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주해 제5권

2007.06.03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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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 주해 제5권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29
게시일 : 2001/12/30 (일) PM 04:56:08  (수정 2006/02/19 (일) PM 09:35:02)    조회 : 111  

계시록 주해 제 5권 - 백영희목사님


5-7절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1.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이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풍속이니 힘있게 맹세함을 가리킴이다(창14:22).

2.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이 맹세는 7절에 하나님의 비밀이 복음대로 호리도 변함없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함이다. 이루어질 사건을 표시함에 있어 심판이나 진노라고 말하지 않고 비밀이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본장을 기록한 그 성질을 밝히 드러낸다. 비밀은 구원의 오묘를 말하고 복음은 구원의 소식을 말함이다. 그리니 본장은 심판의 예고에 두려움을 가져야할 것보다 구원 약속인 복음 성취의 절대성에 두려워져서 이 약속대로 구원 준비에 떠는 지식과 은혜를 받아야 한다. 물론 복음 성취는 심판 성취도 된다. 위에 해석한 것은 심판의 예고를 부인함이 아니고 구원 예고가 중심이니 이를 첫째로 본장에는 주장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선후가 바뀌어지면 탈선한 것과 같이 된다. 다시 말하면 본장은 심판을 면하라 하는 계시보다 복음을 믿어 구원 준비를 후회 없이 하라 하신 것을 경고의 목적으로 하신 것이란 말이다. 크레다느스는 하나님과 그 창조하신 만물을 들어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은 심판주시오 그 심판이 모든 피조물에게 이르는 것을 말함이라고 해석하였다.
물론 복음이 다 성립될 때에는 심판도 이어서 성립되고 도 그 심판의 영향이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게 된다. 그러나 본 성구에 하나님을 나타내심과 그 창조하신 만물을 나타낸 이유는 심판의 하나님보다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심판을 받을 만물보다 복음 역사를 위하여 창조된 만물임을 말하고 또 그 하나까지도 구원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이 이용하시고 계시는 것과 또 선지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신 자인 하나님의 절대 주재권을 나타냄으로 복음의 권위를 다시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세세토록 살아 계신 창조주로 표시한 것은 총 주재권과 영원 주재권 가지신 이가 약속한 복음이니 그 복음의 사실과 효과와 거역의 벌이 예언대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 예언으로 맺어진 결과인 복과 화가 영원 계승할 것을 천사는 또 간절히 외친다. 또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피조물을 가리켜 이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특별히 맹세할 때에 이 피조물들의 하나 하나의 명목을 들어 말함은
①창조하신 만물이 고금에 불변한 것으로 이 계약자의 신실을 나타내고
②그것들의 창조와 그 오묘의 것으로 약속자의 능력을 보이고
③존재하는 전부가 하나님의 창조임을 보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기고는 천상 천하에 용신할 곳이 없음을 가리킨다.

3.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시간이 다시 없으리라 함이다. 종말적 심판 때가 이르렀으니 구원 준비의 시간이 급박하다 함이요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여도 회개와 준비할 수 없는 구원준비이다. 이 계시는 연옥설을 반박한다.

4.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이때는 계11:15을 보면 온 세상 나라는 다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때는 기독교 구원 역사는 끝나고 다시 구원하시는 때는 없다. 천년왕국이 있으나 구원을 받을 시기는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또 로마교에서 말하는 연옥설을 배격한다.

5. '하나님의 비밀이'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리킴이니 동정녀 탄생으로 된 도성인신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신자의 죄악을 눈과 같이 양털같이 성결하게 만드는 사실과 중생, 부활 영생,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 천국의 산 기업, 현재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초자연의 길 기타 모든 복음들이 다 성령의 감화가 아니고는 알지도 믿지도 못할 오묘요 비밀이다. 다만 재세 때부터 하나님의 자비로 이 비밀 세계에서 살게 하시는 자만 살 수 있는 일이다. 이 은총을 입은 자마다 조심 있게 살아야 할 것을 천사는 안타까운 소리로 전한다.

6.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것은 신구약 성경인데 특히 복음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예수님 재림으로 악마와 죄악은 소제되고 약속하신 대로 모든 구원과 영광과 상급의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이니 불신자는 물론 조롱하려니와 신자까지도 에누리하는 것을 주님은 안타까워 천사에게 특권과 특명으로 이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너무 오묘하여 사람들은 의심 혹은 에누리, 조롱하나 7차 나팔 불 그때는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 그날에 가질 지식, 감정, 행동으로 준비할 수 있을 이때에 사는 자가 복 있는 자다. 이 긴급한 사건을 위한 것이 본장을 계시하신 목적이다.


8-10절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 1절에서 7절까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인 성경 말씀 이행의 신실성과 권위성을 말하고, 8절에 또 두번째 말하는 소리는 8-11절까지의 내용대로 이 말씀의 실시가 무오하니 수행하고 전하라 하는 적극성 있는 권면을 하는 것이다.

2.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여기 재차 말한 것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전부를 받아 소유하되 본장 2절 해석대로 땅과 바다인 모든 세상을 밟은 천사가 가진 책이다. 또 이 책을 받는 자도 이 책으로 인하여 모든 세상을 발아래 밟을 수 있는 권위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받고 난 다음에 세상을 발아래 밟을 수 있는 권위자가 되는 것이니 받고 난 다음에는 땅과 바다를 밟을 수 있는 권위를 받은 자인 줄 알고 수권이행으로 밟아야 한다. 이 요한은 모든 후대의 총 신자의 대리로 상징한 것이니 기독자는 누구나 다 이 책을 받고 또 땅과 바다를 밟은 자로 살아야 한다.

3.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먹어 버리라 함은 성경의 말씀을 납득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함이요,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함은 이해하고 섭취할 때에 귀신에게 꿀같이 달고 또 크게 즐겁고 만족된다 함이요, '배에는 쓰리라' 함은 그대로 예언하고 실행하려 할 때에 육체와 세상적 고난이 심하리라 함이다.

4.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또 여기의 작은 책이란 말을 거듭한다. 이는 하나님 속성의 무한하심과 구원 역사의 오묘하심과 구원받은 자의 변화와 그 은총이 영원하심을 기록한 책이다. 그 기이하고 복잡한 사실을 천하에 가득 찰 수 있는 많은 책에 기록하기에도 부족할 터인데 한 손에 쥔 책 한 권에 기록되어 있으니 참 간단명료한 작은 책이다. 예를 들면 썩어질 눈병 하나 고치는 의서도 수십 권 되거든 하물며 하나님과 인생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섭리 또 영원 창조에 대한 서류야 우주에도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책이니 획 하나도 남김없이 다 섭취하여 버리라 함이다.

오늘은 주님께서 얼마나 이 예언을 강권하실 때는 왔다. 사람들은 이 큰 지식과 사건과 보배가 담겨 있는 이 작은 책 다 먹어 버리지 아니하고 한쪽 모퉁이만 핥다가 마는 섭섭한 일이 많다. 남김없이 다 먹어 버렸을 때에 입에는 꿀같이 달았다. 66권을 다 섭취할 때에 우리 영혼에는 유일의 만족이 되고 마치 달게 먹어 넘기는 식물은 아무리 배에 써도 소화될 수밖에 없고 쓸수록 소화는 잘되는 것처럼 전 성경 말씀 전체적으로 섭취하여야 우리 영혼이 완전히 만족하고 장성하며 강건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고 또 역경과 난경을 만날수록 더욱 실행 잘됨을 가리킴이다.

우리는 10절에 '먹어 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한 성구를 잘 주의하여야 한다. 영과 육과 합하여야 사람도 될 수 있고 또 살아 움직일 수 있음같이  다 먹어 버리고  입에서 꿀과 같이 달고  배에서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본절의 사명은 누구나 신구약 성경은 전체적으로 다 믿고 섭취하여 영혼이 완전히 지식하여지고 영혼의 본능화 되어져야 하며, 쓸수록 소화 잘 됨같이 역항력의 신행자가 된다 함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전체적인 이해와 납득을 가지고 영혼 만족하여 모든  말씀과 내 영혼이 하나되어 말씀이 본능화 영화 생명화 되기까지 순서와 그 통과를 노력하여 통과 후 오는 역경을 기다리자!



11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이는 먹고 소화하고 난 다음에 전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특히 입으로만 전할 것이 아니고 배에서 쓰게 소화된 그 경로 후에 전함이니, 복음을 확실히 알아 신앙하고는 그 말씀대로 삼기에 각양 어려움이 있어도 그대로 실천하는 그 일을 통과 후 전하라 함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실행으로 전하여야  올바른 예언이 되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복음을 받은 인간이면 다 전하여야 할 직책을 가진 자이니 그 책임은 남의 생명이 된 복음을 전하여야 할 책임이다. 만일 전하지 아니하면 남의 생명을 도적질하는 일이 되는 것과 잘못 전하면 남의 생명을 해하는 셈이 되는 화가 된다. 바울은 고전9:16 에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하였고, 야고보는 3:1 에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하기를 게을리 하여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는 벌과 조심 없이 자라 못 전한 자의 화를 기억하여야 한다. 겔33:6,8 갈1:9 에 보면 파수군의 손에서 피를 찾으리라고 하였고 또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다. 이점도 주의를 할 뿐 아니라 특수한 전도직인 교역자들에게 대하여 사명에 중한 감이 없이 세상 어떤 취직처럼 생활에 한 방도같이 생각하는 일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다.

2. '많은'
'많은' 이라는 말이 백성에게만 붙었으나 한번 말하여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도 각각 다 붙어 있어야 할 것을 말한 것이다. 많은 백성, 많은 나라, 많은 방언, 많은 임금에게 예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라 함은 전부를 가리켜서 말함이다. 이 네 가지로 말한 것은 세계 어느 지방어나 족속 할 것 없이 다 전하여야 한다는 말인데 특히 백성이라 함은 생활을 가리킴이요, 나라라 함은 규칙과 제도를 가리키고, 방언은 지식을 말함이요, 임금은 권세를 말함이다.
기독교는 어떤 생활, 어떤 제도와 규칙 아래, 어떤 지식 계급이나 권세자에게라도 차별이나 가감 없이 전하여야 한다. 전능자 전지자 또 전재자이신 하나님의 사신이니 그 권세를 힘입어 그의 말과 그의 일만 신실히 충성되이 전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어디서나 담대하고 또 약속 이행의 불변의 말씀이니 언제나 절망 없이 소망 중에 전하여야 한다. 복음은 교회사가 증거하는 대로 순경에는 지나쳐 나가기 쉽고 역경 시대에는 미달, 곧 양보하기 쉽다.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또 전도자는 최귀의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니 귀한 것을 주는 자로 가야 한다. 죽은 자에게 생명, 죄인에게 해방, 가난한 자에게 부요, 가장 천한 마귀의 자식을 지극히 높은 하나님 자녀의 직위를 가지고 가는 것이니 아첨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없어질 축에 속한 이런 것들도 주러 가는 자의 심장이 담대하다. 전도자가 담대함으로 주러 가는 자의 배짱을 가지기 못하는 것은 벌써 복음 없는 상대자의 진상의 가련과 가지고 가는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이니 전도의 자격은 없다. 이 가치 모르는 자마다 구걸을 하러 가는 듯 하는 것과 천한 것을 가지고 가는 듯한 부끄러움을 가지고 가는 자는 참된 가치를 모르는 자이니 복음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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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11장 서론

'마흔 두달'에서 말세를 계산하는 여러 해석들

본장의 의미는 알기 어려우나 제 2절 '마흔 두달' 이란 것을 바로 이해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마흔 두 달'에 대한 해석이 몇 가지 있다.

