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의 특징과 전개

2007.05.18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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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례교의 특징과 전개 - 姜敦求
선지자선교회
Ⅰ. 들어가는 말

   예수에서 비롯한 기독교는 성립 이래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다.  루터의 교회개혁이 있기 이전에 서유럽에는 천주교가, 그리고 동유럽에는 동방정교회가 있어서 기독교는 크게 양대 세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루터의 교회개혁이 있은 다음에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전개되어 왔다.

로마 카톨릭은 비록 국가를 초월하여 하나의 조직체계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서 유럽의 천주교와 남미의 천주교, 그리고 한국의 천주교는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로마 카톨릭과 달리 국가별로 조직체계를 이루고 있는 동방정교회 역시 예를 들어서 그리이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는 분명히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과 동방정교회에 비해서 그 다양성의 정도가 보다 심하다.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를 비롯해서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구세군, 그리고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 세계의 역사상 존재하는 개신교 교파는 무수히 많다.  게다가 각 교파는 또한 여러 교단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 밖에도 여러 교파운동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무수히 존재했었고, 또한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예수에서 비롯한 종교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보다는 '기독교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지도 모른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여러 교단 가운데 침례교의 특징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침례교는 유아침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단조직이 다른 교단에 비해 개교회중심적이면서도 교회의 운영이 보다 민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침례교는 루터교나 장로교와 같이 개신교 교파 가운데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가장 큰 세력을 지닌 교단이며 우리나라에서도 4대 개신교 교파 안에 포함되는 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 교파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침례교의 일반적인 특징과 함께 그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 전반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침례교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에 대한 이해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종교 내부에서 자신의 종교를 호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이고, 둘째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특정 종교를 이해하는 관점이다.  본 논문은 둘째의 관점에서 침례교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본 논문은 침례교 내부에서 논란이 일고 있거나 또는 침례교의 고도의 신학적인 문제들에는 가능한 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본 논문이 침례교 내부에서 침례교 외부에 침례교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고 침례교 외부에서 침례교 외부에 침례교를 소개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 비해 국내에서 침례교에 관한 연구 성과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침례교 전문서점이나 일반 도서관에서 찾아 본 바에 의하면 침례교 일반에 관해 국내에서 발간된 연구 서적은 10여 종을 넘지 않는다.  따라서 침례교 전반에 대해 알아 보기 위해서는 외국의 전문서적을 참고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본 논문은 침례교에 관한 모든 연구 업적들을 참고하기보다는 침례교에 관한 일반 서적, 즉 일반 교양인들이나 침례교의 일반 신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연구 업적들만을 참고로 할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서 우리는 특정종교의 외부에서 특정종교를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그러한 이해가 특정종교의 외부에 서 있는 일반 교양인들이나 또는 타종교나 타교파를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판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특정종교 내부의 이해보다는 특정종교 외부의 이해가 특정종교의 외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 서 있다.

우선 본 논문은 천주교를 비롯하여 개신교 여러 교파들과 대비해 볼 때 지적할 수 있는 침례교의 여러 특징들을 제시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침례교의 발단에서 시작하여 서구에서의 침례교의 전개를 일별해 본 다음 한국 침례교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Ⅱ. 침례교의 특징

   침례교는 루터의 교회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이 출현한 교파이다.  일반적으로 침례교는 개신교 여러 교파들 가운데 좌파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新約의 본질적인 원리를 지키는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원형적인 교회(Primitive Church)로서의 신약교회(New Testament Church)의 신앙을 전승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침례교는 당시 교회개혁이 지향하였던 여러 가지 목표들을 짐짓 극단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밀고 나갔던 교파이다.  침례교는 루터가 유아세례와 성찬식을 로마카톨릭의 방식대로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이 불충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침례나 성찬식과 같은 敎會儀式이나 조직 면에서 바이블에 가장 근접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침례교가 바이블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래에서는 의식, 교리, 조직, 대사회적 측면으로 나누어 침례교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의례적 측면

