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발과 새김질


선지자선교회 1983년 9월 18일 주전

 

본문 : 레11:1-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이 말씀은 육체의 이스라엘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의를 주신 말씀이요 또  우리에게 이 계약의 말씀을 우리의 신조와 교리로 주신 것은 그 법리는 신령한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되는 구원 도리인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신 모든 이 계약은 신령한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다 적용되고 해당된 절대적 말씀이기 때문에 육체의 이스라엘에게만으로  그쳐진 그런 교훈들은 그것을 신령한 이스라엘들에게는 해당치 않다고 계시하신  그 성구들이 있습니다. 폐지되지 아니한 것은 육체의 이스라엘들에게 하신  말씀은 신령한 이스라엘들에게도 꼭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다만  육체의 이스라엘에게는 육체적이고 신령한 이스라엘들에게는 신령적인 그런 면만  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훈하고 인도하실 때에 처음은 어린 다  육체적이요 신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표시도 하고 또 교훈도 하는  그 속에 신령한 것이 이루어져 가고 자라가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모든 계시는 창세기 시작에서부터  계시록 끝에까지 변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인간의 그 수준에 따라서  하나님이 육체가 먼저요 신령이 다음이기 때문에 육체적만을 알게 되는  사람들인고로 육체적 것으로 가르치시고 또 행하게 하셔 가지고 점점 자라서  신령한 데로 성장돼 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육체의 이스라엘들에게 육체적으로 관계된 말씀이요  육체적으로 관계하는 가운데에서 영적의 부분이 조금씩 생겨나고 자라가도록  그렇게 하셨고 신약 시대에는 이제는 육체적 일을 벗고 신령적인 면이 주체가 돼  가지고 계시한 이 도리이나 약간의 외부에 육체적인 그 형태를 이용하는  것만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먹을 짐승과 먹지 못할 짐승,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지 못할 식물을 구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먹지 못할 짐승은 먹으면  이스라엘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더러워지면 멸망받습니다 먹을 수 있는 짐승은  먹을 때에 이스라엘은 자라가게 되고 더 점점 장성하게 됩니다.

 다만 물질적이요 신령적으로 다른 것만이 바꾸어진 것이지 그 이치나 방편은  바꾸지를 안했습니다. 그러기에 육체의 이스라엘은 육체적이기 때문에 물질을  먹는 것을 양식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그 방편을 썼고 신령한 이스라엘은  영적인 하나님의 모형인 그 인격체인 그 신령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신령한  이스라엘이 먹는 것을 달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먼저 '육체의 이스라엘이라 신령한 이스라엘이라'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을 가리켜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얍복강가에서 우리 믿음의 조상 야곱이 받은 새 이름인데 그 이름을 받기 전에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야 곱이라는 이름은 도적이라 하는 그런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얍복강가에서 '다시는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말고-도적이라 하지  말고-이스라엘이라 하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해서 이름을 지어 줬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라는 그 뜻은 '사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시비하면 망한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다투면 망한다, 멸망한다.' 하는 그 것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옳고 그르고 되고 안 되고 이렇게 시비할 상대로 하나님을 상대할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상대하면 인간은 멸망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제는  시비하던 일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기로 작정을 하고 '하나님의  축복이라야 할 수 있다' 하는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준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시비하면 멸망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하나님과 시비하는 것이 막바로 멸망이기 때문에 시비를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로 작정을 하고 하나님이 또 말씀하시는 그 말씀으로  축복하시는 말씀으로 복을 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그때에 하나님이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라' 하는 그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시비하는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하는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순종과 하나님의 축복을 소망하는 그것이 이스라엘이라 하는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도 여러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그  이름의 뜻을 잘못 알면 이스라엘 노릇을 바로 할 수가 없고 구원이 바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자손이면서 이스라엘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첫  아담에게 속한 자이면서 또 둘째 아담에게 속한 자입니다.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는 도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도적이요, 모든  이웃에게 대해서도 도적이요, 만물에게 대해서도 도적인 자기 중심인 원죄의  사람들이 된 우리들입니다. 여기에서 둘째 아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이 됐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된 것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성령과 진리로 새로 난  새사람이 곧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은 하나님과  시비하는 자는 완전히 죽고 하나님에게만 복종하는 것으로 걸어가고 하나님의  축복만을 소망하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성령과 진리로  새로 살려 주심을 받은 새사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개구리가 양서동물인 것처럼 우리는 양면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옛사람도 되고 새사람도 되고 이 두 사람 가운데 끼어서 한쪽은 내 심신을  옛사람의 도구로 옛사람의 종으로 옛사람으로 행동하라고 조아대고, 또 한쪽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영의 소유인 소속인 네 심신이니까 네 심신이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영의 육이 돼 가지고 영의 사람으로 살아라' 그렇게 양편 그 세력  속에 끼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말하기를 '이 두 사이에 끼어서 원하는 일이  빨리 되지를 안한다 옛사람은 옛사람이 우리를 옛사람으로 살도록 하려고  밤낮으로 유혹을 하고 진리와 성령으로 새사람으로 난 새사람은 새사람으로  살려고, 사는 데는 심신을 도구처럼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새사람은 심신을  새사람이 사용해서 새사람의 도구로 의의 병기로 살도록 하려고 하고, 옛사람은  우리의 심신을 죄에 드려서 죄의 도구로 삼아 죄를 이루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구속받은 사람들의 세상 생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으로 또 개인의 죽음으로 두 사람 틈바귀 속에 살던 이  우리 생애는 하나로 결정돼 버리고 맙니다. 택한 자들은 새사람의 심신이 되고  옛사람의 심신으로 되었던 것은 다 분석해서 완전히 영원한 멸망으로 다  소멸시켜 버리고 새사람의 것이 된 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두 사람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양면 역할을 해야 됩니다.

