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총정리(간략사)

2007.06.0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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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역사 총정리(간략사) - 중국어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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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국문명의 기원

  자바 원인 (猿人)과 함께 알려져 있는 `베이핑(北平)원인`의 뼈는 지금으로부터 약 40∼50만년 전의 구석기시대 초기의 것이라고 한다. 황허(黃河)의 유역에는 오랜 옛날부터 인류의 선조가 살고 있었다. 한(漢)민족의 고향도 역시 황허의 유역이었다. 그들은 비옥한 황토와 물이 풍성한 상류 지방에서 일찍부터 농업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최초에 황제(皇帝)가 나와 나라를 이룩하고 요(堯) 순(舜)등의 명군(名君)이 나타나고, 그 다음엔 황허의 치수 사업을 환성한 우왕(禹王)이 하(夏)나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확실한 역사는 같은 황허 중류에 일어난 나라 은(殷)으로부터 시작한다.


2.중국의 고대문명

  은(殷)문화와 한자의 발명

  은이란 나라도 오랫동안 수수께끼 속에 싸여 있었다. 은문화의 유적(은허 殷墟)으로부터 나온 궁전이나 주택의 터, 무수한 토기 도기(陶器) 청동기 보석류가 `황하문명`의 모습을 상상케 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귀중한 것은 거북의 등 과 짐승의 뼈 따위에 새겨진 갑골(甲骨)문자였다. 한자(漢字)는 이 갑골문자로 시작되어, 주대(周代)의 금문(金文 동판에 새긴 문자)을 거쳐 완성되었다.

  주(周)에서 춘추전국 시대로

  은나라가 번영하고 있을 때, 그 서쪽의 웨이수이(胃水)근처에 주(周)가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기원전 1125년에 건국되었는데, 무왕(武王) 때에 동쪽으로 세력을 뻗쳐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문화를 이어받아 최초의 봉건국가를 건설하였다. 주나라는 기원전 777년, 도읍 뤼양(洛陽)으로 옮기고 동시에 차차로 쇠퇴하여 춘추시대(기원전404년)으로 들어가고, 각지의 제후가 천하통일을 다투는 전국(戰國)시대(기원전 1112년)를 이루었다. 춘추전국시대는 약 550년간에 걸쳐 문자 그대로 세상이 혼란하던 약육강식의 시대였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학자들이 가지가지 학설을 들고 나와 천하국가를 다스릴 길을 설파하였으니 이 때의 학자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은 유교를 편 공자(孔子 기원전 6∼5세기)와 도교(道敎)의 시조가 된 노자(老子 기원전 6세기)였다. 노(魯)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인(仁)`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 도덕을 이상으로 한 세상을 만들려고 생각하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제후에게 그 가르침을 전하였다. 이에 반하여, 노자는 `무위(無爲)하면서도 다스린다`는 자연의 도를 설파하였다. 이 가르침은 상당히 어려운 철학적인 것으로서, 후세의 중국 사람들의 마음에서 살아갔다. 공자나 노자에 있어서는 서양인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동양인의 사상과 지혜와 도덕이 있다. 그러나 공자나 노자는 당시의 봉건사회 위에 서서 성인군자의 길만을 설파하였기 때문에 참다운 의미로 서민을 구하고, 사회를 진보시키는 것은 없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의 최초의 농민 반란은 주나라의 여왕( 王 9세기)때에 일어났다. 왕은 수도로부터 쫓겨나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두 사람이 정권을 다투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얼마 지나자 다시 농민들에게 무거운 질곡을 씌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사에 허다한 농민의 반란은 언제나 어떤 야심가에 이용되어 버리고, 성공하지 못한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3.진한의 통일국가와 문화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나라

