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육과 인재양성

2007.05.15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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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97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5/07/01 (금) PM 06:51:08     조회 : 123  

■ 신학교육과 인재양성
  
작성일: 2005/05/17
작성자: 인보라
  

신학교육과 인재양성
                                                                                   邢 福 增

신학교육의 중요한 목적은 교회를 섬기는 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사역자를 양성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19세기 초, 복음이 중국에 전해지던 초기에 선교사들이 중국신학교육의 개척의 첫 장을 기록하게 되었지만 중국신학교육의 발전 과정은 끊임없이 거듭되는 곤란을 겪게 되었다.


중국신학교의 종류

1949년 해방 전, 중국신학교육의 체제는 매우 복잡하였다. 서로 다른 기준이 여러 종류의 신학교(神學院校 - 역자주 : 본문에서의 신학교에는 단과대학으로서의 신학대학과 종합대학으로서의 신학대학교 그리고 성경학교를 함께 지정한 것으로 다음 문장부터는 편의상 신학교로 통합하여 명칭한다) 을 만들어내었다. 우선, 학생들의 입학자격에 따라 신학교를 크게 신학교와 성경학교로 나눌 수 있었다. 신학교는 주로 중고등학교 졸업이상 대학졸업의 학력을 가진 학생들을 선발하였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34년 전국에 고등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자를 모집하는 곳은 모두 14개소였고 중학교이상의 학력자를 선발하는 곳 역시 14개가 있었다. 성경학교를 보면, 1920년대에 크고 작은 규모의 성경학교들을 모두 합쳐 백여 개에 이르렀다. 그 입학자격 역시 천차만별로 중학교졸업자만 선발하는 곳에서 초등학교졸업자를 모집하는 학교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만을 선발하는 곳도 있었다.

1922년에 《中華歸主》의 조사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 특히 여자성경학교의 학생들은 너무 어려서 성경학교에 입학할 것이 아니라 정식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서는 초등학교이하의 학력자를 모집하는 상황을 지적한 것으로, 아마도 일부의 성경학교에 부설된「預科班(준비반)」을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주로 초등학교을 나오지 못한 학생들을 먼저 준비반에서 공부를 시킨 후 성경학과에 입학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교 수나 학생 수에서 봤을 때 후자가 월등히 전자를 능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교단적 배경에 따라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와 연합신학교 등이 있었다.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는 특정 교단의 전통을 고수하고 이었다. 예를 들어 중화신의신학원(호북성의 섭구)中華信義神學院(湖北?口), 성공회중앙신학원(남경)聖公會中央神學院(南京), 미국남북장로회화북신학원(산동성의 승현)美國南北長老會華北神學院(山東勝縣), 선도회건도성경학교(광서성의 오주)宣道會建道聖經學校(廣西梧州) 등 있다. 연합신학교에는 서로 다른 교단들이 연합하여 성립된「協和」(Union)신학교가 있다.

기본적으로 20세기 이후, 자원을 절약하며 통합운동의 태동을 위하여 파송교단들은 계속적으로 신학교육방면에서 협조하였다. 예를 들어 남경금릉신학원(南京金陵神學院)(배경은 감리교, 美남?북장로회, 감리회 등), 廣州協和神學院(배경은 美北장로회, 조합교회, 同寅會, 런던회, 감리교, 성공회등) 과 복건협화신학원(福建協和神學院)등이 있다.

다음은 조직제도상 기독교대학에 부설된 신학교와 독립신학교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연경대학교(燕京大學校) 종교대학, 성요한대학교 신학대학, 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 신학대학 등이 있다. 신중국(新中國) 성립이전에는 중국에 13개소의 기독교 대학교가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기독교 대학교의 신학대학은 중고등학교 졸업이상의 학생들이 선발하였다. 파송기관에서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독립신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를 나누어 모집하였다. 예로는 화북신학원(華北神學院), 호남성경학원(湖南聖經學院), 중국신학원(항주), 중경신학원(重慶神學院) 등이 있다.

