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공과식 주해

2007.06.0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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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공과식 주해  
선지자선교회
(주일학교 공과형식으로 간단하게 요약한 주해)


제목 :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
본문 : 창1:1-31
요절 : 창 1:1


1절에 여기 [태초는] 요1:1절에 말씀하신 태초보다 후로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그 때를 말한다
요1:1절에 말씀하신 [태초는]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신 그 때를 말한다
여기 [천지는] 영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우주를 말한다

3절에 [빛은] 물질의 빛을 말한다.  무에서 유가 나왔는지 유에서 무가 나왔는지?  무가 먼저요 유가 후다
하나님이 먼저 계셨고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므로 존재들이 있게 되었다

5절에 밤과 낮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밤도 한 시기요.  낮도 한 시기라.  그 기간은 얼마나 긴지 모른다]고 말을 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것은 하루인데 지금과 같은 24시간 하루를 말한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이 정하신 4계절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위치를 거슬리신 일이 없고, 하나님이 한번 만드신 것은 멸시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무엇이든 이루어지게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엿볼 수가 있다
하나님이 땅에게 명령해서 식물을 내라고 했으며 24절에 보면 동물을 내라고 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땅이 순종하여 동식물을 내었다
하나님은 직접 창조하시되 땅에게 권리를 주어서 땅이 창조한 것같이 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일하시는 성격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 때에만 땅이 하나님에게 권리를 받아서 동식물을 낼 수가 있었지 지금은 안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구원 이루는 시기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이것을 이루시는 때라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오늘 이 시간에 이룰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만 이룬다
그 때에 땅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므로 만들어 낸 것은 땅의 것이요, 땅의 영광이다.
땅이 만일에 동식물이 없으면 영광도 없고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식물이나 동물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맺은 결과는 영원히 자기 영광이요 자기의 일거리요 영원히 자기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이 지금에 이루어진다

16-19절에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그 중심은 지구다.  지구를 중심해서 모든 것을 창조했다.  하나님 다음 존재자는 지구에 존재하고 지구에서 육성하신다
그러므로 지구 외에 생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우주는 선택받은 성도가 처음이요 그 다음은 지구다

26절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인격체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사람의 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으신 특수성은 하나님이 회의를 여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만물을 사람에게 맡겨 위임 통치하게 했는데 이 통치권을 영에게 맡겼다


제목 : 에덴동산과 타락
본문 : 창2:1-3:24
요절 : 창2:17

[1] 2:1-3절에, 안식일에 대하여
천지 창조를 마친 후에 지킨 안식일은 구약교회가 지켰는데 제 7일 안식일로서 지금의 토요일이다
지금 신약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건설 완료했는데 이 날을 안식일로 지킨다

[2] 2:4-17절에, 에덴동산에 대하여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이요.  하나님과 의논하여 동산 밖의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위임 통치를 시킨 대리 왕국이요 아담과 하와가 교제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의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과 동거동락할 수 있는 곳이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요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왕국인데 그 요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와 구속받은 성도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시조요 초대 교인이다.
에덴동산에는 세 가지의 나무가 있었다. 일반과실은 하나님의 자연은총이요.  선악과실은 하나님의 율법이요 생명과실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4 강(江)은 교회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어 가지고 아담, 하와에게 주시면서 [이 동산을 지키고] 다른 것이 동산 안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비하고 [동산을 다스리고] 동산을 사용하라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영교를 끊지 못하도록 지키고, 이것을 다스려야 한다

17절에 보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했는데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하면 반드시 죽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아니하면 영광이 없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면 우리를 살리고 영광스럽게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치 아니했으면 우리의 실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것인데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모시게 되었다.

[3] 2:18-25절에 인류시조의 목적과 사명과 생활방편에 대하여
인류시조는 아담과 하와가 합한 것이 인류시조다.  아담만이 인류시조가 될 수 없다.
아담의 갈비뼈로써 하와를 창조하신 것을 보면 범죄 전에는 분식이요 순간적이다

(1) 인류시조의 목적은 돕는 일을 하는 배필로 있었다
엡2:10절에 보면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
돕는 일은 선한 일이요 이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니 곧 자기를 구원하는 일이다

(2) 인류시조의 사명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임통치 하는 것이다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요 구원받은 자기로서 할 일은 창조해 주신 모든 것을 위임 통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신 들짐승들과 날 짐승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는데 하나님의 의사와 아담의 의사가 같았다
이 때는 아담이 하나님과의 연결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이 동하면 아담이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아담이 정했으니 아담의 이름지은 것을 만족해 하셨다
아담이 이름지은 것은 그들의 생활하는 전부이니 그들의 생활법칙을 전부 정했다는 말이요
엡1:23절에는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말씀했다
교회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존속하고 생존하는 은혜를 피조물에게 입혀 주신다

(3)인류시조의 생활방편은 둘이 합하여 한 몸의 역할을 한다
24절에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했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이렇게 해야 실력이 장성해진다 외로운 가운데에 자기를 고치고 장성해진다 범죄후에는 혈통으로 동족으로 치우친다
그래서 진리와 영감으로 정당한 결합을 맺게하기 위하여 가정에 어떤 때에는 불목을 일으킨다.  (마10:34-39)

하나님은 사망 이래의 가정단합을 없애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을 이루시는데 이것을 위하여 먼저 혈통의 단합을 원하시는데 이것이 가정교회요 온전한 교회의 씨앗이다
엡5:27절에 보면은 [하나님께서는 흠과 주름잡힌 것이 없는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부부제도를 주셨다]고 말씀했다

