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주해 제6권

2007.06.03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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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 주해 제6권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30
게시일 : 2001/12/30 (일) PM 04:58:05  (수정 2006/02/19 (일) PM 09:36:17)    조회 : 118  

계시록 주해 제 6권 - 백영희목사님

교회 수난과 완성과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까지를 총론적으로 원리를 말함이니 기간은 신구약을 망라함. 12장에서 13장까지

제 12장
본장은 구약 초기로부터 신약 끝이 되는 말세까지의 교회 수난의 이유와 박해자의 배경에 대하여 증거한 것이니 신약시대의 어느 시기에 국한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해석

1절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이적이란 말은 '세마이온'이니 표적을 의미하는 바 어떤 사리를 가르치는 상징이란 말과 유사하다. 특히 큰 이적이라고 명시한 것은 여기에 상징으로 계시된 사건은 기독교에 있어 심히 중대한 일인 것을 인식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여인과 여인이 낳은 남자와 용과 광야 피난과 결사적인 투쟁에 대한 일들이다.

2.'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여기에 해와 달은 창조의 능력과 피창조의 것을 상징함이다. 달은 그 실체가 있는 것이나 지상에 있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그 실체가 아니고 태양 빛이 그에게 반사될 때 그 달 자체는 반사되는 태양의 빛만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달은 보지 못하고 태양이 반사하는 그 빛만 보게 되는 고로 인간에게 보여지는 달은 달 자체가 아니요 태양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보여지는 모든 피조물은 자존의 것이 아니고 모두가 창조주로 말미암아 피창조되어 그 창조주와 그 창조의 능력을 인간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해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섭리로 창조하셨으니 이것을 가리키고, 달은 천상 천하에 모든 피조물을 총칭적으로 상징함이다. 여인이 해를 입었다 함은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섭리를 입었다는 말이니 의복은 특히 호신과 영광을 상징한 것이며 하나님의 총 지혜와 능력과 섭리는 곧 지상교회, 곧 택자만을 보호하시고 그에게만 영광이 되어지고 모든 피조물은 교회의 발등상이 되어지는 그 교회의 영원한 지위를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고전3:21-23 참고).
그러므로 하늘의 천군 천사도 지위적으로 교회의 수하가 될 뿐 아니라 땅 위에 있는 세상과 세상의 모든 존귀하고 권세 있게 보이는 그것들이 박해받는 교회의 발등상이 될 때 즉, 최후 공심판 후에는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하늘 법칙의 표준으로 보면 현재도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은 교회의 발아래 있는 것을 보이는 계시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은총 곧 사랑을 독점하였고 만물에게 대한 제일 존귀한 지위를 점령한 교회의 영광이 어떠한 것을 보여 환난을 감수하여야 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다(엡1:22-23 참고).
창조의 능력과 피조물을 일월(日月)로 상징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으로도 상징할 수 있는데 특히 일월로 상징한 것은 어두움을 이기는 빛 중에도 제일 큰 빛은 태양이니 이와 같이 암흑 같은 죄악을 멸하는 능력 중에 제일 큰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그 능력과 하나님의 그 완전한 거룩과 성결과 능력들이 택자를 보호하시는 것을 가리킴이니 악마의 세력에 대하여 더욱 담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3.'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얻어지는 승리를 총칭함이다. 그 수는 열 둘로만 한계 할 수 없는 것이다. '12' 수는 교회의 구원 수이기 때문에 12로 말한 것이다. 그 뜻은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여 주시는 모든 것을 가리켜 12면류관이라고 한 것이다. 대략 그 종류를 기록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신자의 면류관  승리한 의  마귀를 이김  사망을 이김  지옥을 이기고 천국을 얻음  산 기업  부활  영생  영광 ⑩제사장 ⑪찬양대 ⑫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권
이외에도 많이 있다.

4.본장 1절에 교회가 해를 입고 달을 발아래 두고 12면류관을 쓴 일은 엡1:19에 바울이 성도에게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그 능력의 역사가 어떠하심을 성도들에게 알게 하여 주심을 기록하였던 것이다. 또 골1:26-27에 만세와 만대 전부터 감추어 있던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한 그것이다. 이것은 전혀 성도 자기 것이 아니고 2-5절까지에 나타난 여인이 낳은 남자를 여인을 핍박받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진 구원이다. 이 사실을 다음에 기록된 환난 앞에 먼저 기록한 이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각양 환난 받는 교회는 그 환난을 받는 이유가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과 피조물의 최고의 지위와 최고의 기도를 교회가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이를 간직할 만한 양육을 받는 각양의 애로와 시기하는 사탄으로 말미암는 환난과 모든 대적을 싸워 이겨야 하기 때문인 것을 예고하여 소망 중에 인내로 승리하여야 할 것을 사전에 보이는 것이다.


2절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1.'이 여자'
지상 유형적 교회와 무형적 교회를 상징함이니 남아를 밴 여인은 구약에 속한 교회를 가리킴이고 남아를 해산한 여자는 신약시대 교회를 가리킴이다. 이 교회는 신자의 집단만을 총칭함이 아니고 그 요소는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과 구원 성취의 섭리와 구속받은 피소(被召) 성도들을 총합하였다.이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신자 생산인 구원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마25:1 이하에는 교회를 처녀로 상징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임을 가리킴이다.

2.'아이를 배어'
여기 아이를 밴 것은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다. 이유는 '해산한다'는 동사 테카인이 과거사인 까닭이다. 헬라어에서 과거사는 단번(單番)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 이 문법은 확실히 단위의 사건인 예수님의 탄생을 의미한다.

3.'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그리스도를 탄생하기 위해 수난을 많이 한 것을 의미함이다. 이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수난만을 말함이 아니고 창3:15에 여인의 후손이라고 허락하신 그리스도를 탄생하는 시기까지는 4천 년 가량이나 되는 긴 일상 동안 약속 받은 구원의 도리를 보수하는 데에는 시작인 아벨부터 순교로 시작하여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순교까지 순교로 계속하였고 에녹의 고독으로 노아와 계대한 모든 선지자들의 각양 환난과 궁핍과 고형으로 이 약속을 전하여 온 것을 가리켜 말한다.


3절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1.'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이적이라 말은 세마이온이니 표적을 의미하는 바 어떤 사리를 가르치는 상징이란 말과 같다. 하늘에 다른 또 한 사건이 전개되었다는 말이다.

2.'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보라고 하는 어귀가 특히 머리에 있다. 이는 특수한 경고와 주의를 주는 것이니 '붉은' 곧, 사탄의 하는 일과 그 사탄을 언제나 성도들은 주시하고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자기에게 대한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선후 구별도 하지 못할 만큼 같이 자람과 같이 사탄과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관계도 선후를 말하지 못할 만큼 같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안 것만큼 자기를 알고 자기를 안 것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이 악마의 그 행위를 알고 그가 자기에게 향하는 것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며 또 믿고 의지하고 당신의 구원을 간구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윗은 시3:6에 원수가 천만인이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벧전5:8에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였고, 바울은 엡6:11에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다. 이는 다 사탄을 주시하는 눈이 밝은 결과이다. 그 놈을 보는 자마다 한 순간이라고 깨어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 안에 피난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보라'는 날이 특히 놓여 있다.

'한 큰 붉은 용'이 있다고 한 것은 사탄이 하나뿐이라는 말이 아니다. 계12:9에도 사탄의 사자들도 하는 말이 있고 또 7절에도 용과 그 사자들이 미가엘과 싸웠다고 하는 말이 있고 막5:13-15에는 한 사람에게 군대마귀가 들었는데 2천 마리 돼지에게 각각 들어갔으니 그 수가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천하에 귀신들린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또 전혀 마귀 노름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로 보건대 사탄의 수는 그 수가 많은데도 한 붉은 용이라고 함은 마귀의 대장 큰 마귀를 가리킴보다 성도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는 마귀의 단결력이 하나와 같은 것을 특히 의미한다(인본의 신자와 불택자도 하나-계17:14).

'큰 붉은 용'이라고 한 것은 그의 강한 세력과 노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미혹하는 일에 있어서는 뱀(계12:15)이라고 하였으니 여기 큰 용이라고 말한다. '붉'다 함은 피 빛이니 살인과 멸망을 표시하는 흉색이다. 곧 파괴와 살륙과 전쟁과 악화(惡化)등의 핍박성을 가진 사탄을 상징함이다.

3.'머리가 일곱이요'
이는 사탄의 지혜 곧 세상 국가들 모든 정치들의 모든 정치 사상과 정치 지혜들이다. 그러므로 천국 건설인 복음운동 외에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정치들의 머리는 사탄이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요14:30에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니라 그러나 저는 내게 상관이 없으니' 라고 하셨다. 이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다고 함은 사탄의 그 지혜와 정치로 지상 모든 국가를 총 관할하고 있는 것과 참람한 사상과 이름과 행위를 가진 것을 말하고, 7수는 하나님의 수인데 일곱 머리인 7수를 가졌다 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될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해독만 끼치는 자가 인생과 만물을 위하여 은혜 베푸신 모든 창조와 섭리의 역사를 제가 한 것같이 발표하고 제가 하나님이라 하여 영광을 가로채는 사탄의 본성을 상징함이다.

