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주해 제3권

2007.06.0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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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 주해 제3권  
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27
게시일 : 2001/12/30 (일) PM 04:52:02  (수정 2006/02/19 (일) PM 07:54:27)    조회 : 127  


계시록 주해 제 3권 - 백영희목사님

제3부

심판주와 심판 시행에 대한 계시자와 이를 통하여 유일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택자 구원하시는 것을 보이는 계시 4장~5장 이 부분은 6장~22장에 대한 머리말이다. 세상에 남은 역사가 어떠한 것을 보이기 전에 먼저 그것의 원인자이신 하나님의 그 속성과 영광이 어떠함과 그의 하실 일에 대한 계시자(곧 전개시킬 자)가 누구심을 보인다. 4장에는 앞에 될 일의 원인자이신 지성부신(至聖父神: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대한 말씀이고 5장은 될 일에 대한 계시자 곧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보여준다.

제4장

해석.

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2장~3장까지의 회개의 계시를 보고 난 후에 란 말이니 회개 후에 볼 수 있는 순서를 보이고 있다. 이는 기독교에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는 먼저 객관의 은혜 역사가 우리 주관이 이해 못하게 주입되고 그 주입된 은혜가 주관이 이해하며 소유하며 완성의 결과를 맺기까지에는 반드시 주관 행사인 신망과 회개의 순서를 통과하여서만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불가피의 순서와 같다.
주님과 자기와 가리어진 담도 영안과 지안(智眼)과 천국의 가리어진 담도 부패성과 본죄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영안과 지안을 여는 양약이며 천문도 열고 하나님도 볼 수 있는 권세이다. 회개한 것만치 신관도 자인식도 천국과 세상관 만물관이 올발라진다. 성령의 훼방죄는 죽는 시간까지 회개를 거부하는 죄다.

회개는 유일로 권위있는 기도가 되고 성신과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천부의 아들의 권세를 실력으로 가지는 방편이다. 극기 혹은 자기를 부인도, 세상을 이김도, 주님과 천국을 보고 아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앎에는 보는데 있고 보는 것은 눈이 열려야 되나니 영안이 열리는데는 회개의 안약을 발라야 한다. 죽은 것이 사는 것도, 얻는 것도 이김도 영광도 다 회개의 관문으로만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회개의 순서후인 "이 일 후에" 천국이 보여졌다.

2. "내가 보니"
특히 여기에 본 자를 복수로 하지 아니하고 단수로 말함에 있어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평범히 지내 볼 것은 아니다. 여기에 주의하여 볼 점은 천계가 열리고 보여지는 것은 누구의 의속(依屬)이나 의뢰 협동(協同)으로 볼 수 있음이 아니고 개인적의 독립 신앙으로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유는 남의 회개가 자신에게 회개케 하는 권면은 될지언정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 유효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영안이 열리는 것도 개인적인 주를 알아야 한다. 마리아와 요셉은 동행과 친족 중에 있는 주를 방심하였다가 주님 없이 걸은 걸음은 다 허사로 도로 돌아갔다. (눅 2:44~45) 아무리 한 식구일지라도 신령한 은혜는 개인 회개에만 보상되는 것이다.

3. "하늘에"
이것은 종교적 이상이나 심령적 상태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영화로운 하늘 장소를 의미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곳에 올라가셨고 (행 1:9, 엡 4:10, 고후 12:1~4) 그곳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고 (창 28:17, 시 80:14, 사 66:1, 마 5:12~16, 45, 48, 23:9) 그곳에 천사들이 있고 (마 14:36, 28:2, 막 13:32, 눅 22:43) 그곳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거하며 (마 5:12, 6:20, 18:10, 엡 3:14, 벧전 1:4, 계 19:1~4) 그곳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요 3:13) 그가 그곳에 성도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다시 성도를 데리러 오시고 (요 14:1~3, 마 24:30, 살전 4:16, 빌 3:20~21) 우리들은 영원히 살 본향이 그곳이다. (빌 3:20, 히 11:16) 우리가 하늘나라에 관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 현세에서는 기독신자가 성령님의 감화로 말미암아 심령으로 그곳을 알며 믿음으로 그곳을 덧입어 그곳의 모든 은총인 행복을 심령으로 현재 누릴 수 있는 것이며 (고후 5:2~4)
② 기독 신자가 별세하는 때에는 그 영혼이 완전히 그곳에 들어가며 (눅 16:21~22)
③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신자의 몸까지 부활하여 영혼과 몸이 겸하여 천년왕국 후에는 그곳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산다 (계 21:4)
④ 그 영광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이 당하고 있는 지옥의 고통을 볼 수 있는듯 하다. (눅 16:23, 25)

4. "열린 문이 있는데"
하늘나라를 한 성같이 보고 그 세계를 땅에서 볼 수 있게 되는 특별 섭리를 말함이니 이는 중대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하늘 문이 열리었는데 이민 부패(以民:이스라엘백성, 腐敗)에 동참치 않고 회개를 외치는 에스겔에게 천문이 열렸고 (겔 10:1) 예수님께서 회개의 근본인 구속의 희생의 특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또 천문이 열렸으며 (마 3:17, 눅 9:35, 요 12:28)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열렸고 (행 7:56) 요한이 복음으로 인한 정배 생활중 밧모 섬에서 하늘이 열렸다. (계 4:1) 이를 보면 천문이 열린 특수한 때는 회개 운동의 특수 희생의 때다. 이를 보면서도 천국에서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얼마나 크고 기쁜 일이 되는 것과 회개를 멸시하는 자의 용납지 못할 곳인 것도 더욱 보여진다.


5."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가로되" (계 1:10 해석 참조)

계 1:10에는 동일한 나팔소리가 정반대인 뒤에서 들리고 돌이킬 때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보여졌다. 그러나 계 4:1, 골 2장 ~ 3장까지의 회개 순서를 통과한 후에는 반대의 반대인 바로 보이고 바로 들렸다. 이는 특히 회개로만 하나님과 동지 되고 하나님과 천국을 바로 향하는 일이 되는 것을 보인다. 계 1장 10절에는 몸을 돌이킬 때에 음성을 바로 향하며 바로 보여진 것과 계 4:1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여도 바로 들리고 바로 보여졌으니 이 점을 예사로이 여겨서는 안된다. 그거는 "이 일 후에"라는 그 머리말이 있는 데에 중대한 순서 후이기 때문인 것을 보인다.
회개는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는 것이다. (갈 5:24, 6:17) 회개는 그리스도와 동지 되는 순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밀접한 영교를 이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특권이다. 이 권세를 무엇에게나 빼앗기는 사람이 가장 어리석은 낙오자이다.

6. "이리로 올라 오라."
여기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요한은 교회 대표로 계 6장 이하 환난 기록 전 승천했으니 이는 성도들은 환난 전에 휴거될 것이라고 하나 여기는 특히 회개한 자가 천국을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있는 의미를 강조한다.

올라간 것은 주 재림 시에 성도가 공중 휴거를 대표함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으로 성도가 환난에 동참하지 아니하는 예표라 하는 해석은 잘못이다. 계 16:15 여섯째 대접재앙 중에도 성도가 있다. 이 계시 성구는 사도 요한만이 계시 받기 위해 올라간 것이고 일반 성도에게는 이 후에 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와 같은 성질인 심령 교통과 내왕(來往)은 일반 성도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입신(入神)중에 경험한 것이라 하여 주장하거나 또 수락하여서는 안 된다. 이는 불건전한 신비다.
오늘에는 새로운 계시가 없고 성경 충족성을 계 22:18~19같이 수진하여야 한다. 꿈 환상 음성 감동들을 의종하거나 이것들로 계시 말씀같이 여김은 대 이단이다. 이럴 때마다 이런 일들을 성경 말씀으로 비판하여 성경이면 완패한 내 심령에 직접 계시인 성경을 못 깨닫는 고로 간접 계시인 이런 것을 보충으로 주신 것인줄 알고 계시 말씀을 깨달아 굳게 잡고 그를 버리고 만일 이것들이 계시 말씀과 부합지 아니할 때에는 악령의 유혹이나 주관의 관념 산물인 줄 알고 이런 일이 없도록 주님 앞에 기도하여야 한다.
요한이 올라간 것은 어떠한 모양이었는지 미상(未詳)하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사도 바울이 휴거 된 거와 같은 성질의 방법인가 한다.

7.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이 후에"라는 말은 2장 ~ 3장까지의 교회생활 이후에 란 말이니 곧 교회생활인 회개 생활은 그의 특색이 희생과 고난, 곧 십자가의 생활이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회개 생활 후에 받을 소망을 보이는 것이다. 특히 "마땅히 될 일을" 하는 언사는 이행 불변인 주의 말씀이면 다 신실한 것인데 마땅히라는 말을 한번 더 붙인 것은 소망에 대한 확신을 성도로 하여금 굳게 잡아야 할 일은 모든 고난의 회개 생활에 특히 필요함을 가르쳐 특별한 은사를 가한 것이다.
살전 5:8에 소망을 전투자의 생명에 중요부분을 보호하는 투구라고 비유하셨다. 이와같이 소망은 천성 백성들의 전투적 생명을 보호하는 중요성을 가진 것이니 범사에 소망을 인한여 후회하고 소망을 인하여 의를 쌓으며 견뎌야 하는 것이다. 소망으로 기인하지 않은 회개는 일종의 독선으로 하나님의 대 계획에 적이 되어지는 것이다. 소망은 중생한 자가 첫째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과 둘째는 자신 성화와 셋째는 천국의 모든 기업들이다.

"내가 네게 보이리라." 고 2인칭으로 계시하신 것은 회개 생활에는 소망을 각자의 지식과 지혜와 신앙과 체험으로 독자적 소유를 하여야 할 것과 또 인간에게나 무엇에게 소망의 견고함을 구하지 말고 직접 주님이 주신 것이니 은밀히 계시는 주님 앞에 은밀히 궁극적(窮極的)으로 가진 진리 지식과 양심으로 고요히 비판하면서 주님을 대면하여 주께 구할 때에 세상도 천국도 현재의 생활과 심판 공평된 보응도 명확히 발견되고 따라서 소망이 확실할 때에 바울같이 자기와 싸우는 자가 되고 (롬 7:24, 고전 9:27) 희생에는 감옥과 죽는 것을 날마다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빌 4:4, 고전 15:31 참조)


2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1.'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계 1:10에는 성령의 감동되어 그리스도와 교회를 보았고 또 회개할 것을 보았으며 계 4:2에는 회개 순서 후인고로 성령에 감동되어 천계에 하나님과 그 설비의 영광들을 보았다 지금도 영감으로만 이 순서를 통과할 수 있고 영감된 자에게는 이것만이 안전(眼前)에 전부되는 것이다. 눈이 열려야 보고 보는 데에서 탐심이 생기고 탐욕에서 취할 노력이 생겨지고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고후 5장 4절에 바울은 부활의 사람과 천국을 무거운 짐진 것같이 탄식으로 덧입기를 힘쓰는 그 생활은 영안이 열린 성신감동에서 발원하였던  것이다. 그 성신 감화는 회개의 노력의 보상으로 (행 5:32) 충만에서 충만에 점진하는 것이니 일정한 광음(光陰)에 이 영감은 그 맺혀진 성화와 선행에 얼마나 싸일 것이며 진보될 것인가 진합 태산과 유사(流砂)평지같이 이 영감의 자격(刺擊)이 있고 없는 자의 천국 차별(差別)은 형언 못할 것이다.
바울은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일각을 전금(全金)으로 천국 보화를 매수하였건만 영감이 부족한 사람은 일생을 광음이 아까운 감이 없이 문득 사망에 이르나니 그 장래가 얼마나 비참한가 세월은 내세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자금이다. 이 재촉하는 지혜가 오직 회개가 필요한가 기독자는 회개를 전공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 절의 성신 감동은 천계를 보이기 위한 회개자에게 주신 선물이다.

2.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천국이니 성도들이 천년왕국 후에 갈 곳이다. "베풀어 놓은 보좌"는 하나님의 영광의 지위이니 창조자의 위와 모든 창조물을 통치하실 총주권적 지위를 말씀하심이다. 보좌라는 구약 4차 유(有) (시 11:4, 사 6:, 겔 26:1, 단 7:9)

3.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니 특별히 앉으신 이라 함은 그의 대주재권의 부동소하는 위용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를 천계의 첫 순서에 기록하신 것은 1장, 3장, 6장의 약속계시를 하신 이가 만물을 심판하며 통치하실 절대자이심과 약속이행에 부동불변하실 것을 보여 이 계시를 보고 듣는 자마다 신중히 확신을 가지게 하려하심이다.
요 1:12에 오신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것이 곧 이 약속을 에누리 없이 믿는 것이요. 에누리 없이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그 결과적으로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확신을 강조하는 계시이다.


3절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같더라."

1.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같고"
이것은 원어로 '호카데메노스 호문이오스 호라사이' 라고 하는데 여기 한역은 오역으로 알아지기 쉬운 어법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자역하면 "앉으신 이는 보이기가 같고"라고 함이 가하다. '보이기가'란 말은 모양이고 번역하면 독자가 하나님을 혹 종의 물적상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보이기가'라 하면 그런 오해를 면한다. '보이기가'란 말의 헬라 원어 호라사이는 환상으로 보임을 가르친다. (계 9:17, 행 2:)
하나님은 물적 형상이 없으시고 그 영광만이 계시된대로 요한의 영안에 보인바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볼 뿐이고 그의 본질은 볼 수 없다. "앉으신 이"의 해석은 본장 2절 해석 참조할 것이다.

2. "벽옥"
원어로 '이아스피디'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자비의 성결 영광을 상징된 것이니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볼 때에 언제나 성결을 그 본성으로 하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결적인 자비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결적의 자비를 바라보는 자를 또 용납하신다.

3. "홍보석"
원어로 살디오라고 하는데 그 홍색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위를 상징함이니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마다 자비 엄위하신 하나님이면서 지공 무사의 심판의 엄위하신 성결의 영광을 가지시니 하나님으로 알아 성결과 경외로 바라보아야 한다.

4. "보좌에 둘린 무지개"
이 무지개는 겔 1:28의 말씀을 인용한 듯하다. 이 "무지개"는 하나님의 신실 (약속이행에 신실)과 자비를 상징한 것이다. (창 9:13)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사람과 관계하심에 있어 계약적으로 하신다. 이 계약은 스킬드 박사의 말대로 하면
① 행위 계약 (창 2:16~17) 인간이 계명(율법)을 순종하면 생명을 얻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게 되는 계약이며
② 은혜 계약이니 그리스도의 은공(恩功)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들을 무조건으로 용서하시고 축복하는 계약이며
③ 자연 계약이니 주님께서 그 지으신 우주의 형상을 불변의 법칙대로 유지하심이며 (창 8:22)
④ 평화의 계약이니 인생과 우주가 그 본래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또 그로 더불어 거룩하게 평화로이 함께 있던 원상회복(原狀回復)되게 하리라는 계약이다 라고 했다. 우리는 스킬드와 같이 하나님의 계약을 사종으로만 분해할 수 없다. 분해한다면 그 수효가 무궁하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대하여 주권적 의지로 세운 계약을 주권적 능력으로 시행하나니 그 계약은 성문 계약인 신구약 66권을 상징한 것이다. 이 무지개를 신구약 성경으로 하지 아니하고 상지이라하여 그 형형색색의 분해로 나아가면 탈선할 우려가 많다.
⑤ "그 모양이 녹보석같더라." 이는 무지개의 모양이니 곧 신구약 성경이 크게 나타나 보이는 총괄적 의미가 보기의 생명과 성결이더라 하는 표시를 녹보석같다고 상징한 것이다. 성경은 정죄와 구원 계시되어 있으나 계시 목적은 하나님의 의로 죄인을 구원코저 하시는 자비와 신실의 계약이다.


4절 "또 보좌에 둘러 24장로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24장로들의 흰옷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1. '이십 사 장로들이 있고'

24장로에 대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① 크레다너스는 상징적 환상으로만 간주하였고
② 바이스는 후대에 ??구라 하고
③ 찰스는 후대의 저자(사도시대의 저자가 아님)의 필적으로 보았다.
④ 매튜 핸리는 말하되 여기 24장로들의 앉은 보좌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런 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을 즐거워 함과 및 계속적으로 그를 알고 접근하는 생활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⑤ 모팟트는 말하기를 본서 저자가 바벨론의 24성신 신화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상 다섯 가지 해석은 믿을 수 없다. 24장로는 실재하여 특히 천사들과 그 성격과 의복이 달라 구속 받은 표시가 있는 자이며 또 승리자로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있어 하나님과 접근된 점과 섬기는 점을 나타내었으며, 이는 승리한 전성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24수는 구약 12지파에 소속된 성도와 신약 12사도에게 소속된 성도를 총상징수요, 보좌는 계 3:21에 "이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을 것을 약속하신 그 실현이다.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군천사보다 지위와 영광이 높으며 하나님을 접근하는 일과 섬기는 일이 천사를 초월하여 부자와 부부의 관계를 가진 영광자이다.