25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범죄 전에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지 자기를 위하고 좋게 하는 것이 없었음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있고 자기를 위해서 행하는 것 (의복이나 거처)은 하나도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이것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4) 3:1-6절에, 인류타락의 순서
뱀이 에덴동산을 들어오게 된 것은 에덴동산을 지키지 않고 다스리지 아니한 연고다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피동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하지 아니했으니 자연히 뱀이 들어 온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죄가 들어온다
여기에 뱀은 마귀를 상징한다.  에덴동산에 들어온 뱀이 하와를 먼저 유혹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항상 사람의 약점을 잡고 유혹한다.  뱀이 하와에게 말을 한 것 보면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을 중심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 사람은 진리를 위해서 있고 진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  진리가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면 인본주의다
뱀은 언제든지 사람을 중심하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도 진리도 이용하게 한다 이것이 뱀의 술책이다
타락이 눈으로 귀로 들어와서 이성에 한번 머물 때에 벌써 죄악이 되었다
하와는 영과 육이 합하여 된 사람인데 죄악이 육으로부터 와서 육이 범죄 함으로 영육이 함께 죽었다.  아담은 하와를 통솔하지 못한 여기서 자기도 죽었다

(5) 3:7-24절에, 타락의 결과
타락 전에는 하나님만 보던 자가 자기를 보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자기 양심에서 우러난 것이요 이것이 타락한 인격이요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위하고 염려하고 자기를 생각하는 것은 타락한 부패성이요 타락한 본능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것은 자기가 자기를 염려치 아니해도 염려 없는 사람이 된 후에 염려하지 아니해야지 그것이 지나치면 죄악이요. 자기에게 아무 해도 오지 않겠끔 한 후에 정직한 자가 정직한 자다

다음은 자기의 책임을 잊어버리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이는 이미 자기가 죽었다는 증거요.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과 원수가 되어서 대립이 되었다
범죄 전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선물은 평안과 즐거움이요. 범죄 후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하나님에게 받은 선물은 수고와 고생이니 이것은 범죄자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선물이다.

제목 : 하나님이 기뻐하신 성도들
본문 : 창4:1-8:22
요절 : 창7:21

[1] 4:1-26절에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가인은 믿음을 버리고 자기 세상과 자율과 사욕에게 이용된 사람이요 아벨은 자기세상을 믿음으로 이용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사는 세상과 자율과 사욕을 좇아서 드린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지 아니했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성도다.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했는데 선행을 계속할 때는 죄가 침노하지 못하고 선행하는 것을 피곤하게 여길 때부터 쉴 때까지는 움직이는 것은 전부가 죄가 된다.

회개할 기회는 양심에 가책이 될 때요 이 때에 회개하면 벌이 없고 그 후에는 회개해도 벌이 있다.

가인과 아벨은 초대교인이다.
당시에 가인과 아벨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나 여기에 기록되지 아니한 것은 성경은 우리 구원에 필요한 것만 기록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우리 구원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치 아니했다.

[2]5:1-32절에 에녹이 승천함
사람이 출생하는 것과 자라는 것과 죽는 것은 일반적으로 죄 중에서 되는 일인데 전부가 사람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 사망을 뚫고 나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생활은 모든 일반 생활에서 해야 한다.
에녹은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전부를 천국에 옮겼으니 에녹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다.

[3]6:1-8:22절에 노아가 홍수에서 구원받음
노아 시대가 홍수로 멸망 받은 원인은 남녀 관계로 말미암은 것인데 사욕대로의 관계가 원인이었다.
홍수심판은 죄악이 관영한 때로부터 120년 후인데 정죄 받은지 120년만이다.
하나님의 정죄 심판은 시일이 지연된다고 변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조만간에 공의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대로 천하는 홍수로 침몰되었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방주를 만든 노아와 그 식구들만 구원받았고 모든 생명을 가진 동물들도 노아의 방주에서만 보존되었다.

홍수 속에서 오직 노아의 방주 안에서만 생명이 거주할 수 있다.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모형이다.  지금도 그때와 같이 죄악으로 침몰하는 때다.  노아의 홍수와 같은 때다.
그때에 방주 안에만 생명이 있었음과 같이 오늘도 방주와 같은 교회 안에만 생명운동이 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그리스도와 성도가 하나된 것이다.
노아 홍수 때에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 물이 솟았다. 이와 같이 말세에 하나님의 심판도 하늘과 땅에서 일어난다.

노아 식구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원인은 정욕과 자율로 인간관계를 맺지 아니한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요.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이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만든 것이요 여기에 보면 멸망 받기로 저주받은 자들에게 세상적인 용사가 많았다.
노아가 평지에서 방주를 지었다. 사람과 동물이 작은 배에 들어간 것과 거기서 견딘 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이적이었다.


제목 : 바벨탑
본문 : 창9:1-11:9
요절 : 창11:8

[1]9:1-29절에 에덴동산에서는 채식뿐이었는데 노아 홍수 후에는 육식을 허락했다.
사람이 범죄해 갈수록 영양가를 더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에게 약속하신 것은 채식과 육식을 허락하신 것과 홍수 멸망이 영원히 없을 것을 약속했다.
육식을 허락하시면서 금하신 것이 있는데 이것은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짐승을 식물로 먹기 위해서는 죽일 수가 있으나 다른 목적으로는 죽이지 못하고 피는 먹으면 안 된다.
피는 육의 생명이므로 죽음에서 나온 생명이다. 생명을 해하지 말 것을 예표한 것이다.
남의 죄 값으로 죽고 그 죽음을 이기고 나온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남의 생명을 아껴줌으로써 자기 생명을 아끼고 보호함이 된다.