1. 과거파 학자들의 의견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타락이 67년 봄으로 70년 가을까지를 가리킨 것이라고 한다. 이 해설은 믿을 수 없으니 문자대로 성전 밖마당이라면 현재 성전, 지성소 있던 그 자리까지 밟히고 있으니 잘못된 해석이고, 상징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말함이니 밖마당이 되는 교회가 유대인 뿐으로 볼 수 없으니 또 잘못이다.
2. 교회사학파에서는 '마흔 두 달'을 1260년(하루를 1년으로 계산함)이라 하여 그 기간은 왈도파의 진리 운동의 시작(주후1170년)부터 계산한 1260년간이라고 하고 이 파의 혹자는 루터 종교 개혁 후(주후1517년)부터 계산한 1260년이라고 한다. 이 학설대로 하면 주님의 재림 날짜가 명확히 계수될 수 있다. 그러나 증거를 마치는 날이 곧 주님의 재림하시는 날인 고로 그날과 그 시를 아는 셈이 되니 받기 어렵다.
3. 말단 과학자들은 후에 유대인들이 독립한 후 오래지 못하여 다시 이방인의 점령 하에 들어갈 기간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한다.
4.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가 단9:25-27의 '70주간' 예언에 있는 말주(末週)의 전반부를 가리킨다고 한다. 단9:25-27의 '70주간' 예언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곧 아닥사스다왕이 유다인더러 '예루살렘을 중건하라'고 발령한 때(주전 445년 3월 14일, 느 2:5-8)부터 메시야왕 곧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때(주후 32년 4월 6일)까지가 일곱 이레와 62이레의 반수 곧 483년이 된다. 이렇게 483년 되는 때에 기름부음 받은 자(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매 유대 왕통은 완전히 끊기고 적기독국 왕의 백성, 곧 로마 사람들이 유대에 와서 예루살렘을 훼파하매 유대는 황폐한 나라로 오랫동안 있을 것이다. 그 뒤에 세계의 종말기 제 '70이레'인 7년 시기가 올 터인데 그때에 적기독이 유대인들로 더불어 언약을 맺고 있다가 그 7년의 절반에 이르러 그가 유대인들의 종교를 핍박하는 일이 있을 것이며 또 그 자신이 멸망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기초하여 계11:2의 마흔 두 달(1260일, 계 11:3->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계12:14)은 세상의 끝에 있을 7년 시기의 전반기(3년반)일 것이라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단8:27에 '한 이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단9:29에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란 말은 적기독이 날개를 펴듯이 세력을 신장함인데 이것은 로마가 예루살렘을 훼파한 전쟁이 3년간(주후 67년 봄부터 70년 가을까지)이 걸린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5. 단9:27의 7년 시기 성격을 보건대 그 전 3년 반은 적기독이 본격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 시대인 듯 하고 그 후 3년 반은 그가 최후적인 발악을 하는 시대인 듯 하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11:2의 '마흔 두 달'이란 것은 다니엘 9장 27절의 7년 시기의 전반부인데 그것의 숫자적 의미보다 영적 의미에 따라 (신약시대 적기독이 최후적 발악 전(前) 시대)를 가리킨 듯 하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크레다너스는 십일 십이 십삼의 세 장을 가리켜 동일한 일에 대한 각기 특색있는 기록들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 세 장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로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 있는 교회의 분투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제 11장의 요지는 교회가 세상에게 복음을 전함이고(3절), 제 12장은 교회가 수난하는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명하여 이것을 용(사탄)이라 하고, 13장도 역시 그 동일한 사건의 원인의 일면을 지적하여 짐승(이 세상 정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3장의 사건만은 시간적으로 보아 두 예언자의 활동이 필할 때(전 3년 반 끝난 다음)에 후종한 것이 명백하다(계 11:3,7,13 참조). 다시 말하면 11장의 요지와 12장의 그것이 동일한 사건일 수 있으나 13장의 것은 시간 위치로 보아서 확실히 그 이후의 것이다.
이명식 목사는 바벨론 포로 시부터 대환난 때까지를 마흔 두 달이라고 했다. 크레다너스의 견해가 지당하다. 3일 반(계 11:11), 마흔 두 달(계 11:2), 1260일(계 11:3) 세 때 반(계 12:14, 단 7:25) 이 수들은 다 같은 것들을 여러가지로 표시한 것뿐이요, 단9:24에 70이레와 25절 62이레와 7절 한 이레 2이레의 절반, 단12:11의 1920일은 3년 반에 한 달이 더한 것이요, 단 12:12에 1223일은 3년 반에 두 달 반을 더한 것이니 이 숫자적으로 표시한 그 중심의 뜻은 날짜대로 계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12:25-27에 있는 숫자가 주전 445년 3월 14일 아닥사스다 왕의 유대 중건의 허락일로부터 주후 323년 4월 6일 예수님의 나귀 타고 입성하신 날까지 합계 483년의 그 계수가 꼭 들어맞았다고 학자들이 말할지라도 이 해석들은 믿을 수 없다.

'그날과 그시를 계산하는 것이 잘못'

이유는 마 24:35-36까지에 주의 말씀 이행이 천지는 변하여도 불변적으로 다 이루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한 이 시일은 모두가 재림의 시일로 선입적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은 주님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하나 하나에 대하여 그 시, 그 시의 징조는 짐작할 수 있으되 그 시일은 아버지만 아신다는 말이다. 또 행1:6-8에 제자들이 묻기를 '이스라엘 나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라고 물을 때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와 기간은 아버지 권세에 두었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성령의 권능을 얻어 땅 끝까지 증인되리라는 말씀만 하셨다.
이 말씀에서도 때라고 함은 한가지 한가지 사건의 때요 재림까지 기간을 말씀함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벌써 예수님의 초림하심으로 시작한 것이다. 비록 제자들의 그 묻는 중심은 재림이나 천년왕국이나 무궁세계의 때를 물은 것인지 확실히 모르는 일이나 그 시 그들의 사상이나 또 주님께 받은 복음대로 생각하면 천년왕국과 무궁세계는 죽은 성도의 부활 입고 있을 것은 요11:24을 보아 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부활이 하나도 없는 그 장면에서 천년왕국이나 무궁세계의 회복을 물은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다만 지상구원의 천국 곧 재세에 이스라엘 나라 건설이 이 때이라고 물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물론 순(純)복음으로 교회천국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고 세상 정치와 겸한 신정국가 비슷한 그런 나라를 동경한 것도 섞여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정확무오한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의 대답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와 기간은 아버지의 권한이니 복음이나 전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복음의 구속완성이니 지금 회복되고 있는 중이다.

'때는 구속 완성의 기간'

그러므로 이 때와 기한은 구속완성의 기한과 때니 위치적으로 종말적 시간 끝 재림의 때만을 말함이 아니고 때도 회복하나 하나의 때를 가리킴이 분명하고 또 기한이라고 하는 말은 더욱이 종말 그 안에 총건설의 시간이 그 기간을 포함하고 하고야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곧, 구속의 종말 시간을 아버지만 아시고 사람도 천사도 아들도 알 수 없다 함이 아니고 복음 성취의 한가지 한가지에 대한 그 시일과 복음의 완성 시일을 아는 것은 아버지만 주권하시고 허락지 아니하신 것을 똑똑히 말함이다. 이는 딤후4:2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기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였고 눅17:8에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갈6:9에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하신 이 성구들은 전도에도 기도에도 선행에도 그 성과를 보는 때는 반드시 있는 것이나 시일만은 성도는 모르고 아버지의 권한에만 맡기워진 것이니 이루어지기까지 계속하라는 것이 분명하다.
많은 학자들은 그날과 그 시(마 24:31) 때와 기한(행 1:7)이라는 성구를 주님의 재림의 때로만 해석하여 재림의 시일은 계수하여 안다고 하는 그 학설을 이단으로 정죄함이 거의 공통되어 있으나 복음 섭리에 사건사건의 시일에 대하여는 인간이 알 수 있다는 그 설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일하는 시간을 알면 맡기는 시간은 숫자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계11:2, 3에 기록된 날 수를 예루살렘 멸망 3년이니 왈드파 진리운동 시작이니 루터의 개혁운동 시작이니 하는 숫자 풀어 시일을 정하는 이런 해석들은 비성경적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숫자를 알 수 있는 중심은 하나님의 완전수 7'

우리가 하나 기억할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은 날수, 년수, 일수, 또 때에 대한 수로 표현한 그 계시의 중심은, 하나님은 7을 완전수로 하셨는 고로 하나님의 완전수인 그 7수를 근거로 둔 숫자들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한 사건에 대한 완전기간을 7로 정하였으면 그 반되는 것은 3년 반 혹은 3일 반 혹은 세 때 반이라고 표시하였고 반이 넘으면 단12:11-12과 같이 7년의 반이 되는 3년 반이 조금 넘은 한 달 혹은 두 달 반 더 있는 것으로 표시하였고 완전수인 7에 조금 모자라는 때는 62이레니 그렇게 말하였고 하나님의 정한 수의 전부의 기간은 70이레(단9:24)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한 7수인 완전 기간은 그 사건 사건에 대하여 각이(各異)하니 하나님의 수, 곧 당신만 아는 수이니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성경적이다.
다만 7수를 중심 단위로 하여 표시한 일에 대하여 그 정확한 숫자는 도무지 사람이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어떤 일에 대한 정한 기간의 숫자가 얼마인지 모르나 거저 총수를 7로 셈하여 혹은 반 넘어 혹은 전부 혹은 전부가 좀 못됨으로 짐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큰 자비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어느 시에 믿을 것과 어느 시에 시험에 들 것과 어느 시에 승리할 것과 어느 시에 죽을 것들의 시일을 모르게 감춘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큰 선물이다. 이 시일을 모름으로 회개와 선을 쌓는 일에 있어 크게 도움이 된다. 알게 하신 것도 사랑인 동시에 모르게 하는 것도 같은 사랑이다. 알려 주신 것을 앎으로 유익된 것같이 모르게 해 주신 것은 또 모른 것만큼 유익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한 사건 한 사건에 대한 징조는 대략 짐작할 수 있는 것을 허락하셨으나 그 정확한 시일은 아버지의 주권에만 가지시고 감추신 것이 성경적이며 또 실지 우리의 신앙 경험도 그러하다. 과거사는 인간이 억지로 숫자에 맞추어 놓는 일이 많으나 미래적으로는 종전에 이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 실패하였다. 실지에 있어 그것이 요행 맞았다 할지라도 성경적은 아니다. 또 안 것이 모른 것만큼 유익이 없다. 간단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 징조적인 늙음으로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이나 중병으로 혹은 환난으로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짐작은 할지라도 그 시일은 모르나니 이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그 일자를 해석함에 있어 장단의 짐작은 한다 할지라도 정확한 시일을 말하는 해석은 용납지 아니하여야 한다.


1절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척량하되

1.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이는 하나님의 잣대이니 신약적 성경 말씀을 상징한 것이다. 계10:과 11:13상반은 한 내용을 가진 것이니 또 내게 주었다 하는 것 보면 계10:9에 책을 주며 갖다 먹어 버리라고 한 그 천사 같으나 예수 그리스도시다. 외부에 보기에는 지팡이와 같은 갈대같이 양척(量尺)이 아닌 것같이 보이나 실상은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는 하나님의 잣대이니 성경 말씀은 그러하다.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볼 때에 상벌의 총심판을 주시한 법규가 아닌 평범한 책같이 광야에 빽빽하게 들어선 갈대같이 보이고 실상은 피조물 하나 하나 그 사물의 귀정을 주권한 심판의 책이다.

2.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을 척량하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라 함이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 말씀대로 심사하여 진가를 재세에서 드러내어 다시 고칠 수 있도록 하려 함이다. 인정한 하나님의 척도대로 맞추어 과(過)나 불행이나 좌우로 치우친 것을 고쳐 꼭 맞도록 몇 번이든지 수정하려는 것을 명함이니 이는 사도 요한이 받은 사명인 것만큼 지상 성도는 자타에게 대하여 별세하는 시간까지 말씀의 척도에 맞추어 몇 번이든지 수정하여야 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일어나서라' 함은 앉은 것이나 누운 자를 말함이 아니고 특히 열심을 내어 자타의 수정(修正)운동에 힘쓰라는 명령이다. 성전은 고전3:16과 고후6:16과 벧전2:5과 요일3:24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 모신 그 몸과 마음을 성전이며 산 집이라고 하신 그대로 중생된 자, 곧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신 자의 몸과 마음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상징한 것이다. 모든 물건 안에 몸, 몸 안에 이성, 이성 안에 영혼, 영혼 안에 주인인 나,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고로 구원받은 자의 그 인격과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는 중생자를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곧 원죄적으로 간섭하시며 수정하시고 선행에 대하여는 그 심신에 하나님을 모신 자에게 그 행사를 간섭하여 선행케 하신다는 말이다.

3. '제단'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물이 놓여지는 곳이니 한 번 제단 위에 놓은 것은 바쳐지지 아니한 것이 없고 또 죽지 않고는 제단 위에 놓여진 것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을, 곧 우리의 주격을 제단으로 상징한 것이다. 우리의 이성과 전 주격의 소산인 발생(發生)은 전부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결시켜 전부가 나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그 의에 대하여 받아 사는 자의 그 중생된 주격과 이성을 가리켜서 제단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대속하신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아의 전 인격과 전 이성에서는 하나님께 받아 하나님만 위하여 살면 이 일만 전업으로 하는 그 사람이 이 척량에 들어갈 제단에 소속한 자라 말이다. 이는 하나 하나에 생각나고 마음먹는 그 전부가 다 이와 같이 되어진 후라야 제단 자격을 가졌다 함이 아니고 원리를 말함이다. 곧 그리스도 중심 곧 하나님 제일주의(第一主義)로 사는 자라야 제단 되어 있는 자라 함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자의 발생은 전부가 희생주의여야 한다. 실지로 희생해야 하나님께 바쳐진다. 다만 특수한 제물 산 것으로 바치고 또 죽지 아니하고 제물 된 것 하나만 있으니 이는 이삭이다. 그러나 그는 히11:19에 죽은 데서 도로 살리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으니 이는 오늘 우리의 생명을 바치는 제사의 성질을 보인다. 주의 진리를 위하여 내 생명을 산 것으로 순교의 제단에 바칠 때에 죽여 받으시는 일도 있고 또 생명을 받은 셈하시고 생명을 도로 살려 두시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특히 본성구에서 깨달을 것은 우리의 이성이 제단이니 우리의 이성 위에 발생되는 것, 곧 우리의 이성 움직임의 전부는 하나님께 바칠 것과 바칠 희생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간섭하시고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법도대로 온전하게 만드신다.

4.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은 몸을 주로 말하고, 제단은 이성과 모든 봉헌의 생애를 가리키고, 여기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의 자격을 가진 몸과 이성을 소유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존대하고 영화롭게 하는 그 인격을 가진 그 사람의 주격을 상징함이다. 그러므로 이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섬기는 참된 교회를 말함이요, 또 이러한 교회와 이러한 개인만을 간섭하시며 하나님의 것으로 취급하시고 그에 대하여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건설 또는 성화와 선행하도록 섭리하시고 시언하라는 말이다. 이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은 이는 요한이니 이는 지상교회를 대표한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님의 역사와 성도들의 헌신으로 된 것이니 곧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것을 겸전(兼全)한 교회와 개인에게만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와 성도의 역사의 운동이 허락된 것을 말한다.