4.'뿔이 열이라'
뿔은 힘을 상징한 것인데 열이라고 하는 그 수는 인간의 만수요 곧 지상과 세상의 만수이다. 그러므로 열 뿔이라 함은 인간과 세상과 땅의 것으로는 그 이상 더 있을 수 없는 최고절정의 힘을 가리켜 상징한 것이다. 예를 들면 과학의 힘, 이종교들의 힘, 각 사상들의 힘, 각 무력들의 힘, 인본들의 도덕, 예의, 유전, 풍습, 각양 오락, 각양 죄악들의 힘을 가리킴인데 10수를 붙인 것은 이것들의 최고 발달의 강력을 가리켰다. 10뿔이 용 한 마리의 몸에 붙어 연합되어 하나된 것은 위에 열거한 모든 것들의 세력은 그 배경이 사탄인 것과 총 발원처가 사탄인 것과 그들을 이용하는 자도 사탄이요, 그들의 총 목적은 지상교회를 대적하는 적기독인 것을 상징함이다.
이러므로 성도들에게 적이 없는 시간은 주야간에 순간도 없는 줄 알아야 된다. 또 벧전1:5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신 그대로 부절(不絶)히 하나님과 연결하여 그 음성을 들으며 보여 주심을 받으며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탄의 하는 일 곧 세상 전부가 나의 대적됨을 보고 낙망할 필요는 없다. 천래(天來)의 지혜와 능력은 사탄보다 무한히 초월하셔서 그 말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사탄 이 하는 모든 일이 합하여 성도에게 유익이 되어지도록 이용을 하시는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는 사탄은 하나님에게 이용되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 붉은 용도 뱀도 사탄도 마귀도 귀신도 하나일 뿐만 아니라 일곱 머리도 열 뿔도 외부에는 각각이나 그 근거는 용 한 마리에게 속한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공사간의 모든 정치와 그 지혜와 모든 세력 곧 힘은 다 사탄에게 근거한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천국 운동과 세상 운동 둘뿐이니 천국 운동이 아닌 것은 다 한 세속의 것으로 천국의 적인 줄 알고 취급하여야 한다.


4절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 서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1.'그 꼬리'
이는 붉은 용의 꼬리이니 유혹하는 거짓말을 상징함이다. 뱀의 꼬리는 1분간에 수백 번 진동을 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사탄은 살기를 품은 것을 가리켜서 붉다는 것을 붙이지 아니하고 그 꼬리라고만 하였으니 사탄이 지상에 모든 권세를 가지고 살해 운동을 하면서 민활한 유혹과 무력인 강압을 겸하여 가지는 것이다. 꼬리란 말이 계9:19에도 전쟁의 외부 무력은 사자로도 비하였고 그 이면 성도를 해하는 유혹은 꼬리라 하여 그 꼬리에 힘이 있다고 하였다. 뱀은 꼬리 진동이 빠른 것같이 사탄의 역사는 진실이 없는 말과 책임지지 아니하는 말도 얼마든지 변동을 시켜 사람들과 천사들을 유혹케 하는 것을 상징함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측량하고 신앙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 단일로 보는 신앙의 눈으로 감시할 때에 그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신앙과 진실이 없는 자를 유혹하려 함이 악령의 역사이다. 성도도 뱀의 꼬리같이 변동 많은 일들은 다 한 사탄에게 소속된 일들이다. 이는 거듭거듭 회개하는 일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2.'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하늘 별은 여러가지로 해석한다. 하늘의 천사라고 하는 해석도 있고 또 타락한 교역자라고 하는 이도 있다. 이 두 해석은 취할 만한 옳은 점이 각각 하나씩 있다. 본절의 별은 천사만도 교역자만도 아니요 둘 다 포함한 상징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를 저 사탄이 유혹하여 범죄케 하여 타락시켰고(벧후2:4, 유6), 이 범죄한 천사들은 지상에 있는 소위 하나님의 교회에 세움을 입은 교역자를 유혹시켜 각양 이단설을 만들어 기독교 사회주의, 정치주의, 도덕주의, 유물주의의 자유신학으로 철학화, 세상화, 육신화시키는 인본주의를 만드는 일들이다.
히6:4-8에 기록된 대로 이런 자들은 택한 자 중에서도 한동안 같은 유혹을 받을 수 있으나 대개는 불택자로 처음부터 사탄의 것으로 된 것들이다. 혹이 이 해석을 한 성구에 천사와 교역자의 두 뜻이 내포될 수 있느냐고 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인이 낳은 자손은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가 되는 사역도 지위와 목적도 하나이다.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것이니 타락한 천사들이 타락한 교역자 속에 거주하여 일하고 있다. 하늘은 그들의 처음 지위와 명칭을 말하고, 땅은 타락한 후의 위치와 사역을 말하고, 끌어다가 던지는 것은 유혹하여 타락시킨 것을 말한다. 특히 3분의 1이라 한 것은
①타락지 아니한 하나님의 것이 많다는 것과 승리함이요
②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면 그놈에게 유혹받을 만한 존재인 것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한계 내에서만 마귀가 유혹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는 것을 보임이요
③하나님은 건설자시며 환난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하는 것이다.

3.'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 서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니 곧 창3:15에 기록한 뱀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고 여인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리라고 한 그대로의 싸움이니 곧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이다. '해산하기 전에 기다리고 있더라' 함은 그리스도의 탄생 전 구약시대의 성도의 모든 박해도 이놈에게 당한 것이다. 아이를 삼키려고 함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삼키고자 함이 아니고 이 구속의 역사를 실패케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도를 전하기 전 강보에 쌓였을 때에
①육신을 죽이려고 꾀하였으나(마2:16), 마3:13-17에 계시된 대로 택자의 죄를 법적으로 대신 담당하여 세례를 받으시고 성부와 성신과 성자 자신과 선지의 대표인 세례 요한이 만인간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곧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증거하시고 선포하신 후에는 벌써 도가 전파되었다. 제단 위에 제물로 놓여지신 이후 이미 육신은 죽일수록 구속만 완성되고 실패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마4:3, 6, 9에 기록된 그대로 하려고 하였다.
②그후 마16:22에도 베드로를 통하여 유혹하려고 하였고 빌라도가 여러번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한 것과 요19:10에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자기에게 주권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는 뜻으로 말하면서 빌라도에게 동정을 입으려는 아첨하는 말을 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③마27:41-44에 참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구원하시리라고 하는 말들은 예수님을 동정하는 빌라도나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찾으려고 하는 제사장과 서기관같이 보여졌으나 그들도 알지 못하는 그 이면에서 역사하는 마귀는 최후까지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허락이나 뜻이 아닌 한 가지의 언행심사의 범죄라도 하게 하여
④그리스도의 직을 실패케 하려고 십자가에 달아 최후까지 유혹과 폭력을 쓰다가 죽기까지 순종하여 속하지 아니하시고 별세하셨을 때에 그들은 더 유혹할 수 없게 되었는 고로 마귀는 완전 실패, 그리스도는 완전 승리가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의 육체를 죽이는 것이 저희의 목적도 아니요 지혜도 아니었는데 그 놈의 어리석음과 그 본 성격이 그대로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여 도리어 완전 실패를 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그놈 하는 일은 이러하다. 성도에게 영적 전쟁이 혈육전으로 화하고 선의 싸움이 악으로 화하여지는 것은 그놈에게 물들었던 우리 속의 부패성이 하는 일이니 그놈의 방법이요 그놈의 일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믿기 전에는 믿지 못하게 노력하고 믿은 후에는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노력한다. 성도의 승리는 살아 있으면서는 언제나 미결에 있는 것이요 완전승리는 싸우다가 죽는 것, 죽어 충성함에서 완성된다.



5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요 남자라는 말은 유력하다는 뜻이다.

2.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린다' 함은 마28:18에 기록한 대로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아버지께 받아 그 권세로 엡1:10에 기록한 대로 모든 피조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는 일을 가리켜 말함이다. 이 권세를 장차 받을 것이라고 미래의 것으로 기록한 것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설정으로 성립되고 그 완성은 천년왕국 후 공심판 후에 완성이 되어 영속하는 것이다.

3.'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라간'
올라간 것은 부활 승천을 가리킴인데 완전 승리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이라고 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이니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신 신인양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리킴이다.


6절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광야로 도망하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한 것은 신약시대의 교회가 처세할 세상 입장과 형편을 말함이다. 광야는 육신으로 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가기까지 광야에서 단련 받아 예비기간과 같이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낙원에 가기 전까지 성화 받는 처세 형편을 가리켜 말함이다.

'광야'라 함은
①자연적 소용물이 없는 곳, 육적으로는 자아에게 무익하고 주와 영과 이웃에게만 유익한 입장
②쓸쓸한 곳 멸시 천대 손실 억울 병 실패 낮아지는 입장
③고독 배척, 산(山), 옥(獄), 납치, 독야(獨夜), 집중사격
④무의(無衣), 무탁(無托), 물(物), 권, 인(人), 명(名), 지(智), 이런 것들을 의지할 수 없는 입장. 이런 광야로 끌려감이 아니고 용을 피하여 도망하게 되는 것은 사탄의 해 곧, 범죄 생활을 아니하려고 하면 자연히 이 광야 같은 생활을 만나게 되어지는 것을 가르침이다.

2.'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
예비한 곳이 있었으니 육적으로는 이 광야 생활이 심히 불행 같으나 천국 시민은 여기서 연단과 성장을 얻게 된다.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자연법으로서는 양육 받을 수 없는 광야에서 초자연법의 은총으로 40년간 생활하는 데에서 하나님과 그 권능의 보호와 약속의 그 신실을 깊이 인식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신약시대 교회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면 자연법으로 살 수 있는 애굽 같은 세상을 자연히 떠나게 되고 광야 같은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초자연의 은총과 거기 대한 확신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계명은 광야 같은 세상으로만 이끄는 도리로만 되어있다. 이는 고행주의로 이러한 것이 아니고 신본과 인본의 의와 벌의 성격이 다른 것과 같이 도(道) 자체의 그 원리가 그러하고 다음은 연단 받기 위하여 환경이 그와 같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성도의 가질 주의는 자연의 처세술로 생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순종하려고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런 것은 아예 파기하고 초자연의 섭리가 아니면 처세할 수 없는 그 길이 성도의 양육받을 천로(天路)인줄 알고 초자연의 섭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식명(衣食命)은 주께 주권되어 있음을 견고히 잡고 요동치 않아야 한다.