신학적 관점으로 중국신학교는 20세기 이후에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신학적 논쟁으로, 확실히 구별되는 두개의 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학교에 소속된 신학대학은 개방, 관용, 자유와 비판적 정신의 영향을 자연스레 받게 되었고, 대학내의 학술연구적 경향은 교의전통에 도전하게 되는 동시에 교역자로서의 훈련에 소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여러 교단들과 파송기관에서 연합하여 세운 신학교들은 서로간의 신학전통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求同存異(일치한 점은 취하고, 의견이 서로 다른 점은 잠시 보류하다)」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신학교와 협화신학교 모두 개방적 태도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이에 근본주의파는 그들을「새로운 교단(新派)」의 신학교로 간주하였다. 독립신학교들은 대부분 신학적으로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1940년대에 보수파 교회인사들의 환영을 받은 4곳의 신학교 - 화북신학원, 호남성경학원, 중경신학원과 건도성경학교(建道聖經學校) 등이 모두 독립신학교에 속한다. 그중 화북신학원은 몇 몇 미국장로회의 선교사들이 제로대학교(齊魯大學校) 신학대학의 현대주의적 경향에 불만을 가져 1919년도에 세운 것이다. 주목해 볼만한 것은 1940년초에, 자유신학의 범람을 감지한 중국에는 반지식적 경향이 농후한 영성수련원(靈修院)들이 출현하였다. 그중 비교적 유명한 곳으로는 지아위밍(賈玉銘)이 운영하는 중국영성수련원(중경)과 삐용친(畢詠琴)이 운영하는 향산(香山)영성수련원(북경)이 있었다.


상위급 신학교들이 직면한 문제

1920년대 전성기에, 중국신학교(각종 신학교과 성경학교를 포함)들은 대략 120여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전후(戰後) 서방 파송기관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1950년도에 이르러서는 71개만이 남게 되었다. 규모가 다양한 성경학교들을 제외하고, 초점을 상위급 신학교(편집자주 - 고등학교이상 대학교 졸업자들만을 모집함)로만 맞추었을 때, 몇 가지 주목해 볼만한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신학교 입학생의 수가 계속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1922년《중화귀주》의 조사에 의하면 96명의 대학 학력의 학생들이 사역자의 길을 가기 위해 헌신하였다. 3년을 평균을 내어 볼 때 매년 32명이 입학한 것이다. 각 파송기관에서 방대한 자원을 들여 신학대학을 운영하는 목적은 중국교회에 양질의 지도자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신학대학을 운영한 결과, 실제로 신학교에는 단지 32명의 학생들만을 보낸 결과가 되었다고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개탄하였다.

1935년에 진행된 중국신학교육에 관한 조사 -「Weigle Report」에서 이런 현실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1934년에 고등학교 이상 학력자를 뽑는 14개의 신학교에 모두 373명의 학생이 있었고, 그중 대학교졸업자가 26명이며 대학 중퇴자 15명을 포함하여 총 41명이 되었다. 1920년대 초와 비교하면 신학교에 입학하는 대학 학력자의 수가 57.3%로 감소한 것이었다. 이렇듯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들의 감소로 인한 인재들의 손실은 당시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 보고서는 중국교회의 인재 양성의 위기는 잘 나타내었다.

종류  신학교 학생수(명)

연합신학교

(광주협화신학원)光州協和神學院 29
금릉신학원(金陵神學院) 58

기독교대학교 신학대학
화서협대종교학원(華西協大宗敎學院) 10
제로신학원(齊魯神學院) 32
호강신학원(?江神學院) 13
성요한신학원(聖約翰神學院) 3
연경신학원(燕京神學院) 30

독립신학교

신의신학원(信義神學院) 34
화북신학원(華北神學院) 133

둘째, 독립신학교과 기독교대학신학교의 소장관계(消長關係)이다. 여러 조사보고서는 기독교 대학교가 중국교회에 인재들을 성공적으로 공급하지 못함을 비평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대학교 신학대학의 문제점을 잘 반영하였다. 쉬이화(徐以?)의 연구의 따르면, 기독교 대학교 중 연경대학교 종교대학이 가장 우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입학생 부족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1927년부터 1931년까지 단 7명만을 졸업시켰다. 「Weigle Report」의 통계에 따르면, 1933년 현재 중고등학교 졸업이상 학력자를 모집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통계는 아래와 같다. <표의 위치>

위의 표에서 보면, 학생 수에서는 독립신학교인 화북신학원이 월등히 우세하고, 다음이 금릉협화신학원이었다. 연경종교학원 챠오쯔쳔(趙紫宸)원장은 독립신학원의 장점은 「온전한 신실함」이며, 왜 독립신학교의 학생의 수가 연합신학교나 신학대학보다 많은지를 설명한다고 말하였다.