2절 성전 밖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 '성전 밖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외식적인 신앙, 혹은 명목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가리킴이니 양의 피로만 제사하고 참 하나님의 어린양인 그리스도의 대속을 힘입지 못한 구약적 교우, 또 구약 율법에서만 머물고 율법 속에 있는 복음을 믿지 못한 교우들, 오늘 종교 의식만 믿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망(信望)하지 아니하는 자들, 하나님을 상식적(常識的) 존재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대우하지 아니하며 모든 생활에 산 자와 관계를 가진 거와 같은 관계를 가지지 아니하는 신자 또는 생존하신 동행의 인격자로 믿으나 제일 경외의 하나님으로 제일 신망애하는 하나님으로 관계를 맺지 아니하는 자, 이들이 성전 밖마당이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이 간섭도 양육도 하지 아니하실 뿐 도외(道外)의 것으로 유기하여 버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원리를 말함이니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신자도 있나니, 이는 미중생자의 부분이다.
원리적인 힘이나 지혜나 생애나 할 것 없이 그 전부는 결국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부분 이미 또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것으로 취급당하지 못하는 구원 외의 것이다. 또 하나님이 쓰시는 것도 아니니 그 자신에게 있어 유해무득의 것이다. 불같은 시험 오면 다 타고 또 키 바람에 날려갈 것들이요, 또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이요, 주여 주여 하나 쫓겨날 부분들이다. 마 5:22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의의 양을 말함이 아니고 질을 말함이니 곧 본절과 같은 의미의 뜻이다. 이것을 가리켜 '헌부대와 헌옷'이라고 비유하심도 본절의 성질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요소와 방법은 진실로만 삼는다. 사람들은 사울의 순종 같은 순종이 하나님의 노를 초래하는 것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다(삼상 13:23). 이러므로 성전 밖마당이 되는 부분은 범죄해도 하나님의 징계도 간섭도 없나니 이러한 자와 부분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고 징계 없는 버린 자의 입장인 줄 알고 회개하여야 한다(히 12:8). 그러므로 우리는 단체나 개인에 있어 양도 보려니와 질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한다. 많은 선한 일에 하나님 긍정(肯定)한 의는 추호도 끼이지 아니할 수도 있다. 이런 선행은 외식이어서 역대 순교자의 박해의 죄들이 여기서 발생되었던 것이다.

2.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이것은 역사적으로는 유대인이 그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뒤에 이방인들이 그 땅을 주관하게 될 것을 가르침인데 곧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눅 11:24) 그들이 복음을 배척한 고로 죄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계시도 이것으로서 마침이 아니고 계시된 그때로부터 종말적인 예언으로서는 말세에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난 교회, 곧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회는 양의 비례로 '밖마당'에 비하여 지극히 적은 부분의 것이 참되고 그 외 많은 교회는 교회같이 보이나 실상은 적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진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이 버린 세상 세계에게 짓밟혀 속화될 것을 가르침이다.
노아의 배는 물위에 떠 구원이 되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홍수에 침몰되어 죽음같이 오는 참 교회는 세상 세력을 발아래 밟고 극세(克世) 정세(征世)의 승리적의 권위로 구원 완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버린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능은 없고 세상적 능(能)만 가져 세상적 성공은 가지지만 진리와 의는 다 세상 세력에게 빼앗김으로 멸망을 저축하여 가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말세가 되어 갈수록 참 교회가 적고 거짓 교회가 많으니 범죄할 때에 하나님의 징계와 간섭이 있는 교회와 교인은 적고 타세와 각양 범죄 행위에도 무징계의 교인과 세적인 성공의 그 생애를 부러워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하는 교회인 줄로 아는 큰 유혹이 있다. 사람들은 이 미혹에 많이 침몰되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교회가 아니라 유기(遺棄)하신 것임으로 세상 세력에게 짓밟히는 것임을 예언하여 세적(世的) 성공의 유혹을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3.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흔 두 달은 3년 반이요, 7년의 반수이니 이는 구약과 신약의 총 구원 시기를 7년으로 셈하고 반인 마흔 두 달은 신약 시기를 상징함이다. '이방인이 짓밟으리라' 함은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요일 5:4-5) 세상 권세에 이용물이 되어 세상의 사다리와 같고 참 성도를 박해하여 오는 적그리스도를 위한 다리와 같이 이용될 것을 보겠느냐 하신 그대로 말세가 될수록 가시적 교회는 늘어가고 참 그리스도의 피에 팔리워진 것으로 사는 참 교회가 적을 것을 말함과 같다.  '마흔 두 달'에 대한 상세한 해설은 11장 머리말의 제 7절을 참고할 것.


3절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1.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이 해설도 각이하다. 모세와 엘리야라고 하는 이도 있고, 칼빈 루터와 18세기 우에스레와 호잇도후이루도라고 하는 해설이 있다. 또 에모과 세례 요한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본절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준다 하였으니 이 권세는 3절 하반절로 7절까지에 기록된 권세이다. 이 권세는 주님이 주신 것과 이 권세는 주님과 주님의 것을 그 말씀만 증거하는 것에 한하여서만 똑똑히 구별하고 있다. 여기 기억할 것은 이 증인의 행사는 주께 받은 천사의 권세로만 할 수 있고 또 그 권세는 주의 것만 증거할 때에 주께서 주시는 것을 기억하여 올바른 증거가 아닌 입장에 설 때는 하나님과는 절연(絶緣)되고 모든 대적에게는 독립으로 상대되는 위험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올바른 증인의 입장에 설 때에는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동행함으로 담대하여야 한다.
2)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 슥4:14의 말씀과 관련이 있는 것을 보아서 이 두 증인은 신약시대의 교회를 가리킴이 분명하고 슥3:4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자 스룹바벨을 교회 대표자, 곧 진리 증인들의 대표적 상징이었으니 이 계시록에 기록한 두 증인도 신약교회의 본무(本務)인 증거를 상징함이니 신약교회는 다 이 두 증인에 포함되었다. 신약교회의 신자 전부는 증인생활이 자기의 본무(本務)이며 여기서만 자기가 권세를 얻을 것을 계시하는 것이다.

특히 두 증인이라고 하는 말은 중복의 역설을 가진다. 둘은 증거 수며 또 증거에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언행심(言行心)으로 증거하는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혹이 이를 교계의 유력한 어떤 인물로 교회로, 국한하는 것은 불가하다. 신약시대 교회를 총칭하여 증인의 역사를 원리적으로 표상(表象)한 것이니 적은 자나 큰 자나 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면 올바른 증거의 그 요소만은 여기 포함되고 아무리 큰 자일지라도 올바른 증거에 소속되지 아니하는 요소의 것은 여기서 제외된다.

3)'권세를 주리니' 함은 초자연적 직분과 지위와 증거의 능력을 주시겠다고 함이니
①베옷입고
②1260일 예언
③두 감람나무
④두 촛대
⑤입에서 불이 나오고
⑥하늘을 닫아 비오지 않게 하고
⑦물이 피 되게 하고
⑧순교 당하고
⑨부활의 권능 얻고
⑩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시는 입장을 얻는 이런 권세들을 가리켜 말한다.

2. '저희가 굵은 베옷 입고'
이것은 회개에 대한 통회의 비애를 상징함이니 왕상1:27-29과 시6:1-10, 시51:17, 눅18:13-14에 기록된 아합 왕과 다윗과 세리들이 회개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가 긍휼로 바뀌어진 복 있는 자신의 회개권을 가리킴이요, 둘째는 눅19:41에 예수님의 우심과 삼상16:1에 사무엘의 울음과 렘13:17에 예레미야의 울음과 스9:3-10:1까지 에스라의 울음과 벧후2:7-9의 롯의 울음, 행20:19의 바울의 울음과 같이 남의 죄에 대한 울음이니 이는 예수님의 사랑이 내주한 것이니 남의 죄에 대하여 연대적 책임(히 13:17)과 남의 영혼의 구원 문제를 맡은 자들이니 (겔 13:16) 이 직분에는 눈물은 선합선과 같은 것이다.

3.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계11장 머리말 제 2절에 마흔 두 달을 해석한 바와 같으니 일천 이백 육십 일은 신약시대를 가리키고 두 증인은 복음을 증거할 교회를 상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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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1.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인증(認證)하시고 또 세우시고 함께 하시는 자라는 말이다.

2.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슥4:3을 인용한 것이라 하여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가리킴이라고 해석하는 이가 있으나 본절은 과거 사람인 그 인물들을 가리킴이 아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올바른 사역자들이며 또 빛이 된 신실한 자들이다. 여기에 말한 것도 그 인물들은 아니나 사역상, 성질상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진 감람나무는 기름을 내는 나무요 등대는 불을 켜는 것인데 둘이 합하면 빛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신약시대의 교회가 세상의 빛의 직분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치고, 2절에는 이를 두 증인이라 하였으니 신약시대의 신자는 빛에 대한 교회의 표상이 되는 중대한 책임을 보이는 것이다.

'두 감람나무'
1)감람나무를 예수님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으니 이는 잘못이요
2)두 감람나무는 예수님이 아닌 자로서 아담 하와가 범죄로 빼앗긴 그 생명을 다시 회복받아 산 영이 된 자이니 예수님과 동등되는 두 인물이라는 잘못된 해석도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 감람나무인 그 사람만 믿어도 구원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예수님과 성신 대신 감람나무를 믿어 구원얻는다고 하는 파들도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을 믿어 피와 전 진액이 되는데 대소변으로 나오고 새로 바꾸워 넣으면 생령이 된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었던 생령이 그들이 범죄로 남겨 두었던 생령을 대신 받은 자라 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생령이 셋이라고 한다. 예수님과 두 감람나무인 2인과 합하여 셋 생명인고로 감람나무 나기 전에는 예수님만 믿어 구원 얻을 수 있으나 두 감람나무가 나오면 셋 생명 중 어느 것을 믿어도 구원 얻기는 일반이라고 한다.
이들은 차자 심하여져 이제는 감람나무인 자기만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까지 한다. 그들은 찬송할 때에 성신이여 강림하사를 '감람나무 강림하사' 라고 하고 예수여 비노니 하는 것을 '감람나무 비노니' 라고 한다. 이는 다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이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이 많다 하여 따르고 있다. 한국이 합하여 물밀듯 믿고 있으니 이것이 한국교계의 무실력과 무진리적인 감상주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교역자들이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기른 것과 또 신앙의 진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며 또 심판이다. 이들은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확신을 얻은 근거는 실제로 피와 모든 액체가 현저히 대소변으로 유출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는 보았을지라도 성경적이 아니면 부인하여야 한다. 박태선씨의 이러한 주장은 다 감각적 신앙이니 곧 주관적인 신앙이다.

3)'두 감람나무'는 성령님과 성령님의 계시한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한 은혜인데 이는 신약시대의 영감과 말씀의 역사요 영감과 말씀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요, 또 '나무' 라고 한 것은 기름을 내는 나무이니 성령과 말씀의 권위자를 양성하는 기관들과 인물들을 가리켜서 말함이다. 특히 둘이라고 가리킨 수는 기록하는 영감과 증거하는 말씀의 사람이라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1절의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생활과 3절의 두 증인의 생활하는 그 차서(次序)를 밟은 후에 특수한 권세를 얻어 '감람나무'의 사역을 하는 권위를 가리켜 말한다.
이는 특히 상술한 바와 같이 네 가지 순서의 그 자본을 가져야 얻을 수 있는 것이요 네 가지의 그 생활도 은밀한 의미에서는 전적 은혜이나 외부적으로는 자기가 하는 것 같은 방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생활이다. 쉽게 말하면 '두 감람나무'는 증거하는 말씀의 권위의 사람이요 영감의 권위의 사람이다. 감람나무는 빛을 발하게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니 곧 진리의 신, 생명의 말씀이니 사람들에게 빛을 발하게 하는 진리와 생명인 영감과 말씀을 공급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3. '두 촛대'
1)두 촛대는 증거하는 촛대라 함이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의지인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을 가리켜 둘이라고 함이요
2)촛대는 마5:14과 요1:4에 성도를 가리켜 빛이라고 한 그대로 빛의 생활을 하여 특히 진리와 생명을 나타내는 것을 가르침이다. 빛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요 성도는 빛을 맡은 자인데 여기에 기록된 촛대는 빛을 맡은 교회요 또, 예수 그리스도인을 가리킴이다. 빛은 곧 예수님의 생명 우리들의 중생된 새생명 곧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또 진리 자체가 살고 있는 진리와 합일되는 승리의 생활들을 상징함이다.
말과 행위로 인격으로 구원과 멸망과 참 신과 거짓 신과 죄와 의와의 정체를 드러낸다. 어두운 밤에 등불이 각 물형(物形)과 물색(物色)을 드러내는 것처럼 증거하는 빛의 생활 곧, 암흑을 멸하는 승리의 생활을 상징함이니 이도 3절에 얻은 권세로 이루어지는 생애이다. 이러한 성도의 영광된 생애의 권세도 성전 제단 경배 증인 생활을(스스로 은밀한 의미에서는 은혜이나 외부적으로 자기가 행하는 것같음)하는 자에게 주시기로 허락한 계약적 의미를 가진다. 신앙생활은 스스로 힘써야 하나니 이것이 없는 자가 금 한 냥쭝과 한 므나를 땅과 수건에 묻어 놓은 책망 받을 생활이다.


5-6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1. 5-6절의 계시도 문자대로가 아니고 상징적이다. 사람의 입에서 불이 나온다고 한 것은 상징적 계시인 것을 밝히고 문자대로가 아닌 것을 보인다.

