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化革命 시기의 중국 기독교(1966-1976)

2007.06.11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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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化革命 시기의 중국 기독교(1966-1976)
선지자선교회
지난 호에 우리는 대약진운동 이후의 중국의 정치변화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문화혁명 시기의 중국의 기독교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문화혁명의 발전과정

1965년 11월, 야오원웬(姚文元)이 상하이의 문회보(文匯報)에《해서파관(海瑞罷官)》이라는 역사극을 평론하면서 당시의 문예계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마오쩌둥(毛??)은 그의 평론을 정치적 투쟁의 돌파구로 이용하여 모든 신문에 싣게 하였고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리우샤오치(劉少奇)를 중심으로 한 수정주의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16일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마오(毛)가 제정한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통지(通知)’가 통과되면서 문화혁명이 시작되었다. 문화혁명을 지도하는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한 ‘516통지’에는 마오의 좌경사상, 투쟁노선, 투쟁의 방침과 정책 등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중앙문화혁명소위원회>를 조직하여 소위원장에 천바이다(陳佰達), 고문에 캉셩(康生), 부위원장에 장칭(江靑)과 장춘챠오(張春橋) 그리고 왕리(王力), 관펑(關鋒), 치번위(戚本禹)와 야오원웬 등을 위원으로 구성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먼저 인민일보(人民日報)를 재조직하여 선전의 수단으로 삼고 6월 1일 첫 사설에 사상이 불순한 인물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튿날 베이징대학에서 학생들이 <베이징대학당위원회> 와 <베이징시위원회>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발표하고 민중들이 일어나 ‘흑방(黑幇)’을 물리쳐야 한다며 각 당위원회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베이징대학교를 선두로 하여 각 지역의 학생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시위를 벌이고 각 학교마다 대자보가 만발하여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또 각 곳에서 홍위병(紅衛兵)들이 조직되어 시위가 확산되어 갔다.

홍위병은 문화혁명 당시 학생들에 의해 조직된 학생시위 조직으로 마오의 공개적인 지지를 통해 홍위병 운동은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마오는 8월에서 11월까지 3개월 동안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무려 8번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홍위병들을 만나 이들의 운동을 고무시켰다.

마오는 8월 1일부터 12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한 <제8대 11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리우샤오치를 타도하고 중앙정권을 다시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앙정권을 장악한 마오는 67년부터 그 여세를 몰아 각 지방으로 확대하여 지방정권 숙청작업에 착수하였다. 67년 1월 상하이(上海)의 왕홍원(王洪文)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상하이의 당정권을 성공적으로 쟁취하면서 시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치열한 정치투쟁으로 인해 내부의 모순과 대립이 발생하면서 무력 충돌까지 속출하여 내전의 위험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마오는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홍위병을 해산시켰다.

  1968년 9월 전국 29개 성, 시와 자치구에 <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약 2년에 걸친 홍위병 운동은 일단락을 맺고 <혁명위원회>의 주도하에 문화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1968년 10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8대 12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리우샤오치는 모든 직책을 박탈당하고 카이펑(?封)에 연금된 후 당뇨병, 심장병, 폐렴 등으로 11월 12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1969년 <제9대 제1회 중앙전체회의>에서 마오를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린뱌오(林彪)를 부주석으로 선출하면서 3년 여에 걸친 문혁은 일단락을 맺게 된다.


종교정책 

문화혁명 당시 파사구(破四舊: 구사상, 구문화, 구풍습, 구습관)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마오와 고위 당국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장칭은 인민일보 12월 4일자에 <무산계급문화대혁명대회>에서 발표한 연설내용을 보도하여 이 세상에 신이나 귀신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종교는 구문화(舊文化)의 것이니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종교를 용납할 수 없고 이를 철저히 소멸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67년부터 홍위병들은 대자보를 붙이고 종교 문제를 관할하는 <통일전선공작부(統一前線工作部) 이하 통전부>가 반혁명 수정주의 집단에 통제되어 자본주의 계급의 도구가 되었다고 비난하면서 통전부의 지도자들을 면직시키고 강제노동 처분을 내려 사상개조를 시켰다. 또한 통전부와 그 외 종교와 관계된 모든 기관을 해산시키고 홍위병들이 모든 관계 서류들을 인계받아 처리하였다. 통전부 산하 종교업무를 직접 담당하는 <종교사무국>은 <괴물들의 보호소>, 혹은 <자본주의 부활부>라고 비평하여 폐지시키고 그와 관계된 고위 간부들은 모두 강제노동에 보내졌다.

