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주해 제2권

2007.06.03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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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 주해 제2권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26
게시일 : 2001/12/30 (일) PM 04:45:00  (수정 2006/02/19 (일) PM 07:52:06)    조회 : 110  

계시록  주해 제 2권 - 백영희목사님

(노트제2권)

길의 극히 좁은 한 줄기의 빛만 왕래하게 하는 골방이다. 이는 아 1:4 왕의 후궁중의 후궁이니 성도들은 유형의 감옥보다 일층 엄한 무형 감옥 중에서도 결코 낙망은 말아야 한다. 거기서 자기와 세상의 짐을 벗고 한줄기 빛의 좁은 길 보좌에서 흘러내리는 생수로 목욕하며 주와 깊은 영교에서 가장 주가 원하시는 결합과 제물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한다. 롬 8:31-39까지는 이 세계에서 한 바울의 신앙 간증의 전기이다.
4.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니" 이 해석은 동일치 않다. 모 주석가들은
⑴ 날수를 년수 상징이라하여 로마의 디오클네시안 황제의 10년간 혹책한 박해를 가르침이라하고
⑵ 또 로마시대 10대 박해자 곧 네로, 도미시안, 트라얀, 아우델리우스, 세베루스, 맥시멈, 데키우스, 발네리안, 아우델니안, 도미클네시안 황제시? 의 10시대를 가르친 것이라고 하였으나 믿을 수 없다.
⑶ 크레다너스는 한정이 있고 길지 않는 기간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연한다.  
⑷ 한정되어있는 기간의 환난인 것과 또 만수(滿數)되는 일들을 가르친 것이다. 만수에 대해
①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에 만족되시기까지
② 성도 그 자체로 그 시험으로 인한 부분의 완전 성화와 완전 승리의 판결이 나기까지의 시험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진실성을 보인다. 사이비한 것들이 통과되지 못한 투명한 시험이다. 예를 들면 과거 입감(入監)하여 있다가 변절한 수개월 후 8.15 해방을 만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수개월 전에 해방되었으면 이 사람도 승리의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하나님은 그것까지 그 잡(雜)것을 승리로 인증치 아니하여 금을 연단하듯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과 인간적으로 된 전부는 실패로 구별되기까지의 시험이라는 것을 가르쳐 '10' 수의 시험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험의 그 양은 다르나 질은 같으니 거짓 것을 옳은 것으로 통과시키시는 속는 시험이라는 의미이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1.충성은 자기를 빼 세운 그이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뽑아 세운 그이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 '충'이니 특히 군신장병(君臣將兵)과 주인과 종 사이들에게 쓰는 언사이다.
2.결사적의 죽는 날까지 충성을 의미함이 아니고 충성함으로 죽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충성은 아무리 충성하였을지라도 살아있는 정도이면 주의 요구의 만족된 충성은 되지 못한 것인 줄 알아야 된다.
3.이 충성을 할 때에도 자기 것 가지고 하는지 알면 잘못이다. 주의 피에 팔린 주의 것으로 충성한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생명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이 생명은 이 세상 육신대로의 생명이 아니고 참된 생명이니 예수 그리스도로 부여 된 새생명이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2.중생 된 생명이니 이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함은 이 생명으로 사는 승리의 생활을 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생(內生)하시는 승리의 생활, 곧 그리스도께서 재세에 겪으신 그 자체(姿體)를 따라가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언제나 승리의 생활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쌍방의 행위 계약적으로 되어있다.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을 면류관으로 주신다고 하였다. 이 생명은 생명으로 생명에 충만한 극치적의 영광된 생명이니 곧 승리하는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1. 이기는 자는 사대관을 바꾸고 환난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를 가르침이요.
2.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함은
① 영육이 나누이는 사망이 아니고 부활한 영육의 전부가 지옥에 던지우는 것을 가르친다.
② 택소자(擇召者)에게 재세에 있어서는 첫 죽음은 영육의 분리인 죽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낸 죽음이다. 그러므로 둘째 죽음은 영육이 나누이는 별세인 죽음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니 곧 죽음의 두려움과 세상 모든 사물을 이별하는 슬픔과 또 사망의 성질에 소속된 각양 해를 받지 아니하나니 요 11:26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심과 같은 자이다.

3. 10절로 11절까지를 보면 진리 파수와 투쟁에 두려워 아니하고 충성하려는 자마다 사망적인 해를 받을 거 같으나 도리어 사망에 소속적인 각양 피해가 없는 평안과 기쁨과 안전의 길이 되리라고 하셨다. 이를 체험한 바울은 고후 1:5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라고 하였다.

주의 : 성도들아 정신차려라 사랑하는 목자를, 충성된 장로 집사를, 떨어질 줄 모르던 동지 존경하는 교우를 원수에게 팔고 나 혼자 남아 버린 자식으로 원수의 앞잡이된 내 정체가 되면 어찌하려는가 피 흘려 주신 주님 앞에 어찌 서며 성도에게 그 수치를 어찌 받으랴 정신차려 금일에 4대관을 바꾸어라. 옮겨 서라. 별 수 없나니 자율의 각오와 결심으로는 풍전등화 같나니 아이야! 인생관을 바꾸고 중생자로 살아라. 땅 위의 것은 다 지고 영원의 것이 전개되나니라. 연약한 인생들아! 바꾸어 주옵소서. 아버지여 바꾸어 줍소서. 4대관을 4대소유를 바꾸어 주옵소서. 땅 위의 세월을 내 것 삼으려 하니 영원한 세월이 빼앗기게 되고 육의 생명을 잡으려 하니 영원한 죽음이 내 영혼을 누르나이다.
십자가 고난이 비록 고달프나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앞에 보이고 홍포의 부요의 영원한 빈궁이 나를 경계하오니 무절제의 갈대 같은 인격이니 나를 잡아 주의 길에 맵소서. 한마디 책망, 터럭 같은 손해에도 선배와 동지를 배신하는 내 인격이오니 세상 4대의 소유를 적에게 주고 수진(守眞)할 가망은 전혀 없는 내니 아이야! 4대관을 바꾸어 주의 손에 잡으시옵소서. 주님과 성도들은 골고다에 생명길로 가시는데 나 혼자 외롭게 떨어지면 어떻게 하렵니까. 천국 문에서 만날 때에 내 얼굴빛 가리움을 어떻게 보렵니까.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옵소서 라고 호소할지니 별 수 없는 인간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三. 버가모 교회에 보낸 서신 12절-17절
버가모는 서머나에서 북으로 240리 되는 강변 도시로 로마 황제 예배하는 신전과 에이쓰쿨타피우스라는 뱀신 전각이 있고 또 제우스 신전이 있어 우상의 총본지라 할 수 있고 큰 도서관이 있는 인구 12,000가량의 작은 도시이다. 이 교회를 셋째로 기록한 것은 그 도시의 중요성의 의함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 셋째의 중요성을 가진 사건인고로 셋째로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주권을 바꾸어 하나님께 두어야 할 것을 보인다.

1.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
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① "좌우의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이니 "좌우"는 자타 수모(誰某:누구)를 막론하고 지공하신 심판을 의미함이요.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밀과 고심과 엄위적인 지혜의 권위 심판을 가르침이다. (히 4:12 참조) 그러므로 인간 자신이 모르는 죄과까지 깊이 세밀히 수술 혹은 심판의 권위를 말한다. 칼인 말씀이 예고할 때에 말씀에 걸리는 입장에서 옮겨서는 자에게는 긍휼과 자비의 능한 수술 검으로 상해없는 치료의 복음이 되고 회개치 아니하고 기회를 지난 자에게는 진노의 정죄와 심판의 율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② 버가모 교회는 나타나신 주님을 보아 끊어야 할 죄악이 있는 것이 그 내용을 살피기 전에 보여진다. 누구나 이 검에 걸리는 부분을 세밀히 발견한 자가 지혜롭고 끊기기 전에 옮겨서는 자가 복되다. 언제나 구원의 은혜가 지나간 후에는 심판이 오는 것이 성경이며 또 역사이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1. 주께서 친히 버가모 교회에 입장을 아신다는 것과 또 그들의 당하는 역경의 고난을 세밀히 체휼하신다는 위로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살피시니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신 사랑이요. 후에는 우리의 단점을 세밀히 살피시나니 이는 시은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자를 교양함에는 단점보다 장점을 찾기에 먼저 주력하여야 한다. 버가모 교회는 우상 본부적의 박해 많은 입장을 아신다는 위로이다.
"거기는 사탄의 위가 있는 데라"
1. 대도서관이 있었으니 각 지식욕의 과분의 우상이 있었고
2. 황제예배 전각이 있었으니 강압적인 우상이 있었다. 1,2,3의 우상의 종류는 각이하나 그 이면의 우상은 하나이니 곧 자아이요. 우상숭배의 원인도 하나이니 곧 불신에서 난 것이다. 진실한 신앙을 가지지 아니하고는 자위(自爲)생활인 우상을 버릴 수 없고 자아 우상을 버리기 전에는 우상 시험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행사보다 그 원인인 자아 우상을 살피시고 그보다 그 원인인 불신 그것으로서 정죄 하신다. 사람들은 우상 범죄의 행사에만 치중하고 범하지 아니한 우상숭배자는 정죄 할 줄 모른다. 이는 다 보이는 것으로만 표준 삼는 것이니 외식이요. 금송아지 만든 죄와 같은 죄 중에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1.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는 말이요.
2. 주의 과거의 사역과 미래의 약속과 섭리를 굳게 신앙하면서 의지하고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이름은 단순히 예수님이라 함이 아니고 주님의 각 성호와 그 속성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를 다 믿는 것이 그 이름을 믿는 것이다. 오늘 신자 중에 단순히 예수님 이름이나 부르고 부인 안 하는 것으로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허락한 구원을 받을 줄로 아는 허위적인 신앙이 많다.

1.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가운데 곧 사탄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 안디바는 제 3세기 버가모 교회에서 우상의 박해로 순교당한 사람이라고 터툴리안은 말했다.
2. 순교는 심히 드문 것이며 귀한 것이다. 기독교의 최상의 영광의 축복이다. 특히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함같이 고래로 순교는 충성된 자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할 만큼 역사가 그러하다. 순교는
① 주께 제일 귀한 생명을 바쳐 정사(情死)하지 않고는 만족이 없는 성도와
② 그리스도와 맺은 정절이 생명보다 귀하게 보관된 신부적 성도와
③ 어서 떠나 주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자에게 맺히는 열매이며
④ 성결을 세상 모든 전부보다 귀중히 가지는 거룩한 자와
이상 이 조건들이 구비한 자을 정한 생명대로 다 마치고 마지막 별세 시 잠재한 사랑을 최종으로 전부 폭발시키는 것이니 평소에 발휘할 수 없는 주애(主愛)를 다 발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랑하기 어려운 입장을 주시는 것이요. 또 주를 사랑하는 그 모양대로 하늘나라에 영원히 옮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사랑함이 강하고 뜨거울수록 순교의 잔인과 박해가 심하고 긴 것이다.
3. 사탄에 거하는 곳에서 순교를 당했으니 버가모에 설비된 각 우상과 활약한 사탄은 안디바를 위하여 하나님의 허락으로 예비된 것이 분명하다. 생명은 분명히 폐물이면서 주께만 바친다면 제일 귀한 보배와 선물이 되는 것이다.
4. "나를 믿는 믿음은" 주를 믿는 믿음이니 이들은 안디바의 순교시에 배반치 아니한 수신자(受信者)들이니 다 순교의 각오를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는 배신치 아니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을 만나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여기에 몇가지 생각할 것은
① 순교의 각오를 하여도 하나님이 아니 받으시니 하지 못하였고
② 마 10:41에 기록한 선지자의 상급의 동참하는 귀한 축복은 순교 당시나 후에 선지자로 대접하는 한 법도 기억해야 한다.
③ 안디바 순교시 원수의 앞잡이도 있었을 것이요 또 참 신앙으로 또 변절자로 또 남의 등불로 담대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두어가지 책망할 것"
1. 두어가지란 말은 둘 이상의 복수를 가르킨 것이나 한 수도 될 수 있는 적은 수를 말함이다.
2. 책망할 것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말함이니 두 교훈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실상은 동일한 교훈이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
1. 발람의 교훈은 민 31:16과 25:1-5에 기록되어있으나 니골라 당의 교훈은 계 2:6과 15에 니골라 당의 행위또는 교훈이라고만 기록되어있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기록되지 않았다. 교부 이레네오의 말에 의하여도 니골라는 7집사중 일인이라고 하는 것뿐이요 그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 이름조차 믿을 수 없다. 이유는 성신의 충만한 집사가 타락할리가 없다. 그러나 니골라 당의 이단 사상의 내용을 밝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발람의 교훈을 가르켜 15절에 이와같이 니골라 당의 교훈이라 하였으니 곧 그 두 교훈은 동일한 이단임이 분명하다. 같은 내용의 이단을 다른 이름으로 표시한 이유는 이단의 술책의 원리를 보인다. 시대마다 같은 이단이 다른 탈을 쓰고 있다.

2. 이 이단들의 드러난 죄악은 이스라엘을 우상 제물먹게한 것과 행음하게 한 것이나 은밀한 죄악은 그 외에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과 니골라의 죄악성만이 있음이 아니고 거기에는 발람, 발락, 모압여인, 이스라엘 이 넷이 연대 범죄성의 죄악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죄악들을 보기로 하자.
⑴ 발람의 죄 ...... 이방 선지로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자.
① 소망을 세상에 둔 것.(물화:物貨, 위:位, 권:權) 세상 지애(至愛)주의 민 25:13-31:16
② 발락 주권주의 ........ 발락은 모압 왕이니 부귀 권유자(勸有者) 그가 이것들을 가지게 하여 줄 주권이 있는 줄 알았다. (대하 16:12,2 대상 21:1-)
요리(要理): 교역자가 세상을 생각하면 장로는 도적이 되고 교인은 강도된다.
③ 거짓 기도의 죄
ⓐ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면서
ⓑ 이해간 순종할 각오없이
ⓒ 선(先), 자의 (自意) 정하고. 후(後) 주께 문의.
④ 발락과 손잡은 죄, 부귀, 권(權), 세적(世的) 인격보고 하나님 백성 해하려는 자와 손잡은 것. 금일도 세상적으로 성직을 택하는 자들은 발람과 발락같이 기본 교권과 은사 교권들의 범죄하는 일이 많다. 왕상 19:15-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듣고 하사엘, 예후, 엘리사를 택하여 기름부음같이 성직을 택함에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받고 또 신앙 중심으로 남녀노소를 성경법대로 택할 것이다. (매수당하는 죄)
⑤ 하나님 거역 죄
ⓐ 하나님의 지시를 경히 여겨 하나님 의사를 알고 또 하나님의 의사 아닌 줄 알고 기도하는 것. 자기 의사 이루기 위함인 죄.
ⓑ 하나님 뜻을 거슬려 노하여 허락한 고통에도 부정(不停)하는 죄.
ⓒ 나귀의 막음도 불청(不聽).........금일도 섭리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릴 때에 거역함이 죄가 됨.
⑥ 우상의 제물을 먹게한 죄......영적으로는 세상주의의 인생관을 부러워하는 미혹 이것이 자라 세상 지상주의로 사는 우상 섬기는 자되고 이것이 곧 신령한 행음이 된다.
⑦ 발람의 이중 행동
ⓐ 기도로는 이민(以民:이스라엘=以色列)을 축복
ⓑ 행동은 발락 협조 올무

결론 : 발람은 세욕(世慾)의 이단이니 특별히 교회 지도자를 가르친 것이다. 평신도도 범할 수 있는 죄악이다. 이 잘못된 길을 시작한 발람은 순교적인 제단 쌓고 사지에서 4차 순종했다. 그러나 방향을 안돌릴 시 결과는 자타가 망하였다. 민 23:-24:

