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찬 목사님의 글

2008.01.17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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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신찬 목사님의 글
선지자선교회


1. 첫 신앙의 시절  

첫 신앙의 순간, 박 신찬을 포함한 대부분의 분들이 가졌을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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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0년의 생존이 큰 기적이고 40여 년의 신앙생활이 더 큰 기적이고 20여 년의 목회생활은 더욱 크고 놀라운 기적이라고 믿는다. 유교적 고풍이 극심한 가정의 장손으로서 예수교의 신앙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기적이요 은혜이다.

부모님의 심한 반대 속에 주일성수하며 교회 생활 계속하다가 달빛 밝은 어느 날 저녁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의 정문 위에 앉아 기도하고 집에 와서 신앙생활 자유롭게 하라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교회까지 달려가던 그 기쁨의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이후 모친과 형제 자매, 그 자손 모두 신앙인이 된 것도 기적이다.

고교 1학년 크리스마스 다음 주일부터 친구들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여 3학년에는 신앙 생활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주일 예배 뿐 아니라 주변 교회의 모든 집회에도 빠지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11월에 읍내에 있는 개척 교회의 집회에 담임선생님과 곰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 주간 참석했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신앙 고민을 하는 학생을 기독학교로서는 징벌할 수 없다하시며 용서하신 곰님의 넓은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신앙생활에 빠져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잘못이지만 후회해 본 적은 없다.

1957년(고1) 크리스마스 다음 주일인 12월 29일에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성탄절에 떡 얻어먹으러 온다고 생각할가봐 일부러 성탄절 지난 첫 주일부터 나간 것이다. 나의 첫 교회는 건너 마을의 조그만 동산 위에 있는 아담한 고신측 교회였다. 두루마기 입고 설교하시는 늙어 보이는 조사님(전도사)으로부터 요6:1-14 오병이어의 설교를 들었다. 58년 일년 동안은 신앙에 별 진전 없이 보낸 것 같다. 교회는 빠짐 없이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나갔다. 보리밥을 많은 먹던 시절이라 그런지 몰라도 어떻게 설교 시간에 무엄하게도 방귀를 여기 저기서 뀌어 대는지 퀵퀵 웃다가 돌아오곤 했으니 믿음이 자랄리 없었다.

일년이 가고 58년 마지막 주간에 집회(사경회)가 열린다기에 월요일 저녁 친구와 함께 참석했다. 나의 첫 집회 참석이었다. 그러나 그 집회 시작하면서  교회가 분열하는 서글픈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청년회 주최로 초청한 강사님이 한창 노회에서 재판해오고 있는 서부교회 백영희 조사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강단에 세울 수 없다고 처음 들어보는 골리앗 같은 당회장의 위엄찬 목소리였다. 이웃교회에서도 다소 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청년회장으로 생각되는 선배가 나와서 다른 곳에서 집회를 강행할테니 참석하라는 발언과 함께 거의 퇴장하여 田집사님의 새까만 아주 작은 오두막 집 방과 마루에서 첫 집회를 마쳤다. 이튿날 동네 가운데 있는 다른 李집사님 집의 벽을 뜯어내고 두 방을 한 예배당으로 만들고 중학생들이 학교서 사용하는 책상 하나를 강대상으로 세우고 집회를 끝 마쳤다. 새벽까지 한 시간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맨 앞자리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때의 말씀은 기억 못해도 설교하시던 조사님의 얼굴은 천사 같이 느껴질 정도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부러워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조그마한 동리에 두 개의 교회가 서로 종소리를 울리며 예배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고 지금도 아픈 분열은 이 땅에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동네 가운데서 집회를 끝낸 그 집이 오늘에 우뚝 솟은 창북교회로 발전한 것이다. 내가 약 20년 간 밤낮으로 드나들며 신앙생활을 한 모 교회인 것이다. 눈을 감고라도 찾아갈 수 있는 정든 교회였다. 백 조사님이 상회불복종이란 죄목으로 노회에서 제명(59,6) 당하기 약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첫 교회, 첫 집회, 첫 분열로 교역자 없이 우리끼리 모여 예배드리는 형편이었으나 나의 신앙은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 생활 약 40년은 모 교회와 새로 시작된 세칭 백 파 교단의 약 40년 연대와 같은 셈이 된 것이다. 총공회는 그 이후에 붙인 이름이다.

두 세 선배와 우리 친구들끼리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기도 하며 서부교회서 다달이 순회로 오시던 귀한 집사님들의 설교와 격주로 오시는 이 조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자라갔다. 고 3 학년이 주교 부장도, 청년회 회장도 해보기도 하지만 유명무실 그대로 실패였다.

59년 9월 29일 추계 휴교이므로 동쪽 아침마다 해 떠오르는 높다란 금귀봉 정상에 올라 기도하다가 내려오니 우리 교회에 교역자님이 오셔서 읍내 李집사님 댁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뻤다. 친구들과 같이 가서 저녁에 약간의 이삿짐을 질머지고 올라오고 전도사님은 이튿날 9월 30일 수요일에 부임하셨고 첫 수요 예배는 창3:1-8 설교하시다가 단식을 오래하여 지쳐 중단하고 말았다.

그 신 전도사님은 내가 만난 첫 목자였다. 남자 전도사를 조사라 부르고 여전도사는 그대로 전도사로 불렀다. 그 이후에도 여전도사는 거의 찾을 수 없을 만큼 희귀했다. 그래서 여 전도사님 부를 것 없이 전도사님이라고만 불러도 다 통한다. 혼자 사시는 어머니 같이 보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30세 중반의 젊은 때인 것 같다. 나의 모 교회 20년 동안에 열 분의 교역자가 교체되었다.

일편단심 하나님 사랑, 교인 사랑하시며 기도로 사시던 그 분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그 분이 소장한 박윤선 목사님의 전 주석과 모든 책을 탐독했으며, 그분의 기도실을 뒷산 너머 산 중턱에 친구들과 굴을 파서 마련해 드린 것 등은 잊을 수 없다. 전도사님은 나의 아내를 중매하기도 하신 분이며 우리 친구들이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며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는 응답되어 여러 장로(이환봉, 성기정, 오세윤, 남상철, 김병권),목사(김철수, 김병춘)가 되었고, 집을 예배당으로 사용한 집사님의 두 딸은 사모가 되었다. 이 모든 신앙 동지들을 나는 자랑하며 지금도 존경하고 있다. 2세들 가운데도 여러 교역자들과 사모들이 자라고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은 64년  8월 29일(토) 꼭 5년 만에 이웃 교회로 이동하셨고 송용조 조사님이 도평과 겸임하여 몇 개월 목회 하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철없는 젊은 우리들이 여자는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배신하여 이동케 했으니 우리의 소시의 죄악을 사하여 주옵소서. 몇 년 전 서울서 은퇴하여 홀로 늙어 가시는 전도사님께 지금도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그 후에도 이런 교역자 반대는 몇 차례 더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는 가룟 유다의 후예인 것이며, 목회하며 교인들의 반대를 부딪힐 때마다 마땅한 보응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긴 것은 잘못된 생각일까?

영욕이 교차하는 첫 교회, 첫 집회, 첫 목자, 첫 교단, 첫 배척!   만감이 교차하지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때를 생각하며 기도 동지회로 모이기도 한다.

나는 그 동안 1960년 3월, 읍내 있는 교회의 유치원 강당을 빌려 졸업식을 했다. 61년 11월 17일(금)저녁 중앙교회(현 창동)집회 기간에 백 영희 목사님께 학습을 받았고, 62년 5월 7일 본 교회 순회 시 배 수윤 목사님께 읍내 친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할렐루야!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아멘!