   침례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침례를 통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침례교의 첫 번째 특징은 침례의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교파들은 주로 물을 뿌리는 방법에 의해 세례를 주고 있는 것에 비해 침례교는 아예 물 속에 담그는 방법을 통해 세례를 주고 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이와 같이 세례를 주는 방법을 달리하고 그 방법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본래 세례라는 말 대신에 '뱁티스마(baptism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하였다.  캐나다인으로 우리나라에 온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주한 외국선교사들로 구성된 성경번역위원회의 부회장으로 있던 펜윅(Malcom C. Fenwick, 1863-1935)은 'baptism'을 세례 대신 '뱁티스마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다가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부회장직을 사퇴하고 바이블을 혼자 번역할 정도였다.  그러나 침례교는 '뱁티스마'라는 용어가 일반에 생소할 것을 우려하여 '뱁티스마'라는 용어는 포기하되, 세례라는 용어 대신 침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침례교에 의하면 중세까지 모든 교회는 대체로 침수침례를 행하였다.  2세기의 문헌인 {열두 사도의 교훈(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s)}은 물이 귀할 경우에만 물에 들어가는 대신에 물을 붓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리고 {디다케}(7:1-3)에는 "흐르는 물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에 침례를 주라.  찬 물이 없으면 더운 물에 주라.  찬 물도 더운 물도 없거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물을 머리에 세 번 부어라."는 구절이 있다.  이들 문헌을 보면 기독교는 본래 침수침례를 행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약식으로 세례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311년에 개최된 라벤나 회의는 灌水禮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유일한 세례 방법이며 침수침례는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침수침례를 행하는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 뒤부터 침수침례는 침례교의 가시적인 첫 번째 특징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와 같이 침례교는 침수침례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믿는 자들 만이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신약교회는 믿는 자들 만이 침례를 받았으며,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다.  침례 때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장사 지냄을, 그리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믿지 않는 사람이 침례로 인해 몸이 물에 잠겼다면, 그것은 물에 젖지 않은 죄인이 물에 젖은 죄인으로 바뀐 사실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는 母胎敎人을 인정하지 않으며,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자기의 믿음을 보여 줄 수 없음으로 유아세례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물론 유아세례에 대한 침례교의 이러한 입장은 재침례파(Anabaptist)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유아세례를 거부하는 침례교는 세례를 받았건 안 받았건 일찍 죽은 어린 아이는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無知에 의한 죄도 예수에 의해 代贖되었는데 어린 아이의 죄가 無知에 의한 죄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례교는 침례가 곧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인에게 침례는 구원을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 결코 아니다.  침례는 죄를 씻지 못한다.  따라서 죄를 씻기 위해 침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침례교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침례를 못 받았다고 해서 구원을 못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침례교는 침례를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침례교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례교인에게 침례의 이유는 예수가 전도하라는 명령과 가르치라는 명령 못지 않게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인에게 침례는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  침례교는 확실히 믿지 않고 철저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침례를 행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인위적인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라 확실히 믿고 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침례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침례교는 로마카톨릭이 7대 聖事를 행하는 것과 달리 개신교 일반과 마찬가지로 침례와 성찬식만을 聖事로 인정한다.  그런데 성찬식에 대한 침례교의 입장은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들과도 상이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성찬식에 대한 기독교 각 교파의 입장은 크게 化體說(transubstantiation), 共在說(consubstantiation), 그리고 象徵說(symbolism)로 구분할 수 있다.  화체설은 로마 카톨릭의 입장으로 성찬식 때 司祭에 의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목과 피로 변한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기 때문에 성찬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거나 없는 사람이거나 간에 똑같이 작용한다고 믿어진다.  공재설은 루터와 칼빈의 입장으로 다시 구분된다.  루터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방법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떡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가운데'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 의하면 역시 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사람도 성찬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에 비해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믿고 성찬은 오직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작용한다고 믿었다.

화체설과 공재설은 비록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하는지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는 점에서는 견해를 같이 한다.  상징설은 이와 달리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라는 견해이다.  침례교는 츠빙글리에서 비롯된 이 상징설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다른 교파들과 대비된다.

침례교는 침례가 敎人權의 시작이라면, 성찬식은 교인권의 점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교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떡은 떡 그대로, 포도주는 포도주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으며, 성찬을 이와 같이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바이블에 가장 가까운 견해라고 생각한다.  공재설 가운데 루터와 칼빈의 입장을 개방적 성찬식과 폐쇄적 성찬식으로 구분한다면 침례교는 이 양자의 입장을 함께 견지하여 침례교 내부적으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2. 교리적 측면

침례교는 교파신학이나 헌법 혹은 특별한 신조를 두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침례교는 교리도 없고 신앙고백도 없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침례교 역시 하나의 교파로 존재하는 한 교리적인 측면의 특징이 없을 수 없다.

