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종교개황

2009.07.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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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조선족종교개황
선지자선교회
책제목: 길림조선족
출판사: 연변인민출판사
출판일: 1995년1월 제1판
주  필: 김  택
부주필: 김인철
페이지: 844쪽
책  값: 정장정가 21元 평장정가 17元
발췌자: 김반석

발췌자 註: 1)이 책은 제 1편 이주와 개발, 제 2편 혁명투쟁, 제 3편 학교교육, 제 4편 문화예술, 제 5편 종교와 풍속, 제 6편 인물전기가 수록되었습니다. 2)연변조선족종교개황은 제 5편 종교와 풍속 편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3)천주교와 기타 이종교도 수록되었으나 발췌하지 않았습니다. 4)타자를 칠 때에 글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본래 책 그대로 하였습니다.

기독신교

1. 장로교회

  장로교회는 기독신교의 여러 파들 가운데서 영향력이 제일 크고 세력도 제일 강한 교파였다. 장로교는 갈빈주의를 신봉했고 장로정치를 실시했다.

  20세기초를 전후하여 조선인교도들이 이주해옴에 따라 장로교도 연변에 들어오게 되었다. 1902년, 카나다장로교 선교사 구례선과 선교사조리 홍순국은 연변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도활동을 했으며 뒤이어 전도사 안순영이 계속 전도활동을 벌리였다. 1905년 반일 민족지사 리상설이 ≪민족독립정신을 양성하고 종교로 단결을 이룩≫ 하려는 목적으로 룡정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한편 ≪서전서숙≫(1906년에 세웠음)을 꾸리고 반일선전을 적극 하였다. 이듬해 리상설이 연변을 떠나자 ≪서전서숙≫도 문을 닫았다. 1903년에 구례선선교사와 홍순국선교사조리는 룡정에 룡정교회를 세웠다. 그해 전도사 안순영이 한족교도 선금의 도움밑에 선후하여 화룡현 양목정자교회, 광제암교회 등을 세웠다.

  1907년, 반일민족지사 김약연, 구춘선등 사람들이 다라즈 장재촌 (후에 명동촌이라 고쳤음)에서 교민회를 조직하여 묵밭을 일구는 한편 반일사상을 선전하였다. 그 이듬해 4월 김약연은 원래의 규암재 (1901년에 세워졌음)를 명동서숙이라 고치였고 그 후에는 또 명동강습소라고 고치였다. 1097년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가 나온 뒤 조선인반일지사들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으며 명동학교의 반일활동도 날따라 여럽게 되었다. 하여 이 학교가 세워진후 김약연, 구춘선, 마진, 박무림, 강백규등 사람들은 조선 서울로부터 장로교회의 정재면 등 교원을 초빙하여 장로교회에 집단적으로 가담했다. 1909년, 김약연 등은 명동교회를 세웠다. 명동교회는 세워진 뒤 각지에서 적극 전도하는 한편 교회조직을 뭇고 교회학교를 창건하고 반일사상을 선전함으로써 자체의 종교세력이 날따라 발전하여 점차 연변의 반일활동중심으로 되었다.

  장로교가 전파되여온 초기에 연변인민들의 생활은 더없이 가난하였다. 외국선교사들은 병을 치료해주고 부침땅을 좀씩 희사하는 수단으로 전도하면서 적지 않은 군중을 저들의 교회에 끌어들였다. 한편 반일지사들은 장로회에 가담하여 민족교육을 발전시키고 반일활동을 벌려 인민대중을 더욱 많이 끌었다. 1911년에 이르러 연변 각지에는 교회와 집회처가 40여개에 달했고 교도가 1,600 여명에 달했다.

  1914년 기독신교의 리동휘 등 반일지사들이 연변에 와서 로씨야, 중국, 조선등 세 나라 전도회의 명의로 기독신교를 전파했으며 반일사상을 선전하고 반일 활동에 종사했다. 리동휘 등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에서 ≪종교로써 전체민족을 단합시키고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자≫는 사상을 선전한데서 장로교는 더욱 빨리 발전하였다. 1916년에 장로교는 교민회가 발전하여 형성된 간민회와 훈춘의 황병길이 세운 ≪한민회≫를 합쳐 간도국민회를 조직했다. 국민회 회장은 구춘선이 맡았다. 국민회는 국자가에 본부를 앉히고 아래에 지방회, 분회를 두었으며 룡정 카나다선교부의 제창병원 지하실을 련락지점으로 했다. 국민회는 80여개 분회가 있었고 아래에 구역회, 촌회의 통신기구를 두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목사와 시찰회의 순회목사들이 분회 회장을 맡았다.

