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의 기원과 구성원

2007.05.1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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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20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2/23 (토) AM 11:16:24  (수정 2002/05/18 (토) PM 10:07:02)    조회 : 69  

■ 가정 교회의 기원과 구성원
                                                                                      인보라

가정 교회의 뿌리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의 토착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 가정 교회와 토착화 운동은 서로 연관지어지는 관계에 있었다. 가정 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는 조금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토착화된 교회, 즉 소군(小群)교회, 진야소(眞耶蘇)교회, 야소가정 등의 형태로 단체끼리 가정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오늘날의 가정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취회소(聚會所)에 속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중국에 가정 교회가 출현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병길은 가정 교회의 기원을 삼자운동 시기로 보고 있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지나친 정치적 간섭과 영향 속에서 삼자의 신학 관점에 반대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가정예배를 시작한 것이 가정교회의 기원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 11월 상해에서 개최된 제 2차 중국기독교전국회의 종료 후 회장인 오요종이 “지금까지의 삼자 운동을 통해 교회내의 반혁명 세력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들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데서도 보이지 않는 기독교의 활동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L. T. Lyall은 문혁의 박해로 인해 제도화된 교회가 문을 닫게 되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로 잠입해 들어감으로 해서 발생된 것이 가정 교회의 기원이라고 본다.


가정 교회는 문화혁명 이후 교회가 문을 닫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본래의 교회가 삼자 교회로 되면서 교회의 기능이 왜곡되자 신자들이 지하로 모이게 되었다.


조천은도 “문화혁명 이후 4인방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은 기구적인 종교 차원에서는 종교없는 사회가 되었지만, 이 기간 동안 교회당 없는 기독교는 적극적인 지방 크리스챤 공동체로 나타났다.”고 하여 가정 교회가 문혁 이후에 출현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지하로 잠입해 들어갔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적 상황에 맞는 토착화된 가정 교회가 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정 교회는 중국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가정교회운동에서
기원하였으며 삼자운동기의 반대 세력들의 모임에서 등장하게 되었고 문혁기의 탄압을 통해 제도 교회가 사라져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현재의 가정 교회는 문혁기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가정 교회에 참여하는 성원들은 대체로 중국의 관리와 당원 같이 합법적으로 종교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과 1950년대 삼자 교회에 참여했다가 박해를 받은 사람들, 종교인이라는 이름이 붙게되면 지위를 박탈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비밀히 신앙을 유지하려는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가정 교회의 성원과 1960년대의 성원은 다르다. 문혁 이후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가정 교회에 새로 가입했다. 즉 1966년 이전에 삼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던 목사와 신자들, 그리고 삼자활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신자들이다. 여기에 문혁 이전에 가정 교회에 다니던 신자들까지 포함하면 세 종류의 성원이 된다.