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와 종교정책 전망

2007.05.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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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26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6/02/05 (일) PM 05:58:03     조회 : 126  

■ 중국 정치와 종교정책 전망    
작성일: 2006/01/10 06:12:28
작성자: 인보라
  

중국 정치와 종교정책 전망
       향후 10년, 큰 변화 없는 종교정책

전제되는 질문들:
이러한 문제를 다뤄야 하는 이유가 있다. 중국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도대체 언제 종교에 대해 완전한 개방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 한다. 하나는, 한국보다 더 자유스러운 모습을 보고 중국에서의 선교는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한 통제를 경험하고는 선교가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문제는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자의 경우 너무 자유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너무 쉽게 사역이 드러나 일찍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후자의 경우는 너무 어렵게 생각한 나머지 제대로 사역을 펼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이러한 것과 정치적인 것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중국에서의 종교는 정치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이다. 거의 절대적으로 정치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영향을 더더욱 깊다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모택동부터 후진타오에 이르는 정치적인 흐름을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의 정치 일정을 이해 할 수 있다면 종교적인 정책은 아주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서론:
공산화 이후 모택동은 본격적인 사회주의를 실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한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이로서 온 국민의 확실한지지 속에 자신의 신념을 그대로 실현해 나갔다. 그러한 가운데 중국 교회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속속 추방되고, 식민지 하에서의 잔재를 씻어나가는 과정을 격고 있었다. 교회들이 하나하나 문을 닫고, 특히 문화대혁명에 접어들면서는 서방의 교회들은 중국의 교회가 죽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기를 10년 모택동의 사망과 더불어 문화 대혁명이 끝이 나고 권력 투쟁을 통해 등소평의 지도 하에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개방 개력이 이루어지고, 이에 맞춰 경제 뿐 아니라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역시 개방이 시작되었다. 서방의 교회 관계자들은 竹의 장막을 걷고 교회 죽음이 끝이 난 후 과연 교회가 어떻게 됐을지는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들은 중국에 들어와 여러 곳을 다닌 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죽은 줄만 알았는데 정말 생명력 넘치는 교회와 교인들이 가는 곳 마다 소복소복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때, 많은 서구의 교회는 저마다 발표하기를 800만에서 1200만 명을 추산하였다. 등소평은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교회의 개방을 선언하고, 종교국을 개설하고, 자신의 점진적인 개방이라는 스케줄에 맞혀 철저하게 관리를 해나갔다.
그 후 권력을 계승한 강택민과 후진타오는 철저한 등소평의 이론에 근거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택동부터 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정치적인 면을 살펴보자. 그러면 그들이 어떤 종교적인 정책을 펼쳤는지는 쉽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1. 마오쩌둥(毛澤東)
그는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주인고이다. 한국 사람들은 반공 교육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선입견으로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냉철하게 그들의 입장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생각된다.

가. 독립운동가, 애국자
당시 서구의 제국주의, 식민으로부터 해방을 이루어내 인물이다. 공산당을 창설한 순간부터 줄곳 항일 전쟁에 참여했고, 일본의 항복이후 국민당과의 전쟁을 했지만 그때 역시 서구의 식민 하에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인민 공화국을 설립함으로 그 모든 제국주의와 식민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실로 100여년의 식민으로부터 해방을 이룬 역사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나. 사회주의를 실현한 인물
당시의 사회주의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상태였으나 여전히 실험상태였다. 그때 중국 공산당을 실현함으로 공산당의 가능성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러나 중국 사회주의는 러시아의 입장에서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은 노동자 해방 운동이라기보다는 농민해방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다. 국가 통일을 이룬 인물
진시황, 영락제 이후 국가를 통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큰 의미는 역사적으로 가장 큰 영토의 명실상부한 통일이었기 때문이다. 영토의 통일이 더 중요한 이유는 분단국가인 우리로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니, 우리는 언제나 고구려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아쉬워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한국의 99배 되는 땅을 가진 중국을 보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이 그의 공적이다.

