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후들

1986년 5월 9일, '국제평화의 해'를 기념하는 취지로 중국 100인 가수 콘서트가 베이징 노동자 체육관에서 열렸다. 여기에 무명의 한 가수가 무대에 올라 「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一無所有)」라는 내면의 심회를 절규했는데, 이 노래는 그 시대의 가장 민감한 신경을 건드리면서 일시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조선족 출신의 가수 추이지엔(崔健)이었다. 이 공연 이후 그는 중국 대중의 우상이 되었고, 그가 수입해서 독창적으로 개조한 록음악은 중국 젊은이들의 영혼을 적셔주었다.
선지자선교회
1961년생인 추이지엔은 자신의 역사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난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지. 넌 언제쯤 나와 함께 갈 수 있겠냐고. 하지만 넌 언제나 날 비웃기만 했어. 내가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고." 그가 불렀던 이 노래는 1989년 6월 '피의 일요일' 톈안먼 광장에 모인 젊은이들의 입과 입을 오르내리면서 일시에 젊은 영혼들의 '대변자'로 그들의 내면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이렇게 규정했다.

"자유란 감옥이 아닌 것에 불과한 것", "너와 난 노예가 아닌 것에 불과한 것"(「여기란 공간(這兒的空間)」) "내가 모르는 게 아냐, 이 세계의 변화가 빠르단 걸", "지난 날 내가 꿈꾸었던 미래는 지금 이런 것이 아냐", "난 진작 알았어 사소한 일조차 지금은 도무지 알 수 없단 걸, 돌연 나는 느꼈어 내 눈앞의 세계에 내가 자리할 곳이 없단 걸"(「내가 모르는 게 아냐(不是我不明白)」) 그래서 이제 "너에게 말하마, 세계를, 난-믿-지-않아!"(「회답(回答)」)

중국 현대사의 상흔에 대한 비탄과 회한, 혁명에 대한 환멸, 현실역사에 대한 부정과 반항, 자아의 부재 확인과 신음을 이렇게 노래함으로써 그의 노래는 1980년대 후반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문화 코드 역시 추이지엔의 다음과 같은 노래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었다.

날 좀 자극해 줘 의사 나으리
날 좀 사랑해 줘 나의 간호사 누나
어서 날 울게 만들든지 어서 날 웃게 만들든지
어서 날 좀 눈밭에서 지랄발광하게 만들어 줘

Yi Ye ― Yi Ye ―
내 병이란 느낌 없는 거니까
「어서 날 좀 눈밭에서 지랄발광 하게 만들어 줘(快讓我在雪地上撒点兒野)」1)

병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 이 불감증 속에서 1980년대 후반의 문화현상을 대표하는 왕숴(王朔)라는 또 다른 문화 코드가 배양되고 있었다. 1985년경에서부터 문단에 자신의 존재를 내밀기 시작한 이 코드는 이른바 '왕숴의 해(王朔年)'라 불려지던 1988년을 맞으면서 남녀에서 노소까지, 그리고 연구실에서 뒷골목까지 일시에 세상을 풍미하게 된다.

왕숴는 1958년 생이다. 그러니까 그의 유년 역시 추이지엔과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과 어쩔 수 없이 깊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역사를, 그리고 그 역사 속의 상흔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1980년대 초반의 선배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동시에, 그의 후배 추이지엔과도 구분되었다. 추이지엔에게조차 도저하게 드리워져 있는 엄숙주의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그의 중편소설 「절반은 불꽃, 절반은 바닷물(一半是火焰, 一半是海水)」, 「고무인간(橡皮人)」이나 장편소설 『노는 것만큼 신나는 것도 없다(玩的就是心跳)』 등에서 당대 중국의 역사는 전경화(前景化)될 뿐 정면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것에 대해 냉소를 퍼붓거나 조롱하거나 가지고 '노는' 방식을 취한다.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당대 중국의 '퇴폐적 문화심리'를 대변함으로써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혁명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 작품에 내포된 "반사회적·반규범적·반우상적 정신은 적극적인 의미에서 반항아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아 향락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심리 속에서 국가, 민족, 신앙, 도덕 등 전통문화에서 신성하게 여겨졌던 것들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어떠한 지위도 보전할 수 없게 된다. 유일하게 의의가 있는 것은 때맞춰 즐기는 것이다. 내일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또 내일도 없다."2)

이를 테면 "'나'는 학교를 중퇴한 뒤 통신대학에 적을 걸어두고 '경찰로 가장해서 홍콩 상인과 외국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가 하면(『절반은 불꽃, 절반은 바닷물」의 張明), 군대에서 갓 제대한 후 '오로지 술과 여자 때문에 그 동남쪽 해변 도시를 헤매고 다'니기도 한다.(『노는 것만큼 신나는 것도 없다』의 方言과 그의 친구들) 그들은 술, 담배, 도박, 여자를 거의 광적으로 추구하되 결코 심리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 그리고 사기, 공갈 협박, 밀수, 투매, 매춘 등 자본주의적 퇴폐 및 타락과 관계되는 일 가운데 손대지 않는 것이 없다." 이처럼 "왕숴 작품의 주인공들의 행위는 일탈(逸脫)로 요약할 수 있다. 정상궤도로부터의 일탈이다."3)

1990년대 초반 왕숴의 개인문집 출판에 이어 수많은 아류 '왕숴 문체', '왕숴 말투'가 난무하게 되었고 또 그의 몇몇 소설이 영화로 제작됨에 따라 왕숴로 대변되는 '퇴폐'와 '일탈'이라는 문화 코드는 명실공히 1990년대 초반 주류문화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한편 1992년 말에 주요 일간 신문들이 앞다투어 실은 자그마한 기사 하나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 기사의 내용은 다름 아니라, 모 대학에서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모 교수가 강의 이외의 시간을 이용해서 교문 밖에 가판을 차려놓고 직접 만든 셴빙(餡餠, 떡의 일종)을 팔아 돈을 벌고 있다는 기사였다. 이 자그마한 기사는 세태의 변모를 반영하는 듯 사회적으로 상당한 주목을 끌면서 일대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 교수의 행위를 동조하는 축은 주로 이 사건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는 사회관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또 여외의 노동을 통한 치부는 정당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던 데 반해, 반대하는 축은 갈수록 심화되는 전 사회적인 타락풍조를 이 사건이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개탄하는 한편 그런 풍조에 편승한 한 지식인의 부도덕함과 철없음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었다. 비판의 목소리는 주로 고급 지식인들에게서 나왔지만,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에는 모종의 불안과 비애가 스며 있었다. 적어도 1980년대 초·중반만 해도 그들의 생활조건은 이렇게 열악하지가 않았다. 이들 '문화 영웅'에 대한 사회적 대접은 여타 계층에 비해 오히려 후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에 따라 지식인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나날이 증대되었고, 바로 이런 맥락에 이 사소한 사건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위기와 자화상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확인했던 것이다.

각주

  1. 1張新潁, 「中國當代文化反抗的流變」, 『二十世紀中國文學史論』 第三卷 394-401쪽 (王曉明 主編, 東方出版中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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