20-29절에 보면 노아와 함이 실수했다.  노아는 온 천하에 제일 되는 의인이지마는 성공한 후에 긴장이 풀리고 조심하지 아니했으므로 실수하여 아들대에는 정죄를 받았다.
노아 후에도 보면 성공한 후에 실패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삼손도 사울왕도 다윗왕도 솔로몬왕도 그러했다. 여기 노아의 실수는 죄가 되지 아니한 실수요 의가 되지 아니한 일이지마는 아들대에서는 죄로 구성되어졌다.
그러므로 노아의 실수는 둘째아들 함의 실수다. 함이 아버지의 실수를 이미 보았으면 아버지의 실수한 실수의 그 자체와 그 형태가 자기구원을 이루는데 손해보지 않는 방편을 써서 두 번 보지 않고 자기가 아버지의 실수를 가리어 주었다면 의가 될 것인데 그 형제에게 말한 것이 실수였다.

덮어 가리었다고 해도 아버지의 벗은 것을 보지 아니한 자보다 본 자는 더욱 손해라.  
그 만큼 아버지의 교훈을 자기가 받는 데에 영향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운 자의 죄악이 가장 크다.
함의 자손이 지금까지 저주를 받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멸망을 받았다.
그러므로 행복 된 자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노력하는 자요. 불행한 자는 자타의 구원에 손해가 되게 하는 자다.
자기가 의로운 일을 하는데 상대방이 잘못하므로 은혜 받지 못하는 거기에는 책임이 없다.
자기나 다른 사람이 은혜 받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이것이 축복 받는 길이다.

[2]11:1-9절에 바벨탑건축이 인류의 분산 혼돈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바벨탑 건축 전에는 언행과 사상이 같아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덩어리였다.
그래서 아주 행복했는데 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노아 시대와 같이 하나님이 홍수로 멸해도 죽지 않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노아에게 약속했는데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죄요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지 않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네 욕심을 달성시킨 죄요. 하나님이 멸망시킬지라도 자기는 멸망하지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대항한 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존대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성질에서 바벨탑을 쌓았다. 이 결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산을 주었다.
하나님을 높임이 아니고 자기중심 자기 높임이었는고로 서로 충격 함으로 자멸 하겠끔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희들에게 길인데 이 약속을 믿지 아니했으므로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혼돈을 주었다.
그러므로 멸망을 받았으니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았다. 하나님을 떠난 문화 예술 노력 계획 인간의 모든 움직임 그 전부는 바벨탑과 같다.

제목 : 아브라함과 롯
본문 : 창12:1-14:24
요절 : 창12:1

[1]12:1-14:24절에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출발과 시험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출발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와 자기자손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출발했다.
이렇게 출발한 그들에게 시험이 왔다.
세 가지 시험이 있었는데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한 시험, 경제적인 풍부로 인한 시험, 윤리적인 시험과 권세로 인한 시험이 왔다.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버리는 이 세 가지 요소로 출발했다.
오늘 우리도 신앙출발을 이렇게 해야한다.
신앙출발을 한 아브라함이 벧엘에 와서 살 때 하나님이 가난으로 시험했다.
벧엘에 흉년이 들게 하여 가난이 오게 했다. 이 시험에 낙제했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애굽에 내려갔다가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오니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이 부요를 가지고 시험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이겼다.
우리가 신앙걸음을 걸어가면 처음에는 가난을 받으나 나중에는 부자가 되게 하여 가지고 이 부요를 가지고 시험하신다.

벧엘에서 부요를 가지고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이기고 나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재물을 많이 주셨는데 이 재물을 지키는 사람이 318명이나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윤리적인 시험을 하셨다. 소돔성에 살고 있던 롯이 4대강국에게 포로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원할려고 하면 4대강국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렇게 할려고 하면 자기와 전 가족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인 시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친족들이 잠시 멸시하고 배반한다. 어떤 때는 원수처럼 대적도 한다.

이 때에 우리가 잘못하면 그들을 원수시 대하기 쉽고 복수심이 일어나기 쉽다.
그래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면 거절하기 쉽고 또 구원한다고 해도 자기 몸같이 구원하기가 심히 어렵다. 이것이 윤리적인 시험이다.

아브라함에게 가난의 시험이 왔을 때에 이 가난을 피하여 간 것이 실패인줄 알고 가난을 스스로 취하므로 승리했고 또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부요할 때에 하나님이 그 부요를 가지고 시험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주(主)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부요를 포기함으로 그 시험을 승리했고 윤리의 시험이 올 때 자기의 의사를 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를 죄가 되지 아니하고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은 높혔다.

상대방을 자기처럼 사랑하므로 이 윤리적인 시험을 이겼다. 이후에는 권세시험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부권(富權)도 주셨고 318명이란 큰 집안의 군대를 양성하여 4대강국을 물리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를 하나님 위해서 쓰겠느냐?  너를 위해서 쓰겠느냐?  하는 시험이 권세시험이다.

아브라함이 롯의 포로 됨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4대강국을 격멸 하고 빼앗긴 재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에 처음에 멜기세덱이 나와서 아브라함을 영접할 때에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4대강국을 자기 손에 붙여주심을 믿고 겸손하게 십일조를 드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권세를 주신 후에 이 권세가 누구의 권세임을 밝히실 때에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주신 권세임을 밝혔다. 자기에게 주신 권세가 하나님의 주신 권세임을 십일조를 증표로 드렸다.

그 다음에 소돔 왕이 나타나서 [재물은 다 가지고 가고 사람을 자기에게 돌려 달라]고 말을 했는데 이것은 재산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는 권세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 권세를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그의 재산을 취하면 자기는 좋으나 하나님에게는 영광이 없음을 알고 [신들메 한 개도 가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물리쳤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은 버리라고 하시고 버리니까 주신다. 또 주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때에 영광이 되게 하셨고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가난으로 인한 시험을 피할려고 하다가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은 후에 가난을 자취하므로 그 시험을 이겼고 부요로 인한 시험은 물질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겨 물질을 포기하므로 이겼고 윤리적인 시험은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 이겼고 권세의 시험은 주인을 밝힘으로 이겼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권세임을 밝힘으로 이겼다.