⑵ 발락의 죄악
①猜忌
ⓐ시기죄는 좋은 줄 알고 해하는 것이니 인간 대적이 아니요 진리 대적의 죄.
ⓑ 옳고 좋은 줄 알고 부러워하고 난 후에 범하는 죄니
㉠ 형제의 선을 축복을 기뻐하고 주의 것이니 자기 것 곧 신랑의 것이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게 여기도 또 좋아하여야 남편을 대접하는 것이며 기쁘게 하는 것인줄 알고 또 주께 감사하는 자가 되면 그는 개가(改嫁)할 딴 마음을 가지지 아니한 자니 주와 더욱 밀접하여지고 시기 한번한 그 복이 효과적으로 자기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자기는 그 복보다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인 주님을 모시게 된다.
㉡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그다음에 형제가 그 복 가진 것을 진정 기뻐아니하고 주께 감사치 못하는 사람되면 그 다음은 시기된다. 이는 의와 선과 진리를 대적하여 주를 노엽게 하는 입장이 된다.
② 하나님의 뜻 이루는 것보다 자기 뜻 이루기를 원한 죄(사욕을 위하여 하나님 백성을 해할 계획)
③ 하나님의 종 매수 (세상 부귀 권으로 교역자와 은사 교권과 기본 교권을 매수함)
④ 산상 제단 쌓은 것.
ⓐ 하나님의 뜻을 막기 위한 모략적 제단
ⓑ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기 위한 제단(이간 되게)
ⓒ 하나님의 선지를 이중의 사람만드는 죄(곧 기도와 행위가 이중되게 함같이 금일도 설교자에게 성경과 기도에서 받은 진리대로의 설교로 하지 못하게 반향하여 축소시키는 발락의 행동들이 많다. 이는 다 사탄의 무리다. 만일 진리대로치면 회개로 감사하고 진리아닌 사감인 복수성(復讐性)이면 설교자를 위하여 울어야 한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싼 생명의 제단을 복수의 이용, 살인 대로 범성죄인 까닭이다. 히 10:30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다 하였다.
ⓓ 금일도 교역자와 특별집회와 강사 청빙 이런 일들에 있어 발락과 같이 이 세상주의자들은 교인들의 영혼을 기르는 목적보다 자기 입장의 유리를 위하는 일들이 있기 쉽다.
⑤ 우상 제물 먹게 함(발람과 협의하여 범한 죄니 금일도 교인들에게 세상을 부럽게 만드는 유혹의 죄)
⑥ 행음하게 함
ⓐ 이민은 육적 행음이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범한 죄 (고전 3:17) 사욕대로 쓴 죄.
ⓑ 육적의 사랑으로 영적 사랑을 가지지 못한 죄.
ⓒ 몸 안에 있는 죄.
ⓓ 영적으로는 우상 제물먹고 행음한 것처럼 세상 부러운 유혹받은 후는 상필(常必) 세상과 짝되는 속화적 행음 교회가 되는 것이다.
ⓔ 성도의 교통은 엡 5:19과 마 6:33 기타에도 영감과 신령한 시와 그 나라와 의에 대하여만 화답하고 사모하라 하였다. 신약 전 성경의 물질, 명예, 권세등의 세상을 구하라는 교훈은 한번도 없다. 있다면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 한번 뿐이다. 구하기 전에 아시고 주신다고 하셨다. 성도의 교통의 세상을 보이고 부럽게 하는 일은 발락의 이단인줄 알아야 한다.
⑶ 모압여인의 죄
① 발락 왕에게 매수당하여 이용된 죄 (금일도 간교하게 세권주의자에게 물질, 조력, 친절, 친족, 동류의 조건들로 인하여 매수 당하는 일이 많다. 기본교권과 은사교권을 파는 죄가 되나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파는 것이니 곧 가룟 유다이다.
② 우상제물 소개죄 (인본, 세본, 육본주의의 세상적 권위교인에게 맹종하여 세상부러워하는 소동이다. 그런 인물들은 교회에서 존대하고 수종(隨從)함으로 교인들의 주목을 그런 자들에게 기울이게 하는 간교한 모압 여인들이다.)
③ 행음하게 함(세상, 지상으로 주를 제 이로 섬기는 자 되게 하는 새떼같은 속화신자들이 많다. 모압 여인은 육적 행음케 한 것이니 금일도 정숙지 아니한 이성 교제와 불경의 장식으로 부정한 결과를 맺게 하는 일과 또 형식적 우상을 용납하는 일도 있다. 국기 배례, 추도식 또 십자가형, 성화등은 다 우상이다.)
⑷ 이민의 죄
① 무지의 유혹(은사교권에게 맹종자들)
② 하나님의 율법 배반(세상주의 유혹으로 세상에 정신을 기울임)
③ 우상 제물먹고 행음함 (속화됨)
⑸ 결론 : 차(此)죄의 보응
① 이민은 차(此)죄로 24,000명 죽었다고 고전 10:8, 민 25:10, 31:16에는 이 범죄로 회중이 염병으로 죽었고
② 발람은 이민에게 피살되었고
③ 비느하스가 이스라엘 남자와 미디안 여인이 회중으로 동행하여 오는 것을 한 창에 남녀 배를 꿰뚫어 죽일 때에 하나님의 노가 물러가고 염병도 끊쳤다.

16절 "그러므로 회개하라"
1. 버가모 교회에 이런 중대한 죄악이 있으나 주님은 사죄와 용서의 길을 두시고 회개를 권고하셨다. 기독교는 회개의 특권을 받은 것이나 시기를 지나면 도리어 노가 커진다. 범죄에 대하여 낙망은 불신의 죄에 속하고 회개와 사죄의 약속을 빙적(憑摘)하여 죄와 투쟁에 진력하지 않은 자는 히 10:29 언약의 보혈을 불결한 것으로 여기는 무서운 죄를 범함이 된다. 짐짓 죄는 사유할 도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한다 하신 것은 위에 회개를 권하신 자비의 주님이 이제는 진노와 심판의 주님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이러하시다. 먼저 구원 후에 심판 그 다음의 것은 멸망이다.
2. 속히 임하신다 하심은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지 아니하신 것과 또 주관적으로는 심령이 완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이야 오지 아니 하리라하는 그때에 임하심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이다.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그들이라 함은 선민을 대적하는 자들은 물론이려니와 택자라도 회개치 아니할 때에는 주님과 싸우는 적의 편이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대적을 거저 두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2.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 것이나 12절에 있는 검과 16절에 있는 검은 같은 말씀이면서 역사가 다르다. 전자는 자비의 기술 만능의 수술검이나 후자는 소멸하시는 심판의 말씀이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놓친 까닭이다. 14절을 보면 의가 있는 버가모 교인들에게 이단의 책망을 한 것 보아 회개는 연대 책임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죄의 보응은 대신함이 없는 것을 대하 25:4, 신 24:16, 겔 18:20 이하에 말씀하였다.

17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돌을 줄 터인데"
1.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을 배반(背反)치 아니하고 발람과 발락과 모압여인과 이민(이스라엘민)의 그 죄악을 회개한 자를 가르침이다.
2. "감추었던 만나" 전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나 이사야가 만나를 담은 법궤를 감추었는데 메시야 시대에는 이 만나가 공개된다고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감추었던" 이란 말은 이 세상에는 없고 하늘에만 있다는 의미로 만나는 천계에서 먹는 양식이라고 하였으니 의연하고 크레다나스도 역시 이와 비슷한 해석을 취하여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하고 놀랍고 영화롭고 참된 양식이라고 하였다. 여기 감추었던 만나는 신령한 양식이니 감추었다 함은 회개(기본회개, 평생회개)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들어도 보아도 만나도 모른다는 것이요. 회개함에 따라서 만나의 은혜는 점점 그에게 부여된다는 것이니 세상에서는 회개치 아니한 자에게 감추어있고 내세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내리는데 새 예루살렘에 감추어있다.

3. 만나는 영의 ① 생명을 유지하고 ② 자라게 하고 ③ 힘을 주고 ④ 또 복음이 약속된 전복(全福)을 다 실제로 소유하게 하신다는 의미도 가진다. 그러므로 감추었던 만나는 ① 마 4:4 하나님의 말씀 ② 요 4:34 성령의 은혜 곧 생수 ③ 요 6:51 그리스도의 피와 살
그러므로 말씀의 은혜와 보혈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와 약속된 모든 축복 그 전부를 회개하는 자에게 회개하는 대로 따라 실지로 주시마고 하신 약속이다. 금생에서 시작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주신다.
4. "흰돌을 줄 터인데" 흰돌은 그리스도와 성도를 상징한대로 있고 (벧전 2:4-6) 흰 것은 성결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 두 명사는 성결하신 주님을 올바로 발각하여 올바로 믿고 내 것같이 영접하며 이 주님을 내주로 완전히 영접함을 따라 자신이 성결생활 하도록 권위를 주시마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속성과 전인격이 그리스도화 되여 참 그리스도의 지체됨을 말한다 그 이면에는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전과 정절이 특히 정숙한 것을 의미한 것도 있다.

"그 돌 우에 새 일홈 기록한 것이 있나니"
1."그 돌 우에라 함은 그 성결한 생활과 그리스도화된 성화인격을 석판과 같이 삼아 글을 각한 거와 같이 그 위에 그리스도를 견고히 확실이 모심을 말함이니 곧 이런 성도는 보좌가 되고 주님은 좌정하신다는 의미와 또 이런 성도는 몸이 되고 주님은 그 위에 머리가 되신다는 의미이다. 위에   이름을 기록한다 하였으니 만나먹고 힌돌 받은 그 전부가 그리스도만 위하여 각판이 이 글을 위하여 발등상이 앉는 사람을 위하여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함과 이런 것같이 그 위에 기록할 새 이름만 위하여 준비한 것이란 의미이다

2. "새 이름을 기록"한다 함은
(1)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니 그리스도의 새로운 모든 일들 곧 행위들을 말함이니 세상에서 역사 하신 일이나 나타난 일이 아니고 천적(天的)의 것을 말한다
(2) 그리스도와 천국에서 관계될 그 관계를 이긴자에게는 벌써 내세에 가진다는 것이다 (친밀 경애 감사 찬송 신종:信從)
(3) 일반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를 알 그대로 재세 시에 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중요한 지식인가 천국에서 주님과 천국 외에 탐할 것이 무엇이 있으며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와 그 통치의 일에 대하여 이와 같은 지식과 관계를 지상에서 가지는 행복을 주신다는 말이다. 혹 해석에 이름을 이긴 자, 자기 이름이라 하여 이긴 그에게 세워주신 본질과 인격과 영광을 지위의 선물을 주신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긴 자의 본질과 인격은 흰돌에 포함되었고 영광과 지위는 세상에서나 천국에서 막론하고 상기한 대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여하에서 곧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자기의 옳은 행위 위에 자기의 이름 곧 자기의 것들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오히려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것보다 영광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고로 이 해석은 좀 믿기 어려운 것이다 계 3:12 -승리한 빌라델비아 교회도 주님이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였다고 했다

"받는자 밧게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나니라"
1. 상술한대로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세상에서 가진 자에는 아무도 다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들어도 알 수 없다 함이다
2. 그리스도관과 천국관과 그 관계를 천국에서 가진 것같이 세상에서 가지게 하는 유일의 법칙은 배움이나 연구나 들음으로 도무지 가질 수 없고 이기는 것으로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김으로 주께 받아 가져본 자만이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3. 우상의 세상과 발람과 발락 같이 세상주의 또 인간주권주의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거부하는 성도의 박해는 종신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십자가의 길 걷는 자에게 신실하신 주님은 우상과 세상 주권보다 나은 만유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저희에 주가 되시고 세상부귀와 영광과 지위보다 좋은 그리스도와의 특수관계인 저희와 그 나라에 대한 준비에 열중하게 하여 은밀한 가운데에 큰 부요를 사게 하는 은사이다


4.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서신 18절 - 29절

이는 현명(現名) 아키사라고하는데 루디아의 루카 강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루디아에 고향인 듯하고 그로 인하여 교회가 설립된 듯하다. 상업 번성지요 인공조합이 많이 있어 생활통제로 말미암아 개인행동을 취하기 심히 어려웠다. 그들은 우상제물로 연회를 자주 있어 신자도 동참하게 되며 또 제물 먹는 일을 하기 쉬웠다. 또 남신 여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그 유풍(流風)으로 이성교제에 문란하여 사회나 교회가 실제로 음란으로 더러워진 듯하고 여신을 섬기는 여선지가 있어 이것을 가르쳐 이세벨이라 한다.

그러나 미상(未詳)하다. 또 그리스도의 대속을 오신하여 반율주의적인 잘못된 교리가 있는 듯하다. 총괄적으로 하여 말하면 자율주의에 이단을 경계한 것이다. 두아디랴 교회을 넷째로 기록한 이유는 자율과 타율을 바꾸는 것이 4차 중대한 고로이다.

두아디랴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
18절"그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갈아사대"

1."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이라 하심은 1장 14절과 15절 해석을 창조할 것 이 교회는
2."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함은 두아디라 교회는 사이비한 외식적의 교회인고로 불꽃같은 눈으로 나타났고 거기 대하여 주는 분개하사 이 모든 행사들을 심판하여 멸하시겠다는 뜻이니 그 외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⑴ 가견적인 형식교회보다 유형적인 사업을 중히 여겼고
⑵ 무형의 교회보다 유형적인 교회를 중히 여기고
⑶ 주님께 인정받음보다 사회(신,불신자)인정의 명예를 중하게 여겼고
⑷ 교회 질보다 양을 중하게 여겼고
⑸ 하나님을 사랑하며 화목함보다 인간을 사랑하여 화목함을 앞세웠고
⑹ 하나님에게 지혜와 능력을 얻어서 일을 하는 것보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앞세웠고
⑺ 하나님께 대한 갈망 보다 인재를 더 탐하였고
⑻ 이런 것들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겼으며 또 자기의 힘들과 수단으로 이루기 위하여 참았던 것이다
⑼ 이런고로 두아디라교회는 가견의 것 인지(人知) 인력(人力)의 것과 계시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주권주의의 것이라고 한 외식의 교회이었다.
⑽ 이런고로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하심은 성자가 피로 세운 교회이요 또 하나님이신 주께서 교회를 주장하시며 세우시는데 저들이 교회를 저희에 소유로 또 저희들의 주장으로 교회를 자유하는 일을 책망을 하시면서 주님은 교회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셨든 것이다

19절"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종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상기한 다섯가지
1."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 함은 상기한 다섯 가지 행위에 대한 질과 양이 점점 더 진보(進步)되고 향상하며 강하여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칭찬하심이 아니고 크게 책망한 것이 그 다음 20절을 보다 분명하다. 점점 열심 있게 나가는 그것이 곳 이세벨 용납한 그런 작동들이니 외면은 가장 주께 대한 충성한 것 같으면서 그 이면의 실(實)은 주의 뜻을 대적하는 운동이 되어지는 고로 이 두아디라 교회에는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아지 못한다는 옳은 자들이 교회를 주장하지 못하고 미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열심을 낼수록 이상 10가지 외식인고로 전지하신 심판의 주로 큰 대가 낸 주인공으로 나타나사 멸하시고 찾으시겠다는 것이다. 금일도 이런 사이비한 외식교회들에게 성도는 미움과 순교를 당한다.
2.믿음으로만 주와 연결되는 것인데 믿음은 사랑 다음 셋째  순서의 위를 찾아 하였으니 그들은 기독교 사업주의 도덕주의 사회주의가 분명하고 인내를 보면 정치적인 모략지혜가 농후한 정치주의가 분명하였다. 믿음의 토대 위가 아니니 주와 연결 없는 순 인본주의의 것들로 시작하여 사업하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고 사업과 사랑을 세우기 위하여 믿음을 주장하는 방편을 썼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간판으로 삼아 저희들의 목적 달성인 사업 위하여 서로 인내하였던 것이다. 올바른 순서는
①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섬기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고 그 명령순종으로 사업을 할 것이며 그의 지혜 곧 뜻대로 경영하고 그에게 얻은 능력으로 시작 하였는 고로 그가 잘해주실 줄 알고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② 그러므로 외식의 형식과 강약과 성패의 그것보다 그같은 이면의 것이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신본의 것이냐 불연이면 인본의 것인가가 문제이다. 언제나 말세성도는 공회나 치리회나 교회나 은사교권이나 기본 교권이나의 진가(眞假)를 심사할 때에 이 점에 총 중점을 두어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동기가 잘못되면 방법과 결과가 좋으면 좋을수록 많은 사람은 속고 피해는 많다.
3.진리운동과 개혁운동에도 장기간의 고독과 쇠퇴의 암흑을 만날 때에 사람들은 인재욕과 흑암욕에 갈정(渴情)을 가지는 연약한 인간이다 악마는 이것을 잘 아는 고로 이럴 때마다 자연인재와 인위성사를 가져와서 유혹하게 된다. 10년 수절에 하루밤 실수로서 그 익일 오는 본남편에게 변절자로 실패한 거와 같이 진리의 생활의 절정의 고독과 쇠퇴는 마 25:6 밤중과 같은 것이니 신랑되신 주께서 완승의 선물을 가지시고 문 앞에 이른 때이다. 악마가 유혹에서 실패하고 퇴장하기 전에는 주님은 그 광경을 보시면서 좌우판정을 기다리시는 순간이다.
① 인재냐 ② 주님이시냐
① 전성(全盛)이냐 ② 주의 뜻이냐 함이니 선자(先者)를 택할 때는 주님 떠나시고 후자를 택하여 인내로 노아같이 고요이 주만 기다리는 자에게 주님은 대면하신다. 그런고로 성도는 성공을 세상 안에서만 준비말고 영원에 두며 언제나 주만 의지하고 주의 뜻대로만 순종하는 것으로 성공을 삼아 길이 참아야 한다.

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1. 이 책망이 상기한 다섯 가지 행위를 옳다고 인증하고 다음 사건만 책망받을 일이라 함이 아니고 상기한 다섯 가지의 행위는 그 중심이 신본이 아니었음으로 외부는 옳은 것 같으나 그것이 다음 책망 받을 일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고 한 것이니 이는 많을수록 더욱 주께는 대적이 되는 것이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종들을 가라처 꾀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는도다"

1. "이세벨"에 대한 해석은 각이하니
⑴ 두아디라 우상종교여신 여선지 그 여인이라고
⑵ 쉬렐의 증거에 의하면 두아디라에 바벨론 신당이 있어 그 신 사이벧을 이세벨이라한 것이라고 하고
⑶ 즈안은 어떤 사본에 너희란말이 있음을 보고"너희 여자 이세벨"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너희 여자"란 말이 그 교회 교역자의 아내의 의미하고 하였다. 이명직 목사님은 혹 두아디라 교회 목사의 부인이라 하나니라 라고 하였다.
⑷ 이상들은 판단하기 어렵고 우리가 성경적으로 의심 없이 깨달을 점은 당시 실지로 그런 인물의 유무를 막론하고 그러한 위(僞:거짓)선지의 이단 사상이 용납되었던 것은 확실(確實)하다. 이세벨은 왕상 16:31 -왕하 9:22에보면 이방여인으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이니 그는 ①미용(美容)과 ② 모략적 정치수단과 ③ 탐욕이 강한 여인이며 ④ 바알신과 아세라 목상을 끌어들여 각처에 신당을 짓고 하나님의 선지를 다 죽이고 전국 신민(神民)을 우상숭배자로 만들어 엘리야는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하였고 백성에게는 3년 반 천재(天災)로 기사자(飢死者)가 많았던 것이다.