침례교는 무엇보다도 바이블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며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침례교에 의하면 권위는 오직 살아있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신약성서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침례교 최초의 선교사였던 펜윅은 무엇보다도 바이블의 한글 번역에 힘을 썼으며, 바이블 읽기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대한 교단의 권위있는 해석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펜윅은 신도들이 바이블의 어려운 구절에 부닥쳤을 때 남의 도움을 빌어 해석하기보다는 수차 그 구절을 읽으면 성령이 필요에 따라 알게 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침례교는 바이블에 무한정의 권위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도 개개인이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바이블을 해석할 수 있으며, 과학과 교육에 의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할 때에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아마도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가 영적 개인주의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영혼의 자유와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느 교파보다도 강조하여 모든 신자가 똑같이 제사장의 지위를 지닌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침례교에도 교파 나름의 신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침례교는 대체로 웨스트민스터문답서와 필라델피아신앙고백서를 지지하다가 1925년에 가서야 일반적으로 '뉴 햄프셔 신앙고백(New Hampshire Confession)'으로 알려져 있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신앙의 표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침례교는 1962년에 이르러 이 '뉴 햄프셔 신앙고백'을 수정, 보완하여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라는 신앙고백을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이 신앙고백서가 최종적이며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만약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다면 적절한 시기에 이 신앙고백서를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가 미국 남침례회라는 침례교의 대표적인 교단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서라고 해서 이 신앙고백서를 모든 침례교 교단이 승인할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침례교의 다른 교단은 물론이고 미국 남침례회에 소속된 침례교 교회라고 할 지라도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서는 어디까지나 바이블 해석에 도움이 되는 지침일 뿐 이것이 모든 침례교인의 신앙을 좌지우지할 권위를 지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서 침례교는 개신교의 다른 교파와 달리 信條가 신도들의 양심을 구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편, 침례교는 신과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소통과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신과 올바른 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침례교 내부에는 다양한 신앙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예를 들어서 1731년에 런던에 있던 침례교 목회자 25명 가운데 7명은 율법폐기론자 혹은 고등칼빈주의자, 7명은 칼빈주의자, 6명은 알미니안주의자, 3명은 유니테리언주의자, 그리고 2명은 제7일 안식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침례교 초기의 목회자들이 이렇게 다양한 신학적 성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침례교가 개인 나름의 신앙을 존중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침례교가 1950년대에 다른 교파의 목사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침례교는 이와 같이 개인의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하기 때문에 교단 나름의 신학을 정립하는 데 비교적 관심을 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침례교의 신학적인 성향을 개신교 대표적인 교파인 장로교와 감리교와 어느 정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영국침례교는 초기에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어 전개되었다.  알미니안주의는 네델란드의 알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에서 비롯되었다.  알미니우스는 극단적 칼빈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의 교리와 함께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는 최종적으로 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또한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다고 가르쳤으며, 은혜로부터 타락이 가능하다고 하고 성령의 불가항력적 사역을 부인하였다.  

장로교가 이러한 알미니안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1618년 11월과 1619년 5월 사이에 열린 돌트회의(the Synod Dort)에서 알미니안주의는 장로교로부터 철저히 단죄되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주의 5대 요점이라고 알려진 'TULIP'이라고 알려진 칼빈주의의 5대 요점이 제시되었다.  'TULIP' 가운데 여기에서 장로교의 특징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어떤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미리 정해져 있고 또 다른이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다시 말해서 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위 '예정론'과 인간이 회심하여 한번 구원을 받으면 이 구원의 효력은 영원히 지속된다는 교리이다.

감리교는 신이 회심한 사람일지라도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는 자유를 부여했다는 소위 '은총으로부터의 타락'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보다는 오히려 알미니안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초기 침례교는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어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일반침례교 내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적인 침례교 교리가 출현하게 되어 18세기말에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주의의 장로교와 알미니안주의의 감리교와 비교해 볼 때 침례교의 신학적 경향이 장로교 쪽에 가까운 온건한 칼빈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3. 조직적 측면

침례교는 원칙적으로 철저한 개교회주의를 지향한다.  비록 개교회가 모인 지방연합회, 그리고 지방연합회가 모인 총회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 3자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동의 관계이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단 조직은 한마디로 개교회주의에 입각한 협동적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침례교의 이러한 교단 조직은 로마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의 다른 교파의 그것과 비교해 볼 때 침례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치권과 자결권을 가지는 침례교의 개교회는 감독제도나 장로제도와 대비되는 회중제도라는 조직 형태를 취한다.  감독제도는 감독이나 주교에 의해 치리되는 교회 형태로 로마 카톨릭, 영국 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감독교회, 연합 감리교회, 그리고 루터교의 일부가 채택하고 있다.  장로제도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堂會가 교회를 치리하는 교회 형태를 말하는데 장로교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대표적인 교파이다.  