라. 토지개혁을 이룸
그는 사회주의의 기치아래 국가 통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넓은 땅을 그의 사상대로, 농민들의 소원대로 토지 개혁을 이루었다. 이것은 농민들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78년까지 계속되었고, 아직도 그 제도의 그늘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얼마 전 개인 소유제도가 발표가 되었지만 이것은 아직도 땅은 국가 것이라는 엄청난 국가 경쟁력을 만들고 있고, 후에 백지 같은 종이에 맘 놓고 작을 하는 화가와 같이 경제가 발전 하는데 아주 적절한 계획이 가능케 한 원인중 하나이기도 했다.

마. 대국가 정책
- 인구 증가 정책 - 땅은 넓은데 일할 일꾼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다산정책을 편 결과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날 당시 7억에 달하는 일구를 가지게 되었다.
- 영토 확장 - 한국의 99배
후에 러시아, 베트남, 몽골 등의 영토분쟁을 겪으며 지금의 중국 영토를 만들었다.
- 군사 - 60년대 이미 러시아의 도움으로 핵을 보유 할 정도로 군사 대국이었다.
- 경제 - 1,2차 대약진 운동 - 모두 실패 함.
바. 정치 이념 - 교조주의 - 1인 동재, 철저한 중앙 집권
             - 모택동이 죽은 후 미이라로 처리 영구 보관

사. 모순론-
   모택동은 혁명 중에 공산 혁명으로 위해 자본주의자와 협력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모순이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선 작은 모순을 가지고 큰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 후에 그 작은 모순을 해결하면 된다는 이론을 내 놓은 것이다.

아. 문화대혁명 - (1966년-1976년)
   대약진 운동의 실패 후유증으로 주석직을 퇴진한 후 흥위병을 통해 일으킨 친위 구테타라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역사의 바늘을 적어도 10년 이상 되돌리는 아픔을 격어야 했다.
- 우상척결, 전통사상척결, 종교 미신 타파, 모든 지식인의 노동 현장 참여 등의 골자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모든 학교의 폐교, 지식인의 지방전출(下?)등으로 인한 아픔들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은 것은 넓은 땅덩어리와 가난 밖에 없었다.
- 모택동은 공산중의 모순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공동 분배만 생각했지, 그에 따른 책임지지 않는 부분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 아픔의 역사는 76년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2. 덩샤오핑(鄧小平)
가. 생애
등소평(1904-1997)은 위대한 맑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 주요한 지도자의 한 사람 중국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총 설계사 등소평 이론의 창립자.
사천성 광안(廣安)사람. 1904년 8월 22일 출생. 원명은 등선성(鄧先聖) 학명은 등희현(鄧希賢). 5살 때 입학, 그 후 광안현 중학교에 입학. 1919년 가을, 중경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랑스유학 예비학교에 입학. 1920년 여름 프랑스에 가 근공검학. 1922년 중국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 1924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6년 초, 전 소련에 가 학습.
좌강(左江), 우강(右江) 혁명근거지 창설, 홍군 제 7군과 제 8군 정치위원과 전적(前敵)위원회 서기 담임. 1931년 여름 강서 중앙근거지에 가 선후로 중국공산당 서금(瑞金)현위서기, 회장중심(會昌中心)현위서기, 강서성 서위원회 선전부장 역임. 모택동의 정확한 노선을 옹호하여 당시 당내 “좌”경 지도자들로부터 배척 철직. 그 후 홍군 총 정치부 비서장, 총 정치부 기관지 <홍성(紅星)>의 주필 담임. 1934년 10월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 연말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장을 담임. 1935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즉 ?義회의)에 참가. 회의는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 중앙지도부 확립. 그 후 홍군 제 1군단 정치부 선전부장. 정치부 부주임, 주임 역임. 항일전쟁 폭발후 국민혁명 군제 팔로군 정치부 부주임. 1938년 1월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 담임.