당시 이 교회도 이런 사건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또 이는 전 지상 교회에게 이러한 거짓 선지의 죄악에 있을 것을 계시해 보임이니 영적과 육적의 양면의 죄악을 용납할 이단을 말함이다
(5)전교회에 용납되는 이세벨은 육적보다 영적으로 해석하니 지당하게 보인다. 이유는 19절의 행위들을 보면 하나님보다 인재욕을 가지게 되었고 또 그 사상에는 위 선지인 자연인재를 탐용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① 육적 해석이면 문자대로 우상제물과 숭배를 허용하여 배신하는 교인을 만들고 그러면 자연 부정한 교제들도 용납하게 되는 것들을 말함이니 이런 것은 들어난 것인 고로 구별하기도 쉽고 또 피해도 적다. 그러나 영적의 것은 인간도덕에는 가장 고상하면서 신적 도리에만 이단이 되는 고로 구별도 어렵고 또 종류 많은 교회들이 말세에는 거게가  다 이로서 범죄하게 된다.
②아합왕과 이세벨의 관계에서 영해(靈解)
아합왕은 교회정치의 두령이요. (은사교권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다스리려 함보다 자기주장과 사욕의 직업과 무대로 교회를 삼는다. 이세벨과 같은
① 미중생자 (이방 여인)
② 간판이 훌륭한 자(미용)
③ 자연의 인재(모략적정치수단자)
④ 사업과 명예주의로 가견의 것으로 치중하는 자(탐욕과 정욕이 강한 여인)
⑤ 불신자들이 지상으로 삼는 세상 각 권세들 하나님보다 앞세우고 더 신망하는 자. 바알 신과 아세라 목상 용납)
⑥ 인의(人意)적인 조직과 단결의 운동을 배치하는자 (각처 신당을 만든 이세벨) 이런 인물을 용납하는 교회정치의 우두머리이니 곧 교권주의자이다. 언제나 진리운동과 개혁운동이 부패할 때의 순서는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민들의 운명이 사사 혹은 왕 그 한 인물의 선악의 좌우된 것같이 오늘도 공회 두령자들의 신앙과 정치 여하에 교회운명은 제2로 주권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부하는 간신 행위를 버리고 상회의 잘못은 하부의 죄악보다 더욱 심사(深査)할 것이며 충성되이 사정없이 지적하여야 한다.  진리운동에도 있어서 상부의 인물들을 불경(不敬)하며 그 자신이 부패하고 불의에도 존경함으로 함구 맹종하면 자신과 상회를 죽이는 마귀가 되고 충고를 하여 줄 수하가 없는 교권자 되고 (충언을 할 때에 수하라 하여 권압: 權壓함으로) 교권자가 되면 자기와 교회는 아합 왕과 이민 같이 망하고 생명수의 흉년으로 영혼들은 죽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아합왕이다. 그러므로 이세벨은 상술한 바와 같은 6가지 인본주의를 가진 자연 인재들이다.

2. 이 이세벨인 자연인재는 (거짓 선지 적기독 각종 인본인 이단) 그 사상과 유혹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행위를 교회에 끌어 단기는 일을 한다.
(1) "자칭 선지자라" 하나니
①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는 자가 아니오
② 하나님이 택립(擇立) 송자(送者)가 아니오
③ 자칭이라 함은 그 자신만을 말함이 아니고 인간자체를 말함이니 순 인간들이 선정(選定)자란 말이다
④ 차(此)는 땅의 방법과 말을 함으로 단합이 크게 잘되고 이 운동은 인기를 끌어 참 진리를 대적하게 된다. 교회는 이런 자들을 발견하는 눈을 가져야 복 있는 자이다. 계 4:8 참조

(2)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라"함은
① 먼저 은사교권들을 유혹(誘惑)시키고
② 주의 피공로를 참 믿는 자들을 유혹하고 (잘 믿어 보려고 충성되이 일하려 하는 자들)
③ 하나님의 뜻보다 일만 많이 하려고 하는 자들을 유혹한다
(3) "행음하게 하고"
① 하나님보다 피조물에 대한 애착을 더가지게 하고
② 피조물과의 관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③ 하나님과 천국을 얻는 것보다 인간들과 세상 얻는 것을 더 중하게 여겨 하나님과 천국을 제2주의로 부업적으로 믿는 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영적 간음이니 (약4:4, 호2:5-7) 자기와 세상과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절개를 잃은 것과 같이 주는 미워하시며 또 큰 죄인 줄 알아야 한다.
④ 육적으로 7계명 범한 것은 성전을 더럽힌 일과 주의 지체를 창기의 지체로 삼은 범성죄가 되고 육을 사랑함으로 그 영을 죽게 한 사랑 같은 원수의 일이다. 잠 6:29에 음란한 마음으로 만지기만 하여도 죄 없다 아니하리라 하였고 마 5:28에는 음욕을 품는 것이 심적 음행이라고 하였다. 이 악령의 유혹은 절제보다 피하는 것으로만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박윤선 목사님은 말했다.
(4)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도다"
①우상의 제물은 영적과 물질적에 것이 있으니
A. 제물적 우상제물에 대하야 어떤 이는 이것을 먹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롬 14:2을 의거하여 먹는 자가 신앙이 장성한 자로 여기며 또 고전 8:6 과 7절의 의지하여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고 제물을 먹는 자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고전 8:11에는 우상제물 먹는 자가 멸망하였다고 하였고, 고전 10:18에는 제물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라고 하였고 21절에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또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참여치 못한다고 하였다. 또 행 15:26과 계 2:14과 20-의 다 우상의 제물을 금했다.
B. 영적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을 세상에 대한 탐신의 그 갈정을 말함이다. 이를 가리켜 렘 2:24에는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함으로 허덕거림 같다 하였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라고 하였다. 또 계 9:9에는 세욕에 달림을 출전하는 말과 같다고 상징했다. 또 호 2:5-7에는 세상을 탐하는 신자를 가리켜 간부와 연애하는 여인 같다고 말하였다. 이는 다 주 앞에 배신하는 죄가 될 뿐 세상적인 모든 것을 탐하는 자의 정신 열중의 그 상태를 말하여 주는 분(忿)히 여기시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애착이 있고는 주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호 7:7에는 버리고 본 남편께로 돌아가니 형편이 낫다고 말하였다.

결론 : 육과 물인 가견적의 죄를 끊지 못하고 영적 죄는 더욱 끊기 어렵다.

21절은 "또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코저 아니하는도다."
1. 주는 범죄 하는 그 시간부터 알지 못하여 가리워짐을 받으심이 아니고 즉시로 심판하실 것이로되 체휼하사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범죄 후 벌 없으면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고대하시는 주의 안면을 보아 두려움과 수치를 품고 강퍅하지 말아야 한다. 회개할 기회를 지나면 반드시 심판으로 오시고 또 회개코저 아니하는도다 하심은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회개는 승리의 생활이니 곧 권능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시지 아니하시면 할 수 없나니 자주권이 아니며 피은자(被恩者)로서는 주시는 그의 정한 기회를 추종할 것뿐이요, 자정할 권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에 기회를 주었으되 라고 했다. 또 회개의 능을 받아야 하나니 그 받는 수속은 회개코저 하는 곧 간절한 소원과 인적 노력을 말한다. 이것이 없는 자에게는 능을 주시지 아니하시고 회개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하는 각종 환난 주시는 것을 22절 이하에 말했다.
2. 주님은 회개의 갈급을 제물보다 기뻐하시고 멸시치 아니하신다고 하였고 (시51:17) 마12:13에는 회개치 아니하는 자는 사함 받지 못하는 죄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범죄의 징벌이 없고 그 기간을 죄가 숨겨있는 줄 알고 회개할 능을 주시며 또 받을 기회로 간구하지 못하고 징벌이 오기까지 계속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지혜와 심판을 멸시하는 자이며 또 자기를 사망에 던지는 자이다. 징계가 오기 전 주께서 주시는 회개 기회에 착수하는 자는 권능을 얻어 회개 후 능력자로 살게되고 징계후 회개자는 회개는 할 수 있으나 그 능은 다르다. {삼손과 다윗 비교}
3. 책망 받은 죄악이 두 가지인데 행음만 회개치 아니한다고 말하였고 제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아니한 것은 영적 음행인 속화생활의 원인이 되는 세상을 탐하는 마음(우상제물)은 회개를 하면서도 그 실지 음행인 속화의 생활은 회개치 아니한 것을 책망한 것이다. 오늘도 그 어떤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는 후회하고 끊어 자주 주 앞에 회개를 하나 실지 그 행동은 바로 옮겨 서지 아니하는 일들이 많다.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가 이런 정도의 회개를 한 것을 만족치 아니하실 뿐 아니라 전혀 회개치 아니하신 거와 같이 보시고 책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코자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영적 음행의 시발인 우상 제물 먹는 것을 회개한 것은 회개코자 하는 것으로도 보아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생활에 실행동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은 회개의 시작이나 원하는 것으로도 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거짓된 회개인 말 회개와 마음 회개가 얼마나 많은가? 과연 진심의 회개라면 그 행함에 착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범죄자에게는 생명이 끊치지 아니하는 한 병 손해 박해 천재 지변등의 환난은 제2차 회개기회로 주시는 사랑이요, 별세까지 범죄생활에 버려두는 것은 버린 증거하고 할 수 있다. 회개는 할 때에 손해 같으나 그 수입이 실은 많다. 생명을 삼킬만한 병을 일시 괴로운 수술로 건강하여질 수 있는 한 그래야 할 일이니 한 말로 말하면 자기를 자기가 책임지고 복되게 하려 하던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고 솜씨대로 복되게 하여 주시겠다고 할 때에 그에게 맡기는 일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고 하지 아니하는 차이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인 것이다.
22절 "볼지어다."
1. 이는 광고적인 선포이니 자비뿐 아니고 심판적인 호령(號令)도 포함된 것이다. 누구든지 다음과 같이 시행하겠으니 자유대로 행할 길을 취하라는 권면적 시기를 지난 경고이다.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1. 거짓 선지 이세벨을 침상에 던진다 함이니 육으로는 질병에 걸리게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조각문에 음행으로 벌받아 죽은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2.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음락(淫樂)생활에 일생을 던져 버려두겠다는 의미도 있으니 이는 곧 영적병의 생활이요.
3. 일생 생활을 잠자는 자의 생활, 곧 꿈 생활과 같이 주 앞에 설 때에 깬 후 꿈을 무시한 것처럼 평생 생활이 하늘에 소유 없는 무시할 헛된 생활만 하게 버려 둔다는 것이다. 육의 병상보다 영의 병상이 얼마나 더 저주스러운 일인가 하늘에 속한 근심이 없는 심령과 그 나라에 효과 없는 날은 아무리 세상 각 정욕이 만족하였을지라도 저주의 날로 계산하고 싸워야 한다.
"또 그로 더불어 행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가운데 던지고"
1. 두아디라 교회는 거짓 선지의 이단(異端)이 침입하여 그 여선지로 더불어 육적 음행의 이단을 지적하는 것이다.
⑴ 말세에 거짓선지의 이단 중에는 실지로 그 선지와 육적 관계를 가져야 구원에 이른다는 것들과 또 유다서 4- 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을 도리어 색욕거리로 삼는 부패들이 있을 것을 말함이요.
⑵ 이세벨의 (본장 20절 이세벨 해석 6가지 인본주의) 주장과 합치되어 순 인위적과 세상적과 육체 소욕적으로 합한 교역자 및 교인들
2. 상술한 ⑴⑵의 죄악을 회개치 아니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재앙으로 갚으실 것을 예약적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⑴ 육적이나 영적으로 범한 자에게는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진다고 하였으니 경제 재(災), 사회 국가 질병 가정 등의 각양 면할 수 없는 환난가운데 넣었다 함이요.
⑵ "사망으로 자녀를 죽이리니"함을 육적 자녀보다 영적 자녀 곧 그 교훈을 받은 자들은 그로 인하여 그 영이 혹은 병, 혹은 죽는데 이르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는 교회와 세상과 구별하는 획선을 올바로 긋지 못하면 교회는 여지없이 부패되며 그 영혼들은 죽게 된다. 마 4:1이하 예수님께 대한 세 가지 시험이 다 이세벨 교훈이었다. 기독교는 육이 있는 한 세상과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이면서 잘못 가지면 다 죽게 되나니 얼마나 여기에 대한 올바른 시찰을 구별을 가져야 할 것인가? 세상의 총 대표격이라면 곧 정부들 곧 국가이니 기독교에서 세상관 국가관이 올바르고 또 관계를 바로 가져야 교회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교회들은 여기에 대한 관계들을 오히려 개인의 도덕 생활보다 경히 여기는 편이 많다. 그러므로 박해가 없고 신앙 자유가 세계를 점령하게 된다. 이는 기독교 흥왕이 아니요. 악령의 큰 술책이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1. 시편 7:10, 렘 11:20 참조, 여기 뜻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네프루쑤니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와 감각의 근원을 가르킨다.
2. 여기 "마음"이라 함은 사람의 가장 깊은 속 감추인 것. 자신이 아는 정도의 것만이 아니고 자신의 이해하지 못하기까지 심미(深微)하게 주입되어 있는 것까지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3. "알지라"함은 알라함도 아니요 알게 하겠다함도 아니요. 뜻과 마음을 세밀히 심사하여 너무도 확실한 보응을 이루심을 받고 난 후에는 자기가 알았던 뜻과 마음의 보응은 물론이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였던 깊고 세미한 것까지 본인이 확실히 이해하도록 명확하겠다는 것을 말했다.]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1. 주님은 손에 상과 벌을 언제나 들고 계신다. 악행자에게는 벌로 선행자에게는 상으로 주리니 자유대로 길을 택하라는 것이다.
2. 불택자에게는 재세에 있어서는 죄만(罪滿) 혹은 택자에게 피해가 되는 죄에 한해서만 벌하시고 그 외의 것은 영원한 나라에서 보응 하신다. 그들의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참 선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상이 있다면 재세에서만 있을 수 없고 내세에서는 하나도 없다. 삼하 21:1-6, 창 12:3 참조
3. 택자에게 한하여서는 죄의 벌은 없다. 벌같이 보이나 실은 사랑의 징계(徵戒)다. 그러나 범죄하면 그 구덩이에서 나오기까지의 성화에 대한 형벌보다 경(輕)하지 아니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택자도 의행, 곧 회개자에게는 삼위의 은혜의 선물(膳物)이 부여(賦與)되게 되고 거역하여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 은혜가 중단되나니 실 손해가 벌보다 크고 또 그 은혜의 생수를 마셔보지 못한 자는 모르나 마신 자에게 그 은혜를 도로 빼앗는다 하면 그 갈급이 지옥불만 못하지 아니한 것이다. 기독교 은혜에는 창작성의 시험도 있고 보수성의 시험도 있다. 깊은 의미에서는 다 창조적 은혜이다. 시은되는 그 방편은 보수성으로 되어지는 면도 있다. 보수성적의 시은은 주관이 모르게 객관의 은혜가 주입되어 있는 그 은혜 생활하는 것이 보수 받을 주관의 의행 같이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행을 아니할 때에는 배은 하는 일이 되는 고로 배은 하는 자에게 회개의 순서가 있기 전에는 수은(受恩)의 길은 막히어 있게 된다.

