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三自)와 가정교회(家庭敎會)의 동향

2007.05.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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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석     번호 : 102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5/10/28 (금) AM 11:07:49     조회 : 171  

■ 삼자(三自)와 가정교회(家庭敎會)의 동향      
작성일: 2005/10/20 19:47:14
작성자: 인보라
  

삼자(三自)와 가정교회(家庭敎會)의 동향
천 위(陳 漁)


1995∼1998의 중국 교회의 발전

’95년부터 ’98년까지 중국 교회의 주류인 가정교회의 상황과 발전은 어떠한가? 이 글에서는 이 시기의 역사배경과 가정교회의 발전특징을 간략히 기술하고, 양자간의 움직임과 발전의 관계를 간단히 정리해 보겠다.


1. 가정교회의 상황과 발전

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남부지역을 시찰한 뒤 중국 국가정책의 전체적인 목표는 ‘경제는 반좌익, 정치는 반우익(經濟反左, 政治反右)’, ‘경제는 풀고, 정치는 조인다(經濟要放手, 政治要管住)’로 조정되었다. 이에 92년도 제5회 기독교전국회의 이후 기독교계에서 적극적으로 정부의 ‘종교사무관리에 대한 법적 강화’정책에 호응하였다.

91년 2월 5일 반포된 6호 문건과, 같은 해 5월 6일 국무원 종교사무국과 민정국에서 공동으로 ‘종교사회단체 등록 관리방법에 대한 공고’를 반포하면서 가정교회의 전면적인 등록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전국 각지의 종교관리법규와 임시규정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94년 국무원에서 반포한 144호, 145호 시행령은 중국 내의 외국 종교인사 및 중국의 모든 종교인사와 그 활동을 분류 관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소위 법적인 관리란 중국 교회 발전과 종교자유를  새장 안에서 제한한다는 것이다. 등록하지 않고, 삼자에 가입하지 않은 가정교회는 기독교의 기치와 구호 아래 불법, 위법의 범죄활동으로, 사교조직과 반동 불법조직으로 간주되었다.

95년 말 전국종교국장회의에서 장쩌민(江澤民)은 종교사무는 정치를 중요시할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 93년 장쩌민이 제시하였던 아래 세 가지 문구는 장기적인 종교정책으로 되었다.

첫째, 당의 종교정책을 전면적이고 정확하게 실행한다.

둘째, 종교사무관리를 법적으로 강화한다.

셋째, 종교가 사회주의에 적응하도록 적극 인도한다.

이로써 95년 말부터 종교에 대한 핍박은 다시 한번 거세게 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省)을 넘고 현(縣)을 넘는 가정교회의 복음 전도의 물결은 결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전면적인 핍박은 가정교회로 하여금 하나로 통일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깨닫는 촉진제의 역할을 하였다. ‘불법, 위법, 반동’이라는 명목의 고발은 가정교회로 ‘성경원칙에 합치된 신앙입장’을 선언하게 하였고 아울러 가정교회와 사교(邪敎)의 분별 및 영적 전쟁의 절박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2. 가정교회 발전의 특색

(1)  가정교회 일치운동

95년부터 화중(華中)지역의 가정교회는 현저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정교회 일치운동으로 발전한 이러한 움직임은, 삼자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삼자에 가입함으로써’ 조직을 형성하고 형식에 있어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치로 나아갔다. 가정교회는 진정한 일치의 기초는 성경의 초석 위에서, 서로 마음을 합한 기도와, 거짓 없는 성실한 사귐과, 넓은 아량으로서 세울 수 있음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일치운동은 조직상의 일치가 아니라 영적인 일치를 말한다.

교회 일치운동은 대가를 치르는 행동이었다. 화중 지역의 가정교회 대표들이 사방 각지에서 모여 일치를 위한 기도모임을 가질 때마다, 체포,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더욱 불행한 일은 중국의 종교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가정교회 집회가 불법 종교활동으로  간주되었고, 그 중 비교적 조직체계를 갖춘 교회는 ‘사교(邪敎)조직’으로 규정되어 전국적으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평소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많은 가정교회 신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국내외의 크리스찬 형제들이 가정교회를 ‘사교’로 오해하는 결과까지 낳았다.

(2) 중국 가정교회 사상 최초 공포된 신앙고백

가정교회는 핍박의 고난은 감내할 수 있으나, 순수하고 올바른 그들의 신앙이 오인되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이에 신앙의  순수성을 밝히고, 가정교회가 결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교가 아니며 왜 삼자에 가입하지 않으며, 왜 등록을 하지 않는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수 차례 기도모임을 거친 후에 98년 11월 26일 공동으로 「중국 가정교회 신앙고백」 및 「중국 가정교회의 정부 종교정책 및 삼자에 대한 태도」를 공동으로 발표했다. 가정교회의 정교분리원칙(政敎分離原則)을 밝히고, 그들은 어떠한 정치적인 목적도 갖지 않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사명을 실천하는 데 최우선을  둔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가정교회 대표들은 외부적인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기도하고 논의하는 동시에  참으로 중요한 내부적 문제인 이단과 사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일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사교집단으로 인해 때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든 가정교회가 그와 같다고 오해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 가정교회가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 가운데, 신자훈련과 목회사역이 복음 전파의 속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 이단 침입의 기회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몇몇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함께 교제하며 가정교회 신앙고백의 초고를 작성하여 자신들이 믿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더욱 공고한 신앙의 기초를 다지며, 중국 교회내의 영적 일치와, 선교사역의 일치를 위해 화중 지역 외에 다른 지역에까지 이런 이념을 확대시켜 네트웍을 형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 신앙고백은 실명(實名)을 사용하여 서명하였고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하였다. 그들은 이 문서가 일치운동의 초석이 되어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이 내용에 동의한다면 받아들여, 가정교회가 더욱 나은 영적단체로 발전하며, 나아가 연합하여 사역훈련을 하며 설교자를 교류하고 자원을 공유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3)  영적전쟁의 기도운동

