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교회의 역사

2007.05.15 13:06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중선     번호 : 82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5/02/02 (수) PM 08:34:51  (수정 2005/02/02 (수) PM 08:38:16)    조회 : 143  

■ 중국교회의 역사    

작성일: 2004/12/24 18:24:40
수정일: 2004/12/31
작성자: 인보라
  

중국교회의 역사

기원전 221년 진왕(秦王) 정(政)에 의해 첫 통일 제국이 탄생한 이래 1912년 중화민국이 개국하기까지(같은 해 2월, 음력 12월, 청(淸)황제 부의(溥儀)가 퇴위함) 중국은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동중서(董仲)의 건의에 따라 유교일존(儒敎一尊)의 정책을 택한 후 유교는 남죽조시대(420-589)의 불교발전으로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국가의 치국이념과 중국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상으로 청말까지 발전해 갔다.

기독교는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바탕 위에 전래되어 부침을 거듭하였고, 서양문명의 쇄도와 함께 중화민국의 시대와 현 중국의 시대를 맞이하여 오늘의 중국 기독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중국기독교회사를 1>당대(唐大)의 경교(景敎), 2>원대(元代)의 예리커원교(也里可溫敎), 3>명말 ? 청초(明末,淸初)기의 천주교, 4>청말~1949년 시기의 개신교, 5>현 중국의 기독교 등 다섯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Ⅰ. 당대(唐代)의 경교(景敎)

기독교가 중국에 처음으로 전래된 것은 사도 도마와 바돌로매에 의해서라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증빙할 수 없는 까닭에 이는 한낱 전설에 불과하다. 현재로서 가장 확실한 시기는 당초(唐初)년간으로 소급되어진다.
이는 1623년(1625년 설도 있음) 섬서 서안성 서남쪽 40마일에 위치한 주지(周至)에서 출토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이하 “경교비”라고 약칭함. 781년 페르시아인 경정(景淨)에 의해 저술됨)와 20세기 초 감숙돈황 석실에서 발견된 “서청메시아경”(序聽迷詩所經) “일신론”(一神論) “대진경교삼위몽도찬”(大秦景敎三威蒙度贊) “선천지본경”(宣天至本經) “지현안락경”(志玄安樂經)등의 경교 경전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강력한 당제국(唐帝國)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의 대외 개방적 정책으로 서역과 동아시아의 사신 유학생 상인 등이 자유로이 왕래하였고, 중국 고유의 전통문화에 외래 문화가 흡수 융합되는 국제성을 띠게 되었다.
이때에 431년 에베소회의에서(그리스도의 이위이성(二位二性)등의 주장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어 페르시아 등지로 흩어져 발전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들이 무역 대상들과 함께 주앙아시아의 무역로를 거쳐 중국에 첫 기독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경교비에 의하면 635년(당태종 정관9년) 시리아를 떠나 중국에 이른 Alopen(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경교선교사 일행 21명이 대신 방현령(房玄齡)의 영접하에 장안으로 입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태종(太宗)은 그의 장서루에서 경교 경전을 번역토록하고, 교리에 대해 질문하며 중국에서의 전파를 허락하였다. 3년 후엔 장안 성내 의녕방(義寧坊)에 조정의 찬조로 페르시아사(波斯寺, 후에 대진사(大秦寺)로 개명)를 짓게 하고 그의 초상을 예배당 벽에 전모(轉模)토록 하였다. 뒤이은 고종(高宗)도 태종의 정책을 승계하여 Alopen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로 봉하고, 전국에 경교 사원을 건축하도록 하여 경교의 전파를 도왔다.

고종이 죽은 후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예종(叡宗)의 치세하에 경교는 일시적으로 불교와 도교도(혹자는 유학자라고도 함)의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현종(玄宗)의 즉위로 경교는 다시금 교세를 회복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경교 선교사 17명이 흥경궁(興慶宮)에서 예배를 보며 황족과 궁인들에게 경교를 전하는 특혜가 주어지기도 하였다. 숙종(肅宗) 대종(代宗) 덕종(德宗, 경교비를 세움) 대에도 경교는 사원을 건축하고 성탄절 때는 하사품을 받는 등 황제의 은총 속에 발전하였다. 경교도 이스(伊斯)는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도와 “안사의 난”(安史之亂) 등을 평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당태종에서 무종(武宗)까지의 210년 사이 경교는 대체로 황실의 우대정책 속에 계속된 선교사들의 사역 동참과(경교비에 확인된 이름만도 90여명이 됨) 경교 경전의 번역 및 의술을 통한 사역 등으로 교세를 중국에서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회창(會昌) 5년(845) 도교를 믿는 무종이 도사 조귀진(趙歸眞)의 헌책으로 멸불(滅佛)의 조유를 내렸다.