'광야' 그 곳이 우리들의 영을 양육하기 위하여 예비하신 곳이니 그 양육에 대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또 하나님이 책임지신 것이니 사탄이 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는 그 양육에 가장 적절하도록 적용하나니 두려움도 염려도 가질 필요는 없고 광야를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그 명령에 항상 순종하여 항상 광야에서만 양육을 받을 것뿐이다.
'일천 이백 육십 일'은 3년 반이나 세 때 반이란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인데 여기 1260일은 신약시대를 7년으로 상징하여 계12:6에는 전반을 말하고 14절은 후반기를 가리킴이니 계11:3, 11에 나타낸 기간과 같은 것이다. 이 광야는 억지로 감이 아니고 용에게 삼키지 아니하려는 자에게 피난 가는 생명 길이니 자원하여 달려야 하는 길이다.


7-9절 하늘의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하늘에서 미가엘과 용과 싸워 쫓겨난 것을 예수 승천 후 복음이 지상에서 승리하여 점점 전파됨으로 점령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쫓겨난 이후도 여인을 여전히 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계12:8을 보면 하늘에서는 있을 곳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하늘을 복음 점령 위치라고 본다면 복음을 받은 교회는 해하지 못하여야 한다. 그러나 끝날까지 교회 박해는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아 이 해석은 믿을 수 없다.

2.미가엘은 천사장이요(단10:13-21, 12:1) 그 사자들은 모든 천사들이요, 용은 마귀를 가리킴인데 그 명칭이 네 가지 있으니
①용이니 세상 권세를 가지고 역사하는 성질을 가리켰고  
②옛 뱀은 그 간교한 성질을 표시함이고
③마귀는 거짓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성질의 표시요
④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의 표시다. 그 사자들은 이것에게 소속된 부하들을 말함이니 이 사탄은 하나님에게 범죄한 천사인데 그가 많은 천사를 유혹시켜 범죄케 하여 저의 사자를 만든 것이다. 이놈은 범죄 이후 하나님 다음 지위를 가질 하나님의 후사인 성도를 참소하여 저가 그 지위를 점령하여 승격하려는 행위를 계속하였다. 이놈의 본성과 지혜와 방법은 언제나 월권하여 올라가려고 하다가 떨어져 지옥 제일 밑층까지 가는 것이다. 사람에게 스스로 높여 떨어지는 것도 마귀의 유혹이다.

3.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는 만물은 다 인간과 함께 저주 아래에서 머물렀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택자와 만물은 구속받아 마귀의 권세를 벗어나는 회복을 얻게 되고 마귀는 완전 패전 당하였다. 그러나 사탄은 그 본지위를 내어놓지 아니함으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미가엘을 통하여 사탄을 축출할 때에 그놈은 발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4천 년 가량 동안이나 거처를 하던 공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곳은 살전4:17에 기록된 대로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혼인예식을 할 곳이라고 생각된다. 내어쫓긴 곳은 9절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지상이다. 그러므로 말세가 되어 갈수록 마귀는 성도에게와 모든 사람에게 접근해 오고 그의 해독은 더욱 맹렬하여진다.


10-12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1.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 음성에 대하여 해석은 각이(各異)하다.
①스웨테는 24장로 중에 하나의 음성이라고 하고
②크레다너스는 천사들의 소리라고 하였고
③로마여는 순교자들이고 하였고
④혹은 이것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 분명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구속받은 성도의 대리자로 이 음성을 외친 것은 확실하다. 특별히 큰 '음성'이라고 한 음성은 자비의 권고의 성질을 가졌고, '크다' 함은 붉은 용이 공중에서 쫓겨난 것과 저희 때가 얼마 못된 줄 아는 고로 최후적인 발악을 할 것과 성도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짐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을 경고하는 중대한 사건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2.'이제'
이제라고 함은 이 구원 역사의 시작이 오래 전 곧 태초부터 시작된 것이나 완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사활로 말미암아 마귀의 머리가 상하리라고 하신 대로 대패전을 당하고 하늘에서 완전히 쫓겨나게 됨과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고 생명의 새 길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구약에 많은 성도들이 주께 대한 소망을 가졌으나 그 소망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사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라고 한 것이다(히11:30).

3.'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하나님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공로로 속죄하신 것과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구원이니 이것이 인간의 행위를 말미암지 않고 전적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가리켜 우리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한 것이다. 다음으로 능력과 나라에 대해서도 각각 우리 하나님의 것이라는 명사가 붙지 않았으나 초두에 우리 하나님의 것이라는 증거가 되었는 고로 다 각각 붙어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계7:10).

'능력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책임지시고 오신 성령의 능력을 의미하고(계4:11, 6:12)

'나라'는 보혈의 공로와 성령의 역사로 아버지의 예정하신 대로의 하늘나라가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고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이 말은 위에 구원과 능력과 나라가 이루어졌으니 이것들이 다 그리스도의 권세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 그리스도를 근거한 결과들인데 이중으로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같은 뜻을 중론한 것같이 보기 쉽다. 그러나 이는 다른 뜻을 하나 가지고 있다.
①하나님과 접촉이 그리스도와 마귀와 같이 되었던 것이 이제는 마귀는 그 접촉권이 아주 박탈되고 그리스도께서 독점하신 것을 의미하고
②마귀의 머리가 깨어져 전체적으로 완전승리를 하셨으니 잔존 패전병인 마귀는 있으나 벌써 택한 자의 심령의 왕권은 완전히 정복당한 것을 가리켜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심령 보좌라는 제일 좋은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점령하였으니 죄마는 우리 속에 왕 노릇하지를 못한다.
③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으니' 함은 10절 하반절과 11절에 이루어진 그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4.'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여기 대한 해석은 이 말을 하는 이와 또 참소하는 자가 누구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①스웨테는 이것을 24장로 중에 하나이라 하고
②크레다너스는 천사들이라고 하고
③로마여는 순교자들이라 하고
④구약시대 성도들이라고도 한다.
⑤24장로도 하늘에 실존한 것이면서 성도와 같은 구속의 의를 입은 자로(계4:4) 성도의 대표 혹은 대리 역사를 하는 때가 있었다. 계5:8, 4:24들을 보면 흰 옷 입은 것과 또 면류관을 발 앞에 던진 것과 또 계시록 5장에 각각 다 구속의 찬송을 했는데 특히 성도의 찬송은 없고 24장로가 대표로 찬송하는 것이 보여진다. 지상교회의 장로가 교회의 대표격도 되고 또 하나님의 대리자로 양을 기르기도 하였다(벧전5:1-5, 행20:1-35).

그러므로 성도의 대표로 장로가 말할 수도 있고 또 성도 중에 한 사람이 말할 수도 있다. 위에 해석들 중 ① ③ ④의 해석들은 이연하게 생각된다. 어쨌든 구속 받은 성도를 대표한 자인 것과 또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자이니 장로이나 성도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참소하던 자'는 사탄을 가리키는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택한 성도를 개인 개인을 들어 하나님에게 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근본과 중심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예택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서지 못하게 하려고 밤낮 참소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완전 승리하였고, 또 택자의 완전 칭의가 설정됨으로 저놈은 다시 그리스도의 왕국을 패하게 하려는 계획과 목적은 아주 실패되고 그리스도의 승리 (사탄과 교전 승리)로 천국에서 쫓겨난 것을 말한다. 이제는 하나님께 참소는 할 수 없게 되어 성도의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에 총 주력하였다.  

'우리'라는 복수를 형제와 하나님을 가르칠 때마다 사용된 점에 있어 우리는 주의를 가져야 한다. 이 어구에는 어떻게 사탄과 싸워야 할 전법과 완전승리의 법과 구원완성의 삼각적 절정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유의 경성치 않으면 착각되어 자멸하는 모순을 행하기 쉽다. 나에게 있는 사탄은 적으로 싸울 줄 아나 형제를 해하는 사탄은 적대치 않기 쉽고 나의 완승과 하나님의 기뻐 받으심에는 힘쓰고 원하면서 형제에 관하여는 무관심하기 쉽다. 오늘은 놀랄 만큼 이보다도 형제의 실패를 오히려 기대하고 있는 심정들도 가진 일들을 자타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다 모순된 행위이며 사탄의 유혹이다.

①택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우리들이 오매 전 인류에게 있는 사탄과 사탄의 행사인 모든 불의를 대적으로 삼아야 하고
②그리스도의 몸인 택소자의 전부가 완성하여야 하고
③또 구속받은 자 전부가 다 하나님 앞에 단합하여 기뻐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계7:11에 수가 차기를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느 사람이 택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총 마귀와 그들의 총 역사인 불의로 더불어 싸워야겠고 어디서 패전하였거나 내 패전으로 또 누구가 승리를 하였거나 내 승리로 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져야 마귀와 대립하는 그리스도 인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 구별을 하기 전에는 자가당착의 피해와 혼란을 일으키는 군병과 같아 유해무덕의 작당이니 그리스도의 적 아닌 적이요 사탄의 군병 아닌 역군이 되고 마는 것이다.  

5.본장 11절은 승리한 성도들의 그 원동력과 전술과 분투의 충을 가리킨 것이다.

'어린양의 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의 공로 설정의 보혈을 가리킴이니 택자의 범죄한 형벌을 대신 받고 대신 순종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은 양면 완전을 입혀 주는 공로이다.

'자기의 증거하는 말' 이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니 ①궁극적 은혜 계약과 ②생활 규범인 행위 계약들을 포함한 것이다.