24절 "두아디라에 남아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1. 두아디라 교회도 하나 아니고 두 파로 나눠진 것이 보인다. 특별히 남아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주님에게 인증(認證)을 받는 교우들이 그 교회를 주장하지 못하고 속화된 이단 편들이 교회를 주장하였던 것이 보여진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일 아니하는 것이 일 하는 것보다 도리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된다. 이것을 보아 두아디라 교회는 인간주의의 이단이 들어 온 지가 오래되었고 교세를 잡은 때이다. 이 이단들은 입시시(入始時)는 미약한 주장이면서 은밀히 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고 전성시는 대중이 그러하니 또 비(非)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 대한 파수에 눈을 가진 자에게는 시초에도 보일 뿐 점점 확대할수록 증거가 확실하여 확인하게 된다.
2.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함은 이세벨의 교훈과 19절에 다섯가지 행위의 사상을 받지 아니한 자를 가르친다.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1. 사탄의 깊은 것은 두아디라 교회를 둘러싸고 침입한 각 주의들을 가르침이니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⑴ 그노시스 주의는 심령은 고상하여 더러워질 수 없다고 하고 물질 개악설을 주장하여 몸은 물질이니 이미 더러운 것이다. 아무리 범죄하여도 더 더러워질 것 없다 하여 기탄 없이 범죄하였던 것이며 또 사리의 최고심의 지각을 얻으려면 내 자신을 그것에 적용하여 체험하여야 한다 하여 우상 숭배 또는 음행 기타 죄악들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주의였다. 기독교인 중에도 여기 물들어 교회는 부패하였고
⑵ 이 외에도 기독교 진리와 인간 철학과 혼합하여 철학은 원형적 지식을 삼고 성경 말씀은 연구의 재료를 삼아 사이비하게 기독교 진리를 자율화한 주의들이요.
⑶ 목적과 중심에 있어 간판은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으로 한다하면서 실은 자기의 뜻과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앞서고 하나님에게 대한 것을 다음으로 두는 인본주의.
⑷ 두아디라 교회는 본장 19절 해석과 같이 인간 지혜 인간 노력 인간의 욕망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가 자기가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며 자기가 자기를 행복 되게 또는 자기 앞길을 개척 혹은 구원하려는 그 이면에는 사탄의 참모로 되는 것이니 전지하신 자의 계시 말씀이 아니면 그 비를 지적할 수 없을 만큼 심묘한 것을 가르쳐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말했다.
⑸ 말세가 될수록 사탄의 시설인 인간 사상이 심묘 복잡하여 그 사상과 각종 죄악의 체험의 긍휼과 깊은 무저갱이며 종점 못 볼 긴 거리이기 때문에 그를 다 통과한 후에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는 거기서 죽고야 만다. 인간 대동소이의 이성을 가진 수평선에서 살고있는 자신인줄 알아야 한다. 수 천 년 수많은 시간과 인간 명철과 사탄의 궁구하여 절묘하게 수련하여 놓은 그 주의를 일개 유한한 자기로서 그의 시비를 심사하겠다는 각오나 또 옳은 것만 채용하겠다는 신념 등은 자기를 그 수천의 사람과 사탄보다 탁월한 것으로 자인함이니 벌써 이것이 자무식(自無識)일뿐만 아니라 사탄의 참절(讒切)에 이미 삼키워 자기는 인간을 초월한 자며 사탄보다 지혜로운 자인 줄로 시험에 든 결과적인 행위이다. 다만 이것들의 시비곡직을 비판할 수 있는 권위 법전은 성경뿐이요. 또 인생의 길에 올바른 사상과 주의와 교훈은 성경만이 정확무오하며 또 온전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부분은 빠짐없이 구비하였으니 이것으로서 자기의 사상과 주의의 길과 법칙과 지식을 삼아 부족할 것이 없으며 또 영원히 충만하고 완전하나니 이 외의 것을 궁구도 선용도 할 필요가 없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할 만한 자아인줄 인증(認證)하고 창 3:6 "보니 먹음직하고"라는 비판에 착수한 자율자로 시작한 그 시간에 사망에 삼켜짐같이 말세 성도는 두 가지 비판권  곧 기 인간 모든 사상과 철학과 주의를 비판하려는 자지(自智) 착수(着手)는 사망과 일생실패에 빠지는 길인 줄을 알아야 한다.
2.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 함은 상술한 5가지 인본의 것을 관계하지 아니하고 계시 의종의 지식으로 그리스도만 신망하여 자기의 전부를 맡기고 순종하는 것으로만 본분을 삼는 자들을 가르쳐 말함이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1. 행 15:28-29과 같은 말이니 종전 신앙을 인증하는 말이다. 주님은 무례하게 한정 없는 책임이나 요구를 하시지 아니하시고 각자에게 적당한 책임과 요구를 가지신다. 이는 각자를 지으신 이와 또 각양은혜를 주신 이가 주님인 것만치 호리라도 착오(錯誤)됨은 없다. 그러므로 이 두아디라 교회에 남은 자들은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인간적으로 또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는 만족되신다는 칭찬이니 그 얼마나 영광된 일인가? 그 내용은 상기에 사탄의 깊은 곳을 해석한 그대로의 사탄의 깊은 곳을 해석한 그대로의 사상과 행위이다.
2. 고전 10:13에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치 않게 하시마"고 하셨고 고후 12:9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심같이 각자에게는 각양 적합한 입장과 실력을 주신 것이니 사탄의 깊은 것을 엿보지도 말고 올바른 신망애로만 충성할 것 뿐이다.
25절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아라"
1. "다만 네게 있는 것을"함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곧 계시 의종(依從)주만 신망(信望) 임의(任依) 순인(順忍)의 신앙사상과 행위를 말한다. 이것을 가르쳐 다만 이것이라고 하여 주님은 만족하시고 이것을 극한 보배로 유일의 제물로 여기시는 말이다.
2.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함은 개인적으로 별세할 때까지 전체적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신조와 교리 그대로 신앙하며 요동치 말라 함이니 계시도 소망도 능력도 주와 및 성신도 시대를 따라 변하지 말고 가감도 말고 진리니 그대로 신앙하라는 것이다.
26절 "이기는 자와"
1. 19절 5가지 행위의 순서를 바꾸고 이세벨의 이단을 회개하고 남은 자의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신앙 행위를 가진 자를 가르침이다.
"끝까지 내 이름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1. 끝까지라 함은 종신을 말함이요.
2. '내 이름을 지키는 그'라 함은 하나님의 성호에 나타난 대로 12가지 속성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통일성 지식 지혜 선 사랑 성(聖) 의(義) 진실 주권) 그대로를 가진 인격자로 대적을 하며 올바른 상대를 가진 것을 말함이니 300년 동행한 에녹이 하나님 인격 대우한 것 같은 신앙질의 것이다 믿는 줄 알면서도 실은 권위 있는 한 사람만치도 동거대우를 아니하기 쉽다
3.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함은 지상 전 세계와 전 교회와 우주와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전 통치권을 주시겠다 하심이니 이는 ① 개적으로 그에게 일임한다 말이 아니오
② 그것들을 전부 소유하는 주권자 된다 말도 아니오
③ 이긴 자와 주의 이름을 지키는 자는 목적과 지혜와 능력과 행위가 주와 하나인 곧 주의 것으로 자기 것을 삼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주의 것과 주의 섭리와 주의 승리와 주의 영광이 자기 것 되어 있기를 머리의 것이 곧 그 몸에 것인 거와 같이 주의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 주 한분으로 만족하는 자니 주의통치권은 실로 자기의 것이 된다 말이다. 남편의 모든 영광과 권세가 올바른 아내에게는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 통치의 권세는 진리와 거룩과 생명으로 하는 것이니 곧 삼위의 은혜의 권능이다 이 권세로 만물은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고 통일된다.
27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사래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1. 이는 비유의 말이니 이긴 자에게 주신 권세는 불의의 세력과 또 모든 피조물의 권세의 비하여 이것들을 질그릇으로 상징하고 이긴 자의 받은 권세는 철장으로 상징하여 거침없이 그 권세 일하에 불의는 멸하고 모든 피조물은 순응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능력이 인간 스스로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을 믿음으로 받은 주의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므로 인간무가치한 것이나 올바른 신앙으로 무한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이 철장은 자행하지 않고 맡긴 자에게 주신 능력이다.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1. 마28:18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라고 하신 말과 같은 말이다. 이는 천상천하에 모든 것에 통치권과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권세들을 다 주님에게 소속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아버지께 내가 받은 거와 같이 또 주께서 받은 사명의 계속 성역(聖役)을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거와 같이 예수님께서 이긴 자(올바른 신조와 교리를 가진 신행)에게 맡기시고 또 그 사명을 감당할 권능 곧 아버지에게 받은(마28:18) 그대로 주신다는 것이다. 마28:20 요 17:18 20,21
2.이는 성역과 능력을 받은 것이 질(양은 같지 아니함. 질도 원형과 모형 같음)만이 아니고 승리도 그로 인하여 그와 같이 완전할 것을 포함한 말이다. 요 16:33 계 3:21 참조.

28절"또 그의게 새벽별을 주리라"
1."새벽별"은 그리스도 자신을 상증함이니 그에게 거룩과 영광과 승리와 통치와 생명과 기쁨에 소속한 모든 것 곧 지상교회에 허락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가르침이니 세상에 죄와 저주와 악령의 역사와 인간과 만물의 전(全) 불행을 어둠이라고 하면 이 모든 것을 소멸하고 의와 성과 축복과 성전의 역사와 인간과 만물의 전 행복 건설을 빛으로 상징하여 깊은 밤에 광명한 태양을 맞이하는 앞잡이로 새벽빛을 빛인 새별같이 재세 그리스도는 이 모든 종교적 암흑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으로 소멸하여 태양 같은 무궁한 하늘나라를 맞이할 총 준비가 되는 지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대로 남김없이 다 소유 시켜 주신다는 것을 가리켜 새벽별을 주신다고 하심이다 그러므로 이 새벽별을 받는 일은 지상성도로서 지상그리스도 은혜는 완전히 소유하였다는 의미니 신앙준비에 완성이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자기를 부인하는 연약자에게 강한 능력으로 죄인에게 완전한 의인으로 죽은 자에게 완전한 생명으로 주를 위한 자에게 자기를 크게 위한 유익 본 자로 갚아 주시겠다는 말이다.
3장

사데 교회에 보낸 서신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에서 동남으로 140리 서머나에게 정동으로 180리 기원 전 6세기 루디아란 독립국으로 구리소스가 국왕이 되어 파사국과 싸워 독립을 잃었다 상업도시로 유명하고 부유한 도시이다. 사대교회는 은혜를 간직에 대한 것이 다섯째 순서로 5번에 기록 한 것이다.
1. 사데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
1절 "일곱영과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 "일곱영"은 성령을 말함이니 사데 교회는 교리와 신조는 올바로 가졌으며 또 의식적인 교회행사도 있었으나 육적으로 영감이 핍절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계시 말씀과 영감을 두 기둥으로 삼아 신앙은 건설되나니 어느 것 하나라도 경중이나 선후 차서에 두면 결국은 치우쳐도 올바른 신앙은 못된다. 영감을 경히 여기면 계시 말씀이 믿어지지 아니하여 신신학으로 기울어지고 또 계시 말씀을 경히 여기면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 두 은혜가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을 악마는 아는 고로 여기 대한 유혹(誘惑) 주력하는 것이다. 오늘 수백의 교파분열은 다 - 교리적 차이와 영감차이에서 생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건설은 올바른 교리와 영감의 있나니 교리는 신중히 성경과 상고하여 이단은 많은데 있지 않고 한 가지 있을 수 있나니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만 틀리면 그로서 이단 지적에 족한 줄 알고 더 살필 것이 없고 또 영감도 요일4:1 이하와 같이 또 시험하여 성경적의 영감이 아니면 그 능력 여하간 다 부인해야 한다.
2. 영감은 본 교회에 보면 실행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주시는 거와 같이 보여지고 또 일면은 성령 주겠으니 회개 착수하여라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행 5:32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 이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영감을 주었을 때에 순종하여 회개와 실행을 하려 하는 자에게 영능을 부가하여 주시는 것으로 보인다. 영감 없는 교회는 죽었다 하였고 또 영감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려 하는 은혜이다. (피동적은 아니고 능동적임)
3. "일곱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일곱별은 교회에 사자이니 곳 은사교권들을 총칭하는 것이면서 특히 교역자를 가르킨다. 교직은 기본교권들이 선정한 것이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인 줄 알아 진리와 동행 할 때에는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하여야하고 진리를 떠나는 일에는 하나님의 장중을 벗어나는 일이니 간청으로 앙고(仰告)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직자는 구속의 원리에서 주에 소유되는 일반적 관계가 아니고 특소(特召)적인 관계를 가르쳐 "일곱별을 가진이" 가 가라사대라고 하였다.
4. 사데 교회에 일곱영과 일곱별을 가지시고 찾아오신 이유는 사대교회는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를 받아 영감은 바리고 말씀은 지식에서 머물고 실천하지 아니함으로 실상은 죽은 교회니 과거은혜를 다시 찾아 가지려하면 다시 영감과 말씀의 은혜를 베풀 교역자를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갈망하는 자에게 영감과 말씀의 은혜를 주실 것을 말함이니 새로운 교역자가 아니고 같은 교역자라도  교인들의 갈망에 따라 그 능의 부여가 차이 있는 것을 말한다. 교인이 성령의 역사를 끌 수도 있고 교역자를 권위 있는 교역자를 만든다고도 하고 버린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곳 갈망과 다음은 기도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1. 주께서 소문이나 간접적의 감시(監視)로 행위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친히 감시하시며 발견하신 직접적인 것이다 근본 사랑하시고 또 피로 택하여 중생케 하신 교회이므로 일곱 교회에 매 교회마다 "내가 네 행위을 아노니"라고 말하셨다 우리는 주님을 잊을 사이가 있으나 주님은 순간도 우리에게 청한 시선을 옮기실 때는 없다. 행위가 올바른 때에는 주님은 기뻐하시고 마귀는 수치를 당하고 우리가 실수할 떄에는  섭섭이 하실 뿐 아니라 악마에게 수치를 보시는 일이 된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1.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함은 산 것이 아니고 이름만 가졌다는 것이니 실(實)의 산 자는 아닌 것이다. 이는 성령의 은혜를 받아 일시 감동으로 지내보내고 선행의 자기의 능력화 되지 못한 것과(행 1:8)말씀의 은혜는 받아 요 6:63과 같이 자기의 생명과 영이 되지 못하고 한 상식과 지식에서 머무는 것을 말한다. 영감과 말씀이 감동 지식이 본능화 영화 생명화 되어진 것이 산 자이니 이렇게 가진 것은 가지기보다 버리기 어렵고 그대로 그것으로 살지 않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어려우며 억지의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되는 것만치 성화가 되어진 것이며 사람이 자란 것이다. 말씀은 참 우리의 뼈와 살과 생명이 되고 영감은 힘이 되어야 한다.
2. 그러므로 일시 영감 받은 것과 지식적으로 가진 말씀은 살았다는 것도 아니고 살았다는 이름이 불과한 것으로 주님은 간주하셨는데 이것을 도의 완전같이 또는 이런 순서도 가지지 못하고도 산 자인 줄 아니 너무도 생명의 도는 인의화(人意化)되어 참에서 거리가 먼 거짓화 되었다.

3. 두 가지의 은혜는 다소를 물론하고 영과 생명과 힘으로 가진 것만치는 버릴 리야 버릴 수 없고 또 그것으로 또 그것이 살지 아니할래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은혜를 소유격으로 가져 방취적(放取的)의 단계는 곧 그 은혜가 내가 된 것은 아니다. 주격으로 나에게 주재(主在)하여야 한다. 중생자는 요 3:5과 벧전 1:23 말씀대로 말씀과 성신의 씨로  중생된 자는 말씀과 성신의 은혜를 먹어 그 영양으로만 살찌고 자라고 힘을 얻는 것이다. 손의 쥐고 내 영양 되지 아니한 식물이 내 체육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보다 더 허무한 정도에서 내 영이 자라는 줄로만 세월을 보내니 진실로 주가 미워하시는 외식이다.
2절 "너는 일깨여 그 남은바 죽게된 것을 굳게하라."
1. "일깨어"라는 헬라 원어로 기누그레고론이니 일시동안 깨는 것만이 아니고 계속 경성을 의미한다. 이 경성은 과거 신앙의 잠을 깨라는 말이니 1절에 기록한 살았다는 이름만 가지고 죽은 자의 행위를 하는 그것에서 깨란 말이다. 그러므로 사데 교회는 현재 자고있는 것을 의미한다. 산 자는 산 자이나 마음과 몸에  활동이 없는 잠자는 자와 같이 마음과 몸에 활동이 없는 잠자는 자와 같이 중생 된 생명은 가지고 있으면서 중생한 자의 속성 활동인 말씀과 영감의 행위는 휴식(休息)상태에 있고 중생자의 생활인 천국 생활은 곧 내세의 생활인 십자가 생활은 자는 자 같이 쉬고 있으니 여기서 일어서 성신감화와 진리 말씀의 노동과 중생자가 사는 생활 곧 천국에 생활은 십자가의 도의 생활을 하라는 말이다
2. "그 남은바 죽게 된 것"
각양 영감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를 받아(받은 것은 살았다는 이름정도 또 말씀은 지식에 머무는 정도이니 1절에 총괄적으로 죽은 자라고 말하였으나 2 절에 죽게된 자라고 하는 것은 1절에 말한 죽은 자와는 모순된 것 같이 보인다 그 이유는 이전에는 명재 사경(命在死境)을 말하고 1절은 전사자(全死者)로 말함이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배치됨이 아니고 동일한 것이다. 2절에 "남은바 죽게된 것"이라고 함은 영감과 계시은혜를 총괄적으로는 저버린 셈이 되나 부분적으로는 그 은혜생활을 하여 생명화 영화 능력화 된 것이 있으니 죽은 자는 아니요 죽게 된 자 또 자는 자라고 상징한 것이다. 특히 죽게 된 것이라고 함은 성화나 행위에 있어 그 자본으로 은혜를 주신 주님은 거기 대한 기대와 요구의 일절한 한정이 계시나니 거기에 도달치 못한 것은 미완성품과 같아 정한 기간 내에 주의 요구점인 그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회를 지나면 99로 100에 하나가 부족해도 미완성으로 불합격 곧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 죄인 거와 같이 배은(자본으로 준 두 은혜)자가 된다. 그러므로 죽게 된 것이라는 것은 주의 목적과 요구에 대한 성화성(性)은 행위의 미달 중에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이 요구점을 모르는 유한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전 4:4에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하여 이 요구점을 모르는 것을 표시하였고 모르기 때문에 거기 대한 대책은 (고전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하였고) 주님도 계 2장 10절에 충성하다 죽으라는 것으로 이 점에 대한 비결을 말씀하였고 또 바울은 빌 3:8과 12~14에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내가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 점을 모르나니 여기 대한 염려를 가지지 아니할 수 없으나 다만 불합격할까 두려워하는 중에도 안심할 한 길은 그 두 가지 은혜 생활에 대하여 더 충성할래야 더 할 수 없는 정도의 노력에서 사는 것 만으로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3. "굳게 하라"함은 주의 요구의 만점에 도달하라 함이다. 다시 말하면 영감과 말씀의 은혜가 내 생명화 영화 능력화 됨과 이것으로 선행하는 일에 있어 투자하신 시은의 주께서 그 분량에 적합한 요구 만족에 도달하도록 인적 요소를 가(可)하라는 것이다. 굳게 하는 방법은 새김질과 쪽발의 걸음 (레 11:1~8) 이니 말씀은 계속적인 새김질로 영감(靈感)은 늘 거기 머물고 떠나지 아니하는 연감(連感)으로 쪽발 걸음은 전 행위를 구별하여 이 두 은혜에 배치되는 쪽은 벗어버리고 합치되는 쪽은 덧입어 건축하여 가는 것을 말함이니 이것으로만 굳게 하는 방식이 된다. 삼갈  것은 우리의 회개가 내 스스로의 표준이 아니고 주님의 표준에 의준하여야 할 것과 또 사람마다 이 두 가지 은혜도 각각 다를 뿐 요구하심의 양도 각각 다른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마 25:14 금 맡긴 비유에 보면 2냥중 맡은 자는 4 냥중으로 합격되었으나 5냥중 맡은 종이  그대로의 5 냥중으로 합격이 될 것인가? 그러나 사람 보기에는 오히려 1 냥중이 더 많지 아니한가? 이는 9 냥중 가지고도 합격은 안될 것이다. 기어코 10 냥중이 되어야 하리니 이는 은혜 주신대로 요구하시고 거기 대한 계산은 은혜 = 요구량의 수학적인 무사(無私)정확성을 보이는 비유가 아닌가? 도리어 오늘은 보편 은혜나 특수 은혜를 막론하고 자본으로 교만하고 장사하지 못한 쫓겨날 겸손은 가질 줄 모른다. 굳게 할 기간은 오늘 뿐인 줄 아는 것이 지혜요 내일까지 계산에 넣는 것도 심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나니"
1. "내 하나님 앞에"라 함은 주님이 하나님을 가리켜 내 하나님이라고 함이니 특히 지공무사하신 심판의 하나님의 공의 앞에 라는 말이다.
2.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다." 행위 전체를 총칭하는 말이 아니고 각개개의 행위를 말함이니 그 어느 하나에도 주님 요구의 완성인 만점이 없다는 것이다. "찾지 못하였나니" 함은 여러가지 행위 중에서 하나도 찾지 못한 것과 또 주님은 피로 산 당신의 백성의 온전한 부분을 찾으시는 것만큼 원하고 계시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 공의로운 하나님의 존전을 통과할 것을 생각할 때에 합격점이 없는 그 점을 보시고 심히 안타까워하시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범사에 주께서 요구하시는 그 만점을 향하여 달려야 한다. 사렙다 과부는 떡 한 개로 봉헌의 온전이 표시되었고 다니엘은 하룻밤으로 기도의 온전이  이루었던 것이 봉헌에 있어 중도에 머뭇거리고 절정인 이 온전점의 같은 관심을 가지는 일이 적다. 일본인은 최후의 5분간을 말했고 마 24:13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 얻으리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통과할 온전한 정도라는 점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으며 가지고 안심을 하는지 스스로 시험하여야 할 것이다.
3절은 온전케 하는 방법과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 임할 손해를 말한다.