옛사람은 죽이는 역사를 우리가 해야 되고 새사람으로는 살아 성장해 가는  역사를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옛사람은 죽이는 곳이 교회요  새사람은 살려 길러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한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나고 장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인간의 말이 섞이지 아니한 순전히 영감과 진리의  하나님이 하시는 그 말씀을 강단에서 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그 말씀이 자기에게  원수와 오랑캐와 같이 되어 말씀도 자기에게는 듣기 싫고 심지어 말씀을  대언하는 강사까지도 원수와 같이 그렇게 보기 싫은 그 사람도 있고, 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심히 기쁘고 힘이 나고 감사하고 그 말씀만 반가울 뿐만  아니라 말씀을 대언하는 강사 까지도 귀중히 여겨지고 가장 자기에게 보배로  여겨져 보배를 주는 하나님의 은혜 기관으로 알아서 귀중히 대우할라 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설교를 들을 때에 옳은 설교라 할지라도 그 설교와 원수되는  사람도 있고 그 설교와 일치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설교를 들을 때에 한  사람은 꺾어져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큰 사형시키는 몽둥이를 맞은 것과 같이  그렇게 아주 기절하게 까무러지는 그 사람도 있고 한 사람은 흙 속에 묻혀 있던  사람이 이제 드러나니까 활동하게 되니까 좋고 기뻐서 힘을 쓰고 활발하게  날뛰는 것과 같은 그런 새사람도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교회는 먼저 살인소요 구인소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곳이 교회요  사람을 살리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그 예배  통해서 '이놈을 죽여야 되겠다' 하는, 자기에게 죽일 자를 찾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그날 원수를 토벌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죽일 자를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그 사람을 죽여 '이놈은 죽였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구로 단속해서  다시는 재발하지 못하도록 하겠다' 하는, 자기에게 죽여야 할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죽인 그 일을 한 사람이 성공자입니다.

 또 '이 사람은 보호하고 길러야 되고 이 사람이 주장돼서 활동해야 되겠다'  하는 그 새사람을 발견해서 새사람이 힘을 얻고, 새사람이 일어서고, 새사람이  자기의 전체에 주격이 되고 옛사람은 원수라는 것을 발견돼서 쫓겨나는 그  역사가 있어야 주일을 바로 지킨 것입니다. 이게 없이는 언제든지 제 주관대로  예수 믿습니다. 육백육십육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살인소요 구인소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인의 말씀이요 구인의 말씀이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에게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쪽발로 걸어가고 새김질하는 그  고기만 먹지 쪽발로 걸어가도 새김질이 없으면 먹으면 네게는 부정하기 때문에  네가 더러워져서 멸망을 받게 된다. 또 새김질은 한다 할지라도 쪽발로 걸어가지  안하면 먹으면 안 되고 쪽발로 걸어간다 할지라도 새김질을 하지 안 하면  더러우니까 먹지 안해야 된다.

