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출발점

발터 벤야민(W. Benjamin)은 역사에 대한 그의 성찰록에서 아주 흥미로운 비유를 들고 있는데,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거듭 역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든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어떤 장기 자동기계가 있었다고들 하는데, 이 기계는 어떤 사람이 장기를 두면 그때마다 반대수를 둠으로써 언제나 이기게끔 만들어졌다. 터어키 의상을 하고 입에는 수연통을 문 인형이 넓은 책상 위에 놓여진 장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거울로 장치를 함으로써 이 책상은 사방에서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기의 명수인 등이 굽은 난장이가 그 책상 안에 앉아서는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였다."1)
선지자선교회
"클레(P. Klee)가 그린 새로운 천사라고 불리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그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 멀어지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그의 입은 열려 있으며, 또 그의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을 바라보고 있다.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또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고 있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2)

이 흥미로운 두 가지 비유를 중국의 현대사 위에 오버랩시킬 때, 우리는 선뜻 위화(余華)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活着)』을 개작하여 장이머우(張藝謀)가 만든 『인생(人生)』(1994)이란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역사적 인간'이나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한 개인'이라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물음을 던져보게 된다. 이 작품은 1940년의 국공내전(國共內戰)을 시작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역동적인 시기를 푸구이(福貴)라는 한 개인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삶을 통해 잔잔히 조망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4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절과 연속의 과정이다. 도박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개새끼'라는 욕으로 후려치는 아버지를 향해 푸구이는 "개가 있으니 개새끼가 있지"라는 식으로 태생적 연속성을 긍정하는 한편, 태어난 아들에게는 도박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부두(不賭)라는 별명을 붙여줌으로써 자신의 세대와의 단절을 염원한다. 노름으로 결국 가산을 탕진하게 된 푸구이는 그림자극 공연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 그림자극 공연의 무대장치를 통해 우리는 벤야민이 제기한 첫 번째 비유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자그마한 무대의 가운데에는 천으로 장막이 쳐져 있고 그 장막 뒤에서 사람 모양을 한 댓가지를 조종하면 천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바깥의 관중들은 환호한다. 이 작품에서 댓가지를 조종하는 인물은, 그러니까 벤야민 식으로 말해 "그 책상 안에 앉아서는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는 '등이 굽은 난장이'는 춘성(春生)이라는 젊은이다. 공연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군도(軍刀)에 의해 역사의 장막이 찢겨지고, 이때부터 푸구이와 춘성은 국공내전이라는 현실역사의 전장을 떠돌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푸구이는 아들 유칭(有慶)의 그림자극 소품상자에 대한 태도를 통해 부정되지만, 그림자극 공연을 계속하며 '지속혁명'에 복무하게 된다. 그러던 중 춘성이 당의 고급간부가 되어 이 지구에 부임한다. 부임을 환영하는 자리에 아이들이 동원되고, 여기에 참석시키기 위해 푸구이가 아들 유칭을 업고 가는 장면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

"닭이 커서 거위가 되고 거위가 커서 양이 되고 양이 커서 소가 되면 잘 살 수 있을 거"란 말로 푸구이가 유칭을 위로하자 유칭이 묻는다. "그럼 그 다음은요?" 그러자 푸구이가 대답한다. "공산주의지". 그러나 이날 유칭은 '등이 굽은 난쟁이' 춘성이 탄 차가 들이받은 벽에 깔려 죽고 만다. 유칭의 무덤 앞에서 푸구이의 아내 자전(家珍)은 춘성을 향해 이렇게 울부짖는다. "당신은 우리에게 한 생명을 빚졌어요!" 여기에다 실어증에 걸린 푸구이의 딸은 아이를 낳지만 출산과정에서 문화대혁명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럼으로써 푸구이의 다음 세대는 역사 속에서 존재하는 부재, 혹은 부재하는 존재로 남겨지게 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장이머우는 유칭의 세대, 즉 자신의 세대의 모호한 아이덴티티를 이런 식으로 강변한다. 그러나 푸구이는 딸의 죽음에 한 원인으로 작용한 만터우(饅頭)를 손자의 이름으로 붙여줌으로써 죽은 딸의 부재를 현존화한다.

한편 문화대혁명의 와중에서 무대 뒤에서 댓가지를 조종하던 '등이 굽은 난장이' 춘성은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제서야 푸구이와 자전은 춘성이 진정한 '등이 굽은 난장이'가 아니었음을, 그보다 더 큰 '등이 굽은 난장이'가 현실역사의 무대 뒤에서 자신들을 조종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춘성을 용서한다. 문화대혁명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푸구이는 아들 유칭이 부정했던 그림자극 소품상자에 손자 만터우의 병아리집을 만들어주면서 유칭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손자에게 되풀이한다.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되고 닭이 커서 양이 되고 양이 커서 소가 될 거라는. 그러자 손자가 묻는다. "그 다음은요?" 그러자 푸구이가 대답한다. "만터우가 장성하게 되는 게지".

그렇다면 푸구이의 아버지 세대에서부터 손자 세대에 이르기까지 현실 역사의 무대 뒤에서 댓가지를 조종하고 있는, 무대 뒤에 도사리고 있는 '등이 굽은 난장이',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4대를 거치면서 그들은 얼마나 '진보'한 것일까? 혹 그들은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쉬임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 속을 끊임없이 '돌고 돈(循環)' 데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중국의 '신시기' 역사, 그 가운데 1980년대는 이러한 물음들로부터 시작된다.

각주

  1. 1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1」,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343쪽, 반성완 역, 민음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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