2.  인생 길을 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사람 백 영희  


백 영희조사님


나의 인생에 가장 귀한 만남은 백 영희 조사님을 만난 것이다.  나의 40여 년 신앙생활과 20여 년의 목회생활은 백 영희 조사님을 만남으로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내가 조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4월 25-30일 첫 삼봉산 집회 때였다. 4.19 학생 혁명 다음 주간이었다. 나는 당시 조사님을 만나는 것이 유일 소망이었다. 매월 순회 오시는 서부교회 집사님들과 본 교회 전도사님과 주변 많은 사람들로부터 너무 너무 신령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회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교인들과 약 60리 길을 걸어가 참석하였다. 삼봉산 밑에 폐금광의 뼈대만 남고 허물어져 가는 건물에서 첫 집회가 열렸다. 가을(9월 12-17일) 집회는 더 깊은 골짝에서 큰 천막을 치고 열렸고 다음해부터 일정한 장소에서 천막 치고 집회를 하다가 1967년부터 주상기도원으로 옮긴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사님은 약 12명의 집사님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셨다. 조그마한 키에 삭발한 모습이었으나 얼굴과 눈은 너무도 빛나 보였다. 첫 시간부터 감동과 감격 속에 충만한 은혜를 받았다. 본 교회서의 설교와 순회 집사님들의 설교와 여러 차례의 다른 집회를 통해 받은 기초 위에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 고후13:5,딤후3:12-17, 히2:1-4, 벧후1:1-11 본문으로 중생 성화를 중심 한 근본 구원 도리를 자세히 증거 하셨다.

그 후 예배당 겸 숙소인 천막을 치고 집회를 계속할 때 많아지는 교인들로 너무 좁아 꼼짝도 못하였고 자주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밥을 지어먹고  비바람에 펄럭이는 천막 아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도 3-4시간씩 하는 설교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경청하며 필기했다. 그 때부터 받은 복음 진리가 내 신학과 신앙의 뼈와 살이 되어 성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63년 4.29∼5.3일간 삼봉산 집회는 산에서 열리지 않고 봉산예배당에서 열렸다. 창세기 4장 본문으로 노선에 대해 한 주간 설교하셨다. 5월2일 목요일, 집회 마지막 저녁 백 목사님의 요청으로 전도사님과 친구와 강사실에서 처음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다. 목회자가 되기 원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구동성으로 소원은 있지만 부족하여 되겠습니까 하였다.

성직의 사명감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마음을 버리지 말고 충분한 준비를 하라고 하시며 특히 성경과 영어 공부에 전념하며, 범사를 깊이 관찰하고 타에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권면 하셨다. 예수님은 30년 준비하여 3년 일하셨고 모세는 80년 준비하여 40년 일했으니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며,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없으니 어린 종들을 인도 양육 보호해 귀한 일꾼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로부터 16년 후, 79년 11월 9일 친구들보다 약 10년이나 늦게 전도사 인허를 받고 11월 20일 봉산, 원기교회에 부임했으니 기이한 섭리로 생각되었다.

78년 목사님의 요청과 선배 교역자들의 권면으로 양성원에 입학하여 6년 만에 졸업하고, 86년 3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부임한지 6년 반만에 86년 5월 봉산교회를 떠나 신풍교회 구전교회, 성림교회 거쳐 포양교회 현재에 이르렀다.

목사님은 89년 8월 27일 주일 새벽 설교를 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 분의 죽음을 측근은 순교, 보통은 순직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나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다가 죽으셨으니 순교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보다는 그 날의 살해가 정신이상자의 광란으로만 알기엔 너무 강한 의심과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80년 4월 병아리 전도사 시절 어느 수요 예배 시간 서부교회 강단에서 증거 한 나의 짧은 설교를 세계적인 설교라고 하시며 교만하지 말고 말씀대로의 사람만 되라고 분에 넘치는 격려를 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말씀이 예언으로 성취되기를 아직도 기대해 본다.

나는 목사님 앞에 무례한 언행도 더러 행하였다.  조폐공사의 악명이 그러하고, 세례라면 박 목사에게 물어보라는 말들만 봐도 그러하다.  그 이후 만날 때마다 한번도 그냥 지나지 않으시고 다시는 어리석지 말라는 말씀하시던 것을 기억하며 반드시 지혜자가 될 것을 믿고 기도하고 있다.

많은 선배와 동역자들로 부터 나는 100% 그대로 식이 아니라고 깨끗지 못한 사람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심판 날에 그들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고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최선을 다해 예수대로, 성령과 성경대로 믿고 행하고 전하고 산다면 목사님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너무도 위대한 설교자, 목회자, 신학자로,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추종을 불허하는 하나님의 종이시며 신사참배와 공산세력을 이기신 불굴의 신앙가이심을 아는 자들만이 알 것이다. 나는 제자의 수에도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다. 살아 계실 때에도 부끄러워 감히 나서지 못했고, 천국 가서도 멀리서나 뵈올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스럽겠다.

목사님의 유족들과 모든 선배 후배 동역자들과 가정과 교회들 위에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은총이 끝 날까지 함께 하기를 우유부단하고 신찬한 사람이지만 삼가 또 삼가 기원해 본다. 주님과 함께 오실 조사님 아니 목사님을 스무 살 나이에 처음 만나 이단, 사이비, 이상한 교회,  별난 소리까지 다 들으며 지금까지 살아 왔으나 나는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조그마나마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아직도 끝 날까지엔 어떤 미지의 길이 열려질지 고요히  고요히 눈을 감아 본다.  주여!

예수님 만나 좋은 신앙인이 되려면 좋은 신앙인 부터 만나야 한다는 말은 지당한 말이지만 좋은 신앙인, 목회자, 친구들을 만나고도 좋은 신앙인, 목회자가 못되는 것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아멘





3. 집회들의 역사,  모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모두를 목회자로 만든 힘  


집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교회 부흥 운동에 큰 역활을 한 것은 거룩한 집회(사경회, 부흥회)였다. 집회에서 받는 뜨거운 성령과 말씀의 은혜로 교회는 성장해 왔다. 개인의 신앙의 성장에도 집회는 큰 역활을 해 왔다. 집회 없는 신앙 성장은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나의 신앙 성장은 집회와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나의 지역 교회들의 집회 참가 열은 유별났다. 나의 모 교회는 더욱 그러했다. 집회만 있다면 우리 교인들은 반드시 참석했다.

많은 집회, 많은 말씀, 많은 은혜를 받았으나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해 너무나 부끄럽지만 그래도 집회는 기다렸고 즐거웠고 은혜롭고 행복했다. 나의 신앙 초기 첫사랑에 빠져 은혜 받던 집회를 생각해 보는 것도 아름답고 은혜로운 추억이다.  

(*기록으로 기억하는 참석했던 집회들)

1958.12.25-     창북       한 동희 조사
1959.11.16- 중앙(창동)   홍 근섭 목사     계시록10-13장, 아가서, 환란
1960. 2. 8-      개명      이 재순 조사     눅2:41-  행9:1-  수5:1-
1960. 4.25-    삼봉산     백 영희 조사     고후13:5, 벧후1:1-
1960. 9.12-    삼봉산     백 영희 조사     행1:5- ,2:1- 성령의 영감
1960.11.16-     개명      백 태영 조사     엡4:17-  고후13:5-  벧전3:
1960.12.26       창북     김 병도 조사     마2:1-  유1-25  마9:1-
1961. 2.20-      중앙     김 현봉 목사     창3:1- ,히12:1- ,마16:13-
1961. 3.13-      무월     이 병규 목사     마1-7,13,14장 강해
1961. 4.24-    삼봉산     백 영희 조사      (나의 불참)
1961. 9.       삼봉산
1961.11.13-     중앙      백 영희 목사     롬8:12-,딤후3:12-,골2:1-
1961.12.18-    양혜원     백 영익 조사     고후1:12-시102:1-,아가서
1962. 2.26-     무월      백 태영 조사     롬1:18- ,8:26- ,딤전6:15-
1962. 4.23-    삼봉산     백 영희 목사     마6:5,5:13, 창12:1-
1962. 9.       삼봉산
1962.12. 3-     중앙      백 영희 목사     창1:1-  창조,인론
1963. 1.28-     도평      백 영익 조사     마4:1- 천국, 성경해석법
1963. 4.29-    삼봉산     백 영희 목사     창4:1- 노선
1963. 5.13-    양혜원     이 인재 목사     딤후2:20- 벧전1:11- .2:1-
1963. 8.26-    삼봉산     백 영희 목사     벧전1: ,2:1-
1963.12:16-     웅양      이 인재 목사     벧전2:1-, 빌1-4장
1963.12.30-     개명      백 영익 조사     요3:1- ,고후1-4장
1964. 1.20-     무월      백 영희 목사     마13:1- 비유
1964. 2.17-     중앙      백 영희 목사     고전6:12-   요일 1-5장
1964. 4.27-    삼봉산     백 영익 조사?    롬5:16- 사35:3- 막5:1-  
1964. 7.27-     위산      백 태영 조사     롬7:14-, 마25:1- ,중생영
1964. 8.24-    삼봉산     백 영희 목사     계1-2장
1965. 2.8-      개명         ?           눅16:19- 요일3:9- 사49:6-
1965. 4.       삼봉산
1965. 8.23-    삼봉산    
1965.12.27      개명      김 효순 집사     출애굽기 강해


