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선교의 블랙홀

2007.05.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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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11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1/24 (목) PM 11:45:28  (수정 2002/05/21 (화) PM 02:05:06)    조회 : 783  

■ 중국선교의 블랙홀    


                                                                  인보라

중국선교에는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가 휩싸여 들어가면 나올 수 없거나 힘든 불렉홀이 있다. 최근에 중국선교사들이 이러한 불렉홀에 빠져 고통당하는 것을 자주 접하면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몇일 전 잘 아는 선교사가 안식년 차 귀국하였다가 일이 있어 중국에 가려고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하고 당황하는 것을 보면서 참담한 마음이 되었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추방을 당하면 다시 들어가기 어렵다.

필자가 인터뷰를 해 본 여러 명의 추방당한 선교사들 가운데 입국금지 기간이 지난 후 다시 중국에 가려고 하였을 때 비자를 거부당한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선교사는 입국금지 3년을 받았는데 그 기간이 끝난 후 대련을 통해 들어가려고 배를 타고 가서 비자를 받으려 했는데 대사관에서 받아오라고 하여 다시 돌아와 대사관과 홍콩 등에서 비자를 받아보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선을 다 동원하여 알아보았지만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빠지기 쉬운 불렉홀을 미리 찾아보고 조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불렉홀에 빠지는 것은 불렉홀의 존재를 몰라서 일수도 있고, 알고도 불렉홀을 우습게 여겨서 그럴 수도 있으며, 설마하는 마음에서 당하는 수도 있다.

선교사 한 명을 육성하여 파송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일인가? 그리고 선교 프로젝트를 위해 드려진 선교비가 의미도 없이 허비된다. 다양한 영역에서 선교비의 허비가 관찰된다. 또한 중국선교에 적응이 된 선교사 한 사람을 잃는 것은 그 선교사 본인과 그의 가족에게는 청천벽력이요 후원자들에게는 중국선교에 대한 허탈감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본 고는 중국선교에서 피해야 할 불렉홀이 무엇인지와 피하는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본 고에서 다루는 내용은 가설이나 추측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보안을 위해 모든 인명과 지명은 당사자나 그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정도만이 알 수 있는 정도로 표기할 것이다. 그러면 중국선교사가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중국선교의 불렉홀은 무엇인가?

1. 삼자교회와 협력하는 것.

필자는 삼자교회를 이단이라거나 구원받은 사람이 없다고 정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교사가 삼자교회와 연관을 갖고 사역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는다. 중국선교가 진행되는 한 누군가는 삼자교회와 연계하여 그들을 돕고 섬기는 사역이 필요하다. 삼자교회에도 구원받은 성도가 있고,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며 복음적으로 사역하려는 오바댜의 후예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잘 섬길 때 그나마 삼자교회에 주어진 복음적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 개인적으로 볼 때 삼자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협력하는 엄청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동북삼성 같은 경우 약간 느슨하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 삼자교회와 협력하는 것은 선교사의 생명을 재촉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필자가 만났던 중국에서 추방당한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삼자교회와 직간접으로 연결하여 사역을 하는 분들이었다.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삼자교회와 직접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중국선교에서 가장 흡인력이 강한 불렉홀이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는 것이 선교사의 불렉홀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삼자교회와 협력하다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삼자교회내의 갈등과 분쟁에 휘말릴 수 있게 된다. A선교사는 남부 지역에서 선교 초기부터 삼자교회에 전 가족이 다니면서 성가대로 봉사하였고, 담임목사의 허락을 받아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그 교회에서 나와 교회를 개척하였다. 교회를 개척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가 추방당한 가장 큰 원인은 삼자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생성된 것이다. 성도는 누구나 연결된 사람이 많으면 좋을 수도 있으면 그만큼 시험과 유혹을 받을 가능성도 많아진다. 삼자교회에 깊숙이 관여하다보니 교인들이나 교역자들과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의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들게 된다. A선교사도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로 바로 그 교회 부목사의 고발로 추방을 당하게 된 것이다. A선교사는 그 부목사와 갈등이 없었는데도 그 부목사는 A선교사를 고발하였다. 왜냐하면 그 부목사는 A선교사를 도와준 다른 목사와 갈등관계에 있었는데, 그 목사가 미우니까 그가 도와주었던 A선교사까지 미워서 고발한 것이다. A선교사는 자신이 중국의 종교정책과 삼자교회의 실상을 정확하게 몰라서 삼자교회에 다니게 된 것이고, 그렇게 한 것을 후회하였다.

