에 그 사람과 나와 담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나와 담이 있는 것은 내 양심이 담이 있는 것을 나에게 증거해 주기 때문에 담이  있고 내 양심이 아무 거게 담이 없는 그럴 때에는 나는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자유하려고, 무궁세계에 자유하려고,  하나님 안에 자유하는 그것이 제일 최고의 자유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성전  생활 하려고 애를 쓰고 그리스도인의 생활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둘로, 쪽발 새김질 요것은 기억하기 쉽게 해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니까 그 행위가 아니면 우리는 하지 안해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구별 중에도 옛사람이냐 새사람이냐 그것을 구별하고 난 다음에는  지식을 구별하고. 지식 구별하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신을 구별하고. 그리고  나서는 뭐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만 옛사람 새사람 구별해 놓으면 새사람이  좋아하는 건 다 좋고 옛사람이 좋아하는 건 다 나쁜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만 자기가 됐을 때는, 자기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어짜고  나니까 어느 한 토막에 성소에 들어가서 자기가 새사람이 된 때에, 새사람이 된  때에 보니까 새사람이 되고 나서는 사람도 보니까 달라졌고, 만물도 보니까  달라졌고, 원수도 달라졌고, 자기가 새사람 되고 나니까 이제 상대하는 모든  것이 다 달라졌고, 산천도 달라졌고, '모든 게 변화됐다. 이상하다.' 하는  그것을 사람들이 다 처음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다 이것이 뭐 천국이라 변화됐다  하는 그것은 자기가 변화된 그것을 찰나로 입어 보고 순간으로 입어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가 새사람으로 변화되면 다 되고 자기가 옛사람으로 다시  타락하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욕심도 달라지고 소원도 달라져. 새사람이 되면  옛사람이 욕심부렸던 걸 새사람이 되고 나면 그게 밉고 죽이고 싶고 '뭣 때문에  그렇게 미쳤던고? 그렇게 어리석었던고?' 하는 것이 그것이 절실히 자기에게  느껴지기 때문에,  새사람으로 자기가 입각하기 전에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의를 행할 수도 없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 이랬습니다. '새사람이  되기 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할 수도 없고 그분에게 순종 할 수도  없다' 이랬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631 쪽발과 새김질/ 레튀기 11장 1절-8절/ 1983. 9. 18.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 쪽발과 새김질/ 레위기 11장 1절-8절/ 1983. 9. 18.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629 징계-책망-사랑/ 요한계시록 3장 19절-22절/ 1987. 7. 28.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628 징계와 회개/ 시편 1장 1절-3절/ 1983. 6. 8.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627 징계받기 전에 회개하라/ 이사야 1장 18절-20절/ 1981. 8. 26.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626 징계를 보는 눈동자/ 예레미야애가 2장 18절/ 1986. 7. 30. 수새벽 선지자 2015.12.28
625 징계 받을 때/ 요한계시록 3장 19절-22절/ 1983. 9. 7.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624 징계/ 히브리서 12장 5절-7절/ 1980. 6. 25. 수저녁 선지자 2015.12.28
623 집회참석/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1989. 4. 1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622 집회준비-옥토밭을 준비하라/ 마태복음 13장 3절-9절/ 1988. 4. 7. 목새벽 선지자 2015.12.28
621 집회준비- 예수님의 것/ 베드로전서 5장 6절-11절/ 1983. 8. 1. 월새벽 선지자 2015.12.28
620 집회준비/ 이사야 49장 8절/ 1984. 6. 15.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619 집회준비/ 마태복음 13장 1절-10절/ 1985. 4. 12.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618 집회준비/ 마태복음 25장 10절-12절/ 1986. 4. 18.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617 집회설교 복습/ 요한계시록 1장 1절-3절/ 1985. 9. 29. 주일오전 선지자 2015.12.28
616 집회를 위한 기도/ 시편 1장 1절-3절/ 1983. 8. 2. 화새벽 선지자 2015.12.28
615 집회 준비 4가지/ 누가복음 14장 28절-30절/ 1988. 7. 2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614 집짓는 비유 / 고린도전서 3장 10절-15절/ 1985. 12. 15 주일오후 선지자 2015.12.28
613 집사투표/ 디모데전서 3장 1절-7절/ 1985. 12. 20.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28
612 집사자격13가지-현재의 가치/ 야고보서 3장 13절-18절/ 1988. 12. 28. 수저녁 선지자 2015.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