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의 중요성, 두 신앙, 길가밭

 

1983. 5. 5. 목전집회

 

본문 : 마태복음 13장 1절∼9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함으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오늘 아침에 설교 말씀을 듣고 어떤 분이 와서 의문이 된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서 온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중노릇을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예수님을 믿고 그 사람이 자기가 몇 주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를 만난 지가 한 이십 년  전에, 잘 모르지마는 약 이십 년 전에 늘 자기 여동생이 잘 믿는 사람이라  거기에 와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고 늘 그저 자주 찾아 와 가지고 예배를 보는데  참석했고, 그러나 그 사람이 개종을 선포하지 못하고 늘 그래 있다가 마지막에는  자기 믿는 그 이질한테 와 가지고 자기가 길을 잘못 들었다 하는 것을 많이  후회를 하고 마지막에는 개종을 해서 '나도 이제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고  이제는 주님을 따라서 하늘나라 가겠다'고 그런 말을 하고 떠났다는 그 말을  하면서,  제가 한 말이 구약 성도의 그 신앙 행위가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풀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대속을 하나 예표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가지고 드리라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렇게 신앙 생활을  했지마는 예수님께서 대속의 그 공로를 설정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 모든 행위가 미결에 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하신 후에 비로소  그 행위가 다 살아나고 온전함을 이루었다 하는 고 말을 증거한 끝에 그  중노릇한 그 사람에 대한 말이 있었습니다.

 구약성도의 행위는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미래의 예수님을 상징한, 표현한,  양의 대속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법칙대로 신망하면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영감이나 그런 것은, 구약시대 영감과 신약시대 .영감이 다르지마는 구약시대  성도들의 그 행위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온전함을 이루었다 하는  그 말을 한 고것은 맞습니다. 제가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맞고.

 그 다음에 중노릇한 사람이 하는 그것은 그 사람이 선한 그 행위를 한 그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서 개종을 하면 그 행위가 그때에 살아나 가지고 의가 된다  하는 그 말 그만 비슷하게 돼 버렸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도의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그 명령을 따라서 그와같이 한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동기나 목적이나 방편이나 그런 것은 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적으로 된 것이나 다만 그 대속의 실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미결에 있다가 그것은 그때에 완전한 구속을 입는 것이 그것이 바로 된  것이고 또 그대로 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자던 성인들이 일어난다, 또 히브리서 1  1장에 보면 '우리가 아니면 구약에 이렇게 모든 그 순생한 그런 성도들의 그  의로운 행위가 다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다.' 신약에 예수님과 신약 교회가  비로소 건설됨으로써 구약 교회가 온전함을 이루었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래서 구약 성도의 행위가 그렇게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이룬  그것은 맞고, 그 행위는 동기나 목적이나 방편이 다 하나님 말씀하신 그대로  되어 있고, 다만 예수님의 실상으로 입지 못한 것과 또 하나님과의, 예수님의  대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그 연결에 밀접한 화친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 있다가 그 행위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살아나는 그것은 맞고,  그 중노릇하던 사람 그 사람의 그 행사, 요소, 그 사람의 행한 일의 요소,  행사의 요소는, 그 사람이 아무리 개종해서 예수님을 믿어도 행사의 요소는  그것이 중생되거나 부활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행사를 한 인적 요소, 그  사람의 심신의 그 인적 요소는, 그 사람이 성경을 보고 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사람이 세상에서 세상 도덕이나 수양이나 그런 것을 하느라고 많이 애를 쓰고  그렇게 자기의 심신을 수양해서 연마한 사람이면 그 사람의 요소, 마음의 요소나  또 몸의 요소, 그 기능 요소 그런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 믿기 전에 노력을 해  가지고 이루어 놓은 그것도 죽어 있고 다 사망 아래 있고 다 그것은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지마는 그 사람 자체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서 믿게 될 때에 그 인적  요소, 수양되어 있는 인적 요소는 그것이 믿고 난 다음에 된 것만은 못하지마는  그 인적 요소는 그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모실 때에는 그것이 같이 살아난다 하는  그것을 발표한다는 것이, 그 말이 그것이 좀 내 신앙 사상이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 말이 되어서 본의 아니게 됐습니다.

 그때 내가 말한다고 할 때 말은 다 못 해도 그 사람이 중으로 있으면서도  교회에 늘 나왔고 자기 속에는 번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껍데기는 중노릇을 해도 속에 만일 예수님을 자기가 인정하고 바라보고  예수님에게 대한 그런 신앙심을 가지고 한 행위가 만일 있었다고 하면 고것은  예수님이 없는 사람이나 속에는 예수님이 있어서 하는 그런 때도 된 그런 것은  살아나지 않느냐 한 그런 말을 그때 해석을 다 하지 않고 이랬는데, 어쨌든지  구약 성도의 행위가 아닌 이방인의 불신자의 그 행위는 부활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 행위는 부활하지 못하고 그 행위는 중생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서 갖추어  놓은 자기의 그 심신의 수양된 요소 그것은, 어디까지 수양이 되어 있든지  그것은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그때에 그 사람의 심신의 기능이 되어있는 것만큼  그것은 다 부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의 그 행사, 행위, 행사는 중생함을 입지를 못하고 그 행사를  한 그 사람 자체는 어디까지 수양이 되었든지 그것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같이  생명에 속하는 그런 요소가 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되는 것은 영이 중생됐고, 그 몸과 마음의 요소가 중생함을  입어서 구원얻게 되는 것은 그것은 단번은 아니고 중복적으로 여러번 되기는  되는 것입니다. 여러번 되나 다시 구속함을 입어서 그 심신의 요소가 곧 구속을,  심신의 요소가 구속을 입을 때에는 안 믿을 때의 수양으로 자기의 갖추어 있는  그 심신 그런 것이 다 주님을 구주로 믿으면 그 심신의 요소는 그것이 구속함을  입을 때에는 그것이 다 같이 구속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는 그것도, 중생이라 말 안 해도 그것도 새 생명을 얻는 것인데,  심신의 요소도 새 생명을 얻는 것인데, 심신의 요소가 새 생명을 얻는 것은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고 중복적으로 여러번에 걸쳐서 새 새명으로 속량함을  얻게 되는데, 속량함을 얻을 때에는 그 사람이 안 믿을 때에 어디까지 자기의  심신을 연마해 가지고 있었든지 그것이 생명이 없으니까 죽은 것이었다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영감의 자기가 복종을 해서 하나님에게 소속이 되어서  중복적으로 현실 현실에서 구속을 입을 때에는 그 수양된 인적 요소, 그 심신의  기능 요소는 죽었던 것이 살아난 것처럼 그렇게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런 걸, 그래도 비유한다는 것은 좀 힘들지마는 어린 아이가, 죽어  가지고 있는 아이가 살아난 것과 또 장성한 사람이 죽어 가지고 있다가 살아난  것과 살아나기는 다 같이 살아났지마는 살아 난 후에 아이의 살아난 것은 그만큼  어리고, 또 장성한 자의 살아난 것은 그만큼 장성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방인에게서도 자기의 심신을 수양하고 연마한, 연마해서 되어 있는 그 인적  요소는 예수님의 구속을 입을 때에 그것이 다 같이 구속을 입어서 구원된다 하는  그것을 제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안 믿을 때의 사람들의 그 행위는, 행위 요소, 행사 요소, 행위를 한  그 인적 요소는 구속으로 살아남을 받지마는 그 인적 요소가 행동한, 그 행동한  그 사건, 행동 그런 것은 살아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참 그 질문을 아침에 와서 하는 걸 보고 대단히 기뻤습니다. 기쁜 것은, 내가  그분에게도 말했지마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때에 조그만치라도 옳고  틀림이 있는 그것을 세밀히 알아서 그것을 바로 정확히 알아야 되겠고, 정확히  알아야 되겠고, 또 정확히 안 그것을 이제, 알고난 다음에 정확히 안 대로  실행을 해야 구원이 되기 때문에 정확히 아는 그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 신앙이 첫째로 가는 것인데, 그렇게 들을 때에 아주  구분해서 세밀히 듣는 그런 분들이 참 없는가 해서 이거 이래도 저래도, 그만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그 가르친 성경을 보고,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교리에 관한 것이나 신조에 관한 것이나 또 행위에 관한 그런데 대해서 그것을  똑똑히 구별하지 아니함으로 그만 모두가 다 이렇게 혼잡돼 가지고 있는데, 그런  세밀히 구별하는 그런 분들이 있어서, 제가 설교한 데 대해서 세밀히 구별해서  하나도 틀린 것은 그것을 다 낱낱이 지적해서 말해 줄 수 있는 그런 분들이  우리가 같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게 된 데 대해서 대단히 소망이  생기고 기뻤습니다.

 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뭘 구별하지 못하는가 이랬는데 구별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대단히 제게는 흐뭇하고 만족합니다.

 그것을 그리 아십시오. 행위는, 행위는 부활 못 합니다. 행위는 부활 못 하고,  구약 성도의 그 행위는 인적 요소나 그 행사의 요소 들도 다 그것이 구약  성경대로의 바로 된 것은 다 영생으로 그게 부활하지마는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요소는 그것이 부활할 때에, 중생될 때에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함이, 곧  구속함을 입는 것이 그것이 영이 구속을 입는 것이 중생이요, 영이 구속입은  것을 가리켜서 중생했다 이랬는데, 우리 육도 구속을 입습니다.