감독제도와 장로제도가 모두 중앙집권적인 조직 형태라면 회중제도는 보다 민주적인 조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회중제도 아래에서는 교회의 모든 문제가 회중 자신에 의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결정된다.  회중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교파는 회중교회,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그리고 침례교를 열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침례교는 중앙집권적 조직 형태가 아니라 회중제도라는 민주적인 조직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직자와 평신도는 기본적으로 동등한 권한을 가진다.  비록 개교회 내에 목사와 집사라는 직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직분은 계급의 직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능의 직분으로 이해된다.  이런 조직 형태 내에서 신도 개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보다 민주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보다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침례교의 조직적인 측면에서의 특징은 한마디로 개교회의 자치와 회중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대사회적 측면

침례교는 대사회적 측면에서도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침례교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로마 카톨릭은 물론 여타 개신교 교파들과 대비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침례교는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비슷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침례교는 회중교회가 국가의 통제 아래 있으려는 것과 달리 국가가 교회에 대해 그 어떤 통제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회중교회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장로교는 적어도 칼빈 당시에는 국가와 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였고, 이러한 성향이 장로교에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침례교가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한 이유는 침례교가 처음 비롯된 영국의 종교상황으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헨리 8세에 의해 1534년 성공회가 國敎로 지정된 이래 영국에서 성공회 이외의 교파들은 직,간접적인 피해를 받아 왔다.  그러다가 1689년 소위 信敎自由令이 공포되면서 비로소 성공회 이외의 교파들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영국은 여전히 성공회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다.  게다가 침례교는 미국에서 활동을 전개할 초기에 소위 '유아세례'를 부인한다는 이유로 알게 모르게 정치 주체나 다른 교파들로부터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침례교가 국가와 교회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게 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침례교는 국가가 특정 교파를 선호해서는 안되며 그 어떤 종류의 종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처벌할 권리가 없으며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침례교는 1833년 영국 정부가 새로운 학교 설립을 후원하기 위해 각 종교단체에 매년 2천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원하였을 때 배당된 보조금을 받지 않아 교파주의로부터 공립학교를 보호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침례교는 다른 교파에 비해 종교의 자유 획득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교단유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교회형이라기보다는 섹트형에 가까운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침례교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비교적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영국, 유럽, 미국 등지에서 주로 서민들이나 노동자 계급에 더 많은 호소력을 지니고 파고 들었다.  그리고 개신교 교파 가운데 최초로 해외 선교를 시도한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는 1793년부터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침례교가 이렇게 다른 교파들에 비해 일찍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침례교가 섹트형에 가까운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례, 교리, 조직, 그리고 대사회적 성향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세례의 방법으로 침례를 행하며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이해한다는 점, 신도 개개인이 바이블을 해석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신조가 다른 교파들에 비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비교적 융통성이 있는 칼빈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우리는 침례교가 개교회주의를 지향하며 회중의 권한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었다.

아래에서는 침례교의 이러한 특징을 염두에 두고 침례교의 발단에서부터 영국과 미국에서의 침례교의 전개, 그리고 이어서 우리나라에서의 침례교의 전개 과정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침례교의 기원

   대체로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은 그 기원을 정확히 추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루터교는 1520년 독일에서 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영국성공회는 1534년 영국에서 헨리 8세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장로교는 1536년 스위스에서 칼빈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회중교회는 1582년 영국에서 브로윈에 의해, 그리고 감리교는 1740년 영국에서 웨슬레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와 달리 침례교는 비록 그 교회의 최초 설립을 역사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침례교회의 최초 설립이 침례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침례교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확고하게 단언을 내리는 것은 의미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  첫째는 침례교 내부에서 제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傳承說이 있다.  이 설은 침례교가 요단강가에서 침례요한이 사역하던 그 때부터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설은 침례교의 역사를 원시 기독교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는 使徒傳承思想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역사적으로 용인되거나 고증된 학설로 볼 수는 없다.

둘째는 침례교가 재침례교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재침례교와의 靈的 血族說(The Anabaptist spiritual kinship theory)이 있다.  역사적으로 재침례교는 왈도파(the Waldensians), 페트로부르스파(Petrobrusians), 노바티안파(the Novatians), 그리고 도나티스파(the Donatists), 메노나이트파(the Mennonites) 등 여러 계보가 존재했었는데 이 설은 바로 침례교가 重生한 신도의 침례를 주장하는 이들 재침례교와 영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륙의 재침례교가 영국의 침례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를 찾아 내지 못하고, 다만 영국의 일반 침례교만이 이들로부터 약간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는 회중제도와 신자의 침례를 주장하였던 일단의 영국의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침례교가 비롯되었다는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the English Separatist descent theory)이 있다.  이 설은 물 속에 잠그는 침례가 바이블의 가르침에 가장 가깝다고 간주한 영국의 분리주의자들 가운데 일부에서 침례교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침례교의 기원에 관한 설이 여러 가지가 있는 가운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럽의 재침례파와 이들 가운데 네델란드에서 활동하였던 메노나이트파, 그리고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의 분파인 17세기 청교도주의로부터 침례교가 비롯되었다는 데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Ⅳ. 침례교의 세계사적 전개

