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 정책

2007.05.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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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16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3/06/28 (토) PM 10:11:57     조회 : 1809  

■ 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 정책 - 손 윤 탁 (선교신학, 박사과정)

                                                                                      
차례

1. 네비어스의 생애와 그의 사역

2. 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 정책

3.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성공 요인

4. 선교 정책 평가와 오늘날의 선교 전략



1. 네비어스의 생애와 그의 사역

네비어스(John Livingston Nevius, 1829-1893)는 중국에서 40년 동안 사역한 스코틀란드 출신의 미국 장로교 선교사이다.

1829년 3월 4일 뉴욕 세네카 카운티(Seneca County)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오비드(Ovid) 장로교회에 출석하였으나 네덜란드 후손인 그의 부친은 그가 8개월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그 후 재혼을 하게 됨으로 청소년 시절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네비어스는 오비드 아카데미에서 7년 간 수학한 후 16살이 채 못되었던 1845년 9월 뉴욕 유니온신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1848년 졸업하였다. 그가 선교 사역을 결심하게 된 것은 1849년부터 조지아주에 머무른 13개월이었으며, 그 후(1850년 12월)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853년 6월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그로부터 6일 후인 18일 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사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6월 15일 뉴욕(세네카 카운티)에서 그 동안 교제해 온 헬렌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그 해 9월 19일 보스턴을 떠나 인도의 봄베이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중국으로 방향을 바꾸어 닝포(Ningbo)에 도착한 것은 1854년 봄이었다.

바로 중국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헬렌의 부친이 딸을 선교사의 아내로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 선교사로 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부부는 특히 언어에 소질이 있었으나, 네비어스의 장인이 염려한 것처럼 헬렌은 선교지에 적응할 만큼 몸이 건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헬렌은 1856년 건강의 문제로 홀로 귀국하여 미국에서 1년 반을 쉬었고, 1861년에는 중국의 정치 변혁이 원인이기도 하였으나 혹독한 날씨로 인하여 네비어스 부부는 산동지방 지푸(Chefoo)지역으로 선교 활동 무대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에도 순회 사역은 계속되었으나 가장 적극적으로 순회 사역을 하게 된 시기는 1872년에서 1881년까지의 기간이었다.  헬렌의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귀국한 1882년 이후에도 순회 사역은 8년 간 계속되었으며,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초청된 1890년까지도 그의 사역은 쉼이 없었다. 설교와 심방, 세례 주기, 상담과 양육, 그리고 신학교 사역도 계속되었다. 1892년 지푸로 돌아 와 중국의 선교 사역에 합류한 그는 1893년 10월 19일, 그의 순회 사역 전날 밤 심장마비로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


특히 네비어스는 자신의 선교 방법을 중국 상해에서 발간되는 '중국보(中國報, Chinese Recorder, 1865- )'에 연재하였고, 또 '선교 교회의 설립과 발전(Planting and Development of Missionary Churches, 1899)'이라는 책으로도 출간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방법은 영국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의 벤(Henry Venn)과 미국의 해외 선교사협회(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의 앤더슨(Rufus Anderson)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선교 이론은 신생 선교 교회(Young Missionary Church)들이 어떻게 하면 독립교회로 성장하느냐 하는 데 있었다.2)  이러한 네비어스의 선교 방법은 한국에서 이제 막 선교 사역을 시작한 젊은 선교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들은 네비어스 박사의 한국 방문을 요청하게 되었고, 1890년 6월 네비어스는 그의 부인과 함께 한국을 방문, 2주일 동안 한국의 선교사들에게 그의 선교 전략과 방법을 강론하였다.

이것이 바로 '네비어스 선교 정책'이다.