 그러면 구속을 입는 그것이 인적 요소는 입고, 그 행사의 요소 그것은 구속을  입지 못한다 하는 고것만 여러분들이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뭐 혹 딴것 무슨  의문된 것 있습니까?  아주 그런 것도 세밀히, 그분은 와서 나한테 들이 대기를 그리 들어 댑니다.

이는 뭐 다른 데에서 말하는 것은 다 냅두고 목사님이 가르치는 그 가르침의  교리와 신조에 이것이 합리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저와 자주 접촉을 안 해도,오래 전부터 이 교훈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가지고 받고 있는, 서로 연구하고 있는 그런 분입니다.

 아침에도 회개에 대해서 우리가 그저 대충, 시간은 짧은 시간이라 그렇게  넉넉지 못하고 충분치 못하지마는 대충 하나님 앞에서 거리껴서 앞으로 회개치  않으면 다 불의 멸망을 받고 이 전쟁 멸망을 받을 수 있는 그 일에 대해서  회개해서, 응급 조처로 전쟁 멸망을 면하는 그런 우리가 방비 노력의 회개를  했습니다.

 이것 또 이 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좀, 아마 이 말은 안 하는게 좋은데,  자꾸 그저 제게는 사명감이 있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저희 서부교회에서는 한 일년 전부터 원수들이, 대적들이 예배당을 불사를  것이다 하는 그런 것을 예상을 하고 예배당을 불사르지 못하도록 경비를 하자  하는 그런 광고를 하고 경비를 해 나왔습니다. (그때 한창 추울 때에 제가  경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새벽 두시쯤 되어서 너무 날이 춥고  이랬기 때문에 많은 고생으로 상함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그런 기도를 하는데,  뜻밖에 나에게 누가복음 13장에 있는 그 실로암 탑이 무너지는 그 사실을 저에게  생각나게 했습니다. 생각도 안 했는데 생각나면서 연해서 저에게 깨달아  느껴지기를 무슨 느낌이 오느냐 하면 아니)  그래 인제 경비를 하는데, 그러다가 그 뒤에 대구에서 예배당, 성당 불탄 것이  세 군데 있었고, 또 서울에 예배당 불탄 것이 바로 얼마동안 그 근경에 가까운  그때 동시에, 한날은 아니지마는 불탄 일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도 세군데가  불이 나서 타고 이랬는데, 그래서 그때 저는 그것만 보고 '아, 이거 뭐 불타지  않도록 단단히 지켜야 된다. 우리가 그 전에부터 지켰는데 과연 불을  태우는구나. 그런 사람들이, 대적들이 불을 사르는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불사뤄지니까 그런 방비를 해서 지키는 것이 좋다 이렇게는 강조해도 다른  생각은 가지지 않고,  그날 밤에는 너무 추워서 그 추운데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제게 왈칵 깨달음이 오는 것이 뭐이냐 그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열 여덟 사람이  치어 죽은 그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줄로  아느냐? 너희들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회개치 아니하면 너희들도 다  그와 같이 다 멸망을 받는다' 하는 그 말씀이 저희에게 나오면서 그때는  이상하게 도 내 마음에 조급하게 강하게 두려움으로써 임했습니다.

 임해서, 이러면 지금 이것은 하나 우리 남한에 있는 교회들이 회개 안 하면  이와 같이 예배당이 다 불사뤄지고 이렇게 큰 박해가 있을 것을 지금 주님은  하나 예표로써 그렇게 예배당이 전국에 여섯 차례나 그때 같은 시기에 이렇게  불사뤄졌는데, 그 예배당 불타는 그것만 생각하고 남한 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이 불에 다 소멸되어 멸망을 받는다는 이것은 네가 생각지 않느냐 하는 그런  감이 내게 느껴져서 마음에 그때 심히 좀 떨리고 조급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성구를 찾아 보려고, 늘 평소에 알아서, 누가복음 13장에 있다  하는 그것을, 제가 평소에 거기에 대해서 설교도 여러번 했고 이러기 때문에  누가복음 13장에 있다 하는 걸 생각하고 13장을 성경을 내 가지고 찾아봤습니다.

암만 읽어도 13장에 안 보입니다. '그거 내가 잘못 기억했는 것 같다' 하고, 그  13장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 외에 다른 데 어디에 있는가 싶어서 이제는  혼돈되어서, 생각이 혼돈되어 가지고 많은 성경을 찾았습니다. 많은 성경을  찾기를 얼마나 찾았느냐? 거의 두 시간을 찾았습니다. 두 시간 뭐 찾아 가지고  이래 성구 사전도 찾고 이래도 안 보이고 두 시간 찾으면서 마음이 조급해서  거기에 대해서 깨닫고 느껴지는 것이 자꾸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남한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인데, 회개하지 않으면  남한 교회 이와같이 불사른다는 것을 하나의 하나님께서 표시로, 표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인데,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그저 불 안탔으면  됐다. 불탔으면, 뭐 그 예배당은 탔으면 탔지 뭐 다른 것 안 탔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지내가고 만다 하는 거기 대해서 심각한 좀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느낄 걸 다 느끼고 난 다음에 새로 누가복음을 이래 주루루  13장을 찾으니까 13장 1절 이하에 그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교회에다가 이 말을 하니까 어디 똑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모양으로 이상스런 사람이 됐습니다. 그만 내가 그 말을 하고 이래  하니까 교인들도 좀 '저 목사님이 안 하던 소리를 한다' 이러면서 좀  이상스럽게도 보고 이랬으나 내게 자꾸 느껴져서 강하게 주장을 하니까 그를  두고 회개하는 그 회개 역사를, 2월 20 일인가 언제인가 누가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때가 2월 20 일날 제가, 목요일날 밤인가 그것을, 목요일날, 금 요일날  새벽에 두시에 그걸 보고 그날 새벽에 못 일어나, 내가 일어나 설교를 하려  하다가 아무래도 새벽만 이래 가지고 안 되겠다. '금요일날 밤에 각처에서  교역자 오니까 그때 증거해야 되겠다' 그러다가, 그때 증거하는 것보다도  '주일날 오전에 모든 교인들이 올 때에 이것을 말해야 되겠다' 그렇게 말해  가지고 그때부터 회개하는 그 회개 운동이 있어서 늘 계속해서 한 달 반, 약 두  달 가량 계속 해서 회개에 대한 설교만 하고, 제가 강단에 서지 못할 때에도  모든 사람들이 회개에 대해서만 이렇게 말하고, 다른 데 사람들이 올 때 에도  회개에 대해서만 설교해 달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계속해서 설교하면서 이런 죄  저런 죄 회개해야 될 그런 죄에 대해서 낱낱이 회개할 조목들을 말해 가지고 약  두달 간 그렇게 회개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나도 거기에 대한 마음도 그렇게 이제는 뜨겁지 않고  회개에 대해서 그렇게 강조하지를 아니 합니다. 그러는데, 여기 와 가지고  여러분들에게도 또 무슨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똑 점치는 자 모양으로 그렇게  그런 걸 자기 속에 느껴졌다고 교회에서 선포를 하고 회개 운동을 하니까 좀  비정상의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을 할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옛날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큰 자나 작은 자나 어떤  자에게 조그만한 그 흔적으로, 마치 엘리야가 산에 가서 볼 때에 저기 조그만한  손바닥만한 구름 조각이 떠올랐지마는 그것이 뒤에 가서 .오래동안, 오래동안  가물었던 그곳에 큰 비가 내린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면 어디로 전하든지  이렇게 미리 알리고 또 그 뒤에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고 하는  그런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저도 그것을 예사롭게 지내지 못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거기에 '일곱 머리 가운데에 하나가 상하였다가, 일곱  머리 중에 하나가 상하였다가 다시 나음을 받았다' 그걸 보고, 세상 사람들은  머리가 상했다가 나은 그것 보고 '이보다 더 큰 자와 강한 자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그를 따르고 그를 이렇게 다 존대하고 이렇게 하고, 또 그 생명에 속한  사람들은 '상했다가 버뜩 회복은 됐지마는, 상한 그 순간에 조그만한 흔적으로  상했지마는 저런 것은 다 상할 것들이다. 아무리 많고 해도 상할 것들이다.