2. 본절에 권능을 가진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가 아니고 역연(亦然) 권위있는 신자를 가리킴이니 모세와 엘리야에게 함께 하시는 그 성질의 권능이 함께 하시는 것을 증거한다. 도를 막는 모든 불의를 멸하는 권세이니 왕상18:38에 갈멜산 원수를 소멸한 제단의 불과 왕상1:10에 오십부장을 소멸한 것과 왕상17:1에 비오지 아니하게 함과 출7:2에 나일 하수를 피 되게 한 그 권세와 민16:35에 고라의 당파 250명 죽인 권능과 같은 그 권세가 방편적으로 보다 질적으로 말세 충성된 전도자들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계약이시다. 이 두 증인은 죽음을 보았으니 엘리야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3.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이들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권세가 강하고 세밀하여 방해하는 사람과 방해하는 길에 세밀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소멸을 당하는 것을 가리켜서 만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시는 입장에 있으면 대적의 전부를 빠짐없이 소멸하며 세밀한 투쟁과 승리를 가리킴이니 이 입장이 복되고 그 반면에 주님의 권세와 대적이 되는 입장은 세미한 부분까지 소멸을 당하니 그 불행이 심히 크다.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는 그 역사에게 곧, 그 사람, 그 일에게 대적되는 것이 즉, 하나님의 뜻과 권세의 대적이다.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는 복수(複數)이니 주의 권세가 함께 하는 자, 전부를 망라하는 의미요, '해한다' 함은 증인인 그 사람을 해함이 아니요 그 사람이 증거하는 도(진리 성령 생명들이 나타내는 빛의 운동인 곧, 생애)를 해함을 가리켜 말함이요, 증인인 자신을 해하는 사람에게 대한 복수를 가리킴은 아니다. 원수가 복음을 대적할 때에 자신은 원수에게 복수보다 피해를 입으면서 진리를 살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이 증인들의 본성인 것을 순교당한 것으로 밝히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님의 원수만이 우리의 원수요 그 외에는 원수는 없다. 언제나 죄를 미워하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은 사랑하여야 한다(약3:9).

4.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원수를 소멸할지니'
이는 문자대로가 아니고 상징임을 가르친다 (렘5:14, 행2:3, 마3:11 참조). 문자대로 입에서 불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해석하기 곤란하다. 그러나 말세에는 실제로 입에서 불이 나온다 하여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는데 환상에서 일어나는 폐단으로 남이 보이지 아니하는 불이 나온다고 하여 유혹하는 자도 유혹을 받는 자도 있을 것이다. 여기 불은 그 불이 원수들을 소멸했으니 일관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불이라면 물질로 된 인체를 소멸하여야 할 것이고(왕하1:10) 만일 도리를 소멸하는 불이면 물질적 불이 아니요 도리적 불이 아닐 것인가?
박태선장로를 뒤 따르는 교도들이 그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것이 보인다고 하면서도 대적하는 사람을 태워 죽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환상으로 자기만 본 불을 낸 박장로라 하여 그 사람만 믿어도 구원 얻는다는 교주의 자리까지 높여 놓고도 미혹됨인 줄 모르며 여기에는 수만 수천의 무리와 수천만의 헌금이 운동하고 있다. 하여 망종하는 자들도 많으나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입에서' 나오는 불은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능력있는 말씀이 그 입에서 나온다 함이다. 다시 말하면 이 두 증인의 주장하는 일과 하는 말과 하는 모든 행위와의 전부가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고 또 발원된 원천이 하나님이시며 그 전부의 근거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계획하신 그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 하나가 전능적인 능력으로 다 이루어지고 그의 모든 소행을 대적하는 것은 물론대소하고 전멸되는 것을 상징하여 입에서 소멸하는 불이 나온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모든 소행이 하나님과 하나된 소행이기 때문에 권능이 있음과 성립의 절대성을 의미함이다.
그러므로 원수를 소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주장한 것이 불변적으로 성립되고 보니 반대하는 것은 자연 소멸이 되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킴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모든 주장 계획 행위 지식 목적 희로애락 선악 미움과 사랑 기타 소행의 일체를 다 포함하여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징했다. 이는 전 의사(意思)와 속성의 표현이 말로 되기 때문에 입에서 나온다고 상징한 것이다. 하나님께 합한 모든 소행(상술한 여러가지) 그 전부는 절대적인 권위성과 성립성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므로 주와 합한 언행심사의 소행은 하나님처럼 능력 있고 하나님과 불합한 모든 소행은 하나님이 소멸하는 것처럼 자멸의 절대성을 가졌다.
강자와 지혜자와 승리자가 누구뇨. 입에서 불을 토하는 자니 곧 하나님과 하나된 입장에서 그와 합한 소행을 가진 자이다. 그의 합한 소행인 불이 무엇이뇨. 영감과 말씀으로 무기를 삼는 자이다. 악마도 죄도 세상도 자기도 천사도 기타 모든 피조물도 이 무기를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 이것으로 정복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이다.

5.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누구든지' 하는 말과 '반드시' 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 죽음은 영육이 나뉘는 죽음보다도 증인을 대적하는 언행심사의 소행 전부가 그 개별적으로 멸망한다는 뜻이니 택불택자를 물론하고 또 비록 성자와 성녀일지라도 하나님과 일체된 증거의 소행에 배치되는 모든 소행은 배치된 그 부분만은 멸망인 것을 가리켜 '누구든지' 라고 말하였다. 또 역설하기 위하여 다시금 '반드시' 라는 말이 첨부되어 있다. 이는 금을 연단하여 잡(雜)을 태우는 것처럼 두 증인의 시기인 신약시대는 물론대소하고 진리가 아니면 소멸됨을 가르침이니 어떠한 성자 성녀라도 불의의 행위에 머물면 즉시 멸망의 편에 섬이요, 어떤 소자라도 의에 귀속되면 즉시 승리의 편에 서는 것을 본절에서 볼 수 있다. 또 성자의 생애 중에도 불의한 부분은 소멸된다. 사(私)의 것은 소멸된다.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라고 말씀한 권세는 3절에 하나님께 받은 권세이니, 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인 권세이니 이는 하나님만 가지신 것인데 증인이 이 권세를 가지게 된 이유는 그 자신이 가짐이 아니고 그 증인의 소행이 성경적이기 때문에 그 소행의 배경이 하나님이심과 그 일의 이행을 하나님이 책임져 불변적으로 성립됨을 가리키는 권세다. 특히 저희라 함은 복수(複數)이니 이는 문자대로 두 사람이 아니고 누구든지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누구든지 성령대로 주장하고 계획하고 행하는 소행은 이와 같이 권세있는 것을 증거한다. 이러므로 성경과 합일된 소행은 피조물과의 관계 여하를 볼 것없이 용진할 것이며 성경에 배치되는 일은 피조물의 어떠한 세력의 배경을 가졌을지라도 멸망이니 포기하여야 한다.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이는 왕상17:1- 에는 문자대로 엘리야가 3년 반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한 일이 있으나 이것을 말함이 아니고 엘리야가 가졌던 영적 권위를 가지고 신약시대에 복음을 사역할 것을 가리킨다. 이는 이 증인이 죽음에서 엘리야가 아님을 밝혔다. '하늘을 닫아' 함은 상징이니 인간의 영혼에게 만족을 주며 평안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막는다 함이니 창3:24에 범죄한 아담 하와에게 화염검을 두어 생명과를 먹지 못하게 함과 같다.

'비오지 못하게' 라고 함은 문자적 비가 아니고 식물이 우로(雨露)로 소생케 함과 같이 인간의 심령은 하늘로 오는 은혜로만 소생되고 자라고 강건하여 만족할 수 있는 것이 피조물의 본성인데 그 은혜를 막아 한재로 초목이 고갈함 같이 인간의 심령 불안과 불만 불평으로 허덕거리게 됨을 상징한 것이다. 구약시대보다 신약시대는 이것이 더욱 심하다. 그러므로 불택자에게는 하와가 벗은 것을 깨달아 무화과 잎사귀로 호신하기에 분주하던 것처럼 심령에 불안과 불만과 염려를 견디지 못해 그를 채우려 해결과 만족을 얻으려 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오는 것은 모르는 고로 땅의 것을 대용하려 한다. 말세가 되어 '비가 오지 아니'할수록 물욕 정욕 세영(世榮)의 욕에 불붙어 점점 물질주의로 부패하여 가고, 택한 자에게는 이러한 불안에서 회개하여 위의 것을 갈망하게 됨으로 두 증인의 예언을 바라보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날까지 채우고 땅의 것을 찾는 자도 죽는 날까지 갈급하여 채움도 일반이다. 다만 하나는 없어지지 아니할 것으로 채워 영원히 부유하여지고 하나는 없어질 것으로 채워 영원한 가난과 갈급으로 채우게 되는 것이다.

7.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이도 상징적이니 물은 갈증을 면하게 하는 음료인 것과 같이 사람들이 각양 보편 은혜에 갈급할 때에 보편 은혜로 그 불만과 욕망을 채워 만족케 하는 각양 세상적인 행복이라고 칭하는 것들을 가리켜서 물이라고 상징함이다. 예를 들면 돈 없어 갈급한 자에게는 돈이 그 갈급을 시원케 하는 물과 같고, 건강이나 자녀나 지식이나 기타 지위나 권세나 모든 영광이 불만하여 갈급한 자에게는 그것들이 있으면 만족케 되나니 이것들이 물과 같이 욕심에 갈증을 면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 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말하는 소위 복이라고 하는 것들이다.
'물이 변하여 피 되게 한다' 함은 이 행복이 도리어 그에게 살해하는 성질에 속한 불행이 되게 하는 것을 상징함이다. 예를 들면 돈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되고 부모와 자녀가 좋은 것이로되 부모와 자녀 때문에 도리어 죽게 되는 환경과 입장을 만드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한국 6.25 동란 때에는 유식 유산 유권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특수기가 아닌 평소에도 행복이 변하여 불행이 되어지는 일들은 너무도 많다. 범죄한 인생들을 통계로 보면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그것이 있음으로 행복된 사람은 적고 도리어 불행케 된 일이 더 많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어떠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복이 도리어 화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면 누가 보아도 화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자체가 도리어 큰 축복의 근거가 되는 것을 얼마든지 본다.
불택자에게는 세상이 그들의 분깃인 고로(시17:14) 행복하여 화가 되므로 그대로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택자에게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은 그 시기가 회개할 때요 또 보이는 것을 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정붙이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이는 저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운동을 위하여 인생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 곧 인생들이 사랑하고 있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쳐서 택자에게는 세상에서 해방시켜 천국으로 귀속시키고 불택자에게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은밀한 의미에서는 권세 받은 두 증인은 인생들의 화복을 복음을 위하여 자유 자제하는 주권적 권위를 가리킴이니 이는 인간은 주권이 없는 것이므로 주권의 하나님이 그와 하나되어 역사하시는 권위를 말함이다. 이도 그 증인 자체 권위가 아니고 그 증거하는 복음의 권위이니 모든 피조물은 복음만 위하여 멸망하는 진리를 말한다.

8. '아무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는 복음을 위하여 유익하도록 또 복음을 해하는 모든 권력을 인간이 볼 수 있는 재앙으로 치는 일도 있고 또 복음이 기어코 권위있게 이루어지므로 막는 그 모든 존재들이 결과적으로 재앙받아 망하여지는 것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위에 기록한 불과 비오지 못함과 물이 피 됨과 기타 각양 권능은 증인이 죽음으로 후에 사람들에게는 없는 줄로 알기 쉽다. 그러나 이 권능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 개인이 증거생활을 마치고 별세 시에 끝나나 기타 살아 있는 성도에게는 함께 하나니 이 권세는 주 재림 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은 성도에게까지 함께 하는 권능이다.
본장 7절에 죽었다 함은 증인 개체의 순교를 말함이고 여러가지 재앙의 권능이 필료(畢了)됨을 말함이 아니다. 또 증인이 죽었다 함도 개인의 순교를 표현한 것뿐이고 신약시대의 증거역이 끝났다 함은 아니다. 다음 시체의 3일 반도 복음의 박해 신약시대의 극심한 후반기를 가리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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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 저희가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부터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 이 두 증인을 가르쳐 혹설에는 사람은 일생일사가 진리인데 엘리야와 에녹은 죽지 않고 승천하였으니 죽지 아니하였고 그래서 새로 한번 죽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나 이는 오해이다. 이 두 증인은 증거를 중복하여 역설하는 말이니 진실한 증거자라 함이다. 말과 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모든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체 받아 그를 본 자마다 예수님을 본 거와 같이 예수님을 밝히 증거하는 진실하고 권위있는 신약시대 성도들을 가리켜 두 증인이라고 한 것이다.

2. '증거를 마칠 때에'
이는 어느 한 시대의 증거나 한 사건의 증거를 마쳤다 함이 아니고 그의 살 수명대로 자기 수명을 다 산 후 죽을 때가 되었을 때라 하는 말이다. 이 증거를 마쳤다 함은 지상교회의 총증거인 복음운동을 필역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 어떤 개인적으로는 증거를 마쳤으나 또 증거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증거를 마쳤다 함은 개인적으로 권위있는 증거생활을 다 마치고 별세할 때가 왔다 함이요 전체적 교회를 가리킴은 아니니 살 대로 다 산 후에 순교가 오는 것을 가리켜서 표시한 것이다.
특히 증거의 기간은 신약시대를 3년 반으로 상징했고 고난의 증거 기간은 시체로 표시하여 3일 반으로 상징하였다. 기독자의 증거역인 복음생활에 있어서 권위있는 시간이 많고 주를 위한 고난의 기간은 적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난의 기간은 일생에서 얼마 아니 되니 귀함을 알고 아껴 허비하지 아니해야 한다. 순교는 더 살 수 있는 생명을 주님을 위해서 감수하는 거와 같이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수명 일각이라도 단축시킬 수 없고 수명대로 다 살고 다만 죽음을 복되게 하는 것이다. 평소에 주님을 진실되이 사랑하며 또 평소에 다 발휘할 수 없었던 내포된 사랑의 그 실력을 시험하는 시간이요 시험하는 문제이니 그 시험의 합격은 각양 환난과 장단의 고문과 고형 죽음들이 막을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실력있는 애정(주를 사랑함)만이 통과하도록 시험하여 방어하는 것이다. 이 시험과 방어선을 꿰뚫고 통과하여 이제까지의 잠재한 사랑이 발표되며 또 꿰뚫어 합격되며 또 폭발되는 것이며, 외양간에 매인 천리마가 길을 얻어 마음껏 달림과 같이 사랑의 욕심에 만족을 이루는 것이니 만족(滿足)히 사랑하고 만족히 희생하고 만족히 견디어 세상에서는 더할래야 더할 수 없는 사랑의 발동의 만족의 절정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서도 또 불만하여 죽은 후에도 주를 만족히 사랑치 못하여 영원한 미련을 가지는 것이 지상에서 천국에 생활을 하는 성도이다. 누구나 천국에 가면 다 이런 미련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상서 가지는 것이 더욱 복되다. 빌1:20은 이 점을 간증하여 놓은 것이다.
순교는 은밀한 사랑을 폭로시켜 촬영하는 것이요 결혼과 정절과 주님을 사랑함이 생명보다 귀한 증표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재세의 취미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께만 얻고 희생하는 것도 주님께 주고 받는 취미로 살고 이보다 더 가깝게 주님과 관계를 가지려 함에서 순교는 생겨지는 것이다.

