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아이들, 그리고 '한류(韓流)'

"2000년 2월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 경비원들은 새벽부터 비상근무 체제에 들어갔다. 이 호텔에 묵은 한국의 5인조 댄스그룹 H.O.T 멤버들을 보기 위해 동이 트기도 전부터 몰려든 중국의 10대 극성 팬 1백여 명 때문이다. 호텔 로비에서 새우잠을 자며 밤새 기다린 열성 팬도 10여 명이나 됐다. 경비들은 저지선까지 치며 이들의 호텔 접근을 막았으나 H.O.T를 부르는 팬들의 열화 같은 함성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전날 베이징 노동자 체육관에서 벌어진 콘서트의 열기도 서울의 그것 못지 않았다. 중국 청소년 9천여 명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몰려들어 끝날 때까지 온몸을 흔들어대며 한국말로 된 H.O.T의 랩을 따라 불렀다."
선지자선교회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 샤오샤오(宵瀟, 16)는 온통 한국산으로 치장했다. 힙합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었다. H.O.T의 강타를 제일 좋아한다는 그의 배낭엔 강타의 사진으로 만든 뱃지 15개와 3개의 열쇠고리가 달려 있다."

"한국 가수 안 좋아하는 애들이 없어요. 몇 퍼센트냐구요? 우리 반 애들 다 좋아한다니까요." 한국가수들을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를 NRG 팬이라고 밝히는 남학생 황쉬(黃旭, 17)는 또 이렇게 대답한다. "음악도 독특하고, 춤도 잘 추고, 젊고 잘 생겼잖아요. 또 활발하고 열정적이라서 좋아요."

2000년대 들어 중국의 대도시 번화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머리를 노랗게 혹은 붉게 물들이고 힙합 바지를 발끝까지 질질 끌고 다니는 나이 어린 청소년들이다. H.O.T 장우혁의 사진 한 장을 손에 넣기 위해 사진 가게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고, NRG 콘서트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감격의 눈물까지 흘리는 그들……. 과연 중국의 청소년들을 이다지도 열광시키는 한국 열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는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서 매우 낯선 나라였다. 그들에게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70년대 이전에는 주로 적대국가 '남조선'으로 남았고, 80년대 이후에는 주로 스포츠 분야에서 '차이나 킬러'로 '공한증(恐韓症)'으로 남았으며, 또 90년대 초반부터는 '대우자동차', 'LG전자' 등의 로고로 남았다.

그러다가 90년대 말에 들어 대중 문화가 중국의 안방을 통해 침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한류(韓流)'라고 하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한류'란 "한국의 음악, 드라마, 패션 등의 대중 문화가 중국에 매섭게 파고들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신조어는 클론과 H.O.T의 베이징 콘서트 대성공으로 중국 언론에서 '한국 음악'과 '한국 문화'를 대신하는 말로 통용되었으며, NRG와 안재욱 공연을 계기로 중국의 매스컴을 온통 뒤덮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한쭈(哈韓族)'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한국의 댄스 음악과 가수, 배우, 유행을 추구하는 중국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에는 일찍이 '하르쭈(哈日族)'라는 일본 매니아들이나 타이완·홍콩의 이른바 '강타이(港臺)' 매니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 청소년들 세계에서 '하한쭈'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한류' 확산의 중심에는 가수 클론이 있다. 그들의 「꿍따리 샤바라」가 중국 여가수에 의해 번안되어 소개되자 느린 흐름의 곡 일색이던 중국 가요계에서 이 곡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것이 한국 대중 음악에 대한 열기로 이어졌다. 문제는 '속도'와 '템포'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세계 자본시장의 활발한 일부'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자기증식을 반복하던 중국의 문화적 '속도'와 '템포'가 한국형 천민자본주의 특유의 '속도'와 '템포'를 접촉하게 됨으로써 상승작용을 일으킨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 대중문화의 대 중국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한 기업의 사장의 분석도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그 동안 중국 청소년들의 욕구를 분출시킬만한 돌파구가 없었는데, 한국의 젊은 가수들이 세련된 외모와 멋, 신나는 음악으로 그들을 매혹시키고 있기 때문이죠."

중국인들 상당수는 『사랑이 뭐길래』라는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만났다고 말한다. 중국의 관영 TV에서조차 수 차례 재방송할 정도로 인기를 모은 이 드라마를 모르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이 드라마의 어떤 측면이 중국인들의 잠재된 문화심리를 건드렸던 것일까? 그들은 김수현(金秀賢) 식의 멜로물을 통해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중국 대중 문화계를 풍미했던 싼마오(三毛)나 충야오(瓊瑤)를 다시 만났던 것일까? 아니면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질식'과 '실어'적 상황을 '멜로'와 '눈물'을 통해 '바겐세일'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자기정화 양식이 또 다시 요청되었던 것일까? 그렇게 요청된 문화심리가 '대발이'라는 코드를 통해 다시 드러났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의 한 전통 가정의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모종의 향수를 느꼈던 것일까. 아무튼 최근에는 베이징 케이블 TV에서 방영중인 『의가형제(醫家兄弟)』가 중국 내 드라마 순위 1, 2위를 달리고 있고, 그 외 장시(江西) TV, 충칭(重慶) TV 등에서도 각종 한국 드라마들이 시청률 순위권에 올라 있다.

'한류'의 열기는 영화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 『쉬리』가 홍콩에서 『생사첩변(生死諜變)』이라는 이름으로 개봉된 뒤 불법 복제 비디오의 형태로 급속히 파고들었다. 전통적으로 북한이 중국의 우방인 점을 감안할 때 『쉬리』의 중국 상륙은 민감한 사안이 될 소지가 없지 않았음에도. 이밖에 『퇴마록』, 『투캅스』, 『8월의 크리스마스』 등도 VCD 형태로 보급되어 있다. 중국어 더빙까지 마친 이 VCD의 노점상 가격이 10-20위안 정도인데, 비록 불법 복제물이긴 하지만 헐리우드 최신 영화의 불법 복제물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낮지 않은 가격이다. 얼마 전 베이징에서 열린 한국과 중국의 친선 축구 경기장에서 벌어진 한국 응원단에 대한 중국 축구팬들의 구타사건이 보도된 바 있다. 그 현장에 있었던 한 유학생은 그들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다고 한다. 중국에 불어닥친 '한류'는 이 '살기'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중국인들의 말대로 '한류(韓流)'는 혹 '한류(寒流)'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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