  1912년에 조선에서 장로교총회를 내오고 조선국내의 장로교를 7개 로회로 나누었다. 연변지구의 장로교는 워낙 함경로회에서 관리하다가 1917년 룡정촌에 함북로회가 갈라져 나오게 되자 함북로회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1912년에 카나다선교사가 룡정촌에 장로교선교부를 세웠다. 그때로부터 박걸, 구례선 등 선교사들은 룡정, 명동 등지를 중심으로 하여 연변 각지에서 전도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그들은 또 종교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문화사업도 벌리였다. 1914년이후 그들은 명신고등녀자학교, 명신녀자학교, 은진중학(1919년)을 륙속 창건했고 1916년 5월에는 제창병원을 세웠다. 구미자본주의나라와 일본제국주의사이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구미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적극 지지해나섰다.

  간도국민회는 창립되여서부터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함과 동시에 여러 반일단체를 조직하여 반일활동을 벌리였다. 1918년 4월 명도학교 교장 김약연, 교감 정재명 등 39명 반일지사들은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3월 장로교등 종교조직들에서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기한 ≪정의인도≫, ≪민족자결≫ 등 구호를 받들고 룡정촌, 훈춘 등지에서 반일대시위를 단행했다. 그 뒤 국민회는 무장 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마진은 명동장로교학교 학생들을 위주로 한 충렬대를 조기했고 김상호는 암살대를 조기했다. 충렬대와 암살대는 국민회의 명령에 따라 친일주구를 타격하고 ≪일본령사관과 동양척식회사≫등을 불살랐으며 ≪자유의 종소리≫등 지하신저 ≪군자금≫을 모았다. 그해 11월 국민회는 충렬대와 암살대를 토대로 하여 국민회군을 창건하고 안무를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그뒤 또 홍범도 장군을 초빙하여 군사령도력을 강화했다. 국민회군은 기타 항일무장단체와 단합하여 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후근 등 사업을 책임졌으며 각 무장대오를 적극 지원했다. 국민회본부는 ≪군적등록령≫을 반포하여 무장대오에 뛰여들도록 청장년들을 동원했으며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골간을 양성해냈다. 자금을 모아 무기를 사기 위하여 림국정, 윤준희. 한상호 등 7명 교도는 조선은행 회령분행으로부터 룡정으로 오는 차를 습격하여 조선은행권 15만원을 앗아냈다. 1920년 국민회군은 홍범도 장군의 령도밑에 봉오동 전투를 벌리여 일본 침략군을 호되게 족치였다. 그해에 일본제국주의는 많은 병력을 움직여 반일 투쟁을 탄압했다. 놈들은 가는 곳마다에서 교도들을 학살했고 교회당과 학교를 불살랐다. 하여 장로교는 전례없는 재난을 당했다. 장로교의 외국선교사들은 일본침략군의 잔인무도한 죄행을 국외보도계에 폭로했으며 제창병원을 리용하여 교도부상자를 치료해주었고 교도들을 구제해주었다. 1920년 이후 일본침략군의 ≪토벌≫로 하여 담이 콩알만해진 장로교 상층 인사들의 맥을 버리고 반일 기치를 내리우고는 ≪구세촌≫을 건설한다고 떠들면서 군중을 미혹시켜 저들의 세력을 점차 회복했다. 1921년 12월 1일 장로교는 토성보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 함북로회에서 갈라져나와 간도로회를 세우고 김내범을 회장으로 선거했다. 1925년에 가도로회는 동만로회라고 이름을 고쳤다.

  1925년 전후 맑스-레닌주의 사상이 전파됨에 따라 장로교내부가 갈라졌다. 일부 상층인물들은 맑스-레닌주의 영향을 받아 반종교운동을 벌리고 반일투쟁을 견지하면서 혁명의 길을 걸었고 일부 상층인사들은 일본제국주의의탄압이 겁나 이른바 ≪순종교활동≫을 하였다. 1926년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제한과 반종교운동의 충격으로 하여 종교세력이 한때 머리를 쳐들지 못했다.