초기에 김 병도 조사님이 봉산교회서 인도하시다가 맹장 수술을 한 집회, 김 현봉 목사님이 위천 수승대에서 인도하신 집회, 강사는 삭발하고 검은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설교하시다가 파리채로 파리를 잡기도 하며, 웃옷을 전부 벗고 강대상 위에 앉아 건강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셨으며, 밤중에 찬송하다가 꾸중을 듣기도 했고, 머리 기른다고 꾸중을 듣고 집에 오자마자 삭발했으며, 가을 햇살에 붉은 능구렁이를 친구들과 잡기도 했던 수승대 집회, 백 목사님이 참석치 않고 등산복인지 군복인지 입고 강사로 나타나「감사합네다」를 잊지 않도록 증거 한 젊은 이진헌 목사님이 인도한 삼봉산 집회를 확인하지 못해 유감스럽다.

우스운 일화도 수없이 많다. 삼봉산 집회를 혼자 도시락 들고 걸어 가다가 경찰이 간첩인줄 알고 도시락까지 조사하던 일, 마지막 새벽 집회를 밤중에 마쳐 아무리 걸어와도 날이 새지 않아 친구와 주상 어느 도로 가 나무 밑에서 자고 온 일,

삼봉산 집회 강사의 기념 사진을 친구가 찍고 싶어 강사에게 요구했으나 강경하게 사절하시므로 구덩이를 파서 만든 강사 전용 화장실을 다녀오는 모습을 몰래 찍으려니 어쩔 수 없어 포즈를 취해 주시던 일, 그 조그마한 바랜 사진을 자랑하다가 그만 분실해서 아쉽다. 어느 누군가가 보관하고 있을런지.

무월에서는 제실을 우리 숙소로 정해 주어서 얼마나 떠들다가 쫓겨날 뻔도 했고 어떻게 집회 밥맛이 좋아 먹다 보니 간장 만 남기에 간장까지 다 마시고 깨끗이 청소하던 일, 개명교회 집회 가니 김 대수 권찰님 작은 방을 숙소로 정해 주어 얼마나 떠들다가 변소에 가니 변소 안에 돼지가 꿀꿀거리며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으니 겁이 나서 혼이 났던 일, 집회 때는 점심을 주지 않아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개명교회서 점심때마다 고구마를 삶아 주어 맛있게 먹던 일, 그 고구마보다 더 맛있는 것은 아직 먹어 보지 못했다. 그 고구마 먹으며 깊은 산중이지만 처음 맛보는 성도들의 사랑에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싫어하시는 집회, 가는 날 아침에 불쑥 집회 간다고 알리고는 쌀 2되 퍼담아 나선 집회이지만 집회는 은혜로웠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 은혜 속에서 자라온 것이다.

수많은 집회서 듣기만 하고, 오늘까지 집회에서 말씀을 증거해 보기는 두호동교회와 성림교회 두 번 뿐이니 지독히도 못난 종인가보다 생각하다가도 나야말로 아무데도 안나가고 교회 목회에 충실한 종이라고 오히려 자랑하기도 하니 역시 제 잘난 맛에 사는 우스운 인간인가 보다.

아무튼 집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다.  집회 다니다가 끝 날이 왔으면 좋겠다.  듣는 집회라도 말이다.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나 처음 다니던 집회 귀하고 귀하다.  





4. 거창집회의 한 부서에 서서. 넘치던 집회 말씀의 은혜, 함께 했던 생수들  


베들레헴 우물 물 - (집회의 식수공급을 담당하며)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삼하 23:15

나는 한 때 (거창 집회 장소의) 수도국장, 수도청장 시절이 있었다. 매년 8월 첫 주간에 열리는 주상기도원의 식수 담당 시절을 말한다. 전도사 인허 받고 봉산교회에 부임하여 처음으로 맞는 1980년부터 마지막 참석한 집회까지 식수 담당을 하면서 붙힌 자칭 별명이었다.

주님의 종과 수많은 선배, 동료, 성도들의 헌신과 헌금, 수고와 봉사로 자라온 기도원임을 누가 부인하랴. 거기에 묻힌 땀방울이 얼마일까! 봉산, 성림교회 약 12년의 목회생활이 본 업인지, 기도원 생활이 본업인지 모를 정도로 바쁜 생활을 했다. 거창을 거쳐 간 교역자들은 다 그렇게 산 것이다.

처음 기도원에 가니 다른 동역자들은 전문 기술을 따라 부서를 맡았지만 나는 아무런 전문 기술도 없어 할 일이 없었다. 논에 물 댈 줄만 아는 농사꾼 출신이 맡을 것 없어 식수부에 배치가 되었다.

식수 탱크를 청소하고 소독하고 그 많은 성도들이 사용할 물을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한 때는 공사가 늦어 냇물을 퍼 올려 한 탱크를 채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집회는 열리지 않아 모두가 서운해했지만 나로서는 천만 다행이었다.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참가자들에게 미비한 배관 시설로 고루 나눠 먹이기는 더욱 어려웠다. 동파 된 파이프를 교체하고 더 연결하기도 하였고 집회 기간에는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물 관리를 해야만 했다. 왕시재 넘어 중간반까지, 입구 끝까지, 산꼭데기까지, 못 밑 골짝까지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몇 백 명에서 시작되어 1-2만 명 모이는 대성회로 성장했으니 적은 물로, 임기응변식 시설로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분열로 인해 두 번 모이는 기간에도 양쪽 모두에게 모자라지 않도록 절약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기울였다.

예배 시간엔 피곤하여 졸기만 하였지만 언제나 칭찬은 고사하고 기술 부족, 시설 부족, 성의 부족이라고 위에서도, 식당에서도 비난만 하였다.
간혹 식당을 둘러 볼 때 어느 권사님, 사모님께서 물 주느라 고생 많다고 음료수를 주실 때만은 작은 행복감에 젖곤 했으며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역시 받는 것은 좋은가 보다.

그러나 나는 수도국장, 수도청장의 긍지를 갖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했다. 집회가 끝나고 약간의 식수가 남았을 때 안도의 숨을 쉬며 내년 8월을 생각하며 돌아가는 때가 좋았나 보다.  

나중에는 감당할 길 없어 예배당 상하에 100 미터가 넘도록 바위를 뚫고 지하수를 개발하여 계속 넘쳐흐르게 되었다. 이름 그대로 무공해 생수였다. 입구에 흐르는 약수보다 좋은 생수였다.

여러 개의 식수 탱크를 채워 놓고도 집회 기간 계속 양수하여 감당해 갔다. 지내 놓고 보니, 한다고 해도 벌로 한 것 같은데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배탈도 나지 않게 그 더위를 이기며 은혜 받은 것은 전적 주님의 긍휼과 은총이며 성도들의 기도의 덕으로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다.