교회와 신학교육

챠오원장은 신학교육의 발전여부는「자금, 인재, 이상」의 3대 조건 외에「교회」가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중국기독교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 오히려 교회 자체에 이었으며, 1950년도에 전체 선교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선교회의 원래 정책은 교육, 의료, 봉사, 문자 등의 분야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선교를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오히려 도구로서의 분야를 통해 세운 교회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최상의 인재들은 모두 교육, 의료 등의 사역에 참여하였고, 남은 사람들이 교회지도자, 목사와 교수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분명 선교회들의 이러한 선교정책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도구로서의 사역과 교회사역사이의 편차가 너무 크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중국교회, 특히 큰 교단교회는 풍부한 자원을 선교의 의료, 교육, 봉사, 문서 등의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방법은, 오히려 주체로서의 교회를 약화시켰다. 과연 이렇게 약화된 교회가 어떻게 목양할 인재를 신학교에 보내어 준비하게 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인재를 흡수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교회 사역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대우에 있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말했듯이, 사역자들에 대한 매우 낮은 사회적 지위는 많은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목양사역에 머뭇거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신학대학이 사역자들을 배양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독립신학교과 성경학교에서도 인재 유출의 상황을 낳고 있었다. 교회의 낮은 대우뿐만 아니라 신학교에서 영어를 배워 다른 직업을 찾기 쉬어진 적지 않은 학생들은 졸업후에 더욱 교회사역에 남아있기가 힘들어졌다.

쳔쑹꾸이(陳崇桂)의 경우가 이러한 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쳔쑹꾸이는 언약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신학대학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언약교회에서 졸업 후에 그가 교회에서 사역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강제로 성경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쳔쑹꾸이 외에도 3명은 청년들이 이 명령을 따랐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2명은 우체국에 들어갔고, 나머지 한 명도 사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계로 입문하였다. 중국교회가 인재들을 흡수할 수 없는 상황은 이런 예에서 잘 볼 수 있다.
중국교회는 인재에 대한 수요가 시급하지만 교회 자체의 기초가 제대로 서있지 않아서, 오히려 중국신학교육의 발전에 많은 어려움으로 작용하였다. 신중국(新中國) 성립전의 신학교육은 이러한 곤경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신학교육이 처한 곤경

중국의 신학교육은 8년간의 항전기간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전후에 미처 재건을 하기도 전에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의 폭발하였다. 그 후 국민당이 점차 중국각지에서 퇴각함에 따라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되었고, 많은 신학원 - 신의신학원(信義神學院), 신소신학원(神召神學院), 광주성경학원(廣州聖經學院), 건도성경학원(建道聖經學院) 등은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하나씩 홍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중화전국협진회(中華全國協進會)의 통계에 따르면, 해방전후 중국내에 여전히 50여개 이상의 신학교가 남아있었다.

신중국 성립이후 중국신학교육은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발전은 각 신학원은 점진적으로 연합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 남아있던 신학교들은 2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첫째는 학생들의 수급문제이다. 해방초기에 교회의 상황이 밝지 않았다. 종교의 대한 정책들이 지역마다 달랐으며, 끊임없이 예배당이 점령당하며 신도들이 박해를 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교에 남아있던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퇴를 선택하기에 이르렀고, 이렇다보니 청년들을 사역에 헌신하도록 설득하여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일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신학생의 감소는 해방후 중국신학교육의 가장 큰 어려움이 되었다.

다음은 경제적 문제이었다. 신학교육이 중국교회의「토착화」의 일환 중에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던 이유는, 신학교의 교육과정과 교수들을 서양국가에게 의지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파송한 기관의 자금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해방전 중국의 절대다수의 신학교들은 자립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교단주의와 신구(新舊)신학의 논쟁의 상황아래에서 신학교간의 협력과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학교들이 많이 설립이 되었지만 공부할 학생들이 부족한 형세를 낳았다.

