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성경 번역사

2007.05.15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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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석     번호 : 104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5/12/05 (월) PM 11:49:23     조회 : 139  

■ 중국어성경 번역사    

작성일: 2005/11/26 19:43:37
작성자: 인보라
  

개신교 초대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의 성경번역을 중심으로 본 중국어성경 번역의 역사를 되새겨 본다
모리슨문서번역회 최순환목사

1. 서론

중국 교회는 개방 이후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였고 이제 ‘세계선교는 중국에 달렸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옴을 전문가들이 예견하고, 비전문가들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1807년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25세에 개신교 초대 선교사로 와서 심한 핍박 속에서도 52세로 1834년 마카오에서 뼈를 묻기까지 그가 일생을 바쳐 헌신한 사역이 중국어성경 번역사역이었다.

그의 짧은 생애를 불같이 사르면서 한 역경(譯經)사역이 든든한 기초가 되어 중국의 13억을 도전하고 해외 5천만의 화교에게 도전하리라고는 그도 몰랐을 것이다. 이는 주님께서 섭리하신 역사라고 확신한다.

이제 전 세계는 중국을 향하고 있으며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중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중국어성경에 대한 조명과 애착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중국 개신교 선교 200년을 2년 앞둔 시점에서 초대선교사인 모리슨의 중국어성경 번역의 사역을 살펴봄으로써 중국선교사역에 관심을 가진 제3세계 성도들과 선교사들이 중국어성경에 대한 이해와 함께 관심과 애착을 가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 중국어 성경의 역사

(1) 경교에 의한 성경의 번역
중국어 성경이 언제부터 중국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는지는 지금까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일찍이 7세기 전반기(당나라 시대)에 성경은 이미 서구로부터 중국에 유입되고 중국어로 번역되었다. 1625년(명나라 천계연간)에 이르러 섬서(陝西),서안(西安)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泰景敎流行中國碑』는 바로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고 성경이 중역된 최고의 증거이다.

『大泰景敎流行中國碑』의 비문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경교는 대진의 주교 알로팽(Alopen)이 그의 교사를 대동하고 635년(唐 貞觀 9年)에 장안에 온 이후 전입되었다. 당시  그들은 중국에 온 귀빈 대우를 받았으며 아울러 「飜經書殿(Imperial Library)」에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비문에는 또 구약성경, 신약성경에 대한 내용과 당시에 경교도들이 일찍이 전체 혹은 일부분의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던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경교의 번역본 성경에 대해서는 서구인의 여행기에서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2) 천주교 성경 번역본

비교적 신빙성 있는 역경사(譯經史)는 로마 천주교 사제가 중국에 온 13세기부터 시작된다. 그 때 개신교(기독교)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13세기에서 청조에 이르기까지의 중국어성경 번역본은 모두 천주교 성직자의 사역과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13세기 말(1294년) 천주교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vino, 1247-1328)이 중국에서 전도할 수 있다는 허가를 얻었다. 우리는 그의 편지 가운데서 그가 일찍이 시편과 신약성경을 타타르(유목민족)어로 번역해 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것이 천주교에서 번역한 최고의 중국어성경임을 알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이 번역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16세기 마태오 릿치는 일찍이 1584년에 십계명의 내용을 밝힌 한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 가운데서 적지 않은 성경구절을 인용했는데 그 구절이 어떤 번역본을 사용한 것인지를 확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로마 천주교에서 아직 성경을 광범위하고 자유스럽게 민간인에게 전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당시의 천주교 사제들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쓸 수가 없었으며 성경의 중요한 부분이나 기사의 소개에 불과한 것도 있다.

파리 외방선교회 사제 빠제(J.Basset)가 대략 1700년에야 비로소 라틴어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그 번역은 4복음서와 바울서신을 포함하는데 현재 런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최초의 천주교 중국어성경으로 출판되지는 않았다.

18세기 말 예수회의 Louis De Poirot도 역시 구약과 신약의 대부분을 라틴어 통용본 성경으로부터 중국어로 번역해 내었는데 두 번째 천주교 중국어성경이나 출판되지 않았으며 원고는 1949년까지 북경 북당도서관에 보관되었다.