  위만주국이 세워진 뒤 위만주국정부는 저들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종교에 대하여 도와주고 리용하고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 기회를 빌어 장로교는 문화교육사업을 발전시키고 금주운동 등 활동을 조직하여 자체의 세력을 점차 춰세웠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들을 강박하여 일어를 쓰게 하고 ≪진쟈참배≫를 하게 하는 이른바 ≪황민화≫정책을 실시했다. 장로교가운데서 민족의식을 갖춘 사람들은 일제의 이같은 정책을 단호히 반대하여 적극 맞서 싸웠다. 신앙이 드팀없는 외국전도사들도 ≪진쟈참배≫를 반대해나섰다. 연길시의 장로교 교도 김응필은 ≪진쟈참배≫를 반대한 탓으로 유기형 8년에 언도되였다가 동북이 해방돼서야 풀려나왔다. 일본 제국주의는 전쟁물자를 거두어들일 때 기독신교파 교회의 종마저 빼앗아 갔으며 장로회규약의 부분적 내용을 억지로 고치게 했고 성경 가운데의 반항의 뜻이 있는 부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정상적인 종교활동에 큰 영향을 끼치였다.

  일본제국주의와 위만주국정부는 종교를 가일층 통제하고 리용하기 위하여 각 교파를 통일시키는 활동을 애써 벌리였다. 1940년 5월 장로교회는 강박에 의해 ≪만주조선기독교련맹회≫에 가입했고, 이듬해에는 또 억지로 ≪만주조선기독교회≫에 합병되였다.


2. 감리교회

  감리교회는 기독신교의 한 개 파로서 세계성을 띤 종교조직이였다. r감리교회의 특정은 열심히 전도하고 령혼의 체험을 존중할 것을 주장하며 교회를 전도하기 위해 련락하는 조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조직제도를 놓고보면 각 교회와 교도들이 다같이 총책임자를 선거하며 선거된 총책임자가 다시 각 교회의 목사를 임명하는 한편 전도구역을 지정해준다. 따라서 ≪년차회의≫를 소집하고 종교활동을 지도한다.

  감리교는 미국으로부터 전해져왔다. 20세기 초 미국의 남감리교와 미감리교(북감리교라고도 함)는 조선을 거쳐 연변지역에 들어왔다.

  1908년 9월 남감리교회의 전도사 리화춘이 책장사 리응현, 함주익 등과 함께 룡정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족기독교도 선금(단금)과 련계하여 연변 각지에서 전도했고 한편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하여 그 영향면을 넓혔다. 그 뒤 반일민족지사 박무림의 지지와 방조 밑에 룡정촌과 그 부근 지구에서 선후하여 교회 9개를 세웠으며 교도가 500여명에 달했다. 1909년 8월 리화춘 등은 장로교파와 감리교파의 전도구역협정에 좇아 연변지구의 감리교회를 장로교파에 넘겨주고는 조선으로 나갔다.

  1920년 5월 남감리교회는 미국남감리회 선교부의 지지밑에 또다시 연변지구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921년 7월 남감리교회는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제 1차 ≪씨비리만주선교년차회의≫를 소집했으며 훈춘 등지의 성리교회를 접수하여 관리하였다. 1922년 4월 정재덕 목사는 룡정, 두도구, 왕청 등지에 교회를 세웠다. 그 때 연변지구의 총책임자는 량주삼 목사였고 룡정교회 책임자는 리용정이였으며 왕청교회의 책임자는 최세환이였다.

  초기에 남감리교회는 교육발전을 전도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선후하여 왕청, 룡정 등지에 ≪반일학교 半日學校≫등 교회학교를 세워다. 반일학교 학생들은 반날씩 사회로동에 참가하여 먹고입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머지 반날에는 문화학습을 하였으며 저녁에는 종교지식을 배웠다. 남감리교회는 또 교도자녀들을 위하여 동명학교, 북일학교, 영창학교, 삼감유치원 등을 세웠으며 룡정에다도 매일성경학원을 세워 국립, 사립 학교의 학생들을 끌어들여 퇴교후 성경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 영향면을 넓히였다. 남감리 교회에서 교회학교를 적극 창건하여 교도자녀들에 대한 교육사업을 발전시킨 까닭에 많은 군중을 끌었다. 1925년에 이르러 남감리교회는 연변의 국자가, 옹성라자, 룡정, 두도구, 훈춘, 백초구, 석현, 경신향, 대두천 등 곳에 교회를 세웠다. 1926년 11월 남감리 교회는 연길현 두도구에서 북간도지방회 제1차회의를 열고 량주삼을 회장으로, 장주섭을 서리고 선거했다.