  춘추시대에 백 수십을 헤아리던 진 초 연(秦 楚 燕), 제(齊), 조(趙), 한(韓), 위(魏)의 7대국으로 뭉쳐졌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통일국가를 세웠다. 이 사이에 월(越)나라의 구천(勾踐)을 도와 회계지치(會稽之恥)를 씻은 범라(기원전 5세기)의 이야기가 생기고, 또 진(秦)나라에 대해 여러 나라가 `합종(合縱) 연형(連衡)`의 전술을 외친 것도 역사상 유명하다. 자유경제와 국토개발로 국력을 기른 진나라는 기원전 1149년에 통일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진(秦)나라왕 정(政)은 천하를 손아귀에 쥐자 스스로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다. 그는 그 때까지의 봉건제를 없애고 군현제(郡縣制)를 펴고 중앙 집권적인 정치를 행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마음대로 정치를 휘두르던 시황제(始皇帝)는 비위에 거슬리는 학자들을 잡아 생매장을 하고, 대나 명주에 쓰인 수많은 책들을 불살랐다. 도 70만이라는 죄인과 보통의 농민들을 몰아서 만리장성과 아방궁(阿房宮) 등의 대공사를 시켰다. 이와 같은 학정(虐政)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각지에 번지자 진(秦)나라는 단 2대 15년만에 망해버렸다.
  이 때 다음의 천하를 쥐려고 다툰 두 사람이, `홍문(鴻門)의 회전`과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고사(故事)로 알려져 있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다. 서로 다투던 이 두 사람 중 유방이 천하를 얻어 한(漢)을 세웠다.

  한의 발전과 문화

  기원전 202년 한(漢)을 세운 유방, 즉 한의 고조는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 봉건(封建)과 군현(郡縣)을 합쳐, `군국(郡國)의 제도`를 폈다. 차차 발전한 한나라는 7대 무제(武帝)때에는 북쪽의 흉노(匈奴) 동쪽의 조선 남쪽의 안난(安南) 서남쪽의 이민족 등을 쳤다. 그밖에도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안식(安息) 대월씨(大月氏) 대하(大夏) 로부터도 공물(貢物)을 징수하였다. 그 결과 한(漢)민족의 세계는 현저하게 팽창됙, 민족의 영예가 높여짐과 동시에 동서세계를 연결하는 길도 열렸다. 서방측의 진귀한 물질 문화가 수입되고 중국의 명주며 칠기 등이 서방세계로 들어갔다. 유럽인이 이름 붙인 `비단의 길`은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황제들의 사치와 환관(宦官) 외척들의 횡포로 한나라는 얼마 안 가서 왕망(王莽 기원전 45∼113년) 때문에 정권이 무너졌다. 이 때까지를 전한(前漢)이라고 한다.
  그 후 광무제(光武帝)가 `녹림(綠林)의 도(徒)`라는 농민비적의 도움을 얻어 한(漢)을 부흥(後漢)시키고 유교에 의한 정치로 한 때는 평화로운 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후한(後漢)도 궁정 안의 싸움과 대지주들의 힘이 강해지자 차차 쇠퇴하여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계기가 되어 또다시 전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황건적의 난이라는 것도 당시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의 하나이다.
  한나라 시대의 두드러진 문화는 미술건축의 진보 천문학의 발달 한자 한문의 완성 사마천(司馬遷)의 `사 기(史記)`를 비롯한 역사책, 불교의 전래, 거기에 종이의 발명 등을 들 수 있다. 종이는 기원전 1000년경에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한다. 재료는 삼베 대 보리짚 누에고치 나무껍질 등 여러 가지 물질이 사용되었다.


4.삼국분열과 문화

  두 번째의 전란(戰亂)시대

  기원 1210년에 망한 후한의 다음은 `삼국사(삼국지)`의 시대 (1210∼1165년)이다. 위(魏) 촉(蜀 오(吳)의 세 나라에 각지의 호족과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상반되어 또다시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었다. 위(魏)의 조조(曹操)와 촉(蜀)의 유비(劉備)가 다투고 있을 때, 가지가지 묘한 술책으로 유비를 도운 사람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이었다.
  삼국의 뒤에는 진(晉)과 5호(胡) 16국의 시대(265∼420년)가 온다. 5호라는 것은 몽골계 티베트계 등의 다섯 이민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통일 상태가 헝클어지자 이를 기회로 중국 본부에 침입하여 16개국이나 되는 작은 나라를 세웠다가 멸망시키곤 하였다. 이 때 한나라의 무제(武帝)에 쫓긴 흉노(匈奴)가 흑해 지방을 거쳐 기원 400년 경 멀리 유럽까지 침입한 일이 있다.