"그러므로"라 함은
① 은혜 받은 것은 살았다는 이름에 지나지 못하고
② 받은 영감 지내 보내고 받은 진리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은 죽은 자이고
③ 주의 요구의 만점 못된 불온전의 것은 죽게된 것으로 하나님 앞에 간주되나니 경성하여 다음 권면 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1. "어떻게 받았으며"함은 영감과 영적 체험을 말함이요 "생각하고" 함은 이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고 늘 기억하고 그 감동을 떠나지 아니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영감의 그 감화가 계속(繼續)하는 것은 죄마를 막는 강한 방패가 되고 영적 체험을 기억하는 것은 큰 암흑을 깨뜨리는 열쇠가 된다.
2. "어떻게 드렸는지" 함은 (살전 1장 5절, 고전 2장 1절 참조)
계시된 말씀을 어떻게 배웠으며 깨달았으며 권고 받았는지 그 진리대로 "지키며" 행하는 것으로 회개하라는 말이다. 말씀은 수행하려 할 때에 자신이 죄인인 것과 무능을 발견하며 그 말씀의 절대 권위성을 두려워하게 되며 주의 의와 그 권능을 바라보며 간구 하는 자가 되고 또 따라서 온전함에 나아가게 된다. (온전은 절대의 것이 아니고 인간적의 것)  실행은 진리 지식을 가르치는 영감 다음의 선생이라고 계 3:10에는 말씀 수행하는 자에게는 주께서 지켜 시험을 이기게 하시겠다고 하였으니 성화도 상급도 행함을 통과하여 온전하여지는 것이다.
3. ① 상주(常住)의 은혜는 자기의 최저급이요.
② 순간적으로 임하는 은혜는 중(中)이요.
③ 찰라적 은혜는 최고의 은혜이다.
이를 놓치지 아니하고 잡으면 제일 잘 자란다. ③을 굳게 잡으면 ②가 되고 ②를 굳게 잡으면 ①이 되고 ①을 놓지 아니하면 영화 생명화 능력화 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는 인적 노력을 요한다. 이것이 순 주의 은혜이나 인간 스스로 한 것같이 여겨지는 순서로 되어지는 것이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른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1.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만일을 경성치 아니하면 회개치 아니하면 함이니 만일이라 함은 혹이나 행여나의 의미를 가진 것이니 이는 물론 누구나 다 중대한 사건임을 알고는 물론 다 회개할 수밖에 없는 중대사이나 만의 하나같이 혹이나 회개치 아니하면 하는 불회개의 심히 불행스러운 중대하며 위험스러운 일인 것을 표시한다.
2.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넌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심은
⑴ 사데 교회에 오시는 주님은 구원의 주가 아니고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 심판의 주로 오신다는 것이요.
⑵ 오시는 그날에 사데 교회의 가진 것을 다 빼앗긴다는 것이니 성화적으로나 행위적으로 2절에 해석함같이 주님의 요구 조건에 만족히 도달치 못한 모든 미완성의 부분은 최후 재림하실 때에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과 또 평생 생애에 있어서도 주께서 일정하신 그 기간 내에 완성되지 못하고 기회를 잃으면 불합격될 미완성의 것은 다 빼앗기는 것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께서 도적같이 오심으로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주의 허락하신 기간 내에 요구하심에 만족되는 완성의 것을 가진 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맞이하게 된다. 주는 평생 내림(來臨)의 역사도 있고 최후재림도 계신다.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좌우는 평소 영접의 좌우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히 12:17, 벧전 1:7, 고후 1:15 참조)
⑶ 상시(常時)나 재림에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 못하고 두려움과 대적의 입장에서 맞이한다는 것이오.
⑷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심은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네 주관의 그 부패성은 언제나 기회를 빼앗기를 주님 앞에 적의 입장에서 대면케 되는 그 시간까지 또는 준비할 기회를 다 빼앗기까지 유혹하여 이 시간에는 주 오시지 않는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 하는 것으로 끌기를 계속하나니 아니 오시라는 안심 중에 주를 맞이하게 할 유혹하는 부패성을 말함이다. 사람들은 오늘만 오늘이야 하는 데에서 기회는 다 뺏긴다. 또 우리는 주님의 오시는 것도 내 생명이 끝나는 것도 실은 모르면서 단(但) 단기간이라도 이것만은 생존 또는 그 일에 대한 사역을 할 수 있는 절대성을 가진 거와 같이 할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지혜자의 일이 아니다. 다음 기간은 내 것이 아닌 줄 알고 언제나 현시에서 싸워야 한다. 텟손 대장은 내일을 적으로 삼은 것이 그의 일생 성공의 비결이라 한다. 우리는 시간마다 도적 맞는 손해를 보는 영안이 없으면 공중에서 주를 맞이 할 때에 그 도적 맞은 피해가 영원한 가난이 될 것이다.
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1. "그러나" 사데에 이러한 외식(外飾)과 불완전의 분위기 중에서도 속화되지 아니한 몇 명이 있는 것을 기뻐하셔서, 그러나 몇 명이 있다는 그러나의 은사를 언두에 두는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성도의 생활을 주밀히 간섭하시고 회개와 충성을 즐거워하신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 심장을 바라보면서 행위를 가져야 한다.
2.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어"라 함은 성결은 도덕적 순결을 말한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소아시아의 이교 사상에서 취할 그릇된 해석이다. 이 옷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함이니 모든 인격인 자율적 행위를 버리고 신본적인 그리스도 중심으로 모든 동기와 법도를 삼아 그리스도의 구속의 합당하게 살아 신본적 성결의 방법과 결과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동기와 소속이 신본이 아니면 대선(大善)의 적이 되는 소선(小善)이다.
"몇 명"이라 함은 원어 자역(字譯)하면 몇 이름이라 함이니 이렇게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의 이름을 주님은 낱낱이 기억하시고 또 하늘의 생명책(계 3:5)에 등록까지 하여 두신 것을 의미한다.
3.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한 흰옷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여 성결을 보수한 자에게 천계에서 입혀 주시는 영광과 완전한 성결을 그들에게서도 주님의 영광과 성결을 입혀 주님은 그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성결의 역사를 이루시나니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다"는 자, 곧 구속의 관계를 끊지 아니하고 거기에 기인하여 사는 자에게 이런 영광과 승리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고 (요 15:5 참조)
4. "나와 함께 다니리니" 함은 주님과 밀접한 교제에 복된 생활을 의미함이니 주와 동거 동행한다는 것이다. 이도 세상에서 시작하여 하늘에서 완전함으로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다.
5.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것은 그들이 유공(有功)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여 주님과 함께 다닐 자격이 있다는 (자기의 공로가 있다 함이 아님) 뜻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런 축복을 받는데 이르는 바른 신앙노선을 걷는 것을 가르친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보수한 자란 말이니 시은주의 요구에 합격된 자란 것이다. 합격자는 자기 공로가 아니오 수은자요 불합격의 행위에서 머무는 자는 선행 아니함이 아니라 실은 배은의 행위인 것이다.
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1. "이긴다" 함은 은혜를 생명화 영화 능력화 되기 까지 성화와 행위에 있어 주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에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2.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함은 몇 명의 사데 교인과 같이 주의 영광과 성결과 동행하는 생활을 얻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내표한 것이다. 여기에는 힘쓰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겠다는 보수(報酬)적의 의미로 충성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1. "그 이름"이라 함은 4절에 몇 명이라는 해석 같이 이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의 이름을 주는 명심하심 같이 회개한 자를 기억하시고 그 이름이라고 하신 것이다.
2.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하심은 반드시를 붙인 것을 강한 보증인 동시에 우리에게 깊이 인식시키고 소망이 견고한 힘을 주어 회개케 하려는 주의 사랑을 포함한 권고이다. 반드시라는 견고성을 붙인 것을 당신에게 흐림이 있음이 아니고 사데 교회에게 견고케 하시려는 것이다.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택적인 생명책은 흐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택함을 말함보다 이미 택소(擇召)한 자로 구속에 합당하게 행위자를 가르침이니 그 모든 행위가 하늘에 상급으로 다 등록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도 능동적의 것이 아니고 피동적의 것, 곧 은혜로 되는 것이다.
3.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심은 마 10:22~23에 기록된 거와 같은 뜻이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일체(一切)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여 통과시킨다는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의 모든 생활도 주님이 도와주시는 중보 역사를 하시겠다는 의미이다. 6절 해석은 2:7 해석을 참조할 것.


六.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서신 (3장 7절 ~ 13절)
빌라델비아는 사데에서 동남으로 100리와 다른 도시에 비하여 세상적으로 세력이 없으나 주님께서 책망 아니한 교회로서 지금까지 있다. 이 교회는 말씀 파수에 충성한 것이 복된 것을 보임이니 귀중성으로 여섯째가 아니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서에 있어서 여섯째로 기록한 것이다.

1.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음과 같다.
⑴ "거룩하고" 거룩하다 함은 구별하고 의로우시고 하심이니 올바른 구별이 없으면 선과 의와 악은 있을 수 없다. 거룩이라는 구별에 대하여 부자 구별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 하나님의 뜻과 율법과 당신의 것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당신은 하나님이시면서도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구별하셨다. 이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계시 말씀만 의종(依從)으로 구별이 명랑하여 박해 중에 있는 이 교회에 동지자라는 위로로써 위로하시는 것이다. 의와 선은 구별하는 것의 소산이다.
⑵ "진실하사" 진실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알레디노스니 거짓에 대한 반대를 가리킴보다 그림자의 반대인 본체를 가리켜 말한다. 이는 약속이행에 대한 진실성을 말함이니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진실을 권고보다 진실함으로 모든 박해를 당하는 것을 주님도 진실로 인하여 재세 시 박해받으신 것을 은밀히 당신의 진실성을 말하여 동지 됨을 보여 위로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책망할 교회에게는 그 반대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 경성을 주시고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교회에게는 그와 동지 된 것을 나타내어 위로하신다.
⑶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 함은 다윗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게 대한 언상(言上) 칭호로 겔 34:23~24에 말하였다. 다윗은 그리스도를 모형하여 구원을 예언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을 모형하여 영원한 왕국을 예언한 그 구원에 대한 모든 주권적 해결을 가지고 주님으로 나타나셨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유대인의 훼방으로 서로 구원의 바른 길이라는 시비가 많았다. 그러므로 유대인뿐 아니라 온 천하가 구원에 대한 시시비비를 할지라도 오직 주권은 나에게 있으니 안심하라는 위로이시다.
⑷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가라사대" 이는 누구에게든지 구원을 베풀면 구원에 앞길을 열면 은혜를 베풀면 이것을 호리라도 제감(除減)할 자가 없고 또 주께서 막으시면 베풀지 아니하시면 이 일을 이룰 자가 아무도 없는 절대 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으로 보여 또 위로하시는 것이다.
⑸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4 가지 뜻으로 찾아오사 이 교회에 당면한 문제에 있어 적절한 위로로 나타나신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위로와 연합을 초래하는 원수가 하는 참 축복이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1. "볼지어다" 함은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권위있게 선포하는 것이며 또 이 교회에 위로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늘 나타나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여 늘 위로와 힘을 주심 같이 이 교회도 그러함 같다. 오늘도 주님 당신을 대적하는 입장에 선 자들을 투쟁적으로 주시하심을 쉬지 아니하시는 동시에 당신만을 의지하여 그 뜻대로 살려는 자에게 위로와 권고와 은혜 역사를 쉬지 않으신다.
2. "네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함은 상술한 바와 같은 주께서 친히 하시는 그 권능을 가리켜 "내가"라고 하시고 또 "내가 네 앞에"함은 밀접한 동역의 성품을 나타내어 말함이요.
"열린 문을 두었으되" 함은 박해 중에 있으나 이런 절대적인 구원을 이미 베풀었으니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 유대인들의 반대하는 입장에 선 그것이 벌써 주와 동행하는 입장이요 은혜 받은 증거이니 의로 인한 환난을 불리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함이다. 또 말하기를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신 것은 일층 더 강하게 내가 함께 하는 증거로 불의에게 대적이 되고 아무리 대적이 될지라도 주가 베푼 은혜를 제멸할 자 없고 주와 동행을 해할 자 없으리라는 절대성을 가진 위로와 소망과 담력을 주신다. 일곱 교회 중에 독특한 일은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전부가 위로요 총 책임을 주가 지신 것을 말함과 원수를 대신 싸워 주시는 것을 늘 말하고 여러번 말하고 이러하신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이 독특하다.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무슨 독특한 장점이 있기에 이렇게 사랑하셨을까 다음으로 찾아보기로 하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1. "내 말을 지키며"하심은 주님의 계시 말씀을 믿어야 할 부분을 믿고 소망하여야할 부분을 소망하고 회개하여야할 부분은 회개하고 맡기고 의지하여야할 부분은 의지하고 배반하며 끊어야할 부분은 배반하고 끊으며 담대하여야할 부분은 담대하고 인내할 부분은 인내하고 증거하여야 할 부분은 증거하고 함구하여야할 부분은 함구하고 바치며 충성하여야할 부분은 충성하는 것을 가르쳐 내 말을 지키며라고 하였고
2.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함은 주님이 자기를 위하여 설정한 모든 공로와 행하시는 모든 구원 역사와 (모든 약속도 포함함) 당신이 계시한 그 속성대로의 인격을 올바로 신앙하고 에녹같이 대우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떠한 빈궁이라도 만유의 주가 자기와 함께 계시니 약 먹기 위하여 혹은 소화불량을 인하여 부자인 부(父)가 절식(節食)시키는 것과 같이 여겼고 대적에 강한 세력 앞에 섰을 때에도 힘센 아버지의 품에 안긴 아이가 저보다 조금 큰 아이의 위험을 두려워함보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그 무례한 아이가 꾸중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오히려 가지게 되는 것처럼 인격적인 주를 참 동거주로 알아 대접하는 것이며 그의 말씀이면 실물 실재보다 더 진실되이 믿었던 행위를 가리켜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참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자 은밀과 외식과 고독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이목이나 그 입에 두려움까지 탈선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산다고 말을 쉽게 한다. 그러나 어떨 때는 한 인격인 인간의 동거 대우도 주께 돌리지 못할 때가 없는지도 살피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3. "네가 여간한 능력으로" 여기 "여간"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미크란이니 문법상으로 강세를 가지는 위치에 있고 그 뜻은 "작은"이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 이유는 소유한 영적 자원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기울여 신앙 보수에 진력(盡力)한 까닭이다. 그것은 그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과 일예이다. (마 12:41~44) 사렙다의 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도 이런 의미이다. (눅 4:26) 주님은 많은 것을 가지고 방종하는 자를 좋아하시지 않고 적은 것을 가지고 힘쓰는 자를 귀히 보신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말씀을 지킨 것과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한 것을 칭찬하심은 완전한 행위를 (절대성을 가진 행위가 아님) 가리켜 기뻐하심이 아니다.
계 3:2의 해석과 같이 주께 받은 영적 자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울려 충성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므로 여기 대한 주님의 요구의 만족점이 가게하고 또 주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위에 기록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색 위로와 칭찬과 친밀을 원하시는 그 원인은 여기 있다. 말씀 파수와 그를 참 믿어드리는 일에 있어 있는 대로 다 충성한 이 점에 있었다.