곽안련(Charles Allen Clark)목사의 지적은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네비어스의 원리를 "본토 일꾼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데 외국돈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작 네비어스는 이런 진술을 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자립을 강조하고, 성경과 자력 전도, 교회 조직에 관한 견해 등이 현저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곽안련목사는 네비어스의 이러한 원리들은 그의 책 뿐 아니라 그의 아내 헬렌이 쓴 전기에서도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귀신들림』(Demon Possession)이라는 책에서도 한두 항목이 발견되며, 『중국과 중국인』(China and the Chinese)라는 저술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한다.3)



네비어스는 중국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 사역의 꽃과 열매는 한국교회에서 피고 맺히게 되었던 것이다. 네비어스 자신이 설명한 '휘묻이'처럼 그의 본 사역지는 중국이었으나, 그 정책의 휘묻이4) 결과는 한국에서 새로운 묘목으로 자라나게 된 것이다.      



2. 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 정책

네비어스정책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이 방법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있게 한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5)

그러나 네비어스가 사역한 중국에서는 이 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외적으로 비판과 오해가 뒤따랐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네비어우스 선교 정책이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 배경이 된 당시의 한국교회와 한국의 상황을 고찰해 보고, 곽안련목사의 『한국교회와 네비어스 선교 정책』을 중심으로 네비어스 선교 정책과 적용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1) 당시의 한국 교회와 한국의 시대적 상황

당시 한국의 선교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선교사들은 대개 신학교를 갓 졸업한 사람들로서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현지에 왔지만 선교 사역이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험이 없는 젊은 선교사들이 생소한 선교 현지에서 어떻게 선교를 시작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장 깊게 느낀 사람은 언더우드였다.

그래서 그는 본국의 해외 선교부에 경험 많은 선교사로부터 선교의 경험과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고 몇 차례의 편지를 보내었으며, 선교 본부는 이에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네비어스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토록 조치한 것이다.6)



곽안련은 당시의 한국의 상황을 네비어스 선교 정책 성공의 사회적인 요인으로 보고 1890년 전후(前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7)

ⓐ 청일 전쟁과 1876년∼1894년의 대격변의 사건들이 한국 전역에서 사고 방식의 커다란 재조율과 가치 체계의 재평가를 일으켰다. 그러나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

ⓑ 불교와 유교는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무속신앙은 저속하여 기독교가 도래할 당시의 전통 토속 종교들이 약화되고 있었다.

ⓒ 한국인들은 유순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어떤 형태의 종교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는 사실이 지적되기도 한다.

ⓓ 한국인들은 중국이나 다른 외부로부터 오는 지도권에 대해 비교적으로 잘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요소들에 대하여 과장해서는 안 된다.

ⓔ 가난과 압제, 비탄으로부터 오는 '편안함'에 대한 갈망이 한국인들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두드러지게 다른 나라들보다 갈급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해 줌으로 국왕이 선교사들에 대하여 호의를 보여주고 있을 때였다. 국왕이 교회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백성의 인식은 선교에 명확한 도움이 되었다.

ⓖ 당시의 한국 여성들은 활동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복음은 한국 여성들의 지위를 변화시켰다. 교회는 한국 여성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 주었으며 풍요롭게 하였다.

ⓗ 개인적으로 한국인들은 애국자들이다. 애국심이 교회성장의 중요한 요소였는가에 대한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분명히 한국 교회는 愛國忠君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 한국인들은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 거기에 가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신기한 종교'였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신기함은 서서히 없어졌을 것이다.

ⓙ 학교 교육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게일은 "교회는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학교들을 세웠다"고 부언하였다. 전적인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전혀 부인할 수는 없다.

ⓚ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기독교 서적을 해독할 수 있었고,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한글이 있었다. 문자 해독력은 선교의 주요한 요인이 된다.    

ⓛ 상처받은 백성들, 시대적인 어두운 그림자로 인한 백성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곳은 교회였다.

ⓜ 당시의 한국인들은 가정마다 방마다 어떤 呪物들이 있었고, 숲과 나무, 질병을 귀신과 연관시켰으며, 밤에는 도깨비들의 酒宴 시간으로 생각하였다. 성경은 예수 앞에서 허겁지겁 도망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복음과 함께 모든 물신 사상이 깡그리 사라졌다.