   영국에서 침례교는 초기에 두 가지 별도의 집단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 두 집단은 일반침례교(General Baptists)와 특수침례교(Particular Baptists)를 말한다.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는 유아침례를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구원의 대상을 한정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한다.  일반침례교는 한마디로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인류를 포괄한다는 萬人救援說을 지지한다.  이와 달리 특수침례교는 칼빈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은 신에 의해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는 각기 별개로 활동하다가 18세기말에 가서 비교적 온건한 칼빈주의를 중심으로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되었다.
대체로 현대의 침례교는 특수침례교의 영향을 보다 많이 받고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일반침례교가 특수침례교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17세기초 영국에서 케임브리지 출신의 존 스미스(John Smith) 목사를 중심으로 토마스(Thomas)와 제인 헬위스(Jane Helwys) 등 몇몇 사람들이 비국교도적인 분리주의 운동을 전개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정부 및 국교도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고, 결국 1609년에 37명의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박해를 피해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대부분의 침례교인들은 이 교회에서 비로소 최초의 침례교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존 스미스와 토마스 헬위스는 교회의 권위 및 침례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존 스미스는 그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메노나이트파와 연합하였고, 헬위스는 1612년에 그를 따르던 8,9명의 추종자들과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교외에 있는 스피탈필드(Spitalfield)에 영국 최초의 침례교를 설립하였다.  그러자 스미스의 교회는 점차 쇠퇴하여 갔다.  그리고 헬위스는 1년간 비밀리에 예배를 보다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죄악의 비밀에 관한 소론(A Short Description of the Mistery of Iniquity)}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교회에 대한 왕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예상한대로 헬위스는 왕에 의해 투옥당하고 이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일반침례교는 교회정치와 성례전 등 몇가지를 빼 놓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그대로 채택하여 다른 교파들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일반침례교는 영국정부로부터 무정부주의자로 인식되어 끊임없는 박해 속에서 지하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689년에 국교 이외의 교파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신교자유령(the Act of Toleration)이 공포되어 일반침례교의 발전에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일반침례교는 신교자유령이 공포된 이후 20여 년간 좋은 여건을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회의주의에 빠져 아예 소멸되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神性을 부인하는 보편주의교회(the Universalists)로 전향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의 영향으로 침례교 역시 부흥하는 좋은 계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70년에 웨슬리신학을 신봉하는 일반침례교연맹이 결성되었고, 다시 1세기 남짓 후인 1891년 일반침례교 안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적인 침례교 교리가 출현하게 되어 일반침례교는 특수침례교와 통합할 수 있었다.

특수침례교는 분리주의자들의 일부가 1633년과 1638년 사이에 런던에 세운 교회에서 비롯되었는데, 1644년에는 런던을 중심으로 최소한 7개의 특수 침례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수침례교도 1689년 신교자유령이 공포되기 전까지는 많은 박해를 받으면서 서서히 발전하였다.

특수침례교의 이후 전개는 일반침례교와 유사한 측면을 보였다.  신교자유령의 공포 이후 특수침례교는 오히려 칼빈주의를 극단적으로 이해하여 일반인들에게 전도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아 급격한 쇠퇴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역시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의 영향으로 18세기 후반에 가서 특수침례교는 서서히 소생하게 되었는데 특히 18세기 후반의 특수침례교의 선교활동과 19세기 초반의 특수침례교 나름의 바이블 번역사업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1792년에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는 최초의 침례교선교회를 조직하고 자신이 직접 1793년에 인도의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침례교 내에서 현대 선교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인물로 바이블을 26개의 인도 방언으로 번역까지 하는 열성적인 선교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특수침례교는 1804년에 바이블 번역과 출판사업을 목적으로 특수침례교 나름의 바이블번역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일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침례교가 타교단과 독립적으로 바이블 번역 사업을 전개하는 데 선구적인 사례가 되었다.

영국의 침례교는 이러한 전개 과정을 거치면서 웨일즈, 스콧틀랜드,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나아가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확산되어 갔다.  1891년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되어 침례교연맹이 구성되었고 1905년에는 런던에서 침례교세계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 이후 영국 침례교의 성장은 괄목한 것이 못되는 수준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국 침례교가 영국 침례교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는 독자적으로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미국 침례교는 로저 윌리암스(R. Williams)가 1639년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덴스에 침례교회를 세운 것과 존 클락(J. Clark)이 같은 해 로드 아일랜드의 뉴 포트에 침례교회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미국 종교사에서 종교의 자유를 신장시킨 선구자로 인식되고 있다.

이들로부터 비롯된 미국의 침례교는 거의 1세기 동안 식민지 당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 와중에서도 1665년에 보스톤에 침례교회 한 개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684년에 이 교회 몇 사람을 중심으로 남부 캐롤라이나주 찰스톤에 침례교회가 한 개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가 미국 남부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교회이다.  또한 1688년 이후 수 개의 교회가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는데, 뉴잉글랜드 지역의 침례교가 알미니안주의를 따른 것과 달리 필라델피아 지역의 침례교는 칼빈주의를 따랐다.