9절 "보라, 사탄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 "보라"함은 다음에 기록한 사실에 대하여 주목하여 그것으로 한 증거와 또 참고를 삼고 그들의 하는 일에 유혹이나 위협을 당하지 말고 지혜와 담대를 가지라는 의미로 "보라"하고 다음 사건을 말한다.
2. "사탄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함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두 파가 있어 올바르고 칭찬 받는 교우들의 반대자들이 있었다.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 외에는 두 파로 나누이지 않은 교회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다른 교회는 다 회개하라는 권고가 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이 두 교회에 대립된 자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 없는 것이 기이하다.
여기서 하나 생각되는 것은 두 파가 있는 중 회개하라는 권고가 있는 교회들은 옳은 편에 선 부분도 온전치를 못하였고 칭찬 받은 두 교회는 옳은 편에 선 부분은 인간으로는 왼전하다고 표시되었다. 이 점을 보아 두 교회는 택한 자라면 다 회개할 만한 빛을 보였는 고로 반대편에는 회개할 희망자가 없는 듯 함이 보이고 4교회는 그 자체들의 증거 생활이 불충분하여 반대편 중에도 회개할 희망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회개하라는 권고가 있는 까닭이다. 오늘도 우리 교회들이 주의할 것은 교회마다 하나되어 있으면 죽은 교회인 것이 분명하니 인본에서 전부가 돌아서야 하겠고 두 파가 생긴 교회는 진리 편에 선 자로 가질 주의는 4교회에 속했느냐 칭찬 받은 두 교회에 속했느냐의 문제다, 대적의 편에 선 자 중에 주님 보시기에 참 회개할 희망자 곧 택자가 하나도 없기까지 증인의 사명 생활이 완전하였다면 칭찬 받을 입장인  그대로 끝까지 계속하기를 힘써야 하겠고 만이 상대편에 유망자가 있다고 하면 회개에 대한 책임을 쌍방에서 져야한다.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대적 편을 "사탄의 회"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순 사탄의 소속 불택자회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의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유대주의들이다. (계 2:9 해석 참조)
그들의 간판과 선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 세계에 제일로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는 말과 실 생각까지를 가지고 빌라델비아 교회를 반대하는 고로 가책 없이 그들의 양심대로 대적하면서 그것이 하나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 16:1~4 참조) 그러므로 이를 가르쳐 자칭 유대인이라 함이라고 하였고 다음에 밝히기를 "그렇지 않고"라는 증거를 하셨다 교회의 양파와 노선이 생길 때에는 어느 것이 주님께 소속되었으며 옳은 편인지 (불완전하나 그 중에서 옳은 것) 생사의 문제이니 감정이나 이해나 고집 등을 벗어나 냉정한 비평으로 심사하여야 한다. 하나님 편의 대립의 입장에 선 자로 가질 주의는 택한 자로 옮겨 서지 않을 때에는 일생의 수고가 헛되고 진리에 대적한 책임을 회개하여야 하는 일이 있다. 그 편도 진정 옳은 줄 알고 다 속아서 하는 일일 것을 이렇게 예언하였으니 신중한 비판을 가하여야 한다.
3.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무흠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대적들은 이차로 칭호하기를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였다. 거짓말하는 자라는 표시는 사탄의 소속이라 함이오. 혈통 오늘 종교의식으로 아브라함의 자손 곧 예수님의 신자라고 생각하고 아브라함의 신앙과 예수님의 주의를 그대로 가진 것으로만 참 기독자 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자들이 거짓말하는 자이다. (끝까지 이러한 주장을 가진 자) 그 중에 "몇을 네게 준다" 해석이 각이하다. 박윤선 목사님은 "유대인들 중 몇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것을 예언한 듯하나"라고 하였고 혹설에는 끝날 심판 때에 유대인들이 성도들 앞에 굴복하고 심판 받을 것을 가르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9절 초두에 "보라 사탄의 회 또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준다"고 하였고 이 교회는 회개하라는 권고가 없는 것을 보아 굴복하는 몇 사람은 실지 유대인도 그 시에 있으려니와 지상 전 교회에 이런 류가 있을 것을 말함인데 이들은 택자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비행과 자연 보응으로 굴복하기 싫은 부득이의 자연 굴복을 하게되는 것을 말함이니 감화의 회개가 아닌 것이다. 오늘도 참 진리의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쳐서 과격할 때는 꺽는 일이 있는 것을 종종 본다. 과연 몇을 함같이 진리의 대적들이 세상에서 꺽어지는 량패가 되는 일은 희소하게 보이고 육적 승세가 많은 것을 말함이니 역사와 신앙 경험에 그러하다.
또 이들이 택자로 회개하고 돌아옴이 아닌 것이 분명함은 거짓말하는 자들 중 몇이라고 하고 굴복만 말하고 회개라는 말은 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전체로도 회개하라는 허락을 주신 일이 없고 또 와서 "발 앞에 절하게"한다고 하였으니 계 22:8에 요한이 천사에게 "절하는 것"을 동등 형제니 불가하다고 엄금하고 주께만 경배하라 하였으며 마 4:10에도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주님은 말씀하였고 행 27:24에 선객(船客)들을 네게 "주셨다" 하였으나 절하라 말은 없다. 사 60:14, 45:14 절하리라 한 그 대상은 주님을 가르쳤고 49:23에 절하는 자들은 이방  권세자들이 진리대로의 사람들을 존경하리라 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하는 자들은 불택자들의 불의 세력이 가끔 꺽어짐과 또 회개하는 듯이 돌아와 아첨하는 자중에도 이종(異種)인 불택자가 있으매 일층 주의를 가지라는 그런 뜻과 또 주께서 굴복을 다 시킬 수 있으나 필요한 정도는 꺽고 있어 유익할 정도는 두시는 전지의 지혜로 절대 주권적으로 처리하나니 빌라델비아 교회야 두려워말고 굳게 종전같이 지키라 하신 주의를 준 것이다.
4.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한 2인칭은 친밀을 의미하고 또 미래사로 되어 있음은 과거는 많이 훼방을 받고 참은 너희에게 앞으로 천하가 만나는 큰 시험을 승리케 하여 여간한 힘으로 주의 이름을 믿는 일과 말씀 파수에 충성하는 너를 내가 참 사랑하는 것으로 증거하여 보이겠다는 위로와 약속이다.
"알게 하리라" 하시는 자칭 유대인들로 확인하게 하리라 하심이니 이는 시험을 일으켜 그들이 죽쩡이 인 것과 너희가 알곡인 것을 그들 앞에 나타내어 입을 벌리지 못하고 굴복하게 하리라는 말씀이다. 우리들은 이 점에 대하여 경외하며 근신할 것은 주님 편에선 옳은 일에 대적하는 입장에 서면 주님께 복수 받을 행위이니 두렵고 스스로 된 줄 알고 태만 하다가 시험 때에 실패할까 두렵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이는 주님의 도를 보수했다는 말이니 곧 주님의 말씀대로 지켰다는 말이다. 인내의 말씀이라 함은
⑴ 인내를 가지고야 파악하여 나아갈 수 있는 복음이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고
⑵ 십자가에 못박히시기까지 감내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된 복음의 뜻이 있으며
⑶ 자기는 무지 무능하니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말씀을 신실한 자기 지혜로 삼고 그 능력의 도우심을 바라보는 고로 자행(自行)자지(自止) 아니하고 맡겨 놓고 온유하게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고
⑷ 소망을 다 주께서 약속하신 그것에 두고 기다리는 뜻도 가지고
⑸ 범사에 주께서 잘하여 주실 줄 믿고 이해 못하는 일에도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기쁨으로 인내하는 것을 의미함이니 충(忠)과 고(苦)와 시간 상으로 주의 사랑에 간섭과 그 법도인 말씀을 확신함으로 범사에 인내하는 그 맡기는 생활을 말함이니 이는 참 주를 대접하는 생활이다.
⑹ 주의 도를 소유함에는 상필(常必) 환난 중에 거하게 됨으로 인내라야 지킬 수 있는 고로 인내의 도라고 소망 중에 순종만 하는 것이다. 맡기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다음과 같다. 맡기는 생활하는 양태는 자아 부인하여 십자가를 매일 지는 자이니 곧 날마다 죽는 생활이다. 고전 15:31
[1] 내 마음 죽이고
[2] 의심 죽이고
[3] 내 지식 굴복시키고
[4] 내 생각 죽이고
[5] 내 뜻 죽이고
[6] 내 소원 죽이고
[7] 낙망을 죽이고
[8] 내 희로애락을 죽이고
[9] 내 분도 죽이고
[10] 내 탐하는 것 죽이고
[11] 내 판단 죽이고
[12] 내 욕심 죽이고
[13] 내 계획 죽이고
[14] 내 말 버리고
[15] 내 행동 죽이고
[16] 내 노력 죽이고 (주의 힘으로 아니하는 것)
[17] 내 사랑, 자비도 죽이고
[18] 내 성질 죽이고
[19] 내 기분 죽이고
[20] 내 의견 죽이고
[21] 내 방법 죽이고
[22] 내 감정과 섭섭함 죽이고
[23] 내 성공하려는 것 죽이고
[24] 내 수치 피하라는 것 죽이고
[25] 내 이름 높이는 것 죽이고
[26] 내 경험, 내 체험 죽이고
[27] 내 고집 죽이고
[28] 내 주장 죽이고
[29] 내 쾌감 죽이고
[30] 내 몸 복종시키고 (죽이고)
[31] 내 각(各) 이성 복종시키고
[32] 내 눈 아주 뽑고
[33] 내 혀 끊고
[34] 내 힘 버리고
[35] 내 체면 죽이고
[36] 사리판단 죽이고
[37] 첫 아담에게 속한 자아를 전적으로 부인하여 죽여 장사지낸 거와 같이 되어지도록 노력하고 아주 딴 사람 새로 지은 새 사람, 곧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사 주의 지체로 주의 병기로 삼아 주의 뜻대로 쓰시는 자가 되어지도록 노력하여 성경 말씀 하에서만 움직이고 모든 성사는 주께만 일임하는 것이 그것이 맡기는 것이다.

어떤 한 사물을 성사키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하는 것은 자기의 주장대로 하는 일이니 이는 하나님께 맡겼던 것을 도로 찾아 자기가 그 일을 책임지고 자기의 지혜대로 자기의 독단의 일이 되어진다. 이유는 주님의 주장대로 하면 아니 될 것 같아서 자기가 설계하는 것이니 주를 부인하고 자기 설계자에게 수종 하실 하나님은 아니시다. 모든 일에 있어 주께서 맡기만 하시면 필연적으로 무결의 완성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맡기는 사람은 많이 볼 수 있고 완성하시기까지 참 맡기는 사람은 희소하다. 그 실증은 하나님의 뜻대로의 무결의 완성을 범사에 가진 자가 적은 것으로 참 맡긴 자가 적었다는 표적이다. 참 맡긴 자가 누구뇨? 끝까지 맡긴 자니 끝까지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요. 자기로서 최고로 부인 비합리 같이 보이지는 전적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전적 자기를 죽인 자가 아니고는 인정할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그 절정의 한 고개에 맡기고 순종하는 것이 참 맡기는 자로 주께 등록이 되는 것이다. 이 등록은 만사에 완성이다. 범사를 맡길 때에
① 일차는 죄아(罪我)에서 빼앗아 중생자에게 맡기고
② 이차는 성화 된 자아에게서 빼앗아 내주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으로 맡길 것.
③ 죄아는 순 거짓말쟁이, 그놈의 반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④ 중생 자아는 지와 능에 유한하니 무한하신 주님께 맡기고 내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한 내 주님이시니 모든 것을 맡길 것이다.
⑺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요 14:23 언수자(言受者)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희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행 20:32 너희를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리라.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이(利)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여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시나니. 사 56:10~11 비와 눈이 나려서는 다시 돌아가지 아니함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 뜻을 다 이루리라.(해석)
말씀 파수에 대하여
창 3:21, 15.....아벨은 가죽옷 입히신 그 약속 말씀 한마디를 지키기를 창 4:8에 죽기까지 지켰고
히 11:7............노아는 방주 예비의 경고 일언(一言) 120년 순종하였고 아브라함은 창 12:12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한마디로 일생 순종과 죽음에서 믿고 죽었고
창 37:7, 9.......요셉은 두번 꿈 계시 보고 13년 감옥에 인내하였고
왕상 18:1........엘리야는 한 말씀 듣고 사지 아합을 만나러 나갔다.

2.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함은 대귀적(對句的)으로 역설하는 쌍방 계약과 보수의 공의를 가지는 말이다. 이는 네가 나를 배반치 아니하고 나를 생존하는 인격자로 대우하고 내 말을 신종하였으니 내가 또한 너를 배반치 아니하고 네가 나를 어떠한 지혜자로 권위자로 사랑의 주로 신실자로 믿은 것만치 바라본 것만치 다시 말하면 대우한  것만치 내가 네게 대하여 지혜롭게 권위 있게 또 너를 사랑하고 신실하게 하여 주어 네가 믿은 그대로 바라본 그대로 호리도 헛되지 아니하게 너에게 응하여 주리니 달리 말하면 네가 나를 대접한 것만치 내가 너를 대접하리니 네 앞에 있는 모든 난제를 내가 다 해결하여 줄 것이오 모든 싸움을 이기고 모든 일에 합격자로 통과시켜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는 성화의 완성과 생활의 완전 승리를 담보하시는 말씀에 장기간의 고문과 고행이 있을지라도 이런 성도에게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는 전 신앙생활의 완성이니 누구나 이 비결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시험은 각양의 것인데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 하는 것이며 또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막는 일들이며 또 진가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등용과 포기로 판정하게 하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험은 교회시대에 일차만 있는 크게 구별된 때도 있으려니와 또 지방 혹은 개인에게 있어 세계적으로는 하루도 없는 날이 없다고 보아 지당하다. 그러나 지방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이르는 일들은 특히 구별된 시험들이니 반드시 말씀 파수에 자유의 때를 주시고는 개인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시험의 때가 오는 것이 구속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장차"라고 하였고 또 온 세상에 임할 일이라고 하였다. 최후의 시험은 종말의 대환난들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이 시험을 면케 하시마고 하심은 그 시험으로 인한 연단과 하나님께 등록이 잘 되게 하여 주시마는 보장과 극복할 힘을 주신다는 것이다.

11절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 이것은 경주장에서 되는 일로 영적 사리를 비유함인데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힘쓰란 말이다. 히 12:1~4
2. "내가 속히 임하리니 함은"
⑴ 매사에 준비 차, 시험통고 차, 합격 차, 면류관의 시상위적으로 찾아오시기를 속히 하신다 함이니 준비와 시험의 난기를 속히 오실 주님을 고대하면서 수상까지 인내하라는 위로와 권고의 말씀이다.
⑵ 별세 상봉의 주로 재림 상봉의 주를 만나지는 준비기간이 또 어려우나 십자가 질 기간이 짧아 신속히 지나가나니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열심히 견디라는 말이요.
⑶ 주께서 시은으로 성화와 시상에 대한 역사를 하나 하나의 순서대로 불식(不息)으로 주님이 오실 때마다 하나도 실패 없도록 하라는 권면이다.
3.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라 함은 "여간한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하는 그 행위니 이를 세상마칠 때까지 그대로 지키라 말이다.
"아무나 네 면류관를 빼앗지 못하게 하라" 하였으니 생활을 일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과 유혹들의 수와 종류가 많은 것을 가르침이니 곧 성도들의 투쟁적인 생활을 가르쳐 주심이다. "면류관"이라 함은 혼자 노력함의 값이 아니고 투쟁의 승리의 상이니 기독자의 성화와 행위 상급을 여기 면류관으로 명칭한 것도 역연 투쟁의 승리로서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일생 생애는 적이 없는 시간은 찰라도 없나니 시간마다 패전하지 않도록 말씀과 주와 동행하는 생활을 굳게 잡고 놓지 말라는 것이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 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1.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함은 적은 힘으로 적은 일에 충성한 자를 눅 16:10과 같이 큰 일에도 충성하도록 큰 직분과 높은 지위를 맡기고 또 실수없이 충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시다. 이것은 특히 기독교의 승리의 원리를 보이는 성구이다. 주님은 있는 힘 가지고 다 바쳐 충성한 그이를 붙들고 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둥"은 집에 제일 힘 주이지는 위치에 사용되고 있음과 같이 이런 사람은 지상 하나님의 교회와 말세에 중요한 지위의 힘있는 자로 세워 주심을 받을 것을 약속하심이다. 이 영광을 얻는대도 영원히 빼앗기지 아니하고 가지는 것도 받은 은혜의 분량을 다 하여 충성하는 하나로서 되어지는 것을 보여 충성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주님이 얼마나 기대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힘에 미약한 자로도 교회와 말세에 힘있고 존귀한 자도 될 수 있고 세상에서 지위와 영광과 모든 힘(지력, 재력, 권력, 체력, 심력)의 강건한 자로서 말세에 빈약한 자가 되면 그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함은 내세는 물론 이러니와 지상교회에 있어 부동한 신앙 인격을 말함이니 이는 인간적인 실수가 전혀 없는 완전자라 함이 아니요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완전히 감당하고 또 의인이라 할 수 있는 승리를 하게 보장하시는 약속이니 이도 충성의 기인한다는 것이다. 태산도 한 자욱으로 계속만 하면 절정에 도달함 같이 매일 매사에 충성에 보조로만 걸으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것. 주의 성령으로 하여 주실 것을 약속함이다. 이는 특히 자(自) 성화와 직분과 권능의 점장(漸長)을 말함이요. 다음은 그의 삼중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말씀이다.
2.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에게 기록한다 함이니 이 신앙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하나님의 것 되어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창조와 보장과 시은을 책임지신다 함이요. 그는 자기 하나님으로 그만 섬기는 자 된다는 의미요.
3.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⑴ 새 예루살렘의 소유라 함이니 예루살렘의 시민권을 가졌다 함이요 또 예루살렘이 그의 것이라 함이다. 이는 약속상으로 그의 소유만이 되게 하시마 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이는 택자에게는 벌써 다 허락되어 있으며 또 신앙으로 소유하여 있다. 특히 이름을 기록한다고 하심은 말세에는 물론 소유하며 그 시민으로 살려니와 재세에 일반신자가 부활하여 가서 누리는 그 예루살렘을 실지로 체험하며 경험하게 까지 실지로 그 세계에서 사는 감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⑵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함은 예수님의 새 이름이니 계 2:17의 받는 자 밖에는 모른다고 그 이름이요 계 19:12 자기 밖에는 모른다고 하신 이름이니 ① 이름은 단순히 성호만을 말함이 아니고 성호대로 섭리하시는  그 역사까지를 겸하여 말하는 것이다. ② 이는 세상에서 그 새 이름을 미리 소유한다 함이요. 또 그의 소유가 된다는 의미니 일반신자들이 천국 가서 주님을 아는 거와 같이 숭배함과 같이 갈망함과 같이 그 밀접한 관계를 가진 거와 같은 정도를 땅 위에서 가진다는 의미이다. 특히 하나님의 성,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하는 여기에 상술한 바와 같은 의미를 또 똑똑히 표시한다. 천년왕국 후에 내려올 예루살렘을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승리 반열에 드는 성도에게는 생존의 체험하며 또 실지로 덧입게 되며 그 세계에서 아버지와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킴이니 이런 성도들은 얼마나 편하며 그 나라에 대한 준비에 얼마나 열중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그 나라에 가서 세상을 본 거와 같이 세상은 포기되고 그 나라에 가서 주님과 그 나라의 존귀를 느낌 같이 오늘의 존귀를 느끼는 것이다. 아버지와 주님의 그 친밀도 다 그러하다.