ⓝ 손상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평화를 얻게 되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며, 영생에 대한 소망이 확고해 질 수 있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곽안련은 한국에서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의 요인으로 위에 제시된 열 네 가지의 가능성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요인이 아니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며, 영적인 요인인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12개는 사회적인 환경이었던 것이다.



2) 네비어스 선교 정책

중국의 선교 사역은 똑같은 목적, 즉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적극적인 현지 교회를 설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옛 방식은 주로 유급 현지인 대리인에게 의존한다"는 것이고, "다른(네비어스 방식)은 유급 현지인 매개자의 가치를 덜 인정하며 그들의 수를 최소화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옛 방식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현지에서도 요구되고 있는 방식이라는 논증도 있으나, 오히려 많은 해를 끼치되 새 회심자에게는 복음보다 급료의 액수가 더 크게 보이게 만들고 금전적인 이득이 영적인 이득을 파괴하기 쉬우므로 여기에 따르는 여러 가지 폐단을 지적함으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8)

그래서 네비어스의 선교 원리는 아예 처음부터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적극적인 현지인 교회의 설립이 될 수 있도록 독립과 자기 의존의 원리를 적용하자는 것이다.



다음은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9)

1.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널리 순회하면서 전도함.

2. 사역의 모든 분야에서 성경이 중심이 됨.

3. 자전(自傳) :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되며 동시에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자가 된다. 모든 개인과 집단(소수의 그리스도 모임)은 휘묻이법에 의해 사역을 확장시키려고 노력한다.

4. 자치 : 모든 그룹은 선임된 무보수 영수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교구들은 나중에 목사가 될 유급 조사들의 관할을 받는다. 순회 집회 시에는 교인들을 훈련시켜 훗날 구역, 지방, 전국의 지도자가 된다.

5. 자립 : 신자들이 스스로 마련한 예배당을 소유한다. 각 그룹은 창립되자마자 순회 조사의 봉급을 지불하기 시작한다. 학교조차도 부분적인 보조금을 맡도록 한다. 이것은 설립될 당시에만 필요하다. 개교회의 목사에게 외국의 자금으로 사례를 지불하지 않는다.

6. 모든 신자는 그룹 영수와 순회 조사 아래서 조직적인 성경 공부를 한다. 그리고 모든 영수와 조사는 성경 연구 모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

7. 성경적 형벌을 통해 엄격한 징계를 실시한다.

8. 다른 선교 단체와 협력하고 연합한다. 아니면 최소한, 영역이라도 분리한다.

9. 법적 소송 사건이나 그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다.

10. 민중의 경제 문제에서 가능할 경우 일반적인 도움을 준다.  



자립, 자전, 자치로 일컬어지는 3자 원칙이 분명히 드러나는 선교 정책인 동시에 이 세 가지 요소 전부에 동력을 공급하는 또 하나의 네비어스 방식이 그 배후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경 강조 정책'이다.10)

이와 같은 요소를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장로교 정치체제를 채택하는 선교공의회에서 1893년 네비어스 선교 이론을 근거로 10개의 구체적인 선교 정책을 채택하였는데11)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류층보다 근로층을 상대로 전도하는 것이 낫다.

2. 부녀자들에게 전도하고 소녀들을 전도하는 데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어머니들이 후손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3. 시골에 초등학교를 세우고 기독교교육을 실시하면 많은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을 이런 학교에서 훈련하여 장차 교사로 내보내도록 한다.

4. 장차 한국인 목사들도 이런 곳에서 배출될 것이다. 이 점을 더욱 유의하여야 한다.

5. 사람을 회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좋은 성경 번역을 내어놓는 것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이다.

6. 모든 기독교 서적이나 출판물을 한글로 쓰도록 해야 한다.

7. 진취적인 교회는 자립 교회가 되어야 하며, 교인 각자가 더 많은 헌금을 하여, 의존하는 정신을 가진 교인 수가 줄이고 자립하려는 교인이 늘게 하여야 한다.