제목 :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
본문 : 창15:1-17:27
요절 : 창15:1

[1]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기 전에 안 믿는 방법대로 사귀었던 친척과 머물렀던 처소를 순종으로 전부 버렸을 때에 하나님이 성결과 재산을 주신 것이다.
(애굽에서 사라를 지키시고 벧엘에서 부자가 되게 하신 것)

[2]하나님의 계명과 순종함에 있어서 거치는 자연은총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떼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성화의 권세를 주셨고

[3]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에 있어서 거치는 재물을 버리고 자기를 돌보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시고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하고 자기를 버렸으므로 이렇게 크신 약속을 하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런 위치를 가졌을 때에 천하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과 복의 기관으로 인정하시고 만민의 구주이신 구원의 씨를 약속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려고 하면 내 인격과 생활이 정돈되고 갖추어져야 계명을 지킬 수가 있다.

담대해 지려고 하면 오랫동안 화평을 이루고 내가 희생할 것을 하고 나면 담대해진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므로 아브라함의 대적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아브라함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요. 아브라함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질의 인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망이 아브라함의 소망이요 하나님의 소원이 아브라함의 소원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진리가 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못한다.  하나님이 진리이시다.


제목 : 아브라함과 롯의 비교
본문 : 창18:1-19:38
요절 : 창18:19

[1]지도자나 선배가 나를 지도할 때 이 지도가 옳은 지도라고 하면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지도하시는 것임을 깨닫는 깨달음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롯은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할 때부터 차이가 있었다. 출발에 대한 사명감에 차이가 있었다.

[2]애굽에 갔다가 벧엘에 다시 와서 부요하게 되었을 때에 물질관과 행복관이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좌우되는 것을 알았고 롯은 물리로 좌우되는 줄 알았다.
행복관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은 물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행복과 쾌락으로 삼았고 롯은 가족단합과 가족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행복과 쾌락을 삼았다.

[3]아브라함은 인권과 부권과 신권과 구원권을 가졌고 롯은 인권과 부권과 신권과 구원권을 가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성민(城民)에게 멸시와 물질탈취와 하나님의 징계와 포로를 당했다.  (구원권은 롯과 만민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구원 얻은 약속)

[4]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비밀이 없는 의논의 대상이 되었다.
조카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천사를 심부름시킨 사람이었고 롯을 멸망 중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도록 하는 구원의 공로자 곧 원인자였다.

롯은 자기와 자기처소가 죄악으로 관영 하여 멸망을 재촉하는 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으며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도 전혀 보지 못하고(알지 못하고) 세상살이에 도취하여 하나님과 멀어졌으며 하나님과 영교가 끊어졌으며 기도하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기도였으며 아브라함의 혜택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영접하였으나 이 천사까지도 성민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하게 하였고 모든 소유와 자기 처와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였고 자기와 두 딸까지도 급한 화는 아브라함의 혜택으로 면할 수 있었으나 종말에는 하나님의 도리와 인도를 범한 무서운 죄악의 조상으로 구원이 욕된 것으로 변하여지고 말았다.

[5]결론: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 있음은 영감에서 시작하여 모든 견해와 행동에 조금씩 차이가 있어 아브라함은 신본주의로 롯은 인본주의로 화해졌는데 종말에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빚어내었다.


제목 : 아브라함의 실수와 회개
본문 : 창20:1-22:24
요절 : 창22:18

[1]20:1-18절에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에 헛된 두려움으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하여 애굽왕 '바로'를 실족케하므로 하나님의 징계로 '바로'에게 손해를 입혔는데 '아비멜렉'에게도 이와 같은 방편을 썼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보호를 믿지 아니하는 죄와 이웃을 생각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일 곧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하여 '아비멜렉'과 그 백성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했다.

그랄왕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므로 깨닫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한 이것을 돌이키면서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책망을 받는 것은 억울함이 아니고 죄값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시키는 일이요, 복음을 가리우는 일이다.  
아비멜렉이 회개할 때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들에게 대하여 조그만한 불평이나 원망이나 미움을 하나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이 들으실 수 있을 만큼 진실한 사랑과 간절한 기도로 아비멜렉의 사죄와 축복을 빌어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물러가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게 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회개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이웃의 피해가 아브라함의 회개로 완전히 회복된 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삭을 선물로 받았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은 치신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은 이웃의 피해가 있을 때에는 그것이 완전히 회복된 후에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러므로 내 실수로 인하여 이웃이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21:1-34절에 아브라함이 진실된 회개생활을 계속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현저히 드러났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오래 동안 겪어보고 절실히 느낀 후에는 아브라함을 심히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과 아비멜렉의 자손사이에 서로 협조하여 침략하지 말자는 언약을 세우자고 간청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것을 책망하고 그것에 대하여 타협을 하고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진실한 회개생활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사람을 경외하고 애망한다.

[3]22:1-24절에 아브라함에게 최종적이요 최대적인 시험이 왔다.  이것은 백세에 얻은 독자를 번제물로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무서운 명령이 떨어졌으나 아브라함은 도리어 기뻤고 두렵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은 과거에 많은 신앙체험과 경험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손해 되는 것이 없고 작고 크고 간에 모두가 합동하여 유익한 것을 순종 경험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 있었으므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명령이 아브라함에게는 큰 축복인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번제로 드리는 일에 있어서 번제로 드리는 것도 어렵지마는 이것보다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에 만족하실 수 있는 번제로 드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번제를 드렸으니 방편은 어떠한가?