 쪽발로 걸어가는 쪽발과 새김질하는 그 새김질과 한 짐승에게 이 두 가지가  겸해 있어야 그것이 네 양식이 되니까 먹지, 그것이 하나만 있고 둘이 겸하지  못했을 때에는 부정하기 때문에 거룩한 이스라엘 자손 네가 먹으면 멸망받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이것이 역력히 그대로 나타났고 또 그런 자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끊겨지게 되기 때문에 그 잘못된 것을 또 짐승을 잡아서 제사장에게 가 가지고서  사죄를 받으면 괜찮았습니다. 사죄받지 안하면 멸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신약  교회는 고기덩어리가 아니고 그 인격체, 하나님의 신성의 모형인 신성같은  속성을 가진 인격성, 그 인격성을 상대해서 그 인격성을 주체로 삼아 이  인격성을 가꾸고 기르고 하는 인격성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고로 신령한 이스라엘 된 인격된 이스라엘은 먹는 것이 육체의 이스라엘과  달리, 육체의 이스라엘은 입으로 꾹꾹 씹어서 먹으면 되고 또 꿀떡꿀떡 마셔서  넘어 삼키면 되고, 입으로 물질을 먹어서 물질을 보충하고 물질을 유지케 하고  물질을 성장케 하는 육체의 이스라엘이지마는 신령한 이스라엘은 입으로 먹지  아니하고 그이의 전 이성 감각으로 먹게 된다.

 감각으로 먹게 되고 이성으로 먹게 되고 하는 것이니 먹을 양식은 뭣이냐?  신령한 이스라엘의 인격체의 먹는 양식은 물질이 아니고 영감과 진리와  행동이다. 그 세 가지를 먹고 강건도 하고 자라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으로 생겨난 것도 성령으로 살아났고 진리로 살아났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행위로 살아났기 때문에 중생된 새사람은 진리로 배부르고 진리로 강건하고,  영감으로 배부르고 영감으로 강건하고 성장하고, 또 영감과 진리의 행위로 먹고  강건하고 성장하게 된다.

 이래서 요한복음 4장에 신령한 이스라엘 된 이스라엘의 먹는 것을 거게 표시해  놨습니다. 제자들이 '주여 잡수시옵소서' 하면서 떡을 드리니까 '나는 여게 나  먹을 양식이 여게 있다.' 제자들이 '이 사마리아 여인이 무엇을 갖다  주었는가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내가 나 먹을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니 곧 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나의 양식이다.' 그렇게  신령한 이스라엘의 먹는 양식을 말씀했습니다.

 그 양식이 곧 영감을 먹는 것이요, 진리를 먹는 것이요, 영감과 진리대로  행동하는 그 행동을 먹는 것을 양식이라고, 영감과 진리와 영감과 진리대로의  행동을 양식이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밝히 전도 시작 때에 선포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그 뒤에 제자들은 신령한 양식을 알고 그 양식으로 배부르기를  힘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쪽발과 새김질하는 고기가 아니면 먹으면 멸망받는다. 두  가지가 겸한 고기라야 너희들이 먹고 양식이 되고 자라게 된다.' 하는 이 법칙을  주시고 그뒤에 변개를 안 했습니다. 그 법칙으로 그대로 나가는데 다만 육체적인  것을 신령적으로 바꾼 것과 육체적으로 먹는 방식을 신령적으로 먹는 방식으로  방식은 바꾼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한 사람은 죽이고 한 사람은 살려 기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은 길러 강건케 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옛사람의  양식을 먹이지 안하면 옛사람은 곯아서 차차 죽습니다. 새사람의 양식을 먹이지  안하면 새사람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신령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옛사람을 안 먹이면 어떻게 하면  옛사람을 안 먹이는 것이 되고, 새사람을 먹이면 어떻게 하면 새사람을 먹이는  게 되는가 하는 그것을 여게서 가르친 것이니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현실을 당해서 행동할 때에 쪽발로만 걸어가는 것처럼. 네 행동  개시가 되기 전에,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행동 개시하기 전에 너는 둘로  구별하는 그 구별이 있어야 하고, 그 둘로 구별해 가지고 둘을 구별해서 확실히  바로 구별된 그때에 바로 구별된 그 행위를 하면 그것은 거룩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먹으면, 그 행위를 하면 중생된 새사람의 인격은 배부르고 강건해지고  자라게 된다.