'인하여'란 말은 원어로 디아(   )이니 여기서 적극 명사 앞에 놓인 고로 승리의 도구로서의 원인을 의미하지 않고 승리자로 여겨 주도록 한 (승리야 했건 안했건) 은공으로서의 원인을 가리킨다. 그들의 승리는 그들 자신이 잘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그들 자신이 잘했건 못했건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에게 그것을 은혜로 주었고 또 계약의 말씀이 그들을 승리자로 간주함을 인하여 승리된다.
그러므로 '인하여 저를 이겼으니'하는 이 승리는 전적 은혜로 된 승리요 사람의 행위는 추호도 들어있지 아니한 승리이니 곧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 완전 칭의이다. 구원은 이 의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이 의만이 완전 무결한 것이다. 만일 구원에 근거되는 이 의에 사람들의 행위가 호리라도 합하여 되었으면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완전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니 그 의 전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구원에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의와 인간이 행한 의를 합하여 된 것이라고 하는 설은 비 성경적이니 기독교 구원을 완전한 것으로 본다면 그 근거의 일부분이 되는 인간 행위에 완전한 것이 있다 함이다. 만일 인간 행위에 완전한 것이 없다고 (성경대로 말함) 보면 구원이 불완전한 것이 되어진다. 우리는 신인합의로 구원의 근거를 주장하는 것은 이단인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한 어구는 이 어구 머리에 '저를 이기었으니' 하는 그 이긴 이유를 말한 거와 같이 보기 쉽다. 그러나 위에 해석한 거와 같이 이긴 것은 전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이며 다만 이긴 자로 인증을 받은 것이다. 전적 은혜요 자기의 행위의 공로는 하나도 가담되지 아니한 것이다. 여기에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한 충성된 행위는 완전 승리인 칭의의 근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승리자의 의를 인증 받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충성된 생활 한 것이다.

그 충성의 근거는
①그리스도의 공로로 승리자의 입장에 섰고
②하나님의 특수 은혜로 연결되어
③받은 새 생명과 하나님의 은혜로 충성된 생활을 하게 됨이니 그 사랑에 감격함과 그 명령 순종과 하늘에 시상의 소망으로 할 뿐만 아니라 중생 된 자니 이제는 본능적으로 불의로 싸우는 일과 의를 행함에 있어 지사충성이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모든 승리생활은 칭의의 근거는 아니요 칭의 받은 자로서 시상 받을 행위이다. 이 행위조차도 독립적 승리가 아니고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한 승리이니 (계17:14, 14:1, 19:11,14) 이도 은밀한 의미에서는 전적 은혜이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 주의할 것은 은혜라 하여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일과 또 인간의 노력의 중대성을 인증하기 위하여 전적 은혜를 부인하는 주장들을 하기 쉽다. 이는 다 치우친 해석이다. 은혜로서만 지사충성의 뜻도 가질 수 있고 또 지사충성의 행위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은혜가 칭의 받은 중생자에게 임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속에 주입되나니 곧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 충성할 뜻과 힘이 자기 것 같이 여겨지게 되나니 (빌2:13) 이는 객관이 임하여 주관화 된 것이다. 곧 새생명의 사상이며 힘이니 중생한 자기의 것이다. 이를 행하면 중생자가 사는 것이요 일하는 것이요 이를 막으면 중생자가 내주한 육신의 사람에게 눌려서 자유행동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주 한 성령으로 중생 된 자아에게 임하는 은혜를 받아 감당하는 그 행위의 결과에는 육의 소유도 육의 소욕도 정도 생명도 다 투자되고 죽어 없어지는 일까지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손해보지 않고 남겨두고 중생 된 자의 생활을 하려함은 모순이다. 둘째 아담에 속한 자가 사는 것은 첫째 아담에 속한 자가 죽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세상도 몸도 몸에 생명들을 아끼지 아니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미워하여야 하고 (눅14:26,34 참조) 이런 것들을 생명에게 삼키는 양식이 되는 없어질 곳을 (고후5:4) 찾아 헤매는 자가 되어야 중생 된 자의 행위 승리를 하는 것을 보인다.

6.'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완전 승리로 사단이 송사 하던 자리에서 쫓겨난 일과 그 승리를 성도에게 입혀 주어 성도가 승리한 것과 또 죽기까지 충성 되이 싸웠음으로 하는 말이다.

'하늘과' 하늘에 거하는 자는 즐거워하라는 말이니 이는 구속받은 성도로서 이미 별세하여 천계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킴이다. 영광은 차이 있으나 택자이면 이 즐거움은 다 누릴 수 있는 것이다(엡2:6).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 이는 하늘에 거하는 자라는 말이 아니다. 별세하여 천계에 가서 있는 자도 아닌 재세의 성도이다. 또 땅과 바다로 상징한 세상에 거하는 자도 아니니 이는 세상에 있으나 11절에 말한 대로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거룩 높은 신앙세계에서 사는 고로 천국도 좋으려니와 재세의 십자가의 길도 주를 위함과 또 천국에 상을 쌓는 일이 되기 때문에 항상 기쁘게 사는 바울 같은 신앙가들이다(빌4:4).

'그러나' 이 말은 다 같은 택자로서 즐거움과 고통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특히 표시하는 말이니 보편 신앙 성도로는 땅에서는 고난의 화가 있으나 하늘에서는 기쁨뿐이니 땅보다 하늘이 좋은 것을 보이고 또 다 같은 세상에 생존 신앙 성도로서 생명을 아끼는 자는 고통과 화로 처세하게 되고 자기의 생명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충성된 성도들은 즐거운 천국으로 처세할 수 있는 차이점을 말한다(고전1:18).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자는 세상에서도 안위를 취하는 거보다 고난을 취하는 것이 더 평안하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욱 즐거운 것이다.

'땅과 바다는 화있을찐저' 이는 세상이 화 있다는 말이니 땅과 바다는 육지와 물을 가리킴이 아니고 수륙인 지구에 펴있는 인간적인 도덕 세계와 죄악 세계를 가르침이다. 곧 순생의 성도 외에 있는 신 불신자 전부를 가리킴이다. 순생적인 신앙을 가지지 못한 택자들도 고통을 당하고 불택자의 모든 생활도 다 고통이니 온 지구상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생적인 신앙 외에는 생존과 생활 전부가 고통 됨이니 그 이유를 다음에 말한다.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마귀의 때는 무저갱에 갇히기(계20:1-3)까지가 자기의 자유할 때이니 그 기간이 예수님 재림하시기까지이기 때문에 더욱 발악을 하는 것이다. 크게 분내는 이유는 패전보다 그리스도에게 패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대한 분이니 일반 사람에게 보다 택자에게 분함이 더욱 심하다. 그러므로 가면 갈수록 기독교의 박해는 심하나니 생명 기우려 주를 사랑하는 거기만이 성도의 지상안락지다.


13-14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이 구절들을 6절의 보충적 설명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같은 성질의 것은 되지만 한 사건은 두 번 말한 것은 아니다. 용으로 상징한 사탄과 여인으로 상징한 교회는 같은 것이지만 시기는 각각 다르다. 특히 이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6절에는 광야로 도망한다고 하였고 14절에는 날라 간다고 하였으니 6절은 신약시대의 전반을 가르치고 14절은 후반을 가르친다.  

2.'용이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용이 땅으로 내어쫓긴 것은 불신자가 신앙함으로 그 사람에게서 쫓겨 나온 것이다. 곧 복음운동이 되는데 따라 점점 그의 세력이 밀려감을 말함이 아니고 택자의 완전 칭의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 설정되기 전에는 택자들의 송사 할 수 있는 공중에 있다가 그리스도의 사활로 말미암아 다시는 송사 할 수 없도록 공중에서 쫓겨나 그의 총력이 지면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해하는 적 그리스도의 역사에만 주력하게 됨을 말한다.

3.'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 것은 약속한 메시야 탄생을 완전히 성취한 교회를 박해함이니 신약 시대의 후반기 곧 말세지말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이렇게 날아간 것에 대하여 그 여자라는 말과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았다는 것과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갔다는 말에 대하여 우리는 주의를 가져야 되고 또 그기 대한 해석도 각이하다.
①'그 여자'라고 표시한 것은 특히 쫓겨난 용에게 핍박받는 여자이니 적 그리스도의 박해가 극도로 심한 말세지말의 교회는 특히 독수리의 날개보다 광야로 날아가야 할 것을 보인다. 도망하되 날아가야 할 긴급성을 다 가진 것을 가르쳐 그 여자라고 하는 그러한 어두를 쓴 것이다.
②'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날아간다 함을 해석함에는 먼저 '큰 독수리의 날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가르친다. 광야로 날아가는 날개는 성도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인 능력을 가르침이니 독수리 두 마리의 각각 가진 날개를 구별하여야 한다. 이것은 다 상징적 계시다.
큰 독수리의 날개는 독수리가 새끼를 기를 때에 공중에 새끼를 던지고 주위를 지키다가 가해자가 올 때나 또 땅에 떨어지게 될 때에는 큰 독수리의 날개 위에 업어 보호하고 또 공중에 던지는 그런 시련을 몇 번이든지 하여 날음에 온전하도록 양육함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인 구속 성도를 그 능력으로 높이고 승리케 하고 성공케 하여 소망과 자신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교만할 때에 또 하나님께서 던져 두어 실패하게 떨어지게 두어 절망으로 거꾸러질 때에 또 다시 하나님이 들어 높이는 중에 성도를 시련 시켜 마치 독수리 새끼가 발과 몸둥이로는 날 수가 없고 순전히 날개의 힘으로만 공중을 날 수 있는 자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의 권능을 받아 그것으로 초자연적 성공의 높은 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을 상징함이다(출19:4, 신32:11-12, 고후1:8-9 참조).

여인이 광야로 날아간 그 날개는 받은 보혈과 말씀과 성령에 능력이니 말세지말의 성도들이 광야 생활하는 것은 무능이 아니고 영적으로 능력 있는 자의 생활이다. 광야가 자기의 양육 받을 자기 곳이므로 부득이 하여 가는 것도 아니요 무능해서 가는 것도 아니요 권능으로 가는 자원의 길이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초기 광야로 도망한 것같이 그런 정도가 아니고 말세가 될수록 신속히 자원하여 날아가는 거와 같이 광야생활을 자취하여야 성화와 보상의 선행이 자라가게 된다.