  수(隨)에서 당(唐)으로

  삼국(三國)으로부터 남북조(南北朝)까지의 서로 다투는 시대는 370년간 계속되었다. 기원 589년이 되어 겨우 북조(北朝)측의 수(隨)도 2대 30년 정도로 망하고 말았다. 수나라시대에 가장 눈에 띄는 일은 양제(煬帝)때에 완성된 황허(黃河)와 창장(長江)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건설이다. 양제는 그런 사업을 완수하면서 사치한 생활에 날이 지고 새고, 조선 원정에 실패하곤 하여 스스로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수나라를 이은 당(唐)나라(618∼907년)는 처음에는 훌륭한 황제가 나서서 새로운 세제(稅制) 균전제(均田制) 징병제(徵兵制)등을 마련하여 중앙집권적인 정치로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 중에서도 특히 태종(太宗 627∼649년 재위)은 절도사(節度使)로 나라를 지키게 하는 한편, 군사를 보내어 조선, 티베트, 돌궐(突厥)등을 치고, 또 서아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와의 교통 무역을 성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문화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정도로 높아져 이백(李白 701∼762년), 두보(杜甫 712∼770년), 왕유(王維 699∼759년), 백낙천(白樂天 772∼846년)등의 대시인이 연이어 나오고, 장안(長安)의 수도는 국제적인 도시로 번창하였다. 이 때`서유기(西遊記)`가 나온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당나라도 해가 갈수록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775년에 미녀 양귀비(楊貴妃)에 혹한 현종(玄宗)황제에 대하여 안록산(安綠山)이 난을 일으키고, 875∼84년에 걸쳐서는 `황소(黃巢)의 난`이라고 불리는 큰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5.중국의 중세와 문화

  오대와 송(宋)의 시대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니 통일은 또다시 헝클어지고 오대(907∼960년)의 전란이 게속되었다. 이 시대에는 당나라의 귀족들이 영락하여 지방의 방위에 당하고 있던 절도사(節度使)들의 힘이 강해졌다. 오대 즉 다섯 나라가 연이어 흥망한후, 후주(後周 950∼60년)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이 제위에 오르고 송나라(960∼1279년)를 일으켰다.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니 산업도 진흥하고 상업 자본도 발달하였다. 문화상으로는 당나라의 귀족문화에 대체하여 서민적인 문화가 성하였다. 서양의 르네상스의 3대 발명이라고 하는 나침반 화약 인쇄 등이 중국에서는 송나라시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몽골 대제국 원(元)

  이 때쯤 해서 북방의 고원에는 새로운 몽골족이 일어났다. 12세기에 들어서 징기스칸이 나타나자 곧 민족을 통일하고, 1219년에는 웅대한 정복의 길로 나섰다. 징기스칸은 도중에 죽었으나, 단 몇 십 년 동안에 중앙아시아, 북서인도, 러시아, 동유럽까지 짓밟고 역사상 가장 큰 유목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쿠비라이가 제위에 오른 1271년에는 제국의 이름을 원으로 고쳐 베이징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한민족을 지배한 원은 언제나 몽골 제일주의를 취하고 중국인의 전통과 문화를 짓밟았다. 그 때가지 중국에 침입한 이민족은 모두 중국문화에 동화되었으나 원은 그렇지 않았다. 대제국 건설로 동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이 열리고, 마르코폴로를 비롯한 서양 사람이 기독교를 가지고 중국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원제국도 백 년이 못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패망의 원인은 정치하는 방식에 무리가 있었고, 관리들의 부정이 불어갔고, 아니 무엇보다도 한민족이 스스로의 증지를 찾아 반항의 불길을 올린 것이다.


6.중국의 근세와 문화

  명(明)에서 청(淸)의 시대로

  몽골족을 쫓아내고, 한민족을 위한 중국을 부활시킨 것은 1368년의 일이다. 이것이 명나라다. 최초의 황제가 된 주원장(柱元章)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자라나서 거지 노릇을 하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제위에 오르자 농민의 일은 잊어버리고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수만 명의 신하와 학자들을 죽였다. 이 때문에 연왕(燕王) 체( )가 군사를 일으켜서 1402년에 제위를 빼앗아 수도를 난징으로부터 베이핑으로 옮겼다. 명나라시대의 문화적인 업적으로는 2천명의 학자를 모아 대박과(大百科) `영락대전`을 만든 사실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중국과 서양의 발걸음을 비교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수 당 송나라 시대의 문화는 확실히 서양에 앞서 있었다. 서양이 중세의 암흑시대에 있던 때에 중국은 이미 높은 문화를 건설하였다. 명나라가 성립한 무렵이 서양의 근세에 해당한다.
  동양과 서양의 지위는 르네상스를 경계로 하여 거꾸로 되었다. 과연 16세기가 되자 유럽인이 와서 중국인이 모르는 문명을 보여 주었다. 1537년에는 포르투칼인이 마카오에 식민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동북의 땅에 있던 금나라의 뒤를 이은 만주 사람의 후금(後金)이 일어나, 1662u년에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淸)을 세웠다. 이리하여 한민족은 다시 이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청의 발전과 아편전쟁