 그러나 네가 둘로 구별하지도 아니하고 행동만 하면 구별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런 부정한 구별 없는 행동을 네가 하면 옛사람은 살이 찌고 강건할지라도  새사람은 성장하지 못하고, 마치 농토에 잡초를 제거하지 안하면 잡초는  속성하기 때문에 잡초만 무성하고 곡식은 그 속에 파묻혀서 녹아지는 것처럼  네가 시간 시간 현실 현실에 행동하는 그 행동에서 구별이 없는 행동을 하면  옛사람은 잡초처럼 무성해가고 중생된 새사람은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파묻히게  되니 너의 일생 생활은 다 멸망이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행동 개시 전에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네가 두 가지로  구별해라. 여러가지로 구별하면 안 되기 때문에, 토끼도 그런 것 다 이렇게  발가락이 다섯입니다. '둘로 구별하는 것보다 다섯 쪼갱이로 구별하면 좋지  않는가?' 이랬는데 그것을 부정타 이랬습니다. 둘로만 구별하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우냐 좌냐 둘로만 구별해라. 이것이 하나님 중심이냐  피조물 중심이냐 둘로만 구별해라. 이것이 천국에 속한 천국 건설이냐 세상  건설이냐 둘로만 구별해라. 네가 지금 욕심을 품고 있는 것이 성령의 소욕이냐  육체의 소욕이냐 구별해라. 네가 지금 하는 것이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지식대로냐 인간의 지식대로냐 구별을 해라. 네가 현재 살고 있는 이것만 표준한  생활이냐 죽고 난 다음을 생각하는 네 생활이냐 무엇이든지 둘로만 구별해라.

네가 이것이 네라는 인격을 위하는 인격 중심의 행위냐 인격이야 어찌 됐든지 돈  중심의 행위냐, 이것은 뭐이냐?  둘로만 구별하면 우리는 구별할 수가 있고 둘에다가 하나를 더 보태서 서이라도  '그렇지마는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 할 때에는 그때부터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둘을 벗어나면 더러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 네가 구별하는 데는 꼭 둘로만 구별해야 되지 둘 이상,  그것도 그렇고 이것도 이렇지마는 거게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지 않느냐?' 거게서  단서를 붙이지 말아라. 붙이지 말고 둘로만 구별하면 뚜렷이 네가 먹을 것과 못  먹을 것, 네가 행동해야 될 것과 안 해야 될 것이 뚜렷이 구별나지마는 둘로  구별하지 안하고 둘을 넘어서 '둘 보다 세 가지로 구별하면 좋지 않느냐?' 하는  둘을 넘으면 그다음부터 마귀 미혹에 들어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네가 꼭 둘로만  구별해 가지고 둘로 구별해서 확실히 네가 이것은 네 새사람의 양식이 되고  새사람의 행위가 되면 네가 행동을 해라. 그러면 네가 그걸 먹고 양식이 돼서  강건도 하고 탄탄하지마는 그렇지 안하면 안 된다. 이렇게 아주 간단 명료하고  철두철미해서 아주 명백성 있는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대해서도 구별할 때에 '내가 사욕이냐 성신의 소욕이냐?  이것이 새사람의 성품이냐 옛사람의 성품이냐? 내가 지금 행동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옛사람이냐 이게 새사람이냐?' 둘로만 구별하면 똑똑히 알 수 있는  사람도 거게다가 서이를 들어붙이면 그만 혼돈해 가지고 구별 못 하게 됩니다.