8. 신자들이 동족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대중에게 설교하기보다 전도자를 양성하여야 한다.

9. 의료 봉사는 환자들을 병원이나 환자의 가정에서 치료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중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깊은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료소 사업은 비교적 유익이 적다.

10. 시골 환자는 환자의 집에 찾아가서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친절한 대접에 대한 그들의 경험이 전도자를 위하여 넓은 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12)    



바울처럼 생업에 종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나 사경회를 통한 성경 연구모임의 운영 방식, 영수 제도, 오늘날 권징의 근거가 되는 징계에 대한 규정 등의 획기적인 방법들이 채택되었다.



3)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적용 과정

장로회 공의회는 현지(한국) 교회의 통치 기관이다. 공의회는 네비어스 원리에 근거하여 위와 같은 10개 항목을 채택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사역들을 전개하였다.13)

1. 순회 전도 사역 : 한국은 소부락 중심의 나라이다. 당시 모든 사역의 현저한 특징은 끈질긴 순회 사역으로, 모든 선교 성원은 직접 작은 시골 마을로 나가 교회를 세웠다.

2. 소책자와 쪽복음 : 매서인들에 의해 전달되었다. 낱장 전도지를 제외한 모든 책자는 판매하였으며, 신약성경, 쪽복음 외의 소책자는 언더우드가 펴낸 네비어스의 요리문답 번역판, 마펫의 '두 친구(Two Friends)'의 번역판 등이었다.

3.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복음 전파 : 법은 아니었으나 '남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최소한이라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 선교사들의 관습이었다.

4. 노방설교 : 군중에 대한 노방설교보다 초기에는 개개인, 소규모, 비공식적인 대화를 통한 전도가 익숙한 방법이었으며, 시장 터에서의 대중 설교는 나중의 일이었다.

5. 교회에 대한 감독 : 산둥 지방에서의 네비어스 방법 적용의 실패 원인은 감독에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Ewing의 지적). 현지인 助師들에 대한 면밀한 감독과 함께 선교사는 그들과 더욱 고요하면서도 인격적인 교제가 있었다.

6. 성경을 강조함 : 다른 나라에서도 성경이 강조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유달리 독특한 위치를 점유해 왔다. 성경의 권위에 따라 사역자들은 '사회선교'에도 무관심하지 않았다.

7. 사경회와 영성 훈련 성경 강습회 : 마펫의 최초의 성경 공부반과 영수들 중심의 성경반은 네비어스의 안을 따랐다. 사경회는 전 교회를 훈련시키는 방법으로서 교재는 성경이었으며, 그 기간은 한 달에서 두 주일 정도였으나 나중에는 한 주일로 단축되었다.

사경회는 하루 종일 계속되며, 4-5시간 동안 성경 공부와 기도와 토론, 전도 훈련의 과정을 공부하였으며, 저녁에는 유능한 설교자가 인도하는 부흥집회가 있었다.

8. 학습교인 제도 : 이 제도는 새로운 신자들에게 격려를 주며, 교회에 입교하기 전에 더욱 철저한 감독과 가르침을 행할 수 있어서 한국교회 건설에 놀라운 도움이 되었다.

9. 권징 : 미국의 교회들보다 훨씬 엄격하였다. 첩이나 첩의 남편, 안식일을 범하거나 음주나 흡연을 한 자 등 문제가 있는 것들은 어느 것도 한국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10. 새 교회 설립 : 먼저 누군가의 집에서 모이다 숫자가 많아지면 초가를 구입, 방을 헐어 큰 방을 만들어 모이며, 나중 교회 건물이 건축된다. 단계마다 자력으로 建造한다.    

11. 구성원에 대한 조직 : 장로는 종신직이 된다. 안수 받지 않은 장로, 영수는 다스리는 장로의 모든 사역을 행한다. 임기는 1년이다. 초기에는 선교사가 그들을 임명하였다.