1927년 봄, 귀국후 서안 풍옥상(馮玉祥) 국민군 연합군에 파견되어 정치사업에 종사. 제1차 국공(國共) 합작이 파열된 후 등소평으로 개명. 8월 7일 무한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상회의에 참가. 연말 중앙기관을 따라 상해로 이전. 1928-1929년 중국공산당 중앙 비서장을 담임. 1929년 여름 중앙위원회 대표로 광서에 가 봉기(?義) 영도, 등빈(鄧斌)으로 변성명. 장운일(張雲逸)등과 함께 12월과 그 다음해 2월 선후로 백색(白色)봉기, 용주(龍州)봉기 발동. 중국 공농홍군 제7군, 제8군, 좌강 중원국, 화동국(璜局) 제 1서기 역임. 1945년 9월부터 11월까지 유백승과 함께 상당전역(上黨戰役), 한단전역(邯鄲戰役) 영도. 1947년 여름, 군대를 인솔해 황하를 지나 대별산(大別山) 지역으로 전진, 이리하여 국민당 군대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전국적인 전략진공의 서막 개시. 해방전쟁의 전략결전단계에 중원야전군, 화동야전군을 통일 지휘하는 총 전위서기 담임, 두 야전군의 지도자와 함께 회하(淮河)전역, 도강(渡江) 전역 지휘, 국민당 정부 수도인 남경, 그 외 상해,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강서성 등 많은 지역 공략.

1949년 9월, 중앙인민저부 위원으로 당선. 개국대전(開國大典)에 참가. 10월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담임. 그 후 유백승과 함께 부대를 인솔해 서남으로 진군, 운남성, 귀주성, 사천성, 서강성을 점령. 티베트 진군과 티베트 평화해방사업을 영도하여 중국대륙의 전면해방 실현. 이 기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서남국 제 1서기, 서남군사정치위원회 부주석, 서남군구 정치위원 역임. 1952년 7월, 중안에 조동되여 사업. 중앙인민정부 정무원(1945년 국무원으로 개칭 부총리겸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 역임. 그 후 정무원 교통판공실 주인과 재정부 부장 담임.) 1954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비서장.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역임. 고강(高崗), 요수석(요漱石)이 당을 분열하고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쟁탈하는 것을 반대하는 중대한 투쟁에서 크게 기여. 1955년 4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7기 제 5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정치국 귀원으로 당선.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제 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규약 수정보고 발표. 제 8기 제 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주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 모택동을 위수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 일대 지도부의 중요성원으로 부상. 1959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담임. 총서기를 역임한 10년간 중앙위원회 주석과 부주석을 협조해 중앙의 일상사무를 주최. 사회주의 제도 수립, 발전, 중국실정의 사회주의 건설의 길 탐색에서 성과 이룩. 1956-1963년 수차 모스크바에 가 전 소련 지도자들과 담판, 중국공산당의 독립자주의 원칙 입장 견결히 수호. 1966년 “문화대혁명” 시작후 모든 영도 직무 상실. 1969-1973년 강서성 신건현(新楗懸) 트랙터 수리제조공장에 가 노동개조. 1973년 3월 국무원 부총리 직 회복. 1974년 4월 중국정부를 대표해 유엔 제 6차 특별회의에 참가해 세 개 세계 획분에 관한 모택동의 이론 계통적으로 천명. 주은래가 제 4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제 1차 회의에서 한 <정부사업보고> 작성. 1975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총 참모장 역임. 주은래가 병이 위중해진 후 모택동의 지지 하에 당, 국가와 군대의 일상사업 주최, “문화대혁명”으로 조성된 혼란군면 전면정돈, 전국인민들의 진심으로 되는 옹호를 받고 현저한 성과 이룩. 4인방이 모함으로 1976년 4월 다시 모든 직무에서 철수. 1976년 10월, 4인방이 분쇄, “문화대혁명”결속.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0기 제 3차 전원회의에서 당정군 지도직무 회복.

1977년 8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 1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당선. 1978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 제 5기 전국위원회 주석으로 당선. 등소평은 먼저 사상노선을 바로잡고 “두개의 무릇”이란 착오적인 방침 반대. 진리기준문제 토론을 영도, 지지. 완정하고 준확하게 모택동 사상을 이해할 것 제기. 전당사업 중점을 빠른 시일 내에 경제건설에 이전시킬 것 제기. 1978년 12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1기 3차 전원회의에서 개혁개방과 역량을 집중해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새 시기 개척. 이번 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정책의 역사적 전변에서 결정적 역할 발휘. 이번 전원회의를 위해 준비하는 중앙실무회의에서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일치하게 단결하여 앞을 내다보자>는 연설 발표. 전원회의를 통해 등소평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 2대 지도부 형성. 1981년 6월에 소집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1기 6차 전원회의에서 등소평이 작성한 <건국이래 당의 일부 역사문제와 관련된 결의> 채택. “문화대혁명” 근본적으로 부정, 모택동의 역사지위 수호, 모택동 사상 과학적으로 평가.