조그만한 흔적을 보고 그것으로써 그와 같은 종류는 다 그와 같이 될 것이요, 그  조그만한 걸 보고 아주 그게 확대해서 보고 거기 대한 회개와 그 대비를 한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오. 그 조금 그런 흔적 보이다가 없어지는 그런 것을 무시하는  그것이 실패할 그런 사람들인 것을 계시록에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내리 보면 누가복음 13장에 거기에 내리보면 6절에 그런  말씀이 또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요 비유를 덧붙여서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에 깨달아지는 것이 이거 우리 한국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오만 노력을 다 구하고 회개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기다렸으나. 회개의 결과가  맺혀지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진노하시나 우리 주님의 그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주님의 영이 이렇게 좀 더 참아 달라 하고 지금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는 그것이 각처에서 지금 무신론주의 유물론주의의 세력들이 일어나 가지고,  오늘이라도 하나님의 교회를 당장 멸할 것같이 그렇게 양 사방에서 그 세력이  강해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는 그런 거름 주는 것이며  열매를 맺도록,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그렇게 재촉하는 일이 아니나 하는 그런  깨달음이 되어서 그것을 가지고 또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가 그때 꿈에 본 것은 아니고 제 속에, 제게 확 감동이 되어서  와 가지고 뜻밖에, 나는 생각지 않았는데 이 성구가 와서 저에게 부딪히면서  내가 많이 두렵고 떨려지고 이래서, 또 그 성구를 찾으려 하다가 성구가 두  시간이나, 내가 몇번이나, 똑똑히 알고 있는데 13장을 찾아 보니까 없어서 그래  또 내게 더 두려움이 오고 마음에 조급하고 이래서 '이거 당장 지금 내일 아침에  새벽기도에 가서 선포를 해야 되겠다.' 이러다가 아무래도 '그럴 게 아니라  금요일날 밤에 선포해야 되겠다. 금요일날 선포해야 되겠다' 하다 또 '주일날  오전에 하자' 이래 가지고 그렇게 했는데,  제 무슨 생각으로, 선입적 관념이나 그런 걸로 오는 그것보다 제 경험으로써는  주님이 설교를 준비할 때나 언제나 그럴 때에나 또 특별한 무슨 사건이 있어서  그것을 방지해야 될 때나 또 그것을 행해야 될 때나 그럴 때에 저에게 느껴지고  깨달아지고 하는 그 경험이 제게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내 선입적 관념을  가지고 내가 늘 생각하는 그 관념으로 된 게 아니고, 뜻밖에 그렇게 와서 저는  느끼기를 하나님께서 그것이 예배당, '집이 짜다라 수십 채도 타는데 예배당  여섯이 탔다고 해 가지고 그게 무슨 별일이겠느냐?' 그렇게 볼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보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이 그것이 보편이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건데,  제게 대해서는 그것이 남한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이 회개를 요구 하시나 실은  회개하지 않으니까 남한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의 불을 쏟으려고 이렇게  하시는데, 하나님이 하는 것을 성령님이 구원 역사의, 성령님의 역사가 금년만  참아 달라고 하는 이 무화가 비유 모양으로 그래 가지고, '거름을 파고 두루  주겠다. 그래도 안 열거든 어떻게 하십시오.' 말한 것 같이, 이렇게 자꾸  주변에서 무신론 공산주의 세력이 자꾸 그 처음에 강성해 오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회개하지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도록, 회개하는 그 회개를  재촉하는 운동이 된다. 회개를 재촉하는 그 운동이 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는 하나님의 역사라 저는 그렇게 꼭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 교인들에게 함께 선포하고 회개의 운동을 하자고  이래 가지고 회개를 하는 것을 약 두달 동안 거기에만 대해서 설교를 해서  나왔고, 또 환난이 올 터이니까 환난을 방비해야 된다는 거개 대해서 제가 자꾸  느껴져서 환난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회개해야 된다는 그것을 한 이년  전부터 해 가지고 그때부터 밤마다 모여 가지고 기도하러 오는 사람은 장부에  명부를 기록해 놓고 오고, 안 온 것을 이렇게 표시를 해 가면서 그것을 해  나오다가, 지금은 표시 안 해도 자기들이 다 할 터이니까, 집에서 기도하든지  어디 가든지 기도를 하면 되고, 또 해야 될 걸 느끼니까 장부에다가, 기도하러  출석하고 안 한 그걸 출석부를 매길 그럴 필요는 없다 해서 지금은 그 일 안  합니다. 얼마동안은 그 일만 하기 위해서 직원을 하나 써 가지고 그만 전적 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 해 나온 것은 한 이년 됐습니다.

 이년 됐고, 또 하루밤에는 갑자기 마음에, 그때는 마음에 아무래도 '이거  위험하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있으니까 위험하다.' 그날 밤에 급하게 연락을  해 가지고 청년들이 나와서 경비를 했습니다.

 경비를 했는데, 경비를 하는 그날 밤인데 새벽 두시쯤 되어서 연락 오기를  '이상한 사람을 잡았습니다.' 우리 예배당 앞에 거기 재목상이 있는데 그 재목상  위에는 함석으로 이래 해 놔서 사람이 걸어다니지 못합니다. 뭐 푹빠질 만한  그런 곳인데, 모인 청년들이, 경비한 청년들이 이러고 있으니까 무엇이 보스락  소리가 한 두시경에 나서 뭐인고 이래 전지를 비춰 보니까 어떤 사람이 옆으로  누워 가지고 딱 숨어 가지고 그래 있어서, '사람이 여기 숨어 있으니까 이것을  지금,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이제, 이게 지금 오늘 저녁에 살인 도급을 맡아  가지고 온 자인지 모른다. 이러니까 이제 이것을 우리끼리 할 것이 아니고  ,경관을 오라해' 경관을 오라해 가지고 빽 돌려 싸려고 보니까 그 옆에 전도관  집을 지금 수축하려고 사용하는 큰 기다란 사다리가 있는데, 그 사다리를  거기에서 먼데까지 들고 와 가지고 거기다 걸쳐놓고 그 지붕에 올라와 가지고  그리 내려오려고 하다가 못 내려오고 붙들렸는데, 나중에 가니까 그 재목상에  뛰어 내려서 경관이나 모두 가 가지고 붙들어서 조사를 하니까 신분증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뭐 거주지도 분명치 않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고 단단히 이래 말했지마는, 우리는  아무리 단단히 그렇게 말하지마는 뭐 다른 사람 들은 그렇게 알 리가 없는  것이고, 그날 밤에 그 사람 술이 꽉 취해 가지고 그래 왔다가 그날 밤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 다 말하는 것이 꼭 제게 대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위신 깎여지고 권위  깎여지고 이거 오해하기 좋을 만한 일이지마는 내게는 사명감에, 나는 내대로  느끼는 것은 사명으로 느껴져서, 남한 교회가 이렇게 백지 부흥 뭐 복음 운동  이렇게만 말을 하고 참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그 진노가  우리 남한 교회에 불로 쏟아진다 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서 이것을 말하는 것이  나도 볼 때에 처음에는, 그때는 강했지마는 지금은 말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열적기도 하고 또 우사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제게 책임감이 있다 하는 그런  사명감에서 이 말을 합니다.

 그때 서울에 있는 순복음교회에서 직원들이, 목사가, 거기에서 책임진 부장  목사가 다섯 분이 오고, 또 그 장로님들이 그때 열 분인가 오고 이래 가지고 열  다섯분이 와서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와 모든 교회를 시찰하고 오전 예배를 볼  때에 그때에 다른 말씀을 증거할 말씀이 있지마는 이 말을 안 하면 안 되겠다  해서 또 이 말을 그때 내가 했습니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저 무슨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이래서,  그 뒤에 소식을 들으니까 가 가지고 직원회를 모았는데, 그 반사 들이 그렇게  열심을 내어서 뭐 일하는 그게 또 기이하고 어디서 그 열심이 나오는지 그걸  아무래도 찾아 내지를 못하겠고, 대우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이런데 목사님의  그 멧세지 듣고는 그런 용기가 나지 아니할 터인데 그 이상하기는 이상하더라  그런 결론이 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도 그 말을 해서 그분들에게 이상스럽다고만 들려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그  말을 하니까 듣는 사람들도 보니까 '저 무슨 말 하는고?' 좀 이상하게 머리를  찌웃찌웃하게 이래 듣는, 그러니까 내게 대해서는 수치 같지마는 부득이  여기서도 그 말을 합니다.

 나는 느끼기를 남한 교회가 회개 안 하면 불바다가 된다. 불로 가지고 전부 다  사뤄서 불바다가 된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 안 하면 불바다 된다. 우리가 회개를  하면 그것들이 다 이제, 공산주의 사상이 다 철거돼 버리고 거기에 있는 모든 그  사상에 붙들린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택한 자들 다 구출할 수 있는 그런 구원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그런 느낌을 가져서 자꾸만 지금, 제가 믿은  이후에 그렇게 회개에 대해서 말 안 하는데 회개에 대한 그런 말을 자꾸 유심히  하게 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 가지고 증거할 때에 그때에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어지니까 요나는 '공연히 니느웨 성에 불도 타도  않는데 가서 말했으니까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 가지고  섭섭하고 불만을 품은 그런 일이 있는 것 처럼, 오늘 우리 남한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회개의 그 관영이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추실 것이고,  우리를 이북에 붙이지 않고 이북을 우리 손에 붙여서 이 복음이 이북까지 가서  모든 사람을 구출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회개치 않으먼 그 불덩어리가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저는 틀림없이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북을 이남에 붙이면 이남 회개가 하나님이 만족하는 회개가 됐다  그렇게 저는 보고, 만일 그렇지 않고 이남에 이 불이 쏟아지면 이것은 이남  교회가 회개를 하지 않아서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다. 이러니까 거기에 뭐  공산주의 원망할 것도 아니고, 누가 우리 국력이 약해 그렇다, 미군이 어떻다,  도움이 약해 그렇다 할 것도 아니고, 다만 거기의 책임은 한국 교회가 회개치  않는 거기에 있다 하는, 고 책임을 고 하나에게만 책임을 지고 미루고 다른 데에  둘 그런 마음을 가지지를 아니합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아마 다른 데에서 오신 목사님들도 많을 터인데, 이제 가시면  남한 교회는 하나님이 제일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요구하고 계시는 것은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 하는  이것보다도 이제 이미 믿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이것이 문제고, 회개를 해서,  회개를 해 가지고 회개하는 사람의 그 사람이 전도되고 그 행위가 전도되고 이래  전도 되지, 그 사람과 행위는 아무런 볼 것이 없이 그래 돼 가지고 말만 가지고  자꾸 이래 하니까 제가 듣는 대로는 가는 곳마다 말하기를 '야 예수쟁이 입만  까가지고 말만 잘하지 그보다 밉상스러운 것은 없다.'  가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니, 우리 남한에서는 무엇보다도 급선무가  회개니까 강단에 서는 목사님들이 한꺼번에 남한 교회가 이 회개를 외쳐 가지고  어쩌든지 자기대로는, 자기 지식이 있는 대로는 그 범위대로 깨달아서 하나님의  법칙에 거리끼는 것, 하나님에게 대해서 거리끼는 그런 것을 회개를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남한 교회에 요구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것이고, 이북에 있는 형제를 구출하는 것이 회개 이것이 유일한 법칙이라 그렇게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입체적으로 이런 면으로써 이북을 구원하는, 또 저 중공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입체적인 그런 구원 방편을 다 쓰기는 쓰지마는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시는 남한 교회에 환난을 방지하는 것과 또 이북에  사로잡혀 있는 그 모든 무신론 유물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는 그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은 예수 믿어라 전도 하는 것보다도 남한에 있는 교회가 회개하는  이것이 하나의 가장 첩경이고 유일한 방편이라 그렇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찬송 194장