  1918년 전후 미감리교회의 배형식목사는 미감리교를 전파하고저 씨비리와 연변지구에서 사회조사를 하였다. 1919년 배형식은 장로교등의 파의 반일지사들과 련계를 가지고 ≪3.13≫ 반일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1920년 미감리교회는 연변지구에서 전도하기 시작했으며 도문에 감리교회를 세웠다. 그때로부터 감리교의 두 개파 조직은 연변각지에서 자기의 세력을 발전시키고저 장로교파와 교도쟁탈전을 벌리였기에 모순이 생기게 되었다. 1929년 1월, 장로교파와 감리교파는 봉천 (지금의 심양)에서 두 개 파 대표가 참가한 협상회의를 열고 담판했다. 담판을 거쳐 장춘지구를 감리교전도구로 하고 연변지구를 계속 장로교파의 전도구역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파는 자기의 세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협정도 불구하고 계속 연변지구에서 전도했다.

  1921년 12월 감리교의 두 개파는 장로교파와의 쟁탈전에서 우세를 차지하기 위하여 룡정에서 련합회의를 열고 감리교 ≪만주선교년차회≫를 조직했으며 교육위원회, 농촌사업연구위원회 등 기구를 내왔다. 련합회에서는 량주삼을 회장으로 선거하고 리인선, 현성원, 장주섭을 서기로 선거했다. 1925년후 맑스-레닌주의가 전파되고 반종교운동이 흥기됨에 따라 감리교회의 세력은 날따라 약해졌다. 그리하여 만주선교년차회의에서는 1931년을 ≪진흥년≫으로 삼고 룡정, 국자가 등 곳에 녀전도사를 파견함과 아울러 특별전도대를 조직하여 전도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침략할 때 그들은 사람마다 1명 내지 3명의 교도를 발전시키기로 규정하고 도처에서 편안히 살고 부업생산을 잘하여 생활수준을 높일 것을 고취했다. 그들은 또 교육사업을 춰세우고 청년회, 소년관을 꾸리고 생산조합을 뭇는 등 형식으로 그들의 세력을 춰세웠다. 하여 1933년에 이르러 연변지구에는 24개 교회에 1,644명 교도가 있었고 6개 교회학교에 506명 학생이 있게 되었다.

  연변지구에서 감리교파세력이 커진 것으로 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사이의 모순은 날따라 격화되였다. 1934년 10월 장로교파오 감리교파는 또 룡정에서 회의를 열었으나 치렬한 론쟁 끝에 실패를 보고 각 파가 각지에서 마음대로 전도하기로 결정했다. 그후 감리교회에서는 연변 각지에서 전도활동을 더욱 세차게 벌리였다. 하지만 순종교활동만 한탓으로 세력이 굼뜨게 늘어났다. 1939년 감리교회만주년차회는 북만, 동만 두곳으로 갈라졌다. 동만지구에는 대두천, 백초구, 도문, 훈춘, 동흥진, 룡정, 두도구, 명월구 등 9개 지역이 망라되였고 27개 교회에 3,201명 교도가 있었다. 1940년 5월 일본제국주의는 감리교회를 강박적으로 ≪만주조선기독교련맹≫에 합병시켰다.
  

3. 동아기독교
  
  동아기독교는 기독신교의 한 개 파벌로서 그 전신은 대한기독교이다. 1903년 카나다선교사 변위익이 조선 충청남도 강경에서 대한기독교를 세웠다. 1921년 일본제국주의는 대한기독교에서 ≪대한≫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억압했다. 그리하여 대한기독교는 하는 수 없이 이름을 ≪동아기독교≫라고 고치였다. 캘빈주의를 신봉하는 동아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예수기독은 교회의 창시인이고 립법자이며 세례와 성찬을 주요의식으로 한다. 그러나 의식은 상징적일뿐 ≪구령≫과 관계없다고 인정하며 신약성경을 유일한 경전으로 삼고 정치와 종교를 갈라보는 원칙을 주장했다.