B선교사는 사람이 아주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서북부의 어느 궁벽한 성의 성도에서 삼자교회와 터놓고 지내면서 협력하였다. 성의 양회나 종교국, 공안국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그곳 삼자교회와 협력하였으며 삼자교회 담임목사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그 곳에 상당한 액수의 선교비로 삼자신학교를 설립하려고 시도하여 성 양회의 허가도 받아 신학교 설립을 상당 부분 추진하였다. 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삼자교회 지도자들과도 교분을 쌓고 사역을 하였다. 그러다가 삼자교회의 어느 전도사가 고발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가 무마가 되었던 일이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가지 않아 귀국하게 되었는데 다시 현지에 가려고 비자를 신청하였을 때 거부당하고 말았다. B선교사는 비자를 받으러가서 비자가 나오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만약 그가 삼자교회와 협력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추방을 당하는 단초를 제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삼자교회와 협력하면 현지의 양회와 종교국, 공안국에 선교사의 신분이 공개된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다보면 현지의 양회관계자들과 자연히 알게 된다. 양회관계자들과 만나다 보면 종교국과도 연계가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안국에도 선교사임이 알려지게 된다. 일이 없을 때는 상관이 없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함으로 삼자교회와 협력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그곳에 거주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움치고 뛸 여지가 없게 된다. 기독교에 관계된 모든 기관들이 선교사임을 알게 되었을 때 연변자치주나 동북삼성 이외의 지역에서는 처신이 곤란하게 되고 결국 선교사의 생명은 단명하게 될 수밖에 없다. 전국단위의 양회와 종교국 등 정책적인 차원에서 허락한 애덕기금회 같은 기관에서 사역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겠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삼자교회와 협력하여 사역하는 것은 결국 중국의 모든 종교정책과 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에 자수하는 것과 같다.  

3) 삼자교회와 협력하면 필요 이상의 선교비를 투자해야 하고, 외적인 결과를 추구하게 된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면 대부분 많은 선교비를 필요로 하게 된다. 특히 예배당을 건축해 주게 되거나 신학교를 건축해 주는 등 거액의 선교비를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내적인 변화보다는 외적인 결과를 추구하게 된다. 선교사를 후원해 주는 교회나 개인들의 바램을 채워주기 위하여 전시효과적인 사역을 하게 되고 외적인 결과를 추구하게 된다. 물론 삼자교회와 협력해도 은밀하게 의공배훈이나 은밀한 신학교육 등에서 강의를 하고 겉으로 드러내 놓고 사역을 한다면 과다한 선교비를 투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4) 삼자교회와 협력하면 가정교회와 동역 할 기회를 갖기 어려워진다. 가정교회는 삼자교회와 협력하는 선교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선교사는 공개적으로 삼자교회와 협력하였는데 그가 그 지역의 가정교회와도 협력하려고 하였을 때 가정교회가 단호히 거절하였다. 삼자교회와 공개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장기간 사역이 되기 힘들다. 대개의 경우 오래지 않아서 삼자교회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 때 가정교회와 협력하려고 해도 동역할 기회를 갖기 어렵다.

2. 정치적인 일에 휩싸이는(involve) 것.