(1)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되 억지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고자 했다.
(2)하나님께 번제를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되 힘을 좀 더 많이 써서 더 정성 되게 드리기를 원했다.
(3)제사 드림에 있어서 순서를 진행할 때에 이미 깨달은 순서는 심신으로 정성 되게 행하고 하나님에게 대한 간절한 경외심과 성심 성의의 착한 양심은 이미 실행하고 있는 거기에 있지 않고 앞서 질러가서 현재에 행하는 순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궁구 함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선한 양심은 행해야 할 일을 봉착하기 전에 미래적인 것으로 궁구 하였기 때문에 미래적인 영감이 아브라함을 가르쳐 주셨으므로 모든 행사가 임시적이거나 돌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전부 준비적이요 대망적이었기 때문에 사탄의 궤계를 전부 막아 버렸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잘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이런 성질의 신앙걸음이 승리의 신앙걸음이다. 성공의 신앙걸음이다.


제목 : 이삭의 신앙
본문 : 창26:1-35
요절 : 창26:28

1. 기독교는 소용없는 고생은 피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닙니다.
2. 하나님께서 어려워도 거기 머물러 있어라 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는 괴롭든지 평안하든지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기독교는 고생을 피하는 안일주의의 기독교도 아닙니다. 그럼 기독교는 고행주의도 아니요, 안일주의도 아니요 기독교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앙주의로 사는 것이 기독교라 하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결과는 농사의 백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짐승들도 종들도 많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따라가는 걸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경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3.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이삭의 우물을 메우고 여러 차례 방해를 해도 뺏기면 뺏기고 쫓아내면 쫓겨가고 이렇게 했으나 이삭은 대항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왜?
다 빼앗긴다 할지라도 마찰 없이 살고, 하나님의 복만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우물을 백 개나 가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대하였습니다.
분을 발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삭은 온유하고 겸손했고 평안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함께 하심을 아비멜렉왕이 보고 이삭을 두려워하여 찾아와서 화친을 맺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행동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분명히 함께 하심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디서든지 보여줘야 합니다.
주님을 바래보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합니다.


제목 : 야곱이 에서를 만남
본문 : 창33:1-36:43
요절 : 창35:1

[1]야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축복을 받은 후에 에서를 만났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에서를 만났다고 하면, 에서가 감동치 아니하였을 것이요 야곱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번민이 크지 아니했으나 아비 집이 가까워오고 에서가 야곱을 죽인다고 하는 소문이 들려질수록 번민이 강하였는데 이 번민으로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고통했으니 그런고로 에서를 만날 수가 있었다.

[2]인생의 생사가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사람이 죽는 이것이 고통이 아니고 죽는 것보다 죽기 전 고민 이것이 큰 고통이요 이것이 죽음이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회개하지 않고 에서에게 갔다고 하면 죽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번민과 고통과 고민으로 에서 앞에서 기절했을지 모른다.
얍복 강변에서의 번민과 고통은 지금까지의 죄 값이었으니 지금까지의 사욕적이요 자율적인 자기를 죽이기까지 번민하고 고통 했던 것이다. 자기에게 주관이 있으므로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자는 자기주관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사 몸이 죽는 것 이상으로 번민과 고통을 당하게 하여 자기의 주관을 죽이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자기의 주관을 버리고 회개한 후에는 번민과 고통이 없어졌고 담대하여졌고 에서를 만나니까 에서가 야곱을 후하게 대접했다.

[3]야곱이 축복 받기 전에는 에서와 원수였으나 축복을 받은 후에는 에서와 더불어 화친할려고 7번이나 절을 하면서 노력했으니 이것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일이다.
진리를 양보하면서 화친할 수는 없으나 진리 안에서 진리 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주어서라도 화친할려고 해야 한다.
화친한 후에는 나를 존대하고 대우해도 멀리해야 한다.
에서와 야곱이 화친한 후에 생활을 각각 한 것 같이 삼가 경계하여 멀리하고 살아야 한다.

[4]야곱이 세겜에서 살려고 땅을 사고 장막을 쳤다.
하루는 야곱의 딸 디나가 들에 나갔다가 세겜 성의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이 분하게 여기고 계략으로 세겜 성에 있는 남자를 다 죽이고 벧엘로 도망쳤다.
야곱은 시키시는 대로 벧엘로 올라가는데 원수들이 야곱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고 해치지 못했다. 야곱이 세겜에서 살 때에 딸이 강간을 당한 일과 아들들이 살인을 하게 된 원인은

(1)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밧단 아람으로 갈 때에 벧엘에서 하나님에게 약속한 일이 있었는데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후에 이 약속을 어기고 세겜에서 살려고 그 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런 일을 당했다.
성령의 감화로 약속을 지킬 때는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신다.
그러나 거역할 때에는 저주요 환난이요 사망이다.
야곱이 한 대 맞고 올라갈 때에 원수들이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셨다.
우리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준행 하면 그 전에 잘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

(2)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말에 정확치 못함과 시성에 정확치 못함으로 염풍이 불어온 것이다.
그런고로 자기가 깨끗하면 자기의 소속이 깨끗해지고 자기가 더러워지면 자기의 소속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제목 : 요셉이 팔려감
본문 : 창37:1-36
요절 : 창37:36

*요셉이 형들의 허물을 아비에게 고함(1-5)
*요셉이 꿈을 꾸고 모든 형제에게 고함(6-24)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려감(25-36)

요셉을 박대한 형들과 후대한 형들의 결과가 창49장에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에 대하여 (박대한 형들과 후대한 형들에 대하여) 가르칠 것,
요셉이 꿈을 꾼 것에 대하여, 다른 형제에게 없는 것을 요셉에게 특별히 가르쳐주신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목적이었으나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청결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를 보여준 것이다.