  1906년 한태영 등 네사람이 연변 각지에서 전도하기 시작했고 1912년에 간도교회를 세웠다. 그때로부터 연길, 훈춘, 왕청 등 현에 교회학교를 세우고 반일 활동을 하였으며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반일인재를 양성해냈다. 1915년  전후 리동휘 등 사람들은 3국전도회의 명의로 왕청현 춘경사 수분대전자 (지금의 라자구)에 무관학교를 꾸리고 반일무장투쟁 골간을 양성해내다가 1917년에 강박에 의해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1922년에 와서는 연변지구에 11개 학교가 일어섰다. 동아기독교에서 교회학교를 꾸리여 반일사상을 선전하자 적지 않은 군중들이 거기에 끌려갔다. 그리고 선후하여 화룡현 명신교회, 왕청교회, 금당촌교회, 흥인교회 등도 뒤따라 일떠섰다.

  1923년전후 동아기독교는 교회가 일본제국주의의 억압밑에 날따라 용속화되고 또 다른 교파들이 모두 《교》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비추어 다른 교파들과의 다른 점을 강조하고저 이름을 《동아기독대》(양무리라는 뜻임) 라고 고치였다. 《9.18》 사변 이후 동아기독대가 반일기치를 내리게 되자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다. 1936년 동아기독대 총장 신혁균이 위만주국정부의 규정에 따라 일본령사관에 가 포교소를 세울데 대한 비준을 받고 전도활동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 세력은 좀처럼 일떠서지 못했다. 1940년에 이르러 동아기독대 교도는 1,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그해에 일본제국주의가 군대성격을 띠지 않았는가고 《동아기독대》를 의심하면서 제한한탓으로 하는수없이 이름을 《동아기독대》라고 다시 고치였다. 그해 5월 일본제국주의는 동아기독교를 억지로 《만주조선기독교련맹》에 합병시켰다.    


4. 성결교회

  성결교회 역시 기독신교의 한 개파이다. 1907년 미국동양선교회는 조선 서울에 《동양교회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전도했다. 1921년 9월에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을 성결교회라고 고치고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고 불렀다. 재생, 성결, 신유, 복림을 종교리론으로 하는 성결교회는 《복음을 전파》 하고 《령혼을 구원》 할 것을 주장했다.

  성결교는 조선인교도들이 이주해옴에 따라 연변에 들어왔다. 1924년 조선 충청남도 규암교회의 교도 박기래, 경주교회의 교도 박장환이 각기 룡정촌과 도문에 이주하여와서부터 전도활동이 시작되였다. 그후 룡정촌의 한치국이 성결교회에서 꾸리는 잡지 《활천》을 보고 그 영향을 받아 성결교회에 가담했다. 그들은 늘 한데 모였으며 또 목사를 파견해줄 것을 조선성결교회년차회에 요구했다. 하여 조선성결교회에서는 최성무목사를 관찰원으로 파견하여 룡정의 정황을 조사하게 했다. 1925년 3월 리원근 전도사가 룡정교회를 세운데 뒤이어 녀전도사 김경흡, 박로희가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해 5월 초가집 9칸을 사서 전도사가 들게했다. 그해 8월 기와집을 지어 교회당으로 하고 부흥전도회를 세우고 그 세력을 확장했다. 1926년에 이르러 교도가 19명으로 늘어났다. 1928년 녀전도사들이 룡정을 중심으로 하여 부근의 조선녀성들가운데서 전도활동을 벌리였다. 1930년 11월에 천보산분회가 세워졌고 이듬해 11월에 교회당을 지었다. 1932년 9월 김인석목사가 연길현에서 명월구 교회를 내왔고 1933년 2월에 김학선 목사가 조양천교회를 내왔다. 그해에 룡정에 또 교회 하나가 갈라져나왔는데 그 이듬해에 교도들이 200여명에 달했다. 1935년에 리정원목사가 연길교회를 내왔고 그 이듬해 10월에는 박문익목사가 도문교회를 내왔다.