1945년 프란치스코회의 뇌영명(Gabriel, M. Allegra, O.F.M) 신부가 10여 명의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협력으로 16년 만에 성경원문을 서문과 주석 및 설명을 덧붙여 성경전서를 11권으로 번역해 내었으며 1950년에 다시 수정하여 합정본 성경을 출판하였다.

(3)개신교 초대선교사 모리슨의 역경(譯經)사역

로버트 모리슨의 재화 선교사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역경사업이었다. 이 역경사업의 결과물이 『신천성서(神天聖書)』였던 것이다.

모리슨은 영국에서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인 1805년에 우연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四史攸編耶蘇基利斯督福音之會編, Evangelia Quatuor Sinice)』이라는 표제의 문서를 발견하였다. 그는 그의 중국어 교사였던 용삼덕(容三德, Yong Sam-tak)과 함께 이 문서를 필사하였다. 이는 모리슨이 성경을 중국어로 역출함에 있어서 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은 17세기에 카톨릭계의 파리외국선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nges de Paris)소속의 선교사 바제트(J. Basset)에 의하여 역출되어서 사용되던 2절판의 문서였다. 그런데 이 문서가 1737년이나 1738년에 당시 동인도회사의 지배인이던 호즈선 2세(Mr. Hodgson Jr)의 명령에 의하여 광동에서 개작되었고, 1739년에 그가 영국으로 갖고 돌아와 당시 영국학사원의 회장이던 한스 슬로안 경(Sir Hans Sloane)애개 증정하였다. 또다시 슬로안 경이 이 문서를 대영박물관에 유증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슬로안 초본(Sloane Manuscript)이라고 칭해졌고, 일반적으로는 The Manuscript Harmony라고 칭해졌다. 『사사유편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의 내용은 「대조사복음서」(The Harmony of the Gospels), 「사도행전(The Acts)」 및 「사도 바울의 서신(St. Paul's Epistles)」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모리슨의 필사본은 홍콩대학에 현존하고 있고, 1938년에 한 천주교 인사에 의하여 또다시 필사된 것은 홍콩 천주교 사고성경학회(思高聖經學會) 도서관에 현존하고 있다.

모리슨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기본 방침을 세웠다.

나는 번역에 즈음하여 충실(fidelity), 명쾌(perspicuity), 간결(simplicity)을 존중하였다. 나는 드물게 사용되는 고전적인 언어를 멀리하고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또 중국의 철학과 종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피하였다.

나는 이해되지 않는 언어보다도 오히려 평범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곤란한 언어에 마주쳤을 경우에는 경건하게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들었다. ..... 나는 이 번역의 수행에 즈음하여 오랫동안 계속 인내하면서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조용하고도 선입관에 사로잡히지 않는 판단 속에서 생활을 보내었다.

또 흥분, 기분을 버리고 예로부터 좋은 것이라는 것도 배제하였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경건성 속에서 정확한 사고방식을 채용해 왔다. 이들 태도야말로 성경과 kx은 서적의 번역에 즈음하여 취해야 할 자세라고 생각된다.

모리슨은 성경 원본(The Original Scriptures), 영국정부본(The English Pubic Version) 몬타누스본(Montanus's Version), 유포본(The Vulgate), 불어본(The French), 칠십인역(The Septuagint Translation), 칠십인역의 톰슨역(Thompson's Translation of the Septuagint) 등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임무에 충실하기 위하여 모리슨은 『사사유독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 중국에 있던 카톨릭의 여러 저작, 『중영사서(中英辭書)의 원고 등을 참고하고, 중국인 중국어 선생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모리슨이 최초로 번역에 착수한 것은 「사도행전」이었다. 모리슨은 이 「사도행전」의 번역 원고를 중국에 갖고 와서 그것을 몇 차례나 통독하였고, 또한 그리스의 원전과 대조하여 또다시 고쳐 쓰는 방식으로 축어역(逐語譯)하여 그가 만족할 만한 단계에 도달하자 전역을 완료하였다.