七.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서신 (14절 ~ 22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카 강 윗편에 있는 부(富)한 상공도시로서 빌라델비아 동남으로 150리 쯤 되는 현재 이름은 에스키헷사라는 중요치 않은 도시이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 중 특색 하나가 있으니 두 파로 되어 있지 않고 한 파로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로 단결됨이 얼핏 보면 좋은 듯하나 실은 일곱 교회 중 가장 허물이 많은 교회이다. 지상 교회는 악마와 죄악이 있는 곳인 고로 진리의 교우가 없는 곳이라면 부패한 것으로 하나가 될 수 있으나 진리의 교우가 있다면 반드시 두 파는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의와 불의에 분열을 말함이요. 인간의 각이한 이성으로 인한 분열을 말함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요 인간 개인의 의사나 총의나 그 성품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분열되는 양편이 다 참 교회의 적인 사탄의 운동이다. 다시 말하면 분열보다 단합이어야 하고 단합보다 진리가 중한 것이니 히 12:14절 대로 화평과 거룩을 겸하지 아니하면 주를 보지 못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전혀 부패로 하나된 교회가 됨에는 극도 평안하든지 환난이 있든지 할 때에 되기 쉽다. 그러므로 이럴 때에는 다 죽었기 때문에 아 4:6절 대로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이니" 빛 없는 곳에 그림자가 없음같이 진리가 떠난 교회나 시대에는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막 통과는 야동주열(夜凍晝熱)로 화운주(火雲柱)의 조절이 아니였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내세의 성도도 극심한 세고와 세락을 영감으로 조절함을 받지 아니하면 영이 죽는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락으로 전부가 죽어 통일된 교회이다.

1.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다음과 같다.
⑴ "아멘이시요"는 진리의 하나님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니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진실히 성립시키셨고 또 미래로도 계시로 약속하신 그 일을 획 하나라도 (마 5:18) 남김없이 다 이행하실 불변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으니 이는 약속의 말씀을 에누리 혹은 만홀히 여기는 그들에게 너희들이 아무리 부인해도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신실성으로 그들에게 경고를 최촉(催促)하시고 하나님 말씀이 아멘이신 권위와 신종자들을 다음에 몇을 예를 들려한다.

말씀의 권위
① 창 1:3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② 창 1:9~25 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③ 창 1:11 땅은 채소와 각종 씨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④ 창 1:14~15 하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로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치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⑤ 창 1:20~21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궁창에는 새가 날라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⑥ 창 1:24 땅에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⑦ 이상 것은 말씀으로 물질계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이며 존재하는 전부들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존재하였으며 사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권능과 순종으로만 재료도 창조도 존재도 총 활동이 되어있는 우주에 말씀과 적된 자 혹은 의심자, 부인자는 우주 안에 존재할 권리도 없을 뿐 존재할 곳도 없다. 있다면 사명도중일 것이다.

다음은 말씀으로 우주를 초월한 것들을 창조하신 말씀을 참고하기로 하자.
① 벧전 1:23 말씀의 씨로 중생케 하심. 물식(物食) 으로 불포(不飽)  언식포(言食飽) 장성하나니 영은 한 말씀이 부딪치면 죽음도 좋아하는 평강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은 우주를 얻는 것보다 한 성구를 얻어 만족한다.)
② 요 6:63 말씀이 영이요, 곧 생명이라.
③ 요 15:7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짐.
④ 딤전 4:5 거룩하여 짐.
⑤ 벧후 3:7 일차창조를 불사르고
⑥ 계 21:5 일차창조물을 새롭게 하시고
⑦ 고전 1:21 전도의 말씀으로 구원하심.

말씀 신종자들
① 창 15:4 "네 몸에서 난 자가 후사가 되리라"하심을 믿고 히 11:12 이삭을 죽여 제사하라 하실 때에 유사(有史)에 없는 부활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신망하였던 것이다. 시공계에 없는 첫 진리를 신조(信組)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능력으로 발명한 순 인간 중에서는 최대 발명의 공로자이다.
② 노아는 120년 기다렸고 히 11:7, 창 6:3 참조
③ 왕상 18:1 엘리야 아합왕 봉(逢) (만나라 하시니 사지가 확실하나 안심 봉)
④ 마 14:29 베드로 주님 말씀 듣고 수상행(水上行).

말씀 거역자들
① 창 2:17 식필(食必) 사운(死云) 3:4 식과사(食果死) 到今) 계속은 말씀 권능을 계속하여 보이고 있다.
② 왕상 13:9~24 선지 사자에게 찢김.
⑵ "충성되고" 이는 보내신 아버지께 충성됨을 말함인데 곧 세 가지 직분을 완전히 감당하신 충이니
① 제사장은 죽으신 보혈과 (계 1:5) 부절의 기도로 (롬 8:34)
② 선지직은 도성인신으로 삼위의 하나님을 밝히 증거하였고 선지자와 사도와 직접 말하심과 성령으로 계시한 66권 성경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달 알았고
③ 왕의 직은 보호하며 적을 물리치며 또 지배하는 것이니 마귀와 죄와 사망을 아버지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승리하여 멸하여서 해방과 영생으로 적멸 (敵滅) 보호하시고 완전 성화로 영원 순종케 하여 지배권을 감당하신 것을 가르쳐 충성되고 라고 하셨다. 특히 이 3직을 표시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큰 희생의 설정인 구원 완성에 충족하고도 무한이 남는 자원이 있으니 다시 소망을 가지라는 희망을 보이는 사랑이요.
⑶ "참된 증인이시요" 이는 하나님과 하늘에 하나님의 모든 것과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약속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알려 신종과 거역으로 나타나게 하시고 또 사람의 모든 것과 인공(人工) 그 자체를 그대로 하나님께 고하여 상벌로 나타나게 하실 중보자이심과 심판자이심을 증거하여 상벌의 자유의 율법을 선언하여 회개를 재촉하시는 경고이다.
특히 증인이라고 인성을 붙인 것은 신인양성을 가진 단위(單位)의 인격으로 중보되심과 이 중보되심은 하나님이 종의 형상을 입은 것만치 큰 희생의 투자로 된 것인 것만치 증거하시는 그 일이 중대하니 청(聽),불청(不聽)자와 종(從), 불종(不從)자의 화복의 차이가 얼마나 중대성을 보이며 이 일을 하나님이 얼마나 중대하게 취급하실 것을 보이는 말이다.
⑷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이는 그리스도는 창조주로 이미 창조된 우주와 과거 현재의 모든 승리의 교회 개인 등을 창조하신 이도 다 주님 당신이었던 것을 소개하시면서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친히 창조하시려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일차 창조주로 도성인신과 사활 하심은 제 이차 창조의 시작이며 완성의 사역이시다.

결론.
① 하나님 말씀을 업신 여기는 자에게 불변인 아멘으로 나타나시고
② 진공같이 영적 공허자들에게 충성인 3대직업으로 나타나 무한의 자원을 가지시고
③ 내세의 응보를 못 보는 소경과 근시자들에게 정확한 보응의 보증에 참된 자로 나타나시고
④ 무(無)와 같은 대빈(大貧)자들에게 은혜로 부요하게 창조주로 나타나심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적절하시게 나타나셨다. 이는 회개만 하면 모든 것에 완전할 희망을 가지고 오신 주님은 곧 우리에게도 오신다. 우리는 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회개에 열심을 가져야 한다.

15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 "차지도 아니하고" 복음과 상관없는 불신의 생활이니 전체적이나 부분적으로 복음과 상위(相違)되어 있으면서 복음에 합치된 줄로 아는 것을 말함이다. 복음에 가르친 대로의 신관 천국과 세상관 자아관 심판관 죄의관 기타 모든 사물관 신망애 행동 기타 모든 것이 복음적으로 되지 아니한 부분이나 전체를 가르쳐 차운 것이라 함이니 "차지도 아니하고"함은 복음적이 아니면서 복음적인 줄 바른 신행이 아니면서 바로 될 줄로 아는 것을 가르쳐 차지도 아니하다고 한 것이다.
2.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더웁다 함은 복음대로 올바로 신행을 가르침이니 상술한 정반대 모든 신앙과 지식과 소망과 사랑과 행함이 성경적인 것을 말함이니 더웁지 아니하도다 함은 성경적이라 하고 또 성경적인 줄 아나 실상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더웁지 아니하다고 한 것이다.
3. "네가 차든지 더웁기를 원하노라"
① 특별히 "네가" 함은 단체를 말함보다 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② "차든지" 함은 신앙사상과 지식과 행위가 성경적이 아닌 것이 아닌 줄로 알고 주님 앞에 나아오든지 다시 말하면 잘못 된 것이 잘못된 자로 참 믿지 못하는 것이 참 믿지 않는 것으로 참 바른 신앙 인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 못한 줄 알고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오란 말이다.
③ "더웁기를 원하노라" 된 줄 안 그대로 참 바로 되기를 원한다 함이니 바른 신행을 가진 줄 아는 그대로 참 복음대로 올바로 된 자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참 바로 믿어 믿는 줄 알고 참 회개할 것이 없이 온전히 회개한 자로 된 후 다 회개한 자로 주 앞에 나아오라는 것이다.
4. 복음적으로 아니되었으면서 된 자로 주 앞에 서니 "차지도 아니한" 자요. 복음대로 되었다고 하면서 아니 된 자로 주 앞에 서니 "더웁지도 아니한" 자요. 복음대로 된 줄 아는 자야, 참 복음대로 바로 되어 주님 앞에 서라는 것으로 "더웁기를 원하노라" 하심이다. 예를 들면
① 성경이 죄인은 죽는다 하였으니 참 죽는 자로 죽음에서 살며
② 신자는 복음에 중생 영생자라 하였으니 참 중생 한 천국인의 생활로 영생자니 불사자(不死者)로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는 자, 죽음이 없는 자로 살며 죽는 자. 옛 사람으로 살지 말고 불사 영생자 새 사람으로 참 살면서 그리스도 안에 중생자로 사는 줄 알 것.
③ 성경에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고 순종하는 자라 하였으니 참 그대로 완성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 행위를 할 줄 알고 완전을 찾아가는 미완성이며 "더웁지 아니한줄" 알고 완전해진 다음에 더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④ 그리스도의 신부로 정절을 가진 자라 하였으니 참 성경이 말한 세상과 음행 함이 없는 순전히 주만을 역경이나 순경이나 생에나 사나 부나 빈이나 병이나 건강이나 눅 10:27 계명대로 주님만 바라보는 자로 되었거든 된 줄 알라 함으로 "더웁든지" 함이다.
⑤ 신천신지와 천국에서 사는 것이 지상 성도이라고 (마 10:7, 눅 17:21 참조) 하였으니 천국은 계 21:4 눈물, 사망, 애통, 곡, 아픈 것들이 다시 없고 계 21:25 낮 뿐이요 밤이 없다고 하였으니 내가 참으로 완전히 이 세계에서 지금 살고 있는지 있다면 그는 더운 자요 만일 그렇지 못하고 된 줄 알면 더웁지 아니한 자이니 참 그러한 성화의 사람이 되고 완전 천국 시민이 되고야 된 줄 알라는 것으로 "더웁기를 원하노라" 하신 것이다.
이상에 예를 든 것 외에 수많은 부분이 있다. 이것만으로서 원리만 표시하는 것이다. 신망애 순종 인내 지식 선 진실 주권 등에 있어 성경대로 올바로 되고 된 줄 알라는 것이다.
16절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 "미지근하여" 함은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한 것이니 되지 못하고 된 줄 아는 것이다. (본장 15절 1. 2. 해석 참조) 미지근한 것은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두 가지 죄를 내포하고 있다. 1.은 교만이요, 2.는 외식이다. 물질적으로 말하면 "미지근" 한 것은 찬 것보다 더워지기 쉽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면 "미지근한" 신자들은 열심 있는 믿음에 이르기 어렵다. 오히려 핍박자(본 비유에 찬 것에 속한 것.)보다 신앙 부흥이 어렵다. 그 이유는 그들은 스스로 속아서 신앙이 있다고 자처하며 교만하였기 때문이다.
2.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심은
① 도에 합격 못된다 함이요.
② 생명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함이요.
③ 주님의 구속도리에 참가할 수 없다 함이니
④ 이유는 그리스도 그 자체와 천국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은 (더웁지 아니한 것) 불완전하니 주께서 취하실 수가 없고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은 불완전한 자, 곧 죄인과 무지무능, 가난한 자, 죽은 자를 취하여 온전하게 고치는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 불완전하지 아니하다고 하니 또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재세에 자기 죄를 찾지 못하는 것과의(義) 못된 것을 의로 여기는 것보다 더 불행스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주홍과 진홍 같은 죄를 성결케 하는 보혈에도 불가능한 죄요, 냉수 한 그릇의 의도 바라지 않고 반드시 상을 베푸는 의에 전권인 천국에도 소용이 없는 의이다. 죄를 발견하여 참 죄인될 때와 참 순종으로 의를 행할 때에만 주님은 동거동행하시고 성화 승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란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 라오디게아 교회는 참 증인으로 아멘으로 주님이 나타나신 그대로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자율을 의종하며 자율대로 모든 사리 판단을 가졌던 교회인 것이 분명하다. 왜 그런고 하니 자칭은 각양으로 복된 자라고 하나 주님은 다시 말하면 만사물관을 성경과 같이 바로 보지 못하고 거꾸로 가졌으니 이는 곧 인생의 금생과 내생 육과 영, 하나님과 자기를 통합하여 이해와 화복을 간주하지 아니하고 극외부의 극소의 일부분인 육과 세상과 부패한 자아만을 표준하여 모든 것을 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눅 16:19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은 사람이다. 이 교회에 주님의 요구는 만사물관을 바꾸며 또 실지로 바꾸어 가지라는 권면이다.
2. "네가 말하기를" 이는 주님과 대립되는 비판이라는 말이니 스스로 말한다는 말과 같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와 반대되는 비판을 가져 주장을 하나 그것에 사실과 결과는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네게 미치는 불행이 크다는 것을 다음 논술하기 위하여 그의 주장과 주님의 주장을 대립시키려는 시작의 말이다.
네가 자율을 주장하나 하는 책망과 그 가련을 말하는 것이니 하와, 아담이 자율을 취한 시작과 같은 욕망과 안위이나 결과적으로 사망한 것 같이 그러한 불행스러운 주장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3.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이는 중생 된 자가 참 자아인데 이 사람으로 간주하지 아니하고 옛 사람, 곧 불신자와 같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이니 육신대로 각양 부자 (물질, 지식, 권세, 영광, 몸, 연령, 생명, 지위와 인성:人城들의 부요)되어 모든 것에 만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신 바를 관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음의 말하려는 것이다.