이 조치는 불교 외에도 모든 외래 종교(경교 마니교 이슬람교)에 파급되어 3,000여 명이 환속되고(다수가 경교도임). 외국 선교사는 강제 축출되었다. 이에 경교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다만 1년 뒤 무종이 죽고 선종(宣宗)이 즉위하여 멸교의 명령을 거둬들이고 종전의 개방적 종교정책을 시행하므로 어느 정도(?) 교세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뒤이은 중원 지역에서의 번진(군벌)들의 병란, “황소의 난”(黃巢之亂.875-884. 한 아라비아인에 의하면 이때 광부(廣府)에서 12만명의 이슬람 유태 페르시아인과 경교 신자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과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전화로(980년. 한 네스토리우스 주교에 의하면 “이제 중국 내에는 다만 한 명의 경교 신자가 남았다”고 한다) 경교는 소멸되었다.

그간의 경교는 포교의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외국인에 의한 외국의 종교로서(대다수 신자는 외국 상인과 군인들이었다) 중국인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국내외(외적 요인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를 들 수 있다)의 상황 변화에 의해 모습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Ⅱ. 원대의 예리커원교(也里可溫敎)

13세기에 흥기한 몽고제국은 서아시아의 여러 지역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세계와 나아가서는 동유럽 제국(諸國)과의 동서 교류가 전에 없이 활발히 진행 되도록 기여하였다. 중국은 13 14세기 몽고 제국의 지배로 두 갈래의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하나는 당대에 이미 전해졌던 경교이고, 또 하나는 천주교이다. 원대의 지배자는 이 모두를 “십자교(十字敎)”로 칭하고 신자를 “예리커원”(也里可溫), 몽고어. “복 있는 자” 또는 “복음을 신봉하는 자”등의 해석이 있음)이라 불렀다(고로 이때의 기독교는 也里可溫敎라고도 칭함).

1. 경교

마르코 폴로(Marco Polo,馬可 羅)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어머니와 황후 등이 경교 신자였다고 한다. 세보 지원(至元) 12년(1275)을 전후하여 경교는 북방의 대도(大都) 감주(甘州) 녕하(寧夏) 천덕(天德) 서안(西安)에 주교구를 세웠으며, 많은 몽고 귀족과 관리가 신자가 되어 병역과 조세 면제의 특권을 누렸다.

1330년에는 신자 수가 3만을 넘었다. 『동방견문록』과 『원사』(元史)에 의하면 경교는 강남의 천주(泉州) 양주(揚州) 항주(杭州) 진강(鎭江) 온주(溫州) 곤명(昆明) 및 산동 하남 감숙 신강 몽고 등지에도 사원과 신자들이 있었다고 한다(1279-1281년 사이 진강의 부다루가치(副達魯花赤)로 재임하였던 경교도 마사르기스(Mar Sargis, 馬薛里吉思)가 진강에 6개소, 항주에 1개 경교 사원을 건축하였다. 이중 진강의 4개 사원은 1333년에도 존재하였다. 『지순 진강지』(至順 鎭江志)의 호구 조사를 보면 진강 한 곳에만 평균 167호 중 1호가, 63명중 1인이 경교도였다. 이에 원 왕조는 경교와 후술하는 천주교를 전담하는 “숭복사”(崇福寺)라는 기구를 신설하여 이들을 관리하였다.

2. 천주교

몽고제국의 유럽 원정으로 위협을 느낀 교황 이노센트 4세(Innocent Ⅳ)는 몽고의 재침을 막고 그들을 천주교호 개종시킬 목적으로 1245년 프란시스칸 수도승 까르피니(Plano Carpini)를 파견하였다. 1246년 카라코룸(和林)에 도착한 까르피니는 정종(定宗) 구유크칸(貴由)을 알현하고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1248년 프랑스왕 루이 9세(Louis Ⅸ)는 몽고 장관 알지기다이(Algigidai, 阿爾及吉台)가 보낸 경교도를 통해 정종과 그의 어머니가 천주교를 믿게 됨을 알았다. 이에 그는 도미니칸 수도승 안드레(Andre de Longjumeau, 安德勒 龍汝模)와 그 외 2명의 수도승을 1249년에 몽고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정종이 죽은 후였다.