이번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제 12차 전국대표대회 소집, 등소평, 개막사에서 “맑스 주의의 보편적인 진리를 중국의 구체실천과 결부하여 자신의 길로 나아가고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자>고 제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2기 제 1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당선. 중앙고문위원회 제 1차 전원 회의에서 주임으로 당선. 1983년 6월 제 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 1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1기 제차 3전원회의 후 사상 해방, 실사구시를 견지하여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이론 창립, 발전. 이 이론은 사회주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천명.
처음으로 중국처럼 경제문화가 낙후한 나라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사회주의를 공고, 발전시킨데 관한 기본문제를 계통적으로 천명. 중국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처해있어 모든 것을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작성 계획해야 한다고 인정. 등소평의 사상에 따라 중국공산당 제 13차 대회는 사회주의 초급단계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네 가지 기본원칙을 견지, 개혁개방을 견지한데 관한 당의 기본노선을 제정. 등소평, 사회주의 근본과업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전당이 일심전의로 현대화건설을 진행해야 한다고 지적. 현대화 실현에서 관건은 과학기술현대화이며 과학기술은 제일 생산력이고 교육은 한 민족의 가장 근본적이 위업이라고 강조. 20세기 80년대부터 다음세기 중엽까지 현대화를 기본상 실현할 데 관한 발전절략목표 설계.
일체를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 유리한지,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국력을 증강하는데 유리한지, 인민들의 생활수준 제고에 유리한지를 근본기준으로 삼아 새 국면을 부단히 개척해야 한다고 지적. 농촌개혁을 대폭 지지추동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 개혁은 “중국의 제 2차 혁명”이라고 지적.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할 수 있다는 등소평의 논술은 중국공산당이 사화주의 시장경제체제개혁을 확정하는 목표에 이론기초 마련. 경제특구 건설, 14개 연해도시 개방, 상해 포동신구(浦東新區) 개발개방으로 중국의 전면적인 대외개방구도 형성 추진할 것 창의. 정치체제 개혁을 적극 추진하고 사회주의 민주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법제를 건전히 하며 물질문명을 건설함과 아울러 정신문명건설을 고도로 중요시할 것 강조. 간부대오의 혁명화, 연소화, 지식화, 전업화를 제창, 간부영도직무의 종신제를 폐지할 것 주장. 평화와 발전은 현 세계의 두개의 큰 문제라고 인정. 군대와 국방건설 지도사상의 전략적 전변을 실행하고 군대를 강대한 현대화, 정규화 혁명군대로 건설할 것 제기. 홍콩 중국에 귀속, 1999년 말, 마카오 중국에 귀속. 독립자주의 평화외교정책 제기.

평화공존 다섯가지 원칙을 국제 정치경제 새질서 수립의 준칙으로 할 것 주장. 등소평의 주도로 중국 미국과 외교관계 수립, 일본과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 중국과 전 소련 두 당, 두 나라 관계 회복. 주변나라와 제 3세계 나라들과 친선관계 발전. 중국외교의 새국면 개척, 유리한 국제환경을 쟁취해 현대화건설을 진행하고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80년대 말, 90년대 초, 국내 국제에서 정치풍파 발생, 당과 정부는 등소평과 기타 오랜 동지의 힘 있는 지지 하에 인민에 의거하고 네 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함과 아울러 경제건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을 견지하고 개혁개방을 견지해 준엄한 시련을 이겨냈으며 국가의 독립, 존엄, 안전과 안정 수호. 1989년 11월 중구공산당 중앙위원회 제 13기 제 5차 전원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사임. 등소평을 핵심으로 하는 제 2대 중앙 지도부는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제 3대 중앙지도부로 순조롭게 과도. 당과 국가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과정에 관건적인 역할을 발휘. 퇴직후 당과 국가의 사업 관심. 1992년 중국 남방의 무창, 심천, 주해, 상해 등지를 시찰, 중요한 연설 발표. 개력개방이래의 기본경험 총화, 이론적으로 일부 중대한 문제 해답. 이번 담화와 중국공산당 제 14차 대표대회를 표징으로 중국의 개력개방과 현대화 건설 새로운 단계에 진입. 1997년 소집된 중국공산당 제 1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 이론을 등소평 이론으로 개괄. 이 이론은 당대 중국의 맑스주의로서 맑스주의가 중국에서 발전한 새 단계. 당규약은 “중국공산당은 맑스, 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 이론을 자신의 행동지침으로 한다.”고 명확히 규정. 1997년 2월 19일 등소평 베이징에서 서거. 주요저작 <등소평 문선>(총 3권)에 수록.