미국에서는 1733년 메사추세츠주의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설교에서 비롯된 대각성운동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개인의 회심을 무엇보다도 강조하였다.  비록 이 운동에 침례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고 또한 이 운동으로 인해 분파가 생겨나가기도 하였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침례교는 많은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733년 대각성운동이 시작된 때부터 1774년 독립운동이 일어난 때까지 40여 년간 침례교인의 수는 5백 명에서 3만 5천 명으로 증가하였고, 다시 1800년 경에는 그 수가 1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영국으로부터 미국이 독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실현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1777년에는 뉴욕 주가, 그리고 1785년에는 버지니아 주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만들었으며, 1789년에는 미국연방정부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구절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1833년에 메사추세츠 주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만들어 이후 미국의 모든 주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선언하는 법률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물론 침례교는 이러한 일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침례교는 남부와 서부에서 순회전도자들의 선교가 주효하여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미국침례교는 선교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와 남북전쟁의 여파, 그리고 인종 문제 등을 중심으로 여러 분파로 나뉘어 발전하였다.  현재 미국에는 40여 개 남짓의 침례교 교파가 있는데 이들 가운데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교단으로는 미국남침례교총회(1,050만), 미국통합침례교(550만), 미국침례교협의회(250만), 미국침례회(150만)를 열거할 수 있다.  그리고 침례교의 교세가 비교적 많은 나라로 러시아(54만 5천), 인도(50만 8천), 브라질(24만 3천), 자이레(22만 8천), 미얀마(22만 3천), 캐나다(17만 7천)를 지적할 수 있다.


Ⅴ. 일제하의 한국 침례교

   지금까지 침례교의 주요 특성과 세계사적 전개 과정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우리나라에서 침례교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광복 전과 후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침례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지고 있는 교단이다.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한인교회의 통계를 보면 침례교는 해외의 한인 사회에서 장로교 다음으로 큰 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에서 침례교는 생각보다 발전하지 못하고 비교적 작은 교단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침례교 내부에서는 그 이유로 몇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일제하의 침례교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선교사 펜윅이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다른 교단에 비해 충분한 선교비를 지원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제하 침례교의 재정은 주로 한국의 침례교인 스스로가 조달하였기 때문에 침례교는 다른 교단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펜윅은 주로 함경도 奧地와 간도 지역을 주요 선교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펜윅은 다른 교단과의 마찰을 피해 이미 다른 교파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함경도 지역이 아직 다른 선교사들의 활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 지역을 주요 선교지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간도 등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멀리는 몽고에까지 선교의 손을 뻗쳤다.  이로 인해 침례교는 대도시 위주의 선교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교세 확장의 득을 보지 못하였다.

셋째, 일제 말기에 침례교는 성결교 등과 함께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여 교단이 해체되는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침례교의 예배와 집회가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고, 교회 건물과 대지,그리고 종각까지 국방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몰수당하였다고 한다.
넷째, 일제하 침례교의 주요 활동 무대는 이북이었기 때문에 광복으로 인해 침례교의 교세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복 직전에 전국에 140여 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남한에 있었던 침례교회는 35개 정도에 불과하였다.

다섯째, 1959년에서 1968년 사이에 교단이 분열되어 한창 교세를 확장할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기의 교단 분열로 인한 휴유증은 현재까지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 침례교가 광복 이전에 생각보다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침례교 내부에서 지적한 것들을 열거해 보았다.  침례교의 역사적 전개는 사실 이상의 이유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위에서 열거한 사실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광복 이전의 한국 침례교의 역사는 펜윅의 초기 활동기(1889-1905), 대한기독교 시대(1906-1920), 동아기독교 시대(1921-1932), 동아기독대 시대(1933-1940), 동아기독교 시대(1940-1949)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 시대 구분을 염두에 두고 광복 이전 한국 침례교의 역사를 일별해 보도록 하겠다.

펜윅은 1889년 캐나다의 독립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황해도 소래에서 머물다가 선교사업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189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 갔다.  그는 보스톤에서 고든(A.J.Gordon)이라는 북침례교의 목사와 친분을 맺고 비로소 침례교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94년에 한국순회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다시 내한하여 원산을 중심으로 침례교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고든이 시무하던 교회에 엘라 씽 기념선교회(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조직되었는데 이 선교회는 1895년에 수 명의 선교사를 공주와 강경 지역에 파송하였다.  이들의 침례교 선교사업은 사실 펜윅의 그 것보다 앞 선 것이었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1901년 원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펜윅에게 이양되었다.