해방초기에 적지 않은 파송기관들이 계속 중국에 남아있기를 희망하여 철수할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 수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신학교들은 무리하게 운영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심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중국정부는 중국내의 미국의 자산을 동결시켰다. 이제껏 기독교 선교사역이 경제지원에 의존하였다가 이것이 중단됨으로 신학교들은 파산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연합의 길로 접어들다

1951년도에 신학교 운영의 지출을 줄이기 위하여, 금릉신학원과 금릉여자신학원이 합병함으로 해방초기 신학교 합병의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두 신학교는 같은 교단에 속해있었고, 이러한 남녀신학교의 합병은 중국 신학교육 역사상 종종 있어왔다. 1952년에 중국의 고등교육 체계의 전면적인 조정에 따라, 고등교육의 구조는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으며, 신학교에도 규모와 교단을 뛰어넘은 합병의 바람이 공식적으로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중국신학교육이 당면한 심각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1952년 8월 화동(璜)지역의 기독교계가 먼저 상해에서 신학교육좌담회를 개최하여, 화동연합신학원(璜聯合神學院)의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11월에는 화동지역의 11개 신학교들이 연합하여 설립한 금릉협화신학원이 정식으로 남경에 세워졌다.

개별적으로 보면, 상해성공회중앙신학원(上海聖公會中央神學院), 남경금릉신학원(南京金陵神學院)과 금릉여자신학원(金陵女子神學院), 무석화동신학원(無錫璜神學院), 제남제노신학원(濟南齊魯神學院), 장주민남신학원(?州?南神學院), 복주협화신학원(福州協和神學院), 영파삼일성경학원(寧波三一聖經學院), 진강침회성경학원(鎭江浸會聖經學院), 제남명도성경학원 (濟南明道聖經學院)등이 있었다.

금릉협화신학원 외에도 연경협화신학원이 1953년 4월에 북경에 세워졌는데, 연경종교대학, 북경여자연합성경학원과 북경신학원이 연합하여 성립한 것이었다. 9월에 북경원동선교회(北京遠東宣敎會)의 성결교회성경학교(聖潔敎會聖經學校), 심양동북신학원(沈陽東北神學院), 하남개봉화내침회신학원(河南開封華內浸會神學院) 또한 연경신학원에 합병되었다.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에 호북섭구신의신학원(湖北?口信義神學院), 호남성경학원(湖南聖經學院), 북경신소회진리학원(北京神召會眞理學院), 화중협화신학원(華中協和神學院), 북경향산영수원(北京香山靈修院) 역시 뒤이어 합병의 조류에 참여하였다.

화남지역에서는 양광침신회신학원(兩廣浸信會神學院), 신의성경학원(信義聖經學院)과 그 외 다른 교단의 신학교들이 잇따라 廣州協和神學院에 합병되었다. 1956년까지 3개의 협화신학원이 이미 전국 30개소의 신학교들을 합병하였다. 신중국의 신학교육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11개소의 신학교가 합병되어 설립된 금릉협화신학원은 설립초기의 학생이 총 105명이었고(그중 신입생이 10명), 평균적으로 한 신학교마다 평균 10명이 안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시 11개 신학교들이 병합하여 성립한 연경협화신학원은 전성기 때에 학생수가 70여명이었고, 매 신학교당 대략 7명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위에서 말한 학생들 수로 볼 때, 해방후 신학생들의 유실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합일(合一) - 역자주 : 신학교들을 통합하는 정책을 말한다」의 신학교육

여러 다른 교단적 배경의 신학교들이 합병되어 세워진 협화신학원들은 각 신학교의 전통을 공존하도록 하기 위하여, 합병초기에는 기본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아는 바로는 금릉신학원은 30여명의 교수들 중 삼분의 일이 근본주의파의 배경에 속해있었고, 100여명의 학생들 중에 근본주의파의 속해있는 이들이 60%이상이었다. 어떻게「현대파」와 「근본주의파」사이에 평형을 유지할 것인지의 논쟁은 연합신학원이 해결해야할 과제가 되었다. 당시 금릉교무처에서는 신학과 성경의 범위 내에서 몇 개의 교육과정을 「현대파」와 「근본주의파」의 관점에 따라 분반(分班)을 하여 수업을 하며, 완전한 의미에서의 완전히 통일된 신앙은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특이한 것은 3개의 협화신학원의 포석(布石)하에 당시 중국 전역에서 합병을 모면한 곳은 쳔쑹꾸이(陣崇桂)의 중경신학원(重慶神學院)과 지아위밍(賈玉銘)의 중국영수학원(中國靈修學院)뿐이었다. 陣과 賈는 모두 삼자운동에 참여한 근본주의파 인물이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은 신학교를 합병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이유는 그들이 삼자조직에 참여함으로 특혜를 얻었기 때문이라 본다.

