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한 통일제국의 출현-진(秦)과 한(漢)

기원전 247년 39세에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1) 영정(嬴政)은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다. 또한 그는 승상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학자들이 정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금하고자 학자들로 하여금 책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2)를 통하여 춘추전국 시대에 꽃피웠던 제자백가의 사상을 억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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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많은 장병을 동원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아방궁, 여산릉 등의 대규모 공사를 일으켰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력을 동원하고 가혹한 법과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에게 커다란 짐을 지웠다.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통일된 나라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었던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진 왕조의 모순은 진승, 오광 등의 반란으로 나타났으며, 진나라가 '만세 만세 만만세'까지 지속되기를 바랐던 시황제의 꿈은 사라지고 결국 이세(二世)인 호해(胡亥)에 이르러 천하는 항우와 유방의 대결구도로 넘어갔다.

진나라가 망하는 과정 속에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대표적인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여 천하를 다투게 되었다. 항우는 초나라의 귀족출신이고 유방은 농민 출신이었다. 처음에는 유방의 세력이 아주 미약하여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소하, 장량, 한신 등과 같이 훌륭한 참모와 장군을 휘하에 두면서 몇 번의 죽음을 넘기고 최후에는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홍문의 연회에서는 번쾌의 방어와 장량의 계략으로 항우의 손아귀에서 탈출하게 된다. 반면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참모가 있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항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유방에게 패하고 만다. 항우와 유방의 천하 쟁탈전에서 나온 유명한 고사를 보자. 항우는 유방과 한신에게 쫓겨 해하(垓下,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영벽현)에서 진을 치고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이 때 항우의 군대는 10만이었지만 한신의 군대는 20만이었다. 한신은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여 진을 치고 한편으로 초나라 출신 군사들을 골라 밤마다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향 노래3)를 듣게 된 항우의 병사들은 고향 생각에 사기는 떨어지고 군량도 차츰 바닥나 탈주병이 속출했다. 천하를 호령하던 항우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향 노래를 듣고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사면초가의 유래이다. 그리하여 항우는 진영에서 최후의 연회를 벌였다. 그 때 항우의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애첩 우희(虞姬)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추(騅)라는 명마가 있었다. 항우는 우희가 따르는 술잔을 들고서 치밀어 오르는 감회와 비분을 시로 노래하였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뺄 수도 있었고 기백은 온 세상을 덮었었노라.
時不利兮騅不逝. 때가 이롭지 못하니 추야 너도 달리지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 추야 너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쩌란 말이냐!
虞兮虞兮奈若何.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쩌란 말이냐!

항우가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읊으니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슬퍼했다. 그런 후 항우는 사랑하는 우희를 죽이고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항우와 우희의 슬픈 사랑을 줄거리로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경극(京劇)이 만들어지고 근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유방의 군사를 무찌르기에는 중과부적이라, 결국 항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최후를 맞이한다. 이것이 기원전 202년의 일이다. 이렇게 하여 4년 간에 걸친 한(漢)·초(楚)의 전쟁은 유방의 승리로 끝나고 한(漢) 왕조를 세우니 그가 바로 한 고조이다.

유방은 한나라를 세운 후 봉건제의 장점과 군현제의 장점을 살려 나라의 기틀을 다진다. 그리고 한신, 팽월 등과 같은 개국공신들을 차례로 숙청하여 황제권을 강화한다. 그리하여 문제, 경제 때에 이르면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되고 무제는 이를 바탕으로 대내적으로는 유가만을 존중하면서 관료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마련하고 대외적으로는 흉노를 정벌하고 서역을 개척하여 국력이 극치에 달한다. 그 후 제 14대 평제 때에 이르면 외척 왕망(王莽)이 한을 찬탈하고 신(新)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신은 제도개혁의 실패로 15년 만에 망하고 광무제가 한왕조를 다시 세운다. 이 신나라를 기준으로 그 전을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이라 하고 그 이후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 한다.

서한 동한이라 부르는 이유는 전한의 수도가 장안이고 후한의 수도는 낙양인데 장안이 낙양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한나라 왕조도 말기에 가서는 환관과 외척으로 인해 정치는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져 갔다. 그런 가운데 2차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禍)로 유생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장각은 태평도라는 종교를 만들어 세력을 확장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누런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황건적이라 불렀다. 이리하여 한 왕조는 마침내 위(魏), 촉(蜀), 오(吳)라는 세 나라로 분열되어 삼국시대를 맞게 된다.

진한시대는 강대한 통일국가를 형성하여 국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특히 한나라에 이르러서는 서쪽으로 영역을 넓혀 비단길이라는 동서교통로를 개척하여 중국과 서구의 문물을 교류하는 통로로 삼았다. 서구에서 중국을 CHINA라고 하는데 진(CHIN)나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며, 또 한(漢)은 중국의 대명사로 중국의 문자를 한자, 중국인을 한족, 중국어를 한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진한제국 문물의 서구 전파와 그 찬란함을 엿볼 수 있다.

각주

  1. 1시황제: 진의 시황제는 자기의 덕이 '삼황(三皇)'보다 높고,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뛰어나다고 하여 한 자씩 따서 '황제(皇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황위가 자손 만대로 세습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자기를 '시황제(始皇帝, 처음 황제라는 뜻)'라고 하였다.
  2. 2분서갱유(焚書坑儒): 농업·의학·점복에 관한 서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사르고 정치에 이견을 제시하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조치를 말한다.
  3. 3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하였고, 적에게 둘러싸여 진퇴를 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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