1969년 8월 <홍기(紅旗)>를 통해 종교는 인민들의 아편과 같아 무산계급을 압박하고 노예로 삼아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정신적인 무기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무산계급들이 압박자들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속박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종교는 과학과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대립되기 때문에 전 세계 공산화를 위해 분투노력하는 것과 기독교 국가를 설립하는 것하고는 물과 불이 융합할 수 없는 것처럼 상극의 존재라고 주장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호함과 동시에 불신앙의 자유도 보호해야 한다는 중국 공산당의 종교에 대한 기본입장과 태도를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천명하였다. 또한 공산당은 종교자유를 허용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유심론(唯心論)이나 종교의 교리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유심론, 승려주의, 각종 종교와 미신 등에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폭력과 협박 등으로 신도들이 신앙을 포기하여 중국에 모든 종교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유도하였다.

각종 종교를 핍박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마오쩌둥 숭배운동’을 전개하여 그를 우상화시키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천주교와 각종 사당을 파괴하면서 전국 곳곳에 마오의 초상화를 붙였다. 그리고 마오가 저작한 모어록(毛語錄)은 성경을 대신하여 읽도록 하였다. ‘손에도 모어록이 떠나지 않고 입에도 모어록이 떠나지 않도록 한다.’ 는 구호와 함성을 미친 듯이 외치면서 그와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 혁명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심지어는 구타와 폭행을 서슴지 않았다. 공개 집회마다 “마오쩌둥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는 것은 보편적인 관례가 되었다. 홍위병을 이용하여 백성들이 갖고 있는 현재의 종교사상을 마오쩌둥 사상으로 완전히 세뇌시켜 새로운 공산주의의 ‘신인(新人)’을 만들어 내는 것이 문화혁명이 노리는 가장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수난과 발전

1966년 8월에 대부분의 교회들은 홍위병들에 점령되어 건물들이 파괴되고, 교회재산은 압수되었으며, 종교 활동은 ‘자본주의 계급의 집회’ 라고 규정하여 모든 집회를 중지시켰다. 교회 내부의 시설들과 찬송가, 성경 등 교회의 모든 시설과 자료들을 불에 태워 버리고 그나마 생존한 교회들은 공장, 창고, 회의장이나 당 간부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교회 벽과 울타리 등에 “근본적으로 신이나 영혼, 그리고 예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 어른들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믿을 수가 있나? 우리들은 무신론을 신봉하고 오로지 마오만을 믿는다. 우리들은 전 국민들에게 모든 성경을 태워 버리고 십자가나 신들을 철저히 파괴하며 종교단체들은 모두 해산 시키자” 라는 표어나 대자보 등을 수없이 붙였다.

교회뿐 아니라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난징(南京)의 <금릉협화신학교(金陵協和神學校)>도 예외는 아니었다. 1966년 6월에 신학교의 강의가 중지되고 8월에 홍위병들이 신학교에 진입하여 무자비하게 파괴하였다. 특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와 학술잡지들은 대부분 소각되어지는 비운을 당해야만 했다. 도서들을 소각하는 데 3일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그 당시에 소각된 도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홍위병들은 도서들을 운동장에 쌓아놓고 소각할 때에 신도들을 그 주위에 강제로 무릎 꿇게 하고 그 모습을 보도록 하였으니 그 방법과 태도가 극도로 잔인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삼자회> 조직은 해체되고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대자보를 통해 <삼자회>의 간부들은 ‘자본주의 계급’ 혹은 ‘인민을 박탈하는 계급’의 대표자들 이라고 비난하고 ‘삼자운동’ 은 ‘리우샤오치(劉少奇)와 우야오종(吳耀宗)의 음모에 의해 벌어진 정치운동’ 이라고 비난하였다. 홍위병들은 <삼자회>에 속한 목회자들을 극악분자, 사상반동파, 문제가 비교적 적은 인물 등의 세 부류로 나누어 처리하였다. 그들은 삼자회의 고위 간부들을 구타는 물론 목에다 죄명을 붙이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온갖 고통과 모욕을 주고 심지어 강제노동을 시켜 스스로 반성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폭행 속에 간부들은 고통과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신앙을 버리거나 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일반신도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홍위병들은 ‘파사구(破四舊)’ 를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신도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온 집안을 수색하고 귀금속, 골동품, 피아노와 가구 등 값비싼 물건을 강탈했다.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불에 태우거나 부수고 집안에서 성경과 종교서적들이 발견되면 신도들을 끌고 가두시위를 하며 온갖 구타와 폭행을 가했다. 그러나 많은 신도들은 용감히 이 모든 고통을 견디며 그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결론

문화혁명은 마오의 극좌파와 리우샤오치 등의 수정주의파와의 정치, 사상, 이념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정치투쟁이었다. 마오는 문화혁명을 통하여 대약진의 실패로 실축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홍위병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회오리 속에서 기독교는 전례 없는 핍박과 피눈물 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중국 기독교가 서방의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과거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들추어 중국이 공산화된 후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던 중국 기독교에 일격을 가하여 중국에서 기독교가 영원히 자취를 감추기를 원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고통을 참으며 신앙을 견지하여 오늘날의 중국 기독교를 건설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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