 물론 우리가 복음 운동하는 데에는 설교도 그렇겠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전도하는 전도에 대해서도 우리가 힘을 써야 되겠고, 또 우리 교인들의 모든  세상 축복을 받아서 모든 세상 일이 형통하고 세상적으로 성공을 해야 되는 그  일에도 힘을 써야 되겠고, 또 믿는 사람이 이 복음을 중심해서 이런 저런  사업들도 하는 것을 힘을 써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하기를 '그런 것도 하지마는 그것은 그저 하나의 음식의  양념처럼 하고, 회개를 주식으로 해서 회개를, 그저 전적으로 회개를 주  목적으로 지금 주력해야 될 때라.'  그러면, 회개를 이렇게 주력하면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사람들이 벌써  이상해져서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말은 듣기를 싫어하고, 성경에 말한 대로 그  세상에서 잘살 것, 세상에서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산다 하는 이 지상 천국이나  또 세상 잘되는, 사두개교인과 같은 그런 땅의 복음 그런 거나 말하면 사람들이  흥미있어 하고 기분좋아 하고 좋아하지, 회개보다 싫어하는 것이 없습니다.

회개를 아주 싫어합니다. 그러면 회개하라 하면 뭐 잘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마는 그만 사람들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듣기 싫은 것이 회개입니다.

 이러니까 자연히 설교자들도 회개를 잘 안 하고 그저 세상에 이러면 좋다  복받는다 잘된다 해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귀에 듣기 좋아하는 말만 자꾸  해서 땅의 복음은 자꾸 말하고, 또 이제 전도하는 사랑만 자꾸 이래 말하고  이렇지, 회개해야 된다 하는 이 회개에 대해서는 듣는 사람도 듣기 싫어하고,  증거하는 사람들도 증거하는 것이 재미없고 이러니까 그만 차차 차차 회개라  하는 것은 등한해지는데,  지금은 저는 생각하기를 남한 교회는 그 어느 개교회나 교파나 뭐 이나 무슨  사업 운동이나 복음 운동이나 뭐 문서 운동이나, 구제 자선 운동 그런 어떤  운동보다도 한국 교회는 제일 급선무의 중요한 것이 회개인 줄 압니다.

 또 우리가 세계 소식을 잘 듣는 대로 월남에 있는 신자들이나 캄보디아에 있는  신자들이 얼마나 참사를 당했습니까? 참사 당한 그것이, 남의 일은 건너보고 잘  알 수 있는데, 참사 당한 그것이 그분들이 사업을 안 하고 전도를 안 하고 뭐  심방을 안 하고 그렇다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그것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돌이키지 아니해서, 정말로 하나님을 자기 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전적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우 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성도가 있으면,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를 무신자들에게 죽게  만든다고 하면 그것은 순교가 됐을 것이고, 또 하나님은 지금 재림 때가, 재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일을 하지 않을 줄 압니다.

 그러니까 전도 부인들도 듣기 좋은 말 그런 말 하면 뭐 대접도 오고 돈 봉지도  오고 이렇게 하지마는 회개를 돌아다니면서 말하면 그 교회 쫓겨날 것이오. 또  목사들도 회개를 말하면 쫓겨날 것이오. 쫓겨나도 결국은 그 사람이 하나님이  붙드는 사람이오.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고 많은 사람은 그리 깃들 것입니다.

겨자씨 모양으로 아주 미약한 것이지마는 결국 모든 사람은 그리 깃들어집니다.

 6·25때도 보니까, 그때 6·25가 일어나니까 이것 저것 다 팽개쳐 다 파산이  되어 헤쳐지고, 보니까 어떤 지방에, 그 지방에 어떤 교회 교역자한테 그리만,  그리만 피난이라고 전부 교인들이 그리 모아든다는 말 들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회개라 하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바로 회개 안  하면 불속에 내가 타고, 내가 안 타려면 회개해야 된다. 그러니까 불속에 타는  것만큼 힘을 써서 회개해야 된다. 회개 안 하면 불탄다 요것을 요대로 꼭 인식을  하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 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아브라함과 롯에 대해서 세 가지를 회개하자 하는 것을  말했는데, 그 회개가 이제 알기는 알 만큼 알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롯은  거기에서 주장자가 누구나? 주장자가 누구나? 사람이라. 사람을 위주로 해서  사람을 중심으로 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중심 위주로 했고, 하나님을 제일  주로, 그분을 위해서, 그분을 따라서 모든 것 한 것이 아브라함이고, 롯은  하나님은 뒤로 두고 인간을 따라서 한 것이 롯이니까, 개 교회든지 개인이든지  가정이든지 요것 하나만 해도 지금 회개할 것이 많을 줄 압니다. 이것이 안 되면  하나님이 무엇보고 십자가의 대속한 것을 그대로 둘 것입니까?  옛날 하나님을 진노케 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보다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진노케 했고 하나님의 노를 격발케 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사람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제일 분개했소. 왜? 당신이 한 바가 크고,  당신이 거기에 회생한 바가 크고, 또 사랑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제일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이 커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만큼 버릴 때에,  미워할 때는 그만큼 이스라엘을 제일 미워했습니다. 인류 중에 제일 미워한 것이  이스라엘이오. 제일 사랑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어떤지 모르지마는 나로 말하면, 내가 보면 무슨 현실을 당할  때에 하나님보다 저를 앞세우는 그런 행위를 많이 해 나왔습니다. 그런 행위를  해 나왔고, 하나님보다 날 앞세우고, 나보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무슨 범사에 날  남겨두고 하나님 좋도록 해서, 나는 하나님 좋게 하기위해서 있는 자라. 하나님  좋게 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자라. 피로 값주고 구속함을 받았고, 지음을 받을  때도 그렇고 속량함을 받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받고 있고 가르침을 지금도  배우고 있고 하나님께 듣고 있는 것이 그것이니까 '나는 주를 위해서 있는 자라.

나는 주를 위해서 살아도 죽어도 그에게 속하고 그를 위해서 있는 자라' 하는  것을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해도 그저 닥치면 슬그머니 하나님은 뒤로 두고  제가 앞장 나서 가지고 저 좋도록, 저 하고 싶은 대로 이렇게 처리한 내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목사 노릇 수십년 해도, 또 장로 노릇 수  십년 해도 실상 자기의 닥친 현질에서 그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은 주를  대접하고 자기가 주를 위하는 자가 되고 주께 속하지마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큰  낭패되는 그럴 때에는 자기를 앞세우고 주님은 뒤로 두고 그렇게 주님을  섭섭하게 저버리는 그런 일이 많이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이러니까 그 죄를 우리가 깊이 회개합시다. 껍데기로 회개하지 말고, 주님은  우리의 비밀도 아시고 우리의 속도 다 아십니다. 이러니까 속은 그러면서 고걸,  회개 이렇게 말하기 전에는 모르지마는 지금 핑계 못해. 이렇게 말을 해  놨으니까, 말을 해 놨으니까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으니 자기가 현재 이  현실에서 그만 뭐 주님이고 내고 비교할게 뭐 있는가? 그저 주를, 주님 좋게  하는 것이나, 나 좋게 하는 것이냐? 이걸 따지면 그게 나올 터이니까 따질 것 없  이 그저 뭐 이리 해 버려.' 그저 하지 이렇게 해도, 이놈아, 네가 지금 따져  들어가면 그게 네가 너 좋게 하는 것인 줄 알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알고 하면  더 양심에 가책되고 이러니까 모르는 척 버물거리지 그게 너 좋게 하는 것이지  나 좋게 하는 것이냐? 주님은 정죄하고 속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고것을 두고 우리가 회개를 해야 될 것이고, 또 너무 세상에 지금  말이 많고 여론들이 많고 뭐 어떻게 말이 많은지, 저한테도 그만 교회에 돈이  얼마나 많은지 뭐, 편지 한 장 아마 돈이 적어도 몇 백원 들 터인데 그런 것이  하루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쥐뜯어 내 버리기가 힘들어, 뜯어 내버리기가  힘들어. 그것 전부 제가 왕노릇 하려 하는 그것이오.