중국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굉장히 예민하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별 문제도 아닌 것을 그들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선교사가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연루되어 있으면 공안국이 아닌 국가정보기관에서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의도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예민한 일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1) 탈북자 사역에 깊이 관여하면 곤경에 처하기 쉽다. 탈북자를 보호하고 주님께 인도하며 그들의 앞길을 열어 주는 일은 꾝 필요한 사역이다. 그러나 탈북자 사역은 지금 원래의 의도에서 많이 이탈되어 있다. 탈북자 사역이 탈북자들을 살리는 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비를 후원받기 위한 사업으로 변질된 경향을 여러 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탈북자를 섬기는 사역은 지혜롭고 신중하게 수행해야 할 사역인데 지헤도, 신중함도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북한에 납치되어 억류되어 있는 선교사들도 탈북자 사역을 하다 그리 되었고, 3월 중순경에 연길지역에서 일어난 선교사 살해 사건도 탈북자 사역과 연관되어 일어났다. 이 외에도 중국 중부지역 대도시에서 사역을 하던 어느 사역자도 탈북자를 돕다 탈북자간에 싸움이 일어나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되어 체포되기 전에 귀국했다가 몇 년간 중국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다. 또한 99년 8월에 메스컴에까지 오르내린 어느 선교사는 탈북자를 섬기는 사역을 하다 문제가 되어 공안국도 아닌 국가보위부에 체포되어 한 달간 안가에 감금된 체 심문을 받았고, 자신과 친구의 재산까지 10여억에 이르는 거금을 몰수 당하고 10년간 중국에 들어갈 수 없는 추방령을 받았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탈북자 사역을 전문적으로 하는 것은 적어도 중국선교를 하는데는 생각밖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탈북자 사역은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을 때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모든 일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행할 뿐 아니라 그 비밀을 철저히 지키고 중국에서도 국내에서도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을 위해서 국내에서 집중적인 중보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2) 티벹의 장족이나 신강의 위그루족, 회족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대상들을 사역의 대상으로 삼을 때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중국정부는 단순한 선교사역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눈감아 주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선교사역이 정치적인 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되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설사 그 지역의 공안국이나 종교국의 관리들과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묵인해 주지 않는다. 특히 중국에서는 서장자치구와 신강위구르자치구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두 자치구에 사는 장족과 위구르족 등이 집요하게 독립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관련된 일에 대하여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민감하다. 어느 선교사는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지역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 지역 삼자교회 목사와 사역자들과 친하게 지냈고, 양회와 종교국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공안국 관리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단지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점잖게 추방을 당한 것이다. 그래서 본인도 추방당하는 것인지 모르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려고 하니 비자를 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에 있는 친지들에게 알아보니 그와 관계되었던 삼자교회 사역자들과 가정교회 사역자들 모두가 공안국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추방당하기 전 공안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알아보니 그의 사역이 장족과 회족을 상대로 한 것도 있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정치적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공안국관리들도 그 사실을 알지 않느냐고 아무리 설득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평소 공안국 관리들과 좋은 관계였기 때문에 추방하는 것으로 사건이 무마되었다. 소수민족선교, 특히 서부대개발과 보조를 맞추어 서북부지역에서 소수민족을 섬기려는 사역자들은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지방정부 실력자와 관계망을 구축하고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사역하는 것.