2.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 받은 성결을 의미하고

3.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면류관은 승리와 왕권을 상징함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왕권인데 믿음으로 얻어가진 것이니 그리스도의 것을 얻는 방법은 계 3:21절 그대로 진실되이 회개하여 신앙생활에 승리한 자를 가르켜 말한다. 이 전쟁은 두번 통과는 없다. 차세(此世) 일차실패는 영원 실패로 결정된다.

4. "앉았더라"
이는 사명과 역사를 완전히 마치고 성결과 영광과 권위를 겸하여 주께 받아 이제는 다시 곤고같은 일이 없는 평강과 다시 변동이나 동요가 없을 견고한 지위를 말한다. 거기는 한번 작정되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한다.


5절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1. "보좌로부터"
보좌로부터 나오는 이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를 말함이니 부절히 통치와 섭리 운동과 선전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리고 있음을 말한다.

2. "번개"
성화의 역사를 말하고 (겔 1:13) 뇌성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음성을 상징하고 (시 29:3~1) 음성은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을 상징한다. 지금도 지상 교회에 이 세 가지 운동은 계속하고 있다. 성경은 진노와 자비의 두 음성이요 이 말씀과 함께 성령의 감화는 번개같이 신속히 역사하신다. 택자에게는 영감과 자비의 구원 음성으로 권고하고 불택자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심판의 성신으로 역사하신다. 재세시 차 음성에 관계를 맺음같이 천계에서도 맺어진다. 주의 자비와 영감에 순응하고 진노에 두려워 떨어 피한 자만이 그 나라에 용납(容納)할 것을 의미한다.

3.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함인데 (등불로 말함은) 어두운 것이 하나도 용납되지 못하게 진리로 비침이요. 모든 비밀과 지극히 세미한 것까지 다 그 앞에는 발견되게 하심을 의미하는데 특히 보좌 앞에 있다함은 피조물과 하나님의 사이에 이 빛으로 인하여 털끝만치라도 불의한 것을 끼우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기지도 못하여 상달하지도 못하는 것을 상징함이다.


6절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1.'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이를 원어대로 개역하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와 같은 것이 있고 함이다. 성막 또는 성전에 인조 바다가 있다. 제사장들이 제사할 때마다 여기서 먼저 정하게 씻고 후에 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하는 법이다. 수정은 맑고 투명한 것을 의미함이니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상징하고

'유리 바다' 같은 것은
①첫째로 요동성이 없는 하나님의 정치로 인한 순서인 것과
②인조 바다는 물이니 부정한 것을 씻을 수 있으나 이는 유리 바다니 씻을 수는 없는 바다로 성전에서는 씻어 정하게 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는 순서로 놓여 있는 바다이나 여기는 그 바다에 와서 씻지는 못하고 불의한 것이 그 바다를 통과하지만 못하게 되니 곧 불의의 방어책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③은 거기에는 모든 정체가 환하게 비치는 고로 누구나 자기를 다 알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지 못한 자나 그리스도의 피와 관련되지 아니한 것은 스스로 가책을 받아 통과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보좌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이 바다를 통과하여야 하며 재세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씻을 수 있는 바다같이 보혈로 말미암아 원죄와 본죄를 깨달을 수도 있고 사함 받을 수도 있고 회개와 칭의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세상인 기회를 지나 놓은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은 천국의 입문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막는 역사와 정죄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나 재세에 주의 보혈로 씻은 자만이 이 수정 같은 유리 바다 같은 방어선을 통과할 수 있고 제세에서 불신한 자마다 그 시에 자기 죄를 환하게 깨달아 그 자리를 통과 못하고 어두움으로 스스로 돌아가게 된다(요 3:18 참조).

2.'네 생물' 여기 대한 해석은 동일하지 않다.
1)일반적인 견해들
①크레다너스는 이를 단순히 상징적 의의를 가지어 피조물들을 대표할 뿐이고 실재물은 아닌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사6:2을 보면 이들은 스랍이나 그룹과 같은 실존이다. 요한이 본 것은 천계 실존의 상징 표이다.
②어떤 이는 하나님의 섭리 행사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한 상징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③이 생물들이 피조계를 대표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네 생물은 실존하는 것이며 또 그 사후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확실히 알 몇 가지가 있다.

2)'네 생물'이란
①본절, 보좌 가운데 있다고 하였으니 하나님과 가장 접근하여 있는 영물이며
②8절에 주야로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영물이며
③계6:1과 6:3과 6:5, 7절을 보면 인을 뗄 때 개인하시는 그리스도와 협력한 것이 나타나 있다.
④어떤 이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 운동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고 실존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실존이면서 그리스도의 생명 운동을 보조 역사하는 일과 구속받을 피조물의 생명을 가지는 일에 협조하는 일에 사역을 맡은 실재인 영물이다.

계5:11-12에 보면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천사와 24장로와 네 생물이 연합하였고, 13에는 모든 피조물이 연합 찬송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건대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함이 아닌 것은 하나님 당신 섭리로 당신을 찬송함이 아니고 피조물들이 찬송함이 분명하고 또 피조물을 대표한 상징도 아닌 것이 분명함은 찬송할 때에 구분된 조직체에 눈이 있는 것이니 이는 쉬지 않는 관찰과 중단 없는 경성과 통찰하는 자이며 네 영물의 각자의 특성이 또 구속받은 자의 가져야 될 네 특성을 가졌으니 구속받은 자의 받은 새 생명을 상징한 것이라고 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는 그와 같이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에 협조하는 영물인만큼 그의 가진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 도리와 그 얻어지는 생명과 동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실존인 것을 상징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생명 운동을 협조하는 생명 운동을 가진 영물이다.


7절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1.'사자'
용기와 힘의 표상이니 승리를 말하고
2.'송아지'
충성과 희생의 표상이니 순종이요,
3.'사람'
이것은 지혜의 표상이니 피조물의 지배권과 으뜸 됨과 특수하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4.'독수리'
영적 생명의 표상이니 주를 향한 향상과 전진이다.

여기 네 가지 상징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역하는 영물들이 이런 능력들을 가진 사실을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도 이런 능력을 받아 가져야 한다. 혹은 이를 4복음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4복음에는 이 능력은 내포되었으나 이가 4 생물로 상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특별히 우리가 여기서 얻을 지식은 산 그리스도인은
①승리, ②희생의 순종, ③하나님을 아는 지혜, ④성공의 생활과 영적 비상을 가져야 한다.


8절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1.네 생물의 가진 여섯 날개는
사 6:2 스랍이 가진 여섯 날개로 참고할 수 있으니 거기에 '둘은 낯을 가리고' 하였으니 이는 창조주를 올바로 경외하며 지위 분별을 바로 하는 질서 있는 것과 숭배함을 가짐이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으니 이는 자기 행위를 하나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여겨 그 앞에 겸손한 말과 태도를 가진 것을 가리킴이고, 두 날개로 날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신속히 순종하는 것과 죄악 세상을 뒤에 두고 거룩하신 주를 향하여 언제나 갈급하면서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상징함이다.
계12:14에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뱀의 낯을 피하였다는 상징 계시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영능의 은혜이다. 이와 같은 날개로 해석할 때에 이 여섯 날개는 하나님께 받은 영능의 은혜이다. 영력(중생자의 힘)이 장성할수록 하나님을 경애(敬愛)하고 자기를 낮추어 부인하며 주께 순종과 주를 사모함에 갈급하여지고 점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전 생활이 되는 것이다.

2.'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이 가득한 눈은 네 영물 자체의 안팎에 눈이 가득하다 함이니 불휴의 시찰과 부단의 경성과 통찰할 수 있으며 또 하는 것을 상징함이니 소극적으로 모든 불의와 대적들을 방비함과 하나님의 진리와 그 세밀을 관찰하여 이해함과 또 파수하며 이행함을 말함이다.

3.'거룩'
'거룩'을 3차 찬송한 것은 특히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각위로 찬송함이니 특히 거룩하다는 찬송을 한 거룩은 구별함으로 찬송함이다. 구별을 바로 함이 곧 선이요 의다. 특히 여기 구별은 본절에 기록한 대로 특별히 4가지 구별이니
1)'주'
'주'에 대한 구별이니 천상 천하에 평안과 기쁨과 복과 건강과 생명을 주고 모든 원수와 불행에서 참 구원할 주가 많은 듯이 유혹이 많으나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만이 참 주가 되시는 것을 구별하는 찬송이니 내 주는 삼위일체의 하나님뿐이라는 구별 찬송이다.
2)'하나님'
'하나님' 모든 것의 창조자와 모든 것의 주인과 모든 것의 통치자와 모든 것을 존속 유지케 하시는 이는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구별하여 찬송함이다. 만사물에 내가 주인공으로 나타나서는 아니될 뿐 나도 내 주인은 아니라 주인이 될 때에는 범성죄가 된다. 그러므로 항상 피조물인 것과 또 종인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롬12:­에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으니 산 자로 죽은 자같이 복종하라는 것이다. 사6:­스랍들은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루었다. 자기의 피조물성과 종된 것에서 바로 자기의 행위를 파악한 자는 감당치 못한 죄인으로 자기를 지적하게 되고 경의로 표시하게 된다.
3)'전능하신 이여'
'전능하신 이요' 우주와 영계에 각양(各樣) 힘과 능력이 많으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지음 받은 존재요 또 그가 원동력되어 피동으로 움직이는 힘이요, 모든 힘의 근원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과 모든 능력을 정복하고 개별적으로 지배하심과 주권적 의지를 다 시행하실 수 있는 주권적 능력은 오직 삼위일체의 하나님만이 가지신 것을 구별하고 그 능력만이 의지하고 바라보며 두려워하고 소망하면서 순종하는 구별로 찬송함이고
4)'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이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가리킴이니 과거로 영원 전 미래로 영원 후에 이상 1) 2) 3)으로 증거한 그대로의 하나님으로 계시고 불변하심을 가리켜 말함이니 특히 여기는 모든 것은 변하되 오직 하나님만이 불변하심을 구별하여 기뻐하고 그를 의지(依支)하고 소망하면서 만족하여 미래를 두고 찬송함이요 또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은혜가 그로만 말미암았고 아무나 그 누구의 은혜로 된 것이 추호도 없는 것을 구별하여 오직 영원에 영원은 삼위일체의 하나님뿐인 것을 구별하여 찬송함이다.

9절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품성의 광휘를 찬미함이니 곧 그의 모든 섭리를 총괄하여 세 가지로 찬송함이니 그 무한하심을 인간의 술어로는 영광, 존귀, 감사, 이 이상으로 표시할 수 없어 이렇게 표시한 것이다.
1)'영광과'
이 영광은 외부적으로는 시72:18-19, 창1:1-에 기록된 대로 창조의 영광과 마5:45 보편의 은총의 영광을 말하고 그 이면 영광은 지고하신 사랑의 희생의 영광을 가리킴이다. 이 영광은 하나님 자신께 만족한 영광이요 구속받은 성도와 구속받은 만물이 세세 무궁토록 찬송의 제목을 삼아도 측량 없는 부족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희생의 영광이다.
눅2:14 하나님이 인자로 탄생하신 창조주가 말구유 강보에 쌓인 것이 지고하신 하나님께 영광이요, 요1:14 하나님이 종의 형상을 입어 죄인 구원하러 오셨으나 멸시 천대받으시되 끝까지 희생하심이 그의 충만한 영광이요, 요12:28 원수 죄인 위하여 독생자가 도성인신으로 33년 갖은 천대 고생하심이 아버지께 영광되었고, 또 '내가 이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아버지의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하실 때에 천성으로 아버지는 '내가 과거 희생으로 영광 받았고 또 앞으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영광 받겠노라'고 하신 사랑의 희생, 곧 사랑이신 하나님 사랑 그 자체의 영광이요, 요17:1 원수를 사랑하여 희생의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이 당신의 만족이요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요16:14 '성령이 오시면 내 영광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하여 주님의 그 사랑의 발동인 원수까지 사랑하되 죽어 주시기까지, 영광의 보좌를 주시기까지 그 사랑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하여 이것을 가리켜 내 영광이라고 하셨고, 요21:19 아버지의 본체를 받은 예수님을 본받아 베드로야 죽음으로 걷는 이 사랑의 길을 걸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권면으로 수제자 베드로에게 성도의 대표로 마지막 한 마디로 권면하시고 승천하셨다. 지금도 그 사랑은 방방곳곳의 잔인무도와 배은망덕의 암흑을 깨치며 기근과 적신 위험과 붉은 피의 죽음의 길을 사랑의 생명으로 거침없이 이 세계를 무대 삼아 걷고 있다. 주님의 재림은 이 나라의 조직이요 무죄 세계는 이 사랑의 나라의 완성이요 이 사랑의 용사들이 영원히 뛰노는 세계이다. 네 생물은 이 영광이 세세토록 계속함을 찬미함이다.

2.)'존귀와'
이는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이 초월하여 계신 삼위의 하나님을 찬미함이니 특히 엘로힘(강하고 능하심의 성호)과 엘뇬(높으신 성질을 나타낸 성호) 아노나이(인생과 만물의 소유자시며 지배자이심을 나타내는 성호)를 특히 찬송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만이 최고의 능력과 강력을 가지시고 건설하시며 모든 것을 치리함이 세세토록 불변하심을 소망하고 의지하면서 평강을 누리는 찬송이요, 또 그 완전하시고 지고하신 사랑과 덕을 보고 만족하면서 또 갈모하는 경애의 찬송이요, 또 근본 그들로 말미암아 존재하였으며 또 그들의 것이며 또 그들에게만 유일로 지배를 받아야 살고 영광되며 이 복된 입장에 영원토록 있게 하시며 이런 대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계셔 주심을 찬송함이다.

3)'감사를'
이는 창조의 하나님과 은혜 계약의 하나님을 찬송함이니 다음과 같은 성호를 대상으로 함이다.  
①엘사다이: 그 백성에게 은혜와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성호
②여호와 : 은혜 계약의 불변의 하나님의 성호
③파데일 :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성호
④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으로 사람 형상 입어 제사장, 선지자, 왕 직분을 가져 영원히 구속한 은총의 하나님의 성호

4)결론
네 생물은 이와 같이 사랑의 하나님과 능력의 하나님과 은혜의 하나님을 밀접한 관계를 맺은 자기 입장을 한없는 영광으로 여기며 그 하나님이 불변하시니 자기도 불변할 것을 생각하여 찬송함이다. 우리들도 그 사랑은 희생으로, 그 능력은 의지함으로, 그 은혜를 바라봄으로 실행으로 찬송함이 이 생물의 운동을 입은 성도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은 희생하는 자에게 기쁨이 되고 바라보는 자에게 능력이 되고 소망하는 자에게 부요가 되는 것이다.


10절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져 가로되

1. '24장로'
본 계시록 4장의 4절에서 그 1호 해석을 참조할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2.'세세토록 사신 이에게 경배하고'
이는 받은 은혜와 또 경배하며 소망하는 그 하나님이 영생하심에 그가 불변하심으로 또 자기의 입장이 부동할 영원 장래를 생각하면서 행복됨을 느껴 주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경배함은 전부를 맡기면서 부탁합니다 하는 경배이다.

3.'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이것은 그들이 받은 금관의 영예가 실상은 하나님께만 적합하고 그 자신들에게는 그것을 받음이 오히려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고 또 그 원인인 모든 승리가 천계에 가서 보니 전부가 은혜로 된 것이니 하나도 자기의 것이 없는 것을 느껴 다시 그 모든 받은 은혜를 다 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자료로만 삼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 곧 주만 위해서 전부를 가지는 것이다.
'던진다'는 것은 불경의 행동을 표시함이 아니고 감히 지능과 덕이 존귀하여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경배하는 겸손의 태도를 표시하는 데 있다.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1.'우리 주 하나님'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대표격에서 말하는데 상술한 하나님은 유일하신 구주로 총책임을 약속하신 그 은혜를 바라보면서 즐거워 부르는 것이다.