나. 사회주의 사상의 확립
이것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생사의 기로에 선 중국에 대해 국운을 살리는 중요한 결정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이미 1977년 7월 21일 정권을 거머쥐고 처음으로 한일이 사회주의를 확립한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보면 모택동에 의해 3번의 숙청을 겪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모택동의 지위를 확립하고, 그의 사상을 확고히 세웠다. 그 이유는 제일 먼저 경제를 살려야 하는데, 분출되는 국민들의 억눌린 요구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고서는 그 과업을 이룰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로서 모택동은 등소평을 세 번 숙청했으나, 등소평은 모택동 사후 역사속에 묻힐 수도 있었던 그를 부활시켜준 것이다.

다. 事是와 實用主意 노선
그는 프랑스 유학으로 넓은 견문을 가진 지도자였다. 처음부터 실용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로 3번의 숙청과 회복이라는 역경도 거쳤다. 그렇지만 문화 대혁명 이후 실사구시 정신과 실용주의는 도탄에 빠진 중국을 살리는 희망이 되었다.

라. 주요 정책
- 초급 단계론 - 溫?社會, 小康社會, 中等??國家, ??國家
- 등소평 이론 - 한 개의 중심(경제개발) 두 가지 기본점(개방개혁과 네가지 견지)
- 통일전선전략 - 한 국가 두 체제 (홍콩 마카오등 반환) 모든 화교세력 결집

마. 집단지도체제 확립
-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음.
- 권력을 분배 함.
- 교조주의를 배격 - 체계화, 법제화를 힘씀.
경제체제에 관한 개혁, 과학기술 체제와 교육제체의 개혁 진행
- 사망 후 화장 (장기 기증)

바. 점진적 개방
- 처음부터 모순이 있음을 인식.
-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국가 관리를 위한 체계로 여김

사. 단계적 발전론
- 연안지역의 개방
- 연안지역의 잉여금으로 내륙 개발 개획

아. 경제개혁
- 농업생산 책임제.
- 경제특구 시작.
- 대외 개방 촉진
- 도시 경제개혁 단행
- 기업 책임제
- 임대제
- 주식제
- 그룹회사

자. 자본주의를 한 적이 없음.

차. 적어도 50년의 국가 경영.

3. 강택민(江澤民)