3.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지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운동을 가리킴이니 그 출처는 사탄이 왕권을 잡은 그의 거주지, 죄악의 근거지요 그와 연속되어 있는 인간의 무한정인 사욕의 부패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운동을 방해하는 악마와 죄악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상징한 것인데 복음을 방해함이니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기타 이종교 또 사상 주의 학(學)등을 사탄이 이용하여 역사하는 것들이다. 이뿐 아니라 가장 맹렬히 역사하는 것은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고 사탄에게 이용되는 거짓 교회들이다. 특히 맹수성을 가졌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한다(살후2:3,7-8, 단11:31,12:11, 계13:1-10).

4. '저희로부터(두 증인) 전쟁을 일으켜서 저희를 이기고'
살후2:7-8과 같이 하나님께서 복음운동의 방해자를 막으시고 있다가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일으킬 복음운동을 다 완료하면(살 기간이 다 찬 때) 최종적으로 순교시킬 박해를 가리켜서 여기에 일으키는 전쟁이라고 한 것이다.
전쟁에 대하여 주의할 것은 복음운동은 어느 때나 대적과 박해를 받지 아니할 때는 별로 없고 대개 환난을 통하여 성공되는 것이요 또 환난이 있다고 하여 결코 복음이 막히거나 증인이 죽음을 당하는 그런 일은 없다. 여기에 있는 전쟁은 마지막 죽음을 당한 전쟁이니 평소의 박해도 심하면 성도를 죽일 수 있는 줄로 아는 것은 그 박해 자체를 하나님의 주권보다 앞세우는 불신이 되기 쉽다. 그 생사는 하나님에게만 주권되어 있고 박해 그것에게 주권되어 있지 않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역사는 이 점을 우리에게 밝혀 주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인 죽음의 시간이 오기 전에는 천하가 박해해도 죽일 수가 없으며 기간이 차면 천하가 구하려 해도 일각도 더 살릴 수 없는 것이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불신하는 데서 일어난 사욕적인 죄의 보응이다. 짐승이 증인을 이겼다 함은 세상법대로 말함이요 복음의 법대로 말함이 아니니 증인이 졌다 함이 복음의 법으로는 중복 없는 완전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5. '저희를 죽였은즉'
이는 순교시켰다 말이오. 순교는 자기보다 평소에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와 주님의 계명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가진 자가 모든 피조물의 세력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자와 제일 귀한 생명을 생명으로 구속하신 주님께 바쳐 주님을 사랑치 않고는 불만하여 갈급에 있어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에게 영원한 만족과 감추어 있는 사랑의 이력을 발휘시켜 살리는 지상 최후적인 주님의 선물이다. 과거 순교자들 중에는 고문과 고형에도 단기간보다 혹독한 장기간을 더욱 기뻐하였으며 순경보다 역경적인 복음운동을 더욱 기뻐하였고 순교의 죽음도 혹독하고 장기간적인 죽음을 더욱 만족히 넘겼다. 이는 다 주님의 사랑의 고난을 깨달아 주님을 사랑함이 뜨거움에서 발원된 것이다.
본장에 1260일 증거 기간도 신약시대 전부요 시체가 성 거리에 있은 지 3일 반도 신약시대의 전부를 가리킴이다. 그러면 증거 생활 마치고 그들이 죽어 그들의 시체가 3일 반 성 거리에 있었으니 위에 말한 대로하면 신약시대가 시간적으로 이중이 되니 그 해석은 이연치 않다고 하기 쉽다. 또 3년 반, 곧 신약시대 전부를 증거하고 죽은 자의 시체가 거기에 연장되어 신약시대 전부인 3일 반을 시체로 있다고 하니 어떻게 신약시대 총기간을 증거하고 총기간을 시체로 있을 수 있느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해석은 맞다.

3년 반의 끝과 3일 반의 끝은 교회적으로 말하면 신약시대의 끝이요 개인적으로 말하면 일생 신앙생활의 끝이다. 그러면 한 사람으로 신앙생활의 일생을 증거로 또 일생을 시체로 지난다는 말이니 증거 생활 끝날 때가 교회적으로는 복음운동의 결말기요 시체인 박해의 결말기다. 개인적으로는 증거 생활을 마침은 증거적 수명의 마침이요 시체의 3일 반되는 시간은 박해의 종말기다. 증거 기간과 시체 기간에 대한 기록이 순서적으로는 되어 있고 또 논리(論理)하기를 증거 말인 후에 시체의 기간이 있으니 순서적으로 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사람들은 오해한다.
여기에 순서적으로 증거가 먼저고 시체가 다음 되는 것은 복음 운동에는 증거(아이가 증거해도 증거의 권위는 아이가 아니요 전능하신 성령이시니 비밀한 의미에는 두 증인의 포함된 권위는 증거이다.)와 시체 같이 취급받는 박해가 언제나 겸하는 것이면서 그 순서는 증거가 먼저요 박해가 다음 됨을 가리켰다. 본장 증거가 먼저고 시체가 다음으로 순서된 것이고, 또 증거 3년반과 시체 3년반을 다 같은 복음 시기 전부와 개인 신앙 일생 전부 말함은 연장적 순서로 말함이 아니다. 신약시대 총기간과 개인 신앙 일생의 총기간이 일면은 증거요 일면은 박해이니 전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의 총기간은 박해의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고 증거의 기간이라도 할 수 있다. 이는 이중의 시간을 말함이 아니고 같은 시간의 행사 양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연고로 증거는 3년반으로 상징하고 박해인 시체 기간은 3년반으로 상징하였는가? 개인 일생으로 말하든지 신약시대 전부로 말하든지 3년반으로 축소하여 상징했으니 기간이 얼마나 신속하며 짧은가? 그러므로 광음을 아껴 증거하여야 하려니와 시체인 주님 위한 박해는 3년반으로 상징했으니 이는 더욱 그 기간이 짧고 신속함을 중점으로 계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를 위한 고난을 얼마나 아끼며 귀하게 여겨 기회와 그 사건을 하나도 잃지 말고 광음을 아껴 달게 순환하여 할 것을 밝히는 것이다. 또 기독교가 아무리 박해종교라 하여도 실질적으로 권위있게 증거하는 기간과 평안하게 준비하는 기간에 비추어 몇 배나 긴 것을 또 의미한다. 3일반 후에 부활한 것은 주 재림으로 복음 완전 승리와 개인 부활을 다 포함한 것인데 부활 승천한 것에 그 영광의 자본은 3년반 증거보다 3일반 시체로 있던 것이 더욱 크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에게 있어 권위있게 증거하는 기간 평안히 준비하는 기간보다 짧은 박해 기간과 시험 기간이 부활 승천으로 주님 맞이하여 영광의 나라에 사는 때에 더욱 크고 귀한 자본이 되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럴 가리켜 대목 장날이라고 비유하였다. 신약시대 증거 기간과 박해 기간을 3년반 3일반으로 상징했으니 2천년가량으로 셈하면 우리 짧은 개인 일생의 해당 기간은 몇 시간이 될까? 너무도 짧은 기간은 영원에 주와 관계와 행복을 좌우하니 생존의 나의 기간이 얼마나 귀중한가?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1. '저희 시체가'
이것은 본장 3절과 4절에 기록된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로 표시된 사람들의 시체인데 여기에 기록된 시체라는 원어는 푸르마인 집합체를 가리키는 단수 명사이다. 이것을 보아도 8절과 4절에 기록된 증인은 개인이 아니고 집합체 곧 교회의 복음 증거자들 전부를 일체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말은 단수의 명사이지만 집합체의 내용을 가진다.

2.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이 성은 예루살렘이나 바벨론을 가리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큰 성은 어떠한 지역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죄악의 지배를 받고 불의의 세력이 존재하는 온 세상을 가리켜 상징 계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이 아니고 종교적과 도덕적의 죄악의 세력들이 관영하여 있고 그 위치인 세상을 말함이다. 큰 성이라고 표시한 것은 그 세상을 말함인데, 큰 성이라고 표시한 것은 죄악들의 세력이 강한 것을 가리켜 말한다. 산골 한 초가집이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가정들이라면 거기는 큰 성 바벨론에 소속된 것이다. 이는 이방이나 교회를 망라하여 모든 불의의 세력을 총칭하는 말이다.

'시체가 길에 있으리라' 고 한 길은 시체를 방안에나 묘지에 두지 아니하고 길에 버려 사람들에게 더럽게 남김을 받게 하리라는 의미로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는 순교자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인간 중에 가장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것을 예언함이다. 이는 순교한 자만이 아니고 순교적인 신앙주의는 가장 세상에서 천대와 송장같이 추하게 사람들이 남길 것을 의미함이다. 행23:5절에 바울을 염병이라고 함과 같은 성질의 박해를 받을 것도 예고함이다. 그러므로 말세가 가까워 올수록 죄악이 관영하여 어두움은 심하여 인간의 영안은 점점 가리워 진리가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취급되고 주님과 진리와 구원의 양이 그에게 있는 것만큼 그는 세상에서 천대받을 것을 각오하여야 한다. 10절에는 보면 죽이고 만족하니 예물 보내는 일까지 있다고 기록하였다.
말세가 될수록 성도가 땅위에 발붙일 곳이 없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오해하여 낙망이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 이런 모든 대적들이 므나 장사에게는 물건 사러 온 손님이요, 심는 자에게는 노력하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는 자에게는 맛있게 하는 반찬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복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특히 여기에 '있으리니' 라고 미래사로 표현된 것은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하여질 것을 보임이다.

3.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이 성구는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소돔 애굽 예루살렘을 문자 그대로 그 도시들을 가리킴이 아니고 그 성들의 정치 경제 도덕 영광 행복관과 주장과 권력들과 같은 성질을 가진 죄악과 불의가 강한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8절 초두에 기록된 큰 성을 소돔 애굽 예루살렘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세상이 이 3도시에서 진리를 대적하던 것과 같이 하면 갈수록 불의의 세력이 강하여질 것을 예고하여 성도들은 녹아질 준비를 충분히 하였다가 상인이 대목 장날에는 넣는 대로 크게 팔아 수입을 보는 것처럼 솔박 녹아져야 할 것을 예고하는 희소식이다.

4. '소돔'
음란하고 사치하고 하나님의 사자들과 의인들을 멸시하고 예언을 무시하고 물질에 애착하며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멸망하는 그 기간까지 계속하고 유황불길을 초래하여 전멸한 것이 소돔이니, 말세에 온 세상이 이와 같을 것을 계시함이다. 음란과 사치는 육적만이 아니고 영적으로도 심하여질 것을 약4:4절에 기록한 것과 같이 세상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더 가깝게 짝하는 모든 부패한 행위를 말한다. 이상의 각양 죄악이 기록되어 있는 중 그 근거는 음란 하나이니 다시 말하면 말세의 모든 죄악의 근거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애착하는 것이다.

5. '애굽'
물질 부요와 문화 발달과 다신교와 모든 술수와 저희 무력들을 자랑하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고 학대하고 노예로 삼고 하나님 대적하기를 멸망 받기까지 대적한 것이 애굽이다. 세상은 점점 이와 같이 되어질 것을 가리킨다. 애굽은 이스라엘의 기업을 이을 남자아이를 다 학살한 것 같이 세상은 성도들도 하나님의 장자의 기업을 상속할 성화를 학살하여 방해한다. 애굽 창고 쌓는 벽돌구이로 고역한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도 소용 없는 세상 곡간 쌓인 곧 세상 저축주의로 고역하게 할 인간의 부패성과 모든 죄악의 세력들을 말한다.
'저희 주께서 십가에 못박히신 곳'은 지역적인 골고다를 가리킴이 아니고 그 성질을 가리켜 말함이다. 보내신 이의 뜻을 순종으로 이루고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입장이 되어 사망적으로는 악마와 죄악이 승리하고 생명적 성질로는 순교한 성도가 완전 승리하는 입장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소돔 애굽 골고다로 표현하여 순교자의 입장의 유일된 규범을 밝히는 것이다. 그 입장은
1)보내신 이의 뜻대로의 자신 성결
2)보내신 이의 뜻 순종의 완성
3)죄악에게 속박된 자를 자기 회생으로 해방시키는 운동이다.
4)하나님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아들과 여생과 영광의 기업을 얻게 하는 화목의 제물로 인하여서만 모든 불의의 악마 세력에게 자연은총(세상적인 각양 소유, 몸, 생명)의 것은 다 빼앗기고 특수은혜의 것은 다 성공하고 수입하는 입장만이 순교와 순교적인 신앙의 유일한 규범인 것을 표현한 것이다.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서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백성'은 정치적으로 모인 인민 집단의 정치적 권위를 가리키고
'족속'은 혈족적 계통의 혈족적 권위를 가리키고
'방언'은 지역과 족속을 초월하여 세상 언어의 세력들을 가리켜 말하고
'나라'는 생활과 습성과 주의 사상들이 단합의 세력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위에 말한 이 네 가지는 온 세계 온 인류 지상에서 세상적 생활을 하고 있는 전 세력을 망라하는 말이니 세계에 세계 어디서나 복음의 증거자가 박해받는 방편과 형태는 각이하나 질적으로는 다 같이 해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증거자는 세상적 생활은 세계 도처가 복음운동의 대립인 줄 알고 경성과 담대로 용진해야 한다.