펜윅은 재정적으로 선교지원을 받지 못하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으나 반면 그 어떤 선교부의 선교정책에도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이며 독창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개인전도와 순회선교라는 펜윅 나름의 방식이 결실을 맺어 비로소 1906년 충남의 강경에서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 46개조의 회칙을 만들 수 있었다.

펜윅은 개인전도와 순회선교, 그리고 자급 개척이라는 침례교 고유의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그는 교단의 행정체제를 회중주의식으로 하지 않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절충적 감독체제인 감목체제로 하였다.  게다가 그는 웃지 못할 일화를 남길 정도로 매우 엄격했고 나아가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처신을 하여 그의 조직 운영은 독재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당시에 만주와 간도까지 선교사업을 확장하였을 정도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남다른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05년 각 종단으로 하여금 포교계를 제출하도록 하여 선교 활동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 때 펜윅은 포교계 제출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리고 '대한기독교'라는 敎名은 일제가 보기에 불순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펜윅의 선교활동은 일제로부터 보이지 않은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3·1운동 후 일제가 포교 허가제를 포교 신고제로 바꾸자 펜윅은 대한기독교라는 교명을 동아기독교로 바꾸어 등록하였다.

펜윅은 前千年說의 극단적인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1926년에는 동아기독교의 모든 신자에게 학교 교육을 받지 말도록 하였다.  심지어는 교단의 지도자들가운데 자녀를 교육시키는 사람들은 심한 책벌과 함께 성직을 파면당하기까지 하였다.  이 당시 펜윅은 [만민 좋은 기별]이라는 전도지와 [달편지]라는 교단 소식지을 발간하였는데 이 전도지와 교단 소식지는 선교활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펜윅은 1933년 동아기독교라는 교명을 東亞基督隊로 변경하였다.  그는 장로교나 감리교와 같은 교파운동이나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들과의 교제를 끊으라는 의미에서 교회라는 명칭 대신 성별된 양의 무리를 듯하는 '隊'라는 명칭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펜윅이 근본주의적인 섭리주의자로서 자신의 선교사업을 타교파들의 그것과 분리하려는 비타협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35년 일제가 황궁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동아기독대가 일제로부터 박해를 받을 즈음인 그해 12월 펜윅은 사망하였다.  펜윅이 사망하자 1940년 동아기독대는 다시 동아기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隊'라는 명칭이 군대를 연상하여 일제로부터 박해를 받을 여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명칭은 펜윅이 고집하였을 뿐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바이블 교육을 받는 외에 정규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체계성을 지닌 신학적인 기초가 없었다는 것이 동아기독교 지도자들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부분의 교회는 전담 목회자가 아닌 사람들이 예배와 바이블 공부를 인도하는 상황이었다.

일제 말기에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와 함께 동아기독교는 일제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와 함께 재림설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해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44년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의 해체를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 인해 동아기독교의 예배와 집회는 금지되고, 교회 건물과 대지, 심지어는 종각까지 국방 헌금이라는 미명으로 강제 몰수당하고 말았다.  이를 침례교에서는 '원산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 동아기독교의 교세 현황은 한국에 24개 구역에 100여 교회, 만주 6개 구역에 100여 교회, 시베리아 2개 구역에 47개 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 개처의 개척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1941년에 만주에 기독교연합교단이 설립되면서 동아기독교의 재만교회는 만주 기독교연합교단에 흡수되었다.


Ⅵ. 광복 후의 한국 침례교

   동아기독교는 북한의 원산을 總府로 하여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남북 분단으로 인해 많은 타격을 받았다.  광복 직후 남한에는 약 40여 개의 교회와 350여 명의 교인, 그리고 목사는 10명 정도였을 뿐이다.

동아기독교는 1946년 감목체제를 회중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전통적인 명칭을 버리고 일반 다른 교파에서 사용하는 명칭으로 변경하였으며, 교역자도 종전의 파송제에서 청빙제로 바꾸었다.  그러자 구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교인들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교회가 대한기독교라는 교명을 걸고 분리해 나갔다.  이후 대한기독교는 대한기독교침례회라는 교명으로 현재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동아기독교는 1949년 제39회 총회를 충남 강경에서 개최하고 교명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이 총회를 계기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미국남침례회와 손을 잡고 많은 변모를 겪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미남침례회 외국선교부 산하에는 105명의 선교사들이 중국, 일본 및 필리핀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미남침례회 외국선교부는 중국에서 백만 불에 상당하는 선교회의 재산 손실과 유럽에서는 50만불 상당의 재산 손실을 입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남침례회는 광복 이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를 통해서 그들의 선교사업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광복 후 최초로 우리나라에 들어 온 미남침례회 선교사는 광복 이전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에버내티(John Arch Abernathy, 1896-1973)였다.  그는 1950년에 내한하여 폐허가 된 한국 침례교를 위해 많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1952년 충남 칠산에서 개최된 42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문제는 미남침례회의 선교 지원을 받으면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서서히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 측은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선교자금을 이용하여 교세를 확장시키고자 타교파의 목회자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이 때 타교파의 목회자들은 침례교의 신앙을 철저하게 이해해서라기보다 미남침례회의 풍부한 선교자금을 이용하여 보다 자유로운 목회활동을 하기 위해서 침례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숫적으로는 교세를 확장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선교자금을 관장하는 선교사를 중심으로 소위 진보파(혁신파)와 보수파(노장파)로 나뉘는 悲運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보파는 영입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한 친선교사 계통이었고, 보수파는 펜윅의 지도 아래 일제하에서부터 활동하였던 반선교사 계통이었다.