4. "네 곤고한 것과" 함은 참 자기(영육이 합일되어 영존할 자아) 참 자기에게는 현재와 미래에 그의 고통과 수고로움이 영원히 계속할 그 입장에 있음을 말함이니
⑴ 마 11:28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요 시 2:1 "허사를 경영하는 자"라 하심 같이 영원히 면제 못할 죄벌과 절대 불가능할 인생의 영원을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것과 택한 자라면 하늘에 영광 없는 고전 3:15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을 가진 입장에 있는 영적 곤고한 것들을 가르쳐서 말함이다. 중생된 사람의 표준으로 간주하여 곤고한 자란 말이다.
5. "가련한 것" 이도 영적 가련을 말함이니 약 5:1까지 기록대로 모든 착취와 도살의 날의 마음을 살찌운 큰 부채를 소요 없이 영원히 진 것과 눅 16:4대로 다시 준비나 승리는 없는 귀중 재세 기간을 헛된 것에게 빼앗기는 것과 시 73:12대로 꿈 생활 같은 세상 것으로 성화도 성결도 선행의 자료인 몸과 시간과 모든 소유를 다 바꾸고 빼앗기면서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 하니 가련한 자로 최후 결산에 자기 것은 하나도 없고 헛되이 부채만 진 속는 입장을 말함이다.
6. "가난한 것과"
① 영의 생명과 능력과 지혜와 영광과 부요에 가난한 자
② 하나님과 영교의 지위에 빈약과 그의 사랑하심을 받음에 빈약과 그에게 신임 받는 일에 빈약과 동거동행과 그 영광의 동참에 희박 등과 성도의 만물에게 받는 환영의 환(歡) 등을 가르쳐 말하고

7. "눈먼 것과" 영안의 어두운 것을 말함이니 육의 소경 된 자가 접촉되는 신경과 들리는 감으로만 사물을 알 수 있고 눈뜬 자의 원시(遠視)함을 이해 못함같이 영과 세상을 표준한 현실만이 알고 인생의 영원한 장래인 영과 내세에 관한 일은 도무지 이해 못하는 육체주의와 인본주의만을 표준하는 인생관을 가진 것을 가르쳐 눈먼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현실도 바로 난 것은 아니다. 짧은 현실이니 얼마나 영원에 원인 감을 가져 신중히 시간을 두고 싸워 준비하여야할 정금 같은 기간이다. 인간의 지혜는 다 소경이다. 시공과 절대자의 영원 의지에 대하여 전부를 절대적으로 제한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율은 다 지혜에 대한 소경이다.
8. "벌거벗은 것을" 이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의 벗은 것을 말함이니 영은 곧 중생자는 영생할 천국 시민인 것만치 낡아지는 물질의 의복이 필요없다. 그 나라는 빛과 사랑이 넘치는 나라이니 의와 거룩으로 의복을 삼는다. 눅 16:19 홍포 입은 부자의 옷이 그 나라에 따라가지 못하였다. 마 22:11-13 혼인 잔치 비유에 자기 옷을 입고 일정한 예복을 입지 아니한 자는 천국은 누구나 자기의 의(인생의 행위 의로는 용납되지를 못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수많은 이종교가 도덕가 많이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예복으로 입지 않고는 천국에는 용납시키지 않는다. 이유는 인류는 다 범죄하였으니 의행 같으나 실은 하나님의 대적의 입장인 행위니 불의의 속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로만 천국 예복을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벌거벗었다 함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불신함과 또 믿는다고 하나 그리스도의 피를 벗어난 자의 행위 곧 그리스도의 구속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아니한 행동을 말함이다. 이는 주님의 피에 팔렸으니 모두가 그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내게 허락한 모든 것은 내 것이요. 재세의 내 전부는 주의 것으로 주께 순종하여 주만 위하여 살 권리만 있는 자요. 이것이 예복을 입고 주 앞에 사는 자이다. 재세 뿐 아니라 영원히 내 전부는 주의 것이요 주님만이 내것으로 나는 주님 위해 주님은 날 위해 사는 것이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며 곧 생명이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보혈과 관계없는 생활을 정신 없는 자의 일같이 수치스러울 뿐 죽은 시체같이 보기 흉한 것이다.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 "내가 너를 권하노니" 이렇게 불순종의 교회에 진노보다 면할 수 없는 진노가 오기 전에 회개를 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2.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불로 연단한 것은 잡을 제한 순금을 말함이니 곧 무잡 순금같은 믿음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믿음이 부요가 되는 것은 아니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은혜를 얻어 부요하란 말이다.
미국의 무디 선생은 믿음보다 더 수입이 없다고 하였다. 국(國) 기업 소유와 모든 영광 권세 지혜 거룩 생명 기타 성경이 허락한 모든 것은 다 믿음으로 소유할 수 있다. 믿음으로 소유된 것은 영원히 무엇에게도 소멸 당하지 않기를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은 없이 할 아무 피조물도 없고 믿음으로 소유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완전하고 좋다하여도 멸하여지지 아니할 것은 없다.

특히 "사라"함은 믿음을 사라 함이니 믿음을 가지는데는 교환적인 순서를 가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자율을 대가로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값을 주고 물건을 취하든지 물건을 취하고 값을 주든지 결국은 교환이 되어야 매매가 성립되는 것처럼 믿음도 선후 순서는 변할 수 있으나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다.
3.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3장 17절 8호 해석 참조,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사서 입으라 함이니 입는 데에는 그리스도의 피에 팔린 자로 주께 순종하는 생활로 주만 위해 주의 것으로 사러 주 밖에 나가지 아니하는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사라" 함은 자기를 주께 드려 죽어 장사지낸 자와 같이 죄에 대해서는 아주 죽고 의에 대해서만 사는 자유를 다 내어준 자로 주의 의를 소유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의 생활이 옷을 입는 것이다. 이 수치는 하나님의 관찰대로의 수치니 불택자이면 영원한 지옥에서 수치가 되고 택한 자이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이유는 의의 나라이니 불의가 수치로울 것이고 또 수치가 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벗은 생활이니 세상에서는 수치보다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는 편이 많다. 이는 죄악으로 관영한 까닭이다. (빌 3:19 참조)

4.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안약은 하나님의 계시 말씀과 성령의 감화의 마음이다. 모든 주관과 인율을 내어놓고 말씀과 영감으로 치료하여 만사물관을 주님과 같이 되게 하여 과거와 미래에 대한 영원을 바로 아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다. 진리의 감응이 없는 강퍅한 마음을 율법으로 영감으로 갈아 새 살같이 보는 거와 같이 긴 장래에 일이나 현장 같이 확고히 느끼는 것이다.
예컨대 죽는다 하셨으면 곧 죽는 것으로 천국에 대한 계시는 천국에 가서 사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에누리 없이 말씀이나 실지이나 동등시하는 예민한 심령으로 말씀에 감응을 받으며 말씀대로 판단하는 것으로 눈뜬 자의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 외에는 다 그릇 아는 소경인줄 알아야 한다. 계시 의종만이 참 지혜이다. 주를 위하여 죽으면 산다하셨으니 순교를 당하면서 사는 기쁨과 평안을 가지도록 의로운 고난이 애굽 모든 부요보다 큰 재산이라 하였으니 해를 당할 때마다 큰 수입인 기쁨 감에서 사는 것처럼 확신을 가지는 것을 영원히 완전한 지혜가 되는 것이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 죄인에게 회개를 위한 책망과 징계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최고귀의 은사이다. 죄로 죽은 자가 회개로 사죄받아 생명에 이르는 것은 기독교의 원리이요 기독교에만 있는 특수의 선물이다. 구약 삼상 7:3 "가로되 너희가 만일 온 마음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 하거든 이방 우상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가운데서 끊어버리고 마음을 여호와께 향하여 여호와만 섬기라. 그리하면 블fp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리라" 대하 7:14에는 "이 백성은 곧 내 이름으로 이름한 자니 스스로 겸비하며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며 그 악한 길을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에서 재앙을 거두리라" 하셨으니 이 구절들은 기독교의 회개의 유일인 방법을 말함이다.

기독 회개는 택한 자에게만 한하고 불택자에게는 허용치 않는다. 이 회개는 이루는 방편에 있어 어떠한 환난과 불행 같은 순서를 통할지라도 그는 동기도 결과도 다 사랑이요 사랑의 훈계인 징계요 죄 값인 벌은 아니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 담당하신 연고이다. 상기 성구대로 기독교의 회개는
① 숭배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만 유일의 숭배주로 삼는 방향 전환을 말하고
② 이로 기인하여 자신의 변화와 생활 변천을 말한다.
③ 이종교는 ②로만 구성된 것이나 기독교는 ①인 방향 전환 곧 유일의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의 선행이 아니면 선의 가명을 가진 악으로 간주한다.
시 34:18에는 "마음이 상한 자를 여호와 가까이 하시고 심중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리로다" 시 51:17에도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니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경홀히 여기지 아니하시겠나이다." 시 147:3에 "여호와께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그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하셨으니 이는 원죄인 부패성과 본죄인 자범죄를 개개(個個)이 발견하여 통분히 여기며 고침 받기를 원하는 통회다. 원개(願改)의 양면을 가진 택자에게는 이것이 유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이요 사망을 생명으로 부패를 성결로 벌을 상으로 대적을 애자(愛子)로 바꾸어 고쳐 주심을 받는 유일의 방법이다. 회개는 속으로 되는 것이라야 한다. 이는 마음이 슬프고 두려움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욜 2:13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하였다. 회개는 주관과 사상과 마음과 성품과 행위 변화를 열매로 한다. 회개에 방해되는 것은 많은 중에도 가장 큰 것은 외식이다. 남의 눈에 티는 볼 줄 알아도 자기 눈의 들보는 알기 어려운 것이 인생이다. 동일한 죄악이라도 남에게 있는 것과 자기에게 있는 것에 대한 동일한 증오심을 가지지 못하는 외식을 가지기 쉽다. 같은 증오심을 가지는 사람은 회개를 이루고 차별을 가지는 데에는 스스로 속고 회개가 되지 않는다. 이웃의 최대 만의 죄악이 나에게 해를 준다. 내게 있는 최소의 죄 하나만치 손해를 주지 못한다.
회개는 인간의 눈가림이나 칭찬을 원치 않는다. 추악한 죄를 회개함으로 받는 치욕을 기탄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를 참 미워하기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오는 추욕과 고난을 성결에 갈급하여 생명의 보호색같이 여겨 쾌감으로 받는다. 변명은 아직도 죄악성에게 종된 증거이다. 치욕은 기름이 되고 칭찬은 도적과 같다. 암탉이 울면 주인이 낳은 알을 내어감 같이 칭찬을 받기를 원하는 자는 그 선행의 상을 교만의 주인인 마귀에게 빼앗기게 된다. 회개에는 단절성과 접속성을 가져야 한다.
진실이 없는 자는 간사한 사람이니 내외심을 가진 표리부동의 이중자로 스스로 속아 외식에서 머물고 회개하지 못한다. 시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그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시 28:3 "악인과 행악 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회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시 41:9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라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악어와 같다. 악어는 웃으면서 독을 품고 울면서 삼킨다고 한다. 중국 상국(商國)이라하는 국왕 紂(주)는 지족이거간(知足以拒諫)하고 언족(言足)이 식비(飾非)하였고 조조는 치세지 능신(致世之能臣) 난세지 간웅(亂世之姦雄) 이렇게 하면 회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교만은 회개에 대한 큰 방해이다. 시 17:10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목거리로 삼고 강포가 저희 입은 옷이며" 하셨다. 자체를 높이는 환경에 쌓일 때에는 회개의 시기를 빼앗긴다. 잠 15:22에 "거만한 자는 견책 받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 잠 15:32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잠 28:13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라" 죄의 값은 사망이니 회개는 생명과 축복을 찾아가는 돌다리와 같다. 초목에 무성(茂盛)은 뿌리를 지면으로 광심(廣深)히 뻗치는 데 있고 영혼은 본죄와 원죄로 상(傷)한 마음에서 그리스도를 얻어 가지게 된다. 회개는 비상한 통회에서 생수의 기쁨이 솟는 것이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함은 회개하지 아니한 죄과로 가루어진 장벽을 문으로 상징한 것이니 회개로 이 장벽을 헐면 인생이 여는 것이요. 심판의 정죄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 강제로 문을 여시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 문밖에서 두드린다 함은 주님이 위하여 간절히 권면하시되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것과 또 심판 때 또는 개인 별세의 때에 택한 성도를 그리스도께서 만나게 되면 마치 방종한 처녀가 나체와 부정한 행위 중에 수치스럽게 발견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세상과 짝된 수치로 나타날 것인 고로 별세와 재림 전에 회개를 최촉하시는 주의 사랑이다. 두드림은 자기 생활의 환경 또는 어떤 사랑 하나님의 말씀 영감 등으로 회개의 제목들을 두드리신다.
우리는 이런 회개의 권고가 내게 임할 때마다 먼저 주님이 내 앞에 오셔서 간절한 자모(慈母)의 권면으로 비할 수 없는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어려운 단절이라도 실지라도 착수할 것이며 어떠한 깊은 죄에서라도 낙망으로 주를 섭섭게 말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소망을 굳게 잡고 신앙으로 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누구든지 함은 얼핏 보면 인류 전부에게 회개하려면 할 수 있는 전 인류 구원설 같이 보여지나 외부적으로는 아무나 회개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공의를 선포함이 되고 은밀한 의미에서는 택자에게만 유효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내 음성을 듣고" 하심은 직접 음성을 들은 성질로 말함이니 이는 주님이 어떤 형식적 계시로 통화함을 말함이 아니고 이미 나타난 문서계시를 당신의 직접 음성의 말씀으로 표시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이 지금 재림하셔서 말씀하신다고 하면 그 말씀과 이 문서계시와 차이를 둔다. 이는 부패한 심령이 강퍅한 까닭이요 말씀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권위적으로만 말함이 아니고 실지로 계시 말씀을 접촉할 때마다 주님의 직접인 음성인 것을 믿어야한다. 이것이 실지요 가상이 아니다. "듣고" 함은 말씀을 신앙함을 의미하고 어느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3.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회개를 하면 그 회개를 통하여 주와 나와 가까워지고 주님은 나를 점령하시고 나는 주님께 붙들리며 주님을 영접하게 되어 내 안에 주님, 주님 안에 나, 상호 내주 관계를 가르쳐 "들어 가"라고 함이요 "그로 더불어 먹고" 함은 주님은 그를 붙들고 뜻을 이루시고 주님의 일을 하시고 그는 주님의 시장을 면하여 드리는 대접을 하게 되고 함이니 그는 주님을 위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
4.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함은 회개하는 자는 주님이 그에게 붙들림같이 그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소망과 생명의 자람이 되어 주를 힘입어 그의 소원을 곧 그의 사명과 본분 곧 재세에 자기의 총의무(總義務)를 다 하게 하여 완전한 구원 준비에 나아가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그의 참 주님이 되어 그의 소원을 다 이루시고 그를 위하여 일하시며 영원히 살으시겠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영광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이 행복의 후궁은 오직 회개의 열쇠로 만들어 갈 수 있다. 회개자의 소원이 이루어지니 행복 되는 그 이면에는 보이는 행복보다 더 영광됨이 내설 (內說) 되어 있음이니 이는 주님의 모든 뜻이 그의 뜻이 되어 그는 주님과 참 한 형상을 입은 자요 목적과 행복이니 같은 자이니 성공과 영광과 모든 기쁨이 하나이다. 이는 참 부부유별인 그리스도와 교회와만 가질 수 있는 올바른 연결을 가진 은총이니 회개의 나무에 맺힌 열매라 (요 15:7, 요 4:34 참조)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부(父)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1. "이기는 그에게 내가" 이는 만사물관을 계시 의종하여 회개하는 자를 가르침이니 회개하는 그에게는 다음에 표시한 상을 주실 것을 말함인데 여기는 주실 책임을 논하여 "내가" 라고 함보다 영원히 동거동락 동사할 보좌이니 이는 약속이나 법이나 형편을 따라 우연이나 부득의의 동좌석이 아니고 주께서 직접 기뻐하시고 원하여 오직 당신의 소원이 중심이 되어 환영할 것을 의미한다.
2.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기를" 이 보좌는 아버지를 유일로 사랑하시고 그 계명을 지키시고 겸손히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원수 죄인을 위하여 생명을 제물로 드려 구속하신 그 희생의 사랑을 가진 자에게 주신 영광의 보좌이다. (요 10:17) 목숨을 버리심으로 아버지께 사랑 받으심. 빌 2:5~11 순종으로 지극히 높은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무릎을 꿇게 하심. 요 17:1 부(父)를 영화롭게 하시고 받은 영광의 지위.

3. "내가 이기고 부(父) 보좌에 함께 앉은 것같이 하리라" 이는 주님이 완전 순종과 완전 사랑의 희생으로 완전 승리하시고 부에게 받은 영화의 보좌에 앉은 거와 같이 회개한 자에게는 주님이 앉으신 이 영화의 보좌에 동참하는 영광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자의 받을 영광의 보좌의 뜻을 보아 회개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회개는 주님께 순종과 그의 구속 사랑의 질(質)의 희생과 진리와 성결의 승리 생활로 표준한 것이 분명하다. 이 회개의 근거는 중보자 그리스도 원동력을 삼고 완전의 표준은 인간적의 완전을 표준하신 요구이다. 주님이 이김같이 승리는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 그 승리의 원천은 전부가 주님의 것인데 이기는 자라고 그 승리자를 별개로 인정해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진 하늘에 그리스도의 그 충만한 영광에 모든 승리 성도들이 동참할 때에 그 영광은 오직 하나이다. 그러나 개개의 승리대로 각자의 영광이 됨을 말함이니 남의 영광에 동참하는 구경 정도의 성질을 배격한다. 요 14:25 주를 사랑함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삼위의 하나님이 거처를 같이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다.

22절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이 귀는 이 음성을 참 듣는 복 있는 심령을 말함이니 만고에 불변할 이 약속을 신망하며 준비에 노력하기를 장차 그 나라에서 즉견(卽見)할 그때와 같이 갈급을 가지고 육과 세상을 멸시하는 그 심령을 가진 자가 참 천래(天來)의 복음을 듣는 자란 말이다. 땅 위에서는 이러한 진실되고 겸손하고 온유하여 주님 같은 그 심령을 가지는 것이 인생의 최대의 행복이며 듣고 배우고 가질 것도 이 위에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옥토 같은 심령을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다. 나는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감각이나 자극을 받고 있는 심령인지? 이것을 시간마다 검토하여 율법(律法)의 보습으로 쉬지 않고 갈지 아니하는 자는 자기를 속이는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다. (눅 9:62 참조)
2. 성령님께서 부절이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권고하시는 말씀은 세상도 정욕도 가되 아버지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나니 이 말씀에서 살고 죽고 부요하고 가난한 것이 참 산자가 사는 것이며 이것이 곧 영생인 것과 영원할 인 것을 쉬지 않고 훈계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지상 생활에 자기와 세상과 악령과 죄악은 순간도 동행 못할 원수인 줄 알아야 한다. 오직 동행자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그리스도와 성신 소개로 동행할 것 뿐이다.▶▶제2권 끝 3권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