2.'영광과 존귀'
본장 9절 1, 2호 해석 참조할 것이다.

3.'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이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능력을 받으신다 함이 아니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의 근원자이심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여겨지며 또 대우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 함이다. 다시 말하면 원인자도 하나님이시요 목적도 하나님이시요 결과도 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4.'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헬라 원어에는 이 글귀가 '왜 그런고 하면' 이라는 말, 호리로 시작하여 그 위의 말씀의 이유를 보여준다.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이유는 왜 그런고 하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이는 피창조된 모든 만물이
①하나님의 의지 예정 안에 있었던 것이란 말이요
②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로 계획된 것이며
③하나님 당신을 위하여 당신의 목적대로 의지에 있음이요
④당신의 존재하신 본체와 속성 거기에 기인하였다는 것이다.

6.'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의지의 예정되어 있었던 그것이 그 뜻 그대로 창조되었다 함이니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①예정 실행으로 신실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이심과
②이렇게 계획과 목적적으로 피조된 것이니 전부가 그를 위하여 있을 뿐 또 그만 위하여서 존재할 수 있고 또 그만 위하여 복될 것을 나타냄이며 또 생물과 장로 자신도 이렇게 깊은 하나님의 절대적의 목적에서 존재한 것이니 그에게만 영광 돌림이 지당하다는 것이다.

요리.
4장은 천국을 상징으로 표시함인데 천국은 신자에게 있어 유일한 소망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세히 알기를 원한다. 천국은 영의 생활 상태를 말하는 정도가 아니고 장소성을 가진 실존의 것이다. 요14:1-3에 말한 아버지의 집, 요16:28 예수님께서 그 곳에서 오셨다가 또 그곳으로 가신다고 하신 아버지의 집, 눅16:23 아브라함의 품, 눅23:43 강도에게 오늘 동거하리라 하신 낙원, 고후12:2 바울이 갔던 3층천, 계21:1 기록된 새 예루살렘이니, 마13:43과 같이 의인들이 해와 같이 빛나는 곳이요 마22:11-13까지 예복을 입지 아니한 자가 쫓겨난 곳이다.
그곳은 모든 것이 분명히 드러남과 어두운 것이 용납할 수 없는 곳이 특색이다. 24장로와 생물의 창조주에 대한 찬송이 충만하니 조물주를 거역한 자가 용납할 수 없으며 네 생물에 가득한 눈이 감시하니 속일 수가 없고 수정 같은 유리 바다에 모든 정체가 환하게 비치며 그 안에 성경 말씀대로의 부절(不絶)한 설교가 계속하여 있고 승리한 24장로 반열들이 옹위하였으며 하나님의 약속 말씀이 무지개 같이 둘러 방어하고 있는 그 위에 영광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다. 이곳에 갈 시민들이 성도이니 누구나 성결을 가지지 않고는 자격을 얻지 못한다.
성결은 죄인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것으로 하나니 그날에 수치를 면함은 오늘의 죄인의 수치를 가지는 것으로 면할 수 있고 그날에 쫓겨나는 수치는 오늘 자기의 죄악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모르는 것으로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의인들은 회개와 성결을 모든 행복보다 귀하게 여겨 성결을 죽기까지 파수하는 사람들이 순교하는 것이다.



제5장 해석

1절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1.'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
성부를 가리킴이요

2.'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
이는 우주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및 그것에 대한 그의 주재권을 표시한다. 하나님만이 우주의 장래를 계획하시고 이행하시는 주재권을 가지신다. 오른손은 힘있는 손,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주의 장래를 주권적으로 잡고 계시니 그 내용이 비밀이 되어 보여 주시는 자만이 알 수 있게 되고 그 계획 성립에 대하여 누가 조금이라도 가감할 수 없는 주권적 능력을 상징함이다.

여기에 해석한 우주의 장래라 하는 장래는 요한이 계시 받은 그 후를 가리켜서 장래라고 함이니 타락 이후로 구원 완성의 무궁 천국까지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포함하여 말함이다. 여기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질 줄 안다. 이유는 5장 7절의 어린양이 책을 받는 것을 요한이 직견하였으니 인봉책을 받고 주님 부활 승천 이후요 또 인봉책 열림이 6장부터 있으니 어찌 그시 이후가 아니고 그시 이전 수천년을 포함시켜 미래라고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특별 계시를 기록한 시일을 보면 몇 천 년 과거사를 현재에 예언적으로 기록한 일도 있다. 그러므로 과거도 미래도 상관없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모세 오경은 뒤로 돌아보고 앞으로 내다보면서 기록한 계시이다. 본 계시록은 과거 현재 미래사가 겸하여 계시되었다.
①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
②천국 시설(施設)
③계6:1-2 첫째 인 떼심은 복음운동이니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한 것이고
④계12:2 이하 잉태로 고난받는 여인은 구약시대의 교회이며 (아벨로부터 마리아까지)
⑤계5:5 다윗의 뿌리라 하니 다윗 이후의 일이 아닌가 하겠으나 이 말은 창3:15를 계속 증거하는 말이니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 함은 여인의 후손이 그 머리를 상하였다는 말의 전달사이다.
⑥인봉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인봉된 것이니 범죄가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였고 그 원죄와 아담의 본죄로 된 인봉도 어린양이 아니고는 뗄 수가 없는 까닭에 여기에 나타난 인봉된 책은 범죄 이후에 구원 계획에 대한 우주의 장래로 해석함이 옳은 줄로 믿는다. 죄로 인봉된 인간의 구원 계획은 아담 때로부터 예약적으로 어린양이 떼었고 실지인 완성은 도성인신과 십자가 사활로 이루어졌고 이미 과거사로 이루어진 것이 요한에게 계시 되기는 그 당시에 되었으며 요한은 그 되어진 순서를 그때에 본 것뿐이다. 모세도 창세기를 기록할 때에 1장을 기록할 때는 현재사이었고 2장은 그 시에 미래사로 그가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3.'안팎으로 썼고'
인간 타락 이후로 전개될 우주의 장래이니 '안'으로 기록된 것은 인간의 오관으로 볼 수 없는 은밀한 섭리요 '밖'으로 기록한 것은 인간의 오관으로 지식할 수 있는 섭리와 그 사물들이다.
'썼다' 함은 구원 계획을 위한 우주의 장래가 전적으로 작정되어 있으므로 그것에 누가 가감할 수 없음을 상징한다.

4.'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다음과 같은 뜻을 상징함이다.
①계시록 6장에서 22장까지에 나타난 사건들을 내포함이니 이는 계시록 6장에 기록된 것이라 하여 요한이 계시 받은 이후의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인생 타락 이후로부터의 것이다.
②일곱 인봉은 일곱 가지의 내용을 가졌다 함이니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수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전부가 인봉되었다 함이요
③7수는 하나님께서 전지 전능으로 인봉하였기 때문에 특히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인을 열 수 없는 절대성을 상징함이요
④이 인봉된 이유는 범죄로 말미암아 구원 역사가 중단됨이니 곧 우주 전개의 중단이다.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원 계획의 성립과 그를 위한 존재들이니 이 인봉은 우주 전개의 각종의 전부의 중단이다.


2절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1.'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친 것'
그 사건인 내용이 천상 지상 지하에 두루 믿어야 할 중대성을 가짐이요, 그 내용인 구속의 대사업은 천사도 미지하고 경이와 흥미로 구경하려는 것으로 크게 외치는 것이다. 이는 우주와 택자의 흥망이 여기에 좌우되는 것만큼 중대사이다.

2.'누가 책을 펴며'
누가 죄로 중단된 하나님의 구원과 우주 전개를 다시 계속할 자가 누구뇨 함이니 이는 전지자가 아니면 복잡한 우주 전개를 다스릴 만한 지혜가 없겠고 전능자가 아니면 파괴와 건설할 만한 능이 없는 거대사이다. 집 한 채 짓기와 가정 하나 다스리기도 어렵거늘 우주 전개의 책임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3.'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중단시킨 것을 누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또 인봉하신 하나님께 개인(開印) 허락 받을 자가 누구며 또 그 무한한 비밀을 무지한 인간과 만물에게 각각 알릴 대로 알릴 자가 누구뇨 함이다.


3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1.'하늘 위에나'
별세한 성도의 영혼들과 천군 천사와 모든 영물들이 있는 곳이니 이들의 전부를 가리켜 하늘 위에 라고 하였고

2.'땅 위에'
땅 위에는 인생과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이 있는 곳을 가리킴이니 이것들의 전부를 가리켜 말함이고

3.'땅 아래'
구원 얻지 못한 영혼들과 악령들이 있는 곳이니 이들을 총칭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4.'능히 책을 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죄로 중단된 인류 구속과 구속을 위한 우주 전개를 능히 할 자가 없다 함이다. 특히 펼 이가 없다 함은 전개할 이가 없다 함이니 곧 실시할 능력자가 없다 함이다. 다시 말하면 택자 구원과 만물을 새롭게 할 중보자의 자격을 가진 자가 삼위일체의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말함이고

5.'보거나 할 이가 없다'
특히 하나님의 허락이나 또는 전개를 말함이 아니고 치리할 이가 없다 함이다.

6.결론
본절은 다시 말하면 인생의 지극히 작은 죄의 문제나 하나님의 원수됨을 화목하는 문제나 역사 세계의 지소의 전개 (개미 발 하나 뻗는 것도, 탁자 위에 놓인 연필을 요동시키는 것과 같은 이런 사소한 것까지의 요동도)도 인봉 떼기 전에는 있을 수 없고 인을 열고 전개함으로 추진되는 것이니 인을 뗄 수 있는 자격자 그이 없이는 하나도 있을 수 없는 그이의 절대적인 주권적 능력을 상징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소의 존재도 동정도 인을 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으로만 되어지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

4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1.요한이 크게 운 이유는 무엇인가?
1)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프로그램이 인봉되고 다음이 보이지 아니함으로 답답하여 욺이니 하나님의 구원의 미래 비밀을 알지 못하여 우는 것보다 구원 약속이 중지됨으로 구원 약속의 허락을 애원하는 울음이요
2)인간의 죄로 하나님과 끊기고 구원 우주 전개가 중단된 멸망을 해결하기에 합당할 이가 없는 고로 죄와 하나님의 구원을 통회 애원하는 울음이니
3)하나님의 진노와 그 영광 훼손과 자타와 우주의 멸망을 슬퍼함과 회복의 간절한 소원의 통곡이었다. 이것을 느낄 줄 아는 예언자는 울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우니' 하는 울음은 해결 받기까지의 계속적 울음이다. 천사의 부르는 큰 소리에 대하여 전 우주에 한 마디 대답이 없으니 이는 할 수 없는 죄악 세상의 적막이었다. 이것을 느끼는 자는 큰 울음을 울지 않을 수 없다.
이 곡성도 천상 지상 지하를 진동하며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할 수 있는 호소력을 가졌다. 자타의 죄과를 통감하는 회개의 울음소리, 약속 계시와 구원을 애원하는 울음소리 이는 하나님의 보좌에 들리는 위대한 곡성이다. 사람들은 육신 고통을 위하여 운다. 자기의 어떠한 손해를 위하여 울며 육의 사망을 인하여 울며 질병이나 환난을 인하여 운다. 이것은 사소한 아이의 울음이다. 요한은 계시의 인봉 떼거나 보기에 합당한 자가 나타나지 못함을 보고 울었다. 그것은 죄로 황패해지고 적막해지고 멸망의 깊은 속에 유구무언인 인류의 참상에 대한 울음이다. 이야말로 우주와 세계를 위한 큰 울음이며 인류의 죄를 위한 거룩한 울음이다.


5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1.'장로'
장로는 천국 실존직이면서 교회를 대표한 직분이니 지상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여 지상 교회의 원리가 나타난 것이다. 그 '장로'가 말하기를 울지 말라 하였으니 이는 실지로 지상 교회는 요한 같은 울음을 환영하며 위로하고 만족의 해결을 주는 것으로 본분을 삼아 있는 것이다. 이 울음을 우는 자마다 이와 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고 또 하늘에 속한 자마다 다 이 순서를 걷게 된다. 장로의 위로는 지상 성도에게 지상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가 나타나는 그 실지를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요한의 애원을 해결하여 줄 자격자는 천상 지상 지하에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뿐인 것을 말했다.
1)'유다 지파의 사자'
이것은 창49:9-10의 예언을 중복함이다. 야곱은 유다 지파에게서 메시야가 날 것을 예언하여 말하되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숫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라고 하였다. 이 예언이 성취되어 과연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 탄생하셨다(히7:14).
'사자'는 이기는 자의 표상이요 이기는 것은 메시야의 특징이다. 창3:15에 메시야에게 대하여 예언하기를 '여인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고' 라고 하였다. '사탄의 머리를 상함'은 곧 메시야의 승리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도 성령님의 감화로 말하기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네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롬16:20)고 하였으니 이것은 분명히 창3:15의 말씀을 성취될 것을 말함이다. 창3:15 메시야 예언이 있은 후 고래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기는 자, 곧 메시야를 대망하여 온 것이다. 예언자들은 메시야를 사자로 비유하였고(창49:9-10) 혹은 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통치자에게 신앙으로 소속하는 자는 이기는 자가 되어진다.
2)'다윗의 뿌리'
다윗 왕통의 베어진 그루터기를 말함이나 다윗의 씨, 다윗의 싹 (사11:1, 10)과 관련된 의미를 가진 것이니 육체의 선민인 신정국가의 왕통을 계대하여 신령하나 선민, 영원한 신정국가의 왕인 그리스도가 영원한 통치자로 계속할 것을 상징함이니 육신의 이스라엘은 그루터기요 신령한 이스라엘은 새싹이다. (구약시대에 속한 영혼들도 택한 자는 신정국가 이면에 신령국가에 신앙으로 된 시민권을 가진다.)
3)'이기었으니'
이것은 메시야의 특성이 (창3:15) 곧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구속 사업을 성취하신 일이다(골2:14-15). 그 승리는 사탄과 죄와 사망과 세상을 이긴 것이다(눅10:18, 요14:30, 요12:32, 계1:18 참조). 이와 같은 승리자, 곧 메시야께서만 신인간의 중보가 되시며 하나님의 비밀을 그의 택한 백성에게 계시하며 또 계시한 프로그램대로 구원 완성을 하셨다 함이다.
'이기었으니' 함은 과거사인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재림하심으로 완필되는 것인데 승리를 과거사로 말한 것은 택자의 구속은 그리스도의 사활로 완성된 것과 그에게 소속한 성도도 구원 완성의 완전도 포함한 것이다.

3.'책과 일곱 인을 떼시리라'
죄로 인하여 인봉하신 하나님께서 인을 여는 자로 유일의 구원을 창3:15에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는 죽으심으로, 마귀는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사망은 부활하심으로 인봉하신 하나님의 노와 죄로 중단된 우주의 구속을 해결하셨으며 성립하셨다.


6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직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1.5절은 인을 여는 자를 소개하고 6절에는 그 권능을 구체적으로 말함이다.

2.인개자의 자격은 여기 보아 잘 알지니 이러한 자격자는 천상 지상 지하에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5, 6절에 나타난 대로의 자격
①'일곱 뿔'을 가진 자는 전능 전권자 하나님을 일체로 소유한 자
②'일곱 눈'을 가진 것은 전지자 성령을 일체로 소유한 자
③'유다 지파의 사자' 곧 신인 양성을 가진 모든 것의 승리자(죄, 마귀, 사망 모든 피조물 시공 전부를 승리하여 지배권을 가진 자) 계2:2, 4. 6. 해석 참조
④'다윗의 뿌리' 죄로 인봉된 것을 인을 여는 자로 허락받고 영원한 통치자 왕권을 인봉자에게 받은 자
⑤'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인생의 불순종과 범죄를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대속한 사랑을 가진 자
⑥'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 사이에 선 어린양' 이는 대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 후에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제물되신 그 희생적인 사랑을 이 후에도 정사할 일이 없지만 있다면 넉넉히 하실 수 있는 그런 사랑의 주로 영원히 중보로 계시는 것과
⑦밖에 앉지 아니하고 사이에 서서 계심은 영원한 중보자로 구속받은 자의 모든 부족을 영원히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영원히 계속적으로 끌어 우리에게 주심을 상징하심이다.

