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영웅'들의 곤혹

이와 같은 징후들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문화적 난맥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80년대 초·중반의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계몽' 기획이 혹은 변모하고 혹은 퇴락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중반에 이르는 시기의 문화계 속사정을 잠시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문화계 분위기, 특히 지식인들의 내면 세계를 단적으로 대변해주는 단어는 '질식'과 '실어(失語)'이다.1)
선지자선교회
장이머우의 영화 『인생』에서 장이머우 자신의 세대에 속하는 푸구이의 딸이 한 바탕 신열을 앓고 난 뒤 실어증에 걸렸던 것처럼,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잃어버리는 이런 분위기가 1990년대 초반의 문화계를 횡행했다. '정신병자의 헛소리'와도 같은 수많은 말과 글들이 문단을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다. 왜 이런 증상이 발생했을까?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었겠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단해 볼 때 직접적인 병인은 두 가지 방면에서 가해진 엄청난 '충격'이었다.

하나의 '충격'은, 문화대혁명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에 의해 '4개 현대화 방안'이 제출된 이래 1987년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거쳐 1992년 덩샤오핑의 '남방 순시 연설(南巡講話)'에 이르기까지 자기전개를 지속해 온 '시장'이라는 존재로부터 왔다. 1980년대를 주도했던 '개혁개방', '현대화', '지구상의 본적(球籍)' 찾기, '세계화' 등 주류 이데올로기의 구호 속에서 때로는 그 흐름에 편승하고 때로는 역류하면서 조금씩 확장·심화해갔던 일련의 '계몽' 기획은 이제 다시 원점에서 그 기본 전제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이 기획을 설계하고 주도했던 '문화 영웅'(지식인)들은 이제 '시장'이라는 존재 앞에서, 그리고 기승(起升)일로에 있는 '대중 문화'라는 괴물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무력함을 절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야흐로 시대는 이들로 하여금 '계몽'과 '시장'이라는,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라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대척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제 지식인들은 "문화라는 외로운 섬을 고수(固守文化孤島)"할 것인지 아니면 "자본의 바다에 뛰어들(下海)"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충격'은 1989년 '천안문 사태'의 해결과정에서 드러난 현실 정권의 대응으로부터 왔다. 이 '몸서리칠 정도로 놀라운' '충격'으로 인해 현실 역사와의 '행복한 결합의 시대'는 사라져버린 듯 보였고, 이 사실이 다시 이들 '문화 영웅'들에게 깊은 좌절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 좌절과 상처를 통해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설계하고 주도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계몽' 기획이 실제로는 현실 정권과의 '공모' 내지는 '타협'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견실한 역사 '주체'라고 믿고 있었던 자신들이 결국 역사의 무대 뒤에 숨어있는 '등이 굽은 난장이'의 손에 조종된 한낱 인형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다시금 처절히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1980년대는 1990년대에 대해 다시금 존재하는 부재로 혹은 부재하는 존재로 드리워지게 되었다. 마치 1980년대에 대해 문화대혁명 '10년 동란'의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의미에서 1980년대의 "한 바탕 포스트모던한 혁명에는 중세기 식의 결말이 내포되어 있었다"2)는 한 지식인의 회고는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중국의 1980년대는 "조심스럽게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어 그들로부터 이름과 슬로건과 의상을 빌리고, 이 유서 깊은 분장과 차용한 대사로"(마르크스, 『브뤼메르 18일』) 1990년대의 문턱을 힘겹게 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주

  1. 1戴錦華, 『隱形書寫』 50-51쪽, 江蘇人民出版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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