 네가 지금 성을 내는 것이 노하는 것이 새사람의 노냐 옛사람의 노냐 새사람의  노도 있을 수 있고 옛사람의 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비느하스는 새사람의 노를  가지고 음행하는 남녀를 한 창에다가 둘을, 엎쳐 가지고 있는 걸 둘을 한목  창으로 콱 찔러 가지고 한 창에다 찔러 가지고 어깨에 매고 이스라엘 진중에  들어왔기 때문에 '네가 내가 그 죄악을 질투하는 것처럼 내 질투와 같은 네가  질투를 가지고 이 죄악을 네가 미워하고 노했기 때문에 내가 네 질투로서 내  노가 다 풀렸고 만족이 됐고 이스라엘에게 진노를 내가 그치겠다'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에게 대해서도 옛사람이냐 새사람이냐 둘로 구별하고,  성질로 들어가면 '이 성질이 새사람의 성질이냐 옛사람의 성질이냐?' 욕심에  들어가면 '이 욕심이 성령의 욕심이냐 육체의 욕심이냐?' 성경에는 육체의  욕심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고 죽는 것 외에는 없고 성령의 욕심으로 살면 생명과  평강을 이룬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이 지식이 인간 지식이냐 하나님의 지식이냐?'  무엇이든지 둘로만 구별하면 똑똑히 아니 둘로 구별해서, 너는 이스라엘이니까,  너는 이스라엘이니까 하나님으로 시비하면 몽둥이 맞고 망하는 것을 네가 절실히  깨닫고 이제는 하나님과 시비하지 안 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축복만을 바라보기로 출발한 네기 때문에 네가 이 둘로  구별해서 이 행동은 네 가 해도 되나 안 되나 둘로 구별해 가지고서 네가 할  행동이라고 판정될 때에 그 행동을 해라. 그것을 먹어라. 그 행동을 하라. 그  뜻을 이루고 그 행동을 하라.

 신약에는 먹는 것을 뜻을 이루고 행하는 것이 그것이 먹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네가 지금 뜻하는 것이 네가 행동하는 것이 이것이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이스라엘의 양식이 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행동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네가 구별해 가지고 먹어야 네가 행동해야 된다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또 이렇게 둘로써 구별을 한다 할지라도 새김질이 없으면 취해 죽는다.

새김질이 없으면 그것도 부정하기 때문에, 꼭 쪽발로 행동, 걸어가기는 한  자욱에서 두 자욱으로 전진하는 데에는 행동하는 데는 쪽발로 행동을 해야 되고  자기가 이미 먹은 것, 자기가 이미 먹은 것은 꼭 새김질을 하는 그것이라야 네게  거룩하지 새김질 안 하는 것은 안 된다.

 다른 짐승 도야지 같은 것은 위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먹으면 그만입니다.

먹으면 그 먹은 것을 창자가 다른 짐승보다 길어서 그 창자에서 내려가면서  소화를 시켜 가지고서 섭취하지마는 새김질하는 짐승은 위가 너이라서 이 먹은  것을, 먹은 것을 새로 먹은 그대로 있으면 그만 죽습니다. 먹은 그대로 있으면  죽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목축하는 데 조금 경험이 있는데 '소가 아프다. 양이 아프다,'  그러면 첫째 묻는 말이 그말입니다. '새김질 하나 안 하나?' 묻습니다.

'새김질은 합니다.' '새김질하면 낫는다. 괜찮다.' '새김질 안 합니다.' '새김질  안 하면 그것 죽는다. 이리 이리 해 봐라.' '그리고 나니 인제 새김질합니다.'  '새김질하면 안심해라. 됐다.' 그렇게 말합니다.

 왜? 먹은 일차적으로 먹은 것을, 일차적으로 먹은 것을 다시 그것을 게워내  가지고 새로 이로 씹습니다. 이물이물 씹으면 새김질하면 거품이 푸득푸득 나는  걸 그걸 씹어 가지고 그래 인제 또 먹고 또 게워내 가지고 또 씹어 가지고 먹고  이래 가지고 게워내 가지고 그것을 다시 새겨 가지고 씹어 가지고 그래 먹는  그게 새김질인데, 자기가 어떻게 쪽발로 걸어 둘로 구별해 가지고 '이거야말로  새사람의 할 행위라, 이것은 새사람의 생활이라.' 해서 네가 판정하고 행동한  것일지라도 한 때가 지나가고 나면 네가 그만치 자라기 때문에, 다시 깨닫게  되니 과거를 네가 반성해서, 그걸 지나간 때에 모든 것을 반성을 해 가지고  그것이 잘됐나 못됐나?  못됐으면 고쳐야 되고, 잘됐으면 현재에 그대로 해야 되고, 그게 모자라면 좀  보충을 해야 되고, 또 잘못됐으면 그것을 고쳐야 되고 네가 과거에 모든 생애를  현실에서 반성해 가지고서 과거에 잘못된 그것을 현재에서 고치는 현실로,  과거에 미비점은 현실에서 구비하는 현실로, 과거에 미달된 것이라면 현실에서  그것을 충족을 이렇게 해서 반성을 해서 새김질을 해 가지고 그래 현실에  행동해라.