③광야를 자기 곳이라고 하였다. 6절 상반절에서 광야를 말할 때에는 자기 곳이라는 말을 붙이지 아니하고 특히 여기만 붙인 것은 말세지말이 되어 갈수록 성도는 광야 생활을 하여야 중생자가 양육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광야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에 40년간 시련하시던 것을 두고 말함이다. 그기에는 애굽의 것들이 하나도 없고 초자연의 권능으로만 의식주 하였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신실성과 권위성을 점점 깨달아 신, 종, 인(믿고 따르고 인증)의 사람으로 점점 바뀌도록 한 것같이 말세는 더욱 신, 종하면 세상과 멀어지고 초자연 은총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입장으로 몰아 끌게 된다. 이것이 말씀과 영감의 인도이니 이 길은 실패와 사지 같은 길로 더욱 확실하게 보여지게 된다. 그렇게 보여지도록 세상은 악화되어감으로 신종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 길을 가보면 그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과 천국소망의 확신이 자라고 신앙인격이 점점 장성하여진다. 다시 말하면 광야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충성과 희생의 길이니 곧 순교 정신으로만 걸을 수 있는 험하고 동지가 적은 광야 길이나 그기서만 양육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랑과 양심과 충성과 열심과 인내를 가져야 갈 수 있는 길이다.

5.'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기에 그 뱀의 낯을 피하였다고 하였으니 앞에 있었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위 9절에 표시한 넷 뱀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강압적 박해를 말함이 아니고 유혹하는 해독을 가르침이다. 세 때 반으로 상징한 신약 후반기인 말세지말이 되어 갈수록 사단인 적 그리스도의 박해가 무력과 유혹을 겸하여 심하여질 것을 가르쳐 13절에는 용으로 표시하고 14절에는 뱀으로 표시하였다. '낯을 피하여' 함은 적 그리스도의 각양 시험을 당하나 시험에 들지 아니한 것을 가르침이다. 시험에 들지 아니한 생활은 광야 생활이요 시험에 들지 아니하려고 하면 광야로 피하여야 한다.


15절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물을 강같이'
강물에 대하여 혹설은 침략군들을 가리킨다고 하고, 큰 재앙이라고도 하고, 또 무수한 환난이라고도 하고, 크레다너스는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하는 세상주의라고 하였다. 이 중에 크레다너스의 해석은 이연하다.

2.'뱀이 그 입으로'
이 강물을 토하는 자를 붉은 용으로도 또 용으로도 상징하지 아니하고 뱀으로 한 이유는 토하는 강물은 무력적 박해가 아니고 유혹하는 간교적 박해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는 다 상징 계시니 과거 이스라엘도 광야에 식수가 없어 크게 기갈을 당한 일이 자주 있었다. 이와 같이 광야생활인 신앙생활에는 식수에 갈증을 느낌같이 세상적인 것, 모든 보편의 은혜의 것에 갈증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경제나 권세나 평안이나 기타 모든 세상에서 행복이라고 할 만한 그런 것들에 대한 궁핍을 자연히 가지게 된다. 사단은 이 점을 잘 아는 고로, 이것들을 통하여 유혹한다.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하려는 간교한 수단은 말세가 되어 가면 갈수록 심하여진다(마4:2-3).
그러므로 여기에 뱀이 토하는 강물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여 우리에게 오는 모든 세상 은혜를 말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아니하면 올 수 없는 모든 필요한 것들이 그 계명을 다소라도 어기는 그런 방편을 통하여 말세 성도에게 오는 모든 행복(직계, 지위, 권세, 안일, 쾌락, 모든 경제피난 등)을 가르쳐 강물로 상징한 것이다. 처음에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 행복들을 내가 이용하고 후에는 그 행복에게 침몰되어 떠내려감과 같이 주와 아주 멀어지게 되는 것을 가르쳐 말한다.
이 운동이 점점 심하여가기 때문에 말세가 될수록 성도 앞에는 계명만 어기면 얼마든지 세상적 고난을 면할 수 있는 길이 자연히 찾아오게 된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어려움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데 계명대로 지켜 고난의 길을 가기 때문에 말세에는 정통적 신앙노선을 고행주의 염세주의 과격파 등등이라고 비난을 하게 되고 또 자신이 길을 가다가도 문득문득 유혹을 받게 되는 길이니 심히 승리하기에 어려운 길이다. 말세는 물론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계명 어겨서 오는 것은 뱀이 주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 계명대로 지켜 살게 되는 그 생활이 광야이니 거기서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과 성화와 선행이 자라가기로 한번 정한 것이니 이 길을 떠나서는 이런 것들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마실 때는 좋으나 떠내려 갈 때 고통은 갈급보다 심한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16절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땅이 입을 벌려 용의 토한 물을 삼킨 것'
땅이 입을 벌려 용의 토한 물을 삼켰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 얻어진 세상과 세상에 모든 것은 성도를 삼키며 타락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수한 섭리로 그것들을 제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보존케 하시는 것을 가르침이니 여기 대하여 땅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수섭리로 마귀의 박해가 성도를 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침에는 통일되어 있다. 땅이 이단자 고라 250명을 삼킨 성질과 같은 것이라고(민16:30-35) 하고,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열중할 때에 블레셋 군의 침략으로 다윗이 도망할 기회를 얻게 된 것과 같은 성질이라고 말들 한다. 즉, 모든 정면적 대항과 박해의 적에게서 구원하시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땅이 물을 삼킨 것은 그런 성질도 본문에 포함은 되어있으나 땅이 입을 벌린 땅에 대한 제일 큰 뜻은 아니다. 땅이 입을 벌려 여자를 구원하였는데 이렇게 원수의 박해를 일으킨 자를 뱀이라고 명사한 것과 물이라고 한 것에는 중요한 뜻이 있는 것을 위에 15절 2호에 해석한 바와 같다. 이는 간교적 유혹인 박해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는 방편인 입 벌린 땅도 무력의 것이 아니고 지혜로 유혹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그 방편도 또한 지혜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입벌린 땅은 일반 은총에 속한 것이며 땅에 속한 것이니 자연계시(창조물, 하나님의 섭리, 자연의 빛인 양심)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택소자에게는 성령님과 특별계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모든 만물들의 인과와 또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깨닫는 양심과 지혜가 바르게 하사 모든 사리판단과 가치 평가가 올바르게 된다. 이렇게 바르게 되면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서라야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에 가치가 외부로 보기에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과 하나님의 진노와 자연 멸망과 공의의 보응이 연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 그것은 하나님을 빼앗기게 하는 유혹인 것과 자기의 날개를 꺽는 일이 되는 줄을 깨닫게 하여 불의로 오는 모든 세상 것을 정복하여 제탈되는 것을 가르쳐 땅이 입을 벌려 강물을 삼켜 여인을 구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의를 통하여 오는 그 모든 것들을 보통 계시의 은총으로 벗어나게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말세가 되어갈수록 성도들은 투명한 양심을 가져야 뱀의 토한 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격 없는 지위와 수입 없는 용도와 노력 없는 수입을 바라는 것은 다 욕심이니 양심을 유린하는 것이다. 곧 강물을 삼키는 것이 되고 즉시 회개치 아니하면 떠내려가고 침몰된다. 말세가 되어갈수록 여러 방면의 구제가 심하여지나니 구제하는 자와 받는 자의 전부가 악령의 운동으로 되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혹시 구제를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주고받는 그 사이에 뱀은 틈타게 되고 받는 자 속에서는 뱀의 입에서 뱀이 토한 강물에 갈망을 가지게 하여 이런 물들을 마시는 습성을 길러 멸망을 초래케 하는 일이 대개이다. (살후3:8, 10, 12, 롬13:8 참조)  


17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1.본절의 해석은 여자의 남은 자손이 무엇인가에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여인의 남은 자손에 대하여 각이한 해석이 있다.
①휴거되지 못하고 남은 성도
②이방인 신자
③전체적인 교회가 아니고 개인신자들
④그러나 본장 11-12절 상반절까지의 성도와 15-16절에 말한 성도와 17절에 있는 성도를 처음 여러 형제로, 다음은 여인으로, 끝은 여인의 남은 자손으로 표시한 것은 다같은 성도이니 교회라고도 할 수 있고 신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각양으로 호명한 것은 시기나, 본족이나 이방이나, 단체와 개인을 구별함이 아니고 신앙적으로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11-12절에 있는 여러 형제는 순생적 신앙이니 생명 초월이요 세상에서도 기쁘게 승리할 수 있음을 말하고, 15-16절에 여인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보다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자니 세상초월의 신앙이니 유혹의 사단이 해하지 못하고, 17절에 기록한 여인의 후손은 계명을 지키는 택소자이나 아직 완전히 세상초월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을 가지고 유혹하는 사단에게 아직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을 가르친 말이다. 재세 성도로서 생명 초월 신앙은 즐겁게 살 수 있고, 세상 초월의 신앙은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니 평안은 하나 죽음의 위협은 받고 세상 애착심을 버리지 못한 신자는 늘 사단의 유혹과 침해를 받게 되는 것을 가르친다.

2.'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용이 분내어 여자의남은 후손에게 갔다 함은 전 인류와 싸우던 전쟁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 승천으로 완전 패전하고 순교적 신앙가와 극세적 신앙가들에게도 패전을 당하고 보니 이제는 할 수 없어 계명대로 살라고 하면서 세상 미련을 가진 자들로 싸우려고 집중함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괴롭고 자랄 시간을 많이 손해 본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눅14:33에 말씀하셨다.

3.'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바다 모래 위에 선 것은 창22:17 반대로 사단의 무리를 거느리고 선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바다 모래 위에 섰다고 함은 사단이 있는 위치를 가르침보다 그 상대자인 성도가 처세하는 위치를 표시함이다. 죄악을 상징한 바다도 아니요 도덕으로 상징한 땅은 땅이나 바다 모래 위니 바다가 가깝다. 도덕 세상미련을 가진 성도는 비록 한 때는 계명을 지키나 바다 같은 죄악에서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항상 괴롭고 미약한 신앙으로 지나기 쉽다.


제13장

본장은 사단이 적 기독의 행위를 할 때에 사람이나 어떤 기관이나 각양 피조물들을 이용하여 구체적 행위를 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본 계시록에 사단이 이용하는 그의 기관 중에 중심 되는 둘을 두 짐승으로 상징하여 성도에게 지혜와 용력(勇力)으로 경고하신다.