제목 : 요셉이 옥에 갇힘
본문 : 창39:1-23
요절 : 창39:21

*요셉이 애굽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감(1-6)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함(7-18)
*보디발이 요셉을 옥에 넣음(19-23)

[1]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범사가 유익 되는 결과를 맺도록 섭리하신다.

[2]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고난이라고 하나 본인에게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평안과 재미를 누린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외부적으로는 고난이지마는 그 본인만 아는 내부적으로는 평안이다.

[3]계명을 지킬 때에 존귀하게 되고, 존귀할 때에 계명을 어기게 하는 존귀한 대우가 올지라도 이것은 원수 마귀가 주는 것이니 이것을 물리치고 환영하지 말 것이다.
환영하면 심히 평탄할 것 같고 물리치면 심한 환난이 올 것 같으나 이 환난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찾아가는 길이다.

[4]하나님의 뜻을 좇아 계명을 지키는 걸음에 일시의 심한 억울함도 당할 수 있는 것인 줄 알고 이것을 참고 견디면 구원에 없어서는 안될 복의 순서가 된다.


제목 : 요셉이 총리가 됨
본문 : 창41:1-57
요절 : 창41:40

*바로가 두 가지 꿈을 꿈(1-8)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추천함(9-13)
*바로가 요셉을 부름(14-16)
*바로가 요셉에게 꿈을 말함((17-24)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함(25-36)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삼음(37-57)

[1]하나님은 사람을 높힐려고 하시면 문제가 없다.
(1)하나님은 높일려고 하는 그 사람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키시고 환경을 주신다.  바로왕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시고 박사들로 하여금 해석을 못하게 하시고 또 7년 풍년과 흉년을 일으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지상 형편을 주권하고 계신다.

(2)하나님은 높일려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의 심리를 주권 하신다.
꿈을 꾸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모르게 하고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고 또 생각나게도 하시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되게도 하신다.

(3)하나님은 높일려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지혜를 주권 하신다.
모든 지혜를 어둡게도 하시고 밝게도 하신다.

[2]하나님의 사람 요셉의 마음에 아름다움
(1)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했다.  
므낫세의 뜻은 나로 나의 모든 환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했다는 뜻이다.
요셉이 장자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자기와 아비 집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은혜를 입어 환난을 벗어나기를 심히 사모하였기 때문에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했다.

(2)차자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했다.  
에브라임의 뜻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케 했다는 뜻이다.
요셉이 차자(次子)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것은 타국 애굽에 와서 창성케 된 모든 것이 항상 마음에 뿌리깊게 박혀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던 것이므로 그 이름을 수고한 땅에서 하나님이 나를 창성케 했다고 하는 의미로 작명한 것이었다.

[3]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의 형편을 교체시켜서 주시고 요셉이 여러 형편을 믿음으로 통과하므로 사람이 되고 난 후에는 하루만에 총리로 세우신 것이다.
이 요셉은 자기의 경력을 항상 마음에 새겨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있었고 무심치 아니했다.
또한 항상 아비 집을 생각하고 그의 가족에 대하여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궁금하여 자기의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했다.
요셉은 항상 자기와 자기가족과 자기민족과 타국민족과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늘 생각했으니 큰 뜻을 품었다. 보통 사람들은 등 따시고 배부른 것으로 만족하나 요셉은 자기를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과 자기와 자기에게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을 항상 생각하고 큰 뜻을 품었으므로 자식들의 이름을 므낫세라, 에브라임이라고 했으니 위대한 사람이었다.


제목 : 요셉이 형제를 대우함
본문 : 창42:1-45:15
요절 : 창45:15

[1]요셉에게 된 일들이 일반적인 보편의 사건으로 사람들이 보게 되나 그 속에는 우주와 영계보다 더 큰 목적의 운동이 역사하고 있다.
평범한 그 일이 우주의 존재목적이 이루어졌고 천하만민을 구원할 구원이 그 속에서 역사 했다.
그런고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평범한 일이라도 예사롭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2]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처리한 일을 보면 감정을 초월하여 심사적이었다.
오늘 신학자들은 뱀같이 지혜로우나 비둘기같이 순결한 것은 뒤떨어졌다.
반면에 정통 신학자들은 감정을 초월한 심사성이 없다.
신비주의라고 하는 것은 물리에 맞추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3]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정평정가 했다. 속이지도 아니했고 속지도 아니했다. 요셉은 심사적으로 일을 했고 또 그가 일을 다루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쓰는 방편과 같이 했고 별스러운 방법으로 하지 아니했다.
그 일 속에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알찬 일을 했고 자기만이 아는 실속 있는 일을 했다.
평범한 그 속에 주님과 자기만 알고 주님과 맺는 연결성이 있어야 하고 주님과 자기만이 알고 은밀히 그 일을 추진하여 나가야 한다.

[4]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인간적인 행사 속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가 있음을 알았다.
자기의 형들에게 자기가 요셉임을 나타내고 한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45:3-5)
지금까지의 이 운동이 형제들을 구원할 섭리하심임을 요셉은 알았다.
만일에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를 했다고 하면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수했을 것이다.
형들이 회개하지 아니했다고 하면 형들을 회개시킨 후에 형들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평범한 일 속에 하나님의 특수 알맹이가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하고 모든 일에는 감정을 초월해서 심사적으로 해야 하고 애정이 흐리지 아니해야 한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지니 원망이나 시비할 것이 없고 전진만 할 것뿐이다.