가. 생애
강택민, 1926년 8월 17일생, 江蘇省揚州인. 중국공산당중앙정치국상임위원회 중앙위원회총서기, 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1943년부터 지하당 지도의 학생운동에 참가. 1946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47년 상해교통대학 전기과 졸업. 상해 해방 후 상해 益民식품공장 부기술자, 공무과 과장 겸 동력작업장 주임과 공장 黨지부 서기, 제1부공장장, 상해비누제조공장 제1부공장장, 1기계부 상해 제2설계분국 전기전업과 과장 등을 역임.
1955년 소련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공장에 부임하여 실습. 1956년 귀국 후 長春제1자동차공장 동력처 부처장, 부총동력사, 동력분공장 공장장 등을 역임. 1962년 후 1기계부 상해전기과학연구소 부소장. 1기계부 武漢熱工 기계연구소 소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대리하였으며, 1기계부 외사국 부국장과 국장을 역임. 1980년 후 국가수출관리위원회,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부주임겸비서장과 당임원을 역임. 1982년 후 전자공업부 제1부부장과 당조직위의부서기, 부장, 서기를 역임.
1985년 후 상해시 시장과 중공 상해시위원회 부서기, 서기를 역임하고, 1982년 9월 중국공산당 제 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위원으로 당선, 1989년 6월 중공 13회 4중전회에서 중공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중공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 1989년 11월 중공 13회 5중전회에서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1990년 3월 제7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주앙군사위원회주석에 당선. 1992년 10월 중공 14회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 중앙위원회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 1993년 3월 제8회 전국인대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
1997년 9월 중공 15회 1중전회에서 중공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 1998년 3월 제9회 전국인대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
강택민은 89년 5월 조자양(趙紫陽)이 천안문사태로 실각하면서 권력 핵심부에 등장했다. 등에 의해 『경험과 서과는 부족하지만 개혁을 단행한다는 인상을 인민들에게 확실히 줄수 있는 놀랄만한 신인』으로 전격 발탁돼 「제3세대 영도핵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강택민은 1920년 가소성 양주 출신. 전 국가주석 이선념(李先念)과 함께 혁명운동을 한 숙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 43년 사해 교통대학에 입학, 지하활동에 참가하연서 두각을 나타냈다. 55년 소련에 유학, 스탈린 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장춘시 제1자동차 공장에서 동력처 부처장을 맡았다. 문화혁명 초기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74년 제1기계고업부 외사부국장으로 복귀하며 순조로운 승진을 거듭했다.
82년 이래 전자공업부 부부장과 부장을 지냈다. 86년 상해시장을 거쳐 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89년 천안문사태를 맞았다. 그는 이때 시장과 함께 천안문사태의 불길이 상해로 확산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은 공적과 상해시의 경영 성과를 인정받아 당중에 진출, 등소평에게 발탁된 것이다. 발탁 당시 강은 기계공업부장, 사해시장 등을 지낸 테크노크라트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92년 등이 남순강화(南巡講話)로 개혁의 가속화를 암시하고, 그해 가을 군부의 거물이었던 양상곤(楊尙昆) 양백빙(楊白氷) 형제 등 군부 내의 잠재적인 저항세력을 퇴진시킨 것을 기화로 가의 역량을 강화해주었다.
이른바 「상해방」으로 불리는 인사들이 대거 중앙에 진출한 것도 이때였다. 강의 후임으로 사해시장을 맡았던 주용기(朱鎔基)부총리, 역시 상해시장을 거쳐 올라온 오방국(吳邦國)부총리, 그리고 89년 강이 상경하면서 데리고 온 회경홍(會慶紅) 중앙판공실주임, 그리고 정관근(丁關根) 당선전부장 등이 이른바 상해방을 이루는 주요 인물들. 이들 모두 강의 강력한 후원아래 중앙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등소평의 이념과 사상의 충실한 실천가
- 89년 이미 후계자로 지목
등소평은 그를 중요 요직을 두루 섭렵하게 하고 권력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 그의 국가 주석 재임 중도 등소평은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나. 확실한 경제개발을 이룩하였다.
小康 사회로의 확립 (주요 대도시 엥겔 지수가 35-37%에 해당)

다. 이념 - 정신문명건설
- 여기서 정신문명이란 사회주의 이념을 말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등소평 이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

라. 집단지도체제 유지 - 이붕, 주용기와 함께 등소평 이후의 제3세대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적절한 역할 분담으로 훌륭히 완수 하였다.

마. 후계자 지목
등소평이 강택민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배양하듯, 그 역시 이미 1992년 후계자로 지목하고 자신이 했던 것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지도자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2003년 그에게 성공적인 권력 이양을 마친 것이다. 점진적인 개방, 초급단계론, 점진적인 국토개발, 점진적인 정치개력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지도자가 되었다.

바.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1년 만에 사직

사. 자신의 이름과 삼개 대표론을 업적으로 남김
- 黨章은 마치 우리나라 헌법의 1장1조에서 국가의 체제를 선언하듯이 헌법의 전문에 중국의 사상과 이념을 밝힌 것이다. 16차 당 대회에서 삼개대표론을 삽입 개정함으로 자신의 정치이념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개정된 내용은 “중국 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와 모택동의 사상, 등소평이론, 그리고 삼개대표론을 중요사상으로 자신의 행동지남으로 삼는다.”(中國公産?以?克 思列學主?, 毛澤東思想, 鄧小平理?和“三介代表”重要思想作?自己的行動r指南)라고 되어 있다.

