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성' 신화의 두 얼굴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자 다시 정계로 복귀한 덩샤오핑은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사상해방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그래서 1979년은 사람들에 의해 '창세기'라 명명되었다. '문혁 청산'의 책임을 떠맡게 된 덩샤오핑은 '10년 동란'의 모든 책임을 '4인방'에게 돌렸다. 정권의 배려 하에 '4인방' 재판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이 장면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과거와의 처절한 단절을 목도했으며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도래를 실감했다. 계급투쟁을 근간으로 해서 근대의 완성과 근대의 극복을 동시에 이룩하고자 했던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적 이상은 중국사회가 아직도 전근대에 속해 있다는 처연한 현실인식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 위에서 신헌법과 새로운 당규약이 정식으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공업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 농업의 현대와, 국방의 현대화를 내용으로 하는 '4개 현대화 방안'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이로부터 마오쩌둥 시대의 수많은 혁명적 구호들은 이제 '현대성'의 수사학으로 대체되었다.
선지자선교회
'현대성'은 덩샤오핑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시대정신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走向世界)' 유일한 길인 것처럼 보였다. 이제 모든 것은 그 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進步)'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사태의 복잡성은 당시 베이징 동물원의 전기공이었던 웨이징성(魏京生)이라는 청년이 체포된 자그마한 사건에서 잠시 표면화되었다. 그는 당이 제기한 '4개 현대화'에 대해 민주주의를 '제5의 현대화'로 추가할 것을 주장하며 덩샤오핑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로부터 '베이징의 봄'은 짧았던 시간을 마감했고, 희망과 불안 속에서 1980년대가 열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문제는 이데올로기의 단절과 체제의 지속 사이의 모순성에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혁 청산'이라는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제를 지속시키는 형태로 이룩했던 정권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총체적 단절로의 가능성은 미연에 봉쇄해야 했고, 이와 동시에 체제의 지속성을 보장할 담론적 기제를 절실히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동원된 담론적 기제가 바로 '현대성' 담론이었다. 1980년대에 제기된 수많은 '현대성', '세계성', '진보'의 담론들은, 현실 역사의 비전을 담보하는 한편 '문혁 청산'에 내재된 모순성을 은폐하고 현실 역사를 망각시키는 이중적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일조를 한 것은 다름 아닌 1980년대 초반의 문화계를 특징지우는 기억과 반추의 서사였다. 이 서사 체계에는 총체적인 단절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 속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의 철저한 단절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현당대 역사의 모종의 연속성과 동질성'을 보장해주는 또 다른 측면이 존재했다. 바로 이 점이 현실 정권의 차원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동시에 체제의 총체적 단절을 방지해주는 유효한 문화적 장치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80년대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반사'의 명의로 역사적 '반사'를 거절한 점에 있다. 담론적 차원에서의 성공적인 실천을 통해 그것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혁명이여 안녕(告別革命)'이라는 사회적인 공통인식을 상당 정도 이룩해냈던 것이다."1)

문화적 '반사'의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 성격은 '지식청년 문학'이나 '뿌리찾기 문학'에서도 드러난다. '지식청년 문학'의 원동력이 된 '피와 눈물의 기억'은 "청춘에 후회는 없다"는 식의 낭만적 이상주의에 의해 상당 부분 가려지게 되었고, 또 이런 낭만적 이상주의에는 주류 이데올로기와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내포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런 여지는 80년대 중·후반 문화권의 중심에 이들 '지식청년'들이 진입하게 됨으로써 얼마간 사실로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이들에 의해 촉발된 '뿌리찾기' 담론으로 인해 "당대 중국의 역사에 대한 사고는 전근대 중국사회와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었고, 현실의 희비극에 대한 글쓰기는 '민족 알레고리'식의 서사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문화전이가 발생하게 된 본질적 요인은 모종의 감성적인 방식으로 '문혁을 청산'해야 할 필요성이었다. 이는 원래 책략의 성격을 띤 필요성이었다. 가장 직접적이고 유력한 방식으로 중국사회를 '개혁개방' 혹은 '현대화'로 명명된 도정 속에 조직하려 했던 것, 이것이 신시기의 진정한 의도였던 것이다."2)

현실 정치와 문화 사이의 기묘한 연관은 '문화열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단절과 체체의 연속 사이에 조성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 있어 '계몽'과 '비판'은 '잠재적인 위협'으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현실 정권의 입장에서는 '계몽'과 '비판'에 내재된 래디칼리즘을 어떤 형태로든지 둔화시키거나 관방 이데올로기 속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었고, 또 현실 역사에 드러난 역사적 단층이나 이것에 대한 인식론적 거리를 은폐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 정권은 이 논쟁에서 가장 래디컬한 입장을 견지했던 '철저재건론'자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중도적 입장을 관방 이데올로기 속으로 흡수하는 한편, 이 논쟁에서 가장 온건한 입장을 보인 '유교자본주의론'자들의 손을 슬며시 들어주는 제스츄어를 취하게 된다. 여기에 '유교자본주의론'에 내재된 '화해'의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적 정감과 자본주의적 '현대성'이 미묘한 유착력을 발휘하고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각주

  1. 1戴錦華, 『隱形書寫』 45쪽, 江蘇人民出版社, 1999
  2. 2戴錦華, 『隱形書寫』 43-44쪽, 江蘇人民出版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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