모리슨은 「사도행전」의 번역?출판에 이어서 「누가복음」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누구가 기록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모리슨이 양서의 문제의 유사성과 그에 따른 번역의 평이성이라는 점에서 「사도행전」에 이어 「누가복음」을 택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수긍되는 바이다. 1811년 9월 모리슨은 「누가복음」을 번역?출판하여 본국에 보내었다. 계속해서 그 해 안에 「마태복음」?「마가복음」 및 「요한복음」의 번역을 완료하여 출판하였고, 1812년에는 바울 서신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이리하여 모리슨은 중국 도착 후 6년만인 1813년 9월에 진노의(陳老宜)?이십공(李十公) 등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서 『신약전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광주에서 비밀리에 2천부를 목판으로 인쇄하였다. 이 『신약전서』의 조판과 인쇄는 대부분 양아발에 의하여 행해졌던 것이다.

모리슨이 『사사유독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출판한 신약전서는 다음의 14서였다.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한편 모리슨이 직접 번역한 것은 다음의 13서였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모리슨이 직접 번역한 부분은 그 페이지 수로 계산하면 실로 신약전서 전체의 2/3에 달한다.

모리슨은 1814년 1월 11일부로 영국성서협의회의 부서기(The Assistant Secretary of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에게 지금까지 번역과 출판을 원조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들 번역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장은 확실치 않아서 더욱 좋은 번역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외국인에 의하여 행해진 번역에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주해를 붙이지 않게 되어 있는 성경에서는 특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알고 있는 분들께서는 저의 성의와 제가 전력을 다하였다는 것을 믿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만 기도로써 하나님의 축복에 맡기는 것입니다.

복음서 및 마지막 부분의 서간과 계시록은 제 자신의 번역입니다. 중간 부분은 그 노작이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미지의 사람의 번역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생각으로 그 어떤 부분을 바꾸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부가하였습니다. 저는 이 미지의 선배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이 편지로써 위대한 사업인 성경의 중국어 번역과 출판에 즈음하여 모리슨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을 갖고서 선인의 노력에 대해 감사를 표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작업이 불완전한 것이었던가를 반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리슨의 한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1837년 최초의 일본어 성경의 번역자가 되는 칼 구츨라프는 그의 명저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1831-1833)의 서문 속에서 ‘이것(신약전서의 중국어 번역의 완료)은 중국을 위하여 행해진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라고 하며 신약전서의 중국어 번역의 완료를 칭송하였다. 이 말은 당시 유럽과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치된 찬사였던 것이다.

1813년 7월 7일 밀느가 광주에 도착한 이후 모리슨은 밀느의 협력 하에 1814년부터 『구약전서』를 번역하였다. 그러나 밀느가 정조(淸朝) 정부 당국과 마카오의 포루투갈인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말라카로 가서 중국인 선교 기구를 설립하게 되었다. 1815년 4월 17일 모리슨은 양아발을 비롯한 다수의 인쇄 노동자를 고용해서 말라카에 보내어 밀느의 성경 인쇄를 돕게 하였던 것이다.

1817년 세모에 밀느 부처가 모리슨을 방문하여 구약성경 번역을 분담함으로써 모리슨의 부담은 경감되었다. 런던선교회에 대한 보고에 의하면 모리슨이 번역한 구약성경은 다음의 26서였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룻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아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에 대해서 밀느는 구약의 다음 13서를 번역하였는데 물론 모리슨의 심의?수정을 거친 것이었다.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모리슨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출판하는 과정에서 외부로부터 중국 관헌의 감시와 방해에 줄곧 고통을 당하였다. 때로 관헌의 너무나도 심한 눈초리를 견디기 어려워서 모리슨의 조수들은 그들이 취급하고 있던 성경의 원고를 찢고, 제작한 목판을 불태워버리는 일까지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모리슨은 광동과 마카오를 떠나 말라카로 옮기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런던선교회에의 보고서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최후까지 인내심을 갖고서 광동과 마카오 지구를 떠나지 않고 마침내 신?구약성경 전권의 번역을 완료하였던 것이다. 번역이 완료된 날 모리슨은 하나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런던의 선교회 본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보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의하여 신?구약전서 전권의 중국어 번역을 오늘 종료하였습니다. …킹 제임스(King James)판의 번역자는 수적으로 54인이었고, 그들의 모국어로 그들의 모국에서 그들 군주의 후원 하에 번역하였습니다. 우리의 판은 두 사람 혹은 기껏해야 세 사람(『사사유독야소기리사독복음지회편』의 저자 포함)의 작업인데, 먼 나라에서 최근에 습득한 외국어 - 세계에서 가장 어렵고 유럽에서는 가장 덜 계발된 언어 중의 하나 - 로 수행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리슨과 밀느가 성경의 중국어 번역을 완료하자 그들의 이 위대한 사업에 대하여 각계로부터 갈채와 축하가 쏟아졌다. 런던선교회의 서기 버더 목사(Rev. G. Burder, D.D.)는 ‘우리는 주님께서 이 위대한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사용하신 공로자들을 잊어서는 안 되고, 잊지 않을 것이며, 잊지 않는다’ 라는 편지를 보내었다. 영국성서협회 위원회는 유사한 내용의 감사와 축하의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번역본의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하여 추가로 1,000파운드를 지급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미국성서협회 위원회는 그 경의와 찬동의 표시로 화려하게 장정된 최고의 8절판 성경을 모리슨에게 선물하였고, 미국공리회는 최대한도로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와 축하의 편지를 보내었다. 이밖에 스톤턴과 다수의 저명한 학자들도 이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전 기독교 세계가 느낀 관심의 강도를 증명하기나 하듯 이 유사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던 것이다.