조사는 선교사들의 개인적인 조수이나, 성례를 집행할 수 없는 것 외에는 사실상 목사와 다름이 없었다. 여성 사역자가 있었다. 전도부인, 권사, 혹은 여조사로 불리었다.

그 외에도 성경 완간(1900년 완성판 신약성경 출간, 1905년 신약 개역판, 1910년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판이 출판), 주일학교 사업, 여성들의 활동 등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네비우스 정책이 정착되어 감에 따라 선교사로 구성된 장로교 공의회는 과거처럼 선교사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 대표자들도 함께 모이기로 하였다. 이 연합 공의회 시기는 네비어스 선교 정책에 따라 한국 교회의 자치적인 능력을 가지게 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01년의 한국어 회의에 3명의 한국인 장로14)와 6명의 조사가 참석하게 되었으며, 1900년에는 두 사람의 정식 신학생이 1902년에 4명 더 입학하였고, 1907년의 학생 수는 172명이었다. 교회는 강력한 지도자를 선택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공의회는 신학교육을 위한 위원회 구성과 함께 교수를 보강하고 1907년 '대한예수교 장로회신학교'를 정식 선포하였다.

동시에 교단 설립을 위한 계획과 함께 1904년 새로운 규범을 채택하고, 신앙고백, 정치 형식, 요리 문답, 권징 등의 형식과 제도가 협의되거나 채택되었다. 1897년 언더우드와 빈튼에 의해 개인적으로 발간된 「그리스도 신문」은 1905년 감리교 신문과 통합되었고, 1901년 공의회에 의하여 단행본으로 출간된 찬송가도 1910년 감리교와 협의하여 하나의 찬송가가 되었으며, 교회 명칭도 1904년 '예수교'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교제와 상호 도움을 목적으로 한 '복음주의 선교회 연합 공의회(General Evangelical Council)'가 결성되었으나 감리교가 장로교회와 연합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자 교단 당국과의 관계 문제가 여의치 않아 1911년 이후 '연합공의회'에서 '연합회(Federal Council)'로 바꾸어 지속되었다.15)

중요한 것이 이 시기의 복음 전도 열의는 대단하였다. 1901년의 세례교인이 3,710명이었으나 1907년에는 18,801명이었고, 신자 총수는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특히 복음 전도를 위한 조직에서 두 가지의 새로운 것이 등장하였던 바 그것이 바로 '날 연보(collections of days)'와 '권찰'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1901년에는 북방의 미전도 지역에 전도대를  파송키 위하여 6명의 선교사와 9명의 한국인으로 구성된 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남부의 기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헌금, 고아원을 위한 구제금 분배, 등 사회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안타까운 것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러일 전쟁이나, 교회는 이제 네비우스의 원리에 따라 민족 교회의 조직을 위한 사전 준비가 완결되어가던 시기가 이 시기였던 것이다.    



1907년 9월 17일 평양에서 전국 장로교회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독노회의 초대회장은 마펫이었고 언더우드는 휴가 중이었다. 부노회장과 기타 직원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이 기간 중 7명이 목사로 안수 받았고. 이 7명 외에 선교사로서의 목사와 장로가 38명, 한국인 장로가 40명이었다. 네비어스 원리의 진행 과정은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회합에서 이제 막 안수 받은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 되었고, 이듬해 평양시 여성들은 이선광 여사를 역시 제주도 여성을 위하여 파송 하였다. 1909년 제2회 졸업생 9명 중 최관흘목사는 블라디보스톡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외지 전도부라 불리었던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부는 1907년 설치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1907년 대부흥 운동은 1910년의 "금년내 백만 명의 새 영혼을"이라는 슬로건으로 일어난 복음 전도 운동인 '백만인 구령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한국인 목사들이었으며, 성령의 놀라운 역사 그 자체였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1912년 9월 1일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날인 총회가 조직되어 출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의 유입과 국가적인 자주권의 상실로 한국교회는 무너지기 쉬운 위기 상황에 있었으나, 성경과 삼자 운동으로 요약되는 네비어스 정책으로 다져진 튼튼한 한국교회의 기초는 오히려 더욱 공고해져 가고 있었다. 물론 곽안련의 지적처럼 혹자들의 신앙은 파괴되었고, 혹자의 신앙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