2. '중에서'
위에 말한 이들과 복음 증거자는 합치되지 아니하고 그들과 대립되며 수백첩으로 포위된 자와 같이 고독하고 집중 사격을 당하는 거와 같은 그런 주장이 복음 증거자의 입장임을 말한다. 이는 복음을 무능하게 하려 하는 죄악의 운동들이나 고후1:8-10절과 4:7, 12:10절과 같이 자기 의지하지 말고 권능이 심히 큰 것이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을 나타내어 실패와 사망과 모든 대적에게서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만 의지해야 승리케 하려 함이다. 이런 경험을 많이 겪은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라고 함과 같다. 복음운동에 대적이 많을 때에는 혹 장소를 옮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도 있고 혹은 더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더욱 드러나게 하고 증인에게 확신을 자라게 하는 일들이 백리무해뿐이다.

행12:17 14:19-21, 행26:30-27:1 행28:30-31과 같이 박해로 옮겨 구원을 얻을 자가 많은 곳에서 일하게 하시니 매였던 천리마가 해방을 받고 용감하게 달림같이 힘있게 일하게 하시는 것이요, 행4;1-31 행16:11-3 행27:14-25 딤후4:17 왕상22:27-28 37 사36:1,4,13,18, 37:4-36 단6:24 삼상18:10-11 왕하6:13-23 왕상18:38-40과 같이 각양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로 전적 하나님만 심망간원 하게 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원수는 멸하고 복음은 가속도로 성취되게 하신다.

3. '사람들이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목도하며 무덤에서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사람들'이란 온 천하에 불택자들을 망라함이니 저들이 '시체'를 목도한다 함은 순교당한 자의 시체만을 말함이 아니다. 순교적 신앙을 가진 성도를 시체와 같이 더럽게 여기며 멀리하며 또 숨은 자끼리 무능하게 하게 여겨 천대하고 언행심사로 증거하는 복음을 시체같이 본다. 또 시체의 악취같이 여기는 적기독교인 대적이 가면 갈수록 심하여질 것을 상징한다.
'사흘 반을 무덤에 장사 못 하게' 한다 함은 신약시대 동안 참 복음을 환영하는 시기는 한 번도 없고 갈수록 계속 적일 것과 심하여지기를 시체는 갈수록 더하고 악취가 산 자에게 심하여 짐같이 복음이 죽은 자들의 눈에 그렇게 될 것을 상징한다. 9, 11절에 있는 3일간을 3절에 기록된 1260일과 숫자가 다르다 하여 달리 보아서는 아니 된다.

3절의 1260일과 9절의 사흘 반은 다 같은 신약시대를 이중으로 말한 것이니 증거 기간을 1260일로 표시하고 시체 기간을 사흘 반으로 표시한 것은 하나는 권위있게 증거 하는 기간과 또 평화롭게 준비하는 복음 기간을 3년 반으로 길게 말한 것이다. 시체인 박해 기간은 3일 반으로 짧게 말하였으니 이는 박해의 복음이라고 해도 박해보다 평안이 시간적으로 많은 것을 의미한다. 증거를 마치고 죽임을 당했으니 한 사람으로 죽고 그 후 시체로 있는 3일 반 같이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신약시대의 총 증거와 박해의 교회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증거 마친 후 죽어 시체 된 그 순서는 원리적으로 증거가 먼저요 박해가 다음이라는 것뿐이다. 또 증거 기간과 박해 기간이 각각 신약시대의 총기간이라고 계산을 하면 이중이 된다고 하기 쉽다.
과연 이중은 이중이다. 이유는 교회는 증거와 박해 양면으로 자라가기 때문에 증거도 신약시대 총 기간을 게속하고 박해도 계속되는 것이므로 양면이니 이중이다. 시체 박해를 상징함은 가면 갈수록 일반인과 적기독의 박해가 극심하게 된 후 기독교의 완전 승리를 가리켜 부활 승천으로 상징하고 그 후 지진으로 죽는 것은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킴이다. 그 이유는 13절에 남은 자들이 두려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였으니 천년왕국시대에 번식인종으로 최후에 남는 그 무리 외에는 세상에 세인들이 죄악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없고 가면 갈수록 악하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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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 '땅에 거하는 자들'
이들은 세상 곧 죄와 마귀에게 소속된 자이니 곧 자아주의 곧 사욕으로 사는 자이니 교회 안에도 있고(행24:1 행14:19 행7:54-60 마23:33-34 왕상19:2) 또 불신 이방 중에도 있다(행16:19-24 왕하6:11-15절).

2.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속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땅에 속한 사람들은 악령의 지도대로 사리 사욕 사성 사계획 사목적 대로 또 모든 불의대로 사는 행위이니 그의 마침은 영원한 멸망이다. 이유는 악령 곧 마귀의 본성의 지혜가 사망의 법이고 그 목적이 인생을 저에게 굴복시키려 함이다. 그에게 순종은 사망하는 법이기 때문이요 죄도 그 자체가 그 멸망케 하는 권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대립되는 모든 사사로운 사(私)도 전능왕이신 하나님과 대립되매 엡1:10과 같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때에는 사망 패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즉 중생 되지 못한 사람과 모든 세상본위의 생활은 다 이상에 말한 땅에 거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종말은 하나도 존재할 수 없고 그 전부가 영원히 파멸을 계속하나니 그것이 곧 지옥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과 영원 승리 운동이니 땅에 속한 자와 정반대 될 수밖에 없고 또 생명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에게 속한 산 자로는 사랑의 그 본성이니 사망으로 달리는 땅에 속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복음은 마귀를 대적하여 멸하고 하나님을 주로 또 사(私)를 멸하고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에, 대공(大公)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또 모든 죄를 일게 하고 책망하고 권하여 성결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니 이는 땅에 속한 자를 죽여 하늘에 거한 자로 살게 하는 운동이므로 자연히 이 운동원들을 괴롭게만 하는 일뿐 아니라 죽이는 운동이 되어진다. 그러므로 저들은 참된 기독교자인 두 선지자를 죽이고 또 그 죽음을 (없어짐과 멸시 천대 조롱 고난 무력해짐을) 중심에 즐거워하고 표현된 모든 태도가 기뻐한다. 이는 미중생이므로 그 본능과 또 성신 없는 자인 고로 그 행위가 다 그러하다.

'예물'을 보낸다 함은 말세에 기독교의 박해가 얼마나 심할 것과 땅에 속한 자에게는 복음을 대적하지 아니하는 요소가 추호도 끼어 있지 아니함을 가리킨다. 사람이 이 원수라도 죽임으로 미움이 마치는데 저들은 죽이고 또 즐거워하고 또 외형으로 기뻐하고 또 물질로 기뻐 예물까지 하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복음을 대적하는 것과 이해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 성도들은 내 자신이 중생됨에 있어 확신과 감사를 가져야 하고 이와같이 대적이 많은 세상이니 은밀히 선을 두어 긴장으로 대적하고 저들의 입장을 불쌍히 여길 것이며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또 위하여 기도하며 생명의 씨를 그들 속에 심이기를 주께서 나에게 하시듯 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 롬1:14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그는 겸손히 통한하였다.

'두 선지자'라 함은 문자대로 두 사람을 말함이 아니고 증거, 증거자라 함이니 충성된 증거자를 가리킴이다. 괴롭게 하여 미움을 받기까지 증거함이 사랑의 장성이요, 생명 강건이고 부활 능력이다. 본 성구는 예물을 보내리라 하고 미래사로 되어 있는 예언이니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사랑의  투쟁은 계속될 것과 구원받은 성도의 사명임을 가르친다.


11절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신약시대 증거의 끝보다 교회 박해가 지나가는 끝에 교회의 완전 승리를 말하는 것이니, 주 재림과 멸시받고 속은 자 같은 기독자가 참 부활하여 승천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신약시대 박해를 정수 '3일 반'으로 간섭한 것은 특히 교회의 박해와 개인의 박해가 일정되어 있는 동시에 신속히 지나갈 것을 의미한다. 이 3일 반은 신약시대 교회의 박해 기간이요 또 신약 교회 안에 내포된 성도의 복음적 박해의 일생이다. 3일 반같이 지나가는 짧고 허무하게 뜻 없이 지나 허송키 쉬움을 말한다.
신앙생활 일생의 박해가 3일 반이니 얼마나 신속히 지나감인가! 3일 반으로 축소한 어의는 환난이 심하나 짧으니 인내하라 함을 가리킴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수난기가 짧으니 경성하고 예비하여 하나의 박해와 천대도 빼앗기지 말고 아껴서 다 받으라는 말에 종점을 둔다. 이유는 3일 반 영생할 생기를 얻는 영광을 보이면서 거기 비해 시체 취급받는 3일 반은 짧기 때문이다. 권위 있게 증거 하다가 승천함보다 증거 하다가 박해받아 죽어 시체로 조롱받다가 다시 부활하여 원수 앞에 승천하니 더욱 원수들은 놀라게 되고 승천한 자에게는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평안한 복음 생활이나 권위있는 복음 생활보다 부활 후 영광의 나라에서는 지상 박해 생활이 더욱 천국의 영광의 자원이 되는 것을 상징함이다. 자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행함이 상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고 상으로 결정된 것이 행으로 표시되나니 지상의 행으로 그 나라의 상의 여하를 알 수 있는 것인 고로 자원이라고 한다.

2.'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구경하는 자는 호의나 호감으로 보고 배우고 동정하는 그런 의미의 것이 아니다. 대적을 했던 그 이상으로 또 미워하여 죽이고, 죽이고도 그 이상으로 또 기뻐 예물을 교환하고, 또 그 이상으로 시체로 있는 것을 장사 지내지도 못하게 하고 그 더럽고 냄새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괴롭게 증거 하던 자가 그렇게 된 것을 보면서 즐거워함이다. 이는 악령에게 그 마음이 가리워짐을 받은 사람들은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여 준 사랑의 역사를 이렇게 미워하여 송장같이 볼 뿐, 또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당하는 그 비참한 처지를 동정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를 유일의 즐거움으로 구경처럼 여김을 말함이다.
교회 안에서도 진리와 의를 홀로 주장하다가 교회나 교계에서 배척 당하는 그를 동정함이나 한편 되어 박해를 받음은 의인을 대접함이다. 그러나 그에게 무관심함이나 동정이 없음이나 은밀한 의미에서 시원케 여기는 것은 다 두 선지자를 죽인 자들의 성격의 반열에 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극히 주의하여야 하나니 모든 인간적 분열 곧 당파가 여기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 '하늘로서 음성이 있어'
살전4:16 '주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강림하신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니 지상교회에게 최후적인 위로의 영접이 되는 주님 공중 재림을 가리킴이다. 지상교회는 주님의 재림 시에 최고적인 위로가 시작됨을 가리킴이요 또 특히 시체로 있던 자에게 생기와 초청의 음성이 들려짐은 교회로서 승리와 위로와 칭찬을 받는 행위, 권위 있는 증거 생활보다 고난받는 부분이 더욱 귀함을 표시한다.

2.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함은 기독교가 전체적으로 또 개인적으로까지 주님 재림하실 때는 완전 승리하고 영광스럽게 부활 승천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 할 것을 가리킴이다. 본절의 구경은 11절의 구경하는 거와 정반대의 구경이다. 11절은 시체와 같이 세상적으로 비참하게 된 기독교의 생애를 멸시하고 만족이 여기며 구경하는 것이고, 12절의 구경은 기독교의 완전 승리로 계1:7에 주의 재림은 그를 찌른 자들도 본다고 한 그대로 그리스도 영광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승천의 영광을 보고 두렵고 부러워하면서 구경하는 것을 말한다.
원수 앞에 유한한 것으로 또 유한한 기간에 진리와 함께 구경거리 된 성도는 그대로 영원한 참된 것으로와 시간적으로 영원토록 진리와 함께 영광스럽게 된 것을 영원토록 부럽게 구경시켜 준다.  눅16:23 홍포 입은 부자가 나사로를 본 것 같이 변개 할 수 없는 영원한 관계로 되어 있는 것이 천국과 지옥이다. 그러므로 재세 성도는 악마와 죄악에게 진리로 더불어 함께 낮아져야, 수치스러워져야, 해를 보아야 하겠고, 죽어야 하겠다. 그러나 진리대로 심판하는 그 넘어 있는 진리의 세계에서는 낮아진 것만큼 높아져야 하겠고 수치 된 것만큼 영광스러워야 하겠고 당한 손해만큼 부요 하여야 하겠고 죽은 것만큼 생명 충만하여야 할 것이 지당성을 가진 진리이다. 다만 유한의 것이 무한의 것으로 배수(倍數)되는 것만 차이 있다.

구경거리가 되어라.
영원한 영광이 기다린다.
생명을 폐물로 던지지 말고 주와 함께 솔박 죽고 가라.
사랑을 겸한 생명이 너의 것이 되리라.


13절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 '그 시'
그 시는 주님 재림하시고 성도가 부활 승천하는 때이다. 지상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마지막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박해로 죽고 죽는 즉시 즉시 부활 승천하는 때이다. 택함 받고 부름을 받은 자는 다 휴거 된 때이다.