1823년 모리슨은 그가 번역한 성경을 『신천성서』(Morrison and Milne's version of the Holy Scriptures)라고 명명하여 21책의 선장본(線裝本)으로서 마카오에서 출판하였다. 이리하여 성경이 출판된 지 1600여 년 후에 비로소 중국에 완전히 소개되었다.

그 이후 중국어성경은 모리슨성경을 바탕으로 여러 선교사들과 중국인들에 의해서 개정이 되었으며, 현재 화합본(和合本) 성경은 중국과 화교세계에 공통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3. 중국인과 성경

중국교회가 환란에서 부흥의 시기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의 능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문을 닫고 지하로 숨는 핍박 속에서도 성경은 암송되어졌고, 스스로 써서 보존하였으며, 선교사들의 끊임없는 운반과 인쇄가 큰 역할을 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어성경은 중국인들에게 여전히 어려운 책으로 남아있다. 한자 자체의 어려움으로 인해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인민들이 많은 까닭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화합본(和合本)은 1919년에 개정 완성된 것으로 문어체가 많이 남아있고 인명, 지명 등의 전문용어는 일반중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자가 많다. 중국인에게도 한문은 여전히 어려운 글 인 것이다. 대륙에서 쓰고 있는 간체자도 선교의 또 하나의 벽이 된 것이다. 대만에서는 일찍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대만 자체의 중국어 발음표기(주음부호)를 성경전체에 달아서 극복하고 있다. 문제는 56개의 민족이 함께 존재하는 대륙이 더 심각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어 섭득에 어려움을 느낀 외국인선교사들이 먼저 노력했지만 부분적인 성과(신약)만 거두었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부담을 가지고 전문적인 연구를 거쳐 신?구약 성경을 국제적인 발음표기인 병음을 달아 수 년의 작업 끝에 2003년 신?구약전서를 발간하였다. 이 작업은 실로 중국교회의 새로운 성경의 역사가 되리라 생각한다.

국제적인 발음표기인 병음(PIN YIN)은 중국의 소학교에서 배우게 되므로 앞으로 일반 중국인들이 쉽게 성경을 접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는 1823년 모리슨의 성경에서 2003년 병음성경까지 중국어성경은 완벽한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4. 결론

이제 중국에서의 개신교 선교역사는 200년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조선말로 된 성경이 만들어져서 선교사들이 입국과 동시에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는 동기가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선교사가 그 어려운 환경과 싸우면서 번역원고가 찢겨지는 핍박 속에서 현지에서 성경을 번역하여 완성하였기에 얼마나 험난했던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초대 선교사 모리슨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중국선교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후에 누군가가 어려움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가 번역했던 성경이 중국에서의 조선어 성경 번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는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대선배이며 은인이다. 2007년이면 중국개신교 선교 200년이 된다. 이 기회에 그의 끝없는 영정과 인내와 사명감을  다시금 되새기며 그 마음을 후배 선교사들이 닮는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