 사람만 댓이 모아 놓고 난 다음에 '한국 교회 연맹이라, 한국 무슨 운동에 무엇  무엇이 회라, 조합이라' 알아 보면 찍해야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없으면서도 다  그래 가지고 지금 하고 있으니까, 전부 어떻게 하여 자기를 영화롭게 존귀케  할까 하는 이 세대로 지금 마구 가속도로 지금 타락해 가는 이 때에 참  어디서든지 현실에 조심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자기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야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주님은 존귀케 하기를 원하는 이 사람으로  회개하는 자 그자가 소돔 고모라성에 열 명만 있어도 하나님이 참으려 했고,  예루살렘 거리에 한 사람만 있어도 하나님께서 참아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러기 때문에 엘리사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마병이요  불기둥이라 한 것이 엘리야가 국방을 다 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오늘 우리는 작으나 크나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 주신  것이니까, 주격을 네가 바로 세워라. 주님을, 어디서나 아무데서나 무엇에서나  주님을 주격을 세우고 너는 거기에 소속해서 그 은총의 나래 밑에서 살아라.

요것을 구별하는 것이니까, 어디든지, 무슨일에서든지 하나님 생각지 않고 저만  생각하는 그것은 멸망 받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뭐 이제는 자꾸 하도  말해 쌓아 놓으니까, 이것은 멸망 받을 줄 알고 해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마귀가 말하는 것도 주님이 다 그를 통해서 말하는 것인데,  내가 명색 목사고 사경회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말한 것 주님이 나를  퉁해서 말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여기에서 이렇게 주격을 주님으로  세우지 않고 다른 걸 주격으로 세운 것은 주님이 대적해서 다 멸망 시킨다 하는  이것을 자꾸 말하는 것이 주님이 말하게 하신 것인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말이 많은 이 세상에서 보면 무슨 회의를 해도 다수 가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말, 숫자 많은 데로 따라가는, 주님이야 어찌 됐든지 숫자 많은 데로  따라가서 전부 모임이라 하는 그 모임은 종다수로 이래 나가기 때문에 회라 하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샛별같이 시작된 회라도 그 회가 몇해가 지나가면 슬슬  부패해 가지고 이제 타락해 내려가 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왜나? 그 다수가 다  바로 깨달을 수는 없고, 대개 바로 깨닫는 것은 소수이니까, 바로 깨달은 소수는  이거, 바로 깨달은 소수는 뒤로 두고 잘못 깨달은 다수를 따라가니까 그것이  속화될 수밖에 없고 타락할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이렇게 말쟁이가 많고 또 말들이 많은 그 사람들의 의사, 의논,  열변, 웅변, 아주 고상한 논리가 많은 이런 때에 그 모든 것을 헤치고 하나님의  의사가 뭐이냐 하나님의 뜻이 뭐이냐 고것을 하나 찾을라고 애쓴 그자를 주님이  찾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걸 예사로 여길 게 아나라, 롯은 그 중론과 의사를  따라갔고,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거슬리는 길을 가면서도 주님의 의사를  하나 찾아 가지고 따라가려고 애쓴 그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또 롯은 보이는, 눈으로 보이는 조건 좋은 것. 또 자기네들의 조브라운 생각에  이래야 좋겠다 하는 자기네들의 그 의사의 범위 내에서 그 조건 좋은 것 그런 걸  택해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은 번연히 못 받는 것이오. 하나님이 축복할 리가  없는 것이지만 축복 그까짓 것 있으나 마나 하고 가견적인 이 모든 조건 거기에  중점을 두고 다룬 것이 롯입니다.

 그 롯이, 그런 사람이 그렇게 걸은 것이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두  노선을 보여 주기 위해서 영원 전 롯도 예정했고 아브라함도 예정해 가지고 때가  되니까 그 두 대립적인 노선을 걸려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라 그 말이오.

이것이 다 우리에게 구원 도리의 계시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형편 좋은 것, 형편 좋기를 위해서, 그걸 위주로  해서 우리가 모든 일을 취급해 나가는 그런 것을 회개를 하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야 된다. 하나님이 되게 해주셔야 된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된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된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된다,  이것만 되면 당신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말이요, 악한 자라도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지'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죄를 짓는 말 사람들이 안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 줄 안다 그 말이오. 아무리 신앙에 무식해도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줄 알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축복이 제일이라 은혜가 제일이라,  축복 없으면 안된다 이래 가지고 축복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매였고,  또 의사도 하나님 의사를 따르지 않으면, 인간 의사 따르면 인간 의사 다  빼앗긴다 하나님 의사 따르면 이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다.

 또 주격을 하나님으로 주격을 세우면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자신이 다 성화가  돼 가지고 이렇게 성자 성녀들이 된다. 하나님을 주격으로 세우지 않고 자기는  어떤 인간을 주격으로 세우면 마귀가 와 가지고 그 심령이 전부 변질이 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나 욕심하는 것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방편이나 그 모든 게 전부 정 꺼꾸로 되어 버리고 만다 하는 요것을 알아 가지고  하나님을 주격으로, 하나님의 의사를, 하나님의 축복을, 이 셋을 찾는 사람이  되어서 오면, 그래도 이 셋을 찾아, 모든 소망이 주께 있으니까, 주님은 참되신  분인 걸 자기가 아니까 소망이 주께 있으니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거스린 일을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 행위가 옳아지고 발라지고  깨끗해집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회개하도록 하고,  여기에 씨 뿌리는 비유에 거기에 옥토에 뿌린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맺는다. 이것은 좀 궁백한 그런 해석이 될런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깨닫고 있습니다.

 백배라 하는 것은 인간 수인데, 인간의 만수가 십이 만수이기 때문에 거기에  만수를 가하면 백이 되고, 포 마귀의 수는 육 수로써, 성경에 육십 육 그것은  마귀의 수라 하는 것을 그것을 성경에 가르쳐 놨기 때문에 그 육 수에다가  십배를 하면 육십이 되고, 하나님은 셋이 하나님의 수라고 이렇게 성경에 그렇게  해 놓은 데도, 셋이 하나님의 수라 말하지는 아니해도 하나님의 수를 표시할  때에 삼으로 표시하고, 마귀수를 표시할 때에 육으로 표시하고, 인간 수를  표시할 때에 십으로 표시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수를 일곱으로 표시 할 때도  있고.

 이러니까 백배를 결실한다 하는 그것은 우리 신앙 생활이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가 하는 일은 사람에게 대한 일인데 사람에게 대해서 후회 없는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성공 중에 하나요, 그 다음에는 또 악령에게  대해서 우리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그것이 우리 신앙 성공의 하나요,  하나님에게 대해서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그것이 신앙 성공의 하나라.

 하나님께 관계는 전부가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의 것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폭 싸여서, 하나님으로 전신갑주를 입어서, 하나님 수에 폭  싸이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고,  인간에게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렇게 전파해서, 이제 그는 알든지  모르든지 자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전 인류에게 대해서 뒤에 원망이나  불평이나 부끄럽지 않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대한 이 구속  역사의 자기로서, 모든 사람에게는 그저 개적으로 만나든지 무슨 급할 때  만나든지 사건 하나를 서로 관계를 하든지 금전 여수 거래를 하든지 어쨌든지  우리는 구속 중심을 해 가지고 그 사람에게 구속을 주줬고, 신앙을 도와 줬고,  은혜를 줘서 그 영의 심령, 심령의 양식을 준 그것이 인간에게 대해서 올바른  성공이 아니냐?  그렇게 마귀에게 대해서는, 마귀에게 대해서는 마귀를, 마귀에게 대해서는  마귀에게 하나도 거기에 미혹받지 않고, 하나도 굴복하지 않고, 또 하나도  거기에 패전하지 않고 완전히, 거기에 대해서는 미혹도 받지 않고, 굴복도 하지  않고, 그것을 완전히 승리하는 그것이 마귀에게 대해서는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나 그렇게 저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하느니라 하는 그 세  결실은 저는 그렇게 해석을 하고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강하게 그렇게 주장을 하지 않으나 나는 그렇게 깨닫는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어쨌든지, 그렇게 깨닫든지 달리 깨닫든지 성경에 보면  '옥토에 뿌린 씨는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을 하느니라' 했으니까, 백배  육십배 삼십배 그 이상 좋은 게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이상 좋은 게 없고 그것은 참 좋은 것이라.