이후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는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을 통해 1백 명의 기독교 학자들을 보내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나, 전쟁으로 폴로 부자만이 중국으로 돌아왔다.

1289년 교황 니콜라스 4세(Nicholas Ⅳ)가 세조에게 프란시스칸 수도승 요한 몬테 꼬르비노(John of Monte Corvino, 孟高維諾. 중국의 첫 천주교 전교구(傳敎區)의 창시자)를 파송하였다. 요한은 1249년 천주(泉州)를 거쳐 북경에 도착하였다. 요한은 성종(成宗) 티무르(鐵木耳)의 영접을 받으며 30년간의 전도사역을 전개하였다. 그는 경교도인 고당왕(高唐王) 퀴리지스(闊里吉思) 등을 개종시키고, 신약성서와 시편을 몽고어로 번역하였으며, 북경에 3개 예배당을 짓고, 1305년에는 600명에게 영세를 주는 활약을 보였다.

천주교의 확장을 위해 교황은 몇 해 뒤 요한을 북경 총주교로 임명하고, 7명의 부주교를 1307년에 파송하였다(3명만이 중국에 도착함). 1322년에는 프란시스칸 수도승 오르도리꼬 (Ordorico de Pordenone, 和德理 包戴諾)와 제임스(James of Ireland)가 천주에 상륙한 후 복주(??) 항주 남경 양주 임진(臨津) 제녕(濟寧) 등을 거쳐 운하를 따라 북경에 도착하여 3년간 머물렀다.
1328년 그들은 교황에게 50명의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하였다.

끝으로 교황 베네딕트 12세(Benedict ?)는 지오바니(Giovanni de Marignlli, 若望 馬里諾利)를 파송하여 1342년 중국에 도착한다. 그러나 원말 중국의 험악한 정세를 smRLs 지오바니는 1345년 황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하였다. 이에 원대의 천주교는 반세기만에 약 3만명의 신자로 (알란, Alans, 阿蘭족과 몽고인이 다수; 경교에서의 개종자 포함) 발전하였으나 한족(漢族)의 원조 타도(명 왕조 수립)와 배외 감정 및 불교 도교의 배척, 천주교와 경교 간의 갈등 등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경교는 중국의 역사 무대에서 예리커원의 명칭과 함께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Ⅲ. 명말 청초기()의 천주교

명말은 당 원과 달리 국수주의와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외국과의 교류가 둔화되고 외국인의 중국 진출이 제재되었고, 신유가(新儒家)사상만이 정통사상으로 우뚝 서있던 시기이다. 한편 서구에서는 제국(諸國)의 해외 진출과 함께 천주교의 해외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중 앞장선 선교회가 “예수회”이며, 이들 선교사들은 식민 개척자 상인들과 함께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나아갔다.

1551년 예수회의 선교사 자비에르(Francis Xavier, 沙勿略)는 왜구와 해적의 위협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광동(廣東) 연해의 상천도(上川島)에 상륙하였다. 그는 광동 내륙비역으로의 상륙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무위로 끝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선교정신은 많은 후진들에게 열정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후 여러 선교회선교사들이 중국 선교를 위해 도래하지만 여전히 상천도 혹은 마카오에 머무를 뿐 중국 내륙에서의 장기 체류는 불가능하였다.

중국 진출에 처음으로 성공한 선교사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회원 마테오 릿치(Matteo Ricci)이다. 1583년 예수회 동방 감독 발리난(Alexander Valignan, 範禮安)의 명으로 마카오에서 중국어를 학습한 릿치와 뤼기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는 중국어 구사 증력을 계기로 당시 광동성의 도성인 조경(肇慶)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조경에 첫 번째 선교 거점(예배당)을 세우고, 중국의 문화와 풍습을 이해하고 중국어와 오경 ? 자 ? 사(五經子史)를 탐구하였다. “중국에선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릿치는 그의 생활양식을 중국화 하였다.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고 스스로를 서승(西僧)이라고 칭하고 거처를 선화사(仙花寺)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릿치는 그의 친구인 구태소(瞿太素)로부터 당시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유생보다 낮음을 깨닫고, 유복(儒服)으로 갈아입고 승명(僧名)을 폐지하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이에 릿치는 발리난에게 선교사들의 승명을 폐하고 머리를 기르며 관리를 접견할 땐 비단 옷을 입도록 건의하여 1584년에 비준되었다.