            

3.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성공 요인

이미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당시의 한국적 상황이 네비어스 선교 정책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

당시의 한국이 기독교 선교 초기였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사역한 선교사들도 모두 새로운 선교지에서 어떻게 선교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네비어스의 동역자였던 칼빈 마티어(Calvin Mateer)가 네비어스가 죽은 지 7년 후  그의 동료였던 네비어스를 격렬히 공격하면서 "네비어스는 그의 정책으로 산둥에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는 지적과 "네비어스 박사는 그가 크게 성공한 지역에 인접한 어느 현장에서 7년 동안 일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단 한 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하였다"는 평가16)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교 전략이나 정책도 중요하지만 선교지의 상황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곽안련은 이러한 시대적인 환경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더 중요한  근본 요인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자립, 자치, 자전의 삼자 원칙이 적용되는 한 어떤 현장이든 놀라운 진보가 있게 될 것은 분명할 뿐 아니라 이 세 가지 요소의 배후에 존재하는 '성경 강조 정책'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사경회 제도, 주일학교, 성경학교, 여름성경학교, 성경 클럽, 성경 통신 과정, 가정 예배에서의 성경공부 등에서 추진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17)


그래서 그는 네비어스 정책의 성공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의 요인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다.

첫째, 이 원리에 대하여 철저히 신봉하고 거리낌없이 수용하여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현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원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강력하게 붙들 규범이 있어야 한다(1891년의 규범18)과 같이).

셋째, 진행 상황 점검을 위한 강력한 지부 조직이 있어야 한다.

넷째, 복음 전도 사업은 물론 의료, 교육, 일반 사역 등이 모두 동일한 정책위에 진행되어야 한다. 어느 한 사업이 이 규범을 깨뜨리면 정책 자체가 파산될 것이다.

다섯째, 사경회 제도와 순회 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마 이 제도가 없었다면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섯째, 충실한 영역 분할과 계획이 필수적이다.

일곱째, 한국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받아 들였다.19)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내용이지만 한국에서의 네비어스 선교 정책이 성공한 원인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 원리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실천적인 면에서 이 원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치밀한 계획이 따랐다. 곽안련의 지적처럼 강력한 규범이 있었고, 제도와 조직면에서도 거의 완벽하였다.

끝으로 지속적이었다. 1915년 스피어(R.E. Speer)는 『태국, 일본, 필리핀, 중국에 대한 방문』이라는 책에서 "1895년 우리는 네비어스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고수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포기하였다"고 기록하였다고 한다20). 실패의 원인은 포기에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속적인 적용이 주요했다.        



4. 정책에 대한 평가와 오늘날의 선교 전략

네비어스 선교 정책이 한국 교회 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를 곽안련은 한 마디로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는 말로 표현하였다. 네비어스는 권리이양(devolutio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 고찰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네비어스 정책이 채택되고 1901년 첫 공의회가 결성된 이후 꾸준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교회에 대한 통제에서 완벽한 권리이양을 위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교회의 법적인 문제에서 네비어스 정책을 적용한 이후부터 '선교사들은 점진적으로 쇠하였으며, 한국의 형제들은 계속하여 흥하였다'. 곽안련은 이 책을 쓸 당시 아직 선교사들에게 남아 있는 두 개의 과제가 있다면 먼저는 선교사들이 교회의 어떤 치리회에서든 투표권을 내어놓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치리회와 선교 현장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21)

오늘날도 가끔 선교 현지로 나아가는 우리 선교사들로부터 위험한(?) 다짐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저는 제가 선교하는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이며, 자손 대대로 선교지를 위하여…". 참으로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다짐이다. 분명히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최근 강조되고 있는 선교 활동의 두운법(P-)에 따른 단계를 반드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1. 개척(Pioneer)의 단계 : 선교사는 지도자로서 일의 많은 부분을 담당해야만 한다.