 그것은 참 성공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판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옥토에 뿌린  씨는 이렇게 된다.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결실이 된다. 이는 참 이제 성공한다  하는 그 말 아닙니까? 그것은 뭐 그 이상 더 잘 될 수 없이 제일 잘된다 하는 그  말인 것은 사실입니다. 되는 것이 뭐 사람에게 대해서 만점, 마귀에게 대해서  만점, 하나님에게 대해서 만점 그렇게 해석을 안 한다 할지라도 어디든지 신앙  생활로써 완전 성공이라 하는 그것으로써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완전 성공을 하려고 하면 옥토에 뿌린 씨가 되어야 되는데,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고 하면 돌짝밭이 없어야 되겠고, 또 길가밭이 없어야 되겠고, 가시덤불이  없어야 되겠고 이 셋이 없어야, 이 셋을, 어쨌든지 길바닥, 단단한 길바닥  이것을, 단단한 길바닥 이것을 개간해서 물씬 물씬해야 되고, (저  집사님  밤으로 안 자는가? 자꾸 와서 뭣 때문에 자고 있어? 자려면 저 뒤에 구석에 가서  자든지 하지. 그냥 그게 안 들리는 모양이라.)  우리가 옥토에 뿌린 씨가 되어야 우리 신앙 성공을 하는데, 옥토에 뿌린 씨가  되려고 하면 첫째는 길바닥의 단단한 그것이 없어야 되겠고, 그걸 어쩌든지  처리를 해야 되겠고, 또 새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고 해석을 했으니까 이 새의  해를 받지 않아야 되겠고, 또 악한 자가 와서 빼앗아 간다 했으니까 악한 자의  해를 받지 않아야 되겠고.

 그러면 셋, 또 돌짝밭에 뿌린 씨는 돌, 씨가 뿌리를 박을 때에 뿌리 박지  못하게 하는 돌 그놈만 빼 던져 버리면 되겠고, 또 덤불 위에 뿌린 씨는 덤불  그것만 다 캐내 던져 버리면 되겠고 이제 몇 가지입니까? 다섯 가지.

 다섯 가지인데 덤불을 해석하기를 덤불을 해석하기를 세상 염려와 재리라  이렇게 주님이 해석을 했고, 돌짝밭에 뿌린 씨는 이제 핍박과 환난이 오면 안  된다, 다 말라버린다 아랬으니까 이제 이것들을 우리가 다 능가할 수 있는  복음으로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니까 뭐 우리가 자꾸 말 구경만 하려고, 자꾸 말만 들어서 자꾸, '보자'  아이들이 꼭 영화 구경 할 때에, 영화 구경하면서 또 새것이 뭐 나와야 재미가  있지 옛것은 재미 없는 모양으로, 이제 자꾸 무엇인가 새것만 말하면 좋아하고  새것 나오기 원하나 지금은 새것 그것보다도 이 하나만 가지고라도 실행을 해서,  실행을 해서 그 껍데기 속에 알맹이, 껍데기 속에 알맹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를 만나서,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된 그 혜택과 능력이 우리에게 건너 와서  역사해야 되는 그걸 우리가 받아야 되는 것이지 자꾸 구경만 하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길바닥 씨를 면해야 되는데 길바닥 그것이 단단하니까 천국 말씀을 받으나 그  사람 속에-이거 비유입니다. -길바닥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해. 길바닥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니까 그 씨를 새들이 와서 다 주워 먹어 버렸다 말이오.

이러니까 길바닥을 뚫고 들어갈 만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헛일됐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길바닥은 뭘 가르쳐 말한 건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그것이  길바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꾸 왕래를 해서 다져진 것이라 그것이오.

 이러니까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수많은 문화 건설, 수많은 유사 종교, 수많은  인간들의 모든 그 사상, 또 주의, 지식, 이 모든 뭐 과학, 이런 것 전부 다  이것이 한말로 말하면 세상인데, 너무 시달리고 세상에 많이 침로를 당해서,  많은 세상에 접촉해서 속화가 되어져 가지고 있어 참 하나님 말씀은 암만 들어도  이 말씀이 자기 속에서, 자기 속에서 옥토같이 이 말씀이 조금도 제재받지 않고  이 말씀이 그 자기라는 자기를 이 말씀이 온전히 삼켜서 자기라는 자기는 이  말씀에 완전히 바쳐져서 이 말씀이 자기에게, 이 말씀이 자기를 완전히 잡아  먹고 자기는 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 이 말씀에 삼켜져서 이 말씀에 이용되고, 이  말씀에게 다스림 받고, 이 말씀에게 지배받고, 이 말씀에게 이제 주장 받는 이런  자기가 되기까지 깨달아 지지를 않는 이것이 뭐이냐? 길바닥에 뿌리운 씨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면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럴 때에 이  말씀이 세상이 말하는 모든, 한 말로 말하면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꿰뚫고 들어가서, 어쨌든지 내 깨달음이 말이오. 천국 말씀을 듣든지 보든지  읽을 때에 이 천국 말씀에,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이 나를 깨닫게 해 주시는  이 깨달음이, 깨달음이 어디까지 가야 되겠느냐?  옥토가 되기까지 가야 되니까 깨달음이, 옥토는 좀 범위가 넓기 때문에, 옥토는  그 씨가 흙에 있는 양분을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는  그것이 옥토이고, 그러니까 그 씨가 잘 자라 가지고 백배 육십배 삼십배가  맺어진다 그 말이오.

 이제 이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이 복음을 깨달은 깨달음이, 깨달은 깨달음이,  깨달은 깨달음이 자기의 전신이 이 천국 복음의 깨달은 깨달음의 것이 돼  가지고, 이 깨달은 진리가 자기를 완전히 자유하고 삼켜서, 자기는 깨달은 이  깨달음의 완전히 것이 돼 가지고 깨달음에게 꼼짝 못하고 깨달음이 죽으라먼  죽고 살라면 살고, 이 깨달음의 것이 돼 가지고 깨달음에게 다 삼켜질 수 있을  만한 이만한 깨달음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돌짝밭을 면한 것이니까 그것이 쉽게  됩니까?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그걸 이번에 그렇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렇게  깨달아지느냐? 깨달아지려고 이 모든, 다시 말하면 내가 들은 바의 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달은 것이 온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된다 그 말이오. 온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된다 이거요. 온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되고, 세상 문화를 다 이길  수 있어야 되고, 이 세상 과학을 다 이길 수 있어야 되고, 세상 인간들의,  수많은 인간들의 지식과 그 모든 것들을 다 이길 수 있는 그 깨달음을 가져야  자기가 결실이 있지 이길 만한 그런 깨달음을 가지지 못하면 다 그것들에게 밥이  되고 그것들에게 다 삼켜지고 만다 그 말이오.

 이런 깨달음을 가지려고 애를 써도, 애를 써도 안 되는데, 어려울 것인데, 이걸  깨달음을 가져야 된다는 걸 느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 이런 깨달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가져야 됩니까? 내치 지금 공부했으니까 한 번 물어 봅시다.

 이 씨가 땅 속에 심겨서 그 뿌리가 박혀서 땅에 있는 지기를 다 빨아먹는, 그  지기라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인데, 다시 말하면 자기인데, 또 단단해진 그것은,  단단해진 것은 세상이 단단하게 했는데, 세상을 꿰뚫어 가지고, 과거에는 자기가  세상에게 삼켜겼지마는 이제는 깨달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완전히 삼켜서  자유가 없어. 이 말씀이 먹고 싶으면 먹고, 이 말씀이 있으라 하면 있고, 가라  하면 가고, 갇히라 하면 갇히고, 꼼짝 못 하고 이 말씀의 것이 됐다 그 말이오.

 이런 깨달음을 가져야 이제 길바닥을 면하게 되는 것인데, 그렇게 깨달음을  가지는 방편을 요번에 우리가 말을 했더라 그거요. 깨달은 방편을, 그게 뭐 쉽게  예사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방편을 우리가 연구하다가 말을 했는데,  그렇게 세상을 다 꿰뚫고, 세상을 다 벗어 버리고, 내가 세상을 벗어버리고,  세상에 속한 내가 세상을 버려 가지고 이제 깨달은 이 말씀의 것이 되어지는, 이  말씀의 것이 되어지는 데까지 깨닫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그 깨달음이  되어지는가 하는 것을 그것을 자 여기에 교역자들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좋은 법이 있습니까? 좋은 법이 있소? 여기 한 번 대답해  봐요. 여기 여반에서 백점 했어. 여반에서 백점 했어. 교역 자들은 백지  껍데기라. 여기에서 백점 했어.

 비교해 가지고 정평 정가가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이오. 무슨 비교요?  알기가 쉽지. 말씀과 말씀을 비교해 가지고 정평 정가, 말씀과 말씀을 둘을  비교해 가지고 땅위에 있는 모든 문화의 말, 모든 세상 지식, 이 모은 지식의  모든 말과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과 이 말과 말을 둘을 비교해 보면, 비교해  보면, 비교해서 그 말씀이나, 공자가 한 말씀이나 또 석가모니가 한 말씀이나 그  말씀이나 다 같은 말씀이라 이렇게 평가한 그 평가가 맞습니까? 그 평가가  틀렸습니다.

 이제 그 말을 이번에 수십번 했다 말이오. 수십번. 우리에게 주신 천국 말씀 이  말씀은, 이 말씀은 인격자 아니오. 이 말씀은 하나의 능력 가진 이치입니다.

능력 가진 이치요. 능력을 가진 진리인데, 이 말씀은 어떤 일을 과거에 했는고  하니 없는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을 지으실 때에 이 말씀에게 청부를  줘서 이 말씀에게 지으라 할 때에 이 말씀이 그를 다 지었습니다. 말씀은 무인격  존재이나 신격인 생존 하신 하나님이 말씀을 척 던질 때에 이 말씀이 가서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 그 말이오.