좀더 설명을 하자면, 1950년대 중엽 이전에 중국에는 여전히 몇 개의 근본주의파들이 운영하는 독립신학교가 남아있었다. 이러한 독립신학교 운영자들은 삼자운동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였기에 여전히 독립적으로 운영하였다. 규모는 비교적 작았으며 파송기관과도 조직적인 연계가 없었으므로 주로 신앙에 의한 헌금에 의지하였기에 해방 후에도 무리하게나마 운영할 수 있었다. 그 예를 보면 북경향산영수원(畢詠琴 운영), 중국전도인수양원(焦維眞 운영), 회은업여신학원(懷恩業餘神學院)과 성경학사(聖經學社)등이 있었다.

삼자운동측에서는 그들의 가입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54년에 전국 기독교회의를 소집하여 정식으로 삼자애국운동회 위원회를 설립한 후에는, 삼자운동의 참여에 대한 압력을 더욱 심해졌다. 1955년에 삼자운동반대의 핵심인물이 왕밍따오가 체포된 후 일부의 근본주의파 인사들은 처음에 가졌던 뜻을 바꾸었고 그들이 운영하던 신학교들도 합병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들 근본주의파 인사들을 삼자운동 가입하도록 하기 위해, 중국전도인수양원, 회은업여신학원과 성경학사는 금릉이나 연경협화신학원에 합병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아위밍의 중국기독영수학원과 위의 3개의 신학교는 합병하였다. 1956년 10월에 위의 4개의 신학교로 구성된 중국기독교상해영수신학원(中國基督敎上海靈修神學院)이 설립이 되었고 지아밍위를 원장으로 선출하였다.


통합에서 쇠퇴로

중국정치 형세가 더욱 좌경화 됨에 따라, 몇 개밖에 남지 않았던 신학교들도 더 이상 합병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1957년에서 1959년까지 반우익 정풍(整風)운동이 신학교들을 직접적으로 가격하였고, 중국영수학원, 중경신학원과 광주협화신학원은 폐교와 금릉협화신학원과의 합병이라는 갈림길에서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주의 학습운동을 위하여 금릉과 연경 두 곳의 협화신학원마저도 수업을 3년간 중단하였다. 1961년에 연경신학원 다시 금릉신학원에 합병되어서, 금릉협화신학원은 중국 전역에서 유일한 신학원이 되었으며, 1961년이 4월이 되어서야 수업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 종교활동을 매우 심하게 탄압을 하여 금릉협화신학원은 목회예비반만을 개강할 수 있었다.

1962년에 이르러 본과과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62년부터 「사청(四淸)」운동(정치정화, 경제정화, 조직정화, 사상정화)으로 신학교는 신입생모집을 중단하였다. 곧 이은 문화대혁명으로 최후로 남은 한 곳의 신학원마저 홍위병 사령부로 사용되기 위하여 폐쇄되었다. 이것으로 중국신학교육은 10여간의 암흑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1950년과 1960년대에 전국을 뒤덮은 정치운동은 중국교회의 모습을 철저하게 변화시켰다. 만약 중국교회가 중국의 정치운동으로 인해 탄압을 받은 재해지역이라고 말한다면, 중국의 신학교육은 재해지역 중에 재해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신학교육의 장래는 완전히 교회의 발전에 달려있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해방후의 신학원 졸업생의 수를 확인할 수가 없기에, 단지 2곳의 협화신학원을 예로 들어 보면, 연경협화신학원은 1953년부터 1961년까지의 졸업생이 목회예비반을 포함하여 약 150명이고 그중 목회예비반의 인원이 적어도 50여명에 이르렀다. 금릉신학원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모두 114명의 학생을 졸업시켰고, 그 이후 본과생의 모집이 중단했었다. 1962년 최후의 졸업생은 20여명의 본과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130명을 졸업시켰다. 다시 말하자면 남쪽과 북쪽에 있는 2개의 신학원에서 1952년부터 1966년까지 모두 합쳐 200여명의 본과생을 졸업시켰으며, 평균 매년 10여명에 해당된다. 신학교육의 퇴락은 중국교회의 시대적인 운명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적인 제약아래 중국신학교육은 1950년대부터 위축되기 시작하여 1966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전면적인 중단을 하게 되어, 이것으로 중국신학교육사상 단층(斷層)을 만들어 내었다. 1980년대 중국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회복한 후, 「단층」의 여파가 큰 재난을 당하였던 중국교회의 재건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와 신학교육이 어떠한 방법으로 스스로 중건되었지는 다시금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중국신학교의 재건