2.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이렇게 10분의 1이 무너지게 되는 성은 어느 지역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고 또 예루살렘이라고 하며 계시록에 상용하는 상징 수이니 알 수 없다고들 각양으로 말한다. 그러나 여기 10분지 1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가르치는 뜻이 따로 있다. 주님이 공중 재림하고 성도 전부가 휴거 된 뒤인데 이때로부터 주님과 성도가 지상으로 강림하게 되는 천년왕국 시작 바로 전인 그 사이에 있을 일이다.
그때에 벧후3:7-12까지와 계17:16-18과 14:19-20까지에 기록된 그대로 온 세상을 불사를 것이다. 전 지구와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전소시켜 원소로 돌아가게 할 것이 아니고 죄악이 있는 곳만을 심판의 불로 사르실 터인데 살라지는 그 부분을 가리켜서 10분의 1이라고 하였다. 그 멸망시키는 것은 지진으로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을 통과한 후 벧후3:7 이후의 사건을 통과한 후에도 오히려 남은 지면은 10분지 9 가량이나 됨을 예언함이다. 여기서 무죄한 초목만이 있는 것은 멸할 것을 보인다. 범죄한 인생은 세계 어느 안락시로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골에 갈지라도 이 재앙은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그가 거주하는 무죄한 초목까지 소멸하게 되어진다.

3.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숫자대로 '7천'이 아니고 하나님이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대로의 총수를 가리킴이니 천년왕국시대에 번식인종이 될 그 사람들은 자기가 끝까지 가지고 있던 육체로 천년왕국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사람들의 숫자 외에는 다 전멸될 것을 가리켜 상징함이다. 이는 천년왕국 전 마지막 때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계19:2-2에 보면 거짓 선지자와 세상 아마겟돈 전쟁이 마지막인 동시에 끝날 것을 말하였던 계19:21 천년왕국 시작 전 지상 멸망 끝에 참여하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이 죽은 무리들은 계19:19에 나오는 말 탄 자 곧 그리스도로 더불어 싸우는 자라고 하였으니 지상 인생이 천년왕국 시작하기 전에는 성신 감화 받지 아니한 자로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점점 심하게 악을 행하고 대적하다가 망하게 할 것을 온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또 계20:1-3 까지에 보면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는 악령이 잡혀 무저갱에 갇히는 그 시간부터 인간은 유혹 받는 일이 중지되고 성신 받지 아니한 자로서도 그 양심만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자가 될 것을 말하며, 사탄이 갇힌 천년동안을 천년왕국이라고 하였다. 또 계20:7-8에 보면 사탄이 놓이니 즉시 인간은 또 유혹 받을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마겟돈 후 사단이 갇힌 후가 아니면 땅에 남은 모든 인간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때는 있을 수 없으니 계11:13 하반절에 '그 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하늘에 하나님께 돌리더라' 하는 것을 보아 지진에 죽은 7천 명은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에 죽은 자를 말함이 분명하다.
이것으로서 천년왕국이 시작되기까지의 지상 대환난은 끝을 마친 것이다. 다음 계11:13 계속되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계9:13-21에 기록된 사건 다음으로 전개될 순서이다. 다만 계10:1-11:13까지 기록은 신약 복음 시작부터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의 일을 강령과 원리와 중요한 것만 대강 기록한 것이다. 계11:14은 둘째 화 곧 여섯째 나팔은 지나가고 셋째 화 곧 입곱째 나팔 재앙이 속히 이룰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을 불 때에 전개되는 사건을 계11:13 지진보다  뒤에 될 일이라고 할 수 없고 동시에 되는 일이며 또 계11:13 남은 백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일곱 나팔 재앙 다음인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본 계시록의 기록순서를 역사적 전개의 순서와 같이 보아서는 아니 될 뿐 아니라 일곱 나팔 7대접에 대하여도 이것을 기록된 대로 전개 순서를 삼아 해석하면 아니 된다.

4.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에 하나님께 돌리더라'
여기 대한 해석도 각각 다르다. 두 증인이 살아난 후에는 회개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이라 함은 몇 부분을 말함이 아니고 생존한 총수를 가리킴이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일은 마귀가 무저갱에 갇힌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는 지상에 있을 수 없고 가면 갈수록 악하여지며 잔인하여지며 배신 패역이 심하여질 것을 계16: 이 마지막 일곱째 대접 재앙까지 점점 심하여질 것과 또 계18:5 하늘까지 죄악이 관영 할 것을 가르치신 말씀으로 증거한다.
번식인종은 어느 민족 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될런지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번식이 있을 것만은 확실하다. 사65:20에 사해란 말이 있고, 23절에 그들의 소생이라는 말이 있고, 계20:8 천년왕국 후 사람 수가 바다 모래의 수효와 같다고 예언한 말씀에서 알 수 있다. 미가야 4장과 사2:2-11까지를 보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곧 그 생활이 경건한 자 중에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인가 한다. 혹은 유대민족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 또 믿는 자도 천국 소망과 세상 소망 둘을 가지고 하나도 놓지 아니하려는 자들,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와 함께 휴거할 수도 없고 세상 소망만 가진 자와 함께 멸할 수도 없고 중립이니 양면인 천년왕국 천국 비슷도 하고 세상 비슷도 한 천년왕국을 기업으로 주었다가 곡과 마곡으로 전멸 당하고 심판을 통과하여 유황불못에 던지움을 받는 자들이라고 한다. 이러함이 공변된 보응법에서 생각한 것이다.
성도들은 두 가지 소망을 가진 것은 위태한 것인 줄 알고 아예 골3:1 말씀같이 위엣 것을 찾고 땅엣 것을 찾지 말아야 한다. 유거된 성도들은 천년왕국 시대에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나니 천사와 같고 저급인 혈육적의 사람은 아니다. 벌써 시공을 초월한 영광된 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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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여섯째 나팔 재앙이 지나갔다 함이다.

2.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일곱째 나팔 불 때에 환란 연발될 것을 예고하여 성도로 하여금 깨어 연속적인 준비를 권고하는 계시이다.


15절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와서 가라사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1.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의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이 나팔은 지상 마지막이 되는 환난이고 아마겟돈 전쟁까지 포함된 셋째 화인 나팔재앙인데 하나님의 진노나 엄위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먼저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이 나타남은 기이하다. 계시록인 본서 용어에 진노하시는 말씀은 뇌성으로 표시하고 자비와 긍휼의 말씀은 음성으로 표시된 때가 많다. 이뿐 아니라 음성으로 발한 사건들이 기쁨의 소식이다. 이 기쁜 소식을 최후 최고인 셋째 화 첫머리에 큰 음성으로 외친 이유는 크다.
큰 음성들이라고 함은 누구든지 심각하게 들어야 할 뿐 또 택자는 누구든지 들어야 할 사건이요 또 음성들이라는 것은 복수이니 여기서 나는 음성을 다 들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 음성은 환난 중에도 주님이 같이 하실 것과 또 환난 후 영원한 영광이 환난을 통과한 성도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 보여 소망으로 위로하고 굳게 세워 인내로 승리케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말세 환난은 음성들이 외치는 바를 명심치 않으면 이기지 못한다.

2.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본문에 세상 나라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말이 대조적으로 함께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증거 생활로 그리스도인의 사상이 비참하게도 심하게 박해를 받는데, 성도들은 이와 같이 박해주는 세상이 짧으며 조만간에 없어질 나라요 여기에 대한 보상으로 상상치도 못할 놀랄 만한 위로와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을 것이며 그 나라는 끝없는 영원 무궁 계속됨을 보여 누구나 그 면류관을 뺴앗지 못하도록 굳게 잡고 인내케 함이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국가가 된 것은 천년왕국만을 말함이 아니고 영원한 천국까지, 다시 말하면 만물이 새롭게 되고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서 강림하는 그때까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빌2:10-11까지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는 영원히 총통치자 왕위를 가지시고 지옥까지 모든 피조물이 다 그리스도의 통치 권하에 영원히 있을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참 인생들의 사는 나라이다. 세상은 신불신자 간에 나그네와 행로이다. 인생의 행불행은 거기에 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복잡하게 표시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예약적이며 보상적이어서 큰 위로가 되는 것을 표시함이다. 우리 주의 나라가 된다 함은 본장 8절 '저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이 본문은 무능하고 어리석고 정죄 받고 빼앗기고 쫓겨나고 압제받는 그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 지혜에 순종하며 그 의를 바라보고 그에게 기업을 소망하고 등극을 목적하고 존귀한 지위를 위하여 충성하는 성도들을 표시했다. 이런 충성으로 말미암아 시체 같은 취급을 받는 중에서도 멀지 않은 본향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기 주로 지금 영접하면서 세상이 조롱하나 즐거워하고 세상이 어리석다 하나 자기의 지혜로움을 스스로 기뻐하고 행인의 길을 피곤치 않게 달리는 신앙가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또 무궁세계의 주님을 영접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시체로 취급받는 재세의 그 입장을 봉착케 하는 그 주를 영접하면서만이 있는 것이 고정적인 것을 보인다.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고 다시 말함은 그리스도의 3직 즉, 죄 문제는 그리스도에게서만 해결되는 것이며, 땅에 많은 말들 중에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참 도리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의 보호와 주권만이 영원한 것을 주장하고 또 그대로 시행함으로 말미암아 피곤한 증거와 고독하고 시체 같은 취급을 받는 입장에 있는 것이 오늘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위로와 사랑과 칭찬을 받는 그 지위에서 박해받던 세상을 건너다 보고 과거 박해받은 것같이 과거사로 내가 재세에 박해의 원인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신앙으로 미래가 올 때 현재를 삼고 현재를 신앙으로 지나보내어 과거로 삼아 피곤이 없는 기쁨을 말함이다. 말세 수난성도는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16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본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순전히 환상으로만 해석하는 이가 있으나 그렇지 않고 실존되어 있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1.'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
이도 성도들이 하나님을 늘 경외하고 접근하여 있는 고로 그것을 위치적으로 상징한 것이라고 해석한 이가 있으나 이는 천계 실지로 이십 사 장로들이 하나님에게 얻어 가지고 있는 영화로운 지위가 있는 그것을 자기 보좌라고 말함이다.

2.'이십 사 장로들이'
이 장로들은 계4:4에 흰옷 입은 무리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자요, 계5:8에 보면 향을 가졌는데 이는 성도의 기도라고 하였으니 성도인 것을 말한 듯 하고 또 이스라엘 국가에 있어 장로는 백성들의 대표자이었던 것이니 이는 천국에 있는 성도임이 분명하다. 그 직분의 행사는 모든 성도의 대표적의 사역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다.

3.'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는 영광의 구원을 받은 은혜를 감사히 하는 것을 상징함이다. 엎드린 것은 전적 무능한 인생인 것의 표시요, 얼굴을 땅에 댄 것은 전적 부패한 죄인이었던 표시요, 경배는 순전한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그 능력의 은총으로만 구원 얻게 된 것을 감사하며 찬미함이니 성도의 옳은 행실까지도 이와 같은 성질로 된 것을 깨달아 오직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것이다.


17절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본절도 환난을 앞두고, 또 현재 환난 중에서 성도들과 현재 같이 하시는 주님은 무능한 것 같고 패전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전능하시고 점점 큰 권능으로 승리하여 주권을 잡으시고 계시는 그 비밀을 즐거워하면서 또 완전 성립될 천년왕국을 바라보면서 찬양하는 것이다. 이는 진실로 불의의 나라와 세력과 진리의 나라와 세력을 구별하면서 나오는 찬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불의의 나라와 그 세력관으로는 무능과 대실패이나 진리의 세계와 그 세력관으로는 전능과 완전 승리가 되는 것이다.

2.'감사하옵나니'
이는 외부는 환난이요 실패나 그 속은 날로 평안과 완성으로 새로워감의 섭리를 소망 중에 감사함이요,

3.'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이 찬양함은 말세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 과거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멸망과 실패 같은 그 순서를 통하여 영광과 승리를 이루신 기이하였던 섭리들을 신앙으로 당겨보면서 시방도 성신의 사람이 아니면 이해 못할 대실패와 환난을 조롱을 받게 하시는 이것이 구주가 하신 구원역사요 또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이의 역사인 것을 확신하면서 지금 역사하고 계신 이 하나님이 이 능력 가지고 이 방법으로 원수를 발등상 삼고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켜 영원히 왕 노릇하실 역사를 찬양함이다.


18절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시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로소이다 하더라

본절은 천년왕국 끝에 곡과 마곡(계 20:7-9)의 멸망으로부터 공심판과 천국 시상식과 악마의 2차멸망 유황불못에 던지는 말씀까지를 기록한 말씀이다.

1.'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임하여라 함은 천년왕국 끝에 무저갱에 갇혔던 사탄이 옥에서 놓여 백성들을 유혹시켜 성도의 진을 둘러 분노하여 싸우려 하매 주께서 진노하사 하늘로서 불을 내려 그들을 마지막으로 소멸하시는 것을 가리켜 '주의 진노가 임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지상 번식인종으로는 절정을 지우는 멸망이다. 천년왕국에 번식인종으로 있던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구원 얻은 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도는 첫째 부활로 참여한 자들이니 천사와 방불한 것인데도 미가엘 천사와 싸우는 격으로 해하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다가 멸망받는 것이다.

2.'죽은 자를 심판하시매'
이 죽은 자라 함은 엡2:1과 같은 영적 죽은 자가 아니요 영육이 분리되어 죽은 것을 말함이니 이는 천년왕국 후 불신자 전부가 부활하여 공심판 받는 것이다. 계20:11-13까지에 있는 심판과 같은 심판이다. 여기에서 심판받는 자마다 유황불못에 영원히 던지우는 것이다. 마지막 대환난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 배도자의 이 멸망의 심판을 보이면서 환난의 인내로 승리하여야 할 것을 예고함이다.

3.'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며'
상은 다 같은 기독자들을 세 부분으로 구별하여 시상함이 보인다. 이는 분명히 보상이 있되 직책과 행함에 따라 각이함을 보이는 것이다.