3.'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이는 중보되신 그리스도를 말함이요 '어린양'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먹는 것이니 속죄 제물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속죄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1:29, 36, 사53: 참조). 그런데 여기 어린양이란 글자가 요1:29의 그것(암노쓰)과 다르게 '암니온'이라고 했으니 이는 어학상 상형명사이다. 예수를 사자로 지적하고 돌연히 상형명사인 어린양으로 나타내는 계시는 의미 심장하다. 메시야는 사자 같은 승리자이다. 그러나 그 방법인 행동 원리는 어린양같이 유순하셨다. 하나님 암종으로 겸손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온유로 승리가 된 것이다. 불신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사자같이 승리하시는 행동 원리가 사자 같은 것이라고 거짓되이 알았으므로 실패하였고, 요한은 사자 같은 승리를 어린양 같은 희생의 행동으로 하신 주님으로 영접한 그는 성공하였다.
모든 기독신자들은 다 사도 요한식으로 메시야를 찾는 것이다. 메시야(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승리 사업을 하실 때에 항상 어린양 같으셨다. 마12:18-21에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되 '보라 나의 택한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 사도행8:32-33에 메시야께 대하여 말하기를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감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라고 하였다.

혹설에 여기 사용된 상형명사 어린양(암니온)은 친애(親愛)의 의미까지 표함(表含)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던 것이니 만큼 지금 천계에 계시면서도 우리에게 친애하는 관계를 가지시는 자이시다.

4.'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이 어구는 그 뒷말 '섰는데'를 형용한다. 곧 어린양께서 섰으되 죽은 듯이 서서 있더라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의 공로를 세우신 것이 영원토록 효과를 가진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가 죽은 듯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그리하셨으니 이것은 내세에서도 영원한 공로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원한 속죄요, 의요, 성결이요, 지혜가 되신다(고전1:30).

5.'일곱 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그 얻으신 완전무결하신 권세와 능력을 상징한다(빌2:9-11, 행2:63, 마11:27, 28:18 참조).

6.'일곱 눈'
(슥3:9, 4:10 참조). 이것은 아래 문구대로 보아서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지성부님을 동행하실 뿐 아니고 역시 성자님과 동행하신다(사11:2, 4:1). 성자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을 특수한 방식으로 보내시어(행2:) 자기를 정관하게 하셨으니 본절의 이 말은 이 점을 가리킨다.

*3호는 박윤선 목사님 계시록 해석 126항-128항까지 그대로 옮긴 것


7절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1.5-6에 그리스도에게 대한 여러가지 명사가 있는 중에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의 앉으신 이의 오른손의 책을 취하시니라'고 하심은 6장 이하에 인을 여는 역사를 특히 온유와 사랑의 희생으로 역사하실 것과 또 인봉책을 받으시는 모든 자격 중에도 어린양의 사랑의 희생과 유순한 순종을 그 사람의 증거 생활에도 이것들을 특질로 한다.


8절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1.인봉된 구속 역사를 어린양이 전개하게 되매 생물과 24장로가 송축함을 가리킴이다. 생물은 4:6-7 해석에 참조하고 24장로는 계4:4과 4:24 해석 참조한다.

2.'거문고'
거문고는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는 악기요
거문고는 특히 생물이 가진 악기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꼭 성도의 대표인 24장로가 가진 것은 아니라고도 하기는 어렵다. 본절에 누가 가진 것으로 구별할 수 없고 각각 향도 가지고 거문고도 겸하여 가졌다고 봄이 이연하다. 이유는 향은 단장품이요 거문고는 찬송하는 기구인 관계다. 향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함으로 미행인 향이 되고 또 하나님과 연결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격이 되되 거문고에 여섯줄이 구비하여야 올바른 음정이 나오는 것같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모든 것에 구비한 신앙인격을 가져야 할 뿐 또 전신 전체가 다 합하여 주를 송축하는 줄을 갖춘 거문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3.'금대접'
금대접은 거기 담긴 향을 요점으로 한 것이니 향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보이는 증거라고 본문이 밝힌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기도를 향같이 즐기심이 여기 나타난다. 기도는 하나님께만 향처럼 귀여운 것이 아니고 성도 자신에게도 그런 것이다. 참된 신자에게는 기도하는 때처럼 기쁘고 향기로운 것은 없다. 특히 성도의 기도를 향이라 함은 성도의 기도 자체가 향이라 함이 아니고 그 향 자체는 그리스도의 공로이니 그와 영교를 가져 그리스도의 구속을 근거한 그 모든 생애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향처럼 귀하다는 것이다.

특히 기도 담은 그릇을 금대접이라고 하는 것은 금은 영원성을 가리킨 것과 존귀성을 말함이니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하여 구속받은 성도의 모든 생애는 기도이며 또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취를 제한 의요 또 인간의 모든 죄악을 제하는 의요 죽은 자의 냄새를 제하는 생명운동일 뿐 유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고, 금으로 말하면 짧은 하룻밤 같은 세상에 기도의 생애는 영원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가리켜 향이 가득한 금대접이라고 하였다. 이것만이 참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다.



9절-10절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1.9절-10절은 생물과 24장로의 찬송이다. "새 노래는 일차창조에 속한 찬송이 아니고 제 이차창조인 곧 구속으로 새로운 피조물되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으로 된 것에 (고후5:17) 대한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이다. 생물은 모든 생명운동들로 세우신 하나님의 기관이요, 24장로는 성도들의 대표이니 이들의 첫째되는 의무와 직업이 찬송이었다. 이는 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된 새것에 대한 찬송인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천성에 영원히 계속할 찬송은 이것이다. 찬송의 특질은 자신의 행복됨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는 찬송은 생명은 없다. 참된 찬송하는 입장이 천국이며 영광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세계에서는 새 것으로만 행복되고 새 노래 많은 자가 복된 자다. 성도의 재세의 목적은 새 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세 성도가 새 노래를 배울 줄 모르고 묵은 노래(없어질 것으로 기뻐하는 자)로 지나는 자리에서 옮겨 새 노래 배우기를 힘쓰야 한다. 계 14:3에도 새 노래다 전업이었다. 새 노래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되어진 모든 은혜를 인하여 또 그 은혜로 된 그것이 자체가 기쁨에 충만하며 주께 감사함이 새 노래라.

2. 새 노래의 제목.
⑴ 책을 가지시기에 합당하고 ...... 우주의 미래를 소유하시기에 합당.
⑵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고 ...... 죄로 인봉된 우주 전개의 주권을 가지시기에 합당하고 함이니 찬송의 내용은
⑶ 일찍 죽임을 당하사 ...... 하나님의 아들로 죄아래 가진 자 위해 죽어 주심을 찬송함이오.
⑷ 각족속과 (혈통을 초월하여) 방언과 (국민을 초월하여) 백성과 (정치를 초월하여) 나라(생활 습성의 유사를 초월하여) 가운데서(세계 전인류를 망라하여 택한 자만을 구별하여)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심과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시켜 형벌 대수로 죄에서 해방하시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것, 곧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제사장과 찬양대 성전이 되게 한 영광과 지위와 권세 주어 하나님의 것 되게 하신 은총을 찬송함임.)
⑷의 결론 : 세계에 택한 자만 구원하심과 (남을 구원함에 대한 감사가 성도에게 있어야 한다.) 영원 영직 주심을 찬송함이다.
⑸ 구속 성도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시고 친히 이 왕국은 지상에서 시작하여 천년무궁까지다.
⑹ 이상 5가지 제목은 생물과 장로의 찬송이니 새 생명을 받은 성도는 누구나 다 이 제목으로 드리는 찬송을 계속해야 한다.


11절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천사가 둘러선 것은 하나님과 생명운동과 성도들의 수종하는 지위를 가르침이요.
2.'만만이요 천천이라'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함은 그 수가 헬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말함이요.
3.'많은 천사의 음성'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함은 그리스도가 인을 떼는데 대한 감사와 찬송하는 음성이다. 12절은 그들의 찬송 제목이다.


12절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큰 음성으로 가로되'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함은 하늘에서만 구속을 찬송할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도 들어야 할 찬송인 것과 또 그 찬송 제목이 찬송하기에 합당하고 또 능력을 가질만한 존귀하고 실력있는 제목인 까닭이다.

2.칠 제목의 찬송
여기 열거한 것은 칠 제목의 찬송이니 죽임을 당하신 것과 어린양으로 계심이 일곱 찬송 제목을 가질만큼 실력있는 것을 가르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절대자에게 순종과 사랑과 희생이 행할 때에는 쓰나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모든 영광과 권위는 비교 못할만큼 큰 것을 볼 수 있다.

3.이 찬송의 앞에 네 마디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구속의 능력을 말함이니 특히 부활 승천 이후에 가지신 것이니 지상 성도의 완성과 천국 영원 보존에 넉넉한 구비한 권위를 말함이니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으로 택자의 무능과 가난과 우와 연약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는 마28:27에 말한 그대로 천부에게 받은 것이다. 성도는 이 성구에서 힘을 얻어 피조물에게 아부하지 말고 어린양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이런 권위자가 우리에게 어린양으로 대해서 주시니 더욱이 은혜이다.

4. 다음 세 마디 찬송은 주님의 완전 성공의 높으심을 찬송함이니 존귀는 주님의 본체를 칭송함이고 영광은 구속완성의 사랑을 찬송함이고 찬송은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히 받으시는 찬송을 지함이니 오직 주님만이 이 구비한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천군 천사가 노래한다.


13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모든 가운데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찬송하는 이들
본절은 생물과 24장로와 천군 천사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찬송하였고 그들 외에 모든 피조물들이 어린양의 구속을 찬송한다. 이들은 제 삼자로서의 찬송만이 아니고 직접으로 저들도 구속의 혜택을 입은 까닭이다. 이 세 찬송은 각 단체이다. 그리스도를 찬송함에 통일성을 보인다.

2.찬송의 대상
찬송의 대상은 성부와 성자에게 찬송함이니 선재 두 찬양대는 이미 성부 계속적으로 찬송중에 어린양을 찬양함으로 성부를 대상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고 만물들은 성부를 대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 기억할 것은 천상 천하 지하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협조와 찬양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만물에게 대하여 고독감을 가지지 말아야 할 신앙세계에서 살아야 하고 또 모든 피조물이 가령 버린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니 더욱 고독감을 가지지 아니하여야 한다.
이종교에서 만물과 자기는 하나라는 물아동체, 곧 범신론에서 나온 사상은 아니다. 만물이 말한다 함은 다만 무언중에 호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뱀이 말함은 마귀가 시켰고 나귀가 말함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한 것뿐이니 이것은 다 이적이다.

3.찬송의 내용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린다 함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택이 영영함을 받아 누리고 또 영원히 누릴 것을 바라보면서 찬송함이다. 네 마디 사언의 해석은 13절 참조.


14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1.본절은 천사와 만물의 찬송이 하나님 앞 보좌에 상달될 때에 생물은 환영과 찬송으로 협조하고 성도는 천사와 만물과 그리스도와 그 사이의 지위를 가진 제사장격에서 상달되는 찬송을 받아 경배로 그 찬송을 어린양에게 올리고 어린양은 하나님께 올리는 그 순서를 보이는 것이다. 성도의 지위가 얼마나 존귀한가 십자가의 길이 땅 위에 비록 비천할지라도 영원한 소망을 인하여 비천하니 도리어 영광의 감이 가져지기까지 소망에 힘이 강하여야 한다.
(범죄한 것도 좋고 본죄도 좋다. 원죄와 본죄 그것이 좋은 것은 아니로되 원죄로 인하여 사랑하는 자인 전부를 솔박 받았으니 좋고 본죄로 사랑하는 자의 손이 와서 나를 붙들어 일으키며 그 품에 안겼으니 좋다. 원죄와 본죄는 간 곳이 없고 구속주의 사랑만 내게 남았으니 좋다.
성도여 네 마음을 좁히지 말고 넓혀서 대운동에 행하라. 어찌 조브라운 마음으로 너만 곤고하게 날뛰느냐? 불변적인 우주 대세의 순풍에 돛을 달아 하나님의 아들아! 우주를 상속 받은 자야! 우주를 요한 같이 한 권의 책으로 보고 이것을 가지고 노는 자가 되어져라. 이 속에 싸이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처럼 살아라.
범사에 감사하고 맡기고 순종하고 인내하고 바라보라. 두려워도 염려도 하지마라. 이는 다 불신한 저주이다. 불변의 이 계시에서 먹고 마시고 마음껏 평강을 누리라. 너는 보배가 담긴 질그릇이요. 일광에 쬐인 네 얼굴이 비록 검으나 후궁은 너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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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본문 : 요한계시록 5장 1절 ~ 9절
2.제목 : 간구와 감사하라.
3.본문.

1)요한은 울었다. 이는 애걸하는 행사이다. 눈물로 기도한 요한은 장로에게 위로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기독교의 원리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요, 또 부활의 종교이다. 모든 것이 이 원리에 준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먼저 울고 후에 웃을 일을 만나며 먼저 버리고 후에 얻고 패로 승을 가져오며 패함을 통하여 귀하여지고 참 두려워하는 자라야 참된 담대와 평안을 찾게 되고 죽음으로 생명이 살며 아주 죽어야 영생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자라가는 방법이다.
이는 세상과 육신과 자기를 향하여 사망으로 달리는 인생이 천국과 중생자와 하나님을 향하는 길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방에서 부름을 입고 현재에서 미래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터이다. 기본회개이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물질계도 목적의 반대 방향에서는 아무리 달려도 전환하기 전에는 목적지에 도달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영원 불변의 진리 세계이리요. 일단 포기 후 취하는 생활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완전한 세계를 발견하여 취하는 방법이며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화를 피하려는 노력이다.

요한은 이 문제로 울었으며 간구하였으니 그는 인생의 큰 과제를 발견한 사람이다. 장로는 그에게 유다 지파 사자 다윗의 뿌리 죽음을 당한 어린양을 보이면서 위로하였다. 이 위로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과 도성인신하신 신인양성을 가진 중보자 예수님과 죽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는 기도의 응답이요. 소원에 성공이요. 구비한 은혜이다. 울어지는 진정한 갈급에서만 이는 발견도 할 수 있고 또 얻을 수 있는 기독교의 은혜이다. 참 울음을 가지기 전에 참된 슬픔과 근심을 가지기 전에 참된 두려움을 가지기 전에는 실력있는 인생의 평화를 가질 수가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아니가질 수 없을뿐 아니라 인생의 참된 평화의 이름도 가치도 배우지 못한다. 범죄한 인생이 불안과 울음은 회생된 증거이다.

2)은혜 입은 자의 남은 생애.
네 생물과 24장로는 거문고와 향을 가득히 담은 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로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였다. 이는 새 생명 받은 성도의 금대접에 쉴새 없는 감사와 자복과 간구에 향을 담고 육체로 갖출 아름다운 행위의 거문고로 찬송함이 천국 백성의 자격이다. 주는 창조주와 시은자시요. 나는 피조와 수은자이니 인생의 본지위를 찾을 때에 모든 것을 받았으니 감사할 수 밖에 없고 받지 않고는 얻을 것이 없으니 간구할 수 밖에 없다.
감사 떠나면 배은이요. 간구가 끊어지면 독립적이며 자기를 믿는 것이다. 지극히 적은 부분이라도 감사 없이 가지고 간구 없이 시작하는 것은 기독적 무신론이요. 기독교적 유물주의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향이라고 하였다. 이는 감사와 도고와 간구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자신에게는 은혜를 입을 만한 미이다.

3)감사치 않는 것은 보급선을 끊는 것과 보배를 원수 앞에 버려두는 죄가 되고 간구치 않는 것은 보고의 열쇠와 노동을 버리는 가난과 동결을 자취하는 죄가 된다. 은혜의 댓가는 감사이니 가진 것에 그 가치를 알 때에 감사하게 되나니 감사는 그 보배의 파수이다. 열쇠가 없으면 잠긴 문과 보고에 출입은 동결되고 노동이 없이는 수확은 없다. 기도는 유일의 열쇠이요. 인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노동이다.
구속 받은 성도들에게 감사가 떠나거나 희박한 것은 착각이요 망령이다. 천하를 빌린 채무는 갚을 수 있으나 털끝만한 은혜는 갚을 수 없는 무거운 빚이다. 참 은혜는 그와 나와 관계가 진공같이 받을만한 원인이 없을 때에 거저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받은 은혜를 잡으려면 내가 죽고 이전 관계를 다 잊어 서로 모르게 되고 난 후에 시은해야 보상되는 것이니 갚을 도리는 없는 것이다. 참 은혜는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나 혹 다소 도울 수 있는 것에 그 누구가 내게 베풀었다면 그것은 은혜가 섞인 것이요 순 은혜는 아니다. 어떤 이유인가?