앞에서 말했듯이 중국교회가 극좌노선의 정치운동으로 탄압을 받은 재해지역이라고 한다면, 신학교육은 재해지역 중에 재해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10년 간의 문화혁명은 이미 쇠퇴의 길을 달리던 신학교육체계가 정식으로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부터 중국교회가 공개적인 집회를 회복하였는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교회의 건설과 인재양성을 위하여 신학교육체계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무원 종교사무국(현재는 국가종교사무국으로 개명함) 역시 종교계에 더 이상 계승자가 없는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각 종교조직이 종교신학교를 개설하는 것을 도와야 함을 인정하였다. 1981년 2월에 금릉협화신학원은 제일 먼저 수업을 재개하여, 문화혁명이후 첫 신학생들을 모집하였다. ]

그 후 각지에서 신학원교들이 신설되고 수업을 재개하여,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미 18여 개소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기독교협회는 1987년에「신학교육위원회」를 구성하여 신학교육에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였다.
1980년대에 중건을 시작한 신학교육체계는 전국 단위, 대구역(大區域) 단위와 성(省) 단위로 하는 3개의 등급으로 나누었고, 그 분포는 아래와 같다.

<표의 위치>

성급(省級)이하의 각급에도 여러 등급별의 사역자훈련반이 있는데, 주로 각급의 양회(兩會)에서 운영하며, 수업기간은 10일 과정에서 1년 과정으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각 현(縣)과 시(市)의 상황이 따라 수준과 규모에 차이가 났다. 그중 자금이 비교적 풍부한 현이나 시에서 개설한 사역자훈련센터들은 여러 면에서 성급(省級)의 성경학교나 신학교의 수준과 별 차이가 없었으며 사정이 더 나은 곳도 있었다.

1980년대에 계속적으로 신학교들이 재개되면서 많은 신학교들은 재정이 넉넉지 못하여 제대로 된 교사(校舍)를 갖지 못하였고, 심지어 독립된 교사(校舍)가 없어 삼자조직이나 교회내에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근래에 들어 몇 몇 신학교들은 하드웨어적 설비개선을 위해 힘쓰고 있으며, 특히 학교교사(學校校舍) 방면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 화동, 절강, 산동, 연경, 광동협화, 안휘신학원과 호남성경학원 등은 모두 교사(校舍)를 넓히는 등 신학교운영을 위한 조건들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신학교육의 소프트웨어

신학교육이 교회를 섬기는 그 목적을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 이외에도 소프트웨어 방면의 조화가 더욱級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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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稱    備考

全國級

金陵協和神學院(南京) 전국규모. 1981년 재개. 4년제 본과, 석사


大區級

東北神學院(遼寧沈陽) 黑龍江省, 吉林, 遼寧三省. 1982년 설립. 4년제 본과
四川神學院(四川成都) 雲南, 貴州, 四川三省. 1984년 설립. 4년제 본과
璜神學院(上海) 山東, 江西, 浙江, 福建 및 上海. 1985년 설립. 4년제 본과
中南神學院(湖北武漢) 河南, 湖北, 湖南, 廣東, 廣西, 海南6성. 1985년 설립. 4년제 본과
燕京神學院(北京) 北京, 天津, 河北, 北西, 內蒙古, 陜西, 甘肅, 寧夏, 靑海, 新彊 등의 수도. 1986년 설립. 4년제 본과