1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1.'내가 보니'
본장 1절과 11절에 보면 이 두 짐승에 대하여 '내가 보니'라는 말을 기록했다. 이것은 모든 시험이 다 개인적 관계를 가진 것이로되 더욱 이 두 짐승으로 상징한 적 기독에게는 신자 개인 개인이 하루도 떠날 수 없는 직접적 관계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각자 개인 개인이 이 적을 주목하여 싸워야 할 것을 의미한다.

2.'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바다를 로마나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세계 각국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백성과 무리와 지방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13:1에는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고 13:11에는 땅에서 짐승이 나온다고 하고 14:1에 어린양은 산에 섰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 짐승 자체가 무엇인가 함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그 짐승들이 각기 어디 거주하며 어디 소속한 것이며 무엇을 근거로 하여 발생하는가를 표시한 것이다. 산은 지성이요 땅은 인간적 도덕이요 바다는 죄악들을 가르쳐 말함이다. 그러므로 여기 바다는 신인결합인 거룩도 아니요 인인을 함께 합한 도덕도 아니요 이기주의만으로 구성된 죄악 등을 가르친 것이다. 온 세상에 있는 운동 중에는 이 세 가지 운동 외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바다, 땅, 산으로 상징한 것이다.

'한 짐승이 나오는데' 라고 하는 이 계시에는 '하나'라는 명사(名詞)와 '나온다'는 행동과 또 '나오는데'라는 말씀이 있어 중요한 뜻을 가진다.
①'한 짐승'이라고 표시한 것은 그 짐승이 한 마리라는 의미로 어떤 한 민족이나 국가나 종교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에 표시한 짐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한 교회의 명칭으로 움직이는 것 외에 세상에 있는 전부를 총칭한 것이다. 개인 가정 사회 국가 종교 각 사상 문화 경제 과학 등을 다 합하여 짐승으로 상징하였기 때문에 특히 하나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 주의하여 세상에 참 기독교나 거짓 기독교회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이면 사람이나 운동이나 조직 기타 전부가 각각 다르고 각양의 것일지라도 그것에 근본은 하나이니 7절에 기록한 대로 성도들과 싸우는 적인 줄을 알아야 한다.
신자들이 그 하나 하나를 접촉하여 자기에게 직접 거리낌이 될 때에는 대적인 줄을 아나 거리끼지 아니하는 것들은 또 그것을 적대시하여 경성하지 못하고 있다가 신앙의 손해를 입는 일이 많다. 이것을 깊이 인식시켜 경성케 하기 위하여 한 짐승이라고 하는 하나라는 명사를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짐승에 속한 것은 언제나 투쟁의 대상이니 반드시 성패의 결과는 있나니 이기면 다 나에게 유익 되고 지면(그로 인하여 범죄하면) 그것들을 아무리 외형적으로는 내가 취하였다 할지라도 나는 패전자요 그의 종 됨이니 자유에 손해를 당하게 된다. 다시 말하노니 하나인 것을 명심하고 그 전부가 마귀의 이용물로 되어 있는 하나임을 명심하고 그 배후에는 사단이 함께 있는 것 알아야 한다. 한 끼의 적은 식물에도 주를 위하여 먹지 못했으면 벌써 그 대적에게 패전한 것이다.
②'나온'다고 한 것은 12:17에 싸우려고 모래 위에 서 있는 용, 곧 사단이 짐승의 껍질을 입고 여인의 남은 자손과 불절이 계속 출전하고 있으니 바다에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나온다. 바다에서 준비하여 나오는 것은 죄악인 곧 각자의 사욕과 이기주의 그것을 이용하여 그것으로 준비를 갖추어 나오는 것이다. 그 출전의 무기와 정신이 짐승으로 상징한 각 존재들의 사욕과 이기주의의 것이니 사단은 각자가 자존코자하는 그 심리를 이용하여 진리를 대적케 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짐승으로 표시된 그 각자들이 진리건설인 이 복음 위하여 스스로 희생하려는 것은 하나도 없고 각자가 자존하려고 진리와 대항하는 것이니 정복이 없이는 그것을 하나도 이용하지는 못한다. 승리치 못하면 진리를 가진 자가 이용을 당하고야 만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한번만 나오는 것을 가르침이 아니고 바다와 연결되어 불절이 새로운 준비와 힘으로 투쟁력이 용출 함을 말함이다. 한 시대에 사단의 역사가 지나갔다고 후에 없으리라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짐승으로 표시한 것 중에 그 시 그 시 특수하게 사단이 이용함은 다르다. 일반적 이용은 다하고 있다.  
③'나오는데'라고 표시함은 그로 말미암아 일어날 사건들을 연하여 기록하려 함이다. 이것은 이 짐승이 준비하는 출전만 주의할 것이 아니라 그의 하는 작전 행사를 동시에 주시하여  경성하고 파수하고 격전하여야 할 것을 경고한다. 이것이 한 말로 말하면 세상과 싸우는 싸움이니 이 짐승을 세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3.'뿔이 열이요'
뿔은 힘을 가르침이요 열은 사람의 만수니 인간을 통한 일들의 최후와 최고가 되는 만만점인 절정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열 뿔은 인간을 통한 역사들의 최고발달과 연단과 연구와 향상된 힘이며 또 그것들이 단합된 것을 상징으로 계시함이다.
그러면 뿔이 힘이니 어떤 것의 힘인가가 문제이다. 이 힘은 곧 본절에 말한 짐승의 힘이니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된 것 외의 것으로 세상에 있는 전부의 힘을 가르침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 사회 가정 이종교 과학 각 사상 각 철학 문학 경제 향락 각양 죄악들 기타 모든 존재들의 힘이다. 이런 것이 그 존속의 역사가 깊어갈수록 연장(硏長)되어 그것으로서의 최고적인 힘에 도달하게 되나니 이것들이 그 힘을 가지고 개적으로 혹은 단합적으로 운동하는 전부가 본장 6,7절의 표시한 대로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는 불의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곧 복음의 거슬리는 힘들이니 이유는 그것들을 붉은 용이요 배암이요 마귀요 사탄으로 이름한 그것에게 이용을 당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단보다 더 능력 있어 택한 자에게는 함께 하심으로 마귀의 이용물인 열 뿔로 더불어 싸워 이길 때에는 그것이 없었던 것보다 훨씬 유익 되게 도리어 이용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천래의 힘이 아닌 세상 땅 위에 모든 힘이 다 열 뿔에 속한 것이다. 언제나 투쟁의 대상물인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내 호주머니 안에 든 은전까지도 음밀한 의미에서는 이 열 뿔에 속한 것이니 내 영혼과 싸우는 대상이다. 그리스도를 중심 하여 의로 이용하였으면 나에게 정복당하여 이용물이 되었고 불의로 사용되었다면 내가 사용은 하였으나 실은 내 영혼은 패전자요 그에게 이용당한 종이니 그만큼 자유권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힘이 나와 싸움의 승패로 나에게 이해가 결정된다.
'머리가 일곱이라' 여기 대한 해석은 계17:9-10에 보면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일곱 왕이니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동안 계속하리라 라고 하였다. 여기 대한 해석을 일곱 국가라 하여 ①애굽 ②앗수르 ③바벨론 ④메데파사 ⑤헬라이니 사도요한 당시에 지나간 국가요 하나는 지금 있다고 하였으니 로마나라로 또 한 국가는 그 후에 있을 것이니 로마와 독일이라고들 해석한다. 이 국가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국가들이니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이치에 가까운 해석이다. 이 일곱 머리는 일곱 국가로 국한보다 일곱 정치를 가르침이니 일곱이라고 한 것은하나님이 허용한 지상에 정치의 종류대로의 전부를 의미하고 산으로 상징한 것은 그 정치들이 주장하고 있는 도덕적인 이상을 말하고 왕은 조직과 권세와 방편들을 가르침이다. 이 일곱 머리인 정치는 물론 국가가 주요 그뿐 아니라 기타 단체들의 정치들이 가지고 있는 법과 조직과 방침과 도덕으로 한 그 전부를 다 포함한 것이니 한 가정의 정치도 이 일곱 머리 안에 내포된 것이니 그서도 성도를 대항하는 짐승에게 속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한 회사에라도 거기는 정치가 있나니 신자는 언제나 그 정치는 자기의 투쟁의 대상인 줄 알고 또 그 뿌리가 짐승에게 속한 것이니 경성하여 진리의 거슬리는 정치는 대항하고 진리의 합한 한계 내에서만 복종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뿔과 머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힘과 정치를 말함이니 이것의 근거가 죄악이요(바다에서 나옴) 세상이니(짐승) 이것이 다 사탄의 이용물이 될 수 있고 또 되어 있으니 바른 관찰을 가져 투쟁하게 하려하여 계시함이다.

4.'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이 열 면류관은 그의 승리한 권세를 말함이다. 완전 수를 붙여 열 면류관이라고 한 것은 1절 해석 3호에 말한 대로 세상에 각 종류대로 존재한 것은 그의 존재 이후로 모든 것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나온 힘있는 존재들이다. 하나님과 연결된 천래의 힘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으로서는 그 힘들을 극복한 자도 탈출한 자도 없는 강한 승리를 말함이다. 일시 권력 있는 사람이 지극히 적은 한 종류라도 일시는 없앨 수 있으나 그 사람은 죽고 또 그 후에 새로 생겨진다. 풀 한 포기도 사상 하나도 전멸할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승리를 해 본 것들과 기독교는 싸워야 한다. 장차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때에 (엡1:1)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심판 후에는 이것들이 다 정복을 당하게 된다. 이러므로 이런 강한 대적들이니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싸워야 하고 최후의 승리를 소망하면서 인내하여야 한다.