그는 자체에게 다소의 자격이 있음을 보고 신용상 투자의 성질과 또 영리적 성질도 있을 수 있고 이가 아니면 쓸데 없는 부채를 지울 그런 성질도 섞여 있나니 순 은혜는 아니다. 순 은혜는 자기로서는 추호의 힘도 없고 요구할 지혜조차도 없는 것에 거저 주어 가졌고 가지고 난 다음에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에는 순전한 은혜는 아버지는 주고 아들은 받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그러나 부모의 은혜는 성질적의 것, 곧 물질적의 것뿐이요. 지식적의 것까지 겸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결과적이 은혜된 것뿐이요 계획적의 것은 아니다.
또 실상은 시은자보다 부모는 시은자 하나님의 사환이라고 함이 지당하다. 그러므로 순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 외에는 전혀 없다. 그는 순자기의 것으로 내가 순 모르는 것을 내게 순전히 없는 것만을 내게 추호의 자격도 없는 것에게 모든 것을 영원 충만하게 주신 자시다.

은혜는 갚을 댓가가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댓가에 대용품이라면 감사 외에는 등용될 것이 없다. 참된 은혜에는 보은은 추호도 못하는 법이다. 예를 들면 자식이 부모에게 우유값 음식값 학비 아이 양육비 등 이 양을 계산하여 갚을 수는 있을지라도 무에서 유하게 한 것은 갚을 수 없는 것이다. 비유컨대 솔씨 한개로 낙낙장송이 되어 수천의 솔씨는 낼 수 있으나 자체가 나온 그 솔씨의 요소를 뽑아내고는 그 나무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또 생존할 수도 없다. 또 그 씨를 갚을 수도 없다. 불가능하다는 것도 논리뿐이다.
무인지경에 굶어죽을 사람을 모든 사람이 거저 지나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10여리 업고 주막에서 2-3일 구호하여 구명하였다고 하자. 그 후 회생된 자가 10리의 요금과 3일 식대 반환으로 보은이 될 것인가? 아니다. 그는 갚고도 일생 감사의 정을 두고도 갚는 것은 못된다. 그 사람이 그 후 사경에 이르렀을 시 모든 사람은 버리는데 자기가 구생했으면 그만하면 완전 보은이 될까? 아니다. 완전 보은하려면 그 관계 조차 완전히 진공으로 돌아간 때에 그런 입장, 그런 형편에 그와 같은 시은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유는 처음 구주의 수은은 수은 후 보은하여야 할 인연 같은 그런 인연이 진공인 때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후 다시 그런 세계가 있다면 혹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어떤 것으로 갚으려 하는가 그를 위하여 모든 부요를 내어놓고 고난으로 걷다가 순교로 마치면 보은이 될 것인가. 이것은 10리 요금과 3일 식대로 청산의 말과 같은 것이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주 앞에 교만한다면 배은이요. 망령이다. 주님 위하여 전기와 순생과 순교를 감사로 동기와 영원한 감사로 결과를 맺어도 보은은 할 수 없는 빚진 자이다.
이는 내가 무로도 돌아갈 수 없고 지옥의 죄인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셔야 할 입장도 없다. 지금과 말세에 감사와 또 다 드려 충성하여도 은혜로 받은 그것 가지고 하는 것이니 보은할 내 것은 하나도 없다.



제6장 해석

본장은 어린양이 인(印) 떼기를 시작하여 여섯째 인까지 본장에 기록되고 7차 인은 8장에 기록되었다. 첫째 인으로 복음운동이 시작되고 6차 인으로 끝을 마치고 7차인은 일곱나팔의 재앙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한가지 기억할 것은 6장에서 8장까지의 일곱인, 8장에서 11장까지의 일곱나팔 14장에서 15장까지의 일곱천사, 16장에서 20장까지의 일곱대접은 순서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점에 있어 그 이루어지는 내용 역사도 이대로의 순서로 진행될 것으로 생각하여 일곱인의 행사가 다 지나가고 다음에 첫째 나팔의 일이 전개될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다. 다만 이 4종목 28차의 순서는 시작하는 순서고 종말의 순서는 아니다. 첫째 인의 시작의 복음운동은 최후까지 계승함도 그중에 하나로 28차는 시작이요 끝이 아닌 것을 보인다.



1-2절 "내가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1.'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때에'
어린양이 일곱인 중에 하나를 떼는 것을 요한은 보았다. 복음운동과 이를 위한 중단된 우주는 예수님의 주권에서만 전개되는 것과 전개하시는 주권자 자체가 택자를 구원코저 하는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원하고 원하시는 어린양이 전개시키심을 보는 눈이 성신의 눈을 가진 자니 복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앞에 모든 일을 이해되든지 아니 되든지 어린양의 자비와 시은의 역사인줄 알고 감사하며 인내하여야 한다.

2.'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네 생물 중에 우레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했고, 그 한 생물은 사자같은 첫째 생물이요 오라 하기로 함은 가라하는 말과 같다. 이는 곧 명령하는 것이다.

3.'흰 말'
어린양과 생물의 명령에 따라 백마가 오는데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함은 지상 정복운동 적 그리스도의 운동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백(白)은 성결을 상징하고 말은 운동을 말하며 활과 살은 복음운동의 성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복음운동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가진다.
①성결 : 흰것, 곧 그리스도의 의.
②전진 : 화살은 앞으로만 간다. 후퇴는 없다.
③직선으로만 가고 직선을 잃을 때는 벌써 무력으로 타락이다. 복음운동은 정의와 진실이 그 힘의 표다.
④휴식은 패전이다. 화살은 그쳤다가 새로 가는 법이 없다. 꽂히는 것으로 마친다. 복음운동은 충성으로 죽어 마치는 것이다.
⑤복음운동은 승리하고 승리하여 영원히 승리뿐이니 금생과 내생에 다 승리다. 그러므로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상술같이 영원승리의 뜻을 말하는 동시에 복음이 전세계 방방곳곳에 전하여 질 것을 가르침이다.

4.본문 1절, 2절을 각양으로 해석하는 수는 너무 많아서 들기 어렵다. 그 중에 유력하게 되어있는 몇 가지를 더 기록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람새이는 이것을 파사왕이라고 하여 왕과 그 군대는 흰말을 타고 활을 무기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크래다너스는 계시록은 상징적인 이유로 이를 배척하였다.
②엘리오트는 이 흰말 탄 자가 로마의 전성시대 곧 도미니안 황제 사망부터 콤모더스 황제가 즉위한 때까지라고 하나 우리는 이 견해를 받을 수 없다. 이유는 다음 학설이 정설인 까닭이다.
③크래다너스는 복음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였고 뉴웰은 이 점에 있어 크래다너스설(說)을 합당하게 여겼다. 이뿐만 아니라 계시 19장 11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시고 세계를 복음으로 완전 정복하여 심판하시는 승리를 말하였다. 거기는 활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6장에는 활을 가진 것만 차이있으니 19장에는 복음운동의 시작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①②설 외에 많은 설이 있으나 ③과 배치되는 설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혹자는 일곱 인(印)이 다 재앙들인데 하필 첫째 인만은 복음이 될 리가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복음운동은 불택자에게는 재앙 중의 재앙이요. 택자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이뿐아니라 계시록에 기록한 모든 재앙이 실상은 택자에게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복을 이루는 것이요, 불택자에게만 재앙이 되는 것이니 일곱인이 다 같은 내용의 운동을 가진 것이다.


3-4절 "둘째 인을 떼실 때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기를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1.'둘째 인을'
이 인(印)도 어린양이 떼시는 구속적 보혈과 이 운동에 소속한 생물이 명할 때에 일어나는 운동인 것을 언제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기억하고 담대하여야 한다.

2.'붉은 다른 말이'
붉은 것은 노기와 살생의 피를 상징함이니 곧 이는 전쟁을 상징한 것이니 이 점에는 해석들이 대개 동일하다. 그러나 크리다너스는 다음 셋 인을 복음전파라고 하였고 또 어떤 이는 전쟁이나 종말의 심판의 관계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전도 운동 뒤에 따라온 것이라고 한다. 한 예를 들면 주후 100년으로 138년까지 유대인들이 58만이라는 다수가 살해를 당한 일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석들은 일리는 있는 것이나 너무 지엽적이다. 이것은 땅 위에 복음운동을 위하여 일어나는 전쟁들이니 마10:34-35에 기록한대로 진리와 불의의 충돌로 일어나는 분쟁도 또 인생으로 세상취미에 깊이 잠겨서 술 취한 자와 같이 인생의 영원한 고와 사(死)와 자기 화복을 자유하지 못하는 것들을 모르고 교만한 자를 겸손케 하며 미련한 자를 슬기롭게 하며 강퍅한 자를 떨게 하며 땅에 전적 붙은 자를 세상의 환난과 종망(從望)을 주어 하늘에 소망을 가지게 하려는 마음 밭을 가는 복음운동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화평을 가져 그리스도와 연결이 멀어지는 것은 환난을 초래하는 것이오. 기독자에게 세상 환난은 그리스도를 찾게 하고 만나게 하는 갈급과 사모 부활을 일으키는 귀한 일이다. 진리 때문에든지 범죄로서든지 분쟁과 전쟁은 평안보다 수입이 많은 때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도들은 전쟁의 때나 평화의 때나 어린양의 보혈을 힘입고 땅의 것을 끊고 하늘에 매여 땅의 것을 주고 하늘의 것을 바꾸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의 생활은 어느 때나 그 생활은 일관이어야 한다.

3.'큰 칼을 받았더라'
큰칼을 받은 것은 전쟁의 군도를 가리키는데 엘리오트와 바안스 두 사람은 로마의 내한시대(주후185년-284년)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제한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복음운동을 위하여 가정 사회 국가 국제 간에 일어나는 전쟁을 가르침이니 이 운동의 권세를 복음운동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과 이 환난 당면에 생명운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주의 손에 붙들린 종들에게 위로하시고 또 지속 성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계시이다. 특히 4절에 '허락을 받아 화평을 제한다.'고 하는 것은 성도들이 두려워하는 혹독한 전쟁도 어린 양 되신 주께서 성도에게 참된 피해는 없고 영혼과 영생에 유익 되게만 위하여 허락하신 것을 보여 위로와 담력을 주시는 계시이다.


5절~6절 "셋째 인을 떼실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매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사이로서 나는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니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니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하더라."

1.'검은 말'
흑마는 포도주의 곤경을 상징하고

2.'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탄자'는 흉년을 그리스도에게 위임 받은 자를 상징하고 '저울'은 곡식이 극심할 뿐 경제타격이 극심하여 인심이 야박하여질 것을 가리킴이다.

3."생물사이로 나는 듯한 음성은"
인을 떼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어구(語句)이다. 인을 뗄 때마다 그것으로 기인되는 범사에는 구주 어린양의 주권행사임을 특히 기억하여 범사에 감사의 입장에서 살 정도의 신앙을 가져야 하는 동시에 셋째 인의 개봉할 때 생물사이에서 나는 음성은 일층 생명을 유익케 하는 것이니 이 점에서 시선을 옮겨서는 안 된다. 들리는 소리는 다음과 같다.
⑴"한데나리온에 밀 한되"
이는 물가의 폭등을 가리킴이니 평시에는 한 데나리온에 밀 8되를 살 수 있는 가격이니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의 품삯에 해당된다고 한다. 밀 석되도 같은 의미다. 그러므로 그 가족의 호구책이 없으니 경제의 타격이다.
⑵"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이는 부식물이니 일반 천한 식물이니 하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은사를 상징함이다. 육은 배고프나 그 영은 이로 인하여 전력을 기울려 잘 자랄 것과 잘 자라기 위함인 것을 상징함이다.

4.이 셋째 인에서 특히 기억할 것은 복음운동에 가난이 따르는 것과 또 택자가 세상을 향할수록 경제타격이 있을 것과 또 택자가 세상을 향할수록 경제타격을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면하려는 것은 망령이다. 다만 내 지식을 초월한 사랑의 섭리이니 이해가 되든 아니 되든 감사할 심령과 또 그럴수록 물질을 등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주시지 않는 식물로 배를 채우려함보다 주시는 감람유와 포도주로 배를 불려야 한다. 땅의 것의 가난은 하늘의 것으로 부요를 가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이다.


7-8절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서 죽이더라"

1.'넷째 인을 떼실 때에'
이 넷째 인을 떼신 이도 어린양이심과 또 수종한 이는 생물인 것을 기억하고 이 환난을 맞이하여야 한다. 계시록에 기록된 재앙은 복음기간, 곧 재림까지의 환난이니 그 전부는 사망과 환난과 변동이요 그 깊은 이면은 생명과 평안과 고정(固定)을 이루시는 운동인 것을 성도는 먼저 알고 맞이 하여야 한다.

2."청황색 말"
청은 놀랜 자의 안색이요 황은 시체의 안색이니 위급하고 혹독한 환난을 상징함이다.
첫째 인은 성결의 복으로 시작하여 둘째 인에 노기로 세째 인에 곤경으로 네째 인의 위급, 혹독으로 점화됨은 하나님의 구원운동이 사랑으로 시작하여 회개치 않을 때는 내유외강으로 점점 징계하는 원리를 보인다. 택한 자는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 바늘구멍으로 뽑아 내려고 하였으면 태산이라도 뽑아 내고야 마는 절대자이심을 믿고 점화 전에 일찍 순종하여야 한다.

3."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이 위급운동의 주권 세력은 사망이라 함이니 사망은 원어로 다나토스이다. 70인역은 온역으로 사용된 것이 30번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질병을 말함인데 그 깊은 의미는 질병뿐 아니라 인간의 영육이 혹독한 곤경에 봉착되는 것을 가르치고 질병은 아무리 악하고 권리자라도 어려움을 대리시킬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면피(免避)하래야 할 수 없는 입장의 어려움으로 회개를 재촉하실 것을 말한다. 둘째 인의 재앙도 세째 인의 재앙도 강퍅한 자는 회개하지 않고 피신할 수 있다. 그런 행위는 네째 인으로 방종의 길을 막으실 사랑의 역사를 가르친다.

4."음부가 그 뒤를 따른다"
지상에 사망을 통과한 후 만나게 되는 것이 음부이다. 다시 말하면 지옥이다. 이것은 특히 두 가지 뜻을 나타냄이니 택자를 반성시키고 새로운 섭리의 회개를 위하여 불택자의 많은 생명을 희생시켜 실물로 경계하는 것과 (사43:4 참조) 또 택자에게 있어서는 질병보다 중한 사망, 사망보다 더 고통스러운 음부의 고통 같은 역경을 봉착시켜서라도 죽기 전에 택자는 회개, 곧 성화완성을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이 노한 자리에서 회개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에서 회개하는 것이 복이 된다. 그러므로 음부적인 단계에서까지 회개를 받는 게으런 자가 되지 아니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이웃 불행과 사망을 보고 그것이 나에게 임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그기에서 멈추고, 당하기 전에 나를 위해 책상에서 미리 알게 하시는 책상격으로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감사하고 속히 회개하여 두려워하면서 옮기는 자가  지혜 있는 자다. 여기서 회개에 완패하거나 게을리 하면 그 다음의 순서는 자신이다.

5."저희가 땅의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땅 사분의 일은 글자적으로 해석할 것도 아니고 이 네 가지 재앙을 어느 한 시대의 역사적인 한 사건으로 국한할 것도 아니다. 이는 복음운동과 택자의 완패한 심령을 회개시키는 그 일에 있어 필연적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복음운동, 곧 회개운동의 형태 원리를 상징함이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시대부터 재림시까지 이 네가지 재난은 계속한다. 지방적으로 혹은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복음이 부절이 역사함 같이 이 재난도 부절이 역사하고 있다.

저희가 권세를 얻었다 함은 사망이 땅 사분의 일을 해할 권세를 얻었다함이니 곧 고통이 인간을 네 가지 방식 즉 검, 흉년, 사망, 짐승의 방식으로 해한다 함이니 이 해는 본장 6절과 같이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하지 아니하고 육을 해하여 영을 유익하게 하는 운동이니 육만의 표준으로 사는 자에게는 순 해뿐이오 영을 표준으로 하는 택자에게는 순이익뿐인 운동이다.

