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반추의 서사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三中全會)에서 「건국 이래 당의 역사문제들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의」가 채택됨에 따라 '10년 동란' 문화대혁명은 철저히 부정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새로운 시기(新時期)'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이 시기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계몽의 시대'라 명명되었다. 그런데 '계몽의 시대'라니? 그 시대는 이미 그 도도하던 1919년 '5·4' 문화운동의 홍류를 통해 처절하게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아직 '계몽의 시대'를 운운한단 말인가?
선지자선교회
혁명과 사회주의 국가건설로 점철된 현대 중국의 역사는 7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오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듯이 보였다. 문제의 핵심은 정치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 이면에서 그것을 통어(統御)하는 어떤 차원, 즉 문화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자 이제 사람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이 자신들의 영혼에 남긴 '상흔'들을 다시 문화적인 방식으로 되돌아보았고, 또 그런 방식으로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1976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天安門) 광장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이른바 톈안먼 시가운동이 이러한 흐름의 첫발이었다. 여기에 이어 1978년 12월 베이징 지역의 몇몇 청년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된 지하 간행물 『오늘(今天)』은 오랜 고통의 끄트머리에서 맞이한 이른바 '베이징의 봄'을 알리고 있었다. 베이징의 이른바 '민주의 벽'에 나붙은 『오늘』창간호에서 시인 베이다오(北島)는 그 굴곡의 '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다.

비열은 비열한 자들의 통행증이고
고상은 고상한 자들의 묘지명이다
보라, 저 금도금한 하늘에
죽은 자의 일그러져 거꾸로 선 그림자들이 가득 차 나부끼는 것을

빙하기는 벌써 지나갔건만
왜 도처에는 얼음뿐인가?
희망봉도 발견되었건만
왜 사해(死海)에는 온갖 배들이 앞을 다투는가?

내가 이 세상에 왔던 것은
단지 종이, 새끼줄, 그림자를 가져와
심판에 앞서
판결의 목소릴 선언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너에게 이르노니, 세상아
난-믿-지-않-아!
설사 너의 발아래 천 명의 도전자가 있더라도
나를 천 한 번째로 세어다오

난 하늘이 푸르다고 믿지 않는다
난 천둥의 메아리를 믿지 않는다
난 꿈이 거짓임을 믿지 않는다
난 죽으면 보복이 없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만약 바다가 제방을 터뜨릴 운명이라면
온갖 쓴 물을 내 가슴으로 쏟아 들게 하리다
만약 육지가 솟아오를 운명이라면
인류로 하여금 생존을 위한 봉우리를 다시 한 번 선택케 하리다

새로운 조짐과 번쩍이는 별들이
바야흐로 막힘 없는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은 오 천 년의 상형문자(象形文字)이고
미래 세대의 응시하는 눈동자들이다

-「회답(回答)」전문

여기에 이어 소설 방면에서는 '상흔(傷痕) 문학' 이 출현하여 역사가 할퀴고 간 상처를 폭로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의 잘못된 사상교육이 청소년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주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류신우(劉心武)의 「담임선생(班主任)」이나, 이념과 조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어머니를 비판하고 가정을 버린 비정한 소녀의 이야기인 루신화(盧新華)의 「상흔(傷痕)」 등이 그랬다. 그러나 '상흔 문학'에는 상처의 발견과 인식은 존재했지만,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가 결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과거의 과오를 모두 '남'의 탓, 즉 가짜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외적 요인으로만 돌리면서 문화대혁명이라는 허황한 유토피아적 실험에 자신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 내적 계기에 대해서는 천착이 없다. 또한, 문화대혁명을 중국현대사의 전체 문맥 속에 위치시키고 구조적 차원에서 그 원인을 해명하는 작업은 이 시기 소설에서 거의 전무하다."1)

'상흔 문학'에 내재된 이러한 불철저성은 문화대혁명으로부터 보다 이성적인 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고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왜 우리는 그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러한 상처의 본질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역사의 본질, 인간의 본질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러한 반성적 물음 속에서 소위 '반사(反思) 문학'이 출현한다. 그것은 주로 "맑시즘과 휴머니즘에 대한 열린 사색의 공간 속에서 역사와 전통, 인간 주체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이루어졌는데, 그 핵심은 '인간'의 문제로 집약되었다."2,'반사' 소설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사람아 아, 사람아!』 (1980)의 작가 다이호우잉(戴厚英)은 당시의 내면상황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이리하여 나는 사색을 시작했다. 피가 흐르는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자신의 영혼을 해부하기 시작했으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자신이 쓴 역사를 다시 읽었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점검해 갔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지금까지 희극으로 비극의 역할을 연출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상의 자유를 탈취당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 정신의 족쇄를 아름다운 목걸이로 착각하고 자랑스레 내보이는 인간, 그리고 인생의 절반을 살아오면서도 자기를 모르고 자기를 탐구하려고 하지 않는 그러한 인간의 역을 맡아 왔던 것이다.