省級

福建神學院(福州) 1983년 설립. 2년제 전문과정
浙江神學院(杭州) 1984년 설립. 2년제 전문과정
廣東協和神學院(廣州) 1986년 설립. 처음에는 2년제 전문과정으로 시작하여 1994년에 3년제로 전환됨.
安徽神學院(合肥) 1986년 설립. 2년제 전문과정
山東神學院(濟南) 1987년 설립. 2년제 전문과정
陜西聖經學校(西安) 1988년 설립
雲南神學院(昆明) 1989년 설립. 3년제 전문과정. 1992년 중단되었다가 1998년 재개설됨
湖南聖經學校(長沙) 1990년 설립
江西聖經學校(南昌) 1992년 설립. 1년제 敎牧진수반
河南聖經學校(鄭州) 1995년 설립. 2년제 전문과정
內蒙古基督敎培訓班 (呼和浩特)
江蘇聖經專科學校(南京)1998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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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데 그중 가장 중요한 요소 교수요원이다. 1950년대 이후로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게다가 문화혁명의 탄압으로 인재양성면에서 「단층현상」이 발생하였다. 그로 인하여 1980년대 중국신학교의 재건이 진행될 당시에, 가장 먼저 당면한 어려움이 교수요원의 부족이었다. 1950년대에 신학교에서 가르쳤던 교수들도 이미 얼마 남아있지 않았기에, 신학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는 나이 많은 목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교회사역을 같이 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수의 평균 연령은 대략 6,70세 이상이었으며, 이런 그들이 신학교육의 계승자를 양성하는 힘든 일을 맡게 되었다.

국무원종교사무국은 1990년대 초에 중국의 종교신학교들의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보고서에서「종교학과의 교수요원이 매우 부족하고 그 자질도 낮다」고 문제점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기독교신학교에서도 이러한「중간단층현상」은 더욱 두드러져 연로한 교수들과 청년 교수들은 많지만 중간연배의 교수의 수가 매우 적은 현상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교수들이 점점 줄어들면서 다른 해결책을 세우지 않는 한 이 잘못된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교수요원의 계승작업을 잘 하기 위해서, 각 신학교에서는 잠재력있는 학생들을 졸업후에도 계속 학교에 남아 있도록 함으로써 단층현상을 완화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94년 현재, 1980년대 졸업생들이 전국신학교의 전문과정 교수 중에 54%를 차지하였고, 1996년에는 61%로 증가하였다. 그중 전국에서 유일하게 석사과정을 가지고 있는 남경금릉협화신학원의 졸업생들이 전국 각지의 신학교에서 교수로 종사하는 비율 역시 가장 높아 명실상부한 교수요원 양성센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으로는 졸업생들이 학교에 교수로 남는 것이 교수자원의 부족을 현시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젊은 교수들 중 상당수가 양회(심지어 당회)의 일을 겸임하고 있어 그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여전히 교수로서의 자질 향상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였다.

젊은 교수들의 자질향상의 절실한 필요를 느낀 금릉협화신학원은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우선적으로 11명의 학생들을 선발하여 영국, 미국 , 캐나다와 독일로 유학을 보내었고, 그 중 8명이 귀국하여 여러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93년부터 중국교회가 신학생들의 유학을 재개하면서 1996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19명이 미국, 영국, 캐나다, 싱가폴과 홍콩에서 유학을 하였다. 현재 전국 양회에서 파견한 유학생들은 대부분이 싱가폴에 있는 삼일신학원(三一新學院)에서 유학을 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의 수는 유학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교수들의 수에 비해 매우 적은 것은 분명하였다. 사실상 개별 신학교에 있는 몇 안되는 청년교수들이 유학의 기회를 얻게된다면, 신학교의 발전에 매우 적극적인 작용을 하리라 의심치 않지만 청년교수들이 유학기간동안 강단을 떠나면서 생기는 공백 역시 교수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신학교가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졸업생의 流失문제

국무원종교사무국의 조사에 따르면, 많은 종교신학교 학생들의 신앙이 깊지 못하여 졸업후에 종교사역을 종사하지 않고 떠나는 현상 역시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학생들이 신학교에 입학할 때, 그 신앙이나 동기가 확고하지 않아 졸업 후 다른 업종을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의 상황은 그래도 다른 종교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1996년 5월까지, 전체 신학교에서 모두 2,65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이 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중 소수가 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금릉신학원을 예로 들면, 학교가 재개된 후로 1993년까지 교회사역에(목회사역, 신학원 교육과 유학생들) 종사하는 졸업생이 모두 372명으로 전체 졸업생의 90%에 해당된다. 바꿔 말하면 대략 10%만이 유출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10%의 유실 중에는 양회조직을 떠나 자유롭게 사역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통계는 알 수가 없다.