- 江澤民은 새로운 시대에 중국공산당은 (1) 가장 선진적인 사회생산력, (2) 가장 선진적 문화를 대표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3) 가장 광범위한 인민들의 근본적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이른바 ‘3개 대표론’을 제기함으로써, 계급정당의 한계를 넘어서 전 인민의 정당임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과학기술의 진보와 경제발전을 주도하면서 중국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새로운 계층들도 당에 흡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 이 부분에서 가장 큰 것은 당장에서 계급투쟁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12대 당장은 9대, 10대, 11대 당장에서 강조되었던 모택동의 ‘계속혁명론’과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삼는다(以階級鬪爭爲綱).는 구절을 삭제하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모순은 계급투쟁의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며, 계급투쟁은 주요모순이 아니다’라고 명시, 계급투쟁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 뿐만 아니라 이로서 자본 계급의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것은 경제 개발이라는 국가의 최우선 과제를 실천 했던 책임자로서의 고충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도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과제는 강택민의 후계자인 후진타오에게 넘겨졌다.
4. 胡錦濤(후진타오)

가. 생애
후진타오(胡錦濤: 1942.12~)는 안휘(安徽) 적계(績溪) 출신으로, 1964년 4월 중국공산당에 입다하였다. 중국의 명문 청화대학(淸華大學)을 졸업하였으며, 현재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주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다. 1959년 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입학하여 1964년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다니면서 정치 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청화대학 수리공정과의 과학연구사업에 참가하면서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문화대혁면발발 후 중단함)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수력발전부 유가협(劉家峽) 공정국 방건대(房建隊)에서 노동에 종사하였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수력발전부 제4공정국 813지국 기술원, 비서, 기관당총지부 부서기를 역임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감숙성(甘肅省) 건설위원회 비서, 1975년부터 1980년까지 감숙성 건설위원회 설계관리처 부처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감숙성 건설위원회 부주임, 공청단(共靑團: 공산주의 청년단) 감숙성위원회 서기(1982.9~12)를 역임하였다. 1984년부터 1985년까지 공청단 중앙 서기처 제 1서기,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귀주성위원회(貴州省委) 서기를 역임하였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티벳자치구 당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를 역임하였으며,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中央黨校: 중앙당간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중앙정치국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중앙당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군사 위원회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앙당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2002년부터 2003년 3월까지 주앙위원회 총서기, 주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앙당교 교장(2002년 12월부터 겸임하지 않음)을 역임하였다.
2003년 3월부터 현재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중화인민공화국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 13기 중앙 후보위원, 제13기, 제14기, 제15기, 제16기 중앙위원, 제14기, 제15기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제16기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역임하였다. 제15기 4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당선되었다. 제6기 전국정협상무위원이다.

나. 기본적인 정책 - 등소평- 강택민으로 이어진 정책을 그대로 따를 것이라는데 다른 이견이 없다.

다. 목표 - 중등 발전국가
라. 과제 -  법제화, 제도화
       - 인권
       - 부정부패
       - 빈부격차 - 서부 대 개발

마. 경제 발전에 따른 문제들 - 외국의 견제, 환률, 물가, 땅 인건비 상승, 경제 과열 등등
이러한 내용들은 위쟈바오 총리의 시정연설 후 기자회견한 자리에서의 회견 내용에도 잘 있다.  
원쟈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는 국내외 기자를 회견하는 자리에서 향후 5년간 중국정부의 업무목표 및 시정방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네 마디로 강조하였다고 한다.
첫째, 업무목표는 경제의 지속적이고 비교적 빠른 성장을 실현.
둘째, 경제구조의 전략적 조정과 대외개방을 계속 확대,
셋째, 3가지 주요 경제 문제 해결 - 1)농촌개혁, 2) 농민에 대한 보조방식의 개혁 3) 농촌 금융개혁 및 농촌 의료제도의 개혁 4) 정부기구 개혁인데 그 성패의 관건은 정부기능의 전환여부에 달려있다.