수학 ? 천문학 ? 지리학 등 서양 근대의 과학 지식을 갖춘 릿치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를 만들고 지구의 ? 자명종 등을 지방 향신들에게 선물로 주면서 교류를 넓혔다. 1958년 공개적으로 첫 영세를 준 이래 신자도 1584녀의 3명에서 1589년에는 80명이 되었다. 그 후 릿치는 소주(韶州) ? 남창(南昌) ? 남경을 거쳐 1600년에는 재차 방물을 공납한다는 명분으로 북경으로 상경하였다.

그는 1601년 신종(神宗)에게 천주상 ? 천주경 ? 십자가 ? “만국여도”(萬國輿圖)와 자명종 등을 선물로 바치며 신종을 알현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였다. 신종으로부터 북경 거주와 선교의 허가를 받아 북경에 거주케 된 릿치는(1601-1610) 서광계(徐光啓) ? 이지조(李之藻) ? 양정균(楊廷筠); 이상 3인을 “천주교의 3대 기둥”이라 칭함) 외에도 많은 관리 ? 학자 ? 명인 ? 왕족 등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와 서양의 지리 ? 수학 ? 천문 등 과학 지식을 소개해 주었다.

1610년 릿치는 병환으로 57세의 나이에 별세하였다. (그는 유교 경전을 인용하며 기독교 교리를 논증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사역은 그가 다진 든든한 기초와 그를 이은 학 ? 덕을 겸비한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1610년 약 2,500명이던 예수회 산하의 신자가 8,000명. 1650년에는 15만 명, 1664년에는 24만 8,180명으로 증가하였다.)

릿치에 이어서 아담 샬(Adam Schall von Bell, 湯若望) ? 삼비아시(Francois Sambiasi, 畢方濟) ? 베르리에(Ferdinand Verliest. 南懷仁) 등의 선교사들도 조정과 사대부 계층의 신망을 얻고 중국의 13개 성에서 자유롭게 선교사역을 전개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1644년 명(明)이 이자성(李自成) 농민군에게 멸망당한 후 예수회 선교사 중 아담 샬은 북경에 계속 남고 삼비아시는 남명(南明) 정권에서 활동하였다. (남명의 영력태후(永曆太后) ? 마태후(馬太后) ? 왕황후(王皇后) ? 황태자 자훤(慈煊)과 태감 방천수(龐天壽) 등 50명이 영세를 받고, 외국의 도움으로 명 왕실을 회복코자 하였다.)

청초 세조 순치 년 간에 아담 샬은 황제에게 “마파”(Mafa. 瑪法, 만주어로 “아버지”라는 뜻임) ? “통미교사”(通薇敎師)라는 칭호를 받는 등 사랑을 받고 흠천감 감정(欽天監 監正)의 직에 임명되었다. 1650년 천주교 남당(南堂)의 신축 ? 준공(1652)시엔 순치제로부터 은 천량과 “흠숭천도”(欽崇天道)의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또한 아담 샬과 베르리에는 역법(曆法)을 제정하고, 총포 제작을 감수토록 명령을 받았다. 베르리에는 공부시랑의 직을 수여받아 황제의 각별한 은총을 받기도 하였다. 성조(聖組) 강희년간에는 선교사들로 하여금 몽고와 중국 내지지형을 측량하여 “황여전람도”(皇轝全覽圖)를 제작토록 하였다. 1692년 강희제는 전국에 성당을 세우고 백성들이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하는 조유(詔諭)를 내렸다.

그러나 명말 ? 청초기의 중국 내 천주교 선교의 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날로 증가하는 “양교”(佯敎) 세력은 일부 사대부들의 강력한 반대와 전통 문화의 저항에 부딪쳤다. 가장 큰 두대와 전통 문화의 저항에 부딪쳤다. 가장 큰 두 “교안”(敎案)은 명 신종 만력 44년(1616)에 예부시랑 심최(沈 )의 상소로 인해 발단된 남경 교안과(교인체포, 일부 선교사의 구금 및 남은 선교사의 축출) 청 성조 강희 33년(1664)에 흠천감 감원 양광선(陽光先)이 일으킨 교안이 있다(아담 샬 등이 하옥 ? 사형 선고를 받고(후에 석방됨), 관리 중 신자들은 관직을 박탈당함).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예수회와 도미니칸 선교사들 사이의 하나님에 대한 호칭 사용 문제(“天” ? “上帝”)와 제사 문제로 비화된 이른바 전례논쟁이었다. 일찍이 릿치는(주로 상류 지식인을 대상으로 함) 기독교를 중국 문화와 관습에 조화시키려 하여 중국 신자들의 조상 제사를(종교성이 없다고 여겨) 용인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호칭할 때 유교 경전에서 지상신(至上神)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천” ? “상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중국 교유의 문화와 풍속을 존중하며 천주교합유(天主敎合儒)→천주교보유(天主敎補儒)→천주교초유(天主敎超儒)라는 단계로 천주교를 정착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일부 선교사들의 반대로 릿치가 죽은 후 1628년에는 재중국 예수회원들이 가정(嘉定)에서 결론을 못 내린 회의를 열었다.