한 세대는 가고, 모세도 가고 여호수아도 가고 종도 가고,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사는 사사 시대인가,
8월이 오면 이 골짝 저 꼴짝에서 자칭 ‘남은 그루터기’들의 설교와 기도 소리가 우렁찬 매미 소리와 함께 어울려 거창한 사과의 고을을 진짜 거창하게 만들곤 한다.
사무엘의 미스바 은혜의 계절 8월은 언제 오려나!

장생골(長生谷)의 약수보다 더 좋은 생수는 지금도 흘러 넘치고 있겠지. 그 물을 마시지 못한 것이 벌써 5,6년. 그 생수를 마음껏 마시며 영생수의 말씀을 충만히 받는 이름 그대로의 장생골의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 꿈으로 끝나기엔 너무 아깝고 아쉽도다.

그때가 와도 나 이젠 수도청장에서 은퇴해야겠지. 정년 은퇴는 없지만.
종은 가고, 가을이 오면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그리고 한 세대는 오겠지!

다윗의 소원대로 적진에 들어가 우물물을 퍼온 무명의 용감한 세 용사의 충성심과 세 용사의 목숨 바쳐 퍼온 물이라며 그 물을 마시지 않는 다윗의 자비심은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군신, 장졸, 사제, 노사, 목양의 의리가 아니겠는가.

새 하늘 새 땅의 생명강수는 우리 영원히 함께 마시며  생명과실은 우리 영원히 교파 없는 낙원에서 함께 따먹자꾸나




5. 여러 곳으로 떠나며 여러 모습으로 신앙 생활하던 신앙의 사람들  


멀리 있는 님들이여!


찬송가 몇 장하면 누구누구, 누구하면 찬송가 몇 장이 생각난다.
찬송을 부르면 주님만 생각하면서 불러야 하건만 그 찬송을 은혜롭게 부르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믿음이 적어서 그럴까?  다 말할 수 없지만 자주 생각나는 오래된 몇 사람을 이야기해 본다.

처음 은혜 받기 시작한 후 서부교회 집사님들이 거창의 소속 각 교회를 달마다 순회하며 1일 집회를 할 때, 어느 교회인지 잘 기억되지 않지만 유명한 성악가이신 장 정애집사님이 밤새도록 가르쳐 주신『세상 모두 사랑 없어  373장』가 먼저 생각난다. 약 40년 전의 이야기이니 그분은 살아 계실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502장』는 군 입대를 앞두고 무월교회 집회를 가면서 높은 아홉산 추우령 재를 넘어 가다가 무월교회가 바라보이는 산기슭에서 석양 햇빛을 받으며 군 생활에서 신앙 승리를 기원하면서 부르던 모교회의 청년 친구들을 생각하게 된다. 청년에겐 당시 군 생활은 무서운 신앙의 시험대였기 때문이다.

『물 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208장』을 부르면 구원의 기쁨을 파도치듯이 감동 감격 속에 불러야 한다며 은혜롭게 부르던 친구, 지금도 그 남쪽 바닷가에서 목회하며 여전히 그렇게 기쁘게 부르고 있겠지.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440장』을 부르면 고향의 두 세 살 위 선배며 신앙 동지인 오 장로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같이 신앙 생활을 시작했으나 부모님과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로 신앙을 양보했다가 군대 가서 오히려 신앙을 회복하고 모든 박해, 유혹 다 이기고 승리하여 제대한 후 모 교회에서 특송으로 부른 찬송이『멀리 멀리 갔더니』였다. 찬송으로 간증을 한 셈이다.

제대 후에도 가정이 어렵고 반대도 심해 맨몸으로 고향을 떠났다. 그때의 처량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산 서부교회에 갔다가 김해로 가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천신만고 끝에 주님의 축복으로 성공하여 양계 대 사장이 되고 충성된 장로가 되었다. 간혹 전화하면 교회 일하러 가고 없다는 것뿐이었다

룻과 같이 믿음 좋고 선량한 부인과 결혼하여 여러 남매를 두고 다복하게 살다가 96년11월 모교회 기도 동지회가 모인 밤, 저녁에 58세의 오 장로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멀리 멀리 갔다.

우리와 가족과는 멀리 멀리 갔으나 주님과는 더욱 가까이서 더 좋은 곡조로 새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아마도 그 부인 집사님도 기도의 제물과 충성된 일꾼이 되고 자녀들도 다 장성하여 성남 성녀들이 되었을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 장로는 고향 땅 냇물 건너 과수원 가운데서 그 날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다. 고향에 가면 간혹 그 냇둑을 차로 지나가며 멀리서 바라보곤 한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고”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갔는가. 약 100호 되는 고향 마을 집집마다 생각으로 둘러보면 옛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가버린 것이다. 모두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도 주안에서 죽은 사람은 진실로 복 되도다. 할렐루야!

나와 함께 세례 받은 친구는 20대 초반에 유복자를 두고 부름 받아 갔으며 혹은 20대 후반에 역시 유복녀를 두고 갔으며 달빛 밝은 처량한 밤에 그의 고향 앞산에 안장 될 때 가슴이 터질듯 아팠으며. 혹은 33세 예수님 나이에 낙원으로 가고 앞산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기도 하다.

집을 교회로 사용한 여 집사님은 부산에서 거리 많지 않는 나이에 부르심을 받고 서부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소천되기 얼마전 문병간 기억이 난다.

모 교회 첫 집회 때 예배드린 집의 여 집사님은 고향집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봉산교회 시절 마침 그 날 문병갔다가 가실 시간이 임박한 것 같아 예배를 드렸고 그 집사님은 마지막으로 교역자와의 말도 많던 문제들도 다 풀고 거리낌 없이 간다며 쇠고기 국밥으로 장례식에 오는 조문객들을 잘 대접하라는 부탁을 했으며 그 날 밤 떠나 가셨다.

이 두 여 집사님들은 나의 신앙 초기에 많은 도움을 주신 신앙의 어머니와 같았다. 오늘밤에 우리도 갈지, 주님이 오실지 아무도 모른다. 모두가 앞서 가 기다리고 계실테지, 아니면 주님 오실 때 같이 오실 것이다. 쓸만 한 것들은 다 일찍 가고 써도 못할 것만 남는구나 하시던 주님의 종의 탄식이 또 다시 들리는 듯하다.

60년 생존이 기적이고 40년 신앙생활은 더 큰 기적이고  20년 목회생활은 더욱 크고 놀라운 기적이요 은혜일 뿐이다. 앞서 가신 사랑하는 이들의 몫까지 다 해야 하건만 악하고 게으른 종, 쓸모 없는 인간 살기조차 부끄럽기만 하다.

요새도 간혹 88 고속도로로 살피재 넘어 고향을 갈 때면 나도 며칠 후에는 영구차에 실려 이 재를 말없이 넘어 저들처럼 잠들 것을 생각하곤 한다. 아니, 아니 하루에도 몇 번 지금이라도 고향에 가고 싶은 것은 늙어 가는 나약한 마음 때문일까, 지치고 쓰린 아픈 마음 때문일까, 도망가 죽고 싶은 요나의 못된 마음일까, 하늘 고향을 그리는 성자의 마음일까?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사람들이여, 그 날에 우리 함께 세상 고생 꿈에 본 듯 잊어버리고 사랑하는 주님 모시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영원토록 할렐루야 새 노래를 부르며 영생 복락을 누리자꾸나!

멀리 멀리 대신에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 함께를 부르며 ,  며칠 후에 -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거기서, 거기서!            




6. 총공회 어느 목회자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상념들  


‘환자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강한 자극을 빠르게 주어 치료하는 방법. 신경과에서의 전격(電擊) 요법 따위. shock therapy’라고 국어사전은 충격요법을 설명하고 있다. 쉬운 말로 깊이 잠든 자, 실신한 자를 깨우고 정신 차리도록 자극하는 것도 아니겠는가.