추방당한 선교사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지방 정부의 종교국이나 공안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비호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추방당한 선교사들을 여러 명 인터뷰하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러나 관계망의 사회에서 거래관계를 친구관계로 착각하는 데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정부관료들과 사이가 좋으면 안전할 터인데 왜 그들이 다른 선교사들보다 더 추방을 당하는 것일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1) 우호적인 권력자의 전근이나 교체로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함으로 그들간의 갈등에 희생물이 될 수 있다. 우호적인 관리들이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 우호관계는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과 우호적인 관리들은 중간관리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근을 가거나 교체하게 된다. 설사 성장이나 당주석이라 하더라도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는 사람은 중국에도 없다. 시간상의 문제이지 우호적인 관리들이 전근을 가거나 교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호적이었던 관리와 세로 부임하는 관리가 사이가 좋으면 우호적인 관계가 인수인계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새로 부임한 관리는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정립하려고 한다. 그럴 때 눈에 가시처럼 떠오르는 사람들이 바로 전임자들과 좋은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면 새로 부임한 관리와 그를 따라 부임하는 그 하부조직의 관리들이 선교사를 위해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선교사가 종교와 관련된 정부권력기관 중에 어떤 기관하고는 친한데 다른 기관하고는 친하지 않다면 곤란한 처지가 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관련 기관들간에 암투가 있을 때 선교사가 희생당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이 선교사로 하여금 종교관련 권력기관들과 그 관리들에 의해 희생물이 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2) 선교사에 대해 비호해주는 권력자의 이해관계가 침해를 당할 때 비호는 체포로 변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철저히 이해상관에 따라 움직인다. 대개의 경우 관계망 안에 들어온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보호해 주는 것이 중국인의 문화이지만 큰 이해관계가 걸린 경우에는 친구라도 배신하는 중국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물며 관리들이 선교사를 비호해주는 것은 선교사들이 관리들의 관계망 안에 들어와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에 유익을 주기 때문인 것이다. 대개 선교사들은 이것을 잊기 때문에 당한다. 이해관계가 침해당하지 않고 선교사에게 기대할 바가 있으면 우호적인 관리는 선교사를 비호해 줄 것이다. 그러나 우호적인 관리가 그 선교사 때문에 일신상에 문제가 생기거나 해를 당하게 될 경우 얼마든지 안면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관리들의 비호가 체포와 추방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처신해야 한다.

3) 지방정부의 권력자를 의지하는 것은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다. 지방정부관리를 의지하는 것은 그 마음에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한 경우일 수 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히라라"(잠29:25). 사람은 의지할 것이 있으면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외에 선교사에게 의지할 대상이 있는 것이 해로울 수 있고, 올무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4.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에 양다리 걸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

선임 선교사들이나 중국선교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에 양다리 걸치는 전략(兩軌策略)을 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양다리 전략이 상당히 지혜로운 것 같이 보인다. 필자는 자랑스럽게 양다리 전략에 대해 집착하는 소위 선임선교사들도 만나보았고, 선교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만나 보았다. 그러나 양다리 전략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전략이고 삼자교회나 가정교회를 막론하고 그들을 속이는 것이다.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면 삼자교회에서도 비토를 당 할 수 있고, 가정교회에서는 확실하게 거부당한다. 양회는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던 미국 남침례회선교부에 대하여 단절을 선언하고 비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가정교회도 해외 선교사들이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양다리 걸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정교회를 섬기는데 어떤 계제에 삼자교회를 섬길 수도 있다. 삼자교회 사역자가 간청한다면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확고한 전략이 되어 버린다면 곤란하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비밀이 밝혀지는 날 그 선교사에게는 설자리가 없어질 것이다.

또한 양다리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가정교회를 훼파하려는 세력에 이용당할 수 있다. 선교사가 무슨 권리로 가정교회를 훼파하는가? 양다리를 걸치는 전략이 선교사로 하여금 융통성이 있게 보이고 멋지게 보일지 몰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가정교회를 허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를 주도하시는 주님께서 그러한 이적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다.

5. 선교가 아닌 목회 접근을 하는 것.

특히 동북삼성에서 조선족 사역을 하던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선교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인 접근을 하였다.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선교를 하라고 보낸 것이지 목회를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조선족 선교를 하는 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선교가 아닌 목회를 하고 있다. 심지어 한족을 상대로 목회를 했던 선교사도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선교를 중단하고 귀국한 사람들도 있고, 추방당한 선교사도 있다. 왜 목회를 해서는 안되는가?