이는 계8:7-12 삼분의 일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니 특히 여기서 가르치는 뜻은 사분의 사 전부가 망한 사분의 일과 같은 자이나 사분의 일을 해하여 사분의 삼은 해를 보지 않고 회개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불행을 보고 깨닫는 것보다 복되고 자기의 불행을 보고도 반성이 없으면 그의 다음은 사망이다. 검 흉년 사망은 2, 3, 4,인에 해석과 같고 짐승은 유물주의를 상징한다 이는 너무 확실하고 많이 경험한 바인고로 자연의 법칙같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 국민의 경제에 타격이 오고 경제 타격이 오면 영양부족의 각 질병이 일어나고 이러한 도탄에 잠기면 유물주의 사상이 농후하고 맹렬하게 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징계하는 운동중 하나이다 소련과 중국은 하나의 실증이다

6.이 네째 인에 2와 3의 인을 떼는 사건이 중복으로 기록된 것은 특히 계시록에 7 7로 일어나는 그 일들이 일시에 마침이 아니고 시작을 말함이니 주 재림하실 말세지 말에는 4, 7이니 28운동들이 병행할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가면 갈수록 복잡하고 단순하지는 아니하니 성도는 더욱 관시력과 파수력과 투쟁력을 가져야 한다


9절 -11절 "다섯쨰 인을 떼실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저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시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리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쉬대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치가 차기까지 하라하시더라"

1.9-11절까지는 순교자의 생명과 호소와 하나님의 위로와 칭찬과 또 순교자의 수가 기정적임을 보이는 계시이다

2.순교자는 그 표준을 우리들이 바로 가져야 한다. 대개는 예수님 믿다가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여 죽기만하면 다 순교라고 한다. 순교는 박해자가 생긴 원인과 현재 박해를 면하지 못하는 이유와 또 피해를 당하는 그 중심들이  다 하나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서만 되어진 것이라야 한다. 정치적 대립 또는 자기 사상적인 대립 각양의 사감 혹은 대세로 오는 우연적인 피살 등은 기독자가 그런 것에 당하였다고 하여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노엽게 한 벌로 죽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 말씀으로 행하므로 또 계시 말씀을 양보하지 아니함으로 일어나는 박해와 또 가진 증거 곧 모신 그리스도의 인격인 생활과 그리스도를 유일의 구주로 증거하는 복음운동과 그리스도를 올바로 모시고 동행하여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일로만 인하여 핍박당하다가 죽임당하는 것이 순교이다.
고정적은 아니나 대개 순교자는 평소에 주를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아 죄악의 세상과 부패한 교계와 늘 대림대는 성경과 의에 입장에서 살던 성도들이 주를 사랑함으로 정사하는 것이며 또 주께서 가장 사랑하여 기독교의 최고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각자가 다 하나씩만 가진 것이며 또 죽음은 최귀의 것도 될 수 있고 최벌의 것도 될 수 있다. 최귀의 것을 최벌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 최대의 손해이니 평소에 늘 이 죽음 하나 바로 하기를 주의하며 또 노력하여야 한다. 누구나 버릴 생명이면서 최귀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폐물 이용이면서 그리스도에게 가져갈 최귀의 예물이요 자기의 가질 최귀의 실현이다.

3."죽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순교 당한 자 곧 그 영육을 가진 주격 곧 지정의와 희로애락을 아는 그의 참 사람을 가르쳐 영혼이라고 함이라.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이니 인간에게만 특수하게 주신 것이다. 이는 물질의 요소로 구성된 것도 아니며 신체 그것들의 배합으로 그 작용이 발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성작용과 심리작용과 성경으로 보아 영혼은 그 신체를 가진 주격이요 물질과는 분리되어 있어 물질을 이용하여 그 작용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질적으로 판이하고 위적으로 판이하니 존재와 분리에 대하여 피차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분리된다고 없어지거나 합한다고 없는 것이 더 존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돕는 것은 긴밀하다.
이가 아니면 저가 못 자라고 저가 아니며 이가 못 자란다. 여기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함은 죽임을 당한 것은 순 육이요 영은 아닌 것이 구별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물질로 조직된 그 신체를 존속게 하는 그 힘 곧 육의 생명 그것들만 죽었지 희로애락을 아는 참 자아 곧 자기라는 존재에 소유된 모든 것을 가진 주인인 자아는 죽음에 동참하지 아니하였다. 이는 순교자 아닌 자라도 구속받은 성도는 다 이러하다. 결코 영육이 나누인다하여 내가 죽거나 없어지거나 혹 흐미하여 지거나 빈약하거나 변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육을 통하여 하던 일만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제단아래 살아 서서 말하고 있고 제단 위에는 물질과 생명만 받쳤던 것이다. 제단은 구약시대에 피를 세사로 드리는 것이니 피는 곧 육의 생명이다. 성경이 피는 생명이요 생명은 피로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피를 드리는 제사는 생명을 드리는 표증이다. 그러므로 여기 제단이라고 함은 순교자들이 생명을 받쳤으니 곧 피를 드려 제사한 것이라 함이다.
이미 없어진 피와 생명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 것이요 참 중생되어 살아있는 자기의 생명이나 자체에게는 추호도 피해는 없고 자기가 소유하여 있는 소유물 곧 육과 생명만 주께 제물로 자기는 제단 아래에 있으면서 드리는 원리를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는 내가 죽는 것도 아니요 희로애략을 아는 내가 변해짐도 아니요, 엘리야가 주님의 받으시는 제사를 드리고 그가 기쁜 것과 그로 말미암아 오는 영광과 축복의 결과가 임할 뿐이요, 손해 됨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드리기까지 애로의 두려움이 있었고 그 드리는 용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오늘 우리의 순교도 그와 같다. 드리기까지는 고민이니 신앙이 아니면 할 수 없고 드리기만 하면 후에는 누구보다 자체가 기쁘고 그 결과로 오는 영광과 축복이 크다.

4."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제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니까"
여기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모바트는 이 순교자들의 기도가 에녹 가경에서 섭취한 것이라 하여 순교자들로 복수에 대한 계속적 간구의 부르짖음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억측의 해석이다.
⑴"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은 순교자의 수가 많은 것과 또 단결됨과 그 몸과 생명을 제물로 드린 다음에 큰 기쁨의 의기양양한 감사와 찬송과 간구를 겸한 부르짖음이요 후회하는 복수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⑵"거룩하고"
순교자들이 제물을 바친 후 낙원에 가서 그들이 받은 감상과 영광과 평강에 대하여 저들이 지상에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 정도로 세상 성도의 생애에 대한 세밀한 구별의 보응을 실지로 받아 세밀히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지공하심을 가르쳐 찬송한 것이다. 이렇게 천국에 간 자마다 너무도 그리스도를 위한 그 생애에 대한 보응이 세밀하시고 신실하심을 놀라지 아니한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은 그 순교자 된 것을 만족히 기뻐할 것이요, 또 순교자 중에는 세밀한 층하를 보고 놀래어 구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성호를 불렀던 것이다. 빛 앞에는 먼지까지도 드러남과 같다. 일생을 주밀한 고찰없이 산 이에 후회와 부러움이 어떠할까! (마25:37, 44 참조)
⑶"참되신"
이는 약속에 신실하신 것과 모든 것에 공의로우심을 저희들이 계시 말씀과 그 사랑에 의지하여 순교하고 받은 보응, 너무 커서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이 소리들은 참 크게 울려야 하겠고 지상에 있는 십자가에 원수의 길을 걷고 속는 줄 모르는 성도에게 귀가 뚫어질 만큼 크게 전하여야 할 소식이다.
⑷"대주재여"
이는 모든 것의 주인이요 또 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으로 모든 것을 편벽됨과 하후하박이 없이 섭리하시며 심판하실 자이심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과거를 경험하여 더욱 확실이 신망하면서 다음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⑸"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의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불택자를 심판하여 순교자를 박해한 복수를 해 달라는 말도 아니요 마귀를 벌하여 달라는 말만도 아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신 불신자를 망라하여 말함이다. 순교시킨 사람들은 벌써 지옥 가서 있기 쉽다. 다만 여기에 큰 뜻은 순교자들이 피와 생명을 제단에 바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영광과 둘째 구속하는 복음운동을 목적하는 하나님의 뜻 이루어지기를 원하여 감사와 간구의 제물인 것이다.
그들의 기인과 목적이 이것이었기 때문에 지상에 남은 역사의 머물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하나님이 모든 하실 바 일을 속히 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심같이 땅에서도 속히 이루어지기를 계속으로 협조 봉헌하는 충성의 부르짖음이다. 그들의 충성은 죽음으로 마친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도 계속적으로 피와 생명을 바친 그 충성으로 일진하고 있음을 가르쳐 피를 신원하여 달라는 말로 상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원을 택자의 구원완성과 다음에는 죄악에 대한 청소완성을 목적하는 것이다. 제단 아래 순교자들의 영이 있는 것을 크게 유의 할 것은 단번의 순교가 영원한 제사가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순교로 주를 사랑하는 그 사람은 그 정사의 역사는 1차 역사적의 것으로 회상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고 그 실지의 역사의 그 순간 같은 애정연결과 충성 봉사의 그 실질이 영원히 계속하는 것은 성도는 지상에서 예지 지식으로 가져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에서 주를 사랑하는 것은 다 이러하다.

5.11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얻는 성경의 법적칭의를 말함이 아니고 사죄칭의를 근거로 한 성화적인 칭의이니 하나님 앞에 성화와 선행적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으로 주신 의의 영광이다. 이는 일반신자가 아니고 특히 순교자에게 하시는 의의 영광인 듯하다. 이것은 실지로 무궁세계에서 받아 누릴 그 것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예표의 것이니 받을 때부터 한 없는 영광이요 존귀요 기쁨이 되는 것이다. 순교자의 모든 고난과 역경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영원히 위로와 영광이 더하여질것 뿐이다.
우리는 순교자들을 열심 불망하여야 한다. 그들을 기억하면 우리에게 용기와 인내가 생기고 그들이 죽기까지 견지한 확신은 우리의 의심을 부서뜨리고 그들의 죽기까지 인내함은 우리의 단기를 녹이고 사지의 희열은 우리의 소망을 갱생케 한다. 지상에서 독특한 십자가의 길은 천계에서 독특한 흰 두루마기를 얻게 하는 것이다.

6."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쉬되"
이 기간은 지상 구속운동이 다 끝나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를 가르쳐 잠시동안이라 하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구속 곧 성화운동을 신속히 하시는 것과 회개를 고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는 회개의 기간이 지루하지 않고 단촉한 감을 가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벧전 3:8). 천국에는 천년이 하루같이 여겨질 만큼 지루함이 없는 세계이다.
"쉬되"함은 본절 끝에 기다리라는 조건을 전제로 두고 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앞서간 성도들은 낙원에서 지사의 남은 성도의 승리를 쉬지 않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저희 동무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저희 동무 종들은 순교할 자들을 말함이니 순교한 자만이 순교자의 동무의 반열에 들어갈  특수권을 말함이니 다시 그들을 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참 깨닫고 그 사랑에 매여 일생을 자유하지 못하고 그에게만 복종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형제들도"이는 일반으로 택소함을 받은 남은 신자들을 가르침이다. 순교자라 다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로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나 구별이 있는 것은 증거함이다.
"자기처럼 죽임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라 함은 순교할 자는 순교로 순교자의 예정수를 채우고 일반신자는 일반신앙준비로 그 예정수가 차기를 기다리되 소원과 기도로 기다려야 할 것을 포함한 의미가 보인다. 천국은 성도의 공통승리와 완성을 개인 자기의 것과 동일시하는 심정이 천국시민의 본성으로 한다. 그러므로 화목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 고 했다(히 12:14절).


12-15절"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1.'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이 인을 뗌으로 어린양이 주권하시는 것을 성도는 먼저 기억하고 다음에 기록된 대로 극복 준비하여야 한다. 어린양이 전개하시는 것은 성화와 선행을 방해하려 함이 목적이 아니고 성화와 선행을 이루는 운동인 동시에 친히 긍휼과 희생으로 이루실 은혜의 운동인 것을 또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 유일의 방법은 소망 중에 인내할 것이다.

2."큰 지진이 나며"
바안쓰는 이것으로 보이는 정치적 대운동 환난은 로마가 고트족과 반달족으로 인하여 망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말씀이 로마 멸망의 사건에서 성취의 완필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여자적으로 지진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실상은 상징적으로 되는 것이니 지상에 대소운동 정치 사회 문화 이종교 각 사상 경제 위생 애락 등의 운동들의 대변동을 상징한 것이다. 이런 재난들이 일어날 때에 실지 지진도 별스럽게 일어나는 일들도 있다 동양에서도 일본이 패망하던 전년 1944년에 큰 지진이 한국과 만주에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지진은 상술한 바와 같은 상징계시요 문자적은 아니다.
이 재난은 복음 시작한 때부터 점점 승하여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을 절정으로 하는 복음을 위한 재난들이니 여기 말하는 지진은 각 시대마다와 최후와 극과의 대폭난들을 상징한 것이다 .

3."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총담은 털로 짠 검은 자루다. 이는 다 여자적이 아니고 상징적이니 해는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진리와 진리의 신의 감화를 상징함이니 곧 복음의 빛을 말함이다 (요1:4,5, 눅1:78 -79 사50:3절). 겔32:7 욜2:10-31 마24:29 눅21:25 들도 여자적보다 상징적인 면이 더 많다. 어느 시기나 환란이 일어나는 것은 죄악의 발동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나니 해를 총담으로 싼 것 같이 진리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가리워지게 되고 햇빛이 없으면 달이 빛을 잃는 것과 같이 진리가 어두워지면 진리를 반사하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어두워지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아2:17, 4:6에는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환란 때에는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같이 그리스도와 진리와 영감을 직접 자기 안에 충만히 모시지 못하면 피상적으로 진리의 분위기와 운동에서 외식하고 실력 없는 신자는 다 그 정색을 잃게 된다. 계17:14 기록대로 진실한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집과 같이 요동치 않는다. 왜정말년 신사참배 문제가 위급할 때와 공산주의 점령지대들은 어두워졌던 것이다.
남이 가진 빛으로 밝은 듯 하였던 자는 환경이 어두워지면 어두워지고, 그러나 자기 빛을 가진 자들은 어두워질수록 도리어 빛나는 것이다. 어두움이 빛을 빼앗는 이치가 없고 또 남의 빛으로 신랑을 맞이한 처녀가 없다. 여기 상징한 달은 자체는 전혀 빛을 가진 것이 아니고 남의 빛을 반사만 하는 존재로서 자기 빛같이 비치고 있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진실되지 못한 교회, 참빛을 자신이 받아 소유하지 못하고 달과 같이 되어 있는, 남의 것으로 또 환경과 분위기에 따르는 기회주의 무생명 신자, 대세주의인 실력 없는 외식 교회들, 믿는다는 단체들은 평소에는 진리를 말하면서 교권을 잡고 환란 시에는 이단을 주장하면서 또 교권을 잡는다.
자체에게 진리와 영감 곧 그리스도를 그와 더불어서만 동행하지 않고 다수주의자와 맹종주의자들은 지진같이 교회와 세상 대변동이 일어날 때에는 생명운동인 기독교 정색을 잃고 핏빛 같이 사망의 운동을 하는 자들이 된다. 과거 모든 성도의 박해가 외식자로 말미암았고 미래에도 성도들의 박해와 순교는 외식 교인들이 원수의 앞잡이 되어 이용될 것이다. 여기 가르친 바는 이것이다. 진실한 자들은 이기나니 이것이 금을 연단 하는 불세례이다(마3:11 계17:14 참조). 언제나 신앙은 개인적인 것과 독립성으로 자라야 한다. 주와 나와만 결합하여야 한다.

4."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땅에 떨어지며"
이 계시도 글자적으로 말하는 설이 있으나 과거 이스라엘에게 종교적인 부패로 별이 떨어질 것이라는 말로 예언한 일들이 많았으나 실지로 그런 일들은 별로 없었다. 도리어 그들과 상관없는 시기와 지대에서 별이 떨어지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로 인생에게 재앙이나 피해가 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계시는 말세 성도들을 경고하여 예비케 함과 위로로 담대 승리케 하려 함이 목적인 것을 잊어버려 이런 글자적 해석을 끌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 맞추어 국한하는 사람들의 해석은 이 계시에 대한 근본 목적을 착각하고 다만 시기시기 예고하는 것에 중점을 둔 까닭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중점은 예언과 교훈이 병행한 계시다. 말세학으로만 또 역사적으로만 또 교훈과 기독교 원리적으로만 해석함은 다 치우친 것이다. 이 계시들은 이상 기록한 사실들을 총포함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구구절절을 잘 구분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하늘의 별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들 택하여 부른 자들 중에 진실하게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패전할 신앙 행위들이라는 것을 상징함이다.