제목 : 바로왕이 요셉의 부형을 영접함 (요셉의 정치 원리)
본문 : 창45:16-47:26
요절 : 창47:25

*바로가 요셉을 명하여 그 아비를 영접함 (45:16-46:7)
*애굽에 내려간 야곱 자손의 이름들(46:8-27)
*요셉이 고센에서 아비를 영접함 (47:1-6)
*요셉이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에게 보임(47:7-12)
*요셉이 양식으로 짐승을 바꿈 (47:13-19)
*요셉이 양식으로 밭을 바꿈 (47:20-26)

[1]요셉의 정치함에 대하여
가정이나 학교나 사회나 교회나 어느 기관단체든지 정치는 다 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경영을 말한다.
요셉은 그 당시 애굽의 총리로서 정권을 가진 사람인데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시기 불만 불평을 받지 아니했다.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심중으로 요셉을 좋아했고 존경했으며 요셉을 대 환영했으나 요셉은 월권치 아니했고 자기 지위를 지켰으며 자기에게 관한 일은 언제든지 피동적인 정치를 했다.

[2]요셉은 월권하지 아니했다.
아무리 인기가 있고 대환영을 받았지마는 공경을 지켰고 권세를 남용하지 아니했고 월권치 아니했다. 권세를 남용하고 월권하는데서 권세를 빼앗긴다.

[3]자기 지위를 지켰다.
상하의 지위를 구별하여 지켰다.
상하의 지위가 혼돈 되면 그는 망하고 만다.
사람들을 보면 자기 지위에서 인기가 좀 있고 환영을 받게 되면 위를 침범하고 아래를 침략한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아니했다.  그리고 자기의 지위를 지키되 상하결합의 경계를 들어내면 이 사람은 무지자다.
겉으로는 경계의 들어 남이 보이지 않고 오직 보이지 아니하는 내부에서 자기 지위를 지키는 자로 자기의 할 일만 행하는 그 길에서 자기를 고치고 행하면 다른 사람들이 보수하든지 말든지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융합된다.

[4]요셉은 자기 일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피동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은 자기가 따져 주었지마는 자기의 유익은 자기가 따져 유익 되게 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은 다른 사람이 따져주어 요셉을 유익 되게 하게끔 했다.
책임에 있어서 자기 단속은 자기가 따져 강하게 하고 책임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단속은 무르게 했다. 유익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유익은 강하게 하고 유익에 있어서 자기에게 대하여는 무르게 했다. 요셉은 이상 4가지 정치원리로서 애굽을 다스렸다.

[5]요셉은 언제든지 보호색을 입었다
형들 가운데 몇을 택하여 바로왕 앞에 보인 것이다. 이것이 있어야만 후에 칼을 입지 않는다.
우리 성도는 뱀이 아니더라도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거짓말하거나 속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지마는 속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모든 사람들이 불의의 방법으로 나를 속일려고 하면 나는 불의를 쓰는 것 같으나 실은 불의를 쓰지 아니하는 자로서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다.

[6]요셉은 항상 법적 애정을 가졌다.
항상 법을 통과한 애정을 가졌다. 7년 대풍 때에 곡식을 헐하게 사서 쌓아두고 7년 흉년 때에 비싸게 팔았다.
처음에는 곡식의 대가로 짐승을 받아 들였고 그 다음에는 토지를 담보로 잡고 그 다음에는 노동을 시키고 그 대가로 곡식을 주었다.
요셉의 정치에는 구제라는 것이 없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살릴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법적 애정을 가졌고 법적으로 했으므로 질서를 회복하고 유지했다.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어느 단체든지 법이 있으니 법을 지켜야 하고 법을 통과하여 생활을 해야 하고 법적으로 다스려야 하고 법적인 존경을 해야 한다.


제목 : 요셉이 약곱의 축복을 기다림
본문 : 창47:27-28:22
요절 : 창47:30

*요셉에게 야곱이 유언함 (47:27-31)
*요셉이 두 아들을 야곱에게 보임 (48:1-14)
*야곱이 요셉을 위하여 축복함 (48:15-22)

[1]유대 풍속에 대하여
(1)형이 죽으면 형의 대를 이어주기 위하여 형수와 동침하여 아들 낳기까지는 법적 동침할 의무가 주어진다. 아들을 낳은 후에 동침하면 하나님이 벌을 하신다. 죄가 된다.
(2)손자를 데려다가 아들을 삼는 풍속
(3)자기 아내를 누이로 삼는 풍속(법칙) 누이로 촌수를 될 수도 있고 아내로 할 수도 있다.  아내보다 누이동생으로 촌수를 대면 가족적인 관련이 있고 남편만 관련이 있을 때는 아내로 촌수를 대었다.  
아브라함이 유대법으로 아내를 누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죽을까봐 겁이 나서 누이라고 함이 나빴다. (열 두 지파 가운데 단이 빠지고 므낫세가 들어갔고 열 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가 빠지고 바울이 들어갔다)

(4)지방마다 풍속이 다르고 법이 다르므로 이것이 성경에 배치가 될 때에는 버리고 그렇지 아니할 때에는 전부 지켜야 한다.

(5)요셉은 세계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로서 존귀한 자였고 아버지 야곱은 존재 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으나 요셉의 상식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대가 아버지에게 있는 줄 알았고 메시야 계대가 유다에게 있는 줄 몰랐다.

그래서 구원 계대 그 일 때문에 야곱에게 축복을 받을려고 했다. 또 신앙에는 계통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축복을 받고자 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구원 계대를 시키시는 이것이 축복인 줄 알고 축복 이것이 알맹이인 줄 알고 이 축복 받기를 노력했다.  