교회생활에도 충격요법이 있다. 교역자가 교인에게, 교인이 교역자에게 하는 충격요법이 있다. 나는 교인생활 약 20년, 교역자생활 약 20년, 반 반 나누어 한 셈이다. 그래서 양쪽으로 받은 경험들이 많다.

어떤 분이 충격적인 말을 한 것을 읽어보았다. 아무리 오래 목회하며 많은 깊이 있고 은혜롭다는 설교를 해도 마지막에 교인들의 머리 속에는 설교 말씀 하나 남지 않고 오직 그 교역자 어떤 사람이다 하는 인격과 인상만 남는다는 것이었다. 참말인 것 같다.

지난주일 설교 말씀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거의 기억 못한다. 그래도 할 말은 있다.  다 기억하고 있으면 목사가 무슨 필요있느냐?  잊어 먹어야 또 설교할 것이 있지 않느냐 반문하며 콩나물에 물줄 때 다 흘러 버리는 것 같아도 콩나물은 자란다고 하니 모두 도수나 단수가 나보다 높은 것 같다,
그래서 오래 기억나게 하는 것이 충격요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역자의 충격요법 중 하나는 반복 설교와 권면과 기도이다. 어느 교회의 아주 늙은 교인이 전임 교역자에 대해서 늘 한가지 설교만 하고 가셨다고 하길래 무슨 설교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사죄 칭의 화친 새생명 설교만 했다고 강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늙은 머리 속에 저렇게도 분명하게 남아 있도록 세뇌 교육을 시켰으니 얼마나 설교하고 기도했겠나, 참 목회를 잘하신 분이구나 생각해 보았다. 떠나올 때 나에게는 무슨 설교를 들었다 할까 궁금했다.

아주 오래 전에 어느 교역자는 새벽 설교 시작할 때마다 ‘모든 일마다, 소리마다 뜻이 있다’ 로 시작하신 것을 기억한다. 만사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어느 교역자는 대표 기도할 때마다  ‘모든 것이 부족하여’ 라고 시작한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나도 부족한 종이란 말을 잘 쓴다. 반복하는 주입식 교육법이라 지루하지만 오래 남아 있는 것은 그런 것뿐이니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는 자존심을 심하게 자극하는 책망이나 권면이다 .옛 사람이 발동해서 폭발할 정도의 독설에 가까운 발언이다. 시어머니께 불효한다고 보였는지 젊은 며느리보고 이 세상에서부터 저 세상까지 등에다 불효한 며느리라고 써 붙이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기억난다. 주홍글씨 소설처럼 말이다.

또 맥추 감사절이 가까워 오니 생각나는 것은 감사주일에 십일조나 감사헌금이 적게 나오니 어느 교역자가 우리 교회 집사들은 전부 도적놈뿐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는 도적놈이 되니 옛 사람이 부글거렸어도 참말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 목사님의 책에 떼어먹을 것이 따로 있지 십일조를 떼어 먹냐. 깍을 것이 따로 있지 교역자 사례를 깍느냐 하는 글도 생각나니 그것도 충격요법인 모양이다.

충격요법을 사전에 생명에 위험이 없는 범위 안에서란 단서가 붙어 있다. 지나치면 죽는다. 어느 교회서 우리나라 초대 교인 가문의 老장로님을 이웃 교회로 보낸 적이 있었다. 젊은 교역자인 나의 말 한마디에 가신 것이다. 그것은 충격요법이 아니라 살인요법인 셈이다.

그러나 그 장로님은 원래 그 교회가 내 모 교회이므로 가야할 때가 되어 간다. 또 그 교회가 나오도록 밤낮 기도하는데 그 기도의 응답인 것 같다며 조용히 가신 점잖은 어른이다. 지금도 살아 계신지, 잠시 후에 천국에서 만나게 되겠지.


교인들의 교역자에 대한 충격요법도 있다.
첫째가  ‘나 다른 교회로 간다’  는 말이다. 어느 교회를 가도 바로 옆에 큰 교회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어느 교회, 어느 직분자, 교인도 자주 쉽게 사용하는 충격요법이다. 20년 동안 너무 많이 들어서 면역 항체가 생길 정도이니 이제는 충격요법이 되지 않는 셈이다.

둘째는  ‘좋지 않을 겁니다’  이다. 이것은 아주 점잖은 말이지만 여운이 남는 강한 충격요법이다. 먼저 것은 자신이 간다는 말이지만 이것은 교역자를 공모하여 추방하겠다는 위협적인 발언이기 때문이다. 교역자는 세 가지 준비 곧 설교할 준비, 이사갈 준비, 죽을 준비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이 있긴 하지만 심히 불쾌한 충격요법이다. 나의 설교와 언행이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오겠나 생각하고 이해해도 그러니 역시 인간은 약하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간사한 것인가 싶다.

자신이 가거나 교역자를 보내거나 둘 다  교역자로서는 버림받는 것이니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너무 큰 비극, 불행이니까.  버리는 자들이 미운 것보다 버림   받는 자신이 못나고 밉고 싫은 것이다.

또 하나는  ‘배가 고파 죽겠다’  는 말이다. 같이 예배드리고 나오는 어느 집사가 조느라 눈이 벌겋게 되어 있으면서도 ‘아이고 배가 고파 죽겠네’  하길래 점심때가 되어서 시장해서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라 은혜를 못 받아 배고파 죽겠다고 설명을 하였다. 실컨 졸고 무슨 은혜냐 무심히 듣고 넘겼지만 교역자가 된 이후에는 무서운 충격요법의 발언으로 곁에서 너무나 크게 들려온다.

또 한 교회서는 연초 사례를 조금 올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말했더니 당장 하는 말이 사례 많이 주는 데로 가면 될 것 아니냐 하길래 기가 막혀 넘어질 뻔도 하였다. 중이 제 머리 못 깍는다고 예산시엔 전도사 시절처럼 다른 당회장이 그리웠다.

그러다가 목사 안될 사람이 목사가 되었고 안 올 목사가 왔다고 까지 나오면 극에 달한 것이다.  나도 그래 생각하고 너도 그래 보이지만 하나님은 달리 보신 모양이다 하며 개가 아무리 짖어도 열차는 달려야 하지 않는가.

또 말없는 충격요법도 있다. 말없는 충격요법이 너무도 내 속에 깊게 심어 준 것은 교역자는 반드시 개척교회를 세워야 하고, 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어도 자식이라도 그렇게 길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세상 만사 마음대로 되는 쉬운 게 아닌가 보다.

늙어가며 기억도 사라져 가는 것인데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는 것은 무슨 요법이든지 고마운 일이다. 다만 나의 사랑 없는 강퍅한 말들이 내 교인 생활 20년 동안 목회하신 교역자님들의 기억 속에 충격요법으로 살아 있다면 진짜 큰 일이다. 삼가 용서를 빌 뿐이다.

또 20년 동안에 교역자로서 사랑 없고 무책임한 말들이 이 교회, 저 교회 교인들의 기억 속에 말씀 대신 남아 있다면 이것도 진짜 큰 일이다. 역시 용서를 빌 뿐이다. 가슴을 찌르듯이 내뱉은 충격요법이 어찌 용서하라는 말 한 마디로 해결될까마는 그래도 빌어 본다.

안산 이 재순목사님이 소천되시기 얼마 전 동역자들과 함께 문병간 적이 있다. 목사님은 나의 모 교회 창북교회가 설립되어 첫 교역자 신 숙자 전도사님이 부임하시기 전 교역자 없는 동안 개명교회에서 격주로 우리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고 지도를 하신 분이시니 어찌 보면 첫 목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나는 동안 더러 충격요법의 말들을 한 것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목사님 뵈올 면목이 없었으나 용기를 내어 찾아뵈었다.
집에서 나서면서부터 뵈올 때까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건가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무례하였음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였다.

