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안대욱 교수님

2007.05.15 14:11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반석     번호 : 105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6/09/28 (목) AM 00:10:12     조회 : 73  

■ 보고 싶은 안대욱 교수님


작성일: 2006/09/26 22:55:14
작성자: 북경사랑


사랑하는 안대욱 선교사님이 우리들을 떠나신 지 벌써 1주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리움이 남습니다.

저희들은 지난 한 해 동안 계속 그분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우리들은 <황혼이 질 때 주님을 경배합니다>, <땅 끝에서>, <내게 있는 향유 옥합>, <내 주를 가까이>, <주를 경배하라> 등을 불렀습니다. 이러한 찬양을 부를 때마다 곧 바로 안대욱 선교사님이 생각났고, 항상 그분이 우리와 함께 찬양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마치 그분의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책상과 침실에는 단정하게 정돈된 안대욱 선교사님의 사진이 있습니다. 여러 차례의 사역과 공부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너무나 피곤해서 멈추고 싶었지만 안대욱 선교사님 사역의 모범이 생각났기 때문에 계속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교회의 일들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안대욱 선교사님께서 하셨던 일 처리 원칙이 생각났기 때문에 방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평온할 때도 선교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마다 열정적인 사랑이 일어났고, 그리움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소천 1주년이 되어서 우리들은 사랑하는 안대욱 선교사님을 회고하며 기념예배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 서로를 위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립니다.

이번 주는 우리 기독교회에 있어서도 고난주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육신의 몸으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안대욱 선교사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중국에 오셨고, 중국인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또 중국 교회의 신학 사역을 위하여 그 분은 중국 대륙에 오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신 지 삼일 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권세를 주셨으며, 하늘에서 지금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안대욱 선교사님은 주님 곁으로 돌아가셨고, 지금은 주의 품안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그분도 영광을 얻었고, 앞으로 주 예수와 함께 중국 교회와 저희들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슬픔도 있지만 기쁨이 더 큽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눈물을 흘립니다. 고통과 상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그리움과 감사함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안대욱 선교사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좇았고, 그분은 자기의 사명을 완성했습니다.

14년 전(1990년 1월 19일) 그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인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대륙에 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사역을 시작했고, 00신학원을 시작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또한 많은 열매를 맺었고, 오늘 이 곳에 앉아 계시는 각 사람들과 또 이러한 기념예배에 참가하지 못한 형제자매 모두는 그분이 맺은 풍성한 열매입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 우리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며, 오늘 우리가 계산이나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14년 전, 중국에 있는 수천만의 그리스도인 중, 아주 적은 사람들이 “개혁주의신학”이라는 말을 들었고, 아주 적은 사람들이 “칼빈”에 대하여 알고 있었으며, 아주 적은 사람들이 가장 성경에 부합한 신학사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비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학을 알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자세한 내용을 몰랐고, 신학을 하나의 지식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필요 없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은 모두 ‘신학’에 대해 반대하였었으며, 오늘날까지 이러한 현상은 여전히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환경 중에서도, 안대욱 선교사님은 중국에서 신학 교육을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이었는가 우리들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역은 이미 중국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중국 대륙의 최북방, 최남방, 동방에서 서방까지, 또 중원지대에서, 양쯔강 유역에서, 황하유역, 농촌, 도시, 삼자교회든 아니면 가정교회든 처처에 그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제자들은 결코 안대욱 선교사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향 아래서 성경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두 그분의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정식으로 CDTS를 졸업한 학생이라면 모두 그 분과 3년 동안 함께 지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더 긴 시간 동안 그분과 함께 지냈을 것이고, 졸업 후엔 안대욱 선교사님과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모두 다 정확한 것이었고, 신학은 정통이었고,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었으며, 사상은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어떻든 간에 그의 인격은 우리의 생명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사람들과 오늘날의 우리들을 새롭게 가르치는데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중에서 바울의 빈틈없는 생활과 정통적인 사상을 알 수 있습니다. 안대욱 선교사님께 배운 3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분의 바울을 보았습니다. 나는 유명한 사람들의 CD를 본 적이 있고, 유명인들의 테이프를 들어 본 적이 있고, 또 유명한 사역자들을 만난 적이 있지만,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해야 할 사역들의 방향성과 생활의 목표를 제시해 준 것은 단지 안대욱 선교사님뿐이었습니다.

안대욱 선교사님은 우리를 향한 교육, 관심, 보살핌, 섬김은 우리가 전부 목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 교회를 위해, 중국 신학교를 위해, 우리들이 도울 수 있는 신앙이 깊지 않은 제자들을 위해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을 받았고, 얼마나 피곤하였는지 모르고, 또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추측은 가능합니다.