 이 말씀은 모든 인류와 만물을 창조한 능력을 가지신, 창조의 능력 가진  말씀이오. 이 말씀이 재차 우리에게 지금 천국 말씀으로 온 것은 뭐입니까?  진동되고 변동될 일차 창조, 우주 영계, 이런 것 창조한, 이 말씀이 이차적으로  온 것은 이제는 진동되지 아니할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는, 이제 알파와 오메가의 나라 영원 불변 영생 영존의  세계를, 그런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처음의 일이 큰 일입니까, 뒤에 일이 큰 일입니까? 처음 일이 큰  일이오, 뒤의 일이 큰일이오? 결과가, 결말이. 어디입니까? 뒤에 일이지. 처음의  것은 준비의 요소요 뒤의 것은 완성이라 그 말이오. 이 말씀과, 이 말씀과  인간들이 지글거린 수많은 박사, 학사, 종교 창설자, 도덕가, 사상가, 오만  과학자, 모든 인간들의 말을 똘똘 뭉쳐서 말할 때에 이 중량과 하나님 말씀과의  중량과 이 중량을 비교해서 그 중량의 가치를 정가 정평할 수 있는, 정평해서  정가할 수 있는, 이것을 정평 정가하는 이 깨달음을 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도 길바닥에 지금 있는, 길바닥과 같은 인간이라 그 말이오.

 이거 뭐 쉽습니까? 대번에 그리 되는 줄 압니까? 안돼요. 이래 가지고 자꾸 이  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식인 이 말씀과 인간의 지식과 이것과 다 같은  말인 줄 알아. 이러니까 설교하는 사람도 성경 말씀은 다 아는 것이니까, 성경  말씀은 다 아는 것이니까 그것을 말해 가지고, '뭐 한글만 아는 사람도 다 아는  것인데 그것만 말 해 가지고는 사람들이 그리 유명하게 안 여기니까 이제  그것보다도 그 사람들이 모르는 걸 말해야 되겠다.' 그 사람들이 모르는 걸  말하니까 저 외국말로 해 놓은 무슨, 외국말로 해 놓은 그런 걸 말해야 되겠고,  또 이런 사람 듣지 못한 어떤 유명한 인간말 해야 되겠고,  그래 말하면 이 말은 귀하다고 이 말을 들어서 이 말 하나만 하면 내일 주일은  지금 팔아먹고 인기 끌 수 있다 이렇게들 생각하고 있으 니, 말과 말의 가치와  능력을 이것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가 강단에 서 설교를 하니까 그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 생명 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 말이오.

 이것을 비교하는 이게 있어야 된다 그 말이오. 그래 가지고 교인들도 아 그  사람 만날 말해야 성경밖에는 말 못 하는 것. 그 무식한 것 아이구 자꾸 듣기  싫은 것. 우리는 전부 요번에 어학도 많이 알고 또 이 세계 여기 저기 있는  소식도 잘 알고 그런 걸 또 말하는 그런 유식한 사람 데리고 오자. 데려다가 그  사람이 와 가지고 '아, 뭐 천문학은 이렇고, 지질학은 이렇고 무엇은 어떻고  어떻고' 이러니까 '야 유식하다 참 됐다' 이 바보야 그 말과 하나님 말씀이  같으냐? 이 바보야 여기 대해서 증오심이 와야 됩니다. 미워해야 된다 말이오.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인간들이 말해 놓은 말, 이 말씀이 지은 그것들이,  이 말씀에 지음 받은 것들이 지금 무슨 책임하게 말한 게 무슨 책임이 있소?  그들이 말한 대로 됩니까? 마지막에 그것, 모순 지식은 다 폐해지고 마지막에는  이 말씀에 연결되지 아니한 것은 다 유황불 구렁텅이 아닙니까? 무슨 책임있소?  무슨 권위가 있소?  뭐 이 말을 암만 해도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못 듣는다 그 말이오. 양심이 없는  자는 못 들어. 양심이 있는 자가 자세히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 말씀과 이 세상  말이 다르지마는 그것을 그렇게 여기지를 않는다 말이오. 또 말한 이와 말한, 이  말한, 이 세상에서 말한 자, 모두 이거 말하고 이거 누가 말하고 누가 말한  그자와 우리에게 천국 말씀을 말한 것은 누가 했습니까?  좋은 씨를 심는 것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인자라 그렇게 말했소. 13장  비유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은 하신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까,  인간이 기록했지마는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이 말씀했다 그 말이오. 배암 말도  하나님이 배암 말을 '이것은 배암 말이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해 줬다 그  말이오. 말씀하신 이 분과 말하는 인간과 이것을 비교해서 정평해 가지고 정가할  줄을 알아야 될 터인데, 아무리 무슨 말해도, '아 그래 그것은 우리 주님에게  지음 받은 인간의 말이로구만. 아, 이 말은 모든 것을 창조한 능력, 창조의  능력을 가진 능력있는 말씀이로구나. 아, 이 말씀 하신 분은 영원 자존자,  대주재이신 창조주, 주권자, 영존자, 완전자 이 분이로구나.' 이것을 우리가  자꾸 느껴서 자꾸 알아야 된다 그 말이오.

 이것을 알고 여기에 대해서 애타하고 이 둘을 비교해야 된다는 이 비교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이오. 이래서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이오. 뭐 이거 하지 않고  우선 사람에게 팔아 가지고 교인들, 어리석은 교인들이나 꾀워서, 교인들에게  감동을 줘 가지고, 교인들 요리 꾀우고 조리 꾀워 가지고 뭐 교인들에게 있는  무엇이나 뺏들어 가지고 젖이나 빨아 먹고 이제 이래 가지고 하는, 네가  돌아다니면서 이리 저리 얻어 가지고 배나 지옥의 자식을 만든다. 또 만나면  대접받기 위해서 오만 청산 유수의 해당도 되지도 않는 축복을 막 밀어재낍니다.

그 축복이 전부 저주인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빌지 않는 축복을 제가 제  마음대로, 제가 뭐 복의 주인인가!  오늘에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의 지식의, 인간의 모든 말과 하나님의  말씀과 이 둘을 비교해서 그 권위를 바로 정평 정가 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말이나 이 말씀이나 다 같이 여겨 가지고 하는,  마귀가 이렇게 범벅을 시켜 놓은 이것을 갈라낼 종이 누구나?' 이것을 당신이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돌아가 가지고 그저 밥을 굶든지 먹든지, 뭐 전부 하는 것이  보면 귀신 노름이라. '요래야 내가 유명하나 조리 해야 유명하나?' 심지어  사십일 단식 기도한다고 하면 자기에게 오만 것, 영양제 하루 한 개씩만 먹으면  아무일 없대요. 나는 모르지마는 미국서는 어떤 의사가 하루 한 개씩만 먹으면  그것은 일년이고 십년이고 살 수 있는데.

 그러면 창자가 차차차 오그라 붙어서 그게 나중에 문제라서 하다가 말았다  하는데, 그거야 속으로는 다 먹으면서 그래 가지고 사십 일 기도하고 나면  사십일 기도 그걸 팔아먹고 돌아 다니면서, 사십 일 사천년을 기도했으면 무슨  소용이 있다 말이오.

 전부 명예주의 영광주의, 자기를 어떻게 영화롭게 하며 사치스럽게, 자기를  어떻게 빛나고 모든 사람이 다 알아주도록 이래 꾸미고, 전부 자기 꾸미는  노름이라. 우리가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 안 하면, 회개 안 하면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자만 두고 회개 안 하는 자는 다 뜨금 뜨금 다 망할 것이오. '천인  만인이 네 곁에 엎드러지나 회개하는 자는 절대로 상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하나는 지극히 크신 자존자시요, 모든 것의 원인이 된 자시요, 주님은  원인이 없어. 자존이라. 자존이라 말은 원인이 없다 말이오. 뭘로 말미암아  생겼느냐? 자기가 스스로 계셨소. 자기 위에 무엇이 있어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자존자 그분이 인제 모든 것을 존재케 했어. 창조주라.

 그런고로 우리는 말씀을 할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되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언제든지 증거하지마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주님이 이제 '오늘  주일에는 네가 이 말을 전해라' 당신이 전하라는 말씀이 어느 말씀인지 이제  장소도 있고 시간도 있고 있으니까 '오늘은 당신이 어느 성경을 전하라 하는고'  하는 이것을 찾는 것이 힘이 들고, 그것을 찾는 게, 아마 설교하는 사람 다 그럴  거라.

 '오늘은 주님이 무슨 말씀을 전하라 하는고? 주님이여' 성경은 이 성구라도  설교하면 설교 할 수 있고, 저 성구라도 설교 할 수 있지마는 그렇게 성구를  제가 제 마음대로 선택한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두려워서 제 마음대로  선택을 못 해.

 그래도 선택하다가 자기에게 '아! 이거라 하고 나가너가 아!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 그게 뭐인가 자기에게 그래도 주님이 선택해 줬다는 그것을 자기대로는  인정은 될 수 있는 그 선택을 받아야 그 설교를 해서 안심이 되지 그게 아니고  아무나따나 성경만 자꾸 말하는 그것은 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집회할 때에 오늘은 무슨 성경을 공부하자 이래도 그 성경대로  1장 2장 3장 자꾸 나가면 뭐 힘들겠소? 선택하는 데 힘듭니다. 그래도 바로  선택이 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지마는 선택해서 하나님이 전하라 하는 그 성구가  어느 것인가 그것 찾는 데 골이 빠져. 그것만 찾아놓으면 다 됐어.