1) 목회적 접근을 하면 현지 교회 사역자들이 사역할 기회를 빼앗아 자립의 기회를 빼앗게 된다. 선교사들이 한 교회나 또는 순회하면서 설교를 하고 성례를 집례하며 교회 정치에 관여하면 현지 교회 사역자들이 할 일이 없어지거나 적어진다. 선교사는 현지 교회 사역자들로 하여금 목회사역을 잘 해 나가도록 뒤에서 지도를 해주고 격려해주며 자문에 응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현지 사역자들이 소신껏 목회를 할 수 있고, 사역의 역량도 향상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느 한국인 목사와 선교사가 어떤 지방에서 목회적인 사역을 하였는데 결과는 좋지 않게 끝났다. 선교사는 사역을 그만두고 귀국했다가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를 후원하며 같이 목회적인 사역을 했던 사역자는 지금은 한족 삼자교회 목사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들이 섬겼던 교회는 훼파되었고, 현지 사역자들은 탈진하거나 타락하게 되었다.

2) 목회적 접근을 하면 현지 교회 사역자, 신자들과 갈등관계에 놓이게 될 수 있다. 목회적 접근을 하였을 때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뒤에서 현지 사역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어느 선교사는 전도에 특별한 은사를 갖고 전도에 치중하는 교회가 파송해서 동북삼성 어느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사택도 건축하고 잘 해 나갔는데 귀국했다가 현지에 돌아갔을 때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교인에게 목회 자리를 탈취당한 것을 보았다. 현지 사역자 중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교회 조직 중에 일부를 충동하여 분열하는 것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현지 사역자와 신자들 간에 강들이 야기되기도 한다. 필자가 아는 어느 한국인 목사는 현지 교회를 방문할 때 마다 현기교회 사역자를 공개리에 격하시키고 다른 교인들을 만나 충동질하였다. 그래서 그의 허황된 약속에 부화뇌동한 신자들이 교회를 분열하여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결국 그 목사의 의도대로 되지 못하였고 그 목사는 그 교회에서 거부당하였으며 나간 교인들은 이단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고, 신앙생활이 흐지부지된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3) 목회적 접근을 하면 선교적 기회를 놓치게 된다. 선교의 성공은 선교사가 섬기는 현지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가 선교적 접근을 하지 않고 목회적 접근을 하다보면 현지 교회는 자립할 의욕을 갖지 못할 뿐 아니라 영원히 피선교지 교회로 남게 된다. 선교사가 목회적 접근을 하는 교회가 제대로 성장하는 경우를 필자는 보지 못하였다. 주님은 선교사가 섬기는 교회들이 자립할 뿐 아니라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

6. 반 공개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

선교사들이 반공개적으로 사역을 하는 경우가 있다. 언뜻 보면 담대한 것 같으나 그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북한에 피납당한 어느 사역자는 용정시의 강도허가증(설교허가증)을 받았다고 반공개적으로 사역을 하였다. 노방전도도 하고 누구나 그가 선교를 하는 것으로 알도록 사역을 하였다. 필자는 그가 받았다는 <강도허가증> 사본을 본 적이 잇다. 중궁의 지방정부당국이 묵인 해 준다고 해도 공개적, 도는 반공개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다. 비전트립이나 단기 선교, 또는 여행을 온 교인들이라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전도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데 선교사가 반공개적으로 사역을 하는 것은 막가파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게 사역을 하던 사역자치고 장기사역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7. 재중 한인기업체에서 사역하는 것.

동북삼성에서 사역하던 어느 선교사는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3년 전에 어느 기독실업인이 운영하는 업체에 가서 한 번 설교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였다.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독교실업인들도 신중한 사람들은 자기 공장이나 사업장에서 선교사를 초청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선교사 중에는 처음부터 친척이나 지인의 사업장을 근거지로 하여 사역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사는 한인 사업장에 가서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한인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렇게 해도 당장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행위가 공안국의 컴퓨터에 모두 입력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8. 무분별하게 전화를 사용은 것.

연변에서 어느 선교사는 한국에 있는 교회와 전화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추방당하였다.

동북삼성의 어느 선교사는 전날 밤 장시간의 전화에서 문제가 생겨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하여 엉겁결에 중상을 당하고 공안원의 호위아래 귀국하여 치료를 받고 있다.