"땅에 떨어짐"은 단12:7 절과 같이 성도의 권세가 깨어짐을 당하는 것이며 12:11 절과 같이 매일 드리는 제사를 빼앗기는 일들 곧 신앙의 절개를 팔고 땅의 권세의 종이 됨을 가르침이니 일정시대 조선교회와 다니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한국의 38도 이북 교회들과 같은 형편들이다. 그러나 이런 시기시기마다 떨어지지 아니한 별은 더욱 귀함 같이 승리한 종들은 빛난다. 엘리야 시대에도 7천명의 승리자가 있었고 한국과 이북에도 다니엘과 같은 진리를 지킨 자들이 있었다. 이것을 가르쳐 단12:12 에는 마지막 45일을 견디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다.

그 떨어지는 형편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서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신자들이 타락할 것을 상징했다. 선 과실이라 함은 완성되지 못한 신앙을 가르침이요, 떨어지는 이유는 병들고 약한 것이 떨어지는 거와 같이 주님과 자기 사이를 가루고 있는 죄가 있는 병든 신앙과 실력 없는 약한 신앙은 대 환란으로 인하여 배신하게 될 것을 상징함이다. 그러므로 이 계시의 목적은 환란이 오기 전에 환란을 교회가 어두어지기 전에 어두어질 것을 가르치는 것이니 곧 자신이 배신하기 전에 배신할 원인이 있는 점을 발견하여 예비케 하려는 것이다.

계13:8을 보면 세상적 박해는 택자들이 다 승리한 것을 말했으나 교회부패로 오는 시험은 다 이기리라는 보증 성구가 없다. 그러므로 이방에서 오는 박해보다 우리는 교회라는 단체 안에서 일어나는 유혹과 박해를 더욱 주시하여야 한다.

5."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과 같이 떠나가고"
이는 천공인 하늘을 말함이 아니고 땅위의 인간들이 보기에 높은 권세들과 기관들과 운동들이 다 깨어지고 한자리 거침과 같이 망하여질것을 상징함이니 세상정치계 문화계 예술계 이종교계 외식의 기독교계 모든 경제계드의 그 존귀를 모든 사람들이 하늘같이 보고 부러워힌나 일시에 다 물러갈것을 상징함이다 계18:8에는 그 사라짐의 속도를 하루동안이라고 말했다 성도는 이점을 신앙의 눈으로 잘보아야 한다 38년된 앉은뱅이가 자리를 들고 이러섬과 같이 이런것들을 하늘을 보아던 그 눈에서 일어서면 쓸떄없는 버릴 보금자리인것을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6."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산은 지상에서 높게 용솟음 친 봉우리이니 인간을 근거하여 일어날 모든 도덕의 무리와 자선의 봉우리인 인간의 선을 가르침이고, 섬은 인간의 모든 사욕과 모든 정욕으로 말미암은 부패성의 모든 계획과 운동으로 높이 솟은 강하고 민활하고 이성적인 것, 그래서 모든 인기와 그 심령들로 주시하게 하고 있는 것들, 곧 죄악의 지극히 높은 봉우리이다. 이것들이다.

"제자리에서 옮기운다고 "하였으니 인간적인 모든 선행은 뿌리 없는 화초같이, 썩는 음식같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마지막 환란에는 다 마르고 깨어지고 날아가고 만다. 인간적인 각오나 의지 인본의 인조 신앙들은 십자가의 도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옮겨갈 산들이다. 십자가의 도는 환란에서만 존재하고 죽음으로 완성과 최후 승리가 되는 것이니 말세의 환란과 박해는 참된 십자가의 도만을 빛내는 암흑이요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높이 드는 홍수들이요 생수만이 용솟음치게 하는 한재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평안에서 환란을 찾고 자기를 시련하고 환란에서 면류관과 보좌를 사야 한다.

"섬이 자리에서 옮김" 같이 성신의 소욕을 배격하는 모든 인간의 사욕과 정욕이 중인의 시선을 끌고 있고 성도에게는 음녀의 포도주같이 유혹하고 있으나 한 때가 오면 환란이 오면 다 일소되고야 마는 것이다. 죽음의 날에 이런 것들을 안전에 두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인생들이 다 허사를 경영하였다고 공동 고백으로 유언을 남긴다. 성령은 소욕만이 영원하며 주께 힘을 얻고 얻어 신앙으로 비판하고 신앙으로 평가하여 신앙으로 소망 중에 건설한 것만이 영원 존재하는 것이다.

7."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1)'땅의 임금들과'
세상주의로 하나님 말씀의 결박을 벗어나 자유하는 자들이니 가장 이기주의요 인간 중에 주권의 행위를 하는 자이니 인간적으로 잘났다하는 자들 중에 많은 죄악이다. 모든 이종교 교주와 위대하다 하는 정치가 도덕가 사상가 학자 기타 두령들이다.

2)"왕족들과"
이는 상술한대로 땅의 임금 노릇하는 자들을 배경으로 하여 세도를 부리고 그들의 하는 일을 보조하는 사대주의자들을 상징함이요, 종교 도덕 정치 철학 문화의 최고 두령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고 거기 소속 되어 주장하고 옹호하며 사는 자들이며,

3)"장군들과"
자기의 무력과 인력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이며,

4)"부자들과"
이는 모든 것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함이니 지능 지위 권세 물질 등의 부요자들과 또 음밀히 말함인이 되는 구속의 은혜를 믿는 원리는 주의 피에 팔린 것이니 자기 것은 하나도 없는 가난한 자이다. 따라서 보혈과의 관계 원리를 벗어난 자와 그 심령에 세상 것으로 복잡하여 있는 심령들도 포함한 말이다.

5)"강한 자들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약한 줄 모르는 자니 강퍅하고 교만하고 인간적으로 왕성기를 가진 안하무인격으로 살고있는 자와 또 제3자가 볼 때에 그를 강한 자로 두려워할 수 있는 입장을 가진 자들이다.

6)"각종과 자주자"
이는 물론대소하고 하는 총칭의 말과 같은 말이다. 종은 지배를 받는 자요. 자주자는 지배를 하는 자이다.

이상에 말한 행위들은 불신자는 물론 다 이 일에 대한 범죄자이거니와 택소자 중에도 이런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행위가 많다. 또 음밀한 의미에서는 일생을 이런 죄악에서 벗어나는 피난자도 계속하여야 한다. 어두움에 빛을 만날 때에 즐거움같이 이 어두움의 행위를 하나씩 벗어날 때에 그 기쁨과 평강과 담대함은 받는 자 밖에는 모르는 일이니 인간의 방언으로는 표시 못할 정도의 것이다.


제7장

이 7장의 계시는 말세 대환난 중에 택소자(擇召者:택하여 부른 자)를 보호하여 영적 손해가 없게 하실 것을 말함이라 하는 설도 있고 또 환난 중의 유대인을 구원하실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일반 신자 또 유대인 하는 문제는 각이하나 환난에 대하여는 다 말세의 환난이라고 말들 한다. 그러나 이 7장은 여섯 인을 뗄 때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기독교 구원 전체를 망라하여 말함이나 아벨로부터 주님 재림시까지 택하여 부르신 신자 전부에 대한 환난과 구원에 대한 원리를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7장 1절에 '이 일 후'라는 말로서 여섯 인을 뗀 것과 딴 사건인 것을 표시하였고, 1절에서 3절까지는 기다리라는 의미의 미래사로 말하였고 4절은 벌써 인 맞은 자라는 과거사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대에 구분할 것이 아니고 구속의 총기간에 진리의 생애를 가지려는 신앙가마다 환난을 당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영적 피해를 입은 자가 없는 것을 상징함이다.


1절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1.'이 일 후에'
이는 6장 12절 이하에 여섯째 인을 떼는 말세 계시가 나타난 후라 말이니, 그 사건이 전개된 후 연속적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인 맞은 14만 4천 인은 계14:1-4에 기록된 대로 시온 산에 있는 자는 14만 4천인뿐이니 시온 산은 곧 구원 얻은 자의 처소를 가르침이며 이 사건을 제일 말세지 말 사건이라고 한다면 구약시대와 초대와 중세대의 구원운동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이 일 후에'란 말은 여섯째 인을 뗄 때에 되는 사건과 개봉되지 않는 딴 사건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7'자은 구속운동의 시종을 망라한 원리를 보이는 것이다.

2"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1)'넷 천사'
넷은 땅에 속한 수인데 땅에 속한 일을 분단 맡은 천사라 함이오,
2)'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세계 어느 곳을 물론하고 망라하여 대소의 분쟁과 전쟁을 책임 맡은 천사가 이것들을 조절하여 없어야 될 때에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고, 또 필요할 때에는 일게 하고, 일어나는 중에도 그 정도가 구속운동에 적합하도록 절대의 수권을 하여 있는 것을 가르친다.
3)"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는"
혹은 이 바람을 말세의 대 환난이라고 하는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구속운동도 죄악도 고금이 같기 때문에 초대교회 아벨은 형에게 피살되었으니 죽음보다 더 큰 환난이 어디 있겠는가? 초대교회도 말세지 말 환난 같은 환난이 믿는 자에게는 그 신앙 정도에 따라 개적으로 없을 때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 바람은 각양 각 시대의 환난을 상징함이다. 여기 '땅'은 하나님의 도 외에 있는 불신앙자들의 모든 선이라고 하는 운동에 소속한 전부를 칭함이오 바다는 세상국가들을 말함보다 세상에서 불의 죄악이라고 저들이 말한 그 전부들을 가르쳐 상징함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은 기독교 외에 저들이 말하는 선과 악 둘로 나눌 수 있다. 선에 속한 것은 땅이요 악에 속한 것은 바다로 상징한 것이다. 각종 나무는 이 선과 악의 운동에 두령 되는 인물들을 상징함이니 이것들에게 바람으로 불지 못하게 함은 전쟁이나 분쟁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함이 아니고 이것들이 일어나 계속 중일지라도 다만 시기와 시대에 각양으로 이 세 가지의 표준이 될 만한 지위를 가진 그것들을 불어 없애지 말고 개인 혹은 단체 혹은 지방 혹은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완성, 곧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성화와 선행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3가지 세력을 머물러 두게 함이니 이는 곧 참 하나님의 종과 거짓 종을(보혈을 바로 믿는 자를 종으로 말함) 구별하기까지 신앙의 시련 불로 머물게 하려함이다.


3절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1.'또 보매 다른 천사가'
이 천사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설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 천사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성도의 연단을 위하여 개인과 단체에 대하여 각 시기와 각 단계의 시험 정도의 일정한 합격 표준 단위를 가지고 온 천사이다. 각자 각 시대 시험의 단위가 각이 하나니 그 단위는 이 천사만 안다. 바람으로 땅과 바다와 나무에 불지 말라함은 이 단위인 합격점에 도달하기까지 시험하는 자들을 남겨두라고 하는 것이요 인친다 함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점이 각자의 시험 합격단위에 도달하면 인을 쳐서 하나님의 것으로 합격됨을 말함이다.
인친 후에 바람으로 불게 함은 합격 후에는 시험하는 박해물들을 없애버리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화평을 가져오는 천사도 아니오 이 책임을 가지고 온 천사이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화평의 천사보다 박해자를 해하지 말라는 천사이니 분쟁을 계속시키는 천사이다.

2.'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인을 친다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합격된 것을 인정하고 이제는 그 단계까지 혹은 그 사람 전부를 시험한대로 합격된 그 부분은 하나님이 인정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남은 때에 확대하는 책임을 진다는 가르침인데 특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합격된 자에게 대하여 계속적인 은혜역사를 표시함과 그 합격자 자체에게 받아지는 은혜가 계속할 뿐 아니라 가면 갈수록 새로워지고 생명에 속한 것이면서 자라고 청청하여 질 것을 말한다.

3.'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해 돋는데서 올라옴'은 그리스도의 생명운동에서 보냄은 입은 천사라 함이요.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진리로 사는 성도를 박해하는 세속의 도덕과 죄악에서 발원한 모든 운동과 거기에 유력한 인물들(일본 정신 신사참배 부패한 구교운동 이종교 각 사상 같은 것들이 땅과 동조 남(東條 南)총독 로마 법황 네로 황제 스탈린 김일성, 가족 핍박하는 주인 상관 등인 나무와 중국 마적단 창기의 세력들 공산주의 사기협작 술에 미친 사람 기타 모든 악 사상으로 일어나는 운동들 이런 것들을 가르친 바다)을 없애 버릴 재앙들을 맡은 천사에게 큰소리로 부탁하는 말이니 이 부탁은 큰 소리로 하는 것은 세계방방 곳곳 가정가정 개인에게 다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천하를 망라하여 있는 성도의 방해물들을 제멸하여 버릴 천사에게 명하는 소식인 고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4."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시험의 단위와 합격여부를 심사할 책임지고 온 천사가 시험 중에 있는 성도를 그 시험에 합격되기까지는 박해하는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 함이다. 이유는 그런 것들을 없애버림은 박해가 없으니 난 역경이 없게 되고 참 그리스도의 피에 팔린 자유 없는 종이 아닌 자로 자유하여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고라도 박해를 면하는 자인지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참 종과 종 아닌 즉 참 신자와 신자 아닌 자를 구별하기까지 박해물을 그대로 두라 함이다.

5."하나님 종은"
①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소유된 것.
②그리스도의 종 곧 사환이니 절대 무 자유로 순종자(그리스도의 종은 곧 하나님의 종이다.)
③구라파에서는 종이 3가지라고 하는데 말하는 종과 활동만 하는 종, 움직이지 못하는 물건인 종이 다 같은 명사로 되어있다고 한다.
④여기 하나님의 종이라 함은 완전무흠에 순종을 말함이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완전순종을 말함이니 그 정도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시켜드리는 것 의미한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치 않게 하시나니 (고전10:13) 반드시 봉착된 시험은 극복을 요구하시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인침"
이 '인'도 상술한 종의 해석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순종에 대한 요구하시는 바가 진행 중에 있는 경우와 장성 도중의 시기와 또 단계 단계마다 요구하는 정도가 있나니 그 시험에  합격됨은 거기까지는 하나님이 승리로 인허 하시고 또 거기까지는  성화 된 하나님의 것으로 책임을 지신다. 작자에게 이점에 대한 최후 절정은 하나뿐이니 거기까지 도달하는 그 사람으로서의 완전순종을 최후의 합격 종으로 인을 치신다.  
진행 중에 있는 이는 지상 환란 중 수호를 보장하는 책임 증표를 상징함이요. 최후의 날인은 별세 시에 되는 것이니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말미암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한자로 완전히 주의 것으로 관계를 맺어 누리게 할 것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증표이다.
본장에 계시된 것은 기독교는 시련을 통과하여 완전케 되는 그 원리를 상징으로 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인친다는 것은 한번만 기록되어 있으나 시행에는 여러 번 있어 완전하여지는 것이다. 인을 맞은 후는 하나님의 것이란 말이니 그에게는 완전생활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성도이면서 또 일생동안 부패성이 잔존하여 미성화된 부분이 있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순서적인 날이 없다고 하면 최후에 한번 죽는 시간에 울 것이요, 그렇다면 그 도중에는 하나님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직시하는 것과 인정도 받지 못한 것이 되게 된다.
그러나 택소자면 정도 정도대로의 수호가 있는 것이 확실하니 별세 시까지 날인 못 받은 것으로 간주 할 수 없고 또 어떤 자에 한해서는 별세 말로가 아닌 중로에 인을 받았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여생에는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 같은 이도 롬7:9에 보면 노년에도 원치 않는 일이 행하여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차서적인 날인이 있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4절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1.'십사만 사천인'
계시록 7장에 땅과 바다와 나무에 바람이 불지 아니 할 때를 대 환란 전 고요한 때라 하여 고요한 때 인을 맞으라고 외치는 인들이 있다. 여기 인 맞은 자 144,000인은 구약 성도도 포함되었다. 그들이 말세 대 환난이 일기 전 인 준비하라는 말에 관련된 의미는 있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1절 바람을 구원 원리로 택자를 다 구원하고 일어나는 대 환란으로 세상을 멸할 것을 논했다면 본장 14절에다 큰 환란 중에서 왔다는 말을 쓸 이유가 없다. 또 어느 때나 반드시 성도는 환란을 통해 득구하는데 환란전 인을 받은 자가 환란 승리한다고 하는 이 원리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본장의 해석에는 맞지 않는다.
평안한 시기에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께 인증만 받는 것이요 참 종으로 완결부동의 인을 받는 것은 환란 중에 받는 것이니, 7:3 하나님의 인은 결정적인 환란 최후에 받는 인을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각 시대 각 입장의 성도마다 시험하는 각 환란은 그 성도를 시련하는 하나님의 목적하신 대로 잡것을 다 태우시고 시험으로 말미암은 연단은 완필 하였다고 모실 때 그 시련에는 완전 순종이라 하는 인을 맞고 시험하든 땅과 바다와 나무에 소속한 것은 천사를 통하여 해하여 버리시는 것을 가르쳐 인 치기는 "땅이나 바다이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고"계 7:3절에 계시하였다.