5.'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위에 해석한 대로 머리는 정치를 가르치는데 세상주의인 정치는 창조주도 부인하고 만유주인 하나님의 주권도 부인하고 자칭 하나님이라고 말은 아니한다 할지라도 저들이 자존자로 주권자로 모든 계획과 방법의 행위를 하여 하나님 부인 운동과 하나님과 거리 멀게 하는 성질들의 운동과 행위를 가르쳐 참람 된 이름이라고 말한 것이다. 단3: - 4:30, 6:7 - 10 하나님의 지위를 대신 취하여 하는 행동은 다 참람 된 일이다.


2절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표범, 곰, 사자'
세 가지 짐승으로 표시한 것은 10뿔과 7머리를 가진 짐승으로 상징한 세상 곧 기독교의 진리운동을 대적하는 그 성질에 악독과 위엄과 용감성의 표현이다. 어떤 학자는 단7:을 인용하여 바벨론은 사자로, 메데는 곰으로, 헬라는 표범으로 표시하여 여기에서 유흥(流興)된 것이 로마라고 한다. 해서 이 세 가지 짐승을 로마로 해석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세 가지 짐승으로 상징한 것은 어느 한 국가나 단체나 시대나 기타 어떤 것이든지 기독교를 해하려는 것 중에 어느 하나로 국한 시켜 말함은 잘못이다.
대적하는 그것들의 그 전부의 개개가 각자 각자 이러한 맹수성을 가지고 위협하여 신앙의 절개를 꺾으려 하는 악한 행동을 말한 것이다. 보기에는 이와 같이 무섭게 보이나 신앙으로 투쟁하는 자에게는 실상은 인조 사자, 인조 곰, 인조 표범 같은 것이어서 실제 해는 하나도 줄 수 없는 존재들임을 예고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투쟁하고 인내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인하여 짐승마다 같다는 말을 붙여 실상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였다.

2.'내가 본 짐승'
이 말은 1절 머리에도 기록하여 특히 내가 보았다는 '나'에 대한 해석을 1절 1호에 해석한 거와 같이 주의를 가져야 한다. 이 짐승은 1절에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니 곧 10뿔과 일곱머리를 가진 그것이 표범, 곰, 사자 모양같이 나타남을 말한다. 누구에게든지 이 짐승 (진리를 대적하는 세상 세력)이 해하려고 할 때에는 이기기 전에는 다 이와 같이 보여지고 이기고 난 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지면 질수록 (피하면 피할수록) 명백한 맹수로 더욱 공포에 눌리게 된다.

3.'표범'
얼룩얼룩한 표범처럼 대적의 세력과 지위가 어리어리하여 그 분위기가 주는 엄위성을 말한다(렘13:23).

4.'그 발은 곰의 발 같고'
이것은 무례하게 덮쳐 무조건으로 굴복시키는 잔인성을 말한다.

5.'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이는 그 세력이 강하여 혹독하고 위엄스러워 누구나 그 세력을 당할 수 없는 최대의 강자같이 날뛰는 박해를 가르친다. 이 셋을 합하여 말하면 기독교를 대적하는 것들이 시대시대마다 지방지방마다 사건사건마다 나타날 때에는 이러한 맹수성을 가지고 나타나나니 누구나 그 선포와 간판과 계획과 동작들의 행위에 기압 되어 굴복하지 아니할 자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이 무서운 맹수가 아닌 거짓인 것을 보아 같다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요한이 이것들을 바로 본 원인은 계1:10에 기록된 대로 성신에 감동 받은 지혜의 눈으로 본 까닭이다. 오늘도 이런 것들을 바로 관찰하여 비판하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고 성신의 지혜가 아니면 또 바른 관찰이나 비판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니 성신의 지혜를 가진 자가 누구뇨. 이는 성신의 지혜인 신구약 성경말씀으로 그를 관찰하고 비판하는 신앙이다.
맹수 같기만 하고 실제로는 아니라 함은 성도를 해 주는 권세가 없다 함이다. 이는 신앙표준으로 하는 말이요 세상만의 표준으로 하는 말은 아니니 또 여기에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신앙으로 나갈 때에 그들이 육신본위의 박해를 주지 못한다 함이 아니요 또 해독을 받지 아니한다 함이 아니니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교까지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고문고형도 받나니 이런 해들을 받지 아니한다 함이 아니다. 받기는 받으나 신앙으로 나아가면 그 박해가 한없는 하늘의 영광이 되기도 하고 또 그 박해를 인하여 복음이 크게 부흥되기도 하고 자신이 장성한 성화와 귀한 신앙을 경험하여 힘을 얻게 되어지나니 없는 것 보다 휠씬 유익하게 된다. 이런 신앙에게는 그들이 맹수행위를 하지 못하고 또 이뿐 아니라 직접 다니엘과 사드락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세상적으로도 박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그런 것들을 이겨 면해질 수도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이런 모든 적기독의 운동이 백리무해(百利無害)니 믿음의 능력으로 해를 받지 아니하고 물리치면 세상에서 통쾌하고 오묘한 복음도리를 모르는 세상사람들에게 복음의 시위가 된다. 또 복음의 힘으로 저들의 해를 달게 받으면서 진리를 지켰으면 말세에 상급과 세상이 모르고 신자만이 아는 기쁨 곧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언제 성경대로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인내를 겸하여 가지지 아니하면 이기지 못한다.

6.'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용은 사단이니 여인을 핍박하던 붉은 용이요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에게 싸우려 가는 것으로 표시된 자이다.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짐승에게 주었다 함은 사단이 미혹하는 능력과 자기가 잡고 있던 왕위와 강제로 박해하던 무력을 짐승과 짐승의 머리와 각 뿔에게 주어 그것들을 용의 대리로 삼아 성도로 더불어 싸우는 그 비밀을 알려주는 계시이다.
특히 보좌를 주었다 함은 짐승 본체인 세상과 열 뿔인 세상 각 존재의 힘과 일곱 머리인 세속 각양의 정치 그것들이 사단을 대리하여 사단의 직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을 명시함이다.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그러면 사단이 모든 것에 주권자이냐 하는 의문이 생겨지겠다. 이는 사단이 주권이 아니고 범죄 한 이후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의 주관자로 새움을 입은 인생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인생과 만물은 마귀와 죄와 저주 아래 머물도록 하나님이 정죄 하셨고 이것을 사단에게 허락하였기 때문에 사단은 허용 받은 수권 하에서 짐승이 되는 그 모든 것들을 주관하며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오 마귀는 그 하나님에게 허락 받은 자이다(창3:17 욥1:12 롬8:20 참조).
그러므로 사단은 사람보다 강하니 저놈을 이길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이미 범죄 한 것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었으니 그 손에서 해방 받을 만한 힘도 없다. 그 죄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만 면제되며 해방될 수 있고 저놈을 이기는 힘은 진리와 성령의 힘 외에는 없나니 마귀의 대리자로 나타난 짐승과 열 뿔과 일곱 머리로 더불어 싸우는 대립의 입장에 서는 것도 이기는 능력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진리와 영감을 받은 자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래의 하나님의 은혜로만 마귀 저놈과 저놈의 대리자 세상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에덴동산부터 패전한 싸움을 다시 싸워 창3:15대로 승리하는 것이니 이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재세 성도는 일순간도 투쟁 없는 시간도 적이 없는 시간도 없나니 그리스도로 통하여온 천래의 것 외에 것은 전부가 사단의 이용물로 허락하신 것이니 우리는 그것에 개개에게 싸움 없는 줄로 여겨 속지말고 하나하나를 싸워 이겨서만이 나에게 유익되고 필요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노니 세속(世屬)의 것은 지극히 적은 것 하나라도 성도와 투쟁적 관계를 가지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고 또 빼심을 얻고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는 진실만 가지면 이 짐승들을 자기의 구원의 이용물로 삼지 못할 자도 하나도 없나니 이 소망 중에 맹렬히 투쟁하여야 한다. 이 투쟁에 패전은 의심 낙망 미움 공포 비겁 원망 불평 불만 나태 교만 헛된 안심 패역과 망령 등의 생각과 뜻과 행위가 다 패전의 결과인 것이다. 항상 믿으며 바라며 또 사랑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새로운 충성을 가지는 그것이 승리의 생활이다.


3-4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으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머리 중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이 머리가 나은 일에 대하여 어떤 해석가는 로마에 네로 황제가 죽었다가 회생한 것이라고 말하나 네로 황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이 없으니 불가하고 또 어떤 이는 로마 제국이 쇠퇴하였다가 재흥한 것을 가리킴이라고 말하였다. 또 어떤 이는 적 기독인 어떤 사람이 문자대로 실지로 죽었다가 살아나 미혹할 것을 가리킴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은 믿기 어려운 편벽된 해석이다. 역연 3절과 4절도 상징계시니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2.'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머리 일곱 중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나았다 함은 땅에 속한 모든 정치, 종류와 성질 중 7분지 1인 어느 하나가 상하였다가 회복됨을 가리킴이 아니다. 지상에 세상 모든 정치는 어떤 종류든지 생겨지기만 하면 그것이 없어질 것 같이 일시에 쇠퇴해지나 다시금 재흥 되어 존속되고 또 쇠퇴해진다고 하여도 쇠퇴해지는 부분 부분들이 불과 7분지 1할 정도 되는 것이니 세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되어지는 것을 말함이다. 다시 말하면 잠깐 쇠해지고 회복은 속히 됨을 말함이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잠시 죽으시고 길게 부활하시고 기독교가 잠깐 쇠퇴했다가 또 부흥되어 점점 세상에 널리 강하게 전파되는 거와 같이 세속의 모든 정치들도 (국가, 사회, 가정, 회사, 각 군계, 개인 각 단체 기타 이런 것들의 정치를 포함하여 위에 세속 정치라고 한 것이다. 교회적으로는 단체 정치가 대적이 되고 일 가정이나 일 개인의 세속 정치는 단체인 교회에게는 너무 적어 적대시 아니하기 쉬우나 그것도 그 개인에게는 교회 대 국가와 같은 그 비율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짐승의 머리를 큰 단체들의 정치로만 해석함은 편벽되다. 개인이나 소단체나 세계적인 UN이나 양이 다르지 질로는 다 같은 것이니 정치는 정치로 보아야 한다.) 망할 것 같으나 또 얼마 후에 부흥 존속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든 관념이 흥망과 비운, 쇠퇴를 창조주의 섭리로 보지 아니하고 순환이치로 또는 과연(過然)으로 인간의 운명으로 해석한다. 이러하여 교회 복음 역사와 세상 정치들을 동등시하고 대 주제인 주권자 하나님의 치리 하심을 알기 어렵게 혼미케 하는 일이 되고 모든 사람은 미래를 중어시(重於視)하는 교회의 복음보다 현재를 중어시 하는 세속정치와 세상을 크다 하게 된다. 성신의 특수한 간섭을 받지 아니하는 자로서는 모두 다 짐승인 세상 주의에게 복종하고 그가 지존하다고 하여 그기 소속됨을 가리켜 다 거기 경배한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신으로 중생 된 사람과 중생치 아니한 사람과의 관찰이 구별된다.