그대로 말씀 드렸더니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무례한 것이 더 많지 뭐 -”  하시고 웃으시던 것이 넓은 아량과 용서인 줄 알고 너무도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온 기억이 난다. 책망하실 때는 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으나 지난 후에 뒷말이 없는 깨끗한 어른이라 좋았었다.

천국에서 더욱 웃으시는 얼굴로 뵈옵기를 바라며 유족들과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기를 감히 빌어 본다.   이렇게 사죄해야 할 선배, 동역자, 교인은 더 있는 줄 잘 알고 있다. 좋은 기회가 올 것을 믿는다.

교역자도, 교인도 충격요법이 필요하긴 해도, 보다는 일반적, 보편적, 상식적인 방법에 성령이 함께 하셔서 원리대로, 순리대로 만사 형통한 것이 더욱 은혜로운 방법이 아닐가 싶다.  

교인 시절에 교인 노릇 바로 못하고, 교역자 시절에 교역자 노릇 바로 못하는 것이 주님 앞에 황송하고  모든 교인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부끄러움 없는 세상이 그립고 그립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인데 !

나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고 행복해야 그 날에 서로 영광, 자랑, 기쁨, 면류관이 될텐데.    할렐루야!                      





7. 백 목사님의 설교를 옮기는 목회자들의 방법론들 - '짜깁기설교는?'  


설교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야 한다 - (백 목사님께 받은 말씀, 어떻게 전하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듯이, 오늘도 말씀은 교회와 성례, 그리고 설교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성육신 되어서 우리 가운데서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신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던 것같이 오늘은 기록된 계시인 성경과 이를 증거 하는 설교를 통해 역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설교는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메세지이다.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며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개신교의 특징이다. 기록된 말씀이 성경이며 해설 적용되는 말씀이 설교라 할 수 있다.

설교가 말씀이 되기 위하여는 그 내용과 중심이 선지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말씀이어야 하고 설교자나 듣는 자가 다 겸손하고 순수하고 진실하게 전하고 들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의 인격과 언행과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듣는 자에게 친히 역사 하는 신비로운 말씀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목회는 말씀이다. 오늘의 말씀은 설교이다. 설교는 오늘의 말씀의 소통이며 이 시대를 향한 말씀이다. 설교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깊이 읽고 상고하여 그 본 뜻을 찾고, 그리고 오늘의 언어로써 현대인에게 듣고 깨닫고 받고 지키고 인내로 열매 맺도록 효과적으로 전하는 말씀과 현대인의 중보자이다

2000년 전 주신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향한 말씀이 되게 거룩한 수고를 지불하며 충성하는 것이 설교자이다.
말씀의 순수성을 보수하며 새 시대, 새 문화에 대치하면서 가장 성실히 봉사하는 자로 배고픈 양을 먹이고 목마른 양을 마시우며 병든 양을 치료하며 인도하며 섬기며, 양들로 즐겨 먹고 온전히 소화하여 필요한 영양소를 충분히 얻어 충실하게 성장하도록 봉사하는 영양사, 요리사로 섬기는 것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설교가 얼마나 성경적이냐 하는데 있고 얼마나 성령의 감동이 함께 하는 설교냐에 있다.
또 설교는 계속적인 자기 고백이다. 듣고 깨닫고 믿고 알고 경험한 진리 말씀 그대로 먼저 살고 교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들을 때마다 필요한 대로 새롭게 은혜 되게 성령이 역사 하신다. 예배, 말씀에는 반드시 은혜가 있다.

이렇게 성경 말씀에 충실한 설교와 성령의 감동이 충만해야 참된 교회가 된다.
설교자는 언제나 성경에 충실하고 성경 말씀을 섬기는 자세로 임할 것이며, 설교 듣는 교인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설교를 오늘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나의 기도의 응답으로 받는 신앙적 자세가 있어야 한다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만남의 현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사건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인격으로 나타나 말씀하신 가장 귀중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오늘은 말씀이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성경을 읽는 자, 전하는 자, 듣는 자 안에서 성령이 역사 하여 말씀으로 말씀되게 하신다. 말씀 자체에 생명력이 있고 재창조의 능력이 있어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고 영육이 강건해지고 복을 받는 기적이 일어난다.(히4:12, 살전2:13)


나는 성경 설교 말씀에 대해 위와 같은 사상과 목회철학으로 설교하는 한 설교자를 만났다. 그는 옛날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처럼 유력한 신학자요 설교자요 목회자며 철학자이다. 나는 그 분을 K K 목사라고 부른다.  

그 분은 여행 안한 곳이 없고 읽지 않은 책이 없고 모르는 음악, 미술, 체육이 없다. 그래서 만물박사 같고 도통한 사람 같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나에게 40여권의 책으로 마음과 눈을 넓혀 준 고마운 분이다. 우리는 다 가보고 다 읽어보고 경험해 보고 알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없는 짧은 인생이다.

남이 가보고 읽어보고 경험해서 성경적 시각으로 전하고 기록한 것을 읽고 듣고 어느 정도라도 안다는 것은 삶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 분을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한다.
언젠가 실제로 만나 감사할 기회가 왔으면 좋으련만 좁은 땅에서도 그리 쉽지는 않다. 위에 설명한 설교론은 거의 그 분의 글에서 인용 짜집기한 것이다.


우리는「짜집기」한 설교라는 말을 많이 듣고 또 하고 있다. 설교자가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한다면 참 순수한 설교일 것이다.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탈선의 위험은 너무나 많으며, 이런 설교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은 이런 설교자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듣고 전하는 객관적 복음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복음이 주관적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읽고 듣고 전하지만 남의 설교가 아닌 내 설교라야 하고 분명 내 설교이지만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함으로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정통 보수 개혁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의 주석, 강해서, 설교집, 예화집 등을 읽는 것은 유익하다.
문제는 내 말씀으로 소화시키지 않고  표절 짜깁기하여 설교를 하기도 하고, 또 전부 도적질하여 베끼고 복사하여 모방 흉내내며 팔아먹는 설교를 하는데 있다. 짜집기 설교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대게 여기에 속하는 자들이다. 큰 도적이 작은 도적을 나무라고 고발하는 격이다.  

그리고 설교는 강연이나 강의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므로 설교자가 성경만 읽고 기도만 하든, 참고서적들을 읽든, 선지 사도들이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실행함으로 먹고 소화하여 양분을 취하여 건강하게 살고 그 양분을 젖으로 자녀들, 양들에게 먹여 주는 것이 바른 설교이며 목회이다.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만 젖으로 나와 양들이 먹고 양들도 말씀대로의 사람이 되고 예수 닮은 인격과 언행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며 설교인 것이다. 곧 목양과 양육이 목회며 설교이다


책 읽는 시대도 서서히 지나가고 인터넷 시대이다. 쏟아져 나오는 정보, 지식, 말씀, 설교, 자료들을  download, upload 잘하고 또 복사하기, 본떠두기,  붙이기, 붙여넣기  또 저장하기, 불러오기 잘해야 하는 바쁜 시대이다.

성경도, 기도도 사라져 가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녹음기 우상이라고 부르짖던 주님의 종의 책망이 컴퓨터 인터넷 우상이라는 책망으로 크게 들리는 듯 하다.

아무튼 짜집기, 모방이 판을 치는 삯꾼, 절도, 강도 이리의 시대라면 병든 시대이다. 아무리 외식, 잡식, 혼식을 해도 말씀을 가려먹고, 아무리 기도로, 짜집기로, 모방으로 설교를 한다 해도 말씀대로 성장한 자기 인격과 언행과 설교에서 나오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 말씀이라야 한다. 이론은 쉬지만 실제는 어려운 것이다.

나는 설교론을 가르치고 책을 쓰는 설교학자들의 설교를 듣고 싶어한다. 이론대로 설교를 하는가 싶어서다. 체육 해설가들이나 감독 코치가 선수보다 실제로는 못하면서 고함만 질러대는 격이기 쉽다.