결국 이들 사이의 내분이 표면화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두 개의 총회로 분열되고 말았다.  먼저 1959년 4월 25일 선교회의 지원을 받는 몇몇 교단의 지도자들과 전입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대전의 대흥동침례교회에서 소위 대전총회가 열리고 그 곳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라는 교단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5일 그 때까지 총회를 주도해 온 교단의 지도자들이 포항침례교회에서 소위 포항총회를 개최하고 한국기독교침례회라는 교단을 설립하였다.  한국 침례교의 이러한 분열은 선교부와 총회의 정책적 갈등, 타교단 교역자의 무분별한 영입으로 인한 부작용, 총회 내의 여러 파벌, 그리고 거기에 편승한 한국인과 선교사의 개인적 감정 혹은 한국인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결국 민족의 자긍심 대 선교부를 등에 없은 실제적 이권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열로 인해 특히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선교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나 1963년에 대전총회에서 일부 한국교역자들이 선교사들의 비행과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고 선교사 배격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5년을 전후하여 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이 전입파를 반대하고 선교부의 독주를 견제하며 주권을 회복하려는 세력으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 입어 1968년 4월 소장파 목사들의 추진에 의해 두 개의 교단이 통합되어 '한국침례회연맹'이라는 교단이 출현하였다.

9년간의 교단 분열로 인해 한국 침례교는 분명히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한국 침례교로 하여금 세계의 침례교와 궤를 같이 하는 명실상부한 개교회 중심의 침례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미남침례회와의 연합으로 인해 한국 침례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고 미남침례회에 예속되어 있는 교회에 불과하다는 自省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한국침례회연맹은 1976년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근래에 침례교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정도로 세계에서 주목받는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지금까지 광복 후 한국의 침례교를 주로 기독교한국침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이외에도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그리고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라는 침례교 교단이 있다.  대한기독교침례회는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1946년 동아기독교가 감목체제를 회중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변경하는 등 조직을 일신하려고 할 때 일제하의 구체제를 옹호하는 교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이다.  그리고 한국성서침례회는 1954년에 들어 온 미국성서침례회에서 비롯된 교단이며,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는 1971년에 들어 온 미국선교침례회에서 비롯된 교단이다.


Ⅶ.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개신교의 한 교파인 침례교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침례교의 여러 특징과 세계사적 전개, 그리고 한국 침례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광복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17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의 역사는 어언 4백여 년에 가깝다.  짧지 않은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해 온 침례교의 특징과 세계사적 전개 과정을 짧은 글에서 모두 서술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침례교의 특징과 역사를 서술하면서 필자의 견해가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여기에서 부언해야 할 것은 본 논문이 침례교의 특징과 역사를 침례교 내부에서 완벽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학자들은 침례교 내부에서 발간한 연구 업적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 논문은 어디까지나 일반 교양인이나 일반 개신교 신자들에게 침례교라는 하나의 교파를 이해시키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침례교의 특징과 역사적인 전개를 이해하는 데에는 몇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침례교에 대한 소개 책자가 다른 교파에 비해 비교적 적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세계기독교사에 관한 서적은 거의가 장로교와 감리교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침례교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서구에서 발간된 침례교에 관한 연구서적들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침례교는 침례교 내부에서 발간된 이러한 연구서적들을 우리나라에 소개하는 데 매우 인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국 침례교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광복 이전의 사료가 소위 원산사건으로 인해 거의 소실되었기 때문에 교단 차원에서 조차 한국 침례교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펜윅이 독립선교사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일제하의 한국 침례교에 관한 자료들이 외국에 보관되어 있지도 못하다.  그리고 광복 이후에도 교단 분열 기간을 거치면서 이것의 휴유증으로 인해 교단 내부에서 조차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직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필자로서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이외의 한국 침례교의 활동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입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침례교 내부에서 더 많은 자료들이 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본 논문에 대한 침례교 측으로부터의 바람직한 지적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