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籒文)과 고문(古文)

전국시대에 이르러 진나라는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밀접한 서주의 문자를 그대로 이어받아 주문을 사용하였다. 주문은 대전(大篆)이라고도 하는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주문에 기초하여 만든 소전(小篆)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주문 즉 대전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위치한 자체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문은 주(周)나라의 태사인 주(籒)라는 사람이 아동들의 글자공부를 위해 제정한 것으로, 그 당시 통용한자의 표준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선교회
당시 전국 칠웅(七雄)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가 서주의 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여 문자의 자체 역시 일맥상통하는 대전을 사용한 것에 반하여, 나머지 동쪽에 위치한 육국은 이른바 육국고문(六國古文)이라는 간략화되고 변화가 심한 자체를 사용하였다.

전국시대는 지역과 국가의 분열로 어문정책 또한 통일이 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서토(西土)의 대전과 동토(東土)의 고문이라는 서로 일치하지 않은 자체를 사용하게 만들었으며, 육국 사이에서도 서로 풍격이 다른 자체를 사용하게 된 주된 이유이다. 따라서 전국시대는 한자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전은 동한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에 수록된 '주문' 이외에는 확실히 밝혀진 자료가 없다. 일반적으로 석고문에 각석된 자체가 대전이라는 설이 널리 펴져있으나,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석고문은 오히려 소전에 가까우며 '저초문(詛楚文)'이 주문에 가깝다고 한다.

고문은 공자의 옛집 벽에서 발견된 '고문 경서' 즉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와 육국의 옛땅에서 발굴된 죽간·백서·도기·화폐·도장 등을 통해 그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대전과 고문을 포함한 전국문자는 형성자 수량의 증가·가차현상의 보편화·이체자의 대량 출현·자체의 간략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전국문자의 가장 큰 특징은 상나라 갑골문과 서주의 금문에 비해 상형성을 탈피하여 부호화의 초기 단계적인 현상이 발견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