1631년의 도미니칸과 1633녕의 프란시스칸, 1683년의 파리 외방 전도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온 후(이들은 주로 중국의 서민층과 접촉함) 이 논쟁은 가열되었다. 결국 1704년 교황 끌레르몽 11세는 “천” ? “상제” 용어의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또한 중국 내의 모든 성당에서 강희제가 친제(親題)한 “경천”(敬天) 편액을 취하하도록 명하였다. 1742년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예수회의 조상 제사를 금지하였다(1773년에는 예수회를 해산함). 이로써 전례 논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중국 황제는 중국인의 미풍양속을 해침과 내정간섭 및 그의 권위 밖의 권위의 존재에 심히 노하여 1706년에는 중국 법도의 준수와 전교인표(傳敎印票)의 수령을 수렴한 예수회와 일부 프란시스칸 ? 어거스틴 선교사들만을 중국에 남게 하였다. 1724년 옹정제는 금교령을 내려 이 시기의 선교 사역은 또다시 일단락되었다. 다만 전 시대와의 큰 차이는 이 시기에 중구인(한족, 漢族)에게 뿌리내린 천주교는 다음의 선교시대를 맞이할 때까지도 중국인들 사이에 존속 ? 전파되었다는 것이다(1700년에는 30만 신도, 1800년에는 20만 신도, 19세기 중엽에는 30여 만 신도가 있었다. 명말 ? 청초기에는 중국 동북지역으로부터 동정교도 전파되었다).

Ⅳ. 청말~1949년 시기의 개신교

중국에 있어서 개신교의 선교 역사는(17세기 대만에서의 일시적 사역 제외) 1807년 영국 런던 선교회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이 중국에 온 것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이로부터 두 개의 중국시대를 맞은 오늘날까지 개신교는 십자가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807년에서 1949년까지의 선교 역사를 크게 구분하면, 1807-1860 : 선교 준비 시기 ; 1861-1911 : 교회 건설 시기 ; 1912-1948 : 교회 발전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선교 준비 시기(1807-1860)

당시 청 정부는 폐관(閉關) ? 금교(禁敎)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고, 역대 한족(漢族) 왕조보다 더 철저히 숭유 ? 존공(崇儒尊孔)하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중국에 파송된 모리슨은 선교사로서는 중국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그는 먼저는 아편 무역 밀매로 악명이 높은 동인도회사 직원 신분으로(통역원, 1808년 11월~1833년 12월까지. 1834년 동인도회사의 단독 무역권이 취소되고, 1834년 선박이 철수됨), 후에는 영국의 상무 감독 네피어(W.J.Napier, 律勞卑)의 중국어 비서 겸 통역관 신분으로 광동십삼행(廣東十三行)에 거주하며 선교 사역을 추진하였다(1834년 8월에 사망).

그의 사역은 『신도논속구세총설진본』(神道論贖救世總說眞本) 『문답천주예수구법』(問答淺注耶 救法)등의 전도 책자를 편저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810년에는 『신약 ? 사도행전』을 번역하고, 1813년에는 『신약전서』를 완역 ? 발행하였다. 1819년에는 밀네(William Milne, 米燐)와 힘을 합해 『구약성서』를 완역하여 1823년 『신천성서』(神天聖書)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때의 전도 활동은 중국인의 냉담한 반응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1814년 첫 세례자 채고(蔡高), 그 후엔 양발(梁發. 첫 개신교 중국인 목사,『권세양언』(勸世良言)을 지음), 굴앙(屈 )등이 있었다(모리슨은 27년 동안 모두 10여 명에게 세례를 줌). 그 외에는 1818년 말라카(Malacca)에 영화서원(Anglo-Chinese College, 英華書院)을 세워 중국 최초의 서양식 교육 제도로 인재를 육성하고, 서원 안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선교용 책자들을 제작하였다.