외적인 유실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사이에 내재된 유실 또한 간과해선 안 된다. 중국 신학교 졸업생의 진로는 졸업후 학교에서 자리를 알아봐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출신지역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말하자면 졸업후, 졸업생이 어디서 왔든지 그 출신지역으로 돌아가서 해당 지역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사이에 불균형을 유발하였다. 현재 중국교회의 모습을 도시교회의「당기는 힘」과 농촌의 「미는 힘」으로 구별할 수 있다. 졸업생의 대다수가 농촌출신이며, 극히 적은 수가 도시출신의 학생이다. 그러나 도시교회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도시교회의 사역자들에 대한 수요가 매우 절실해졌지만 공급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많은 도시교회들은 졸업생들을 모시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촌교회의 경제조건은 매우 어려워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많은 졸업생들은 농촌교회에 돌아온 후 아주 적은 사례비만을 받거나 심지어는 사례비도 받지 못한 채 자비량으로 사역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차가 심한 사회적 구조아래, 도시교회는 농촌출신의 졸업생에게 있어 큰 흡수력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교회는 사례비와 대우에서뿐만 아니라 복지 등 모든 면에서 농촌교회를 훨씬 앞서게 되었고, 심지어 호구(戶口)마저도 농촌에서 도시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빈곤한 농촌출신의 신학생에게 있어서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 되었다. 사실상 현재 모든 신학교들은 성(省)의 수도나 도시에 있으며, 농촌신학생들이 화려한 도시생활을 몇 년을 하다보면 나중에는 농촌교회와 도시교회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실제로는 농촌교회은 사역자가 가장 필요한 지역이자 사역자들이 머물기에 가장 어려움 지역이 되어버렸다.


신학교육과 사회주의의 적응문제

사회주의 체제하에 중국신학교육의 발전 역시 거시적인 환경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국무원종교국이 1981년에 반포된 지시를 보면, 신학원의 종교과목는 전체의 70%를 차지하며 문화과목이 20% 그리고 정치과목은 10%에 해당된다. 10%의 정치사상의 교육목적은 새로운 교육자를 배양하여 정치적으로 당의 지도력을 옹호하며 사회주의 노선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생들은 정치과목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국무원종교국은 1992년의 조사에서 종교신학원교들은 정도는 다르지만 종교사상의 정치적 교육을 소홀히 한다고 지적하였다. 신앙이 신실한 많은 교수와 학생들의 종교과목을 중요시여기고 정치과목은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그들은 정치교육이 그들의 신앙심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는바와 같이 중국 기독교인의 절대다수가 농촌에 있으며 그 기층조직에는 사역자가 매우 부족하다. 각지의 교회와 신학생들에게는 성경, 신학 그리고 목회에 지식에 매우 갈급해하고 있으며, 이것을 해결함으로써 기층교회의 필요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교육중의 받게 되는 정치교육에 가지는 거부감은 이해가 될 것이다. 최근 필자가 중국 내에서 들은 소식에 따르면, 중국정부는 정치과목의 비율을 30%으로 높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실행된다면 더 많은 기층교회들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이다. 어떻게 양자간의 균형을 이룰 것인지의 여부가 중국신학교육의 발전에 영향을 끼치리라 본다.

정치과목과 종교과목의 줄다리기 외에도 사회주의에 적합한 신학사상의 건설작업에 대한 제창 역시 쉽게 넘겨보아서는 안될 과제이다. 중국교회는 보편적으로 보수적인 근본주의파의 전통적 영향을 받았고, 성도와 신학생들은 대다수가 신학연구를 경시하는 태도를 가졌으며, 그 결과 중국교회의 신학기초가 비정상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최근 중국교회는 이런 보수적 경향에 대하여 신학사상의 건설을 제창하고 있다. 신학사상의 건설이 기층교회 건설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은 신학사상의 건설과 기층교회 사이의 갈등을 줄일 수 것은 21세기 중국신학교육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신학교육 위원회 주석인 쑤더쯔(蘇德慈)목사는 일찌기, 1980년대 이후 15년간은 중국신학교육의 재건의 제1단계이었으며 그 특징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환경 속에서 인재양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지금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이고, 제2단계에 진입하기 위하여 이제까지의 환경을 개선시키고 정돈하고 점진적 규범화할 필요가 있다고 있다고 하였다.  21세기 중국교회의 발전과 신학교육의 발전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관건은 중국신학교육이 얼마나 교회의 필요에 잘 부응하며 동시에 기독교를 향한 사회의 변화하는 요구에 성도들을 얼마나 잘 무장시키는가에 있다고 말하였다.

번역 - 최주영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