본 장 뿐 아니라 각 성경에 보면 평시 생활로 인증하시고 최후적인 승리를 하도록 부탁한 일이 많다. 계2:9에 서머나 교회에 승리를 인정하시고 10절에는 최후까지의 순종으로 승리하라는 것을 부탁하여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계시록 3
장 10절에도 인증하시고 최후 순종인 최후 승리를 빼앗기지 말라고 주의를 시켜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혹 해석하기는 이미 얻어 놓은 면류관 빼앗기지 말라고 한 것이니 환란 전 얻기는 얻어 놓은 것으로 그 다음 절까지도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 면류관은 승리를 가르침이다. 서로 빼앗을 수 있는 승부 좌우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때는 어느 편이나 그 승리를 최후적 승리로는 간주하기 어렵다. 이유는 남은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석에서 갑이 이겼다 할찌라도 을의 증거자가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 때는 완전 승리는 안 된다. 이와 같이 기독자의 종 생활은 평소보다 환란 때가 어려우니 환란 전의 순종으로 완전한 종의 날인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계시록3:10-12절 "천하를 시험하는 환란의 때에 승리(면류관)를 뺴앗기지 아니하는 자에게 성전 기둥과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겠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계시록 7장 하나님의 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계7:4 "인 맞은 자는 계2:10, 3:12, 12:11 과 또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구출됨과 세 청년이 불 속에서 구출됨과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을 들음과 사렙다 과부가 떡 한 개 바침과 열 처녀가 신랑 맞이에 확정과 확실의 결정이다. 평소에 인 맞아라 하면 일반이 기쁘는 할 것이다. 평안 시는 참 종과 거짓 종이 나타나지 않는다. 환난 시에 나타나는 고로 땅과 바다와 나무 등은 멸하지 말고 두었다가 진가를 구별하고 그것들을 없이 했다.
7장 바람은 성도의 환난이 아니고 세상 것들을 해하여 없애는 것이다. 참 종들은 구별하시고는 박해자들의 세력을 없앴다. (다니엘도, 세 청년도, 마가야에 대한 아합, 엘리야에 대한 아합, 신사박해에 대한 8.15 해방도 그러하다. 환란기와 동일로 본) 주관의 견해에서 나온 해석이다. 교회와 이방의 환란이 동시되는 일도 있지만 아니 될 때가 더욱 많다. 기독교사에 가장 큰 박해 세 청년, 다니엘, 네로 황제의 박해, 도미니안 황제의 박해, 소련의 박해, 루터 개혁시 박해, 콜롬비아 박해, 흥선대원군의 박해, 일본 신사참배의 박해는 다 이방들에게는 평안과 의기양양이요 기독교만 환난이었다. 그러므로 이방 박해와 기독교 박해를 동일로 봄은 불가하다. 2차 대전 시 일본이 박해로 나가니 기독교 박해는 그쳤던 것이다. 신사 참배 만나기 전 하나님의 인증은 평소의 순종으로 받고 8월 15일까지의 하나님이 종들에게만 인치시고 다 마치는 그 시 땅과 바다와 나무는 날라 갔다. 그러므로 7장은 ①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할 바람은 특히 하나님 종 이마에 인치기까지 기다리라는 어의와 ②14절에 다 대 환난 중에서 온 자들이란 말과 ③14절 이하에 구원 받은 자이므로 성결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키심으로 박해할 때와 바다와 나무가 있었다. 만일 땅과 바다와 나무는 하나님이 천사로 통해 해하였으며 성도의 박해는 있을 수 없다 ④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총 성도의 형편은 상호 관련시켜 보면 평소에 준비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가 환난 시 하나님의 참 종이라는 인 맞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평소에 수인하였다 하여 승리한 줄로 안심하고 태만하면 안된다. 준비는 평소에 있다. 평소 평안시 하나님 말씀 지킨 자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지키시기로 약속하신다. 그 다음은 부탁하시기로 시험의 때에 내가 너를 지키리니 네 면류관은 빼앗기지 않게 굳게 잡아라 이기면 불출적인 성전 기둥 된다.

계3:11, 2:8 내가 너를 아노니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 주마 또 말하셨다 우리는 평안 시 환란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순종하여 인정을 받고 지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참 종과 거짓 종의 구별이 결정되는 환난 시요, 하나님의 인 받도록 지사 충성해야 한다. 평소는 인정이요, 인은 아니다. 인은 부동 불변의 표 기록이다. 평소 공부준비 시험은 있으나 참 시험에 통과해야 된다. 인을 받는 수인자에게는 계시록 9장 황충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성도는 환난 때에 최후연단을 받는다. 환난에 승리한 자는 세욕과 사욕의 종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소용없다는 경험을 가지게 된다. 평안 시나 환란 시가 부패하기는 일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깊은 외식과 자율 자력은 환란 시에 구별된다. 계시록 7장은 환란 시 수인을 가르치기 위하여 14절에다 흰옷 입은 무리는 큰 환란 중에서는 나온 자들이라는 말을 장로는 요한에게 묻고 또 답해 주었다. 이것은 인을 받는 기간인 수인기를 밝히는 뜻이다. 14절 이하에 하나님을 섬김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함은 구원의 성결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니 땅과 바다와 나무가 해하나 하나님이 보호하시니 승리하시니 승리하고 수인하게 된다. 수인 후는 땅과 바다와 나무를 멸하여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7장은 기독교 수인원리를 말함이니 아벨도 박해 중 수인한 셈이다. 복음의 원리상 하나님께 하나님의 것으로 확실히 인침 받을 준비를 평소에 맡김은 불가하다. 인정받고 절정기 환란를 통과하기까지 일심 준비로 충성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종들이라 함은 순종의 진가를 요점으로 함이니 순종의 제일 어려운 때와 가치가 고귀한 때는 환란적이다.

그러므로 수인 시는 환난 중이 분명하다. 계시록 3:10, 2:10 보면 최후적인 환난이 오리니 충성하라 하시고 그 후 이기는 자는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최후적인 수인은 환난 최후 시다. 성도가 수난 시는 도리어 원수들은 해 받는 때가 아니오, 최고 권세의 때이다. 그러므로 계7:1 바람인 환난을 미래 대환난으로 보면 환난전 수인하라는 해석은 맞는다 하나 그들의 해석은 환난전 수인하면 환난 승리한다고 전 기독자인 144,000인이다. 말세 대환난을 통과할 양(羊)이 없으니 또 틀린 해석이 되고 또 계7:1 바람인 환난을 수인자가 다 봉착할 환난으로 해석한다면 환난 전 준비로 수인하고 후에 이 환난을 맞이 하라 함은 맞으나 또 계7:3 수인을 계7:1에 기록한 환난(바람)전에 수인하고 수인 후 환난을 만난다고 해석하면 일반 복음원리에는 맞으나 계7:1 환난을 개개인의 환난, 곧 각 시기 시기마다의 환난이 되겠으니 144000인이다. 수인 후에 환난이 있다 함이 또 틀리게된다.
그러므로 환난 전 수인 한다는 해석은 양면 중 어느 한 면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7:1-3 에 바람이 불지 아니할 때는 성도의 환난 시요. 이방의 세력이 존속시의 수인은 환난 중에 이루어진다 함이 가합하다.

(십사만 사천인의 계수)
어떤 이는 14만 4천인을 계수 할 때에 4는 지수 또 3은 신수로 4 × 3 = 12 × 교회수(12)로 곱하면 144가 되고 거기에 무한 다수로 표시된 1000으로 곱하면 144000이 된다고 하고 어떤 이는 12지파와 12사도로 곱하면 144가 되고 또 거기에 1000배하면 144000된다. 이와 같이 해석한 일들이 있다. 이것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는 확실히 믿는 것은 이 수는 아담으로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구원받은 자 총수는 틀림없다.


5절-8절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라'

5절에서 8절까지에 기록된 12지파 중에는 순서가 바꾸어진 것도 있고 또 빠진 지파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 열거된  내용은 영적 의미를 가르친다. 글자 적으로 유대의 12지파를 가르쳐 말하지 않는다. 로마이어는 말하기를 이스라엘이란 칭호는 계시록에서 (2:9, 3:9)만 아니다. 원시 기독교인들이 영예롭게 여기는 칭호이었다. (롬 2:29, 갈 3:29, 6:16, 빌 3:5, 벧전 1:1, 약1:1) 그리고 12지파의 이름들도 역시 그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시 기독교에서는 이런 이름들로서 교회를 상징하기 좋아하였다.  여기 기록된 형식대로 이 지파들은 다음과 같이 영적 의미를 보인다

"유다, 루우벤"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탄생(誕生)하신 지파임으로 초두에 높이고 루우벤은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뒤떨어졌다. "에브라임"은 여기 제외되었으니 그 이유는 그 지파가 교만하였던 까닭인 듯 하다. (삿8:12) "단" 지파도 여기 없으니 그 이유는 그 지파가 적그리스도의 지파로 알려진 까닭인 듯 하다. (창49:13-27, 신33:22, 렘8:16) 그러므로 여기에 12지파는 기독교 초대 창세기부터 주 재림 때까지의 신자를 총칭한 상징이다. (창48:22과 겔47:13)에 요셉에게는 두 부분을 주신다는 예언대로 여기에 기록한 12지파 중에 요셉과 므낫세가 기록되고 단이 빠졌으며 요셉의 아들 중에도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사람 중에 에브라임은 빼고 므낫세가 등록되었다.


9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1."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전 세계와 각 시대의 전 인류를 말함이니 유사 이래의 전 인류를 말함이다. 나라는 생활과 습성의 유사(類似)요, 족속은 혈통을 말함이오, 백성은 정치를 말함이오, 방언은 국민을 말함이니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런 것들에게 제한 받지 아니하고 이런 것들을 초월하여 세계적과 전인류적인 구원을 말함이다.
"방언에서" 하는 에서란 말이 있다. 이 에서라 함은 그 중에서란 말이니 전인류 중에서 택소자를 구별하는 말이다.

2.아무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가'
여기에 아무나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144000인과 각이하다고 하는 학설들이 있다. 그들이 근거하는 이유는 수가 각이하다고 한다. 땅에 있고 하늘에 있어 처소가 다르다고 하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나는 전 이방인이라고 한다. 하나는 고생(苦生) 중에 있고 하나는 승리한 자라고 이것들을 이유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 무리다. 다만 귀로 보고 눈으로 본 것뿐이다. 그들이 네 가지 말한 이유는 실상은 한 무리라는 것을 보이고 있다.
①땅에 있는 자라야 하늘에 있게 되고
②이스라엘 백성은 세계적인 전인류 유대인과 이방인을 망라한 득권자라야 이스라엘이 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29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께 속한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받은 자라고 하였고 또 고전10:18 을 보면 육신을 따라난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성신으로 따라난 이스라엘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다. 또 눅1:68-69 을 보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속량하시며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하였으니 믿는 자는 다 이스라엘 됨을 가르침이다.
③고생가운데 있는 성도라야 승리가 있고
④땅의 수, 들린 수는 구원얻은 모양을 말함이고 하늘 수는 집합의 수를 말함이니 그 모양을 통과해야 그 수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두 무리를 각이한 것으로 보면 144,000인은 어린양인 목자와 하나님의 장막과 그리스도의 피와 상관이 없는 자니 구속받은 성도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이니 구원받은 자인 것이 또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두 무리는 하나로 보지 아니하래야 할 수 없다.

3."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의를 가르침이요.
"종려 가지"는 사시로 청청한 나무인데 이는 승리와 영원한 기쁨을 상징함이니 승리와 기쁨을 완전히 소유한 것을 손에 든 것으로 상징한 것이다.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보좌는 택소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게 감사 찬송하는 것이며 어린양은 특히 구속하신 양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 그 자비와 긍휼과 특성의 그 사랑의 은혜를 찬송함이다.
"셀 수 없다" 함은 사람으로 천사로 셀 수 없는 수를 말하고 한이 없는 수라 함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계수 못할만한 많은 수임을 말함이다.


10절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속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하니"

1."큰 소리로 외침"
눅10:27 구속 받은 영육의 전력을 다하여 찬송함을 의미함과 모든 피조물들도 환영할 찬송이라는 것이다. 천국에는 찬송이 성도의 전업이 된다. (엡1:6, 12, 14)
2.'구속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구속하심은 보좌에 앉으신 성부의 택하심과 또 보좌에 함께 앉으신 성령의 택소와 성화의 모든 역사와 어린양의 대속으로만 된 순 은혜임을 찬송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기억할 것은 엡2:1 같이 의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은 자이니 추호의 의도 없다. 순전한 은혜로만 된 것을 언제나 범사에 겸손하며 소망하며 주만 자랑할 수 있는 열매가 맺혀지기까지 인식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신망의 하나님의 권능, 불변, 사랑, 지혜, 은혜 기타 모든 면들 중에 제일 믿기 어려운 것은 은혜이요. 또 제일 필요한 것도 은혜를 확신함이요. 하나님께 영광돌림에 제일 은혜를 신망함이다.



11절-12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하더라."

1.본 찬송은 천사들의 찬송이다.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천사가 둘러선 것은 천국의 영광의 위치를 보인다. 보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장로들은 천국장로들과 병합된 모든 성도들도 포함함이요. 네 생물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운동의 기관들이다. 천사는 이를 시위하여 있는 것이니 성도는 천국에서는 천사보다 하나님과 가깝게 있는 지위이다.

2.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제목으로 천사들은 하나님께 찬송한다. 여기서 구별할 것은 장로와 생물은 천사가 시위를 하고 있으나 오직 찬송은 하나님께만 구별하여 돌린다. 천국의 <4권 시작>영광은 하나님에게만, 또 자기가 은혜를 입은 것보다 남이 은혜 입은 것을, 자기가 높아진 것보다 남이 높아진 것을, 자기가 영광 입은 것보다 남이 영광 입은 것을 더욱 기뻐하며 그 시은자에게 자기가 직접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하며 더욱 감사하며 더욱 찬송하는 나라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본장 9-10절에서 찬송하는데 11절 천사들은 엎드려 얼굴을 대고 경배하면서 찬송했다. 남의 행복을 자기행복보다 남의 입장을 자기 입장보다 더욱 신중이 여기며 기뻐하니 그 나라의 국기는 사랑이다. (아2:4)

3. 찬송 제목은 일곱 가지니
①찬송(하나님의 뜻의 온전하심과 동의자 되었음을 스스로 즐겨 하면서 찬송함이요)
②영광과(이 영광은 다음에 지혜와 능력이 딴 제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그 사랑이 무궁하시며 완전하심에 사랑의 영광이요)
③지혜와(모든 예정과 이행에 대한 완전과 지공하심과 또 생명 곧 사랑에 소속한 선하신 지혜를 칭함이요)
④감사와(홀로 창조주와 시은자시요 모든 피조물은 그로만 존재하고 존속할 수 있으며 또 행복될 수 있음을 과거 현재 미래적으로 감사함이요)
⑤존귀와(지존하신)
⑥능력과(피조물의 지식이 도달 못할 무한의 힘)
⑦또 힘이(모든 피조물이 인식할 수 있는 힘, 피조물과의 상관된 힘 이것들이 천사의 찬송제목이었다.

특히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함은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됨을 말함이니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심을 가리키고,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함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에게 일곱 찬송 제목이 있기를 원함이 아니고 그 제목은 영항 불변적으로 있는 것인데 천사 자체로 이 찬송을 영항적으로 계속할 수 있는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 일종의 기도와 같은 것이면서 또 현재가 찬송하는 편에 서 있는 것을 한없이 행복되이 여기는 노래이다.

'아멘' 함은 원한다는 뜻이니 있을지어다 하는 말을 거듭 소원한 것이다.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배치(背馳)되는 것을 제일 불행과 저주로 알며 하나님과 한 편 되고 동의되는 것을 지상의 영광으로 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이다. 지상 성도들도 이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참 지혜 있는 자가 된다. 이 찬송 제목 중에 든 일곱 가지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리고 피조물 그 어느 것에라도 돌리면 자타는 손해 본다(행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