이들 개혁을 추진하면서 다음의 24자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다.
첫째, 도농간의 협조(城鄕協調), 이것은 농업과 농촌을 가장 중요시하고 도농의 협조적 발전을 촉진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동서간의 상호작용(東西互動), 이것은 동부지역은 기회를 잡아 발전을 신속히 하여 현대화 건설을 우선 실현하고, 노후 공업단지에 대한 개편, 개조 및 진흥을 크게 부각시키며, 서부대개발 전략을 계속 추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상하간의 결합(上下結合), 이것은 중앙과 지방 두 개의 적극성을 충분히 발휘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원근 함께 고려(遠近兼顧), 이것은 과학교육흥국 전략 및 지속가능발전 전략을 계속 실시하여 중국의 경제 및 사회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섯째, 느슨함과 긴박함의 적절성 유지(松緊適度), 이것은 발전속도, 개혁강도가 사회용인 정도와 상호 적응하여 개혁, 발전 및 안정간의 결합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등소평은 막스레닌 주의와 모택동의 사상을 하나의 국가 유지의 틀로 삼고 그 위에 자신의 실용주의와 실사구시의 경제 정책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제자들을 길러내듯 강택민과 후진타오를 배출했으며,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지금의 중국은 그 어느 시대보다 강성대국을 구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 정책은 어떨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대답 역시 위의 내용들을 기초로 본다면 대답은 의외로 쉽게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강택민이 국가 주석 직에 오르고 10년 정책의 변화가 없었던 것 같이, 후진타오가 집권하고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견한다면, 종교 정책 역시 앞으로 10년간은 큰 변화 없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5. 종교정책의 변화

가. 모택동 시기
중국의 종교 정책은 1949-1976년까지와 그 이후가 확연히 다르다. 신중국 이후 공산당의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는 곧 기독교세력에 대한 승리와 동등한 의미를 가졌다. 맑스의 사상에서 종교는 인민의 마약으로 척결되어야 할 제 1의 대상이었다.
(1) 교회 혁신 운동과 삼자 교회설립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정리되었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잔재를 척결하는 하나의 통과 의례와 같았다.
(2) 문화대혁명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상황이 좋았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는 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교회가 문을 닫고, 파괴되고, 혹독한 핍박과 순교, 고난이 시작되었다. 1890-1920년에 있었던 반기독교 운동이 합법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암흑시기였다.

나. 등소평시기 1977년 이후 1990년까지의 기간은
(1) 종교가 아편이라는 사상의 탈피
(2) 75년과 78년에 두 차례 새 헌법을 통과 - 종교의 자유 조항 부활
[중화인민 공화국 공민은 사상,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이사, 종교신앙 및 시위나 가두행진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또 종교를 믿을 자유와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제재도 있다.
[어떤 국가기관이나 사회단체와 개인도 공민의 종교 신앙이나 혹은 종교를 믿지 않도록 강제해서는 안되며 종교를 믿은 공민과 믿지 않는 공민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국가는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보호한다. 어떤 사람들도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거나 공민의 신체 건강에 손해를 가져오거나 국가 교육제도를 방해하는 활동은 할 수 없다. 종교 단체와 종교 사무는 외국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는 근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전도를 원칙적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며, 외국 세력의 지배를 배격한다는 말로 선교사의 입국을 사실상 거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선교활동 하는 것을 제국주의자들의 외세 침략, 내정 간섭 등으로 보는 것이다.

(3) 막을 수 없는 국민의 요구임을 인정
(4) 점진적 개방 - 교회의 復堂
개방개혁과 함께 국가 경제만 개방된 것이 아니라 교회 역시 개방이 되었다. 교회 문서와 근거가 확실한 잃었던 교회를 復堂 할 수 있었고,
(5) 철저한 관리 - 통제
(6) 해외 선교사를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 - 경제적인 차원에서 바라봄.
(7) 종교국 신설 - 통전부 산하에 둠.
이것은 교회도 신자들도 조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8) 해외의 교회와 교류 확대 - 외교적이 측면과 해외교회의 선교를 차단하는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지금까지 그 근본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작년에 국가 주석이 된 후진타오가 기본적인 정책의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면 앞으로 10년간 교회에 대한 정책은 역시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