요사이 보면 신자나 불신자중에도 부모를 무시한다.  '시대에 뒤떨어져있다'고 하면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한다.
지위적으로는 부모로 자녀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권위적으로 소유적으로는 부모가 자 식 밑에 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이 그 가정에는 없다.
지위적으로 권위적으로 실질적으로 소유적으로 자녀가 부모 아래에 있고 부모가 자녀보다 중수가 더 위대하다고 느끼는 자녀가 드물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아니했다. 요셉은 총리대신이지마는 자기의 복과 화가 아버지의 장중에 있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가 축복하지 아니하면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셉은 국가적으로는 왕 다음에 가는 권세를 가졌으나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주권에 절대 복종했다. 윤리적 종교적 계통이 있으니 이것이 언제나 유지될 때에 그 가정은 행복하고 축복을 받는다. 경제적 권력은 아버지의 것이니 아버지의 주권으로 모두 사용해야 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사용권을 양도할 때에 사용해야 한다.

종교권은 아버지와 아들의 순서가 뒤바뀔 수 있으나 경제적 윤리적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는 아버지에게서 경제나 윤리가 나왔으니 그 계통을 무시하면 안 된다. 질서가 바로 되지 못하면 언제나 망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망한다.

(4)므낫세를 아들로 삼고 단을 12지파의 조상으로 하지 아니한 것을 야곱도 요셉도 몰랐으나 2000년 후 12사도 이후에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전부 계획적이요 예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은 철저하고 대범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측량할 수가 없다.
오직 현재에 순종하므로 따르는 것이 복이다.
사람들이 짧은 시간과 공간에 맞추어서 보면 자기네들의 하는 일이 옳고 맞는 것 같으나 영원 장래를 두고 보면 어느 것이 옳고 바른 것인지 사람들은 모른다.  하나님만이 안다.
하나님의 지도하심은 이것이나 저것이 같은 것으로 보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면 이것이 연결되고 연결되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영원전부터 영원후 까지가 계획적이요 조직적이다

(5)하나님의 정하신 지위가 항상 있다.
신앙 계대가 있는 것도 기억하고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위치가 있는 것을 알고 신앙의 축복을 받고자 노력했다. 야곱은 앞도 못보고 작대기를 짚고 겨우 일어서는 힘도 없는 존재이지마는 요셉은 상하의 지위를 지켰고 신앙 계대가 아버지에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므로 요셉처럼 부모에게 주권이 있는 것을 알고 부모의 지배에 효성을 가져야 한다.
야곱이 빌 때에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었다.
이것은 야곱이 신앙계통을 중하게 여겨 신앙계통 축복을 빈 것이다.
가정에서도 신앙계통을 이어가야 한다. 신앙의 줄기가 복의 줄기다.


제목 : 야곱이 12아들에게 예언하고 죽음
본문 : 창49:1-32
요절 : 창49:1

[1]야곱이 12아들에게 축복한 것이 예언이요 축복이다. 야곱이 12아들에게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1)야곱이 맑은 마음을 가진 영으로 살았음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영감 시켜 12지파를 세울      예정을 예언하게끔 영감 시켜 주었다.

(2)야곱이 12아들에게 예언한 것이 세밀히는 알 수 없으나 아들들의 예언전까지 지금껏 행동을 보고 그 결과를 판단한 것 같이 보여지기도 한다.

그 사람의 행동 결과로 올 것을 판단한 것을 보면 행동의 결과의 보응이요 이것은 하나   님의 예정에 근거하였으니 행동도 예정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언제든지 이루어지는 것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며 이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고 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에는 원인과 보응이 있는데 이것은 조직적이요 순서적이다.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또 이 행동은 영원 장래의 원인이 되는 행동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선악의 이루어짐이 그 사람이 그 시간에 힘쓰므로 선악이 이루어진 것이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잘못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전 예정이 이렇다고 하는 것의 표시가 현재에 나타나고 있다.
현재란 하나님의 영원전 예정에서 뿌리박아 있는 것이요 영원 미래를 보고 맺고 있는 것이니 현재란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 모른다.

진리는 인격과 인격의 관계성을 말했으니 자연 계시 가운데에 있는 법은 인격대 인격의 관계성을 작성해 놓은 법이니 이 법을 공부하여 자연법에서 특수법을 보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고로 자연계시인 법을 공부하여 특수법인 성경을 공부할 수가 있다.
야곱의 12아들 중에 축복은 유다에게 있으니 유다가 메시야의 계대인 것이다.


제목 : 요셉의 죽음
본문 : 창50:1-26
요절 : 창50:24

*요셉이 야곱을 장사함 (1-14)
*요셉이 형제들에게 고향으로 가라고 함 (15-21)
*요셉의 죽음과 유언 (22-26)

[1]요셉은 몇 가지 신앙을 가졌다.
(1)사람이 아무리 해할려고 해도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자기를 해칠 자가 없다는 것을 믿었다.

(2)나를 해하는 원수를 선대할 권세만 있지 해하는 권세는 없음을 믿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알았다.  

(3)하나님이 요셉과 요셉의 자손들에게 후대하실 것을 믿었다.

[2]기독교의 구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외부에 나타난 형태가 위대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위대한 것이다. 인간들은 외모로 평가하기가 쉽다.

주님도 초림 하실 때에는 말구유에 오셨고 잘못하면 사생아로 오해받기 쉽고 촌에서 목수 일을 거들면서 자랐으나 세계 만민을 구원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눈에 크게 보인다고 큰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요 눈에 작게 보인다고 작은 것으로 볼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 중에서 제일 크신 분은 하나님이요
그 다음은 구속이요
그 다음은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뜻(방편)이다.
이 세 가지에 속했으면 이것이 크고 가치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요셉은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죽은 후에 고향 땅에 묻어줄 것을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