1834년 중국으로 파송된 미국의 파커(Peter Paker, 伯駕)는 1835년 광주에 박제의원(博濟醫阮)을 세워 중국에서의 첫 개신교 의료 선교사역을 전개하였다. 그 밖의 10여 명의 선교사들을 홍콩 ? 마카오 등지에서 전도활동을 벌였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의 발발은 서구의 무력으로 중국을 개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의 발발은 서구의 무력으로 중국을 개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842년에는 “남경조약”(광주 ? 복주 ? 하문 ? 영파 ? 상해를 개방함)이, 1844년에는 “망하조약”(개항장에 예배당과 의원을 개설할 수 있음)이, 1858년에는 “천진조약”(외국인의 여행 자유와 기독교의 중국 내지에서의 포교의 자유가 주어짐)이, 1860년에는 “북경조약”이 체령되어 (선교사들이 각 성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지을 수 있게 됨) 중국 선교 역사에는 큰 전환기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인들의 뇌리에 기독교를 제국주의와 동일시하는 이미지를 남기게 되었다.

2. 교회건설 시기(1861-1911)

“남경조약” 후 기독교는 불평등 조약의 “비호”아래 중국 선교와 교회 개척에 박차를 가하였다. 유럽과 미국 등지의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파송되어 중국어의 습득과 성경 번역 등에 기반을 닦은 선교사들은 이미 확보된 5개 개항장을 거점으로 중국 내 여러 도시에서 예배당 ? 학교 ? 병원 등을 세우며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戴德生)의 “중국내지회”(The China Inland Mission) 창립으로 오지 선교 사역이 크게 발전되었다.

이 시기에는 서양 제국주의의 대 중국 침략정책이 강화되었고 중국(청조)은 양무운동 ? 변법운동 ? 입헌운동을 통해 점진적인 자구책을 모색하였다. 이는 중국의 정치 ? 사회 ?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중국의 반(半)봉건 ? 반(半)식민화요, 중국이 근대화의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서양 제국의 대중국 정치 ? 경제 침략과 맞물려 천진교안(天津敎案) ? 거야교안(巨野敎案, 1897) 등 수백 건의 구교(仇敎)사건과 의화단운동(1900)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된다. 그러나 중국인의 기독교에 대한 태도는 전차 냉대에서 호기심으로 바뀌어 호기심으로 바뀌어 복음으로 나아가는 장벽이 점점 허물어져 갔다.

선교사 수: 1864년(189명), 1889년(1,296명), 1910년(5,144명), 1889년(37,287명), 1910년(167,075명) : 중국인 목사 ? 여전도사 ? 전도보조자 : 1889년(1,657명), 1910년(7,701명).

3. 교회 발전 시기(1912-1949)

1912년 2천여 년 간의 전제 군주제가 막을 내리고 중화민국이 수립됨으로 기독교는 합법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는 서양 선교사의 비호를 받는 “교민”에서 합법적인 “국민”의 신분으로 변화되었따. 청말에는 중국인 신자는 자력으로 교회를 세우고자 할지라도 법률상 자유롭게 토지를 구매할 수 없었고, 외국 선교회의 이름을 빌어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국 이후 중 ? 외(中 ? 外) 모든 인사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믿을 수 있게 되고 관신(官紳)과 이웃의 냉대를 받지 않게 되었다. 비록 민국 초의 군벌의 할거와 전란, 북벌, 중국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권의 출범, 중 ? 일 전쟁, 국 ? 공 내전 등을 겪지만 법률적 ? 사상적 ? 사회적으로 선교사와 중국인 전도자들은 전에 없는 자유를 누리며 전도 ? 출판 ? 교육 ? 교육 ? 의료 ? 사회복지 등 전 사역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교회에 진일보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의 괄목할만한 점은 중국 교회의 자립운동이다. 1910년에는 민남장로회(閔南長老會) ? 화중(華中)의 “중국예수교자립회” ? 화북(華北)의 “중화기독교회” ? “중화국내포도회”(中華國內佈道會) 등이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2년에서 1927년 사이 중국공산당은 반기독교운동(非基督敎運動)을 주도하였다. 기독교를 제국주의의 앞잡이요, 문화의 침략자라고 매도하며 학생 ? 농민 ? 노동자를 선동하여 선교사 ? 전도사 ? 교회 ? 학교 ? 병원 등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이는 중국 기독교지도자들에게 중국교회의 자립을 촉진하고 토착화 교회로 나아가도록 작용하여 기독교가 중국인들의 기독교요, 기독교 신앙이 중국 교유의 문화와 융화하며, 기독교 예의가 중국인의 풍습에 적응되도록 하였다. 이의 결과로 1926년에는 “예수가정”, 1942-1928년 사이에는 “기독교집회소” 등이 창립되었다.