  청나라는 원나라보다 훨씬 오랜 1911년까지 250년을 다스렸다. 그러나 소수의 만주 사람이 중국을 어떻게 오랫동안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한민족의 사회가 낡은 중세적인 신분에 얽매여 서양 같은 국민 국가로서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에 가장 강하였으며 당시 인구는 1억을 넘었다. 나라 재정도 윤택해지고 외국에 상품도 많이 수출하여 많은 은화도 획득하였으나, 이것이 곧 근대화의 길은 아니었다. 청나라는 그저 겉치레의 번영을 이루고 있을 뿐이었다. 19세기로 들어서자 서양의 여러 나라는 날로 발전하여 동양에 침략의 손을 뻗쳤다. 당시 중국으로부터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있던 영국은 산업혁명의 결과 넓은 해외시장이 필요해지자 중국과의 일방적인 수입무역을 하고 싶다고 제의하였다. 청나라의 반대에 불구하고 영국은 영국의 면제품을 인도로, 인도의 아편을 중국으로, 중국의 명주와 차등을 영국으로 하는 식의 삼각 무역을 시작하였다. 아편이 갑자기 중국으로 밀려들었다. 중독환자가 늘고 중국인은 마음도 육체도 좀먹어 갔다. 애써 벌어 놓은 외국의 은화는 잠시 동안에 다시 외국으로 흘러 나갔다. 1831년 청나라는 아편수입을 금지하고, 1838년에는 영국 상인이 가진 아편을 몰수하고, 영국 무역선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은 무역보호라는 이유로 전화(戰火)를 일으켰다. 이것이 소위`아편전쟁`이다.
  아편전쟁은 비참하였다. 영국의 군함과 대포앞에 청나라 군대는 모래밭의 누각처럼 대패했다. 난징 조약으로 전쟁은 끝났으나, 청은 자유무역과 외국인의 특권을 인정하게 되자, 이로부터 유럽 여러 나라는 차차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50년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해 청나라를 타도하자는 기치 아래, 기독교도 호수전(洪秀全)이 우두머리가 되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켰다. 이 난에 가담한 사람은 토지를 잃은 농민, 실직자들을 비롯한 청나라에 불만을 가진 대중들이었다. 이 난은 14년이나 계속되었다. 이 난리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의 민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난을 평정한 것은 청의 지배계급과 결탁한 제국주의의 힘이었다. 이 난리 중에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들에게 유리한 텐진(天津)조약과 베이징(北京)조약을 체결시켜 침략의 발판을 굳건히 하고 있었다. 이들 외국 제국주의 세력은 중국에서 여러 가지 권리를 획득하는 한편, 자본가 대지주 관료 등의 뒷받침으로 백성의 반항을 눌렀다.

  손문(孫文)의 혁명까지

  얼마 지나자 일본도 침략자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일본이 대륙에 손길을 뻗칠 계기가 되었다. 이제 무력해진 청은 침략에 몸을 맡길 도리밖에 없었다. 분함을 참지 못한 중국 백성들은 의화단(義和團)을 조직하여, 외국인을 습격하였다. 이 때문에 철도부설권 광산부설권 등 모두 외국의 손에 넘어가고 독립국이란 말은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20세기를 맞이할 전야였다.
유럽 여러 나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에서 독립의 싸움이 시작된 때였다. 이 때 새로운 중구그이 아버지로 나타난 사람이 손문(孫文)이었다. 그는 광동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널리 지식인 농민들에게 호소하여 혁명운동을 추진하더니, 1911년 `신해(辛亥)혁명0의 결과 마침내 청을 넘어뜨렸고 다음 해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중국은 완전히 구각을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이 된 원세개(袁世凱)는 엉뚱한 생각을 품은 야심가로서 손문 계통의 혁명파를 누르려고 하였다. 국내에는 많은 군벌이 다투고 있었다. 군벌은 봉건적인 제도와 습관이 뿌리 깊이 남아 있었다. 손문은 그가 창도한 삼민주의의 이상도 실현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과 중일전쟁을 거치는 등 현대의 중국역사는 험한 길을 밟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