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선교사의 실수담

2007.05.1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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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선교회 이름 : 반석     번호 : 123
게시일 : 2007/03/09 (금) AM 01:15:28     조회 : 34  

■ 어느 선교사의 실수담    

작성일: 2007/02/20 07:26:47
작성자: 심보경
  

어느 선교사의 실수담


결혼을 하고

내 입에서 “선교사가 될래요.” 라고 말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선교사가 하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도 발가벗고 사는 원주민들에게 옷도 입혀주고 더벅머리도 말끔하게 다듬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난 늘 그 일을 생각하다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지금의 남편을 알게 되면서 잊혀졌던 선교에 대한 생각이 되살아났다. 중국선교에 불 붙은 남편은 공공연히 ‘내 주업은 예수 믿고 전도하는 일이고 부업은 직장에 다니는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좋은 회사에서 정식 직원 요청을 받아도 거절하고 회사에 매이면 교회 일에 자유롭게 시간을 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어쩌면 조금은 무식하게 신앙생활 하는 듯이 보였던 그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난 결혼을 했다.


준비의 시간

결혼 후 ‘곧 선교지로 떠나게 되나보다.’ 생각했지만 남편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차근차근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두 자녀가 태어났고 난 피아노 레슨을 하며 남편의 학업과 생활비를 충당하며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 가운데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나도 무언가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벌거벗고 사는 원주민에게 입힐 원피스를 만드는 기술을 익히기로 했다. 그러나 디자인 학원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고심 끝에 친정에 방치되어 있던 일제 재봉틀을 가지고 와서 모터를 달고 연습을 했다. 일본어로 설명되어 있는 안내서를 가지고 삼일밤낮을 씨름하던 끝에 겨우 실을 끼우고 직선으로 박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침대 커버며 커튼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원피스는 도저히 만들어 지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원주민의 더벅머리를 예쁘게 다듬어 주기 위해서 이발과 파마를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미용학원에 등록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간단한 파마기구와 파마약을 사서 교회 집사님들의 머리와 큰언니의 머리를 볶아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머리카락은 이미 천연 파마머리 인데 왜 파마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리도 애를 썼는지 우습기만 하다.

세 번째로 광활한 그 곳에서 차를 몰고 다니려면 운전면허가 있어야 했기에 두 살 된 아들과 한 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1시간 반이나 걸리는 시골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해서 두 달 만에 1종 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제는 선교사로 나갈 준비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오질 않았다. ‘무엇이 더 필요한 걸까? 아뿔사 언어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지!’ 한국선교사의 자질이 외국 선교사에 비해 부족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회화라는 내용을 선교전문지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난 교회에 갓 출석한 서울에서 이사 온 내 또래의 새댁과 함께 영어 학습 테이프를 들으며 기초부터 회화까지 익혀나갔다. 그러나 교재도 없이 달랑 테이프만 들고 시작한 그 모임은 도대체 진전이 없었다.


결단을 하고

남편은 학업을 마치고 5년 간의 부교역자 생활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 가족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생 개척이라 했다. 개척 후 1년 반이 지났고 난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라며 교회 부흥을 위해 바쁘게 전도편지를 돌리면서 열매수확을 눈 앞에 두고 교인들과 알콩달콩 살고 있던 그 무렵,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내게 동일하게 선교지로 나가라는 출발 명령을 내리셨다.

남편은 피땀 어린 교회와 양들을 둘러보며 쉽사리 결단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급하셨던지 순수하고 열심있는 교인들을 선동(?)해 하나 둘씩 교회를 떠나가게 하시고 기가 차게도 달랑 한 가정만 남겨 놓으셨다. 남편은 결국 결단을 했고 우리가 떠나야 할 선교지도 드러났다.


주님만 의지하며

우린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첫 선교지 싸이판을 향해 출발했다. 싸이판이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몰랐던 우리 가족과는 다르게 주변에서는 ‘아름다운 관광지에서 살게 되었으니 좋겠다.’ 라는 반응들이었다.

그러나 출국 전 파송교회 목사님의 말이 나의 염려바구니 속에서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목사님, 교회에서 매월 보내기로 한 선교사 후원금 없이도 싸이판에 가실 수 있겠습니까? 중국에 세운 교회를 후원하기 위해 후원금을 중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남편은 두말 않고 “네, 갈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고 나가는 길이었다.


웃지 못 할 해프닝

사역지 교회 교인의 90%는 여성이었고 그 중 미혼이 70%, 기혼자가 30% 정도의 비율이었다. 모두 한국인과 중국인 경영자들이 세운 봉재공장에 다니는 조선족 근로자들이었다.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새해가 되었고 회사들은 직원들에게 하루의 신정 휴가를 주었다. 휴가를 이용해 교회에서는 성도들과 관광을 가기로 했다. 이 기회를 통해 전도대상자들을 초청해서 교제하며 자연스럽게 교회로 인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날 우리가족은 기막힌 광경을 보게 되어 적잖이 당황했다. 섬 북쪽 관광을 마치고 해변 가 그늘에서 오락시간을 가졌는데 남편은 그 시간 내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하늘만 쳐다보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과 가이드를 맡았던 교민 집사님도 마찬가지였다.

날씨가 습하고 무더운 탓에 자매들은 대부분 민소매 상의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자리에서도 자매들은 다리를 세우고 앉아있었고 웃을 땐 뒤로 발라당 눕는 시늉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과 우리들은 민망함의 한계를 넘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난 내심 후원금도 없는 선교지 생활과 저들을 어떻게 양육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앞날이  걱정 되었다.


변화되는 성도들

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달 간의 철야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그렇게 기도하는 동안 몇 명의 자매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작정기도 3개월 후부터 교회의 재정이 점차 늘어나더니 6개월 후에는 쓰고도 남는 역사가 일어났다. 성도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때 많은 돈을 가지고 가서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최종목적이었지만 성령께서 친히 그 목적을 바꾸시어 이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한 자녀로 변화시키셨다.

강도 높은 성경공부와 여성학 강의 등 각종의 훈련을 통해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로 변화되어 가는 성도들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돌이켜 보면

초보 선교사였던 우리가족은 이들과 2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한국인이 손꼽힐 정도로 적은 지역이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중국을 직접 접하고 보니 그 자매들의 생활 습성과 문화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왜 자신의 속살이 다 드러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수치심을 모르는지에 대한 의문도 이들의 자녀양육법과 공중화장실 문화를 접하면서 조금씩 풀렸다. 첫 선교지에서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그들에게 하나씩 가르쳐 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하다.

이제 매일 아침 일어나면 이곳의 풍경과 이 곳 사람들이 왜 이리 정겹게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중국인 친구들조차 빨리 이곳을 떠나 다른 아파트로 이사하라고 말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대답을 한다.

“워 이징 시관러(난 이미 적응이 됐어).”

장한나/ 중국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