중부지역의 대도시에서 선교사들이 연합문제로 장시간 전화통이 불이 나도록 통화를 한 것은 결코 신중한 처신이 아니다. 선임선교사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으면 그것으로 끝내고 다음에 모여서 토론을 하든 해야지 전화로 장시간 토론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하지 않은 처사이다.

핸드폰도 유용한 통화수단이기는 하지만 결코 안전한 것은 아니다. 집이나 사무실 전화를 사용하는 것보다 비교적 보안이 되는 것이지 안심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 메일을 사용하는 것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신중한 선교사들은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 국내와의 보안을 요하는 연락은 오직 신뢰할 만한 인편이나 자신이 귀국하였을 때 해야 할 것이다. 국내에 있는 후원자들이나 후원교회도 이 일을 유념해서 통화하는 것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

9. 많은 한국인 중국선교사들과 교류하는 것.

중국에서 동역자들과 교제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이 안 된 선교사들과 교류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를 상대로 등을 치는 선교사 브로커도 있고, 공안국에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흘려주는 선교사 프락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이지만 그렇지 않은 정상적인 선교사들이라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다른 선교사를 알고 교류하는 것과 보안상의 문제와 불렉홀에 빠질 가능성은 정비례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교제하거나 교류하는 선교사가 프락치가 아니라 하더라도 체포되었을 때 공안국의 집요하고 고단수의 유도질문에 빠져 동료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불 수가 있다. 어느 선교사는 자신을 잘 아는 선교사가 공안국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그 선교사에 대하여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진행되는 초교파 모임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신중한 일이다. 어느 대도시 같은 경우 선교사들이 거의 다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필자가 공안국원이라면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한 사람만 체포하면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선교사들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 밖에서 개최되는 중국선교사대회나 선교대회에는 되도록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다. 공안국의 이력서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프락치가 있을 수 있다. 설사 참석한다고 하더라도 사진이나 자기 이름을 소개하지 말고 소개할 시간도 갖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국내에 자주 와서 공개적인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바람직한 처사는 아니며, 해외나 국내에서 개최되는 선교대회에서 강사로 참석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 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이름도 알려지고 영웅이 된 것 같겠지만 그로 인한 대가는 톡톡히 치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교대회 강사로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중국선교는 무명의 영웅을 요구하지 유명한 영웅은 사양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0. 종교국 또는 양회인사를 한국에 초청하는 것

중앙 종교국이나 각 지방 종교국 또는 중앙과 지방의 양회 인사를 한국에 초청하는 것은 신중히 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종교국이나 양회 인사들을 초청해서 잘 대접하는 것은 좋은데 그들에게 한국선교사들의 명단을 알려 주며 선교보고를 하고 있는 기가 막힌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도 알만한 교계지도자들이 그런 짓을 하니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종교국 관리나 양회 인사들이 알지 않았으면 봐줄 수 있는 것도 알고 나면 선교사들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경찰이 신고하지 않으면 불법체류중인 조선족 동포들을 체포하지 않지만 누군가 신고하면 서류정리와 상부에 보고를 하기 위해서도 출동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종교국이나 양회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초청해서 대접하는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그들을 초청하면 대접을 거하게 해주고, 큰 교회 예배 드리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무방하나 선교사나 선교에 관해서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 장ㄹ 대접해 보내면 그들은 한국교회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상대로 선교사를 잘 봐 달라고 하거나 구체적인 선교보고를 하는 것은 그들로 곤란하게 하는 무례이며, 선교사들에게는 치명타를 먹이는 자살골을 차 넣는 축구선수와 같은 지탄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중국선교에 불렉홀은 분명히 있다. 이미 무시 못할 정도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거나 중도 귀국하고 있다. 중국선교에 단기선교사도 필요한 영역이 있기는 하지만 만만디의 나라 중국선교는 장기선교사의 헌신을 요구한다. 장기선교사로 승리하려면 중국선교의 불렉홀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디 중국에서 사역하는 동역자들이 신중하게 처신하여 중국선교의 불렉홀에 빠지지 않고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