4.'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일반 성도에게 보상이 있고 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그 위에 거룩한 생활을 가진 특수 생활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성도를 겸한 자에게는 첨가된다. 또 그 이상 선지자의 직책을 감당한 자 곧 절대 복종으로 증거자에게 또 구별된 상이 첨가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순서로 보아 종 선지자의 상이 제일 큼이 보여진다. 기독자의 선지자 직은 참된 종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고 또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한 자라면 참된 종도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은 선지자역에는 반드시 환난이 함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선지는 미래사를 예언하는 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 구속 의지를 인간에게 증거하는 것이 선지인 것이다. 이 도를 전하면 반드시 환난이 따르나니 선지의 입장에 선 자마다 보내신 이의 능력이 크심을 의지하고 또 앞에 있는 보상을 담대하고 충성하여야 한다.

5.'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이는 적기독을 가리킴이니 사탄과 그의 이용물이 된 모든 기관과 그 세력들이 지상에서 영원히 전멸할 것을 가리킴이다. 이것도 박해받는 성도들이 그들의 세력과 영광을 볼 때 두려워하거나 부러워한다는 것보다 조롱받는 기독교이나 이 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이 다 멸망받을 때가 불원에 있는 것을 보면서 그 신세를 가련하게 보고 담대하여야 할 것을 예고하는 계시이다.


19절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19절은 상반절과 하반절이 각이한 사건이다. 상반절은 천계에 선민들과 맺어진 각양 영광의 계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성도들에게 보인다. 그리고 하반절에는 그 계약이 성립되며 그 계약의 영광의 구속을 받을 준비하는 땅 위에는 어떻게 이루어질 엄위한 일들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도 말세 대환난에 있는 환난을 한 눈으로 같이 보아 인내로 승리하라는 것을 권고하는 계시이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함은 위치적으로 모세로 지은 성전과 예루살렘 성전과 구별하여 하늘에 있는 것을 말함이니 이는 그 언약의 권위성을 더욱 밝히 나타냄이다. 언약궤가 특히 보임은 선민들과 신구약으로 계약한 그 계약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으니 그 계약대로의 보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이면서 성도의 지상 생활을 하게 하려 함이요 계약 수행의 복된 생활은 또 얼마나 고난이 많을 것을 보이기 위하여 하반절에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또 번개와' 이는 성신의 은혜를 가리킴이요
'음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킴이요
'뇌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킴이요
'지진과 우박'은 땅 위의 죄악을 소멸하는 각양 환난들을 상징함이다.

그러므로 19절 하반절을 말세에 지상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대환난으로만 가득한 것같이 보여지나 그 이면에 하나님의 자비와 성신의 역사가 선민들에게 함께 하시는 것을 또 보여 위로하면서 굳게 서도록 권면하는 계시이다. 그러므로 말세 대환난 중 성도들은 천국의 영광의 계약과 지상 환난을 같이 보면서 보이는 환난은 한없는 영광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다. 또 환난에서 사람이 보지 못하는 주님의 자비와 성신의 은총 속에서 피난하여 그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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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문 : 11:1-19
제목 : 진리 증거의 박해

서론
본장은 증거와 증거자의 권능 얻는 순서와 최후의 승리와 영광을 계시한 것이다.

본론
1.복음의 승리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을 전하는 것이니
①진노를 전하여 멸망을 이루는 것과
②복음을 전하여 흥왕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진리를 증거함이니 세상을 주관하여 왕 노릇 하려 함이 아니고 책망하여 회개를 일으켜 바로 하는 운동이다. 진리인 기독교는 세상과 땅의 것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또는 그 중에 제일 강한 것이나 이상적의 것도 아니다. 별계 하늘의 것으로 하늘에서 온 것이니 세상에 있어서는 대적이 될 것뿐이고 그것들의 왕이 되지를 못한다. 예수님은 억지로 왕을 삼으려 하였으나 당신 나라가 아니시기 때문에 피하셨고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요18:36), 또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면서 세상에서는 수난하여 죽기까지 하셨다. 그렇다고 하여 진리가 패전하거나 망하거나 하는 약한 것은 아니다. 우주와 세계 각 존재들의 최후적이며 최고적인 절정기, 곧 진리 운동의 절정에는 진리의 왕권이 발동되고 모든 존재는 그 발등상으로 되는 것이다.

2.복음 전도는 핍박을 받는 일
사상과 행위와 속성이 예수님과 일체된 관계에서 만나지는 고난이다(요15:18-19).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하신 그대로 승리도 주와 일체 되나니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교회사는 고난과 이적의 승리로만 구성된 것이 특색이다.

주님의 십자가 이후 사도들의 순교가 있었고 그 뒤에는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대핍박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짐승의 가죽을 입혀 사나운 개에게 물려 죽게도 하고 화형으로 등불을 대신하게도 하고 맹수로 싸움도 시켜 죽이고 십자가에도 많이 달아 죽이고 그 후 황제는 자살하였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와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핍박은 안 했으나 그 나라 백성들이 핍박하는 것을 방관하였는데 이때에 폴리갑은 순교하였다. 관원들이 네가 예수를 부인하면 석방하겠다 할 때에 그는 내가 86년간 섬겨오는 중 한 번도 해끼치신 일은 없으셨던 그를 배반하리요 하고 순교하였다. 데기우스 황제(주후 200년경)는 신자는 종자를 없이 하려고 로마 신에게 향을 피우라 하여 불응자는 다 죽였다. 다오 클네산 황제 때에는 모든 직원들과 교인들을 구금하고 성경을 모아 불살랐다. 그때 한 감독은 내 몸을 불사르게 주었으면 주었지 성경은 못 준다고 하였고 한 집사는 내 자녀를 불사르게 줄지언정 성경은 못 준다 함으로 그 부부를 불살랐다.
1, 2, 3세기에는 이렇게 정권자들이 신자를 잡아 죽였으나 그 후부터는 소위 교회가 참된 교인들을 잡아 죽였다. 4세기 암브로스는 그를 책벌하였다. 완고한 황제는 8개월간 궁중에서 근신하며 통회하였고 별세하였을 때에는 암브로스 팔에 안기어 세상을 떠났다. 암브로스는 이태리 밀란 지방의 사역자로 그와 그 제자들은 진리 파수에 전력하며 교권주의로 흐르는 로마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로마 법왕의 명령이 밀란 교구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밀란 교구는 11세기(1059년 법왕 니콜라스 2세)에 이르기까지 법왕 정치하에 들지 않고 독립하여 있었던 프로테스탄트 교구이었다. 암브로스는 23년간 밀란의 감독으로 지내면서 성경을 유일의 신앙 규준으로 믿었다. 그 후 루피어스 타우렌시우스, 만수에투스 콜나우디우스 등이 암브로스를 계대하여 진리 투쟁을 계속하였다. 암브로스파 교회는 옛날 교부들의 법에 의하여 신앙 자유를 가졌고 로마교 교권에 복속하지 않았으며 로마 황제의 세력이 거기는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암브로스파는 순교의 정신으로 진리를 파수하여 싸웠다.

왈도파는 암브로스파가 11세기에 해산된 후 남은 신자들이 알프스 아래 근거를 두고 장구한 동안 로마 교권을 대항하고 프로테스탄트적 신앙 진리를 파수하였다. 그들은 알프스 산맥에 있는 카스델루츠 산곡에 거주하였다. 그 골짜기는 일곱으로 된 아름답고 비옥한 지방이다. 그들은 거기 신학교를 두었고 총회 조직이 있었는데 150여명 목사와 동수의 평신도가 있었고 선교사를 양성하여 비단과 보석 등을 파는 행상으로 구라파 서부 남부에 있는 각국과 서반아,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각지에 다니면서 로마 교권을 저항하면서 전도하였으니 집집마다 순교의 각오가 아니면 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왈도파가 서부 교회(로마지방)의 부패에 대항한 것과 같이 바울파는 동방 교회의 부패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파는 콘스탄틴이라는 아데니아 사람으로 말미암아 생겼다. 그가 자기집에 유한 어떤 손님께서 신약책 한권을 얻어 그것을 읽고 헬라 교회의 잘못을 깨닫고 그 교회에서 떠나 7년간 일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이상한 것은 그를 죽인 지방의 감독으로 있던 시메온이 그의 순교하는 광경을 보고 로마교에서 나와 그보다 더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신앙 사상의 지도자가 된 사실이다. 시메온도 후에 순교하였다. 역사가 기본(Gibbon)에 의하면 후에 10만여 바울파 사람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구라파 각국에 헤어졌다고 한다.
그들의 근거지는 씨와산맥과 트리비존드산맥에 있었다. 알비겐스파도 프로테스탄트적인 듯 한데 남쪽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이 파도 많은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학살당하였으니 베지엘이란 도시는 전멸을 당하였다. 거기서 비참하게 죽은 교인이 6만 명이라고 한다. 그때 로마교는 종교재판을 설치하였는데 소위 인퀴지션(Inquisit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조직적으로 딴 파 사람들을 재판하여 살해하는 재판 기관이었다. 이런 재판 제도의 설립에 노력한 사람 중 하나는 성 도미니쿠스라고 전해 온다. 그는 도미니교단 설립자인데 진리 투쟁과 순교를 기피하고 교권과 타협하였다. 당시 성 프란시스도 교권으로 부패한 로마 교권를 싫어하였으나 순교적인 진리 투쟁은 아니하고 은둔주의적인 신앙이었지 순교적인 신앙은 아니었다. 1540년부터 30년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순교한 사람의 수만 해도 90만 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종교 재판에 걸려서 순교한 특별한 성도의 행적을 다음에서 볼 수 있다.

1)올네안의 스데반과 레소예 양인은 로마교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경대로 복음을 가르침으로 감독회 앞에 잡혀 가서 사형받을 위협을 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진리를 증거하고 화형으로 순교하는데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고 한다.

2)네델란드의 개혁순교자들
①요한 바켈은 화형장으로 나가는 도중에 동지들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순교의 문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당신들은 내 뒤를 이어 불의를 거슬려 복음 진리를 파수할지어다' 라고 하니 모든 동지들이 듣고 박수하고 찬송하였다.
②로버트 오기어는 그의 처와 맏아들이 함께 사형을 받을 때에 그의 맏아들은 말하되 '보시오! 아버지, 하늘이 열리고 천천만 천사들이 우리를 향하여 기뻐하나이다. 우리도 기뻐합시다.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죽나이다' 라고 하였다.
③요한 코넬니오 윈텔은 참형을 당하기 전에 형장에서 최후까지 찬송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세' 라는 제목으로 된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모든 순교자들이 하나님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라고 하자 참수되어 별세하였다.
④퀴도디부리는 교수대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 동지 신앙자들에게 진리를 굳게 지키라고 하였다.
⑤리촤드 월님손은 주님을 향하여 핍박을 받아 얼음 가운데 피하였다가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구원하였다.

3)보헤미야의 순교자들
①나콜나스불제테날즈는 기쁨으로 화형대에 서서 신앙 고백문을 여러번 읽고 최후 기도로 주님 앞에 사죄를 구하였다.
②토기장 한 사람은 화형장에서 순교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결혼식 때 가졌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가졌다고 하였다. 술릭은 개혁교 믿다가 교권자들에게 잡혀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할 때에 그는 말하기를 무덤을 잃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4)영국의 순교자들
①로젤스는 잡혀 스미드필드에 갈 때에 젖먹이는 자기 부인과 열 명의 자녀들이 기다리고 섰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개혁 신앙을 취소하면 놓겠다고 할 때 가족을 한번 돌아보고 그들을 향하여 내가 전도한 것을 피로서 인치라고 하였다.
②리들레는 그의 신앙을 위하여 화형을 받는 전날 밤에 그의 동생이 위안차로 그 밤을 같이 지내겠다고 함에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조용히 홀로 평안히 쉬겠다고 말했다.
③라티멀은 리들레와 같이 화형을 당하면서 한 말이 '안심하시오, 리들레씨. 남자답게 행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끌 수 없는 촛불을 영국에 켭니다' 라고 하였다.
④크란밀은 한번 종교재판에 걸렸을 때에 교활한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만 개혁주의의 신앙사상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그후 회개하고 열심으로 개혁 신앙을 증거하다가 다시 붙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가 감심(感心)으로 화형을 받으면서 최후까지 신앙 취소에 집필한 자기 오른손을 불에 내대고 뻗치고 '이 무가치한 손아' 라고 거듭 거듭 말하면서 손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⑤사무엘 루터포드는 스캇틀렌드 장자교회 목사로 그가 잡혀 옥에 있을 때에 전기를 많이 썼는데 그는 그 옥은 그리스도의 왕국이라 하면서 하는 말이 '내가 만일 하늘과 땅 같은 넓은 종이와 바닷물 같은 잉크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써서 보내었으면'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나의 검은 입술에 키스하기를 좋아하신다' 라고 하였다. 순교사를 보면 순교자들이 화형을 받는 중에 기뻐하며 찬송하였다. 그들이 너무 소리내어 찬송하니 원수들이 그들의 혀를 갈구리에 꿰매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빼고 다시 찬송하였던 사실도 있다. (설교 2대지는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거반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3.순교적 신앙에 나아가는 그 순서와 단계는 기존된 내주적 은혜로 네 가지 생활하면 권세 주어 기존 은혜로 감당할 수 없는 특수적인 권위 역사를 아홉 가지 시행 후 순교하게 된다. 그 순서들은 다음과 같다.

1)성전생활
2)제단생활
3)경배생활
4)증인생활
5)권세 얻고
6)굵은 베옷 입고
7)1,260일 예언하고
8)두 감람나무
9)두 촛대
10)입에서 불 나오고 원수 소멸하고
11)하늘 닫아 비오지 못하게 하고
12)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13)원대로 재앙으로 땅을 치고
14)증거 마치고 순교함.

해석
11장 18절을 보면 시상의 순서가
1.종 선지
2.성도
3.주 경외자들이라고 하였다.

종 선지 = 정사 권세 주관자 마귀
성도 = 사생활 도덕행위
주 경외자 = 회개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