우리가 낙담할 때 그는 격려했고, 우리가 어려울 때 그는 가르쳐 주었고, 우리가 죄 지을 때 그는 잘못을 고쳐주었고, 우리가 겁이 날 때 그는 위로하셨습니다. 학교가 위치했던 지역 어디서든 그러셨습니다. S라는 지역에 학교가 있었는데, 그 때 우리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W라는 곳으로 이사했습니다. W에서 몇몇 학생들이 다시 S로 이사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의견들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바로 학생들과 상의해서 결론을 얻었는데, S로 돌아가면 모두 다 두려워할 것 같으니 3학년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게 하였고, 2학년은 Y집으로 이사하게 하였습니다. 조금도 번거로움을 겁내거나 귀찮아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매번 우리가 긴장할 때 그는 곧 바로 오셔서 위로하시고 우리가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떠한 필요가 있을 때엔 그를 찾으면 그에게서 얻을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고, 그 분의 필요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우리의 은사가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가! 그는 계속 우리를 위해 헌신했고, 오히려 우리가 그를 위해서 섬길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우리는 그분을 향해 감사하다는 표시를 하기 전에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비록 안대욱 선교사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의 가르침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방향이 있게 하였고, 그의 격려는 우리들의 힘이 있게 하였고, 그의 위로는 우리들의 존엄이 있게 하였고 그의 고침은 우리들의 가능성이 있게 하였습니다.

선교사님! 사랑하는 선교사님, 우리는 당신이 너무나 그리워요! 문화 배경의 차이 때문에 또 그는 다른 이상에 대한 생각과 집착 때문에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중국인들에게 완전하게 이해되지는 못했는데 이것도 그에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송구스러운 일인지! 그분에게는 원망, 낙심, 후퇴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한번은 우리에게 알려주시길 “중국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 주어도 나는 중국에 왔을 것이고, 환영해 주지 않아도 나는 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이 나를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고 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많은 문제에 부딪쳐도 그분은 낙관적이었고, 믿음이 있었으며, 또한 계속 우리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의 체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이 놀랄만한 끈기가 있으셨습니다. 매번 진행된 강의는 모두 강한 어조로서 살아 있고 힘이 있었습니다. 한 차례의 강의는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학생들이 휴식하자고 말하지 않으면 그는 강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용모는 그렇게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초월적인 매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빨려들었고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을 보든지 간에 평등한 눈길로 보았고 동일한 관심이 있었는데 그의 생명 자체가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길은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줄곧 달음질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또 그가 얼마나 피곤하든지, 얼마나 바쁘든지 상관없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선교사님과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하면 한 번도 싫다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선교사님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분에게 있었고, 사도 바울의 사상이 그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감춰져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선교사님,

자상한 아버지처럼 사랑해 주신 우리의 선교사님

정말로 친한 친구와 같았던 선교사님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시니 우리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제 일 년이 흘렀습니다.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하나님! 이기적인 우리들의 마음을 용서하여 주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충성된 종을....

왜냐하면 당신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은사를....

왜냐하면 당신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안대욱 선교사님을, 그가 피곤했던 것을...

정말로 피곤했던 것을....

그래서 당신은 선교사님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의 사명이 끝났음을....

그래서 그를 불러 천국에서 안식을 취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주신 동산에서 그는 이미 땀을 흘리며 씨를 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노래를 품에 안고 당신 곁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슬퍼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너무나 그와 교제하고 싶기 때문에,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지금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연약하구나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쯤 모두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선교사님의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로 믿습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들의 사역 가운데서 말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며 부탁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또 제자들이 그의 사명을 완성하게 하셨습니다.

안대욱 선교사님은 늦기 전에 우리에게 분부하고 떠나셨습니다. 만약에 가시기 전에 우리에게 확실하게 분부한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고 난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선교사님이 오늘 우리를 보고 계실지 잘 모르겠고, 또 그가 평상시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는 틀림없이 우리들이 충성되게 자기의 사명, 사역자로, 충성되게 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 일을 감당하길 바랄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서는 목회를 잘해 가는 것이고, 학생이 되어서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고, 신자가 되어서는 완전하게 주님께 맡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사랑해야 되고, 서로 감싸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에 대한 가장 좋은 사랑의 표현이고 진정으로 그를 기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 분의 열정적인 교수님의 학생: 친00

2003. 4. 13. 북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