매일해도 어려운 것이 설교며 목회인 것 같다. 운전과 목회, 설교는 완전해야만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고가 나고 병이 들고 탈이 나기 때문이다.  


부요 속의 가난이란 말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서 목말라 죽어 가는 것은 아닐까?  말씀을 너무 먹어 소화불량으로 교만하여 입맛 밥맛 다 잃고 병들어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입맛 밥맛이 꿀맛 같은 사람이 제일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설교를 듣는 데는 네 가지가 있다. 예배시간 직접 참여하여 보고 듣는 것과 비디오 방송 등 동영상으로 듣는 것, 카세트 오디오로 듣는 것, 읽어서 듣는 것이다. 읽어서 듣는 것이 제일 은혜 받기 어렵고 예배시간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제일 은혜 받기 유리하다.

그래서인지 주보에서도 제일 인기 없어 읽지 않는 것은 지난주 말씀요약들이고 인터넷 홈 페이지에서도 제일 인기 없는 것은 목사 설교, 칼럼인 것 같다. 설교가 싫은 것은 목사도 싫은 것이며 하나님도, 구원도 싫은 것이다.

성경은 목사 장로 등 교회 직분자들을 영광의 직분(롬11:13, 고후3:7-11,18, 8:23, 벧전5:1,4)이라고 말하지만 오늘은 가장 무시당하는 직분으로 추락하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무시, 멸시, 업신여김을 받는 자들의 허물이 더욱 크겠지만.

호화찬란한 짜집기의 명수, 모방 흉내내는 앵무새, 배우,  도적질하여 말씀 팔아먹는 삯꾼, 거짓선지자보다는 순수한 젖으로 양을 먹이는 선한 목자가 이제라도 될 수는 없을까?  

오늘까지 실패한 신앙, 실패한 목회, 실패한 설교, 이제라도 바로 믿고, 바로 살고, 바로 전하고, 바로 먹일 수는 없을까?  오늘의 실패를 성공으로, 징계를 축복으로, 그 날의 수치를 영광으로 이제라도 바꿀 수는 없을까?(요엘2:12-14)   오!  주여,

이제라도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셔서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서로 돌아와 만나는 자리가 교회요 말씀이요 설교이다.
영광의 말씀, 설교, 직분, 교회를 사랑하던 첫 사랑이 그리운 것은 첫 사랑을 잃은 때문이리라.      




8. 백 영희의 목회자 양성원 - 세계 제일의 신학교 수학기  


세계 제일의 신학교 (목회자 양성원 a)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더러 있다. 하나는 교단 교회의 학생 청년 교인들이 본 교회를 떠날 때는 거의 다른 교단 교회로 가버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목회자 지망생들이 양성원 보다 다른 신학대학원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의 자녀들도 거의 그러하므로 이것이 이가봇의 현상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목회자 양성원 출신 목회자들이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여러 면으로 어디에서나 교단 교회에서까지 심한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 개혁과 변화가 필요함은 다 느끼는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목회자양성원 출신 목회자인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평신도 목회자들이 복음의 선교와 교회의 성장 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과거에 평신도 출신, 별과 신학생들이 본과 정규 출신 목회자들보다 성공적 목회를 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어 알고 있다.
초기 목회자양성원은 거의 평신도 출신 목회자를 단기 집중 교육시켜 하나님의 일꾼으로 양육 배출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1978년 3월 양성원에 입학하여 일년간 집에서 성경 공부를 하여 성경 과제물을 제출하고 2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매년 3학기 양성원서 집중 교육을 받았다. 그러고도 과제물을 다 제출하여 학점을 따야 졸업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3기생으로 입학하여 84년 3월 5일 4기생으로 졸업을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성경을 100독을 해야만 졸업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입학할 때 거의 오랜 신앙생활을 한 학생들이므로 성경 20독을 한 것으로 인정받았었고 과제물로 40-50독하고, 나머지는 정독과 다독으로 반 반 나누어 읽으면 되었다. 그러므로 조금만 노력해도 할 수가 있었다. 요새는 하루(?)에 성경 1독 한다는 속독법도 개발된 것 같다.

성경100독 졸업은 비양심적인 목회자만 양산한다고 비판도 있으나 얼마든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 역시 큰소리칠 만큼 양심적이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百讀이 아니면 百見도 유익하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보통 성경 읽는다고도 하고 본다고도 하는 것이다. 어디든지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비양심적인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신학교는 신학자들의 학설을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공부하는 학교이라는 취지 하에 성경 100독을 하게 되었고 신학교란 이름 대신 목회자 양성원이라고 한 것으로 안다. 의미 있는 일이지만 보편적인 이름과 다르므로 이질적으로 보이기 쉽다. 교단 명칭도 그러하다.

우리 양성원 교수들은 실력 있는 훌륭한 분들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초대교회사에서부터 한국교회사까지의 모든 교회사, 성경해석학,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 고전어, 교회 정치, 인문과학, 자연과학, 영어까지 열심히 하였다.

제일 중요한 조직신학은 벌코프의 교리사와 박 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을 읽고 배웠으며 그보다도 백 영희 목사님의 모든 설교는 위대하고 심오한 조직신학, 교리와 신조였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얼마나 들었는지 말씀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구속 교리가 앵무새처럼 입에서 술술 나올 지경이다. 이만하면 참으로 훌륭한 학교를 나온 것이다.  

예수님의 12제자가 3년 간 함께 먹고 자고 살며 주님을 배우고 진리 말씀과 기도와 전도를 배워 12사도가 된 것처럼 목사님과 함께 살며 설교 듣고 지도 받는 교육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산 교육이었다.

나는 외우는 과목은 잘했다. 고전어는 모범적이라고 박수까지 받았다. 그러나 자연과학 특히 내 몸덩어리인 인체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시험 문제도 주관적인 시험 문제 하나 뿐이다. 한 번은 쓸 말이 없어 큰 글자로 몇 줄 적어 냈더니 낙제점이 되어 다음 학기에 재시하여 겨우 낙제점을 면했다. 그것도 교수님이 봐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교회 정치 시험에는 우리 교단 정치에 대한 주관적인 답을 써 라는 문제도 있어 간 크게 교황 정치와 비슷하다고 썼다가 겨우 낙제점을 넘기기도 하였다. 학생시절 수, 우(秀, 優)밖에 모르는 우등생이 재시까지 해야 했으니 얼마나 어려운 학교를 졸업한 셈이다.


나는 평신도 시절, 양성원 시절, 목회자 시절에도 백 목사님을 가장 멀리서 보고 따르는 말단의 제자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모르는 면이 많다. 인간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양이 목자를 잘 모르고, 백성이 지도자를 잘 모르고 감사보다 원망하며 따르는 격이랄까?  

교역자들이 서부교회나 양성원에 가면 제일 두려운 것이 설교나 대표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늦게 들어오기도 하고 키 큰 사람 뒤에 앉기도 한다. 80년 4월 9일 수요 저녁예배를 인도하라는 지시를 교학실장을 통해 받았다.
고민하다가 밖에서 들어오시는 목사님께 직접 이번에는 필기 노트도 하나도 가지고 온 것 없어 다음에 하겠다고 사정했으나  “어, 그 참 잘 됐어. 참 실력이 들어 나는 좋은 기회다” 라며 들어가시고, 오후 공부 시간에 일부러 찾아오셔서 나를 불러내 오늘 저녁 설교를 깨달은 대로, 힘있는 대로, 강하게 맘 껏 하라고 부탁하고 가셨다.

그러나 준비도 할 수 없어 며칠 전 목사님이 하신 설교를 요약해서 조용, 조용히 약 15분 정도 설교하고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아 찬송을 두 장이나 부르고 내려 왔다.
목사님 부탁과는 정반대로 두려운 심정으로 서툴게 했는데도 세계적인 설교였다고 칭찬을 하시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동역자들이 그 설교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모를 일이다.