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를 발견했다. 원래 나는 피와 살이 있고 사랑과 증오도 있으며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억압당하거나 '길들여진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커다란 문자가 갑자기 눈앞에 떠올랐다. '인간!' 오랫동안 내버려지고 잊혀져 왔던 노래가 내 목을 뚫고 나왔다. 인간성, 인간의 감정, 휴머니즘!"3)

80년대 문단의 '반사' 열기는 초반의 '상흔 문학'과 '반사 문학'에 이어 중·후반의 '지식청년 문학(知靑文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지식청년'이란 문화대혁명 시기 농촌으로 '하방(下放)'을 당한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에 의해 '잃어버린 10년의 청춘'에 각인된 역사의 상처가 다시 부각되었고, 이러한 청춘에 대한 회고담이 시대적 조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초원 계시록(大草原啓示錄)』, 『중국 지식청년의 물결(中國知靑潮)』, 『중국 지식청년 부락(中國知靑部落)』, 『풍조탕락(風潮蕩落)-1955~1979년 중국 지식청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사』, 『중국 지식청년의 꿈(中國知靑夢)』 등의 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가 하면, '황토지(黃土地)', '흑토지(黑土地)' 등의 단어가 시대적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지식청년 문학'은 그 정조의 측면에서 '상흔 문학'과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상흔 문학'이 "허구적인 영웅과 온정 속에서 역사로부터 개인을 구원"하고자 했다면, '지식청년 문학'이 추구한 것은 "역사적 재난과 겁탈, 죄악 속에서 자신을 대속(代贖)하는 일"이었다.4) 이러한 '대속'의 염(念)은 작품 속에서 주로 자신들이 몸바쳤던 대지를 예찬하는 방식으로 발산되었다. 그래서 "장청즈(張承之)는 한때 정을 쏟았었던 '북방의 강'에 대해 쓰고 있고, 리항위(李杭育)는 갈천강(葛川江) 가에서 오월(吳越) 문화의 정신에 대해 사색하고 있고, 한사오궁(韓少功)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초(楚) 문화를 찾아나섰고, 스티에성(史鐵生)은 황토고원의 '저 아득한 청평만(遙遠的淸平灣)'을 추억하고 있고, 모옌(莫言)은 '동북지역의 찰진 검은 흙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5) 이들에 의해 발굴된 중국문화의 '뿌리'에 대한 관심은 한사오꿍의 '뿌리찾기 선언'을 통해 '뿌리찾기 문학(尋根文學)'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뿌리'로부터 이후 영화계에서 '5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일군의 감독들이 등장하게 된다.

역사의 상흔에 대한 문단의 기억과 반추의 방식이 대개 이런 경로를 거쳤던 반면, 사상계에서 그것은 1984년부터 '문화열(文化熱) 논쟁'이라는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문자 그대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을 연출한 이 논쟁은 1919년의 '5·4' 문화운동을 방불케 했고, 그래서 혹자는 이 시기를 일러 '신 5·4' 시기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제기된 주장 가운데 비교적 논리와 체계를 갖춘 것으로 서체중용론(西體中用論), 유교자본주의론, 비판계승론, 철저재건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주장은 당시 의욕적으로 제기되던 덩샤오핑(鄧小平) 정부의 일련의 현대화 정책방향과 맞물리면서 사뭇 복잡하고 민감한 양상을 연출했다.

역사의 상흔에 대한 반성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볼 때 이 논쟁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현대 중국 역사의 이면에 숨어서 댓가지를 조종하고 있는 '등이 굽은 난장이'의 실체를 거의 전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실체에 대한 인식은 논쟁 전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일종의 묵언의 전제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논쟁의 구도에서 예각을 그으며 '철저재건론자'로 분류된 몇몇 사람들은 이 금기를 깨고 그것을 대담하게 담화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의 담화로부터 사람들은 얼마 전 자신들이 청산을 완료한 '4인방'이란 존재가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등이 굽은 난장이'가 아니라 이들 역시 하나의 대속물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좀더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사람들의 생각을 그들 자신이 은폐하고자 했던, 그럼으로써 하나의 상처도 없이 보존하고자 했던 상징체, 즉 '마오 주시(毛主席)'라는 보통명사로 구조화된 어떤 의식체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 의식체계가 유구한 중국 문화사의 기본 체질에 기반한 '대일통(大一統) 초안정(超安定) 구조'의 변양(變樣)이었음을,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차원에서 빚어진 구조적 결과였음을, 자신들에게 상처를 남긴 주범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이었음을,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단절의 몸부림 역시 이 '지속의 왕국'의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이 점에서 보자면 1980년대는 분명 '비판'의 시대요, '각성'의 시대요, '계몽'의 시대였다.

각주

  1. 1이욱연, 「중국 '신시기' 문학의 전개양상에 대한 일고찰」, 『중국현대문학』 제11호 151쪽,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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