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의 [중국 기독교 전국회의]의 성과는?

2007.05.1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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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51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6/30 (일) PM 11:24:37     조회 : 93  

■ 4, 역대의 [중국 기독교 전국회의]의 성과는 어떠했는가?

제 1차 회의는

중국 정부가 헌장을 통과시킨 후 1954년 북경에서 열렸다.
회의 중 오요방은 4년 간의 [혁신운동]을 종결짓고 이후의 방침은 애국애교로 삼자공작을 뒷받침해야한다고 지시했다.

[삼자혁신운동]은 [삼자애국운동]이라고도 하는데 정식 지도기구인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로 결성되었다.

이외에 4가지 결의안은
1) [애국애교]의 원칙 위에 교회의 통일을 촉진시킨다.
2) 중화인민공화국 장정(章程)을 지지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3) 미제국주의를 반대한다.
4) 전국의 신자들이 애국을 배우도록 격려하고 제국주의의 남은 흔적을 제거한다.

이번 회의의 결속으로 삼자회는 삼자에 불참한 [강경파]교회의 지도자에 대해 비난을 시작하면서 왕명도 등을 반혁명 집단 두목으로 간주하여 각각 징역에 처했다.

다른 교회들도 대부분 정부의 정책에 복종하여 조직상 통일을 이루었다.


제 2차 회의는

류소기가 집정한 1960년 상해에서 열렸다.
삼자회 부주석 오태방의 공작보고에 참가한 319 대표 중 145명을 선출해 삼자회에 가입시켰다. 삼자의 장정(章程)은 당시 정치 노선에 맞추어 수정되었으며 삼자회는 반제국주의의 [애국조직] 이라는 것을 명확히 표명했다. 삼자회의 목적은 기도교인들을 연합하여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제 3차 회의는

1980년 남경에서 열렸고 중국교회에 서광을 비추었다.
회의 중 [중국 기독교협회]를 만들어 전국적인 교무기구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그밖에 회의 중 가정교회의 견해에 대해 새로운 충돌이 있었다.
즉 [교회 안이나 혹 가정 안에서나] 모두 한 마음으로 예수를 신망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동일한 마음을 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있어서의 변화는 아주 분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 4차 회의는

1986년 북경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삼자]와 [기협] 양회(兩會)의 장점을 수정하고 새 직원을 선출한 외에도 장래 사역의 발전에 대해 토론했다.

다음 해 성도(省都)에서 거행한 양회위원회(兩會委員會)에서 미래의 삼자 공작을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1) 농촌 교회의 관리와 해외와의 관계 절단
2) 교회의 자치를 추진하고 교회 규칙과 제도를 정립한다는 내용도 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