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명 전에 기독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2007.05.15 12:23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중선     번호 : 45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6/30 (일) PM 11:13:37     조회 : 92  

■ 8, 문혁 전에 중국은 어떻게 크리스찬을 대했는가?


문혁 전의 17년(1949-1966) 동안 중국은 [삼자운동]의 추진을 통하여 밖으로부터 중국교회와 서방교회의 연계를 단절시켰으며 안으로 전국교회를 통제하여 국가 책략의 도구로 사용코자 하였다.


서방과의 연계를 단절함(1949-1954)

모택동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보았음으로 [삼자운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 내의 제국주의 분자를 숙청했다.
많은 전도인 혹은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외국 선교사와 왕래하는 자는 모두 체포되었다.
서양 선교사는 갖가지 압력 하에 잇따라 중국을 떠났다.


교회의 대연합(1954- 1958)

[삼자]를 통하여 설립되었던 전국교회 교회간행물, 신학원 등의 통치권은 모두 [삼자]에 귀속되었고 목회자들도 서명하고 [삼자]에 가입해야만 했다.


1954년 7월 삼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완고한 반대파] 왕명도를 체포하였다. 한편 삼자회는 또한 교회를 유도하여 [숙반(肅反)=반동숙청][대명대방운동=정치나 사회를 보는 관점을 마음대로 발표하게 하여 후에 숙청 함] [반우(反右)=우파분자] 등, 정치 운동에 참여케 했으니, 계속적으로 많은 신도들이 연약해 졌고 넘어지게 되었다.

1955년 10월 정부는 삼자 이외의 어떤 기독교 활동도 불법이라고 선포했으며 전국의 교회를 대대적으로 합병하여 교회 숫자는 크게 감소되었다.
에를 들면 상해에서는 약 200개의 교회가 15개로 합병되었고, 북경에서는 64개의 교회가 4개로 합병되었다.


교역자 개조운동(1958년- 1966)

반우(反右)로부터 1958년 [대약진] 초기에 모든 교역자는 집중적으로 [학습] 및 생산활동에 강제 참가하게 되었고 평신도는 모두 밤낮 없이 [대련동철(大煉銅鐵)](1958년-1961년 동안 영국의 발전상을 따르자는 취지 하에 각 직장마다 용광로를 만들어 쇠를 제련해낸 운동)에 동원되었음으로 교회집회는 정지되었다.

당시의 통치자가 가장 관심을 둔 것이 경제적인 부흥이었음으로 종교정책은 비교적 피동적으로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이 시기의 일은 주로 목회자들에게 [교육]과 [개조]를 진행시켰다.

각 지방의 삼자회는 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교육을 시키고 목회자들에게 신속히 자아 개조할 것과 적극적으로 노동 관련과 노동 생산에 종사하며 [자유전도], [가정협회]등 반동활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밖에 계속하여 [반혁명 분자와 파리 분자] 들에게 투쟁을 전개시켜 상해시의 인민법원에서 공품매 등 14명에게 각각 유기형과 무기형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