 이러니까, 길바닥을 우리가 꿰뚫고 들어가는 방편은 길바닥 되게한, 길바닥은  누가 길바닥 되게 했습니까? 길바닥은 무엇이 들어 길바닥 되게 했지요? 둘이  들어 길바닥 되게 했는데 무엇이 들어 길바닥 되게 했소? 세상 사람들, 또  하나는 그 말들. 말이, 말이 지식이 고 지식이 말입니다. 말들, 그 둘이 그랬기  때문에 이 둘을 꿰뚫어야 되겠다 그 말이오. 이 둘을 꿰뚫어, 말을 꿰뚫어서  이것은, 이 껍데기 말을 이 말씀이 창조한, 창조 받은 그것들이 말한 말이오.

 이 말씀은 그 말한 이것들과 말한 그것들을 창조한 능력의 말씀이라 해서  그것들을 헤치고 짓밟고 꿰뚫고 쑥 들어가 버리면 이것은 뭐이 나 하면 단단한  길바닥을 파고 들어가는데 개간된 것이라 그 말이오. 말한 이를.

 그러기에 세상에서 경험이 많고, 또 많은 공부를 하고, 어제도 먼저 말하기를  세상에 오래 산 사람들 오래 산 사람들, 또 광문 다학 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그 인품과 심령이 길바닥이 돼 가지고 있다. 오래 살수록 오래 많이  다져 가지고 있다. 이 말 했는데, 그런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배운, 인간의  배운 모든 지식,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 지식 이 둘을 구별해 가지고 인간의  지식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 이것을 창조해서 창조함을 받은 것들이  지걸거리는 지식이요, 이 말씀은 그런 것들을 창조한 지식이라.

 이렇게 차원이 다른, 다른 이 사실을 자기가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은  자기 지식으로 죽었습니다. 자기의 세상 경험과 체험으로 죽었습니다. 그걸  꿰뚫지 않으면 이 복음이 자기에게 옥토에 뿌린 씨로 역사하지 못하는 이게 죽고  망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가슴 아피 생각지를 않는다 그 말이오.

 다시 주님이 그 다음에 해석을 해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다진 그 사람들과 또 세상 지식들이요 이 모든 세상  역사들인데, 뚫고 가지 못하게 해놓고 또 이것을 빼앗아가는 자가 누구나? 집어  삼켜버린 자가 누구나? 그게 새떼라 그 말이오. 그게 악한 자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이 말씀을 가지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들에게 빼앗긴다.

새떼에게 빼앗긴다. 우리가 거기에 빼앗기지 아니할 자가 되어지는 것은 땅 속에  파묻혀야 되고, 이 다음 말해도 말하는 그게 천명이나 만명이나 억만명이나  억천년 동안 말했거나 어쩌든지 그것은 악한 자라. 악한 자라 말은 무슨 말이오?  자기 중심, 주인은 따로 있는데 전부 제가 주장입니다. 그게 뭐입니까? 그게  다른 이름으로 뭐요. 그게 그 뭐 다른 이름으로 뭐이오? 여기에는 원죄라 하는데  여기에는 원죄라 말을 대답을 못하네. 그게 원죄입니다.

 바로 원죄.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선악을 정의 내릴  때에, 선악을 규정을 지울 때에 하나님이 당신 중심으로 규정지우는 것처럼,  이제 선악과 먹은 이후에는 인간이 선악 규정을 제 중심으로 선악 규정을  지우니까 그게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에덴 동산에서 다 쫓아 내버리고 그것  때문에 다 죽었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전부 망령부리는 망령된, 자기 중심이 되지  않고, 자기가 주격도 되지 않고 어찌 자기 중심이 되겠소? 하나님만이  자존하셨기 때문에 자기 중심이 될 수 있고, 또 그 분만이 온전하기 때문에 될  수 있고, 그분이 모든 걸 창조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해서는 할 수 있지마는  우리는 자존자도 아니요 독존 할 수도 없는 자요. 또 아무것도 권리 없는 자라.

오늘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이제 병들라 하면 병들고 아무 털끝만한  주권도 없는 것이 있는 척 하지마는 실상 주권이 하나도 없어. 주권 있으면 제일  소원하는 것 늙기 싫은 걸 다 낱낱이 그럴 것인데 주권이 없기 때문에 늙는다 그  말이오. 주권이 없기 때문에 죽는다 그 말이오.

 이런데 건방지게 제가 주장이 돼 가지고 자주장으로, 자기 중심으로, 자기  중심으로 안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됩니까? 진리의 사람, 성령의 사람들이 아니면  없습니다. 이러니까 다 자기 중심의 자들이 징얼거리는 것이니까 자기 중심의  자들이 와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이래 하니까, 그것에게 위협당할  게 있소, 부러울 것이 있소, 두려울 것이 있소, 그게 볼 게 뭐 있소?  그것이, 하나님에게 지음받은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살 것인데 하나님  중심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하니까 비참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으니까 이제  죽어.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누가 부러워하겠소? 불쌍하고 가련하게  생각하지. 그저 자기 중심자를 불쌍하고 가련하게 볼 줄 모르고 그것이 부럽거나  두렵거나 크게 여기는 자는 눈이 먼 자입니다. 그것은 소경이요 눈이 없는  자입니다.

 또 새떼라고 한 것이 뭐입니까? 새떼, 새떼라고 비유한 것은 그것은 박힌 데가  없소. 인간이 하나님에게 속해야 되고, 하나님과 연결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는, 죽음이 하나님과 떨어진 게 죽음 아닙니까? 이런데 끈 떨어진  두레박 모양으로 아무데도 속한 자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의 날에는  제재가 하나도 없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가 이제 지옥 가 버리고 마는 그  자이니까 아무 붙들어 줄 자도 없고 책임진 자도 없고, 도와 줄 자도 없고,  지켜줄 자도 없고, 책임진 자가 없지. 붙들어 줄 자가 없지. 어디든지 매인 데가  없지. 어디 하나도 불변의 완전성에 연결된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자이니 그  자를 부러워 할 것 뭐 있으며 두려워할 것 뭐 있으며 높이 평가할 것이 뭐있느냐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요 길바닥에 뿌린씨 요거 하나를 가지고 자기는 돌아가서  새기고 새기고 하면 거기에, 너희들에게 뭐이 떠오르기까지?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이 말씀을 사모하는 것이 가하니라.' 샛별은 뭐입니까? 해오기  전에 그런 거 아닙니까? 그것이 주님의 길잡이요 소개자라 그말이오. 그게  뭐입니까? 성신의 감화요. 영감. 네가 이 말씀을 자꾸 사모하고 사모하면 성신의  감화가 너에게 와 가지고, 성신의 은총이 와서 너를 지키시고 붙드신다 그  말입니다. 자꾸 새기면 되는데 자꾸 듣고 지나가 버리니까 제가 다른 말씀 증거  하려 하니까 하나님이 허락지 않아. '이 말을 네가 자꾸 가르치라.'

 오전에는 길바닥에 뿌린 씨를 우리가 배웠습니다. 단단히 배워서, 그러면  길바닥에 뿌린 씨, 새떼, 악한 자에게 이 진리를 빼앗기지 아니하고 이 진리가  내 전체를 다 삼켜서 내 전체가 옥토가 되어서, 이 심은 바의 진리가 나를 다  삼켜서 얼마든지 무성하게 자라서 결실이 백배, 인간에게 대해서 영원히 후회할  것이 없고,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간에게 대해서 완전 행위, 마귀에게 대해서도  하나도 실수 없고 그에게 대해서 할 일을 단단히 딱딱 다해서 주님이 마귀에게  대해서 할 일 다하시는 것처럼 이렇게 완전 행위 하나님에게 대해서 완전 행위  이 행위를 하려면 길바닥에 뚫고 들어가야 되고, 새떼와 또 이 악한 자를 이것을  뭐인지 알아 가지고 그것을 불어 버려야 된다 말이오. 훅 불어 버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만 그 앞에 머리 숙이고 야단들입니다.

 이러니까, 믿는 사람들도 보면 '성경 말씀 이것 가지고야, 이것만 가지고 어찌  내가 목회를 할 수가 있노.' 얼마나 멸시입니까? '철학을 좀 공부를 해야 뭐 그  목회를 하지. 성경만 가르치면 재미가 없지. 뭐 이 세상에 다른 인간 말을  말해야 보배를 들었다. 이걸 말해야 유식하지. 그게 전부 제가 유식하다고 제  자랑하려 하는 그 악한 자이지, 사람이 하나님 말씀 외에 사람 살리는 것이  있느냐 그 말이오. 회개해야 돼요, 다. 이거 회개 안 하면 안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제일 우리 교역자들부터 회개해야 됩니다. 교역자가 회개해야 돼요.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 교역자 된 대로 교인 됩니다. 교역자와 교인이 딴 것  아닙니다. 둘은 꼭 같이 하나요. 교역자가 안 되고 교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인본주의 세상주의 땅의 복음 가지고 야단을 지기는데 교인이 무슨  하늘의 사람이 되겠습니까? 말세에는 귀를 즐겁게 하는 그 말을 듣기를 좋아해서  진리에서 돌이켜 자기를 즐겁게 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말세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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