  1937년4월1일 봉천일본총사관에서는 정식으로 전도활동을 할데 관한 성결교회의 신청을 비준했다. 성결교회는 봉천시의 봉천교회안에 선교본부를 앉히였으며 그후 얼마 안지나 동만교구와 북만교구를 내왔다. 동만교구에는 룡정, 도문, 명월구, 조양천, 목단강, 연길 등 교회가 설치돼있었고 리정원이 순회 목사로 있었으며 교도가 370명에 달했다. 1940년 성결교회는 강박에 의하여 《만주조선기독교련맹》에 합병되었다.


■ 1930년대전후 길림시
    조선인 신앙활동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는 정치, 경제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받아왔다.

  길림시 강밀봉에서 7~8리 상거해있는 사구릉옆에 판지라고 하는 마을이 있고 그 마을 뒤켠에 조선인들이 집결해 사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앞에는 구릉을 등지고 10여헥타르의 논이 펼쳐져있었으며 마을 한쪽옆에 3간짜리 초가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이 바로 이곳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길림시에서 처음으로 세운 기독교례배당 겸 신학교였다.

  길림시에서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초기부터 였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례배당이 없었던 형편에서 조선인들은 한인들이 꾸린 례배당에 다니였다.
  1921년 손정도라고 부르는 목사가 길림시에 왔다. 그는 반일민족독립지사였고 상해림시정부의 고위급 직원이였다. 그는 목사란 직무를 리용하여 반일민족독립운동을 하였다. 손정도 목사가 길림시 우마항에 있는 한인례배당에서 선교활동과 더불어 반일민족독립운동을 선전하자 그의 수하에는 조선인신자들이 몇십명 모여들었다. 그는 길림시에서 10여년간 목사로 있으면서 조선인들에게 반일민족사상을 고취하다가 1932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길림시에서 조선인기독교신자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1935년부터였다. 신자들이 존경하는 중심인물은 변성옥 목사였다. 변성옥목사는 조선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류학하여 이리노이스주의 기독교신학원에서 신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서울로 돌아온 변성옥은 경성협성신학교의 교수로 있었으며, 그 후 미국 사스시감리교 세계총회에 참가하여 목사직을 수여받았다.

  변목사는 서양사람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양정신으로 기독교를 개혁해야 한다는 자기의 신앙주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1935년 3월에 길림시에 왔다. 그해 봄. 그는 강밀봉 관지촌에다 자기 경비로 례배당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3간 초가집이다.

  변목사는 자기가 지은 례배당에서 조선인들에게 기독교 (감리교)교의를 전파하면서 신앙활동을 진행하다가 그 다음해인 1936년에 길림신학교를 꾸리고 교장으로 되었다.

  변성옥목사는 신학교와 교회활동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신학교 학생들과 신자들의 힘으로 구릉과 황무지 10여 헥타르를 개간하여 논과 밭을 만들었다. 벼농사가 잘되여 몇 년후에는 그 수입으로 길림시 7경로에 벽돌로 례배당을 새로 지었다.

  레배당과 신학교에서 신앙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1941년과 1942년간에 새로 지은 7경로례배당에만 해도 일요일마다 300여명의 신자가 례배하러 모여들었다.

  이에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이였다. 놈들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1943년 초에 변성옥목사와 그와 함께 목사직을 담임하고 있던 김의준을 외국특무란 감투를 씌워 체포하였다. 김의준목사는 옥중에서 일본 침략자들의 비행에 항거하여 단식투쟁을 벌렸다가 종당엔 비참하게 옥사하고 말았다.

  변목사와 김목사가 체포된 뒤 정기운 목사가 례배당과 신앙활동을 책임졌고 송애인이란 녀성이 전도사로 있었다. 그후 또 동영학교후원회 회장 표학화를 장로로 모시고 신도들의 기금으로 동영학교 앞마당에 새로 례배당을 지어놓고 이를 중앙례배당이라 하였다.

  당시 중앙례배당에는 목사로 최혁부, 김정배가 있었고 장로신분으로는 허영백, 성태영, 주정화 등이 있었으며 집사로는 황국태 등이 있었는데 신도가 가장 많을 때는 700여명에까지 달하였다.

  1946년 5월 28일, 국민당군대가 길림에 쳐들어와서 조선인소학교와 중앙례배당을 강점하고 국민당군대의 제 26병참으로 만들게 되자 목사들은 길림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국민당군이 길림시조선인을 수시로 수색하고 탄압하였지만 남아있는 신도들은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쳐 신앙활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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