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녀석들'

장위안(張元)이라는 젊은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베이징영화대학(北京電影學院) 촬영학과 출신이며 85학번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일러 '지하 영화계'의 거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6세대' 영화감독의 대표주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확실히 '5세대'로 불리는 78학번 동문 선배들과는 다른 면모가 존재한다. 천카이거(陳凱歌), 장이머우(張藝謀), 톈좡좡(田壯壯) 등의 선배들이 외국의 막대한 자금에 힘입어 세계 영화시장에 '중국열풍'을 일으켰다면, 그는 일단 외국 자본의 유혹을 거부한 채 카메라 하나를 달랑 들고 베이징의 뒷골목을 누비면서 독자적인 생존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독립 영화인'으로 불려지기를 더 좋아한다.
선지자선교회
그의 선배들이 자신들의 '잃어버린 10년의 청춘'을 알레고리화하고 역사의 상흔을 대하(大河) 멜로화하고 또 화려한 색채 미학 속에서 그것들을 해소해버린 혐의를 받고 있다면, 그에게는 일단 그들의 '기억'을 냉정히 관조할 수 있는 시간상의 거리가 있다. 그의 선배들이 80년대 '계몽'의 시대를 일구어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면, 그는 90년대라는 또 다른 현실 지평에 서 있다. 그는 이 다름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언(寓言)은 5세대의 주요한 스타일입니다. 역사를 우언화하는 일이 그리 간단한 건 아닌데도, 그들은 멋들어지게 서술해냈어요. 그러나 내 경우, 나에게는 단지 객관만이 존재합니다. 객관은 내게 있어 너무나 중요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먼 것은 당최 볼 수가 없어요." 그의 이 말은 그 세대 영화인들에게 공히 적용된다.

그는 '6세대'라 불리는 자신의 세대에 대해 또 이렇게 말한다. "'세대'를 말하는 건 좋은 일 같아요. 과거 우리에게도 '세대'를 뛰어넘어 성공한 경험이 있잖아요. 중국인들이 '세대'를 입에 올릴 때면 늘 걷잡을 수 없는 느낌을 가져다줘요. 나와 호흡이 잘 맞는 단짝들은 우리 학교 친구들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엇비슷하고 또 잘 통해요. 그러나 내 생각에 아직도 영화는 개인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 같아요. 내가 추구하는 것은 내 윗대 사람들과 다르고 내 주변 사람들과도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 걸 닮으면 당신 자신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 세대는 열정적이에요." 장위안은 '객관'에 대한 관심과 이런 '열정'으로 『베이징 녀석들(北京雜種)』(1993)을 만들었다. 당국에 의해 상영금지를 당한 이 영화는 록가수 추이지엔과 그가 리드하는 그룹사운드 '칠합판(七合板)', 그리고 베이징 학원가 북쪽에 군락을 이룬 세칭 '위안밍위안 화가촌(圓明園畵家村)' '백수'들의 세계를 통해 1990년대 중국 사회의 이면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5세대' 영화의 화려한 색채 미학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해 취하고 있는 카메라 앵글을 서투름으로 치부해 버릴 지도 모른다. 서투름 때문이었을까? 이 '청춘의 잔혹한 이야기'를 지켜보노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왠지 그냥 시선을 돌리고 싶어진다. 우중충한 색채, 가슴 답답한 공기, 자욱한 담배연기, 방황하는 청춘들, 푸석푸석한 얼굴들, 간간이 삽입되는 록커의 절규와 강렬한 비트, 그리고 그 리듬에 따라 흐느적거리는 영혼들……. 그러나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장위안의 카메라웍은 전혀 현란하지가 않다. 대신 그는 장면 하나 하나에 카메라를 최대한 오래 고정시킨 채 관객들로 하여금 지겨움을 자아내게 하는 고전적인(혹은 아방가르드적인)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관객은 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어도 끝내 들어가지 못한 채 작품의 언저리를 서성거리게 된다.

사실 내용상으로도 빨려 들어갈 만한 구석은 거의 없다. 일단 출연자들 대부분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 장위안의 '친구'들이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고 전해지지만, 각본과 음악을 맡은 추이지엔과 '위안밍위안 화가촌' '백수'들이 직접 출연한다. 이 점부터가 왠지 싱겁다. 게다가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는 사건들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사소한 일상의 편린들이어서 관객들은 극적인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하다못해 싸움조차도 너무 시시하고 답답하고 평범하다. 그러나 이 같은 장치는 철저하게 의도된 것이다. 의도된 '거리두기' 속에서 '객관'적 일상의 익숙함은 철저히 타자적인 것으로 변하고, 이 낯선 타자성이 곧 '객관'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 거리'가 된다. 『베이징 녀석들』은 분명 조야한 리얼리즘이지만, 그러나 이 조야한 앵글 속에서 세기말 중국의 '객관' 현실이 잿빛 살을 드러냄으로써 장위안의 리얼리즘은 역설적인 승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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