2. 양육(Parent)의 단계 : 선교사들은 현지 지도자들을 양육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3. 동역(Partner)의 단계 : 양육된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일하는 단계.

4. 참여(Participant)의 단계 : 스스로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선교지 교회가 초청할 때에만 참여하며, 선교부는 다른 어느 곳에서 다시 개척의 단계를 시도하여야 한다.22)


한국교회의 초기 선교사들은 네비어스 정책의 꾸준한 적용을 통하여 오늘날의 한국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정과 단계를 거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비판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사람이 앞 서 언급한 네비어스의 동역자였던 칼빈 마티어(Calvin Mateer)이다.

그는 네비우스가 죽은 지 7년 후 『네비어스 정책 논평』(Review of the Nevius Methods)라는 글을 통해서 네비어스의 방법이 산둥에서도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실패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곽안련은 오해와 편견임을 여러 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가며 반박하였다23).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교회에서 이 방법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던 요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당시 더 많은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었던 중국과 일본을 비교해 보고, 한국에서도 나란히 함께 일하면서도 이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던 다른 선교회의 성장률과 비교해 본다면 사회적인 환경과 함께 이 원리를 고수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의지에 대한 평가도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네비어스 정책이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와 교파분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부 동아시아 담당 총무인 스미스(J. S. Smith)가 1961년「국제선교」(Th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에 기고한 글에서 네비어스 정책은 지나치게 자치와 자급을 강조한 나머지 자기 신학만을 가르쳤기 때문에 협력의 정신이 부족하여 교회 분열이 생기게 되었으며, 연합 사업이 잘 안될 뿐 아니라 일반 사회와도 유리된 공동체가 되었으며, 훈련받은 유능한 지도자 양육에도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한 적이 있었다.24)

이에 대하여 김인수 교수는 네비어스 정책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비어스 정책의 시행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네비어스는 이런 결과를 미리 내다보고 협력과 연합에 대하여 누누이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인수교수는  네비어스 선교 정책이 한국 초기 교회 성장에 있어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되어야함을 분명히 하였다.25)



  참고 문헌  

        

곽안련, 박용규·김춘섭역,『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4.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8.

이광순·이용원, 『선교학개론』,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이영헌, 『한국 기독교사』, 서울 : 컨콜디아사, 1982 .



Ed. O.M.S.C., Mission Legacies,  New York, New Haven : Orbis Books, 1994.

『교회사 대사전』, 서울 : 기독지혜사, 1994.



      1) Everett N. Hunt. Jr., 'John Livingston Nevius', Mission Legacies, Ed. by O.M.S.C., (New York, New Haven : Orbis Books, 1994) pp.190-196을 참고하였음.

      2)『교회사 대사전I』(기독지혜사,1994), '네비우스 선교정책'(p.345)을 참고함. 김인수교수는 이 부분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다(김인수.『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8. p.194 참고). 즉,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을 삼자정책(Three-Self Principles)이라고 부르며, 이는 CMS 총무 헨리 밴(Henry Venn)의 3자 정책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외부간섭을 받지 않고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Self-Government)과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기 교회를 운영한다는 것(Self-Support), 그리고 스스로 전도한다는 것(Self- Propagation)을 말한다.

      3) 곽안련, 박용규·김춘섭역,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4),  pp. 23-24.  

      4) '휘묻이'법은 과목(果木)이나 정원수를 묘목이나 모종의 의한 번식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서 '접붙임'과 함께 중요한 방법으로 쓰이고 있다. 접붙임은 본 둥치를 자른 후 다른 가지에서 잎눈이나 가지의 일부분을 취하여 접붙이는 방법이지만 '휘묻이'는 본 둥치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가지를 휘어 땅에 묻어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네비우스는 '자립 전도'의 방법을 휘묻이를 통하여 설명하였다(곽안련, p.33, 44, 138). 유년기부터 네비우스는 원예에 취미가 있었다(같은 책, p.43).