선교사 수: 1920년(6,204명), 1926년(8,325명), 1928년(3,375명), 1936년(6,059명); 중국인 전도사: 1920년(남: 9,663; 여: 3,304명); 성찬 참여자: 1920년(368,524명), 1928년(446,631명), 1936년(536,089명), 1949년(834,909명).

Ⅴ. 현 중국의 기독교(1949-)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출범과 12월 국민당정부의 대만 철수는 중국 대륙교회로 하여금 중국공산당의 통치와 국가 이익에 저촉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는 궁극적으로 반드시 소멸된다고 믿는 중국공산정권의 지배 하에 놓이게 했다.

1. 삼자회의 성립과 교회 장악(1949-1957)

1949년 9월 중국 공산당(이하 “중공”이라 함)과 접촉을 가졌던 오요종 유랑모 등 종교계 인사 5인은 중공이 개최하는 제1차 인민정치협상회의 (약칭 “정협”)에 초대되었다. 이는 중공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이들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교계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의미하며, 참여에 적극적인 오요종은 향후 “삼자”(三自, 자치 자양 자전)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듬해 5월 정협의 종교계 대표 ? 중화기독교협진회 ? 중화기독교전국총회 등의 5개 기독교 단체 대표들은 상해에서 상경하여 북경 천진의 교계 인사들과 함께 정부원 총리 주은래와 3차례 회담을 가졌다.

회담 결과 참석자들은 “중국기독교의 신중국 건설에서의 노력의 길”(전후 8차례 수정됨)이란 선언문을 기초하고 전국 각지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에 서명 지지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선언문은 새 정권에 충성할 것을 골자로 하여 중국기독교교회 및 단체는 공동강령(제1차 정협 회의에서 통과된 강령)을 철저히 옹호하고 기독교 내부의 제국주의 영향을 숙청하고 자치 자양 ? 자전 운동을 최단기간 내에 이룬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51년 4월 정무원 소속의 종교사무처는 미국의 원조를 받는 기독교단체를 처리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항미 ? 원조 삼자혁신운동위원회”(抗美援朝三自革新運動委員會) 준비위원회를 기독교계의 새로운 지도기구로 발족하여 전면적인 삼자운동을 정식으로 추진한다고 결의하였다.
또한 미국의 재정 지원을 받는 단체는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는 등의 외국 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안건을 통과시키고, 전국기독교협진회 소속의 F. W. Price 등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진문연(감리교) 주우어(성공회) 등 미국 교단과 관계 있는 인사들을 고발 ? 성토하였다.

1954년 7월 “삼자준비위원회”는 북경에서 62개 교회와 단체의 대표 232인 (244인 설도 있음)이 참여한 가운데 “중국기독교 전국회의”를 개최하고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이는 “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기독교계의 최고 조직체로 하여 전국 각 지역에 분회를 두고 삼자회의 임무를 추진하며 각처의 교회를 그의 조직 냉 수용하고 집중 관리하여 공산주의 정권을 옹호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교회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공산정권과 삼자회는 삼자회에 가입을 거부하는 반대파 교회를 숙청하고 기타 교회를 정치운동에 부합하도록 유도하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1955년 10월 29일 중국 정부는 삼자회 이외의 모든 기독교활동을 불법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철폐되거나 지하로 잠입한 교회 외의 모든 대륙교회는 삼자회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2. 삼자교회의 “대약진”(1958-1966)

1958년 중국 정부는 이른바 “대약진운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경제계획의 결과에 자신을 얻은 모택동은 제2차 경제5개년 계획이 추진되는 때를 같이하여 인민 대중의 적극성을 통하여 중국을 가능한 한 조기에 현대적 공업 ? 농업 ? 과학과 문화를 갖춘 위대한 사회주의국가로 발전기키겠다는 야심찬 생각을 갖고 추진하였다. 이에 모든 “조직의 군사화, 생산의 전투화, 생활의 집체화”를 부르짖으며 삼면홍기(三面紅旗)의 대약진운동을 전개하고 모든 국민을 이 운동에 동원하였다. 기독교인들도 동원됨은 물론이다.