한번은 제일 키 큰 사람 뒤에 엎드려 숨어 예배드리는데 대표기도를 시켜서 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그 다음 주간에는 지난 간 기도했으니 걱정 없다고 고개 들고 있는데 느닷없이 연속으로 기도를 시켰으니 그것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설교, 기도 후에 평가, 책망이 무서워 두려워하는데 나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 마디도 없는 것, 그것도 모를 일이다.

어느 오후 목사님께서 한 조사와 나를 5층에서 부르신다기에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한 번도 못 가본 5층 목사관을 방문한다는 기대감으로 올라갔으나 서운하게 문밖에 나와 계시며 양  팔에 신문지로 싼 꾸러미를 들고 계셨다. 이것 내가 입던 속옷인데 누구에게 주나 생각하다 두 조사에게 주는 것이 덕이 되겠다 싶어 준다며 내미셨다. 감사와 놀라움으로 어리둥절하게 받아보니 거기엔 내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다른 조사들은 엘리야의 겉옷을 엘리사가 받은 것처럼 목사님의 후계자가 될 전조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속옷보다는 겉옷 달라고 구하라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다.
요새도 웃기는 사람들은 그 옷 잘 보관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목사님은 옷을 보관하라고 주신 것 아니고 입으라고 주신 것임으로 다 달아 떨어지도록 입었노라고 하면 그걸 입어 없앴느냐 하며 웃곤 한다.
그 후에도 5층은 한 번도 못 들어가 보고 천국 가신 후 문상 가서 까만 양복 입고 5층에 누워 계시는 화평한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점심 식사 끝나자 마자 몇 학생들과 함께 동대신동 시장 구석에 있는 탁구장으로 달려가 탁구 치고 시간 되어 돌아오곤 하다가 목사님께 보고가 되었다. 호통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양성원 뜰엔 목사님이 사 보낸, 새 탁구대가 놓여 있어 모두 놀라며 기뻐했다. 참 알다가도 모를 놀라운 이변인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좁은 신본주의자, 어찌 보면 넓고 넓은 인본주의자 같아 뭐가 뭔지 모른다. 사자 같이 무섭기도 하고 비둘기 같이 유순하기도 하시다.

신풍교회로 이동되어 갔을 때 여러 선배를 두고 나를 호남지방 공회장으로 임명하시면서 내가 속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셨으니 속을 줄 알면서도 나를 임명하셨는지 참 나는 모르겠다.

따져야 한다고 구별을 설교하므로 목회 잘하겠다고 당장 조사로 파송 할 정도며, 시장보고 온 단돈 몇 푼도 따지고 까다롭고 좁은 분이 거창 집회 후 기도원 회계 보고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도 목사가 돈 떼어먹겠느냐며 넘어가시니 참 모를 일이다.

교단의 돈을 빌려 개척하다가 갚지 않고 다른 교단으로 가도 거기나 여기나 다 복음 운동하는 것이니 가만 두라 하시며 넘어가시니 놀라고 모를 일이다. 모르고도 믿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신령한 종들인 모양이다. 성인이 되어야 성인을 알고, 성화가 되는 만큼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리라!    

아무튼 나의 양성원 생활은 구도자의 행복, 만학도의 행복 그것이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인가. 나의 양성원 생활은 자랑스럽다. 조금도 부족하지도 부끄럽지도 않다. 어느 긍정적인 교수는 항상 세계 제일의 신학교라고 말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말하는지요?  

그러나 알아주는 자 없으니 깊이 생각 좀 해야만 하리라. 종이 계시던 양성원과 떠나가고 계시지 않는 양성원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깊게 넓게 생각해야 하리라.
주님은 가셨어도 주님의 성령이 함께 하시지만, 종이 가신 교단 교회, 양성원은 …….

어떻든 천심도 인심도 돌아오게 해야만 한다.


                                        내니이까?     Is it I ?       (양성원  b)

선배 양성원생들은 참으로 열심히 공부를 한 줄 알고 있다. 코피가 나고 쓰러지기까지 하여 목사님으로부터 보신용 특식이 나오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주간의 과제를 다 마치지 못하면 집에 가지도 못하니 주일에 설교하러도 못 오는 조사 망신이 얼마일까?

그러나 우리는 벌써 그 열심이 식었다. 장난도 심하고 떠들기도 너무 했다. 목사님이 사 주신 탁구대라고 마음놓고 탁구 치며 떠들며 쉴 시간을 보냈다. 교회와 양성원의 예배 설교 회의 등 모든 발언이 5층에서 다 들을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심조심 떠들어도 다 들리는 모양이었다.

한 번은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떠들고 공부 열심히 하지 않는 자질이 나쁜 학생 하나를 퇴학을 시키라고 교학실장에게 책망조로 명하신 적이 있었다.
과연 하나의 퇴학 대상자가 누구일까?  큰 일이다.  “내니이까?”  주의 제자들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 하나는 틀림없이 나일 것이란 생각을 하니 큰 일이었다. 퇴학되어 교회와 집에 돌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퇴학 맞는 날이 언제일까 염려하다가 그대로 끝나고 말았으니 다행이었다.

서부교회 3층을 양성원 교실로 사용할 때 씨름대회가 열렸다. 씨름 선수는 나와 가장 키 큰 조사와의 챔피언 전이다. 샅바도 없이 허리끈을 잡고 시작할려는데 벌써 겁에 질렸다. 그 쭉 뻗은 다리가 코끼리 다리 같아 아무리 달라붙어도 꼼짝도 않는다. 큰 나무에 매미 한 마리 붙은 격이라고 옆에서는 말한다.
그는 괘씸히 여겼는지 나를 번쩍 들어 일본말로 도기다시 된 돌 바닥에다 내부딪치고도 마음에 안 차는지 돌 바닥 위에 몇 바퀴 돌려 버렸다. 아파 죽겠는데 모두는 넓은 강당이 떠나가도록 웃고 있었다.

그 후 두 번째 씨름은 최 집사님과의 대결이었다. 병약하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이길 줄 알고 도전을 하여 허리끈을 잡고 보니 큰 일이었다. 사람 몸이 강철 같이 딱딱했다. 해 볼 것도 없이 지고 말았다. 그 분은 몇 해 전 천국으로 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씨름에 이긴 강철 몸인데도 앞서 가고 나는 씨름에 형편없이 지고도 살아 있으니 가는 순서는 알 수 없나 보다.

양성원생 중에 제일 신사 어른이 한 분 계셨다. 연세가 높으면서도 아주 자상하시고 친절하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하시며 친구처럼 공부를 하셨는데  시간만 나면 방에 가신다고 하셨다. 어느 방인가 따라갔더니 다방에 커피 마시러 가시는 것이었다. 방에 가지 않고는 못 사는 분인 것 같았다. 차마 다방 소리를 못하고 끝 자를 따서 방이라고 한 모양이다.

참 존경하고 친했던 분으로 그 후 도평교회에 목회자로 오셔서 함께 거창에서 목회 한 적도 있었다. 그 어른도 일찍 천국으로 가셨다. 천국에도 방이 있고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가 있을까?  만약 방이 있다면 내가 한 잔 사지요. 없다면  며칠 후  우리 함께 생명강수를 대신 마시며 맘껏 웃어도 보고 씨름도 합시다. 그땐 내가 이길 것이니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자가 많다니까.

‘방’ 말이 났으니 양성원 기간이 아니지만  ‘인사’ 이야기도 해야겠다. 묘산교회 집회에 참석했더니 어느 동역자가 '인사' 간다며 몇  교역자와 함께 나가기에 어디 친족이 부근에 있어 인사차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더니 내리는 곳은 해인사 입구였다. 교역자들이 집회 기간 절에 가는 것이 뜨뜻하지 못해서 해인사 끝 두 자만 따서 인사 간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