미중생자의 관찰
①세속 정치에 대하여는 상하는 것 곧 쇠퇴는 멸시하고 재흥과 존속을 중어시하여 상대하고
②교회 복음에 대하여는 재흥존속과 널리 전파되는 것은 무시하고 관심을 가지는 관찰력이 없고 수난과 쇠퇴의 면만 중시하며 주시하는 관찰력만 가진 것이다.

중생자의 관찰
①세속정치에 대하여는 쇠퇴를 관심 깊게 주시하고 재흥 존속은 또 그의 최 종말을 중어시하기 때문에 멸시한다.
②교회의 복음에 대하여서는 쇠퇴는 정선기(整繕期)와 은밀 확대의 역사로 중요시하고 부흥존속은 성장과 외적 전성기로 알아 쇠퇴의 시기가 오기 전에 열중한다.

그러므로 중생자는 이로 말미암아 점점 의에 나아가고 미중생자는 점점 불의에 이용된다.

3.'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으로'
한 마귀를 붉은 용으로 뱀으로 용으로 표시한 것은 마귀의 역사이나 그 방법이 다른 것을 표시함이다. 붉은 용은 살해적 노기를 말하고 뱀은 간교한 유혹적 행위에 말하고 용은 위협적 세력에 말한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은 사단이 세상에게 자기의 권세를 준 것과 세상은 사단의 권세를 힘입어 움직이고 있으니 그 행사 전부가 성령의 역사인 구원운동에 대적인 세상인 것을 거듭거듭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님은 이렇게 탄식으로 역설하시는데 오늘 교회들은 세상과 교회와를 구별하지 않고 혼합하고 심지어 지상천국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엡2:2).

4.'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이는 마귀와 세상에게 경배한다 함이니 마귀는 인간들을 최고 영두자로 주관하고 세상은 그들에게 지상으로 인증 받게 됨을 가리킴이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모든 인간들이 세상주의로 기우려지는 것은 악령의 유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에게 유혹 받은 사람은, 색경을 쓴 눈이 정색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리판단과 가치평가가 마귀의 유혹적이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그 행위를 다음에 말하여 보인다.

5.'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성신 없는 사람들과 또 성신 받은 사람들도 간혹 마귀의 유혹을 받으면 세상이 제일로 보여지며 또 그리워지고 세상을 첫째로 두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을 말하여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면서 굴복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신자 중에도 세상을 제일로, 천국을 제이로 하는 신앙은 다 마귀의 권세를 받은 세상에게 굴복한 자이다. 택자라면 비록 그 속에 사탄이 최후적인 왕권을 가지지 못하나 현재적인 생활은 마귀에게 점령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5-6절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도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1.'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이 해석에는 언제나 짐승과 일곱 머리와 열 뿔은 한 짐승인 것을 기억하여야 하고 짐승 하나를 말할 때에도 거기에는 일곱 머리 열 뿔을 포함시킨 것을 기억하여 '짐승이' 라고 하면 '뿔'들이 '머리'들이 또 '짐승이'라고 하는 말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들을 합한 짐승 곧 세상이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뿔도 머리도 짐승도 다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았다는 것이니 '큰 말'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말을(살후2:4 참조)하는 것을 가리킴이다. 이는 세상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저희 주권의 의지와 능력으로 모든 것이 자존하고 또 존속되고 치리 되는 것으로 여기는 무신론주의와 유물주의 자연주의 등등의 유사의 것들로 역사가 깊어 가면 갈수록 심하여 질 것을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각 재판소에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하여 사형선고서를 게시판에 붙여놓고 독일에서는 고사포를 공중으로 발사하면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등등의 가증한 일들도 있었다.
여기에 '큰 말'은 비단 입으로 이렇게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지 아니하는 것까지도 세상에 속한 그 전부들의 사상과 행위는 각자각자가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인간 스스로는 찾을 수가 없고 오직 성신의 사람만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동행하는 생활이 심히 어렵게 되는 전체 분위기가 될 것이다. 직시 직감 직동(直動)으로서 이런 것들인 줄 아예 확인하고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과 깊이 연결하여야 할 것을 예고함이다. 누구든지 환경과 주위에 의속(依屬) 의동(依動)하는 자는 배신자(背神者)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인다.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이것은 하나님을 훼방하는 행동과 태도들을 가르쳐 말함이니 세상 전 운동과 목적은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는 것만큼 인간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모르게 세상 자기가 제일로 여겨지게 하는 운동뿐인 것을 상징 계시함이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고 의지하며 바라보는 것과 또 그에게 순종하는 그 신앙생활은 양적으로 적든지 크든지 그는 순전히 천래의 성령의 은혜로만 된 것이다. 오병이어의 이적 때에 부스러기를 주어라고 하신 그 교훈과 같이 지극히 적은 양의 신앙생활이라도 천래의 것이며 지존의 것이니 자기 안에 있는 적은 진리지식이나 적은 영감이나 적은 성결의 행위라도 그 가치를 홀 보아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벌써 세상을 이긴 생명에 속한 자로서 움튼 자이다. 이와 같이 세상을 마귀에게 허급(許及)하신 하나님은 사자와 풀무 불같은 세상에 다니엘과 셋 청년을 살리시던 그 능력과 같은 은혜로 택한 자만을 연단 하시며 양육하셔서 능력의 심히 큼이 하나님에게만 있고 또 전적 은혜로만 된 구원인 것을 믿어지게 하여 점점 겸손하여 하나님만 영원히 바라보고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전적 성도에게는 대적이 되고 성도는 이 대적을 완전 정복할 수 있는 권능을 하나님에게 그리스도로 통하여 얼마든지 구하여 얻을 수 있는 이 점을 늘 기억하고 이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교만과 거역하는 자는 패전과 멸망이요 겸손과 순종자에게는 모든 것에 승리를 얻게 된다. 언제나 전치와 권세와 어두움에서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과 악령을 대전하는 우리들이니 일순간이라도 천래의 은혜가 아니면 패전하고 온 세상이라도 천래의 권능이면 승리한다.

2.'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마흔 두 달에 대하여 해석은 각이하다. 단9:24-27을 근거하여 세 부분으로 설명하였으니,
①69주일(7+62)은 고레스 왕이 성전 재건하라고 명령을 발한 때부터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신 때에 이르는 기간이라 하고 계산은 하루를 한 해의 비유로 알고 푼다.
②그리고 7주일과 62주일 후 곧 69주일 후에는 유대인의 왕통이 끊어져 이방인의 때가 이른다는 의미에서 본문에 말하기를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62절) 라고 하였다 하고 이 아무도 없다는 시기에 이방 교회의 왕성시대 곧 신약 시대의 전폭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신약시대 전폭을 넣지 않는다.
③또 그리고 마지막 일주일간은 '왕'(그리스도)이 이르러서 모든 행사를 하게 되는데 계시록 13장은 그 후반주에 적 그리스도가 연출할 죄악의 사행(事行)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 일주를 가리켜 신약시대의 전폭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여기 일주일은 영적 의미의 시일이다. 이 내용들은 박윤선목사님 주석대로 인용했다.

또 어떤 이는 마흔 두 달은 신약시대를 단9:27의 기록된 '한 이레'로 보고 신약시대의 후3년 반으로 생각한다. 전 3년 반은 적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 편의를 주어 유대인에게 환영을 받고 유대인이 따라 갔으나 적 그리스도가 전 3년 반에 자기의 목적을 이루며 후 3년 반부터는 유대인과 종교까지 배척하니라 라고 해석하였다. 이는 전 3년반 유대인에게와 같이 후 3년반은 이방인 교회에 이 방식으로 유혹시킬 것을 가르침이라고 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해석들은 믿기 어렵다. 이유는 적 기독이 사도당시부터 이방교회에(마24:11-요4:1) 들어왔고 마24:24-28까지를 보면 주 재림하실 때까지였을 것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단9: 에 있는 69주일은 예수님 사활 승천 때까지요 단9:27의 한 이레는 승천 후 성신강림으로부터 예수님 재림 때까지의 신약시대 전부를 한 이레로 상징한 것이다. 계13:5에 있는 마흔 두 달은 단9:27 한 이레의 절반인 3일 반을 3년 반으로 환산한 것이 아니다. 단9:27과는 상관이 없는 마흔 두 달이요 계11:3에 기록된 1260일을 예언하리라 한 그 날짜와 같은 것이니 이는 신구약 총 구원시기를 7년으로 하여 계13:5에 있는 마흔 두 달은 신약시대를 총칭한 것이다. 계11:3에 두 증인이 예언하는 1260일은 계13:5에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성도를 대항하는 때이다. 그러므로 예언도 악령의 대적도 신약시대의 전 기간을 망라하여 일하나니 적기독과 투쟁이 없는 시간은 한 시간도 없나니 휴전 없는 투쟁인 줄 알아야 한다.

'권세를 받았다' 함은 볼 수 있는 세상에 있는 것과 운동들이 보이지 않는 마귀에게 권세를 받고 그의 이용물이 되었다 함이요 깊은 음밀한 의미에서는 마귀 그도 하나님의 허용의 범위 내에서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