      5) 김인수,『한국 기독교회의 역사』(서울 :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8). p.193.

     6) Ibid., pp. 192-193.

     7) 곽안련, pp. 304-320.

     8) Ibid., pp. 25-27.

     9) 곽안련, pp.44-45의 내용을 그대로 전제(全載)함.

      10) Ibid., p. 320. 그래서 곽안련은 같은 책 pp.20-21에서 "한국 교회는 '바이블'이라는 낱말을 쓰거나 성경에 대하여 생각할 때 소문자 'b'를 쓰지 않는다. 이 낱말의 철자를 그렇게 쓰는 새로운 풍조는 이 시대 서방의 대단히 중대하고도 대경실색할 만한 표적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11) 1893년 이전 초창기부터 한국 교회는 장·감 연합으로 선교지 분할에 대한 협의가 시작되었고(1888년, 언더우드에 의해), 북장로교와 호주 빅토리아 선교회간에 장로교선교연합공의회(The 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1889년)가 조직되었다.(1892년 남장로교회의 진출로 1893년 연합공의회 발족). 그러나 감리교회는 스크랜톤이 어떤 특수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제외하고 전반적인 정책 적용은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고, 협의회에서도 예양협정을 반대키로 함에 따라 1893년 장로교에서만 이 정책을 한국 상황에 맞게 적용키로 하였다. 김인수, pp.194-197.

      12) 이영헌,『한국기독교사』, (서울: 컨콜디아사, 1982), pp.94-95에서 인용함. 김인수, pp.198-199에도 같은 10개항이 소개되어 있다. 동시에 이 정책을 언더우드가 네 개로 압축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해있는 일터에 남아서 자신이 일을 하면서 자활해야 하며 자신의 언행을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여야 한다.

   ② 교회의 방법들과 기구는 한국교회가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발전되어야 한다.

   ③ 교회는 최선의 자질을 갖추고 교회가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서 정식 사역자로 일하게 해야 한다.

   ④ 예배당은 토착적인 모양과 기독교인들 자신의 재원을 가지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건축되어야 한다.(김인수, p.199).  

      13) 곽안련은 네비어스 선교 정책의 적용 과정을 논의하기 위하여 그 시기를 초창기(1884-1893), 공의회시대(1893-1901),  연합공의회(1901-1906), 독노회(1907-1911), 총회 시기(1912-1921)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곽안련, 목차 참고). 그 가운데에서도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 상황에 맞게 채용되면서,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적용은 1893년 이후의 공의회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역 방법을 곽안련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곽안련, pp. 134-154).      

      14) 한국 최초의 장로는 4명이 안수 받았다. 한 사람은 소래교회에서, 세 사람은 평양에서 장립하였는 데, 통계(곽안련, p.376)에 의하면 1900년에 2명, 1901년에 2명이 장로가 되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15) 구체적인 관계와 연합 사업은 Ibid., pp.175-178을 참고함.

     16) Ibid., p. 49, 51.

     17) Ibid., pp.320-321.  

      18) 북장로교 선교회는 네비어스 내한 1년 후인 1891년 A항∼G항에 이르는 일련의 규범과 세칙을 채택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곽안련, pp.99-109를 참고할 것.

     19) Ibid., pp. 322-324.

     20) Ibid., p.111.

     21) 곽안련의 이 책은 1937년에 쓰여졌다.

          '권리이양'에 관한 글은 같은 책, pp. 275-283 참고.  

     22) LMS의 헨리 벤(Henry Venn)의 주장을 근거로 함. 이광순·이용원,『선교학개론』(한국장로교출판사, 1993), pp.127-129.

     23) 곽안련, pp. 49-70.

     24) 김인수, pp. 201-202 에 스미스가 열거한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25)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