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이냐 왕숴냐

1993년 상하이의 한 비평가 모임이 개최한 자그마한 좌담회에서 제기된 '인문정신' 논의는 일시에 전국으로 퍼져가면서 1990년대 문화계의 가장 뜨거운 공안(公案)으로 되었다. 논쟁의 경과는 사뭇 복잡한 양상을 띠었지만 대개 '인문정신 상실'론이 먼저 제기되고, 이에 대한 비판이 문화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일부 지식인과 '후현대주의'자들로부터 제기되고, 이 비판에 대해 다시 역비판이 제기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1)
선지자선교회
이러한 과정은 일견 80년대 '문화 영웅'들의 본격적인 홀로서기를 알리는 신호로 보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그들의 공통적인 인식의 기반을 부각시켜 주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거 역사와의 단절 의지와 진보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러한 기본 전제의 공유 위에서 논쟁의 분기점은 다음과 같은 물음 사이에서 생겨났다.

"도대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전근대적 중국은 계몽의 기치를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대중사회가 목하 낡은 사회체제와 그 이데올로기를 와해시키고 있는 것일까?" "90년대의 중국은 80년대의 논리적 연장인가, 아니면 심각한 단절이 이미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은 어떻게 자리매김되어야 하는 것일까?"2) 이런 물음 사이에서 현실 체제와 '계몽' 사이에, '시장'과 '계몽' 사이에, '엘리트 문화'와 '대중 문화' 사이에 관점의 차이가 생겨났던 것이고, 이로부터 계몽주의자, 자유주의자, 후현대주의자, 관방 지식인 사이에 다층적이고도 다각적인 입장의 차이가 생겨났던 것이다. 이 모든 관점과 입장의 차이는 이 논쟁에 참가한 한 지식인의 다음과 같은 고백 속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물질과 정신의 이중적 압박 속에서, 하나의 유혹과 상반되는 유혹의 동시적 충동에서, 세계체제와 민족체제 사이의 마찰과 접근 속에서, 인류의 정신 왕국의 일원으로서 갖는 역할과 자국의 국가 이익 수호자로서 갖는 역할 사이의 모순 속에서, 자신의 정서적·혈연적 근원인 중국문화와 자신의 사상적 원천인 서구문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 택일의 어려움 속에서, 현실적인 생존의 수요 때문에 현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미래의 생존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대화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는 우왕좌왕하는 배회 속에서, 중국 지식인들의 영혼이 겪어야 하는 고난의 길도 막 시작되었다.3)

이 고백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이'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으로 집약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계몽이냐 시장이냐?", 혹은 "루쉰(魯迅)이냐 왕숴(王朔)냐?"

그러나 '계몽'과 '시장'의 경계가 더이상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 외부의 현실 속에서, '루쉰'이라는 보통명사와 '왕숴'라는 보통명사의 경계가 더 이상 명징하게 차별화되지 않는 내면적 현실 속에서, 1990년대 지식인 문화계도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각주

  1. 1이 논쟁에 관한 주요 자료와 경과, 그리고 평가에 대해서는 『인문학의 위기』(백원담 편역, 푸른숲, 1999)를 참고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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