그 결과 지극히 바쁜 생산활동에 소집 ? 동원된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모여 집회를 가질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목회자들도 정치학습 혹은 노동에 참가함으로 교회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약진운동은 결국 다수의 교회로 하여금 자동적으로 문을 닫도록 “대약진”하였다. 삼자회는 대체로 한 지역에 한 교회만을 남겨 두고, 교회 활동도 주일 예배 1회로 제한하고 설교의 시간과 내용 등에도 간섭하였다. 이런 와중에 여러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켜 나가기 위해 스스로 가정적 집회를 갖게 되었다.

얼마 후 대약진운동은 실패하고 유소기 등 이른바 실권파가 등장하여 1960년 초부터 수정주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극단적 종교정책이 완화되는 틈을 이용하여 교회는 호흡을 가다듬고 발전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63년부터 신문지상에는 종교정책에 대한 대변론도 벌어졌다. 종교는 미신과 구부되어야하며 역사유물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정한 세월이 지나 사회주의 발전하게 되면 종교는 사회와 인민의 사상적 진보로 자연히 소멸됨으로 종교를 의식 형태로 보아 물리적 강제수단을 통해 제거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대립되었다. 이는 1949년이래 중공의 종교정책의 양대 견해로서 시공별로 각기 시도됨을 발견할 수 있다. 일례로 “문화혁명” 기간에는 후자의 견해가, 지금의 4개 현대화 시기에는 전자의 견해가 주류를 이루어 시행되고 있다.

3. 삼자교회의 실목과 가정교회의 암약(1966-1976년)

1966년 5월 16일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일명 5.16통지)를 공포게 하여 전국적으로 “문화대혁명운동”(이하 “문혁”)을 전개토록 하였다. 이 문혁의 영향은 정치권 내에 한하지 않고 교회와 신자에게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삼자회를 포함하여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모든 종교사무담당부서는 철폐되고 모든 종교활동은 금지되었다. 모든 유형의 교회는 폐쇄되거나 파괴되고, 성직자는 구금되고 신자는 박해를 받았다.

삼자회 활동과 삼자교회의 모습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홍위병들의 광란과 정치극이 가장 졸열했던 문혁 초기가 지나자 1971년 외교관들을 위한 북경의 미시교회(米市堂)가 재개되었고 오요종 정광훈 등 극소수 삼자회 지도자들이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등의 공개적인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른바 가정교회는 이 기나긴 고난의 때 좌절하거나 소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핍박 속에 더욱 성장하고 굳건하여졌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이들 가정교회는 생명의 빛을 발하였고, 그 빛을 온 중국대륙에 보다 찬란하게 비출 내일을 대망하여 참고 기다렸다.

4. 삼자교회의 재기와 가정교회 부흥(1949-현재)

1976년 모택동의 죽음과 4인방의 타도, 특히 문혁 기간 중 수정주의자로 숙청되었던 등소평의 재등장과 정권장악은 중국을 이른바 “4개(농업 공업 국방 및 과학 기술) 현대화운동”의 시대로 들어서게 하였다. 4개 현대화운동의 목표 아래 중국은 문혁시대의 종교정책을 비판하며, 종교란 중국사회가 발전하면 스스로 소멸된다는 견해로 종교 문제를 대하고(그렇다고 방임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방의 원조와 종교인의 역량을 4개 현대화운동으로 끌어들인다는 실효성에 입각하여 비교적 온건한 종교정책을 실시하였다.

1977년 3월 국무원 소속의 종교사무국이 회복되므로 삼자회가 재기하였다.

1979년 4월 영파(寧波)의 백년당 교회가 문을 연 후 전국 각 도시를 중심으로 많은 삼자교회가 재개되었다. 1979년이래 삼자회의 대외 활동도 매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1980년 10월 남경에서 개최된 회의에서는 “중국기독교협회”가 “삼자회”의 자매단체로 성립되어 교회사무를 돕도록 하였다.

1981년 2월에는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이 개원되었다. (현재는 18개소의 신학교가 개설되어 있다.) 한편 가정교회는 농촌과 도시에 편재하고 있다. 이들 교회는 삼자교회의 재개에도 불구하고 다수는 삼자의 과거 행적을 염두에 두어 그들과의 관계를 멀리하며, 반(半) 공개적 또는 비밀리에 집회를 갖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또는 간단한 조직만을 갖고 있다), 목회자가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정규 신학훈련을 거치지 못한 평신도 지도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약 6천여 만의 대륙의 기독교인구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삼자회 교인은 약 1,600만 정도임), 고난과 열악한 조건 아래서도 신앙의 질적 ? 양적 부흥을 꾸준히 이뤄가고 있다.

우심화(동양사학, A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