 과거에 모든 것을 네가 반성해 가지고 그 반성 그것을 전부 현재에 끌고 와  가지고서 그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그래 네가 현실에 행동해라.

 그러기에 네가 먹을 것은 현실 행동은 과거를 반성해서 그것을 현실에 고치고  구비하고 또 그것을 더 보강하고, 옳은 것이면 더 보강하고 유지하고, 또 둘로  구별해 가지고 새사람에게 양식이 될 수 있는 옳은 것으로 판단이 됐을 때에  그렇게 네가 현실에 발을 디뎌 놔라. 현실에 행동해라.

 그러기 때문에 네 행동은 둘로 구별한 그 구별에서 옳은 것으로 판정된 그것과  과거를 네가 반성해 가지고 그것을 고치든지, 그리 안 하면 더 보태든지, 더  구비하든지 해서 과거를 반성한 그 반성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그 행동, 둘로  구별로 말미암아 결정된 행동 그 행동을 네가 해야 새사람이 자라고 건강해지지  그 행동이 아니면 너는 죽고 망하게 된다. 그것을 여게 가르쳐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내가 처음에 열두 살 먹어서 복음을 길 가다가  들었는데 그때 들을 때에 내 마음에 턱 나오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니 그렇츰 큰 일이 될 수 있을까?' 그게 크다는 것을 마음 가운데, 일으킨  일이 있었는데 그게 뭐일까? 그것을 생각하고, 또 내가 신앙 생활을 시작을  하려고 할 때에 그때에 내가 '나라로 세상에 인류로 뭐 과학으로 어떤 것으로서  커져도 그것은 몇닢푼치 안 되니까 이것 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커진다면 그  이상 더 큰 일이 없겠다.' 그런 생각이 나왔는데 그것을 누가 줬을까? 자기의  어릴 때부터의 것을 반성하면서 반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위인 중에 위인이 자기가 미루어 미루어 어머니 모태 속에  있을 때의 그때 것까지를 반성을 해서 그때 작용한 것을 반성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모르는 줄 알아도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젖먹으면서 젖가슴에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넘어가면서 젖을 먹고 그때에 아버지의 행동, 옆에  형제들의 행동, 어머니의 말한 것이 추상하면 추억하면 낱낱이 기억해 가지고서  세밀히 떠올라서 그것이 정평 정가되는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뱃속  교훈이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품안에다가 안고 젖먹일 때에 그때 교훈이  둘째로 중요하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본능적으로 짓기를 반성성을 그걸 지어 놓은 것입니다.

반성, 또 이렇게 구별하는 그것이 짐승이나 천사에게 없고, 천사는 한번  타락하니까 타락으로 그만 나가 버렸지 그것이 반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성 있게 지은 것이 하나님의 모형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을 살려야 되는데 새사람은 무엇을  먹고사느냐? 새사람은 세 가지만 먹고삽니다. 하나는 성신의 감화만 먹고삽니다.

하나는 진리의 깨달음을 먹고삽니다. 하나는 구별한 행위를 먹고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안한다' 하는 이것은 그가 벌써 양식되는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 죽을 양식을 먹지 안한다 그말이오. 옛사람의 양식을 먹지 안한다.

옛사람의 양식을 다 물리쳤다 하는 그 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 그말은 새사람의  양식의 영감과 진리를 먹고 거게서 나온 대로 움직였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마르지도 안하고 어느 장소 현실에서라도 결실을  맺고 그 모든 행사가 형통하다' 그말은 새사람의 행사가 형통하다 그말이오.

새사람의 행사가 형통하다. 옛사람의 행사는 딱 막혀서 불통이고 새사람의  행사가 형통하다. 구원 이루는 일만 그의 생애에서는 이루어져 가고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간에 우리는 두 쪽발로 걸어가는 둘로만  구별하는 요것을 꼭 잡으십시오. 우리는 둘로만 구별해야 올바른 정평정가를  하게 되지 둘을 벗어나면 우리는 멸망입니다. 둘로만 구별하고 자기의 과거의  어떤 것이라도 반성해서 새김질이 없으면 그는 새김질 없는, 과거를 반성한  새김질 없는, 반성의 개조되는 현실 행동이 아니면 그 행동은 옛사람이 먹고  장성할 것이지 새사람에게는 양식이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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