세상에 속한 어떤 법률도 하나님 자녀들의 기도를 간섭할 수 없다. 교회사에 있어서 모든 교회의 부흥 운동은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교회 부흥과 중국에서 복음이 널리 퍼지도록 기도하는 일은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일로서 전세계 중국 기독인의 기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 가정교회는 영적 자유를 누리는 교회가 되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며, 전세계 중국인 신자들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21세기를 맞아 앞서 가는 세계 선교를 위한 그리스도의 정병(精兵)이다. 그들은 이미 영적인 눈으로 ‘중국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같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된 가정교회 일치운동은 지금 여전히 진행 중이며 이는 95년에서 98년 사이에 중국 가정교회 사상 가장 중요한 발전으로 볼 수 있다.


3. 삼자교회 발전의 특색

95년부터 98년 사이에 삼자교회는 당의 종교정책 지도하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를 모아 교회등록사업을 펼쳤다. 실로 적지 않은 가정교회들이 계속되는 벌금, 수색, 노동교화의 압력을 견딜 수 없어서 타협적으로 억지로 등록하여 교회 내에서 집회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 받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정교회는 아직 복음전파의 자유와 교회의 자주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삼자교회 내부에서는 ‘애국, 애교를 잘 실천하자’는 원칙으로 호소하였고, 특히 교회를 잘 운영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신학원에서의 인재양성과 농촌사역 훈련반에 있어 삼자교회는 모두 성과를 거두었다. 96년 한원자오(韓文藻)가 제출한 네 가지 필수와 열 가지 임무사항에서 기독교는 정신문명 건설에 관심을 가져야하며, 사회의 윤리 도덕방면에 공헌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1)  종교외교의 통일전술 책략  

95년에서 98년 사이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삼자의 국제접촉의 종교 외교노선이다. 97년 중공(中共) 15대 인민대회 후, 장쩌민 정권이 확고해지자 ‘대국외교와 종교통일전술’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해외교류를 확대하여 종교박해의 자아상을 탈색시켰다. 외국 종교단체들의 중국 방문 접대가 2백여 차례 되고, 종교단체 방문단을 백여 차례 파견하여 종교의 자유가 개선된 이미지를 보이려고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교’라는 명목으로 가정교회를 규정하였고, ‘진리를 견지하며, 이단을 저지한다’고 내세워 국제적인 여론을 혼란시켰다. 중국은 ‘종교의 자유’를 대폭 개선하였고, 중국이 타도하는 것은 사교이지 결코 종교박해가 아님을 강조하였다.

97년 중국 국무원이 반포한 중국 인권백서에서 종교의 자유를 공언하고, 중국 내에서 삼자교회만이 합법적이며, 이미 성공적으로 토착화 되었음을 주장하였다. 종교 외교의 실제 움직임은 종교사무국장 예샤오원(葉小文) 등의 삼자교회 목회자와 신학원 교수 및 해외 종교단체나 학계,  교회 상호 간의 활동으로 이 기간 중에 현저한 성장을 보였다. 삼자의 신학원은 또한 홍콩, 대만, 외국의 유명 목사와 신학자를 초청하여 그 앞에서 설교하고 삼자교회를 참관시키고, 복음주의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장쩌민은 심지어 종교계 인사인 꺼페이리(葛培里; 빌리 그래함 목사) 등과 접견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에게 미국 종교대표단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응답하였다. 주룽지(朱鎔基)도 공개적으로 종교는 정신문명에 일정한 공헌을 한다고 밝혔다. 과거에 종교는 미신적인 행위라고 하던 것에 비교하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2)  성경과 종교서적의 인쇄  

성경 인쇄면에서 보면, 난징(南京) 애덕(愛德)기금회에서 97년까지 모두 일 천여 만 권의 성경을 인쇄하였다. 98년 상하이(上海) 양회(兩會) 애덕기금(愛基)인쇄소도 준공되어, 양회에서는 대외적으로 중국 기독교인들의 성경은 이미 충분하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여전히 부족하며 특히 외진 벽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3)  삼자의 대외적인 통일전술 공세

삼자의 통일전술 책략은 중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하던 많은 해외의 교회와 삼자가 합작하도록 이끌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해외의 교회가 가정교회와 연결하고자 하여도 객관적인 환경상 허락되지 않는다.

중국은 기독교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는가?  종교정책은 느슨해졌는가? 97년 12월 한원자오는 가정교회와 내왕하는‘양다리 정책’과 ‘비밀 침투’ 활동을 들어 미국 남침례회 해외선교부와 관계를 종결한다고 선언하였다. 중국은 종교자유가 있는가? 또는 외국 교회가 중국에서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위의 사례에서 일반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하겠다. 95년에서 98년 사이 중국 정부측에서 전면적으로 ‘관리조례와 등기법’을 시행하고, 삼자교회는 엄연히 정통을 자처하며, 해외교류를 확대하고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가정교회는 신앙고백을 선포하여 정부의 명을 요청하고 「정부 종교정책 및 삼자에 대한 태도」를 정식으로 제출하였으니 중국 교회사상 중대한 사건인 셈이다.

가정교회는 핍박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합법화를 선언하고 있다. 가정교회의 어느 대표는 “신앙고백을 함으로써 더욱 견디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을 수치스럽게 하는 일이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신은 그들이 복음을 위하여 지불하는 대가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는가? 고난이 있는 그 곳에 자유케 하고 평안케 하는 복음이 있나니!

출처/『中國與福音』제28기
번역/빈미정·자원봉사자
중국을 주께로 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