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 운동의 기원과 발전은

2007.05.15 12:26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중선     번호 : 49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6/30 (일) PM 11:20:22     조회 : 108  

■ 2, [삼자운동]의 기원과 발전은?

오요종이 총리를 만나, [선언] 초안을 작성함.


1949년 9월 오요종은 기독교의 다섯 번째 안에 드는 사람으로 제 1차 중국 정협회의에 참석했다.

10월 정협(政協)종교대표, 중화기독교협진회. 중화기독교전국총회, 청년회와 여 청년회 등의 인사들로 구성된 기독교 방문단이 전국의 각 교회에 정협의 의결사항, 인민정부와 공산당 정책을 전달하고 교회의 혁신과 자립, 자양을 건의했다.

다음 해 5월 방문단은 태원(太原)을 방문키로 한 계획을 미루고, 주은래 총리를 만나 13명의 기독교 인사와 5월 2, 6, 13일에서 21일 까지 3차 회의를 열고,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망에 대해 의논했다.

회의 중 [선언]을 초안 작성했는데 [중국 기독교의 신중국 건설에 있어서 노력해야 할 과정]이다. 이것을 북경, 상해, 천진 등지의 교회에 나누어주어 수정시켜 다시 주은래에게 상정하는 등 8차에 걸친 수정을 통하여 주은래 총리가 7월 6일 결안을 작성하여 각 교회에 배부  했다.

그리고 다시는 결안 된 문서를 고치지 못하게 하면서 7월 28일 교회 인사 40명으로 정식 성명을 발표하게 한 후 전국적으로 [선언(宣言)] 운동을 펼쳤다.



삼자회의 정식 성립

1951년 4월 16일부터 21일 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1명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은 정무원(지금의 국무원) 종교 사무처에서 개최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기독교 단체 회의의 처리를 위한 회의]에 참가 한 후 [연합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기독교 반미 원조 삼자 혁신 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조성했다.

즉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을 시작했고, 또한 당시 중국 대표적 기독교 간행물인 [천풍]은 일련의 [반동]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규탄문을 발표했으며, 각지에서 규탄대회와 기독교 정치 학습반을 열었다.

1954년 7월 28일 244명의 교회 대표자들은 북경에서 열린 제 1차 [중국 기독교 전국회의]에 출석하여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를 만들고 계속적으로 반제국 애국운동, 교회의 혁신과 개조를 강조하면서 자유 전도인들의 반공, 반사회주의를 고발했고, 교회내의 사상 개조를 강화했다.



문혁 후의 발전

1964년 [천풍]은 정간(停刊)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홍위병들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고 문을 닫게 되면서 삼자회의 일도 정지 됐다.

1977년에 국무원 내의 종교사무국이 각 방면의 일을 회복, 진행하면서 삼자회도 회복되었다.
1979년 영파(寧波)의 예배당이 제일 먼저 문을 열게 되었으며 전국 각지의 삼자회도 분분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 2월, 16개 성(省)에서 온 37명의 인사들은 상해에서 거행한 삼자회 상무 위원회 확대회의에 출석했다. 회의에서는 삼자 정책 노선을 인정하고 교회를 중개(重開)할 것을 결의하고, 성경과 찬송을 다시 인쇄하며 [천풍]을 복간시키고, 신학원을 복과(復課)시키며, 전국에 교무기구를 만들고, 동시에 [전국주안의 형제 자매에게 고함] 이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10월 중국 기독교 제 3차 전국회의가 남경 금릉 협화신학원이 증설되었다.
그 안에 제자 훈련반, 신학연수과정반을 열고 방문단을 조직하였다.

대외적인 활동과 대내적인 활동을 벌였고, [애국공약]을 만들어 당과 인민의 정부 지침을 옹호하고 중앙 종교정책을 준수하는 [애국애교(愛國愛敎)]의 삼자 노선을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