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하는 지식인 문화

'돈의 바다'와 '대중 문화', '통속 문화'의 범람 속에서 1990년대 초반 지식인 문화의 동요와 재편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은 '순수 학술지' 『학인(學人)』의 창간이었다. 해외에서 조성된 기금으로 베이징대학의 천핑위안(陳平原) 교수를 중심으로 창간된 이 잡지는 '학술적 규범의 재건'을 통한 '300년 중국 학술사'의 명맥 유지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른바 '신국학(新國學)'의 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그럴듯해 보이는 깃발에도 불구하고, 이 잡지의 창간은 분명 지식인의 '역사적 후퇴'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해서 1980년대 '계몽'의 시대를 주도했던 '겸제천하(兼濟天下)'의 원대한 이상은 한편으로는 상아탑과 서재 속으로 안주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의 협애한 세계 속으로 자신을 감출 준비를 완료한 듯이 보였다.1)
선지자선교회
그러나 이런 시대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썰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서서 "그러면 현실 역사는 누가 이끌어가야 하는가?", "떠날 테면 떠나라, 나라도 이 척박한 현실 역사의 현장을 지키겠다"는 식의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가 상당 정도 존재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는 했지만, 일개 학술잡지의 창간이라는, 일견 사소한 듯 보이는 이 사건이 1990년대 초반의 문화 지형도에서 심대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중국 문화사의 맥락에서 볼 때 문인의 학술 행위는 그 자체가 곧 '현실 세계의 경영(經世)'에 대한 빛나는 이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문인이 "글을 하는(作文)" 행위의 핵심이 세상에 대한 실천·윤리적 관심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사건에 내포된 함의는 좀 더 분명해진다. '문인'에서 '학인'으로의 전환에는 이처럼 미묘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인』동인들이 잡지명을 영문으로 'Scholar'라고 이름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점을 '십자가두(十字街頭)'로부터 '상아탑(象牙之塔)'으로 제한하고 나섰을 때 이 점은 좀 더 분명히 나타났다.

『학인』이라는 학술지의 창간이 적어도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1990년대 초반 문화시장에서 청대 건가학풍(乾嘉學風)이 문화상품으로 등장한 사실이나 쳰무(錢穆), 천인커(陳寅恪), 우미(吳宓), 쳰중수(錢鍾書) 등 '서재형' 학자들의 저서가 출판시장을 석권한 사실, 그리고 급기야 쳰중수의 『포위된 성(圍城)』같은 소설이 TV를 통해 안방까지 점령해버린 사실 등과 모종의 유착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강호(江湖)를 등지고 '서재'에 안주한 '전업학자'들과 '시장'의 밀월 관계는 1990년대 초반 문화계에 나타난 일종의 역설적인 문화 현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1990년대 초반의 '국학'에 대한 열기를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는 측면이 존재한다. 적어도 그것이 1980년대 '계몽'의 시대가 드러낸 어떤 편향, 다시 말해 '계몽'의 주요한 이론적 기반이었던 서구 담론에 대한 반성과 극복의 맥락에서 제기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반성과 극복을 통해 1990년대 초반의 '문화적 실어증'을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으리란 믿음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1990년대 초반 문화계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현상은 '後, post'라는 접두어를 달고 등장하는 이른바 '후학(後學)' 열풍이었다.

이 시기 등장한 '후' 계열의 용어를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기만 해도 '후현대', '후신시기', '후국학', '후계몽', '후현대주의', '후동방주의', '후식민지론' 정도가 되니, 그 열풍의 정도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2)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재기발랄한 일부 젊은 지식인들과 그들이 수입한 담론적 차원에서의 말잔치였을 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였다. 이를테면, '후식민지론(post-colonialism)' 논의가 한창이던 와중에도 현실 정권은 '지구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계 자본시장에의 자발적 편입과 종속을 정당화하고 있었고. '후동방주의(post-orientalism)' 논의가 한창이던 와중에도 영화계에서는 '5세대' 감독들 손의 의해 '동방주의적 정취' 미학이 여전히 재생산되며 세계 시장을 향해 화려한 유혹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다. 장이머우의 이른바 '욕망 3부곡'으로 명명된 작품들, 즉 『붉은 수수밭(紅高粱)』, 『국두(菊豆)』, 『홍등(紅燈)』에 대한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후학' 열풍 가운데 단연 두드러진 지위를 점했던 것은 단연 '후현대주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그런데 '후현대주의'를 운운할 만큼 '현대성'이 자리를 잡았던 것일까? '현대화'의 구호는 난무했으되 언제 제대로 그 내용을 채웠던 적이 있었던가? 당대 중국은 아직도 전근대성의 미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고, 또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 담론을 수입해서 소화하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서양적인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현대성(modernity)'에 대한 반성·극복의 차원에서 제기된 개념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중국판' 버전에서는 '현대성'에 대한 반성·극복의 측면이 가려지고 제거된 채 오히려 '현대성'의 연장선상에서 논의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의 '본토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아니러니하게도 스스로 '후현대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강렬한 '중화 중심주의'와 '본토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이런 도착(倒着)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어떤 전략적 사고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일까?

1990년대 문화사 전체 맥락에서 되돌아볼 때, 1990년대 초·중반에 수입되어 응용된 '후현대주의'적 "메타비평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후현대'라는 명의를 빌어(어쩌면 자의적으로 이용하여?) '현대주의 80년대'와 '후현대주의 90년대'에 관한 총체적 서술체계를 구축하고, 이것을 빌어 역사 단절에 관한 서술체계를 완성하고, 또 이것을 빌어 80년대 문화와 엘리트 문화의 '비합법성'을 선고하고, 아울러 이로써 8,90년대 사이에 가로놓인 상처 체험을 성공적으로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일련의 비평적 실천 속에서 '후현대주의'는 초연히 '행공(行空)'을 비상하는 한 필 '천마(天馬)'가 되었다."3)이 '천마'의 날개 짓 속에서 정치 체제와 시장의 간극은, 시장과 문화의 모순은, 그리고 현실 역사가 남긴 상흔들은 다시 한 번 은폐되고 망각되었다.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이 '천마'의 날개 짓 속에서 80년대 '문화 영웅'들은 이제 자신들이 '실패자'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실패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근본적인 물음들이 제기되었는데, 1990년대 중반의 문화계를 뒤흔든 이른바 '인문정신 토론'이라는 대규모 논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주

  1. 1戴錦華, 『隱形書寫』 58쪽, 江蘇人民出版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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