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미학-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깊고 넓은 미학

중국 그림을 보면, 물체가 그려져 있는 부분과 그려져 있지 않은 빈 공간이 뚜렷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우지 않고 빈 공간이 많다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이 이른바 '여백의 미'이다. 이는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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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그림에는 모두 빈 공간이 있다. 그러나 두 빈 공간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명대(明代) 진홍수의 그림은 반 이상이 빈 공간이다. 그나마 그려진 부분 역시 대부분 자연 산수이고, 사람과 건물은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의 여백은 광활한 우주 속에 사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다음 페이지의 오휴(吳休)의 그림은 하단부에 자그마한 빈 공간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외견상의 여백은 작아 보이지만,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담아 내고 있다. 위로부터 길게 뻗어 내리는 폭포수 아래에는 이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미학은 산수화뿐만 아니라 인물화에도 적용된다. 증경(曾鯨, 1568-1650)의 〈왕시민소상도(王時敏小像圖)〉를 보자. 이 그림은 증경이 당시(明 萬曆 丙辰 五月) 25살이던 왕시민을 그린 것이다. 왕시민은 명말 청초의 화가였다. 먼지 털이개를 들고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왕시민의 모습은, 면(面)보다는 선조(線條)가 중심이다. 인물 외에는 배경에 아무 것도 장식하지 않았다. 실처럼 부드러운 선만으로 한 인물의 풍모, 즉 사대부의 지고한 인격, 엄숙한 자태, 단아한 외모를 유감없이 부각시킬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이 그림 속에서 우리가 잔잔한 음악과 간결하고 고요한 정조를 느낄 수 있다면, 이는 모두 대상의 내면을 중요시하는 미학 때문일 것이다.

전곡(錢穀, 1508-1578)의 〈동희상(董熙像)〉에 표현된 간결한 선조의 맛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편복한 여인의 반신상을 그린 것인데, 여인의 정숙한 풍모와 청순한 이미지 그리고 고매한 인격을 몇 가닥의 선으로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역시 매우 놀라운 일이다.

두 그림 모두 외형을 비슷하게 묘사하는 '형사(形似)'보다는 대상의 정신을 묘사하는 '전신(傳神)'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미학적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 그림은 간결과 압축의 기법을 사용하며, 숨겨져 있는 것이 나타나 있는 것보다 깊고 광활한 미학을 추구한다. 중국의 그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총체적 예술행위의 하나이다. 이렇게 별개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은 중세의 보편주의에 의한 것이다. 이는 중세의 지식인들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우주 속의 하나의 보편적 원리 속에서 파악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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